출근길 버스, 업무 시작 전, 퇴근 시간 후에 책을 읽으려면 일단 책이 흡입력이 있어야 한다. 끝까지 읽지 못하는 내 인내력 부족을 탓하지 않을 만큼 재밌는 책이, 사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들었다 놨다 하는 책이 얼마나 많은가. 게다가 도서실에서 근무하니 이 몹쓸 행태가 점점 도를 더해간다고나 할까. 내 돈을 주고 산 책도 가차없이 팽개치는데 도서실에 있는 책쯤이야. 고마움을 모르고 살고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그런데 이 책. 끝까지 잘 읽힌다. 진중권이 여러 예술가들과 나눈 대담집으로 여러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어서 좋다. 다만 진중권이 주도하다보니 때로 진중권이 주인공처럼 보일 때가 있어 좀 거슬리긴 하지만, 공부를 많이 한 걸 감추기도 쉽지 않을 터.
인상적인 말들을 베껴본다.
공공미술의 열두가지 원칙 1. 공공미술처럼 보일 필요 없다. 2. 작품은 영원하지 않다. 3. 계획되지 않은 것을 위한 공간을 새롭게 만들어라. 4. 공동체를 위해 공공예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라. 5. 문화적 군비경쟁에서 물러나라. 6. 화려한 불꽃놀이보다 더 나아가라. 7. 장식하지 말고 사람들을 놀라게 하라. 8. 소유권은 자유롭게, 저작권은 슬기롭게 공유하라. 9. 외부인을 환영하라. 10. 작품을 정의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11. 당신의 불신을 접어두어라. 12. 길을 잃어라.
진중권: 참 재밌는 게, 한국의 이른바 모더니즘이 서구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르단 말이죠. 서구의 모더니즘은 `예술을 위한 예술`의 관념을 깨뜨리면서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매우 진보적이며 급진적인 성격을 띠었는데, 한국에서는 모더니즘이라고 하면 정치와 무관한 형식주의, 즉 예술을 위한 예술을 떠올리게 되죠. 우리가 비판했던 것은 바로 이런 유형의 모더니즘이었지요.
박찬경: 현대 과학기술의 반대편에 종교가 있다면, 종교의 반대편에는 미신이 있다. 나는 현대 과학기술도 싫고 제도종교도 싫다. 그렇다고 `미신`을 따를 수도 없다. 유물론자의 차가운 머리도 내 몫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현대 과학기술의 위험을 경고할 때의 종교는 좋다. 종교의 무의식을 건드리는 미신은 좋다. 미신을 거부할 때의 합리적 사고는 좋다.
문성근: 모스끄바에 관광을 가서 연극을 봤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인 열여덟살 소녀의 역을 예순 먹은 할머니가 연기하는 거예요. 예순이 다 된 할머니가 열여덟살 소녀를 연기한다니 황당하죠. 사연인즉, 그분이 그 역을 스무살부터 40년째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관광상품이 된 거죠. 그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다 싶었어요.
예술은 가시적인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 파울 클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