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발견. 바쁜 와중에 그나마 눈에 들어온 책이다. 일기체의 단상을 엮은 책으로, 예전 같았으면 반갑게 읽었을텐데 요즘엔 이런 류의 책들이 별로 달갑지 않다. 굳이 다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볼 만큼 심심하지도 않고 읽다보면 뭔가 멋적어지곤 하기 때문이다. 나이 먹는다는 게 이런 걸까? 무관심, 무감동, 무책임...'無'자가 늘어난다는 것. 이러다가 완전  '무'의 세계로 돌아가는 게 죽음이겠지.

 

그러나  이 책의 서문을 몇 줄 읽으면 도저히 이 책을 안 읽을 수가 없다. 길지만 그대로 옮긴다. 사실 이 책은 이 부분만 읽어도 된다. (무례한 독자...인정!)

 

 

"네가 스무 살이라는 게 꿈 같구나. 3킬로그램 몸무게로 네가 세상에 나올 때 나는 재직 중이던 여중학교에서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하며 <청산별곡>을 강의하고 있었어. 가난하던 시절이었지. 출근할 때마다 5백 원씩 네 엄마한테 하루 일당을 받곤 했던. 5백 원이면 담배 한 갑, 구내식당 점심값, 그리고 버스비를 제외하면 꼭 10원이 남는 돈이었구나. 네 엄마는 주면서 미안해 딴 데 보고 나는 받으면서 미안해 딴 데 보는 금쪽같은 5백 원. 하지만 엄마 배 속에 네 생명의 심지가 박혔을 때 나는 이미 하나, 하나라고 네 이름을 지어놓았어. 5백 원을 지갑에 넣어 안주머니에 간직하고 투명한 아침 햇빛 속으로 걸어 나올 때, 불광동 언덕배기, 너는 아마 기억조차 못할 그 작은 옛집을 걸어 나올 때, 매양 눈물이 날 것 같아지면서, 때가 오면 너와 함께, 청산에 살어리랏다, 어디로 어떻게 흐르든, 청산 하나 품고 살리라 꿈꾸었어, 아빠는. 가난했지만 비참하지도 황야를 품고 살지도 않았다. 저 아래, 내 가슴 깊은 곳, 맑은 우물이 넘치고, 햇빛도 만지고 바람도 만지면서. 그럼, 그렇고 말고, 청산 하나 드높이 세워 기대고 살았지. 나는 구내식당에서 백반 대신 라면을 먹었어. 네가 엄마의 자궁을 조금씩 채워갈 때 내 안주머니엔 백반 값 대신 라면 값의 차액이 역시 조금씩 조금씩 채워져 갔고. '예쁜 공주님을 얻으셨어요'. 전화통에 울리던 산호사의 목소리가 상기도 생생하다. 나는 안주머니에 차곡이 쌓인 백반 값 라면 값의 차액을 통틀어서, 세상의 모든 햇빛 같은, 장미꽃바구니를 샀다. 물 아래 옥돌, 순결하고 순결한 네게 바치려고. 너는 단번에 장미꽃바구니의 아름다움을 알아보았어. 악을 쓰고 울던 네가 장미꽃바구니를 신생아실 유리창에 들이 댔더니, 뚝 움을 그쳤거든. 너는 채어날 때부터 아름다운 것을 알아보았던 거야. 그리고 지금 넌 바람 속 스무 살."

 

재수학원에 다니는 우리 딸아이도 스무 살. "폭풍우로 벚꽃이 다 떨어졌으면 좋겠어."라는 딸. 장미꽃바구니를 지금이라도 줘야 할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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