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먹는 게 좋은 점이 있다면, 예전에 도외시하던 옛 영화들이 새롭게 눈에 들어온다는 점이다. 그저 고리타분하게만 여겨졌던 영화들이 비로소 의미있고 재미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한가하고 늘어진 상태에서 영화에 빠져본 기억이 별로 없다. 직장에서 먹는 점심식사는 해치워야 할 하나의 일과이며 집에서 먹는 저녁밥 역시 허기를 때우기 위한 먹는 노동에 불과하다. 늘 직장생활이 버겁고 집안 일은 대충이다보니, 몸은 어느새 하나씩 망가지기 시작했고 .....이런 우울한 생각에 빠져 있는데, 때마침 모처럼 내 손에 들어온 리모콘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자 이 옛 영화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갓 태어났을 무렵 만들어진 영화였고 이미 여러번 보다말다 하다가 끝까지 본 적이 없는 영화라서 지레 겁이 나긴 했지만, 첫 화면부터 눈을 끌리 시작하는데.....과연 명불허전이다.
멋진 영화에 붙이는 온갖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영화였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를 완전하게 이해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문득 문득 과도하게 클로즈업된 로렌스의 표정이 압권이긴 한데, 말이 아닌 표정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제대로 와 닿지 않았다.
T.E. 로렌스를 알게 된 것은 이 책을 통해서였다. 벌써 30년 전의 일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아웃사이더>는 같은 범우사에서 나왔지만 1983년에 발간된 책으로, 당시 가격으로 3,000원을 주고 샀다. 추억이 어린 책이다. 세로 조판에 무자비한 번역이 일품이라고나 할까. 분명 내가 읽은 책인데 꼭 우리 아버지가 보던 책 같은 기분이 든다. 낯설다. 이런 조악한 번역을 감명있게 읽었었다니 ...도대체 어떤 부분에 빠져들었지?
30년 전에 발간된 <아웃사이더>를 통해 로렌스를 이해하고 싶었다.
105쪽 ....<벗들이 본 로렌스> 속에서....' 이 책(,<지혜의 일곱 기둥>로렌스 저)을 읽고나니 가슴이 아프다. 이 책을 쓴 사람은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가장 위대한 사람이지만, 그는 대단히 틀려 있다. 자기가 자기 스스로는 아닌 것이다(He is not himself.) 이 사람은 <나>를 발견했지만, 그것은 진실된 <나>는 아닌 것이다. 내가 어떻게 될까 나는 마음쓰지 않는다. 이 사람은 행동 속에서 살고 있지는 않다. 교류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이 사람은 생명이 흘러가는 파이프(관)에 지나지 않는다. 대단히 훌륭한 파이프임에는 틀림없겠으나, 진실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무엇으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감상은 로렌스의 근본을 꿰뚫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웃사이더의 일반적 성격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사람은 행동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다.
영화 속의 로렌스는 행동하는 군인이고, 그 행동을 통해 로렌스의 선지자 같은 면모를 웅대하고 드라마틱하게 재현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라니.
로렌스가 자기를 군인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가 파도를 일으켰던 것은 어떤 사상의 예언자로써이며, 그의 힘은 어떤 사상에 심취해 있는 인간의 힘이며, 자신의 감정을 타인에게 전달해 줄 수 있는 힘인 것이다. ...로렌스가 가끔 비참과 실망상태에 빠졌던 것은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즉 자기가 설교하고 있는 사상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의 반생을 보느라면, 회로에 생긴 아주 조그마한 고장 때문에 못쓰게 되어버린 거대한 기계를 생각나게 한다.
전쟁에 의하여 그는 새로운 시야를 얻었다. 더 현명해지기는 했지만 조금도 행복하게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로렌스는 인간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아웃사이더로서는 아직 태아의 단계에 있는 그는 자기의 감정의 배후에 있는 추진력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자기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 때문에 그의 주된 관심은 사고에 쏠리고, 행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 알쏭달쏭한 말들...영화는 분명 로렌스의 영웅적인 행위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행동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니'라니.. 과도하게 클로즈업된 로렌스의 표정의 의미를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바로 He is not himself. 그는 그 자신이 아니었다.
이 심오한 인물을 연기한 피터 오툴이 얼마 전에 타계했다. BBC에서는 피터 오툴의 타계를 2013년의 10대 뉴스의 하나로 선정했는데, 절대적으로 동감하게 된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변호인>에서의 송강호가 노무현보다 더 '변호사스럽다'고 하는데 피터 오툴이 로렌스보다 더 로렌스답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옛 영화에 옛 책. 밤이 깊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