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서랍 - 이정록 산문집
이정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남편에게 말한다.

"나더러, 다른 일 하지말고 넌 평생 책이나 읽고 있어라. 라고 하면 좋겠어."

"밥은 해줘야지."

"물론 밥은 해줄게."

 

이정록 시인의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책만 읽고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리 두껍지 않은 이 산문집을 완독하는데도 일주일이나 걸리는 빠듯한 생활에서 책만 읽고 산다는 생각은 실현 가능치 않은 야무진 꿈에 불과하리라.

 

어제는 유독 숨가뿐 날이어서 더욱 이런 꿈을 꾸는지도 모른다. 1~5교시 연속으로 수업을 하고, 6교시- 동료교사의 수업연구 참관, 7교시- 수업연구에 이은 컨설팅 장학을 겸한 교과협의회, 이어진 교직원 연수는 퇴근 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끝이 났고, 다시 이어진 회식자리. 사이사이에 유예학생 처리하라는 요구가 밀려들고 교과협의회 회의록 작성해달라는 부탁조의 지시가 떨어지고, 학급종례마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야 했다. 입에서는 단내가 났다.

 

일주일 전 일요일. 생태공원에 가서 작은 숲에 둘러싸인 정자에 두 다리 뻗고 앉아 이 책을 읽었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고 바람결에 실려온 해당화, 찔레꽃 내음. 한창 물오르기 시작하는 수십만 평에 이르는 갈대밭의 푸른 빛깔. 책을 읽기에는 완벽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이런 공간에 어울리는 완벽한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시인의 능청스럽고도 구수한 이야기를 읽다가 키드키득 웃음이 흘러나오면 그대로 입 밖으로 방출해버리고, 혼자 웃기 아까우면 옆에 있는 남편에게 방금 읽은 페이지를 손을 짚어가며 넘겨주었다.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행복한 책읽기는 현실의 삶을 더욱 고달프고 무의미하게 혹은 답답하게 만들기도 한다. 거꾸로 일상이 따분하고 고달퍼서 책을 읽는 한순간이 그리 달콤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책 읽는 순간순간을 행복하게 하는 이 책 덕분에 나의 평상심이 흐트러지고 일상의 삶이 고달프게 다가오는 역설적인 현상을 오갔다.

 

이 책을 다 읽기도 전에 이 시인이 너무나 좋아져서 그의 시집 <의자>를 서둘러 구입했다. 읽을수록 사랑스런운 시 <의자>를 베껴본다.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에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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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2012-06-04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이고 저랑 같은 분필과 칠판지우개전공이시군요. 재밌게 읽어주셨다니 마음이 우쭐해지네요. 공부가 짧아서 깊이도 없는 글인데, 제 추억의 언저리까지 동행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게다가 '의자'란 시까지. <의자>시집에서 제가 지금도 촉촉하게 읽는 시는 "머리맡에 대하여"랍니다. 점심 맛나게 드세요. 상추드실 때 아기달팽이 조심하시고요.

nama 2012-06-05 07:31   좋아요 0 | URL
직접 댓글을 남겨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마침 이 책을 한 번 더 읽고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답니다. 좋은 글 덕분에 울멍울멍 눈물겹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