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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는 베르사체를 입고 도시에서는 아르마니를 입는다 - 패션 컨설턴트가 30년 동안 들여다본 이탈리아의 속살
장명숙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유행과는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아가는 내가 이 책을 읽게 될 줄이야.
이탈리아를 가볼까나 구상중이어서 이 책을 집어들게 되었다. 이미 93년과 96년에 이탈리아의 유명한 몇 도시를 다녀오긴 했지만, 그당시 여행이란게 그렇듯 지나고 보니 수박 겉핥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 중 한겨울에 갔었던 밀라노는 여타의 도시보다도 볼거리가 없었고 스산한 겨울 추위만 뼈저리게 실감하고 왔던 기억이 난다. 호텔에서는 뜨거운 물 한 잔 얻어 마시기가 얼마나 힘들던지 눈물이 날 정도였었다. 몸은 천근만근이었고 여행 자체가 고행이었다. 한 달간의 여행을 끝내고 와서야 임신 사실을 확인했으니, 입덧을 치르며 하던 이탈이라 여행이었다.
이 책을 읽자니 그 고생스런 이탈리아 여행이 새록새록 생각이 났다. 그리고 부러웠다. 다른 세계를 살짝 들여다보는 여행이 아닌 그곳에서의 삶이 몹시 부러웠다. 그 어려움과 고달픔이야 한낱 여행에 비할 바가 아니겠지만 한 세계를 샅샅이 경험하고 자신의 삶을 개척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두고두고 부러운 일이다. 저자를 이탈리아로 이끈 칸초네 한 곡, 그 운명같은 만남이 왜 내겐 없었을까,하는 쓰잘데 없는 아쉬움 한 자락이 남는다. 내가 성장한 미군 부대 옆동네는 온통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들로 그득했다. 미국 문화는 지향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지양해야할 기피 대상이었다.
이 책은 참 적절한 내용에, 그에 어울리는 적절한 글에, 또 적절하게 읽을 만하다. 이런 종류의 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시나 자랑 같은 것도 없다. 내용은 빈약하고 포장만 요란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건 기우였다. 한 번도 뵌 적이 없지만 저자의 품위가 느껴졌다.
(232)...더구나 패션은 예술이 아니다. 인간이 신체 위에 걸치는 기술일 뿐이다. 멋있고 아름다울수록 빛을 발하는 기술이다.
패션 컨설턴트라는 저자의 중후만 멋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요란한 예술 아니 요술처럼 보이는 패션에 대한 이 짤막한 정의에, 저자에 대한 신뢰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 첵은 (제목에서 느껴지는) 단순히 패션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이탈리아 전반에 관한 책이라고 해야겠다. 여행으로서는 절대로 파악할 수 없는, 그 세계에서 살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살아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행의 한계를 분명하게 지적해주는 책이기도 하다. 삶의 속속들이를 여행을 통해서는 절대로 알 수 없음을 자각하게 해준다.
별 것 있는 여행을 위해서 읽었건만 결과적으로 별 것 없는 여행의 한계를 분명하게 깨닫게 해준다. 이래저래 아프다. 저자의 다양한 삶이 부러워 아프고 맛만 보고 그칠 내 여행의 얄팍함에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