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 존재의 안부를 묻는 일곱 가지 방법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내가 절대 못먹는 음식이 몇 가지 있는데 산낙지와 개고기가 그렇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낙지를 입에 넣어 먹는다는 행위는 도저히 모방조차 못한다. 꿈틀거림 때문에 속이 뒤집힐 정도로 아찔해져오는 것이다. 개고기는, 어릴 때부터 늘 개와 함께 살면서 눈도 맞추고 머리도 쓰다듬어 주었던 기억 때문에 감히 먹을 생각조차 못한다.

그런 내게 며칠 전 20년 가까이 된 동료가 낙지 5마리를 주었다. 그 동료가 손수 적어준 요리법대로 고무 장갑을 끼고 소금으로 낙지를 박박 문지르자니 참 난감한 기분마저 들었다. 손 끝은 아니지만 마음이 살짝 떨리기까지 했다. 미안하다, 낙지야. 

그렇게 난생 처음 낙지 볶음을 해보았다. 모처럼 풀밭에서 벗어난 밥상을 준비하며 식구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데 이날따라 모두들 바쁜 모양이다. 이래저래 먹을 복이 없는 식구들이다. 심심하고 허전한 마음에 마지막 하나 남은 캔맥주를 따서 저녁 삼아 먹는다. 물론 안주는 낙지 볶음이다. 허나 캔맥주 하나에 취기가 오르랴. 그래도 빈 속에 먹어서인지 알딸딸해진 기분에 방금 배송된 박범신의 <산다는 것은>을 집어든다. 

'꽃에 취해 못 마시는 술 한 병을 그만 다 비우고 만다.' 는 구절이 눈에 들어오자 취기가 확 오르기 시작한다. 책에 취하는 순간이다. '떠나지도 못하고 참되게 머물지도 못하는 반신불수의 어정쩡한 연대에 기어코 봄이 지나가는 걸 올해도 어김없이 견뎌내고 있는 참이다. 눈물이 핑 도는데 초인종이 울리고...마누라가 들어온다.' 나도 덩달아 눈물이 핑 돌아서 괜히 훌쩍거리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리고 남편이 들어온다. 다시 현실이다. 

인상 깊은 구절이 있는 페이지에 갈피갈피 꽂아놓은 연두색 포스트잇이 마치 물이 오르기 시작한 나뭇잎 같다. 조금씩 아껴가며 읽었는데도 금방 다 읽어버렸다. 아쉬워 몇 구절 인용해본다. 

(176) 어떤 이는 평생을 살면서 한 번도 제 몫의 꽃을 피워보지 못했다고 느낀다. 그런 사람에게 시간은 더 가혹하다. 나이 들수록 분노가 쌓이거나 정한은 늘어 욕망과 집착의 덫에 빠지기 쉽다. 

칠순이 지나고 팔순이 되어도 점점 더 어리석어지고 고집만 부리게되는, 자식들의 걱정거리가 되어가는 노인들이 떠올랐다. 그들의 억울함을 자식들인들 어쩌랴. 

(189) 외부로 열린 문을 닫으면 내면의 뜰이 넓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딸아이의 성적이 떨어진 원인을 찾아보았다. 결단을 내렸다. 휴대폰의 부가서비스인 인터넷 접속을 차단시켜버리고, 제 방에 있는 카세트 라디오를 빼앗아 버렸다. 시험기간 내내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공부를 하는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불어 텔레비전 시청 금지까지. '내면의 뜰'이 넓어지고 깊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였다.  

(192)..얼마나 수없이 많은 순간 가족으로부터, 인간에 대한 나의 연민으로부터 '이불 속에서 빠져나가듯이 표 안 나게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하고 바랐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193)애들이 품을 떠난 후부터 밖에서 저녁때가 되면 본능처럼 집에 혼자 있을 아내를 생각한다. 내가 들어오지 않고 혼자 있으면 '밥'을 잘 먹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게 최종적으로 남겨진 감옥이다. 사랑이라고 말하지 말라. 고백하노니, 명백히 그건 틀렸다. 

겉은 범생이 였지만 끊임없이 일탈을 꿈꾸던 내 모습이 겹쳐졌다. 온통 감옥 투성이였다. 특히 가족이, 학교가 그랬다. 그 모순 투성이의 학교. 이젠 선생의 자격으로 감옥을, 모순을 재생산하고 있다.  

 (242) 나이 들어가며 제일 어려운 것은 사랑의 축적보다 미움의 부피를 줄이는 일이다...그것의 부피가 아주 커지면 미워하는 대상보다 자신이 먼저 망가질 것이므로.

 이 작가는, 미움의 부피를 줄여가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글을 쓰는 일이라고 한다. 나도 곰곰 생각해볼 일이다.

이 책의 많은 글들을 이미 한겨레신문의 박범신 칼럼에서 읽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점점 더 그의 글이 좋아진다. 박범신은, 결코 늙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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