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전체공개했다가 비공개로 돌렸는데, 다시 전체공개를 한다. 마음 바뀌면 다시 비공개로 돌릴지 모른다. 사적인 얘기여서 조심스러운데 낙태죄에 대해 한마디쯤 하고 싶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더니 내게는 직장, 결혼이야말로 일말의 공짜도 허용되지 않는 견고한 철옹성 같은 벽이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나도 소위 '보통 사람들'의 세계에 진입해서 늦은 나이에 출산도 했다. 서른 초반의 직장, 서른 중반의 결혼. 요즘은 이런 게 대세라서 별로 얘깃거리가 되지 않지만 내가 20대를 보냈던 80년대엔 흔치 않은 경우였다. 이렇게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나도 모르게 시대를 앞서가고 있었다.
아이를 낳았으나 나는 아이를 키워보지 못했다. 아이를 시댁에 맡기고 주말에만 집으로 데리고 왔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닐 즈음에야 아이와 함께 시어머니께서 우리집으로 오셔서 함께 살게 되었다. 시어머니는 처음부터 우리 아이를 키워주시겠다고 하셨다. 기왕 키워주는 것이니 둘째도 낳으라고 하셨다. 나는 그 말씀이 전혀 고맙게 들리지 않았다. 시댁 식구중에는 이런 말을 서슴지 않는 분도 있었다."애 하나 더 낳아. 두 사람이 맞벌이하니까 한 사람이 버는 건 애 키워주시는 시부모님 생활비로 쓰면 되겠네." 내가 애 낳으려고 결혼했나. 시부모님 부양하려고 결혼했나.
42살에 어쩌다 임신이 되었다. 재고의 여지도 없이 애를 지웠다.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않았다. 남편에게조차. 나는 결혼 전부터 나름대로 가족계획을 하고 있었다. 자식을 낳는다면 딸 하나만을 낳으리라고. 그리고 그걸 이루었으나, 애를 낳아서 키워보지도 못하고 돈 벌어 시부모 봉양하고...이게 결혼이냐는 회의감만 깊어졌다.
어느 토요일에 낙태 수술을 받았다. 물론 혼자 갔다. 수술대에 누운 나를 보고 어린 간호사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애기가 불쌍해요."를 남발했다. '이런 잡것들' 이라는 욕이 목까지 올라왔으나 한편 내가 죄를 짓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마음을 되돌릴 생각같은 걸 할 내가 아니었다. 의사도 그랬다. '자궁외 임신이라 어차피 낳지 못할 아이입니다.'라고.
토요일에 수술을 하고 다음날인 일요일엔 교재연구를 위해 시내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고 구입해왔다. 다음날인 월요일엔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했는데 몸이 너무나 아팠다. 오후 수업을 몰아서 오전에 해치우고 조퇴를 신청했다. 그 당시 근무한 학교는 신설 학교라서 소수의 교사가 많은 업무를 맡고 있는 상황이라서 누구에게 부탁할 처지도 아니었다. 병가를 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월요일 오후에 몸을 추스르고 어김없이 화요일에 출근했다. 서러웠다.
낙태는 임신을 한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다. 아무리 어린 나이에 임신을 해도 결정권은 임신한 사람에게 있다. 화장실에서 아이를 낳는 어린 소녀에 대한 기사를 볼 때마다 우리나라는 참 잔인한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녀는 얼마나 무섭고 서러웠을까? 여자를 이렇게 대접하는 나라에서 저출산 운운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자식을 몇 년간 돌봐주신 시어머니에 대한 부채감은 시어머니가 생존하시는 한 평생동안 지속된다. 내가 그렇다. 그나마 아이가 하나였으니 망정이지 둘이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할 때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있을 수 없는 얘기지만, 만약 내가 다시 아이를 낳는다면 내 손으로 오롯이 아이를 키우고 싶다. 아이가 크는 과정을 오롯이 함께 하고 싶다.
낙태죄 운운 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코웃음만 나온다. 도대체 낙태가 죄가 되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