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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 도시를 보는 열다섯 가지 인문적 시선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5년 3월
평점 :
나는 책을 깨끗이 읽는다. 밑줄을 긋지도 않고 여간해서는 모서리를 접지도 않는다. 기껏해야 포스트잇 정도를 얌전하게 사용할 뿐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마음이 바뀌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연필로 밑줄을 긋고 싶어졌다. 다음은 연필 세례를 받는 구절들이다. 연필 긋기 노동이 들어간 글, 혼자 읽기가 아깝잖은가.
볼 수 있는 사람은 권력을 갖게 되고, 보지 못하고 보이기만 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지배를 받는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듯 남이 자신을 보지 못하면서 동시에 나는 다른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상황을 즐기기도 한다. 다는 말로 관음증 혹은 보이어리즘(Voyeurism)이라고 하는데(중략)우리의 일상생활에는 이 같은 관음증이 넘쳐 난다. -77쪽
학교에 대한 언급에 꽤 공감이 갔다.
...새로 지어지는 대부분의 학교들은 아파트 단지와 함께 설립이 되는데, 일반적인 토지이용계획을 하시는 기술자들은 그저 통상적으로 학교를 사거리 코너에 배치한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동차의 접근성을 고려한 부분도 없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자동차 소음이 많은 곳에 운동장 소음이 있는 학교를 두어서 주거 단지을 조용한 내부에 만들려는 생각이 큰 듯하다. 하지만 의도가 정말 잘못된 단지 계획이다.(중략) 유럽의 광장 주변에는 카페와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다. 우리나라 학교 운동장 주변으로 그런 상점들이 들어선다면 운동장을 광장처럼 사용하면서 학교 중심의 공동체 형성과 학교의 보안 문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85~86
우리 동네 초등학교 앞 구멍가게는 보기에 안타까울 정도로 상호가 자주 바뀐다. 그럴 때마다 먹고 사는 일의 고단함에 한숨을 쉬곤 한다. 마치 내 일처럼. 학교의 보안을 위해 학교 운동장 주변에 상점들이 쭈~욱 들어서서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공동체가 형성된다면 이는 두 마리가 아니라 세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흔히 얼마나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사람인가로 그 사람의 권력을 측정한다....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면적이 아니라 체적으로 그 차이를 구분해야 한다. 한 집이 천장 높이 2.5미터에 30평대 아파트에 살고, 다른 사람이 천장 높이 4미터에 20평대 주택에 산다고 생각해 보자. 면적으로 따지면 30평 아파트가 더 큰 집이지만, 체적으로 따지면 20평에 4미터 천장 높이 주택이 더 큰 집이다. 필자는 주택을 디자인할 때 건축주에게 항상 경사진 천장과 복층 공간을 넣으라고 권한다. -93
아파트는 아무리 넓어도 아파트 구조가 주는 평면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숨을 곳도 없고 오르 내림도 없는 한낱 종이 위에 그려진 평면도에서 꼼지락거리는 느낌이다. 아파트를 한번도 분양 받은 적이 없는, 아파트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나는 이 '경사진 천장과 복층 공간'이 있는 주택이 마냥 부러울 뿐이다.
남대문은 재료가 오래된 나무이기 때문에 문화재가 아니라 그 건축물을 만든 생각이 문화재인 것이고, 그 생각을 기념하기 위해서 결과물인 남대문을 문화재로 지정한 것이다. 따라서 오리지널 남대문이 불타 버린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오래된 나무가 불에 탔다고 통곡하면서 울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116
'생각을 기념'하기 위해서. 멋진 말이다.
2009년부터 5만 원권 지페에 신사임당이 들어갔다. 겉보기에는 그림도 잘 그리는 현모양처 문화인이 선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필자 생각에는 신사임당이 이율곡을 낳아서 전국 수석을 시킨 어머니라는 프로필이 없었다면 선정되지 않았을 것 같다.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낸 어머니가 추앙받는 사회적 분위기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학원이 아파트 상가를 빼곡히 채운 주변 상황이나 5만 원권 위의 신사임당이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137
백 번 양보해서 '현모양처 문화인'도 웃기기는 마찬가지다. 어머니는 현모양처, 그럼 아버지는?
공간은 실질적인 물리량이라기보다는 결국 기억이다. 우리가 몇 년을 살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어떠한 추억을 만들어 냈느냐가 우리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에게 다양하게 기억되는 공간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이벤트 별로 각기 다른 공간으로 각기 다른 기억의 서랍들 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서 우리의 머릿속에서 실제 크기보다 더 크게 인식된다. -195
그래서 '물리적 공간의 체험이 다양한' 천장 높고 마당이 있는 집이 좋다는 얘기이다.
우리가 천장고가 높은 종교 건축에 들어가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상상을 하게 된다. 같은 원리로 사무 공간에서도 빈 공간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창의적인 생각이 더 쉽게 나오는 것이다. 그 비어 있는 공간이 우리의 사고가 숨 쉴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준다. -223
컴퓨터 모니터와 마주한 사무 공간에서 비어 있는 공간을 감히 꿈꾼다....
결국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것은 건축물이 아니라 장소이다. -280
사람 같다. 사람도 장소에 어울려야 한다. 본인을 위해서건, 타인을 위해서건. 어떤 장소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게 진로탐색이다.
니슈케에 의하면 미국처럼 공간이 넓은 곳에서는 시간 거리를 줄이는 쪽으로 건축이 발달하고, 일본같이 공간이 협소한 곳에서는 시간을 지연시켜서 공간을 심리적으로 커 보이게 한다고 한다. -290
건축물은 자연의 겉모습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 대신 그 본질을 모방해야 한다. -316
이 책의 후속편이 나왔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이번엔 뒷북 치지 말고 제 때에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