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펀드에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이라는 것이 있기에 뭔가 궁금해 눌러 보니, 제목 그대로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각종 밈들을 모아가지고 그 기원과 발전에 대해 설명하는 책인 모양이다. '밈'이라고 하면 도킨스의 책에 나오는 개념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각종 '짤방'을 일컫는 명칭이 되더니, 지금은 동영상도 가리키는 모양이다.


과거에도 이은집이니 서정범이니 하는 저자들이 고등학생과 대학생의 유행이며 유행어를 엮은 책이 있었다고 기억하니, 이제는 인터넷 밈을 엮은 책이 나오는 세상이 되었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을 법하다. 아직 나오지 않은 책의 샘플 페이지를 보니 '개죽이'처럼 나귀님의 눈에도 익은 것들이 보인다.(그나저나 '개벽이' 주인 양반은 알라딘에서도 활동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샘플 페이지에 나온 사진 가운데 이른바 "노동요"라는 유명한 인터넷 동영상의 화면을 캡쳐한 것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제목 그대로 일하면서 듣기 좋은(?) 중독성 높은 음악을 여러 곡 엮어놓은 동영상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번 책에서는 <세서미 스트리트>의 캐릭터인 머펫 엘모의 모습에 핵폭발 장면을 합성한 화면에 대한 분석이 주로 이루어지는 듯하다.


그런데 나귀님의 입장에서 각별히 흥미가 갔던 것은 그 제작자의 또 다른 유튜브 동영상 "이마트"였다. 이마트에서 사용하는 로고송 가운데 하나를 장시간 빨리 재생하는 것으로 "노동요" 못지않게 인기를 끌었다고 알고 있는데, 원곡 자체를 예전부터 좋아했던 나귀님으로선 지금 와서 대형 마트 로고송을 거쳐 인터넷밈으로까지 자리잡았다는 사실이 살짝 황당했다.


문제의 노래는 제임스 미치너의 연작 단편을 토대로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이 만든 유명한 뮤지컬 <남태평양>에 나오는 "해피 토크"인데, 적진 정찰 임무를 부여받고 최전선에 파견된 장교가 짬을 내서 원주민 마을에서 휴식을 즐길 때, 미군 부대 옆에서 장사를 하는 원주민 여성 블러디 메리의 딸인 예쁜 아가씨와 물에 들어가 헤엄을 치며 꽁냥꽁냥할 때에 나온다. 


블러디 메리는 장교에게 자기 딸과 결혼해 그냥 이곳에 눌러앉아 살라고 유혹하지만, 그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화를 내며 딸을 데리고 떠나 버린다. 이후 장교는 그 지역의 유지인 프랑스인 농장주의 안내를 받아 적진에 침투했다가 전사하고 만다. "해피 토크"라는 노래 자체는 경쾌하지만, 그 전후 맥락에는 살짝 어두운 느낌도 없지 않은 셈이다.


아마도 이마트에서 로고송으로 사용한 이유도 바로 그런 경쾌함 때문이겠지만, 그걸 또 한 번 더 비틀어서 인터넷 밈의 일종으로 만든 것은 상당히 괴이하다고 해야 할 법하다.(하나 덧붙이자면, 나귀님이 수년 전에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이마트에 다니던 시절에는 "해피 토크"를 이용한 로고송을 한 번도 듣지 못했다. 대신 "아직도 B컵, 엄마는 D컵"은 자주 들었지만...)


소설가 제임스 미치너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태평양 전선에 배치되어 복무했는데, 한 번은 누벨칼레도니에 갔다가 훗날 프랑스인 농장주며 원주민 블러디 메리며 하는 인물들의 모델이 된 사람들을 만났다고 전한다. 이후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한 연작 단편집 <남태평양 이야기>가 1948년 퓰리처상을 받았고, 훗날 뮤지컬과 영화로도 각색되며 큰 인기를 누렸다.


전쟁이 끝나고 10년 뒤에는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젊은 곤충학자가 누벨칼레도니에 왔다가 바로 그 프랑스인 농장주의 집에 한동안 머물며 신세를 지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풍토병에 걸려 끙끙 앓는 바람에 원래 계획한 곤충 채집은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떠나 버렸는데, 그가 바로 세계적인 개미 연구자 겸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인 에드워드 O. 윌슨이다.


또 한 가지 묘한 점은 앞서 언급한 인터넷 밈 "노동요"와 "이마트" 모두에 사용된 사진에 등장하는 엘모와 관련이 있다. 나귀님이 예전에 2번으로 <세서미 스트리트>를 시청하던 시절에는 없었던 캐릭터라고 기억하는데, 지금 와서는 드라큘라, 길쭉이와 넓적이, 쓰레기통 괴물, 노란 새, 개구리 기자 같은 기존 캐릭터들을 밀어내고 일약 프로그램의 간판이 된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에는 트위터의 엘모 계정에 "어떻게들 지내?" 하는 안부 인사가 올라오자 수많은 팬들이 각자의 삶을 하소연하며 큰 반향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그런데 정작 이 캐릭터의 움직임과 목소리를 원래 담당하던 연기자는 수년 전에 성추행 혐의로 불명예 퇴진했다고 하니, 이 사실 역시 이 인터넷 밈에 아이러니를 한층 더해주는 요소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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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딥스로트"라는 암호명으로 지칭되던 정부 고위층의 내부 고발자가 있었다. 그 정체를 놓고 구구한 추측이 있었지만, 제보를 받은 <워싱턴 포스트>에서 함구하며 추측만 무성했었다. 알다시피 이 언론사는 다른 매체의 외면 속에서도 이 스캔들을 끈질기게 파고들어 대통령 하야를 이끌어냈다.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당시 FBI의 2인자였던 부국장 마크 펠트가 바로 그 제보자였던 것으로 밝혀졌고, <대통령의 부하 모두>라는 논픽션의 공저자인 <워싱턴 포스트> 기자 밥 우드워드가 "딥스로트"의 내력을 저술한 <시크릿맨>이란 저서를 간행했었는데, 나귀님은 최근에야 그 번역서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잖아도 수년 전에 외서를 하나 사려다가 할인 쿠폰을 쓰려면 3만 원인지 5만 원인지를 딱 맞춰야 하기에 울며겨자먹기로 마침 대폭 할인 판매하던 그 원서를 사서 책장에 꽂아둔 바 있었다. 워터게이트 관련서를 꾸준히 사 모은 나귀님 말고는 딱히 볼 사람도 없을 터이니 번역서는 못 나오리라 생각했던 까닭이다.


암호명 "딥스로트"는 린다 러블레이스가 주연한 동명의 저 유명한 포르노 영화에서 유래한 것으로, 밥 우드워드가 처음으로 이 조력자에 대해 언급했을 당시에 신문사 편집국의 누군가가 장난스레 제안한 이름이었다. "목구멍 깊숙이" 들어 있는 비밀을 누설하는 제보자를 가리키기에는 제법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극소수 내부자만 알 수 있는 고급 정보가 누설되었다는 사실을 간파한 정부에서 눈에 불을 켜고 용의자 색출에 나섰지만, 우드워드의 책에 따르면 마크 펠트는 이런 상황을 예견한 듯 "우리 중에 스파이가 있어!"라며 자기가 먼저 앞장서서 설레발을 치며 내부 고발자 단속을 제안함으로써 혐의를 벗어버렸다고 한다.


연방 수사기관의 2인자가 굳이 내부 고발을 하게 된 배경에는 닉슨 정부의 폭주를 막아 보려는 의협심도 있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FBI 국장 임명을 코앞에 두고 낙마한 데에서 비롯된 불만도 없지 않았던 모양이니,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을 쫓아낸 사람의 행동 동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없지 않은 듯하다.


탄핵의 위협에 직면했던 대통령이라면 이후의 클린턴이나 트럼프도 있었지만, 닉슨은 실제로 가결을 앞두고 자포자기로 하야한 최초(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 사례라는 점에서 아직까지도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는 실정이다. 외교 면에서의 실적에도 불구하고 도덕성이라는 면에서 치명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최근 번역된 필립 로스의 초기작 <우리 패거리>에서도 그를 연상시키는 정치인의 막장 행보를 꼬집는다 하니, 이래저래 닉슨이라면 여전히 최악의 정치인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진 듯하다. 심지어 맨 정신이었던 때가 별로 없었던 환각제 애호가 P. K. 딕도 닉슨과 그 정부에 대해서는 줄곧 비판적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시크릿맨> 번역서를 알라딘 미리보기로 확인하니 군데군데 축역된 듯한 문장이 나타나는 것은 아쉽다.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파장된 수천 건의 심문 기록과 문서"(11쪽)라는 희한한 표현도 등장하던데, 아마도 "파생된"을 잘못 적은 듯하다. 아니면 매번 출판사들이 주장하듯이 나귀님 눈깔이 잘못된 거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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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밥>의 작가 쿠이 료코의 신간이 나왔다기에 뭔가 궁금해 살펴보니 제목부터 "낙서집"이다. 장편 연재 도중에 심심풀이로 그린 것들을 엮었다더니만, 샘플 페이지를 보니 그 주인공들을 활용한 낙서가 적지 않은 듯하다. 혹시 <던전밥>의 후일담에 속하는 내용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니, 기회가 되면 훑어봐야 하겠다.


그러고 보니 <엠마>의 작가 모리 카오루도 비슷한 그림들을 엮어가지고 "습유집"이라는 제목으로 간행한 적이 있었다. "습유"라고 하면 보통은 옛날 문집을 엮으면서 본편에서 빠진 글을 뒤늦게 덧붙인 일종의 부록이나 보유에 해당하는 것인데, 감히(?) 만화 제목에 활용했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눈길이 가기도 했다.


작가 스스로는 낙서라고 낮춰 말하지만, 남이 볼 때에는 충분히 돈을 주고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생각해 보니 <마음의 소리>의 작가 조석도 최근 시즌 2로 돌아오면서 그간 블로그에 "막 그린" 그림 일기를 <마음의 소리(였던 것)>이란 제목으로 연재하고 있으니, 이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낙서를 작품으로 승화시켰다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2022년에 갑자기 사망한 만화가 김정기의 사례가 떠오른다. 원래는 살짝 애매했던 네이버 웹툰 <TLT>로 처음 접한 작가였는데, 나중에 하얀 벽에 매직펜을 이용해서 끝도 없이 즉흥적인 그림을 그려 나가는 이벤트로 전세계적인 화제가 되었다기에 뒤늦게 놀랐다.


김정기의 생전 작품 중에는 일본의 만화가 테라다 카츠야와 공저한 것도 있는 모양인데, 양쪽 모두 낙서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다 보니 의외로 괜찮은 조합이었던 것도 같다. 테라다 카츠야의 낙서는 <전부>라는 제목으로 한데 엮은 것으로 갖고 있고, 그 외에도 작품집인 줄 알고 샀더니 "뽀샵" 지침서였던 책도 있다.


창작 만화로는 예전에 동네 헌책방에서 구입한 일본어판 <서유기전 대원왕>이 있고 (나중에 2권까지 번역되었다), 그 외에 클래식카에 대한 책이며 만화가로 먹고 사는 방법에 대한 대담집도 나왔지만 아쉽게도 그쪽은 존재감이 약했던 것 같다. "사전극야"라면 여전히 "낙서" 작가라고 기억하는 이유도 그래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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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최근 나온 <최은희와 괴물들>이라는 만화 이야기도 해 보자. 제목 그대로 과거 북한에 납치되었다가 가까스로 탈출했던 영화감독 신상옥과 영화배우 최은희의 실화를 각색한 그래픽노블인데, 십중팔구 국내 보수 성향 언론사나 출판사가 제작한 '반공 만화'가 아닐까 했던 예상과는 딴판으로 무려 독일(!) 작가들이 쓰고 그린 만화였다.


유튜브의 '외국인이 만든 이상한 한국 음식'처럼 살짝 뜬금없다 싶다가도, 두 사람의 체험이 얼마나 극적이었는지를 상기해 보니, 과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분단 국가였던 독일에서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충분히 일리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부부였던 감독과 배우를 납치해 영화 제작을 명령한 독재자라니, 이만한 부조리극이 어디 있겠나!


나귀님만 해도 두 사람의 행적에 대해서는 약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본 적이 있었는데, 납북 직후에만 해도 '사업 실패로 자진 월북했다'는 언론 보도가 빗발쳤던 기억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탈북 이후의 해명에 대해서도 살짝은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의 영화 제작이며 언론 노출을 지켜보면서도 과거 반공 교육의 연장인가 싶어 슬쩍 의구심을 품었다.


두 사람은 <내레 김정일입네다>라는 희한한 제목으로 공동 수기를 간행한 바 있었는데, 지금 다시 확인해 보니 외국에서는 수년 전에 아예 그 사건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도 제작되는 등 뒤늦게나마 국내에서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았던 모양이다. 우리야 지겨울 정도로 들어 무덤덤하지만, 외국에서는 오히려 제3세계 독재자의 엽기 실화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최은희와 괴물들>은 특이하게도 신상옥이 북한에서 만든 괴수 영화 <불가사리>의 내용과 최은희의 실제 경험이 교차되는 방식으로 서술되는 모양이다. 따라서 제목에서 가리키는 '괴물'은 김일성과 김정일을 비롯한 북한 사람들일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영화에 등장하는 진짜 괴물 불가사리일 수도 있으니, 그 자체로 중의성을 지녔다고 해야 될 듯하다.


쇠를 먹으면 몸집이 커지며 무슨 수로도 죽일 수 없는 괴물 불가살, 또는 불가사리는 한국 고유의 괴물이라 하던데, 처음에는 작고 소듕하지만 나중에는 너무 거대해져 감당이 불가능할 정도의 재난을 불러온다는 내용만 보면 건드릴수록 커지는 도깨비 사과나, 또는 동유럽 유대인의 골렘 전설이나, 괴테의 '마법사의 제자'와도 비슷한 점이 없지 않아 보인다.


한편으로는 수탈에 대한 민중의 원한이 드러나는 것도 이 소재 각색물의 한 가지 특징이 아닐까 싶은데, 당장 신상옥의 영화에서는 물론이고 나귀님이 가장 인상 깊게 본 각색물인 백성민의 만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후자에서는 악덕 관리에게 억울하게 죽은 대장장이의 눈 먼 아들이 악에 받쳐 토해낸 핏덩이에 충성스런 황소의 원혼이 깃들어 괴물이 된다.


백성민 버전에서는 주인공이 직접 부모의 원수를 갚지는 못하는 대신, 왜구 토벌 중에 치명상을 입은 원수를 발견하고 최후를 지켜보기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급기야 애국심 뿜뿜한 원수의 부탁을 받아들여 불가사리에게 적선을 파괴하도록 지시하지만, 쇠를 먹는 불가사리는 물과 상극이라 바다에 빠져 자멸하고 주인공은 절에 들어가는 것으로 급마무리된다.


왜구 이야기가 나왔으니, 최근 나온 만화 중에 특이하게도 해적과 노예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미국의 역사가 마커스 레디커의 저서를 각색한 작품이 여럿 있기에 깜짝 놀랐던 기억도 난다. 번역서로는 까치에서 나온 <악마와 검푸른 바다 사이에서>만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갈무리에서 저서를 무려 네 권이나 내놓았고, 내친 김에 만화 각색물까지 두 권 내놓았다.


마침 대니얼 디포의 수많은 저술 속 내용을 통해 18세기 영국 경제사를 재구성한 희한한 책인 <디포의 세계>를 뒤적이다가, 거기서 한 장에 걸쳐 묘사된 '해적의 민주주의'를 보고 새삼스레 관심이 생겨서 책장 곳곳에 흩어져 있던 해적 관련서를 이것저것 도로 꺼내 놓았는데, 조만간 시간이 되면 살가리의 해적 소설들까지 포함해서 한 번 훑어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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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북한에서 정체불명의 물건을 풍선에 매달아 남쪽으로 내려 보내는 바람에 긴급문자가 뜨는 소동이 벌어졌다던데, 날이 밝고 나서 확인해 보니 갖가지 오물을 집어넣은 비닐봉지가 여럿 발견된 모양이다. 휴전선 접경 지역뿐만 아니라 서울이며 더 남쪽의 후방까지도 침투한 모양이니, 비록 피해가 크지는 않더라도 앞으로 상당히 신경이 쓰이게 생겼다.


오물 소식을 접하자마자 이거야말로 진짜 '더러운 폭탄'(dirty bomb)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핵탄두 대신 핵 폐기물이나 기타 오염 물질을 넣음으로써 목표 지역의 환경을 오염시키는 종류의 폭탄을 바로 그런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인데, 이번에는 그 주체가 북한이라는 점에서 '가난한 자의 핵폭탄'이란 또 다른 별칭과도 딱 맞아 떨어지는 듯 보인다.


교묘한 도발인지, 아니면 신경질적 화풀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서 무인기가 서울 상공을 신나게 헤집고 돌아다녀도 속수무책 방관할 수밖에 없었던 선례를 떠올려 보면, 제아무리 유럽에 수출하는 최첨단 초강력 무기로 무장했다는 국군조차 정작 이런 재래식, 또는 원시적 공격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점은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다.


비유하자면 어마어마한 덩치와 힘을 자랑하던 골리앗이 소년 다윗의 돌팔매에 그만 뻗어 버린 것과 비슷한 형국인데, 실제로 세계 각지의 테러 집단에서는 강대국만큼의 무기며 자원이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갖가지 교묘한 방법을 고안한다고 알고 있다. 지난번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에서 명중률은 떨어지지만 저렴한 수제 미사일을 활용했던 사례도 그렇다.


이번 북한의 '더러운 폭탄' 공격은 정체불명의 오물이 들어 있었다는 점에서 세균전의 일종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중세에는 공성 과정에서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나 동물의 시체를 투석기에 넣어 성내로 날려보내는 섬뜩한 방법도 사용했다던데, 구체적인 출처를 찾아보려 지금 다시 구글링해 보니 이제 와서는 신빙성이 떨어지는 날조나 전설로 치부되는 모양이다. 


중세를 실감나게 (즉 야만스럽고 지저분하게) 묘사한 것으로 유명한 폴 버호벤의 영화 <살과 피>에도 바로 그런 장면이 등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룻거 하우어가 연기한 도적단 두목은 나중에 <베르세르크>에서 주인공을 거두어 키워 준 용병 대장의 모습으로 오마주되었다고 알고 있다. 바로 주인공의 "등짝"을 팔아넘겼다가 결국 목숨을 내놓아야 했던 그 사람이다).


세균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한국 전쟁 당시 미군을 둘러싼 소문이다. 당시 중국 정부에서 북한 소식통을 인용해 미군이 자행한 세균전의 증거를 모아 놓았다며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바람에 잠시나마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객관적이고 유의미한 증거라고는 전무한 상태에서 중국과 북한이 일반적인 주장만 가지고 펼친 여론전이었다.


냉정히 따져 보면 모순과 억지만 가득했던 그런 주장에 사람들이 솔깃했던 까닭은 당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던 영국의 생화학자 조지프 니덤이 중국 측 조사 위원회의 일원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열렬한 중국 애호가로서 머지않아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과학사 저술로 명성을 얻게 되는 그는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중국 정부 주요 인사와도 친분이 있었다.


그래서 중국 정부의 제안에 흔쾌하게 조사단에 이름을 올리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공산당의 선전선동에 자신의 명성만 빌려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허술한 보고서가 발표되자 중국이나 북한 정부보다는 오히려 세계적 석학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조사하지도 않은 저 생화학자를 향해 비난이 집중되었고, 그의 화려한 경력에서 뚜렷한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


조지 스타이너의 회고에 따르면, 제법 세월이 지난 후 니덤을 만나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던 중에 세균전 보고서 이야기를 꺼내자 갑자기 상대방의 안색이 달라지더라는 일화도 있었다. 희한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세균전 주장을 믿는 사람이 많은 듯, 수년 전 문제의 허위 보고서를 "발굴"했다며 대서특필한 "진보" 언론사도 있었다.


그런 사람이라면 이번 오물 풍선조차도 "인민의 표현의 자유"이자 "진정어린 성의의 선물"이라는 북한의 주장을 기꺼이 받아들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귀님 눈에는 핵 실험과 미사일과 방사포와 무인기를 뒤이은 '더러운 폭탄'이 졸지에 각자의 분변을 집어 상대방에게 던지며 반감을 표현하는 유인원 수준으로 떨어진 남북의 현 상황을 상징하는 듯해 씁쓸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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