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더미를 뒤지다 보니, 지난번에 사다 놓은 아도르노의 <신극우주의의 양상>이라는 얄팍한 책이 나온다. 제목이 그럴싸해 보여서 혹시 최근의 한국 상황에 대입해 볼 만한 내용이 나오는지 궁금해 뒤적여 보았는데, 원래 1967년의 강연을 재간행한 것인 데다, 역사적 맥락이 다른 까닭인지 충분히 아전인수할 만한 내용까지는 찾지 못해서 유감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조금 뒤적이다가 식탁에 놓아 두었더니, 바깥양반이 약속 있다며 밖에 나가면서 '오, 아도르노' 하고 냉큼 집어가기에, 나중에 들어오면 무슨 내용이더냐고 물어봐야지 생각했는데, 이후로 며칠이 지나도록 가방에 넣고 돌아다니기만 하지 정작 펼쳐보지는 않은 모양이어서 아쉬웠다. 혹시나 싶어 다시 뒤적여도 역시나 딱히 마음에 드는 구절은 없었다.


아도르노며 벤야민이라면 한때 바깥양반이 이것저것 뒤적여 보던 모양인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솔직히 그걸 한 번 보고 제대로 다 이해했을 것 같지는 않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문화적 차이이다. 예를 들어 아도르노가 어느 글에서 호프만스탈을 언급하고 지나갔을 경우, 그 문장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 호프만스탈 책을 읽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으니.


그나마 호프만스탈은 유명 작가이니 미미하나마 번역서가 있기라도 하지,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도통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두루뭉실 넘어갈 수밖에 없다. 이건 독자뿐만 아니라 번역자도 마찬가지여서, 애초부터 번역자가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간 문장이라면 독자로서도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아도르노의 경우는 이런 경우가 유독 많았던 듯하다.


예를 들어 아도르노의 비교적 짧은 글들로 이루어진 <미니마 모랄리아>의 경우, 우리말 번역본은 최문규(2000)와 김유동(2005)의 2종이 있지만, 둘 중 어느 것도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어서, 종종 문맥을 따라가는 것조차도 벅찬 흔적을 보여준다. 예전에 바깥양반 어깨 너머로 훔쳐보다 발견한 사례를 소개하자면, 테오도르 슈토름의 소설을 인용한 다음 구절이 있다.



미니마 모랄리아(224쪽): 


"'같이 걸을래, 리자이?' 그녀는 검은 눈으로 나를 못 믿겠다는 듯 쳐다보았다. '걷자고?' 그녀는 느리게 대꾸했다. '그래.' '왜 그래, 어디 가려고?' '천 가게에! 너 새 옷 사고 싶지 않니?' 나는 어색하게 말했다. 그녀는 깔깔 웃으면서, '가, 그냥 내버려 둬!' '아니, 단지 천 조각, 천 조각만 리자이!' '물론, 인형을 입힐 천 조각만, 그건 비싸지 않을 거야!'"



한줌의 도덕(238쪽):


"'리자이, 산책할까?' 그녀는 까만 눈으로 나를 못 믿겠다는 듯 쳐다보았다. '산책하자고?' 그녀는 느린 말투로 반복했다. '정신차려! 도대체 어디로 갈려구?' '엘렌크람머로! 너 새 옷 사고 싶지 않니?' 나는 바보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소리내어 웃었다. '나를 그냥 내버려 둬! - 아니야, 그냥 헝겊 조각만 사지!' '헝겊 조각을, 리자이?'" - '물론이지! 인형을 입히기 위해서는 헝겊 조각만으로 족하지. 그것은 비싸지 않을 거야!'"



아무리 읽어봐도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에서 해당 구절의 출처라는 슈토름의 소설 <폴란드인 포펜스펠러(Pole Poppenspäler)>의 독일어 원문을 찾아서 내용을 확인해 보니, 양쪽 모두 화자와 대사를 잘못 연결해 놓은 경우에 해당했다. 알기 쉽게 두 사람의 대사를 희곡처럼 배열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은 꽁냥꽁냥 대화였다.



소년: 같이 좀 걸을래, 리자이?

소녀: 걷자고?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소년: 너 어디 가는 건데?

소녀: 천 가게에!

소년: 너 새 옷 사려고?

소녀: 가, 귀찮게 하지 말고! 하여튼 그건 아니야, 단지 천 조각만 사려는 거지.

소년: 천 조각만, 리자이?

소년: 물론, 인형 옷 만들 천 조각만, 그건 비싸지 않을 거니까!



결국 김유동 번역은 문맥을 완전히 놓쳤고, 최문규 번역도 일부 문맥을 놓쳤기 때문에 오역이 나오고 말았다. 물론 리자이가 인형 옷을 사건 강아지 옷을 사건 아도르노의 전체 주장, 또는 사상을 허물어트릴 만큼 중대한 실수라고는 볼 수 없겠지만, 문제는 아도르노의 문장에서 이런 인용이나 언급이 빈번하다 보니, 번역자의 헛다리도 빈번하게 나온다는 거다.


그러니 기껏 번역서를 한 권 읽고 나서도 과연 제대로 이해하기는 한 건지 의문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톨스토이의 유명한 단편 제목을 김유동과 최문규 모두 "순교자의 소나타"라고 오역했는데, 그 제목의 유래인 베토벤의 2중주는 원래 프랑스의 바이올린 연주자 '로돌프 크로이처'에게 헌정한 작품이기 때문에, 흔히 말하듯 "크로이처 소나타"라고 해야 맞다.


음악에 문외한인 독자가 읽었다면, 혹시 어느 순교자에 대한 종교 음악인가 하고 오해하지는 않을까. 결국 번역자의 한계로 인해 독자의 한계가 자연스레 생겨난 셈이니 아쉬울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일단 아도르노를 제대로 이해하는 번역자/연구자가 나온 다음에나 독자도 그 혜택을 입을 법하니, 당분간은 두 권 모두 절판 상태로 남겨두는 것이 상책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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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 책이 새로 나온다기에 오랜만에 지적질하러 들렀다가, 알라딘 광고에서 <헬터 스켈터>라는 책을 발견했다. 만화는 이미 나왔으니 혹시 '그 책'인가 싶어 클릭해 보니, 정말 맨슨 패밀리에 관한 논픽션이었다. 예전에 어느 헌책방에서 페이퍼백 원서를 구입하며, 이런 책은 우리나라에서 절대 번역될 리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래 살다 보니 별일이다!


아무래도 대중적인 내용까지는 아닌 데다, 무려 1천 페이지가 넘는 책이니 번역과 편집 과정에서 제법 시간이 걸렸을 법한데, 과연 무슨 이유에서 이 책을 간행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몇 년 전에 타란티노 영화에 맨슨 패밀리가 나왔다고 하던데, 그때 맞춰 나오려다 사정상 밀린 것인지, 아니면 영화나 기타 이슈와는 별개로 기획된 결과물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하필이면 또 출판사가 '글항아리'이다! 이미 여러 번 지적했듯이 번역과 편집 모두 허술하기 짝이 없는 출판사이니, 이번 책에 대해서도 반가움보다는 아쉬움, 또는 의심이 앞서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수전 손택의 책을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소개했던 '이후'도 글항아리와 유사하게 기획에는 뛰어나지만 번역과 편집, 심지어 제본마저 허술했다는 거다.


짐작컨대 <해석에 반대한다>를 구입한 독자라면 누구나 공감하지 않을까. 커버는 너무 얇아서 군데군데 찢어지고, 하드커버의 책등과 면지를 연결하는 부위의 천도 너무 얇아서 본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까닭에 '겨드랑이 터진' 꼴이 되고 말았다! 오타와 오역의 경우에는 손택의 일기 두 권뿐만 아니라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에서도 특히 두드러졌다고 기억한다.


손택의 번역서는 이제 이후에서 간행을 포기한 모양인지 월북으로 옮겨서 재간행되려는 모양인데, 여기도 마찬가지로 번역과 편집이 뛰어난 출판사까지는 아니다 보니, 북펀드 페이지에 올라온 저자의 약력에서부터 오류가 들어 있다. 아직 책이 나오지는 않은 모양인데 과연 그대로 간행될지, 아니면 뒤늦게라도 실수를 알아채고 수정할지 기다리며 지켜봐야 되겠다.


대신 미리보기로 살펴본 <헬터 스켈터>에 대해서는 오역을 하나 지적하고 넘어가야겠다. "토요일 동이 틀 때까지 집 안에서는 다른 소리들이 들렸다"(16쪽)라는 문장인데, 범행 당시 총소리와 비명을 들은 사람도 많았지만 출처를 알지 못했다는 설명 중에 갑자기 "집"이라 하기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 원문을 살펴보니 "시간"(hours)을 집"(house)로 오독한 듯하다. 


물론 사소한 오역일 뿐이다. 설마 이거 하나 틀렸다고 해서 저 두꺼운 책에서 구구절절 설명된 맨슨의 악행을 선행으로 잘못 이해할 독자는 없을 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쯤 되면 나귀님이 새로 나온 책을 직접 들춰보기도 전에 품은 의심, 즉 글항아리에서 이미 간행한 이전의 책들에서 나타났던 오류를 토대로 생겨난 불신도 어느 정도 정당화되지 않을까 싶다.



[*] 나귀님이 수집한 맨슨 패밀리 관련 자료 중에는 샤론 테이트의 부검을 담당한 일본계 미국인 검시관 토머스 노구치의 회고록도 있는데, 제목은 살짝 낯간지럽게도 <마릴린 먼로는 죽어서도 아름다웠다>(토마스 T. 노구찌 지음, 정해경 옮김, 무당, 1995)이다. 저자는 담당 구역에 할리우드가 포함된 관계로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의문사한 유명 연예인 다수를 부검하는 특이한 이력을 쌓게 되었는데, 저 유명한 마릴린 먼로를 비롯해서 존 벨루시, 재니스 조플린, 윌리엄 홀든, 나탈리 우드가 대표적이었다. 먼로의 경우에는 아직까지도 사망 원인을 놓고 논란이 지속되다 보니 노구치 역시 원치 않은 주목을 받았던 모양인데, 나중에는 본인도 이런 반사적 광영을 즐기게 된 모양인지 홀든과 우드의 의문사 원인에 대해 언론에 언급했다가 부적절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나. 언제 돌아가셨나 궁금해서 구글링해 보니 1927년생, 현재 98세로 아직 살아 계시다기에 신기한 일이다 싶어 덧붙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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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인가, 알라딘에서 '멤버십 등급 유효기간이 7일 남았다'면서, 플래티넘 자격을 유지하고 싶으면 물건을 얼마어치 더 사라는 통보 문자가 날아왔다. 필요한 책이야 늘 장바구니에 가득 담겨 있으니 언제든 주문하면 그만이지만, 이상하게도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아 차일피일하다 보니 결국 다음 주부터는 알라딘 회원 등급이 플래티넘에서 일반으로 떨어졌다.


구매 이력을 살펴보니 알라딘에 가입해서 첫 주문은 2001년이었고, 이후 매년 서너 차례 정도만 주문하다가, 2008년에 중고샵이 생기면서부터 말 그대로 하루 걸러 한 박스씩 주문하면서 등급이 오른 듯하다. 중고샵 개장 이후로는 한 번도 플래티넘 등급에서 내려온 적 없는 나귀님이니, 자그마치 17년 만에 (햇수로는 18년인가) 일반 등급으로 내려오는 셈이다.


등급 하향의 이유는 알라딘 통보 문자에서 지적한 것처럼 구매액이 크게 줄어서, 3개월 합산 30만 원이라는 플래티넘 자격에 미달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중간에 비싼 책들을 몇 권 샀기 때문에 20만 원 기준 골드 등급이나 10만 원 기준 실버 등급은 되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적립금으로 결제한 것은 구매액으로 치지 않는 모양이어서 급전직하를 겪게 된 듯하다.


구매가 줄어든 까닭은, 뭐, 작년 이맘때 쓴 글에서 구구절절 적어놓은 바와 다르지 않다. 우선 최근 들어 알라딘 중고 물품이 '가격은 업, 품질은 다운' 추세이다 보니 딱히 장점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설상가상 중고 상품 품질 문제 때문에 고객센터에 항의하는 등의 우여곡절까지 겪다 보니, 이제는 아예 안 사고 마음 편한 것이 차라리 낫겠다 싶기 때문이다.


고객센터에 마지막으로 항의한 내용도 진짜 웃긴다. 우주점에서 '상급'인 책을 하나 구입했는데 하드커버의 겉표지가 없었다. 품질 판정 기준에 따르자면 겉표지가 없으니 '중급'인데, 애초부터 그렇다고 표기했으면 나귀님으로서도 굳이 살 이유까진 없는 책이었다. 결국 알라딘 측의 과실이므로 무료 반품을 신청했더니, '그건 표지가 아니라 띠지'라면서 거부한다!


띠지란 수상 실적이나 영화 개봉 같은 홍보 사유가 있을 때 추가하는 부속품인데, 문제는 해당 도서의 겉표지가 띠지처럼 생겼지만 실제로는 표지 역할을 하는 '띠지형 표지'라는 점이다. 당장 그 종이를 벗기면 바코드도 없어져 구매조차 불가능한데, 그게 '띠지형 표지'이지 어떻게 '표지형 띠지'냐는 것이 나귀님의 주장이었지만, 고객센터 측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렇게 갑론을박을 하다 보니, 내가 지금 뭐 하는 건가 싶어 문득 '현타'가 왔다. 알라딘에서 툭하면 들먹이는 핑계마냥 중고 책의 품질 판단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면 품질에 대한 의견 차이가 생길 때에도 이를 감안해서 유연하게 해결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할 터인데, 지금의 알라딘은 오로지 정해진 시스템 내에서만 해결하려 하니 융통성이라곤 없다.


1만 원짜리 배달 음식을 팔아도 고객 불만이 접수되면 군소리 없이 환불하는 것이 대세라는데, 알라딘은 무려 2만 4천 원짜리 물건을 잘못 팔아 놓고 2천 5백 원 반품 비용을 부담하기 싫어 자기네는 잘못이 없다며 발뺌한 셈이다. 나귀님이야 반품 요청도 기껏해야 연간 서너 번 수준이고, 그나마도 이번처럼 뭔가 충분한 이유가 있었으니 악질 고객도 아닐 텐데.


역시나 배달 음식에 비유하자면, 식당 잘못으로 환불하는 상황에서 배달비 2천 5백 원을 물어주기 싫어서 발뺌하다 고객이 영영 발을 끊게 했다면 과연 현명한 걸까? 문제의 고객으로 말하자면 2만 4천 원짜리 메뉴를 매일 한 번씩 무려 17년간 꾸준히 시킨 호구인데도 말이다! 설령 억울한 면이 있어도 그냥 물어주고 손님을 붙잡는 게 식당에도 낫지 않았을까.


결국 나귀님은 문제의 책 반품 비용 2천 5백 원을 직접 부담하고 차액만 환불받았으며, 그때 이후로는 알라딘 중고 물품 구매 시에 더 신중을 기하게 되었다. 자칭 '상급'이어도 품질을 장담할 수 없고 환불도 자유롭지 못하다면, '중급'은 사실상 '품질무보증'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보니, 가뜩이나 중고 판매가도 오르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구매도 줄어들었다.


물론 구매를 줄였어도 꼭 필요한 책은 구입하다 보니 플래티넘 회원 자격도 '알라딘과 헤어질 결심' 이후 무려 1년 넘게 지속되었지만, 예전처럼 당장 긴요하지 않아도 싼 맛에 한두 권씩 더 고르는 중고샵 특유의 소비 패턴에서는 확실히 벗어나게 되었다. 지금은 사고 싶은 책이 있어도 가격이나 품질이 마음에 들지 않아 망설이다가 결국 놓치는 경우가 흔해졌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알라딘의 회원 등급이 오른다고 해서, 그 명칭의 유래인 귀금속마냥 휘황찬란한 혜택이 따라오는 것까지는 아니다. 예전에는 더 많았던 혜택이 점차 줄어든 것인지 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 다시 확인해 보니 신간 도서, 극장, 커피 할인 쿠폰뿐이라서 나귀님처럼 새책 안 사고 영화 안 보는 사람에게는 그나마 무용지물이다.


그렇다면 알라딘 회원 등급제도 사실상 유명무실하지 않나 싶다. 마치 '최상급'과 '상급'과 '중급'의 가격 차이가 기껏해야 2백 원 남짓이라 역시나 유명무실해진 알라딘 중고 품질 등급처럼 말이다. 알량한 쿠폰 할인 대신 무료 반품이나 받아주었더라면, 하다못해 충분히 일리 있는 이의 제기를 귀담아 들어주었더라면, 나귀님도 지금처럼 불매까진 안 갔을 텐데!


물론 알라딘 입장에서야 나귀님 같은 잔챙이 손님 따위는 없어도 그만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번 26주년 구매 기록으로 다시 살펴보니, 그간 나귀님의 구매액은 (앞서 말했듯이) 하루 평균 2만 4천 원쯤에 불과했으니까. 월간 1백만 원도 못되고, 연간 1천만 원도 못되며, 구매 회수 역시 "백만 번 산 고양이"에 비하면 딱히 많이 산 것까지는 아닌 셈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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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몇 년 전의 일인데, <상실>과 <푸른밤>을 읽고 새삼스레 존 디디온에 대해 궁금해져 이것저것 찾아보게 되었다. 사실 이 작가에 대해서는 도미니크 던과 도미니크 던(아빠와 딸인데, 이름 철자가 살짝 다르다)에 대해서 알아보던 중에도 대강 살펴본 바 있었으니, 디디온의 남편이 도미니크의 형제(?) 겸 도미니크의 삼촌(?)인 존 그레고리 던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하루는 리터러리허브라는 미국 웹진에서 만든 '존 디디온 에코백'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 손에 담배를 들고 정면을 응시하는 이 작가의 유명한 사진을 인쇄한 제품인데, 진짜로 딱 보자마자 소장 욕구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물건이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 해당 웹진을 구독하고 기부금 낸 회원에게만 제공하는 한정 사은품이라니 더욱 관심이 갈 수밖에!


그런데 리터러리허브의 이런 사은품 정책에 대해서는 불만을 가진 외부인도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해당 웹진의 Q&A 중에는 아예 '디디온 에코백은 어디서 구매하나요?'라는 페이지가 있고, 심지어 거기 나온 내용 중에는 '에코백을 판매하지 않는다면 디디온에게 이메일로 항의하겠다'는 반협박성 발언에 '맘대로 하삼'이라며 여유 부린 답변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디디온 에코백은 미국의 작가며 지망생 사이에서도 꽤나 인기 높은 '레어템'이었고, 급기야 이 물건을 사기 행각에 동원한 사례까지 있었던 듯하다. 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으니 대강 이니셜로만 지칭하자면, 리터러리허브에 기부금을 내고 디디온 에코백을 수령한 여성 작가 A는 어느 날 이 물건을 부러워하는 여성 작가 B의 트윗을 접하게 되었다.


B는 오래 전부터 지역 문단에서 활동했으며, 조만간 대형 출판사에서 정식으로 저서를 간행할 예정이라 해서 주목받던 인물이었다. 직접 만나 봤던 사이까지는 아니었지만, A는 순수한 호의로 자기가 쓰던 디디온 에코백을 선뜻 양도했다. 이에 B는 매우 감격한 듯 고맙다는 인사치레를 길게 보냈고, 그렇게 얻은 디디온 에코백을 나중에 트윗으로 인증하기도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B는 작가도, 지망생도, 활동가도 아닌 사기꾼에 불과했다. 훗날 언론의 추적 끝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B는 여러 가지 가명을 이용해서 미국 각지의 지역 문단에 침투했다. 여러 행사를 통해 익힌 안면으로 작가 협회의 간부라는 감투를 얻으면, 지역 유지며 기관으로부터 뜯어낸 각종 기금을 횡령해서 줄행랑치는 수법을 반복해서 써먹었다.


훗날 진상을 알게 된 A는 애초에 B가 디디온 에코백을 갖고 싶다고 트윗을 올린 것 역시 처음부터 사기 행각에 이용할 의도가 아니었을까 추측하며 씁쓸한 심경을 표현했다. 돈이 있어도 아무나 구할 수 없는 '레어템'으로서의 특징 때문에 디디온 에코백 자체가 문단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확보한 작가라는 일종의 신분증이나 보증서로 활용된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살펴보면 문제의 에코백에는 또 하나 씁쓸해 보이는 면모가 없지 않으니, 그건 바로 존 디디온의 사진 밖 상황이다.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 출간 직후인 1968년에 <타임>의 의뢰로 줄리언 와서가 할리우드의 자택에 와서 촬영한 그 사진은 작가의 모습만 보여주고 있지만, 사실 그곳에는 남편 존 그레고리 던과 딸 퀸타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담배의 유해성이 그리 부각되지 않았던 시절이니 실내 흡연도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디디온의 모습만 확대한 사진이 아닌 거실 전체의 모습을 본 '프로불편러'라면 간접 흡연에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니냐고 이의를 제기할 만하겠다. 심지어 같은 날 촬영한 다른 사진에는 여전히 담배를 들고 있는 엄마가 태평하게 딸을 무릎에 앉힌 모습도 나왔으니 말이다.


너무 과민하다면 솔직히 할 말은 없지만, 아차 하는 순간 무개념에 맘충에 한남이 되기 십상인 세상이다 보니 혹시나 싶어 미리 걱정해 본 셈이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촬영 내내 담배를 놓지 못했을 만큼 골초였던 디디온이 그 사진 밖에서 간접 흡연의 피해를 당했었을 가족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 아픔을 되새기며 여생을 보냈다는 점이 가장 씁쓸해 보이지만...



[*] 지난번에 알라딘에서 5.18 기념으로 에코백을 만들어 판매하는 것을 보니, 새삼스레 이걸 이렇게 기념하는 게 온당하기는 한 건가 싶은 의문이 들어서 갸웃갸웃 생각하다가, 문득 오래 전에 쓰다 만 글이 생각나기에 주섬주섬 기억을 더듬어서 끄적끄적해 본다. 한편으로는 재미있는 이야기라서 쓴 것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쯤 써 놓았으니 제발 알라딘에서 '디디온 에코백 알라딘 에디션' 따위를 만드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뜻도 없지 않다.(분명히 하지 말라고 했다! 퐁력, 퐁력 쓸까!) 이미 여러 차례 지적했듯이, 이제는 너무 흔하다 보니 에코백 자체가 처치 곤란한 또 하나의 쓰레기이자 '안티에코백'이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이왕 에코백을 만들 거면 지난번 '모래고양이 에코백'처럼 귀염뽀짝 다가와 옳지옳지한 물건을 아예 고품질 고가격으로 제작해서 정말 한 번 사면 평생 쓸 만한 '레어템'으로 만들던가 하지, 지금처럼 '싼 게 비지떡' 수준의 물건에다가 이것저것 기념한다고 대충 인쇄 뱍아서 판매하면 솔직히 좀 양심 없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양심적인 알라딘'이야 애초부터 '깨끗한 이재명'이나 '정직한 김문수'나 '온화한 이준석'에 버금가는 모순 어법 아니냐고 지적하면 솔직히 대답할 말까지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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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알라딘 중고샵에 필요한 책이 하나 올라왔기에 주문하려고 보니, 역시나 배송료가 아까웠다. 1만 원을 뭐로 더 채우나 싶어 오랜만에 장바구니를 들여다 보니, 한동안 구매를 하지 않은 까닭인지 대부분 품절된 다음이었다. 혹시 뭐가 더 있나 싶어 알라딘 중고샵에 새로 등록된 책들을 분야별로 살펴보았지만 영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 난감한 상황이었다.


결국 만화책 세 권을 넣어서 총 2만 4천 원 어치를 주문하기로 했는데, 어차피 소액이어서 적립금으로 결제할 것이니 굳이 컴퓨터 켤 것 없이 휴대전화의 알라딘 앱으로 처리하기로 했다. 그런데 주문을 마치고 다시 확인해 보니 이상하게도 배송료 2,500원이 결제된 상태였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만화책 세 권 중에 한 권을 빠트리고 결제가 이루어진 모양이었다.


아차 싶어서 일단 방금 주문한 것은 취소하고, 필요한 책들을 다시 장바구니에 담아서 새로 주문하려고 보니, 이상하게도 아직 구매하지 않은 만화책 한 권에 '이미 구매했다'며 경고 메시지가 뜬다. 설마 하고 다시 주문 조회를 해 보니, 앞서 취소한 주문에서 미처 취소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만화책 한 권을 무려 우주점 동대구역점에 주문했었던 것이다!


원래 사려던 책과 만화책 두 권은 장바구니에 담겨 있었는데, 다른 한 권을 검색해 보니 알라딘 중고가 있기에 함께 장바구니에 담아 주문했다. 그런데 십중팔구 눈 나쁜 나귀님이 중고 상품 목록 맨 위에 올라온 동대구역점 상품을 알라딘 중고샵 상품으로 착각해 장바구니에 담았고, 컴퓨터로 주문할 때와 달리 앱에서는 구매 상품 목록이 접혀서 못 봤던 모양이다.


그런데 황당한 것이, 알라딘 우주점 상품은 구매만 가능하고 취소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정가 7,000원이니 신간으로 구매하면 6,300원에 살 수 있는 책을 중고가 4,900원에 배송료 2,500원까지 더해서 정가보다 비싼 무려 7,400원에 구매했다면 누가 봐도 실수로 잘못 들어간 주문이겠지만, 우주점에서는 일단 주문이 들어가면 취소가 안 되고 반품만 가능하다나.


게다가 반품을 하려면 배송료 2,500원을 추가로 내야 하니, 책값 4,900원을 환불받아도 100원 손해인 셈이다. 결국 동대구역점에 주문 들어간 한 권을 뺀 나머지 책만 앞서와 마찬가지로 재주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재주문은 총액이 딱 2만 원이어서 배송료는 면제였고, 쿠폰과 적립금만 가지고도 2,500원 이상이었으니 그게 그거인 셈이었지만, 살짝 씁쓸했다.


이전에도 비슷한 문제로 알라딘 고객센터에 여러 번 따진 적이 있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주점 상품에 대해서는 취소 불가 정책이 지속되는 듯하다. 심지어 일반인 판매자에게 중고 물품을 구매할 때에도 '일부 상품 품절 시 주문 계속 여부'를 선택할 수 있게 해 놓은 것을 떠올려 보면, 알라딘에서 유독 우주점 상품만 결코 취소될 수 없다는 것은 기묘하다.


이건 캔슬 컬처(취소 문화)가 시대 정신으로 대두한 전세계적 흐름과도 맞지 않는 행보이다. 게다가 국내 상황만 봐도, 내란을 일으킨 전직 대통령의 구속이 취소되고, 여당 대통령 후보의 선출이 취소되었다가 다시 취소를 거쳐 확정되는가 하면, 야당 대표도 1심 유죄, 2심 무죄, 대법원 파기 환송으로 취소의 취소의 취소를 겪으면서 대선 후보로 나서지 않았나.


심지어 불법 점거로 수십억 손해를 입힌 철부지 학생들에 대한 학교 측 고소까지도 무슨 이유에선지 갑작스레 취소되는 상황에서, 알라딘 우주점만큼은 '주문하는 건 네 맘이지만, 취소할 때는 아니란다' 식의 원칙주의를 고수하고 있으니 새삼스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쯤 되면 알라딘 우주점이 행정부나 국회나 법원보다 낫다고 해도 할 말이 없지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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