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당 전당 대회 첫날 트럼프가 붕대를 감은 채 깜짝 등장해서 갈채를 받았다는 뉴스가 나오는데, 그의 옆에 선 부통령 후보의 이름이 J. D. 밴스라고 한다. 뭔가 낯익은 이름이다 싶더니만, 바로 <힐빌리의 노래>의 저자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자서전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영화로까지 제작되었다더니만, 이후 정계로 진출했던 모양이다.


다만 번역서 제목은 정확하지 않다. 원제의 Elegy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애가"(哀歌), 즉 슬픔의 노래이며 대개 애도하는 노래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한때 이미자를 "엘레지의 여왕"이라고 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르겠다. 결국 힐빌리의 암울한 현실을 개탄하는, 또는 힐빌리에게 바치는 슬픔의 노래라고 할 만하다. 


<힐빌리의 노래>는 출간 직후에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서 사서 잠시 훑어보기만 했는데, 무엇보다도 근래에 나온 책 중에는 보기 드물게 교육의 가치를 역설하는 내용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제목 그대로 저자는 힐빌리, 즉 시골에 사는 가난한 백인 가정 출신인데, 그를 키운 할머니는 강인한 성격인 동시에 배움의 중요성을 인지했다.


결국 저자는 해병대와 주립 대학을 거쳐 그 동네 출신으로는 이례적으로 예일대 로스쿨까지 다니게 되었다.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이 대부분 특권층 출신이라는 사실에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졸업 후에는 예일대라는 간판과 인맥을 이용함으로써 예전 같았으면 상상조차 못했던 기회의 문들이 열리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다고도 회고한다. 


그의 회고를 보면 미국의 백인 빈곤층의 암울함과 박탈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공화당의 말마따나 '복지 여왕'으로 요약되는 복지 제도의 부작용에 대한 증언도 있다. 생활 보호 대상자인 이웃이 매달 식품 구매 쿠폰을 받으면 저자의 할머니를 찾아와 '현금 깡'을 하고는 마약을 사기 위해 달려 나갔다는 이야기다.


이런 사례를 보며 자란 까닭인지 밴스는 극단적 보수주의와 포퓰리스트라는 비판도 받는 모양이다. 트럼프하고도 처음에는 대립 관계였다가 최근에야 지지 관계로 바뀌었다는데, 사실상 당선이 따 놓은 당상인 상황에서 향후 부통령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지가 궁금해진다. 댄 퀘일처럼 놀림거리만 되고 끝날지, 아니면 더 큰 꿈을 꿀지.


그나저나 트럼프는 이번 총격 사건 이후 상당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관측도 있는데, 단지 일시적인 반응일지 지속적인 영향일지 궁금하다. 일각에서는 총알이 간발의 차로 빗나간 것 때문에 지금의 트럼프가 '덤으로 사는 인생'을 얻었다고도 말하던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일종의 실존 체험인 셈이다.


제아무리 안하무인 트럼프라도 인간인 한에는 죽음 앞에서 움찔할 수밖에 없었을 터이니, 뒤늦게 혼자 그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오싹하지 않았을까. 물론 사건 발생으로부터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상황이니 지나친 기대일 수 있지만, 결국 또 트럼프인가 싶어 한숨이 앞서는 상황에선 조금은 바뀌었으면 하는 것이 모두의 마음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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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잠 자다 점심 때쯤 일어났더니만 트럼프 총격 사건으로 난리가 난 상태였다. 선거 유세 중에 연단에 있던 그를 누군가 총으로 쏘았는데, 마침 천운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는 바람에 총알이 빗나가서 귀에만 스치고 아슬아슬 목숨을 건진 모양이다.


심지어 경호원의 호위를 받으며 연단에서 내려가는 과정에서도 한손을 주먹 쥐고 번쩍 치켜들며 건재를 과시해서 청중을 열광시켰는데, 어떤 인위적 연출이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사실상 이번 대선은 트럼프가 승기를 잡은 셈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트럼프를 좋아할 리 없는 나귀님으로서도 이쯤 되면 '저건 하늘이 돕는 사람인가' 하는 탄식을 내놓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사업도 몇 번 말아먹었다가 운 좋게 재기했었고, 대통령도 한 번 거하게 말아먹었다가 재도전해서 당선이 눈앞이니 말이다.


특히 암살을 모면한 행동을 보면 조선 초에 태종이 태조의 암살 시도를 운 좋게 피했다는 야사가 생각난다. 골육상쟁 끝에 왕위를 차지한 아들이 미워서 죽이려고 활도 쏘고 철퇴도 들었지만 연이어 실패하자 '이건 천명이다!' 하며 승복했다던가.


프레더릭 포사이스의 소설 <자칼의 날>에서 드골 대통령이 암살을 모면한 것도 생각난다. 행사장 연단에서 훈장 수여자에게 입을 맞추려 고개를 살짝 숙이는 바람에 총알이 빗나갔는데, 영국인 킬러가 프랑스인의 습관을 몰랐기 때문으로 설명된다.


연단 위의 대통령 암살 시도라면 물론 육영수 저격 사건도 빼놓을 수 없다. 박정희가 잽싸게 연단 뒤에 몸을 숨긴 것 때문에 지금도 비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번 트럼프의 반응 역시 총격임을 깨닫자마자 앉으면서 연단 뒤에 몸을 숨긴 것이었다.


누군가가 자기를 노리고 총을 쏘는 상황에서 몸을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인데, 거꾸로 피해자를 겁쟁이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상한 일이다. 박정희도 잘못을 많이 하기는 했지만 이걸 가지고 비난할 것은 아닌 듯하다.


흥미로운 점은 육영수 저격 사건에 책임을 지고 경호실장 자리에서 물러난 박종규가 그보다 몇 년 전에 <암살사 연구>라는 책을 썼다는 것이다. 예전에 헌책방에 있기에 나귀님도 사다 놓았는데, 이번 기회에 '암살' 책장에서 다시 꺼내봐야 되겠다.


로널드 레이건 암살 미수 사건도 떠오르는데, 고령에다 심각한 총상에도 의연한 태도를 보여 지지율이 급상승했었다. 조디 포스터를 연모한 까닭에 범행을 저질렀다던 범인 존 힝클리는 34년간 복역하고 2016년에 석방되어 지금은 자유의 몸이라 한다.


고령이며 치매 논란에 시달리는 바이든 입장에서는 차라리 이번 암살 시도가 자신을 겨냥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을 법하다. 트럼프처럼 가벼운 부상으로 끝나고 말았다면, 동정표는 물론이고 의연함까지 드러내 건강 문제를 불식시켰을 테니까.


물론 일각에서는 트럼프 자체가 워낙 막장이니 이번 사건으로도 지지율이 크게 오를 것 같지는 않다고 예측하는 모양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바이든으로서는 '어찌하여 바이든을 낳으시고 트럼프를 낳으셨나이까!'라고 하늘을 원망하진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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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중고매장에 나온 독일 타셴의 화집 시리즈 보급판 가운데 록 음악 앨범 표지를 모은 것이 있어서 구입해 보았다. 이전에도 음반 표지 1000종을 모아 소개한 비슷한 내용의 화집을 산 적이 있었는데, 저자명을 비교해 보니 아예 다르기에 안심하고 구입했다.



ROCK COVERS: 750 ALBUM COVERS THAT MADE HISTORY by Robbie Busch & Jonathan Kirby. Ed. by Julius Wiedemann (Koln: Taschen, 2014; 2022)


"록 음반 표지: 역사를 만든 음반 750종"이라는 제목처럼 다양한 음반 표지를 소개하는데, 레드 제플린이나 핑크 플로이드 같은 고전도 있고, 신선하다 못해 위악적인 펑크 음반은 물론이고, 조니 미첼이나 제임스 테일러 같은 의외의 가수들의 음반도 포함되었다.


특이한 점은 우리나라 음반도 하나 들어 있더라는 것인데, 바로 "지금은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라는 가사로 유명한 노래 "또 만나요"를 부른 밴드 딕 훼밀리의 1집(작별 / 또 만나요)이다. 가수명은 DICK FAMILY, 발행년도는 1976년, 음반사는 JIGU로 나온다.


비스듬하게 뻗어 있는 건물 기둥 사이에 밴드 멤버 일곱 명이 나란히 선 모습이 절묘한 구도를 형성한 까닭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흥미로운 점은 이 음반의 제목이 DICK FAMILY / QUEST'S FAMILY 라고 적혀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밴드명인데 후자는 도대체 뭘까?


구글링해 보니 그 당시 정부의 외국어 금지 조치 때문에 "딕 훼밀리" 대신 "서생원 가족"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는데, 멤버 중 한 명인 "서성원"의 이름을 활용한 말장난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1집 표지에는 "서생원"이 아니라 "서생의" 가족이라고 나온다.


결국 QUEST'S FAMILY라는 영어명은 "서생의 가족"의 번역으로 추정되는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QUEST와 "서생" 사이의 연관성이 떠오르지 않는 거다. 혹시나 하고 "QUEST + 서생"으로 구글링해 보니 영화 <음란서생>의 영어명이 FORBIDDEN QUEST 라고 나온다.


이 영화가 2006년작이고 타셴 화집의 초판이 2014년에 간행되었으니, 어쩌면 "서생의 가족"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음란 서생 = FORBIDDEN QUEST"이므로 결국 "서생 = QUEST"라는 잘못된 추론이 이루어지는 바람에 "서생의 가족 = QUEST'S FAMILY"가 된 것이 아닐까?


물론 확증까지는 없지만 현재로서는 이 정도가 가장 그럴듯한 해석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나저나 구글링해 보니 딕 훼밀리는 "나는 못난이"가 수록된 2집을 내놓은 이후 해체했고, 38년 만인 2014년에 컴백했지만 그룹 이름을 둘러싼 분쟁도 없지 않았던 모양이다.


즉 엣 멤버들이 재결합한 것이 아니라 저마다 활동을 전개하면서 "딕 훼밀리"라는 이름을 가져다 쓰는 바람에 서로 '내가 원조'라고 주장하는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급기야 "서생의 가족"인지 "서생원 가족"인지의 유래인 서성원이 나서 밴드 이름의 속뜻을 설명했다.



>>> "딕 훼밀리의 딕(Dig)은 '파다' '연구하다'는 뜻이죠. 즉 '음악을 공부하는 가족'이란 뜻으로 제가 지었어요. 근데 제가 활동을 안 할 적에 다른 '딕 훼밀리'들이 마구 만들어졌는데 딕(Dig)을 딕(Dick)으로 쓰고 있더군요. 낯 뜨거웠지요. 외국인이 보면 깜짝 놀랄 겁니다."(출처 : 천지일보, 2014. 08. 22) <<<



왜냐하면 DICK은 영어에서 음경을 가리키는 속어이기 때문이다. 직역하면 "자지 가족"이니 황당하고, 심지어 사진에 나왔듯 멤버 가운데 한 명은 여자이기 때문에 더욱 황당할 수밖에. 하지만 "딕 훼밀리"라는 이름을 듣고 DICK 대신 DIG을 떠올릴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무리 좋은 의도였더라도 DIG FAMILY라는 영어명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이니, 훗날 DICK FAMILY로 와전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또 어쩌면 바로 그렇게 와전되어 희한해진 이름 때문에 타셴 화집의 저자들도 이 음반에 주목했을지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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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에서 정부가 식품 제조 기계의 안전 장치 설치 의무를 강화하는 조치에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지난번 SPC 공장에서 연이어 일어난 근로자 사망 사고를 염두에 두었다고 하는데 너무 늦지 않았을까.


가장 어이없는 점은 자칫 사람 목숨도 앗아갈 수 있는 위험한 기계인데도 불구하고, 덮개가 열리면 기계가 자동 정지하거나, 신체가 감지되면 자동 정지하는 최소한의 장치도 이제껏 의무가 아니었다는 거다.


문득 작년 연말에 무슨 농산물 공장에서 작업용 로봇이 사람을 죽인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 기억난다. 포장된 농산물 박스를 들어서 옮기는 로봇인데, 수리 중 오작동이 일어나서 작업 기사가 사망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로봇인가 궁금해서 구글링해 보았더니만, 긴 팔 끝에 달린 집게로 박스를 집어 들고 옮기는 기계였다. 네모난 박스를 집어 들기에만 특화된 디자인이어서 딱히 위협적인 외양까지는 아니었다. 


사건 당시 피해자가 박스를 들고 있었는데, 재가동한 순간 로봇이 그 박스를 작업물이라고 인식해서 다짜고짜 팔을 뻗어 집어 들었고, 이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수리 기사의 신체가 끼어서 참변을 당했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카프카의 "유형지에서"를 비롯한 갖가지 소설 속 살인 기계를 떠올렸었는데, 실상은 최근 수년 사이 벌어진 여러 공장의 사망 사례와 유사하게 안전 장치 미비로 일어난 사고라고 하니 더욱 안타깝다.


산업용 로봇이라면 이렇게 한 자리에 고정된 상태로 이리저리 팔을 움직여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운반이나 조립을 담당하는 모습이 맨 먼저 떠오르는데, 최근에는 자유롭게 오가는 산업용 로봇도 있는 모양이다.


예를 들어 지난번 뉴스에 나온 쿠팡의 물류 센터에서는 사람 대신 크고 작은 화물 운반용 로봇들이 사방으로 쉴새없이 오가며 갖가지 물건을 가져와 박스에 넣고 포장하는 모습이 상당히 신기하고도 재미있었다.


다만 이 과정에 투입되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며, 물품의 낱개 포장이 이미 이루어져야 하는 등의 자원 낭비며를 감안해 보면, 과연 사람 없이 로봇만 가동하는 공장이 더 저렴하고 유용한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기업 입장에선 임금 상승이며 노사 분규 같은 인력 운용의 단점이 없다는 점에서 전자동화 공장이 좋은 대안일 수 있지만, 최근 철도청 전산망 먹통 사건처럼 기계화나 자동화도 완전무결하지는 못할 테니까.


심지어 로봇조차도 아직 만능까지는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얼마 전 경북 구미에서 로봇 주무관을 채용해서 업무에 활용한 바 있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계단에서 굴러 파손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건 또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서 구글링해 보니, 식당이나 카페에서 음식을 운반할 때 사용하는 일반적인 주행 로봇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로 문서 배달이나 청사 안내 같은 단순 업무만을 담당했다고 전한다.


로봇 기술 특화 도시에서 나온 국내 최초 로봇 공무원이라는 점도 화제였지만, 파손 원인을 두고도 자살인지 타살인지, 업무 중 순직인지 과로사인지, 공무원 생활이 그렇게 힘든지 등 농반진반의 의견이 많았다.


나귀님 눈에야 챗GPT 열풍처럼 한때의 유행, 또는 흥밋거리에 불과해 보이지만, 일각에서 산업용 로봇이나 공무원 로봇의 보편화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지금 와서 다시 검토하고 실천해야 할 원칙이 하나 있다.


바로 공상과학소설의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가 1940년대에 내놓은 로봇 공학 3원칙이다. 그 내용은 "로봇은 인간은 해칠 수 없다", "로봇은 인간에 복종해야 한다", "로봇은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로 요약된다. 


물론 고성능 AI를 장착한 인간형 로봇 이야기이니 여전히 공상의 차원이라 일축할 수도 있지만, 이 3원칙에 함의된 안전 의식이야말로 산업용 로봇이나 공무원 로봇이나 식품 제조 기계 모두에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알고 보니 로봇 공학 3원칙은 2006년에 이미 산업자원부 기술표준원의 서비스 로봇 분야 국가 표준(KS)으로 세계 최초 채택되었다고 나온다. 늘 그랬듯 원칙이 없는 게 아니라 지키지 않은 게 문제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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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양반이 외출 준비하다 말고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문득 "당신은 가지를 싫어하니까..." 하기에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었다. 딱히 좋아하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굳이 싫어한다 말하기도 애매하다. 마치 붓다의 걸식마냥 굳이 달라 하지는 않지만, 누가 주면 사양하지도 않는달까.


짭짤하거나 매콤하게 졸여 놓으면 괜찮은 반찬이며 술안주가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번 마트에 갈 때마다 다른 야채보다 손이 먼저 가는 재료까지는 아니다. 튀김이나 구이가 최고라지만 결국 설거지를 도맡는 나귀님의 입장에서는 치우기 귀찮아서라도 기피하게 마련이니, 애매한 재료라 생각하는 거다.


<가지>라는 만화 역시 애매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예전에 신촌 북오프에서 산 책인 것 같은데,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리틀 포리스트>를 워낙 인상적으로 본 직후라서, 상권 표지를 보니 이것 역시 시골을 배경으로 혼자 살며 가지 농사를 짓는 웬 처녀의 풋풋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넘겨짚고 구입했던 것이었다.


물론 하권 표지를 보니 음침한 중년 남녀의 흑마술 소환 장면 같기도 해서 살짝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막상 구입해 읽어 보니 시골의 가지 농사까지는 맞았는데, 풋풋한 흑마술 따위는 없어서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림도 상당히 거칠 뿐만 아니라, 내용도 뭔가 이야기하다 만 것 같은 느낌이어서 별로였다.


제목 그대로 '가지'를 소재로 하는 연작 단편이기는 한데, 인물과 배경과 사건에 약간의 연속성이 있기는 하지만, 유기적으로 잘 짜여진 구조라기보다는 뭔가 제멋대로 뻗어나가려는 기세를 가까스로 억누른 듯한 (쓰고 보니 수록 단편 가운데 엉뚱하게도 SF였던 작품의 내용과도 비슷하다) 느낌이랄까...


그래서 처음에는 읽고 나서도 살짝 애매하다 생각해서 버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나중에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싶어서 도로 꽂아놓았고, 한참 뒤에 다시 꺼내 읽어보고는 역시나 애매해서 그냥 버리려고 마루에 내놓았다가, 또다시 한참 뒤에 다시 읽어보고는 조금 마음에 들기에 그냥 계속 갖고 있기로 했다.


가장 마음에 드는 단편은 하권 표지에 나온 중년 남녀가 '자는' 이야기다. 도시에서 회사 다니는 여자가 시골에서 가지 농사짓는 남자를 간만에 찾아와서, 밥 먹으려 식탁 차리는 사이에 바닥에 눕더니 그대로 22시간 내리 쿨쿨 잠만 자다 간다. 평소에는 불면증이지만 이곳에만 오면 잘 잔다는 이유에서다.


아버지가 빚지고 잠적한 이후 동생들 데리고 시골 친척집에 와서 살게 된 여고생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시골 마을에 영화 촬영 팀이 나타나자 수십 명 분의 식사며 간식을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앞에서 언급했던 하권 표지의 가지 농사짓는 중년 남자와의 호흡이 척척 맞는 것이 재미있다.


만사에 해피엔딩을 열망하는 속물적인 나귀님으로서는 처음에 읽을 때에만 해도 중년 남성이건 여성이건, 여고생이건 사이클 선수이건 간에 뭔가 뚜렷한 결론을 손에 쥐지 못하고 이야기가 끝나 버린다는 것이 불만스러웠는데, 거듭해서 읽다 보니 이것도 결국 인생의 한 단면에 대한 충실한 묘사려니 싶다.


인생의 모호함, 또는 현실의 애매함이랄까 하는 것은 이 작가의 또 다른 작품 <섹시 보이스 앤드 로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목소리 연기에 재능이 뛰어나 전화방의 바람잡이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중생이 우연히 만난 암흑가의 거물의 의뢰를 받아 이런저런 사건을 해결하고 다닌다는 황당무계한 내용이다.


여기서도 사건은 인과관계나 기승전결로 깔끔하게 설명되지는 않고, 주인공의 전력질주로 사건이 해결되더라도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비쩍 마른 아가씨가 종종 빤쓰 바람으로, 가끔 그마저도 벗어던지고 사방으로 뛰어다니지만 아무런 결실도 얻지 못하고 끝나는 츠루타 켄지의 작품과도 유사한 면모가 있다.


어쩌면 저자의 서술 방식이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더 이야기할 것이 있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더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된 이야기꾼의 재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최근 들어 많이 해 보게 된다. 최근 나온 소설 몇 편에서는 군더더기 같은 내용이 많아 실망한 경우가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하려는 내용을 다 말한다고 해서 항상 걸작이 되지는 않는다는 점은 문학사의 숱한 걸작들을 통해 입증된 바 있다. 엘리엇의 <황무지>는 파운드의 무자비한 교정을 거쳐 분량이 확 줄어들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고, 레이먼드 카버의 인상적인 단편들도 초고보다는 고든 리시의 편집본이 걸작으로 꼽히니까.


어찌 보면 허술함이지만 어찌 보면 절묘함이라 할 수도 있는 이런 특징들이 유난히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까닭은 어쩌면 최근의 이런저런 신작 중에 기시감 드는 것이 많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음악이건 문학이건 영화이건 간에 새롭고 신선한 것보다는 뭔가 잘 팔리는 조리법을 버무린 듯한 것이 많으니까.


뭔가 기성품으로는 나쁘지 않은데 막상 뒤돌아서면 내용을 쉽게 까먹어버리는 범작들과 달리, <가지>나 <섹시 보이스 앤드 로보> 같은 애매하고 미진한 작품들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그건 뭐였지? 그게 뭐였을까? 하는 의문을 품으며 두 번 세 번 읽으면서는 점점 더 뉘앙스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거다. 


그나저나 가지 좋아하느냐 물어보던 바깥양반은 그 이유에 대해 전혀 설명이 없었고, 가지를 사오지도 않았다. 현재로서는 마침 그날 저녁 연남동에서 친구들을 만날 약속이 있다고 했던 것으로 미루어, 아마 근처 중국집에 가서 먹을 저녁 메뉴를 고르다가 내 앞에서 불쑥 흘렸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고나...



[*] <섹시 보이스 앤드 로보>는 나귀님도 뒤늦게야 구하려 애썼지만 정말 한동안은 재고가 한 권도 없어서, 과연 이게 정말 출간되기는 했던 것인지 의심까지 들었는데, 최근에 알라딘에 누군가가 고맙게도 중고 물품을 올려주셨기에 감읍하며 구입했다. (흑흑. 감사합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인상적인 작품이지만 국내에서 저자의 인지도나 전작의 판매 현황을 고려해 보면 아마 다시 나오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나저나 저자인 "구로다 이오(우)"(Kuroda Iou)가 <섹시 보이스 앤드 로보>에서는 Kuroda Lou 라고 영어명으로 알라딘에 잘못 표기되어 있어서 검색해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십중팔구 대문자 아이(I)를 소문자 엘(l)로 착각한 까닭이 아닐까.(그나저나 "이오(우)/유황"은 저 유명한 "이오지마/유황도"와 같은 한자다!) 서명도 "섹시 보이스 앤 로보"와 "섹시 보이스 앤드 로보"로 다르게 표기되어 있어서 1권이 중복 등록되어 있는데, 모두 책의 표기대로 <섹시 보이스 앤드 로보>(저자: 구로다 이오우)로 통일되어야 하지 않을까. 일해라,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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