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알라딘 북펀드 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아베 코보의 <벽>이 재간행될 예정이라기에 어떤 눈 밝은 출판사인가 궁금해 확인했더니 저놈의 '마르코폴로'라는 출판사였다. 그렇잖아도 얼마 전에 <동방견문록> 저자 '마르코 폴로'에 관한 논픽션을 검색했더니만, 엉뚱하게도 이 출판사의 책만 줄줄이 검색되어 짜증이 치밀었다.


이 정도로 유명한 인물의 이름을 가져다 쓰려면 하다못해 '뿌쉬낀하우스'처럼 살짝 변형이라도 하든가, 다짜고짜 그 이름을 쓰는 건 너무하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던 거다. 그런데 잠시 후에 북펀드 중에 제바스티안 브란트의 <바보들의 배> 재간행 소식이 있길래 살펴보니, 이건 또 출판사 이름이 '구텐베르크'라고 나온다.


이쯤 되면 요즘에는 출판사 이름 정하는 데에서부터 일찌감치 창의성이 바닥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물론 -閣, -館, -院, -堂, -社 등으로 끝나는 옛날 출판사 이름이 훨씬 좋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르코폴로'나 '구텐베르크'가 더 개성적이거나 인상적인 이름이라 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알라딘에서 '뿌쉬낀'으로 검색하면 '뿌쉬낀하우스'도 덩달아 검색되어 불편하지만 (그런데 '푸시킨'이라고 검색하면 '뿌쉬낀'이라고 표기한 책도 줄줄이 검색되는 반면 '뿌쉬낀하우스'는 검색되지 않는다!) 그래도 이쪽은 러시아 전문 출판사라는 정체성에 어울리는 반면, '마르코폴로'와 '구텐베르크'는 그런 것조차 아닌 듯하다.


이건 아동서 전집 출판사인 한국톨스토이, 한국헤르만헤세, 한국셰익스피어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도대체 그 출판사에서 간행하는 책과 그 출판사의 이름에 들어간 작가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의문일 수밖에 없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흠좀무'한 사실은 이 세 출판사가 사실은 똑같은 회사의 계열사인지 브랜드라는 점이다.


결국 '마르코폴로'건 '구텐베르크'건 '한국톨스토이'건 '한국헤르만헤세'건 '한국셰익스피어'건 간에, 해당 인물의 사상이나 유산과는 무관하게 그저 명성만을 차용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생긴다. 물론 '까치'도 조류 책만 내는 것까진 아니고, '동문선'도 한국 문학만 내는 것까진 아니지 않느냐고 반박하면 솔직히 할 말은 없다만.


그나저나 유명인의 이름을 출판사의 이름으로 차용하는 지금과 같은 풍조가 계속될 경우, 나중에 가서는 '한국보리스파스테르나크'나, '한국스베틀라나알렉시예비치'나, '한국장마리귀스타브르클레지오'나, '한국토마스트란스트뢰메르'도 나올 법하다. 당연히 '한강'이나 '한국한강'이나 '노벨한강'은 거의 기정 사실처럼 보이고...



[*] 안부공방 이야기를 하려다가 얼떨결에 출판사 이름 이야기만 하다 끝나버렸다. <벽>은 1970년대에 삼성출판사에서 간행한 세로쓰기 전집에 수록된 번역본으로 갖고 있는데, 완역이 아닌가 싶어 어제 다시 꺼내 확인해 보니 "S. 카르마 씨의 범죄"부터 "바벨탑의 너구리"까지 여섯 편이 모두 수록된 완역본이었다. 책장을 뒤적이다 보니 1977년에 나온 신조문고 일어판 <壁>도 한 권 나온다.(나귀님이 안부공방 좋아했네!) 새로 나온다는 책의 번역자는 과거에 <아베 고보 연구>라는 학술서도 내놓았는데, 고유명사 표기 등 기본적인 부분에서 오류가 눈에 띄어 딱히 좋은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번역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뭐, 어차피 이것밖에 없으니 살 사람은 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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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에 바깥양반이 TV에서 방영하는 양궁 예능 프로그램을 열심히 보기에 나도 오며가며 띄엄띄엄 보게 되었다. 역대 올림픽 메달리스트 중에서 이미 은퇴한 선수들을 불러내서 개인전을 펼친 다음, 아직 현역인 선수들까지 추가해서 단체전을 펼치는 구성이었다.


제목부터 "전설의 리그"이다 보니, 바깥양반은 김수녕 정도는 나와야 맞지 않겠나 생각한 모양이고, 나귀님은 김진호까지는 아니더라도 서향순 정도는 나와야 맞지 않겠나 생각했었는데, 결국 두 명 모두 나오지 않아서 아는 얼굴은 기보배와 안산(!)뿐이었다.


양궁의 특성상 실력보다는 실수로 승부가 결정되는 경우가 역시나 많았는데, 이번 프로그램에서는 은퇴 선수들이 종종 체력 저하로 오발하는 부분이 긴장감을 주는 재미 요소였다. 물론 한편으로는 세월의 야속함을 실감하며 안타까운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그런데 활과 화살 이야기가 나왔으니 언젠가 활집과 화살집의 옛날 명칭에 관해서 알아보았던 기억이 난다. 수년 전 판소리 "수궁가"의 한 대목을 차용한 "범 내려온다"라는 노래가 크게 유행했을 때에 그 정확한 가사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뒤져본 까닭이었다.


얼핏 듣기에는 "동화 같은 앞다리에 천둥 같은 뒷다리로"라는 가사로 오해하기 쉬운 부분인데, <동편제 판소리 창본>(송순섭 & 전형대 편저, 한샘, 1991)에 나온 바에 따르면 정확하게는 "동개(筒介) 같은 뒷다리, 전동(箭筒) 같은 앞다리"(167쪽)라는 가사이다. 


동개(筒介, 또는 筒箇)는 "활과 화살을 넣어 등에 메는 기구"이고, 전동(箭筒, 또는 箭筩)은 "화살을 넣는 통"이라고 각주가 붙었는데, 모양으로 설명하자면 동개는 활의 모양[B]대로 넓고 납작한 "활집"[D]이고 전동은 원통형의 "화살통"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판소리에서 호랑이의 굵은 뒷다리(U) 모양과 가는 앞다리(V) 모양을 동개와 전동에 빗대어 그럴싸하게 비유했다고 할 수 있겠다. 판소리 사설은 워낙 천차만별이라 똑같은 "수궁가"라 해도 이 대목 자체가 없는 경우가 있는데, 이 책에는 정확히 나왔다.


<동편제 판소리 창본>은 꽤 오래 전에 아현국민학교 앞 헌책방에서인가 구입한 책인데, 아마 나귀님이 처음으로 산 판소리 사설집이었을 것이다. 공편자 송순섭은 동편제에서 송만갑의 계보인 박봉술의 직제자이고 현재 무형문화재 "적벽가" 보유자라 한다. 


판소리 사설집은 이 책 외에 민중서관의 고전문학전집으로 나온 신재효 판본과 뿌리깊은나무 판소리 음반 가사집의 재간행 판본을 갖고 있다. 훗날 박이정에서 각종 이본을 총합한 시리즈도 내놓았던데, 탐은 나지만 분량이 너무 많아 아직 구입하지 못했다.


판소리며 민담이며 하는 구비문학 관계 자료를 한때 열심히 사 모았는데, 이제는 뭐가 있는지도 기억나지 않으니, 아무래도 헌책방에 도로 뱉어놓을 때가 된 것도 같다. <동편제 판소리 창본>은 중고 가격도 비싸던데, 차라리 이번 기회에 파는 게 나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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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양반이 친구들과 약속 있어 연남동에 간다기에 문득 희곡 전문 서점이 그곳에 있다는 소문을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1인당 1만 5천 원 정도로 생각하고 가면 배불리 읽을 수 있고, 추가 요금을 내면 노래를 곁들여 뮤지컬로 각색해 준다고도 하던데, 가보지 않았으니 진짜인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알라딘에서 우연히 지만지 희곡선 가운데 '박준용 번역 희곡선'이라는 이름으로 전15권짜리 시리즈가 나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1990년대에 포도원이라는 출판사에서 '포도원 희곡선'이라고 해서 제1집 전20권, 제2집 전10권, 도합 30권으로 간행된 것 중 일부이다.


포도원에서는 서른 권이나 나왔는데 지만지에서는 그중 절반만 재간행된 것으로 미루어, 아마 절판된 사이에 다른 출판사에서 간행되어 저작권 계약이 불가한 작품이 있어서인가 짐작했었는데, 지금 다시 확인해 보니 제2집 전10권 중에는 박준용의 번역이 아닌 것도 제법 되었던 모양이다.


확인해 보니 전30권 가운데 박준용 번역은 스물두 권이고, 나머지 여덟 권은 다른 번역자가 담당했다. 참고로 포도원 희곡선 전30권과 그중 지만지의 박준용 번역 희곡선 전15권으로 재간행된 작품(* 표시)을 목록으로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번역자 이름이 없는 것은 박준용의 번역서다.


1. 세추앙의 착한 여자 (베르톨트 브레히트)

* 2. 서쪽나라의 멋쟁이 (존 밀링턴 씽)

* 3. 쥬노와 공작 (숀 오케이시)

4. 미스 쥴리 (아우구스트 스트린베리히)

* 5. 마라/싸드 (페테르 바이스)

* 6. 칭칭[헬로 굿바이] (시드니 마이클스)

7.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존 오스본)

* 8. 미친 사람들 (존 오튼)

* 9. 바람둥이 알피 (빌 노턴)

* 10. 희한한 한 쌍 (닐 사이먼)

* 11. 굿 닥터 (닐 사이먼)

* 12. 플라자 스위트 (닐 사이먼)

* 13. 태양제국의 멸망 (피터 셰퍼)

* 14. 요나답 (피터 셰퍼)

15. 안내놔? 못내놔! (다리오 포)

* 16. 카사블랑카여 다시 한번 (우디 알렌)

* 17. 리타 길들이기 (윌리 러셀)

18. 말괄량이 길들이기 (윌리엄 셰익스피어)

19. 맥베스 (윌리엄 셰익스피어)

* 20. 브라이튼 해변의 추억 (닐 사이먼)

21. 빌록시 블루스 (닐 사이먼) [김철리 옮김]

22. 브로드웨이 바운드 (닐 사이먼) [김철리 옮김]

23. 꿀맛 (샐라 딜래니) [정진수 옮김]

24. 스니키 휘치의 죽음 (제임스 로젠버그) [정진수 옮김]

25. M. 나비 (데이빗 헨리 황) [정진수 옮김]

26. 웃음 넘치는 교수대 (잭 리차드슨)

* 27. 폭력시대 (쥴스 파이퍼)

28. 나는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 (닐 사이먼) [김철리 옮김]

29. 리틀 말컴 (데이빗 홀리웰) [김철리 옮김]

30. 프랭키와 쟈니 (테렌스 맥널리) [김철리 옮김]


결국 셰익스피어와 스트린베리 같은 대가들의 작품을 제외하고 현대 작가들 위주로 재간행된 셈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운 점은 닐 사이먼의 걸작인 '브라이턴비치 3부작' 가운데 첫 작품만 박준용 번역인 관계로 지만지에서도 결국 <브라이턴 해변의 추억>만 재간행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나귀님은 포도원 희곡선 전30권 가운데 스물세 권을 갖고 있는데, 셰익스피어와 브레히트 등 중복되는 작품은 구입하지 않은 까닭이다. 지금 다시 구글링해 보니, 몇몇 작품은 1980년대에 연극 전문 출판사 예니에서 '박준용 번역 희곡 선집'이라는 제목으로 합본 간행된 적도 있었던 듯하다.


재간행된 '박준용 번역 희곡선'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었던 작품은 역시 닐 사이먼의 <희한한 한 쌍>이었다. 포도원 판본에서는 똑같은 페이지를 두 번 인쇄한 사고가 벌어져 한 페이지 분량이 빠졌던 것으로 기억한다.(결국 나귀님이 직접 번역하고 종이에 출력해서 오려 붙여놓았다!)


<에쿠우스>로 유명한 피터 셰퍼의 <요나답>도 요즘 분위기에서는 각별히 주목받을 만한 작품이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다윗 왕의 아들 암논이 이복 누이 다말을 강간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 희곡은 그 과정에서 암논을 부추겼던 모사꾼 요나답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사태의 전말을 관찰한다.


<바람둥이 알피>도 최근 정우성 사생아 논란에 다시 생각난 작품이다. 바람둥이 남자가 만나는 여자마다 줄줄이 임신시키지만 결혼은 거부하며 끝까지 얌체처럼 군다는 내용이다. 1966년 마이클 케인, 2004년 주드 로 주연으로 두 번이나 영화화되었고, 소니 롤린스의 사운드트랙도 유명하다.


그래도 최고의 걸작이라면 닐 사이먼의 '브라이턴비치 3부작'이다. 지난번 비상 계엄 당시 부당한 명령과 복종의 의무 앞에서 우왕좌왕했던 군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빌록시 블루스>의 내용을 떠올린 기억이 난다. 육군 훈련소를 배경으로 의무와 양심의 충돌을 보여주는 꽤 '웃픈' 내용이다.


<브라이턴 해변의 추억>도 3부작 모두의 주인공이자 닐 사이먼의 분신인 소년 유진의 관점으로 전개된다. 대공황 시절인 1930년대에 부모님과 형을 포함해 네 식구가 살던 집에 이모와 두 딸이 더부살이를 하게 되면서, 모두 일곱 식구가 복닥복닥 살아가며 갈등과 화해를 겪는다는 내용이다.


성에 대한 호기심이 충만한 주인공 소년이 사촌 누나의 목욕 장면을 훔쳐보려 한다는 대목이 지금으로선 불편과 분노를 자아낼지도 모르겠지만, 초연 당시에는 오히려 웃음만 자아냈던 것처럼 보인다. 초연 당시 주인공은 훗날 <패리스 뷸러의 휴일>로 스타가 된 배우 매슈 브로더릭이었다.


희곡으로만 읽을 때에는 몰랐는데, 유튜브의 연극 공연 영상을 보니 <브라이턴 해변의 추억>은 대사 하나하나마다 관객이 웃음을 터트릴 정도로 반응이 뜨거운 작품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갑분싸' 장면에서는 방금 전의 웃음소리가 싹 가시고 객석이 고요해지며 숙연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어떤 장면인가 하면, 네 식구 먹고 살기도 빠듯한 살림에 세 식구가 추가되어 일곱 식구가 식사를 하는데, 간(肝) 요리가 식탁에 나오자 모두들 이 맛없는 걸 왜 자꾸 내놓느냐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막내아들이 고기를 먹고 싶다고 불평하자, 아버지도 거들며 왜 맨날 간만 사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어머니가 참다 폭발한 듯 이렇게 대꾸한다. "우리 돈으로 일곱이 먹으려면 간밖에는 못 사니까 그렇지!" 그러자 불평하던 식구들은 입을 다물고, 티격태격하는 것 외에는 별 문제 없어 보이던 가정의 힘겨운 현실이 드러나는 순간 관객도 놀란 듯 침묵을 지키면서 무대를 주시한다.


희곡은 어디까지나 뼈대일 뿐이고, 배우의 연기와 객석의 반응까지 곁들여져야만 비로소 온전한 연극이 완성되는 것임을 깨닫게 해준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평생 단 한 번도 돈 내고 연극을 본 적은 없이 희곡만 열심히 사고 읽은 나귀님의 입으로 말하자니 뭔가 좀 민망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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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엔가 우연히 알라딘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니 <초역 부처의 말>이라는 낯선 책이 1위로 올라 있다. 이건 또 뭔가 궁금해서 클릭해 보니 동경대 나온 스님이라고 해서 유명했던 일본인 저자의 책이었다. 제목 그대로 불경에 나온 부처의 발언을 현대적으로 서술하고 해석하는 모양이다.


최근 갑작스러운 쇼펜하우어 열풍을 감안하면 부처 열풍도 충분히 가능해 보이기는 하지만, 왜 하필 이 책인가 하는 의문이 들어서 구글링해 보니 너무나 단순한 이유라서 살짝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 최근 장원영이 <유퀴즈 온 더 블록>에 나와서 이 책을 요즘 읽었다고 언급했다는 것이다.


결국 인기 연예인이 읽었다는 소문 때문에 너도나도 구매하며 베스트셀러가 된 것뿐인데, 심지어 요지부동의 한강 소설조차 밀어내고 1위를 차지했으니 (지금은 다시 한강에게 1위를 빼앗겼지만 여전히 상위권이다) 아이돌 최강자 럭키비키의 위세가 참으로 대단하다고밖에는 할 수 없겠다.


그런데 마침 알라딘에서는 '21세기 최고의 책'을 선정해서 발표한 직후이다 보니 아무래도 비교가 될 수밖에 없다. 선정 도서 809권 중에 한강 책을 제외하면 베스트셀러 순위 100위권에 <사람, 장소, 환대>, 150위권에 <멀고도 가까운>, <정의란 무엇인가>, <사피엔스>가 들어 있을 뿐이니까.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인 기획이 럭키비키의 한 마디에 압도당한 셈이니 알라딘에서도 살짝 현타를 느끼지 않겠나. 이럴 거면 '21세기 최고의 책' 대신 '아이돌 선정 최고의 책'을 발표했어야만 화제성은 물론이고 서점 매출 면에서도 훨씬 더 압도적이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그나저나 '21세기 최고의 책'에 선정된 서적 중에는 이미 절판된 것도 상당수이니, 새삼 책의 수명이 생각만큼 길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지난 25년간의 미디어 추천 도서며 '올해의 책' 목록을 살펴보아도 대부분 절판이었으니, 그런 책 대부분은 시의적인 것뿐이었다는 해석도 가능하고.


이쯤 되면 초판 간행 이래 절판된 적 없다는 다윈의 <종의 기원> 같은 고전의 위력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인기에 비하면 장원영이며 <초역 부처의 말>의 인기야 머지않아 사그라질 터이니 참 허무하지 않나 싶다가도, 새삼 카리나는 또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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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최근 완독한 로알드 달의 회고록 <단독 비행>에서도 동체 착륙 체험기가 나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공군에 자원 입대한 저자가 속성 조종사 훈련을 받고 나서 단독 비행으로 임지를 찾아 나서는데, 잘못 전달된 정보 때문에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잃고 결국 해질녘이 되어 동체 착륙을 시도하게 된다.


역시나 사막 불시착 체험을 소재로 여러 작품을 발표한 셍텍쥐페리와 유사하게, 로알드 달도 이때의 체험 이후 두뇌가 색다른 자극을 받으면서 창작열이 불타오르게 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물론 회고록 말고 전기에 따르면 이야기꾼 특유의 말솜씨로 불시착 체험부터 실제와는 영 딴판으로 윤색한 부분이 적지 않다지만 말이다.


아동서 저자로서 로알드 달의 명성을 감안하면 <단독 비행>도 지금처럼 청소년물로 간행되는 것이 온당해 보이기는 하지만, 부조리 고발 위주인 내용상 솔직히 성인쯤 되어야 제대로 공감할 만하지 않나 싶다. '스핏파이어'를 '스핏파이터'로 오기한 부분 등을 보면, 후반부 공군 복무담에는 '밀덕'의 감수도 필요하지 않았나 싶고.


최인호와 이우범, 또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안자이 미즈마루(또는 와다 하루키)의 경우처럼, 로알드 달 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사람이 사실상 전담 삽화가인 퀜틴 블레이크인데, 마침 알라딘 북펀드에서 이 양반 전기를 간행한다며 한동안 광고를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나서 지금 다시 검색해 보니 결국 간행되기는 간행된 모양이다.


그런데 북펀드 광고에서 살짝 의아했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저 삽화가의 또 달라진 이름이었다. 원래 QUENTIN은 "퀜틴"으로 쓰고, 실제 발음도 네이버 사전에는 미국과 영국 공히 "퀜튼"(/ˈkwɛntn/ 또는 /kwéntn/)이라고 나온다. 그런데 이번에 간행된 전기의 제목처럼, 이제는 "퀜틴" 대신 "퀸틴"이란 표기가 이미 대세인 듯하다.


사실 QUENTIN이라는 이름은 출판계에서 꽤 오래 전부터 골칫거리로 간주되었다. 컴퓨터가 출판 편집에 도입된 것이 1990년대인데, 그때까지만 해도 완성형 한글에서 "퀜"이라는 표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가 이제는 외면한다는 아래한글이 대세가 된 까닭도 조합형 한글로 "퀜"과 "뚫훍" 표기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초창기 출판 편집 프로그램은 조합형이 아니라 완성형만 지원해서, "퀜틴"을 표기하려면 "퀜"이라는 단어를 그림으로 만들어서 본문의 해당 위치에 놓아두어야 했다. 그 와중에 그림 위치가 잘못되어서 글자가 사라지는 문제도 빈번했으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제인에어> 초판에서도 "하얬다"가 "하_다"로 여러 번 잘못 나왔다.


그러다 보니 편의상 고유명사 표기를 바꾸기도 했으니, QUENTIN이라는 이름을 "쿠엔틴"으로 쓰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퀜틴"이라는 이름을 제대로 표기할 수 있는 지금도 "쿠엔틴 타란티노"와 "퀜틴 스키너"처럼 표기가 제각각이 된 이유는 그래서였다. QUENTIN BLAKE 역시 "퀜틴"과 "퀀틴"과 "퀸틴"까지 출판사마다 제각각이다.


현재 알라딘 국내도서에서 QUENTIN BLAKE로 검색하면 중복 포함 77종이 나오는데, 그중 "퀜틴"은 23종, "퀸틴"은 23종, "퀀틴"은 31종이다. 가장 혼란스러운 것은 살림어린이의 표기법인데, <세계 최고의 동화는 이렇게 탄생했다>에서는 "퀜틴", <단독 비행>에서는 "퀀틴", <발칙하고 유쾌한 학교>에서는 "퀸틴"으로 제멋대로이다.


그래도 달과 블레이크 콤비의 책을 가장 많이 간행한 시공주니어를 비롯한 대부분의 출판사에서는 "퀜틴"에서 "퀸틴"으로 갈아타는 것이 대세로 보인다. 하지만 사전의 발음과 다르면 잘못 아닌가 싶어 유튜브에서 BBC 뉴스를 들어 보니 진짜 "퀸튼"처럼 들리기도 한다. 결국 사전의 발음 표기보다는 현지 발음을 반영한 결과일까.


그렇다면 한때 "퀜"을 그림 파일로 만들어서 일일이 갖다 붙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출판사 편집자들로서는 살짝 억울할 수도 있겠다. 외국어 표기 원칙이야 어쨌거나 간에, "퀜"을 "퀀"이나 "퀸"으로 (또는 "하얬다"를 "하얗다"로) 살짝 다르게 표기하며 편리하게 작업했어도 굳이 누가 뭐라고 하지는 않았을 법하니 말이다.


오래 된 사람은 모두 알고 있듯이 처음에는 "알라딘"도 "앓랉딚"이었고, "나귀님"도 "낪궱닋"이었지만 표기가 어려운 까닭에 지금처럼 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국가를 운영하는 법과 원칙마저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린 지금의 시점에 와서 돌아보면 "퀜"의 표기 하나를 가지고 절절 맸던 과거지사야말로 웃음을 자아낼 수밖에...




[*] 국내 최고의 서점 YES24에서 고화질 미리보기로 살펴보니, <퀸틴 블레이크>의 22-23쪽에 나온 <스펙테이터> 표지에 대한 캡션에는 잘못된 부분이 있다. 영어 원서에는 아마 캡션이 없었겠지만 국내 독자의 편의를 위해 집어넣은 듯한데, 각 권의 표지에 나온 특집 기사명을 잘못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8쪽 왼쪽의 표지를 "<롤리타>, 1959"라고만 썼는데, 실제로는 나보코프의 소설이 아니라 "킹즐리 에이미스의 <롤리타> 서평"이 수록되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19쪽 아래 오른쪽의 표지를 "소비에트 작가들, 1965"라고만 썼는데, "데즈먼드 스튜어트의 기고문 '소비에트 작가 마을에서'"가 수록되었다는 뜻이다. 특집 기사가 부각된 호도 있고 아닌 호도 있으니 (예를 들어 캡션에서 빠진 19페이지 아래 왼쪽의 표지에서는 <스펙테이터>를 잔뜩 가진 아저씨가 그 호의 기고문 가운데 하나인 "아동서"를 꼬마에게 건네주는 장면을 재치 있게 묘사했다) 차라리 특집 기사가 있는 경우에만 내용을 요약하고, 주간지임을 감안하여 날짜 표기는 "1959년 11월 6일자"와 "1965년 8월 27일자" 등으로 써 주면 어땠을까 싶다. 그나저나 "퀸틴 블레이크 버전 '롤리타'"라니... 지금은 아동서 삽화가로 더 유명하지만, 잡지 표지로 경력을 시작한 퀸틴 블레이크의 폭넓은 활동 반경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일화다.(물론 지금쯤 어느 한구석에선가는 '변태 아동성애자 그림쟁이의 책 불매 운동'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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