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에 따르면 이번 경상도에서 일어난 산불이 유난히 크게 번진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나치게 울창한 숲이 지목되는 모양이다. 어린 시절 목격한 민둥산의 헐벗은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는 나귀님으로선 그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분석인데, 왜냐하면 '메아리가 살게시리 나무를 심자'라는 동요 가사마냥, 지금까지 나무는 무조건 울창해야 좋다고 여긴 까닭이다.
예를 들어 국민학교 시절에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반 전체가 옆 동네 야산으로 청소 봉사를 나가 보니, 잡초와 덤불 약간을 제외하면 그냥 흙바닥과 쓰레기뿐이었고 나무는 구경조차도 할 수 없었다. 그랬던 야산이 지금은 나무와 덤불이 무성해서 멀리서도 진한 초록색을 뽐내고 있으니, 수십 년 세월 동안 상당한 변화가 진행되었음을 짐작해 볼 만하다.
문득 지난번에 알라딘 중고샵에서 구입한 <한국의 산림 녹화 70년>이라는 책이 기억나서 꺼내 뒤적여 보니, 그런 수십 년간의 변화가 어떠했는지를 개략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산림은 일제시대와 육이오를 겪으며 사실상 황폐화되고 말았으며, 그 보호와 육성이 본격화된 것은 박정희 정권부터였다고 한다.(비난할 건 비난해도 인정할 건 인정하자!)
우선 산림청이 설립되고 조림 사업과 화전 금지를 비롯한 체계적인 정책이 실시되었다. 장작과 목탄 대신 석탄과 석유가 연료로 일반화되면서 벌목이 감소한 것도 산림 보호에는 큰 영향을 끼쳤다. 결국 오늘날의 울창한 산림은 상당 부분 인공 조림의 결과이지만, 그런 시도 중에서는 드물게 성공 사례이기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는 후일담도 있다.
마침 나귀님 사는 곳 근처의 관공서에 가 보면, 1980년대에 개관 기념으로 심어 놓은 느티나무가 마치 정자나무처럼 자라난 모습을 볼 수 있으니, 수십 년 세월이면 묘목이 아름드리 나무로 성장하기에 충분함을 알 수 있다. 이번에 산불 확산의 원인으로 지목된 울창한 숲도 그런 식으로 오랜 세월 방치되어 자라난 나무들로 이루어졌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뉴스에 따르면 조림 사업에만 몰두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임도 형성과 노목 제거를 비롯해서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과거에 아름드리 나무를 잘라내는 산림청의 행태를 비판하는 환경 단체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보도하는 뉴스가 여러 번 있었는데, 혹시 숲 관리 차원에서 늙은 나무를 어린 나무로 교체하는 것을 오해한 사례는 아니었을까.
결국 나무고 숲이고 간에 무작정 오래, 무작정 많이, 무작정 크게 만든다고 해서 만사형통은 아니라니, 어쩌면 세상사의 이치와도 비슷할지 모르겠다. 이번 산불 진화의 어려움을 놓고도 임도 형성과 장비 도입 같은 문제가 많이 지적되었는데, 제아무리 임도와 장비가 있더라도 꾸준한 관리가 없다면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있으니, 결국 비용의 문제가 아니려나.
그 사이에 도시 풍경은 예전에 비해 나무가 사라지고 콘크리트 천지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나무가 도로 들어선 야산도 대부분 개발되어 아파트가 들어섰기 때문이고, 좁은 정원에라도 꽃나무며 과일나무를 심어놓았던 단독주택도 대부분 사라지고 상가나 아파트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아까워서인지 감나무를 남겨놓은 집도 있지만, 이젠 열매가 익어도 따지 않는다.
또 어제는 벚꽃 소식이 궁금해서 동네 공원에 가 보았더니 화단과 벤치를 없애고 잔디 광장을 만들면서 굵은 벚나무까지 모두 베어버렸다. 결국 동네 주민들만 즐기던 '숨은 벚꽃 명소'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사진 찍기도 찍히기도 싫어한 나귀님이 2년 전 무슨 변덕에선지 촬영했던 사진 몇 장 속에만 남아 있는 풍경이 되고 말았으니 이래저래 씁쓸할 뿐이다.
1990년대 중반엔가 강원도 어딘가에 크게 산불이 났는데, 몇 달 뒤에 단체 여행으로 버스를 타고 동해안을 지나다가 한쪽에는 푸른 바다, 한쪽에는 검고 황량한 언덕이 펼쳐지는 구간에 들어서자, 방금 전까지 웃고 떠드느라 시끌벅적하던 실내가 조용해진 적이 있었다. 숲이나 나무에 대해서 별 관심 없던 일행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모두 숙연해졌던 셈이다.
삶과 죽음은 자연의 이치이니, 숱한 변화 속에서 무상함을 깨닫게 되는 것도 불가피한 일이다. 묘목이 자라서 거목이 되더라도 하루아침에 베어져 나가게 마련이니, 지난 수십 년간 자주 오가며 지켜본 관공서의 정자나무도 조만간 청사 이전과 함께 사라질 운명이다. 깊은 산속의 거목이라 해서 가혹한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것도 이번 산불로 분명해졌고.
이번 산불의 피해자 인터뷰를 보면 '전쟁이나 다름없다'고 표현한 경우가 많았는데, 강한 바람에 불덩어리가 날아다니며 피해를 키웠다는 증언을 감안해 보면 상당히 그럴듯한 비유처럼 들린다. 이번 산불을 계기로 자연의 위력을 새삼스레 실감하게 되었던 것처럼, 앞으로 수십 년 사이에 자연의 회복력이 드러나는 모습도 지켜볼 수 있기를 조용히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