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 막바지에 알라딘 중고샵에 <국역 요사> 상권과 하권이 있기에 구입했다. 사실은 "있기에"와 "구입했다" 사이에 "잠시 고민하다가"라는 첨언이 들어가야 맞겠다. 권당 정가가 6만 원이나 하는 비싼 책이다 보니, 중고가가 절반 가까이로 책정되었어도 여전히 부담스러운 가격이며, 솔직히 당장 필요한 책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고로는 원체 보기 드문 물건에, 지난번에 알라딘 서울대입구점에서인가 달랑 중권만 구입해 놓은 상태였고, 최근에는 처세의 달인 풍도의 전기를 읽으면서 요 태종과의 일화도 ("부처도 할 수 없는 일을 전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간언해 요나라 군대의 약탈을 중단시켰다) 접했으니, 고민 끝에 지르기로 했다.


애초에 구입을 망설였던 이유 중에는 완질이 있을 때에 일부만 빼서 구입해서는 안 된다는 예전 '오프라인' 헌책방 시절의 국룰(?)에 대한 기억도 있었다. 다만 이번에 <국역 요사>는 낱권 구입도 가능하도록 등록되었으니 셋 가운데 둘만 가져가도 잘못은 아니겠거니 싶었는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남은 한 권도 금방 팔린 듯하다.


지난번 서울대입구점에서도 <국역 요사> 중권을 보고 혹시 상하권은 없나 확인했더니, 검색은 되지만 재고는 없는 것으로 미루어 이미 누가 사간 직후인 듯했다. 혹시 지난번 구매자도 전3권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상하권만 구입했다가, 뒤늦게야 실수를 깨닫고 이번에야 중권을 구입해서 나귀님처럼 완질을 맞추게 된 것은 아닐지.


<요사>는 원나라 때 저술된 기전체 역사서로, <사기>부터 <명사>까지 중국의 역대 정사를 통칭하는 "24사" 가운데 하나다. 제목 그대로 거란이 세운 요나라의 219년(907-1125) 역사를 서술했으며, 본기 30권, 지 32권, 표 8권, 열전 45권, 국어해 1권으로 총 116권이다. 우리말 번역본은 원문 포함 B5 판형으로 총 2천 페이지이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삼국과 고려 관련 지명과 사항을 다수 수록하고 있어서 귀중한 자료가 되는 모양이지만, 애초에 편찬 기간이 짧기 때문에 내용의 흠결이 많아서 사료 가치에 대한 의문도 종종 따라다니는 모양이다. 심지어 번역 과정에서도 일부 사학자가 반대 의견을 제시해 난처했었다는 후일담이 역자후기에 나와 있었다.


지금도 <요사>를 이용한 연구가 줄줄이 나오는 상황에서, 완벽하지 못한 사료라고 해서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이 역자의 논리인데, 우리에게는 가장 요긴할 법한 "이국외기" 중 "고려" 편만 해도 <고려사> 등의 사료와 맞지 않는 내용이 상당수라서 일일이 역주로 바로잡고 있으니 골치가 아프기는 해 보인다.


나귀님은 구입 직후 "본기" 중에서 태조와 태종(실제로 풍도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항목을 읽어보았고, "열전" 중에서 뒷부분의 문학, 능리, 탁행, 열녀, 방기, 영관/환관, 간신, 역신, 이국외기 항목을 읽고 나서, 마지막으로 거란어 어휘를 설명한 "국어해" 항목까지 읽어보았는데, 무미건조한 사실 나열 위주라 별 재미는 없었다.


역사통 선배의 말에 따르면 "24사" 중에서는 처음 네 가지인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 정도만 읽을 만하고 나머지는 그냥 그렇다더니만, <요사>의 경우만 보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닌 듯하다. 다만 호기심 많은 나귀님 입장에서는 그저 이름만 알고 있었던 역사서가 어떤 내용인지 알게 된 것만 해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24사"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30년 전 봉천동 헌책방 삼우서점에서 파란 천으로 장정한 축쇄영인본을 구경했을 때였다. <사기> 완역본조차 나오기 전이라 "열전"만 겨우 읽었을 때였으니, 그보다 수십 배, 아니, 수백 배는 더 많아 보이는 역사서의 육중한 외관 앞에서 정말이지 기가 질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박영문고로 나온 세 권짜리 <십팔사략>을 우연히 구해서 읽어보니, 중국 정사 "24사" 가운데 <사기>부터 <신오대사>까지 "18사"의 내용을 축약한 것이라기에 다시 한 번 관심이 생기게 되었다. <십팔사략>은 중국보다 오히려 한국과 일본에서 더 인기였다는데, "24사" 자체가 귀한 변방에서 일종의 대용품이었던 듯하다.


가끔은 낯선 헌책방이 눈에 띄어 들어가 보니 똑같은 장정의 "24사" 우리말 번역본이 있기에 반색하며 집어드는 (그러나 어째서인지 항상 책을 펼쳐보기 직전에 깨어 버리는!) 꿈을 꾼 적도 있었으니, 도대체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무척이나 궁금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느새 "24사" 가운데 3분의 1쯤은 번역서가 나와 있다.


<사기>는 까치(1994-1995)에서 전7권(완역은 아니라고 한다)으로 간행된 것을 시작으로, 김원중이 민음사(2015)에서 전6권으로 완역했고, 신동준이 위즈덤하우스(2015)에서 전6권으로 완역했으며, 다른 몇몇 출판사에서도 완역을 목표로 삼아 부분 번역서를 내놓았다고 알고 있다. "열전" 등의 부분 번역서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한서>는 진기환이 명문당(2016-2021)에서 전15권으로 완역하고, 이한우가 21세기북스(2020)에서 전10권으로 완역했다. <후한서>는 역시나 진기환이 "본기"와 "열전"만 명문당(2018-2019)에서 전10권으로 번역했고, 어째서인지 "본기"만 번역한 것도 나와 있다. <한서>와 <후한서> 모두 "열전"만 선역한 것들은 예전부터 있었다.


<삼국지>는 김원중이 신원문화사(1994)에서 전7권으로 완역하고, 나중에 민음사(2007)에서 전4권으로 재간행했다가, 지금은 휴머니스트(2018)에서 전4권으로 재간행했다. 역시나 진기환이 명문당(2019)에서 전6권으로 완역했으며, <연의>의 인기 때문인지 그 외에도 전자책이나 주문 제작으로 간행된 번역본도 다수 있는 모양이다.


<수서>는 지만지(2020-2023)에서 전13권으로 완간했지만, 원체 작은 판형에 값비싼 시리즈라서 분량은 6천 페이지에 가깝고 가격은 50만 원에 가깝다. <요사>는 단국대학교출판부(2012)에서 전3권으로 완역했고, <금사>도 단국대학교출판부(2016)에서 전4권으로 완역했다. 결국 24사 가운데 7종이 전체, 또는 일부 번역된 셈이다.


비록 일부 번역서에 대해서는 오역 비판도 적지 않은 듯하지만, 어쨌거나 나귀님 같은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는 감지덕지일 수밖에 없다. 물론 <요사>의 경우에도 실제로 읽어보니 기대했던 것만큼 흥미진진하거나 유익하지는 않다는 점이 살짝 의외이기는 했지만, 아직 번역되지 않은 중국 정사들도 읽어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24사"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고, <십팔사략>이며 <자치통감> 같은 번역서를 통해서 중국사의 대강을 파악하려 나름대로 노력한 지 오래이지만, 아직 모르는 것이 많으니 씁쓸한 일이다. 물론 그 사이에 현직 대통령 탄핵 심판은 세 번, 전직 대통령 구속은 네 번, 전직 대통령 자살도 한 번이란 사실만큼 씁쓸하기야 할까마는.


<국역 요사>에서 굳이 단점을 지적하자면 각주 색인은 있지만 본문 색인이 없다는 점이다. 마침 "국어해"에서 뱀의 말을 알아듣는(파셀텅!) "신속고"라는 인물이 언급되었기에 관련 본문을 찾아보려 했지만 색인이 없어서 애를 먹었다. 편집 구조상 전체 색인 작성이 어려워서라고 설명했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아쉬울 수밖에.


대학 출판부에서 내놓은 학술서에 걸맞게(?) 오탈자가 종종 눈에 띄는 것도 아쉬운 점이다. 역자후기에서까지 "요나를 연구"한다는 오타가 나왔으니, 번역자의 입장에서는 두고두고 민망하지 않겠나. 죄인이 감옥에 "갖혀" 있었다는 오타도 나온 것을 보면, 단지 교정만이 아니라 번역자의 우리말 실력 자체부터 문제인 듯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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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출판사 이름을 가지고 시비를 걸기 시작했으니, 몇 년 전부터 또 하나 짜증났던 이야기를 해 보자면, 최근 들어 신생 소형 출판사가 늘어나면서 나귀님 눈에는 영 생소한 업체들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했는데, 그중에서도 몇 군데는 이름이 어쩐지 서로 엇비슷해 보여 헛갈리더라는 거다.


특히나 고약한 것은 "00의 00"라는 형식의 출판사 이름인데, 그리 흔치 않을 듯하지만 의외로 여러 개이고, 표지 디자인이나 출판 성향까지도 엇비슷해 보이다 보니, 나귀님 입장에서는 더 혼동하기 쉬워 보인다. 바로 "사월의책", "오월의봄", "봄날의책", "남해의봄날"이라는 출판사이다.


우선 "사월의책"은 철학과 사회과학 위주로 간행하는 모양인데, 맨 먼저 생각나는 것은 당연히 "이반 일리치 전집"과 "악셀 호네트 선집"이다. 최근에 나귀님이 구입한 리처드 로티의 책도 여기서 나왔다. 물론 가장 유명한 책이라면 한때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신정아의 회고록이지만.




"오월의봄"도 철학과 사회과학 위주로 간행하다가 지금은 전자보다 후자에 더 열심인 듯한데, 하나같이 시의적인 내용이니 의외로 수명이 짧을 수 있어 보인다. 바깥양반이 좋아하는 일레인 스캐리와 사라 아메드는 여전히 나오지만, 나귀님이 좋아하는 토니 주트 책이 절판이라니 아쉽다.




"봄날의책"은 문학 위주로 간행하는 모양인데, 요즘 들어서는 해외 여성 작가에 집중하는 모양이다. 마니, 아랍, 북극, 침묵 등 초기에 나온 깔끔한 표지의 기행 에세이 시리즈가 계속되기를 바랐던 나귀님의 입장에서는 이후의 행보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출판사 가운데 한 곳이기도 하다.




"남해의봄날"은 문학, 그중에서도 에세이 위주로 간행하는 모양인데, 특이하게도 경남 통영에 있는 지방 출판사라고 한다. 아쉽게도 나귀님 취향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듯 보여서 지금껏 구입한 책도 하나 없고, 아마 앞으로도 구입할 만한 책은 딱히 없을 듯하다. 그냥 헛갈리기만 할 뿐.




물론 앞서의 글에서 밝혔듯 閣, 館, 堂, 院, 社로 끝나는 옛날 출판사 이름도 항상 서로 구분하기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역시나 앞서의 글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이름부터 진부한 데다가 출판 성향이나 표지 디자인 등에서 뚜렷한 인상을 심어주지는 못했음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이쯤 되면 나귀님은 쌍팔년도에도 "창작과비평"과 "문학과지성"을 헛갈렸을 만한 사람이 아니냐는 의문도 일각에서 제기될 법한데,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도 종종 헛갈리곤 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문학과지성" 특유의 책등 "빨간 띠"가 출판사의 정체성을 보완하는 중요한 장치였던 거다.


똑똑한 작가인 노라 에프런도 역시나 "00의 00"라는 제레미 아이언스 주연의 영화 제목을 (다시 확인해 보니 <운명의 역전>이다!) 기억 못해 헤맨 적이 있었다고 썼었으니, 이건 단순히 지능이나 노년의 문제만이 아니라 애초의 제목 짓기 과정에서 창의성의 문제도 있지 않을까 싶은 거다.


물론 출판사만 탓할 일은 아닐 수도 있다. 어제 우연히 네이버 연예 뉴스에서 최신 드라마 인기 순위를 확인해 보니 <독수리 5형제를 부탁해>와 <모텔 캘리포니아>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창의성 부족은 비단 출판계뿐만이 아니라 문화계 전반에 만연한 현상이라고 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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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알라딘 북펀드 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아베 코보의 <벽>이 재간행될 예정이라기에 어떤 눈 밝은 출판사인가 궁금해 확인했더니 저놈의 '마르코폴로'라는 출판사였다. 그렇잖아도 얼마 전에 <동방견문록> 저자 '마르코 폴로'에 관한 논픽션을 검색했더니만, 엉뚱하게도 이 출판사의 책만 줄줄이 검색되어 짜증이 치밀었다.


이 정도로 유명한 인물의 이름을 가져다 쓰려면 하다못해 '뿌쉬낀하우스'처럼 살짝 변형이라도 하든가, 다짜고짜 그 이름을 쓰는 건 너무하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던 거다. 그런데 잠시 후에 북펀드 중에 제바스티안 브란트의 <바보들의 배> 재간행 소식이 있길래 살펴보니, 이건 또 출판사 이름이 '구텐베르크'라고 나온다.


이쯤 되면 요즘에는 출판사 이름 정하는 데에서부터 일찌감치 창의성이 바닥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물론 -閣, -館, -院, -堂, -社 등으로 끝나는 옛날 출판사 이름이 훨씬 좋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르코폴로'나 '구텐베르크'가 더 개성적이거나 인상적인 이름이라 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알라딘에서 '뿌쉬낀'으로 검색하면 '뿌쉬낀하우스'도 덩달아 검색되어 불편하지만 (그런데 '푸시킨'이라고 검색하면 '뿌쉬낀'이라고 표기한 책도 줄줄이 검색되는 반면 '뿌쉬낀하우스'는 검색되지 않는다!) 그래도 이쪽은 러시아 전문 출판사라는 정체성에 어울리는 반면, '마르코폴로'와 '구텐베르크'는 그런 것조차 아닌 듯하다.


이건 아동서 전집 출판사인 한국톨스토이, 한국헤르만헤세, 한국셰익스피어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도대체 그 출판사에서 간행하는 책과 그 출판사의 이름에 들어간 작가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의문일 수밖에 없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흠좀무'한 사실은 이 세 출판사가 사실은 똑같은 회사의 계열사인지 브랜드라는 점이다.


결국 '마르코폴로'건 '구텐베르크'건 '한국톨스토이'건 '한국헤르만헤세'건 '한국셰익스피어'건 간에, 해당 인물의 사상이나 유산과는 무관하게 그저 명성만을 차용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생긴다. 물론 '까치'도 조류 책만 내는 것까진 아니고, '동문선'도 한국 문학만 내는 것까진 아니지 않느냐고 반박하면 솔직히 할 말은 없다만.


그나저나 유명인의 이름을 출판사의 이름으로 차용하는 지금과 같은 풍조가 계속될 경우, 나중에 가서는 '한국보리스파스테르나크'나, '한국스베틀라나알렉시예비치'나, '한국장마리귀스타브르클레지오'나, '한국토마스트란스트뢰메르'도 나올 법하다. 당연히 '한강'이나 '한국한강'이나 '노벨한강'은 거의 기정 사실처럼 보이고...



[*] 안부공방 이야기를 하려다가 얼떨결에 출판사 이름 이야기만 하다 끝나버렸다. <벽>은 1970년대에 삼성출판사에서 간행한 세로쓰기 전집에 수록된 번역본으로 갖고 있는데, 완역이 아닌가 싶어 어제 다시 꺼내 확인해 보니 "S. 카르마 씨의 범죄"부터 "바벨탑의 너구리"까지 여섯 편이 모두 수록된 완역본이었다. 책장을 뒤적이다 보니 1977년에 나온 신조문고 일어판 <壁>도 한 권 나온다.(나귀님이 안부공방 좋아했네!) 새로 나온다는 책의 번역자는 과거에 <아베 고보 연구>라는 학술서도 내놓았는데, 고유명사 표기 등 기본적인 부분에서 오류가 눈에 띄어 딱히 좋은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번역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뭐, 어차피 이것밖에 없으니 살 사람은 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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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에 바깥양반이 TV에서 방영하는 양궁 예능 프로그램을 열심히 보기에 나도 오며가며 띄엄띄엄 보게 되었다. 역대 올림픽 메달리스트 중에서 이미 은퇴한 선수들을 불러내서 개인전을 펼친 다음, 아직 현역인 선수들까지 추가해서 단체전을 펼치는 구성이었다.


제목부터 "전설의 리그"이다 보니, 바깥양반은 김수녕 정도는 나와야 맞지 않겠나 생각한 모양이고, 나귀님은 김진호까지는 아니더라도 서향순 정도는 나와야 맞지 않겠나 생각했었는데, 결국 두 명 모두 나오지 않아서 아는 얼굴은 기보배와 안산(!)뿐이었다.


양궁의 특성상 실력보다는 실수로 승부가 결정되는 경우가 역시나 많았는데, 이번 프로그램에서는 은퇴 선수들이 종종 체력 저하로 오발하는 부분이 긴장감을 주는 재미 요소였다. 물론 한편으로는 세월의 야속함을 실감하며 안타까운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그런데 활과 화살 이야기가 나왔으니 언젠가 활집과 화살집의 옛날 명칭에 관해서 알아보았던 기억이 난다. 수년 전 판소리 "수궁가"의 한 대목을 차용한 "범 내려온다"라는 노래가 크게 유행했을 때에 그 정확한 가사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뒤져본 까닭이었다.


얼핏 듣기에는 "동화 같은 앞다리에 천둥 같은 뒷다리로"라는 가사로 오해하기 쉬운 부분인데, <동편제 판소리 창본>(송순섭 & 전형대 편저, 한샘, 1991)에 나온 바에 따르면 정확하게는 "동개(筒介) 같은 뒷다리, 전동(箭筒) 같은 앞다리"(167쪽)라는 가사이다. 


동개(筒介, 또는 筒箇)는 "활과 화살을 넣어 등에 메는 기구"이고, 전동(箭筒, 또는 箭筩)은 "화살을 넣는 통"이라고 각주가 붙었는데, 모양으로 설명하자면 동개는 활의 모양[B]대로 넓고 납작한 "활집"[D]이고 전동은 원통형의 "화살통"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판소리에서 호랑이의 굵은 뒷다리(U) 모양과 가는 앞다리(V) 모양을 동개와 전동에 빗대어 그럴싸하게 비유했다고 할 수 있겠다. 판소리 사설은 워낙 천차만별이라 똑같은 "수궁가"라 해도 이 대목 자체가 없는 경우가 있는데, 이 책에는 정확히 나왔다.


<동편제 판소리 창본>은 꽤 오래 전에 아현국민학교 앞 헌책방에서인가 구입한 책인데, 아마 나귀님이 처음으로 산 판소리 사설집이었을 것이다. 공편자 송순섭은 동편제에서 송만갑의 계보인 박봉술의 직제자이고 현재 무형문화재 "적벽가" 보유자라 한다. 


판소리 사설집은 이 책 외에 민중서관의 고전문학전집으로 나온 신재효 판본과 뿌리깊은나무 판소리 음반 가사집의 재간행 판본을 갖고 있다. 훗날 박이정에서 각종 이본을 총합한 시리즈도 내놓았던데, 탐은 나지만 분량이 너무 많아 아직 구입하지 못했다.


판소리며 민담이며 하는 구비문학 관계 자료를 한때 열심히 사 모았는데, 이제는 뭐가 있는지도 기억나지 않으니, 아무래도 헌책방에 도로 뱉어놓을 때가 된 것도 같다. <동편제 판소리 창본>은 중고 가격도 비싸던데, 차라리 이번 기회에 파는 게 나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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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양반이 친구들과 약속 있어 연남동에 간다기에 문득 희곡 전문 서점이 그곳에 있다는 소문을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1인당 1만 5천 원 정도로 생각하고 가면 배불리 읽을 수 있고, 추가 요금을 내면 노래를 곁들여 뮤지컬로 각색해 준다고도 하던데, 가보지 않았으니 진짜인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알라딘에서 우연히 지만지 희곡선 가운데 '박준용 번역 희곡선'이라는 이름으로 전15권짜리 시리즈가 나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1990년대에 포도원이라는 출판사에서 '포도원 희곡선'이라고 해서 제1집 전20권, 제2집 전10권, 도합 30권으로 간행된 것 중 일부이다.


포도원에서는 서른 권이나 나왔는데 지만지에서는 그중 절반만 재간행된 것으로 미루어, 아마 절판된 사이에 다른 출판사에서 간행되어 저작권 계약이 불가한 작품이 있어서인가 짐작했었는데, 지금 다시 확인해 보니 제2집 전10권 중에는 박준용의 번역이 아닌 것도 제법 되었던 모양이다.


확인해 보니 전30권 가운데 박준용 번역은 스물두 권이고, 나머지 여덟 권은 다른 번역자가 담당했다. 참고로 포도원 희곡선 전30권과 그중 지만지의 박준용 번역 희곡선 전15권으로 재간행된 작품(* 표시)을 목록으로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번역자 이름이 없는 것은 박준용의 번역서다.


1. 세추앙의 착한 여자 (베르톨트 브레히트)

* 2. 서쪽나라의 멋쟁이 (존 밀링턴 씽)

* 3. 쥬노와 공작 (숀 오케이시)

4. 미스 쥴리 (아우구스트 스트린베리히)

* 5. 마라/싸드 (페테르 바이스)

* 6. 칭칭[헬로 굿바이] (시드니 마이클스)

7.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존 오스본)

* 8. 미친 사람들 (존 오튼)

* 9. 바람둥이 알피 (빌 노턴)

* 10. 희한한 한 쌍 (닐 사이먼)

* 11. 굿 닥터 (닐 사이먼)

* 12. 플라자 스위트 (닐 사이먼)

* 13. 태양제국의 멸망 (피터 셰퍼)

* 14. 요나답 (피터 셰퍼)

15. 안내놔? 못내놔! (다리오 포)

* 16. 카사블랑카여 다시 한번 (우디 알렌)

* 17. 리타 길들이기 (윌리 러셀)

18. 말괄량이 길들이기 (윌리엄 셰익스피어)

19. 맥베스 (윌리엄 셰익스피어)

* 20. 브라이튼 해변의 추억 (닐 사이먼)

21. 빌록시 블루스 (닐 사이먼) [김철리 옮김]

22. 브로드웨이 바운드 (닐 사이먼) [김철리 옮김]

23. 꿀맛 (샐라 딜래니) [정진수 옮김]

24. 스니키 휘치의 죽음 (제임스 로젠버그) [정진수 옮김]

25. M. 나비 (데이빗 헨리 황) [정진수 옮김]

26. 웃음 넘치는 교수대 (잭 리차드슨)

* 27. 폭력시대 (쥴스 파이퍼)

28. 나는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 (닐 사이먼) [김철리 옮김]

29. 리틀 말컴 (데이빗 홀리웰) [김철리 옮김]

30. 프랭키와 쟈니 (테렌스 맥널리) [김철리 옮김]


결국 셰익스피어와 스트린베리 같은 대가들의 작품을 제외하고 현대 작가들 위주로 재간행된 셈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운 점은 닐 사이먼의 걸작인 '브라이턴비치 3부작' 가운데 첫 작품만 박준용 번역인 관계로 지만지에서도 결국 <브라이턴 해변의 추억>만 재간행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나귀님은 포도원 희곡선 전30권 가운데 스물세 권을 갖고 있는데, 셰익스피어와 브레히트 등 중복되는 작품은 구입하지 않은 까닭이다. 지금 다시 구글링해 보니, 몇몇 작품은 1980년대에 연극 전문 출판사 예니에서 '박준용 번역 희곡 선집'이라는 제목으로 합본 간행된 적도 있었던 듯하다.


재간행된 '박준용 번역 희곡선'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었던 작품은 역시 닐 사이먼의 <희한한 한 쌍>이었다. 포도원 판본에서는 똑같은 페이지를 두 번 인쇄한 사고가 벌어져 한 페이지 분량이 빠졌던 것으로 기억한다.(결국 나귀님이 직접 번역하고 종이에 출력해서 오려 붙여놓았다!)


<에쿠우스>로 유명한 피터 셰퍼의 <요나답>도 요즘 분위기에서는 각별히 주목받을 만한 작품이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다윗 왕의 아들 암논이 이복 누이 다말을 강간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 희곡은 그 과정에서 암논을 부추겼던 모사꾼 요나답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사태의 전말을 관찰한다.


<바람둥이 알피>도 최근 정우성 사생아 논란에 다시 생각난 작품이다. 바람둥이 남자가 만나는 여자마다 줄줄이 임신시키지만 결혼은 거부하며 끝까지 얌체처럼 군다는 내용이다. 1966년 마이클 케인, 2004년 주드 로 주연으로 두 번이나 영화화되었고, 소니 롤린스의 사운드트랙도 유명하다.


그래도 최고의 걸작이라면 닐 사이먼의 '브라이턴비치 3부작'이다. 지난번 비상 계엄 당시 부당한 명령과 복종의 의무 앞에서 우왕좌왕했던 군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빌록시 블루스>의 내용을 떠올린 기억이 난다. 육군 훈련소를 배경으로 의무와 양심의 충돌을 보여주는 꽤 '웃픈' 내용이다.


<브라이턴 해변의 추억>도 3부작 모두의 주인공이자 닐 사이먼의 분신인 소년 유진의 관점으로 전개된다. 대공황 시절인 1930년대에 부모님과 형을 포함해 네 식구가 살던 집에 이모와 두 딸이 더부살이를 하게 되면서, 모두 일곱 식구가 복닥복닥 살아가며 갈등과 화해를 겪는다는 내용이다.


성에 대한 호기심이 충만한 주인공 소년이 사촌 누나의 목욕 장면을 훔쳐보려 한다는 대목이 지금으로선 불편과 분노를 자아낼지도 모르겠지만, 초연 당시에는 오히려 웃음만 자아냈던 것처럼 보인다. 초연 당시 주인공은 훗날 <패리스 뷸러의 휴일>로 스타가 된 배우 매슈 브로더릭이었다.


희곡으로만 읽을 때에는 몰랐는데, 유튜브의 연극 공연 영상을 보니 <브라이턴 해변의 추억>은 대사 하나하나마다 관객이 웃음을 터트릴 정도로 반응이 뜨거운 작품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갑분싸' 장면에서는 방금 전의 웃음소리가 싹 가시고 객석이 고요해지며 숙연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어떤 장면인가 하면, 네 식구 먹고 살기도 빠듯한 살림에 세 식구가 추가되어 일곱 식구가 식사를 하는데, 간(肝) 요리가 식탁에 나오자 모두들 이 맛없는 걸 왜 자꾸 내놓느냐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막내아들이 고기를 먹고 싶다고 불평하자, 아버지도 거들며 왜 맨날 간만 사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어머니가 참다 폭발한 듯 이렇게 대꾸한다. "우리 돈으로 일곱이 먹으려면 간밖에는 못 사니까 그렇지!" 그러자 불평하던 식구들은 입을 다물고, 티격태격하는 것 외에는 별 문제 없어 보이던 가정의 힘겨운 현실이 드러나는 순간 관객도 놀란 듯 침묵을 지키면서 무대를 주시한다.


희곡은 어디까지나 뼈대일 뿐이고, 배우의 연기와 객석의 반응까지 곁들여져야만 비로소 온전한 연극이 완성되는 것임을 깨닫게 해준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평생 단 한 번도 돈 내고 연극을 본 적은 없이 희곡만 열심히 사고 읽은 나귀님의 입으로 말하자니 뭔가 좀 민망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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