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디세이> 개봉에 맞춰서 알라딘에서 개설한 "오뒷세이아" 이벤트 페이지를 보니 알라딘 자체 제작 티셔츠 2종이 나온다. 그중 하나인 "항해" 티셔츠의 범선 그림이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해서 지난번에 쓴 글 말미에 지적질했는데, 오늘 다시 생각나서 확인해 보니 무슨 이유에서인지 문제의 "항해" 티셔츠는 현재 품절이라서 8월 13일에 재입고된다고 한다.


나귀님의 지적질에 뒤늦게야 실수를 깨닫고서 그림을 수정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항해"가 "투구"보다 더 인기가 많았던 까닭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투구"에 나온 갤리선이 호메로스 서사시의 시대 배경에 어울리는 선박인 반면, "항해"에 나온 범선은 (돛과 돛대의 모습을 보면 '바크선'이라고 해야 할까?) 누가 봐도 근대의 선박이라고 해야 맞을 거다.


서사시의 제목이자 이번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오디세이"(the Odyssey)가 종종 "모험"이나 "방랑"이란 의미로도 사용됨을 감안한다면, 그 영어 단어를 크게 새겨 넣고 바크선인지 클리퍼선인지를 집어넣은 "항해" 티셔츠도 '일반적인 의미의 항해를 뜻했을 뿐'이라고 둘러댈 수 있겠지만, 하필 바로 밑에 저 서사시 원문을 적어 놓았으니 어이없는 실수가 되겠다.


비유하자면 충무공 탄신 기념이랍시고 알라딘에서 티셔츠를 만들었는데, 맨 위에는 "한산대첩"이라고 쓰고, 맨 아래에는 "한산섬 달 밝은 밤에"로 시작되는 유명한 시조의 첫 구절을 적은 다음, 막상 그 사이에는 임진왜란과는 무관한 현대식 항공모함 그림을 떡하니 박아놓은 것과 유사한 정도의 고증 오류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진짜로 그랬다면 난리가 났겠지).


그나저나 평소에는 둔감한 편인 나귀님께서 남들이야 무심코 지나칠 법한 범선의 모양에 대해서 유독 주목한 까닭은, 마침 며칠 전에 어떤 범선의 정체에 대해 구글링해 보았기 때문이다. 실베스터 스탤론의 출세작인 영화 <록키>의 저 유명한 "훈련 장면"에서 막판에 부둣가를 질주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 옆으로 늘어선 선박들 중에 꽤 큰 범선이 한 척 있었다.


영화가 1976년작인데 과연 그때도 현역인 범선이 있었을까? 문득 궁금해져서 구글링해 보니 저 범선은 '모슐루'(Moshulu)호라는 7,000톤급 강철 바크선이라 한다. 1904년 건조되어 곡물 운반선으로 활약하다 1940년대 후반 퇴역했고, 이후 수상 곡물 창고로 사용되다가 <록키> 등장 당시에는 수상 식당으로 개조되었으며, 지금도 필라델피아 항구에 남아 있다 한다.


돛대 네 개짜리 범선이기는 하지만 목재가 아니라 강철 선체인 까닭에 무려 120년 넘도록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었던 것인가 싶기도 하다. 길이가 120미터에 너비가 14미터로 덩치가 워낙 크니 퇴역 후에도 창고며 식당으로 쓸모가 있는 모양이다. 이처럼 퇴역 후 다른 용도로 활용된 선박의 사례라면, 서울 망원동 한강변에 있는 해군 군함 개조 전시관도 생각난다.


외국에는 퇴역 선박을 수상 호텔로 개조한 경우도 있다고 하고 (그 명칭은 '보트 + 호텔 = 보텔'이니, 우리나라 같으면 또 이상한 데에서 유래한 명칭이라며 페미니즘 논문이 한 편 나올 법하다) 특히 프랑스 파리에서는 센 강에 띄운 낡은 바지선을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개조해서 저소득자용 집배로 만든 일화가 유명해서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책까지 나왔었다.


여기서 한 가지 아이러니는 현대 건축의 거장으로 추앙되는 르 코르뷔지에도 아줌마들에게는 '뭘 모르는 사람' 취급 받기 십상이란 점이다. 알랭 드 보통의 <행복의 건축>에 나온 이야기로 기억하는데, 그가 지은 주택은 건축 미학 면에서는 뛰어난 건물인지 몰라도 막상 살기에는 불편해서, 공장 사택 같은 경우에는 애초의 설계와 달리 천차만별로 개조당했단 거다.


제아무리 위대한 건축가의 기발한 생각조차도 실생활의 불편함 앞에서는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으니, 길어야 4-5년에 불과한 임기 동안 부동산 정책을 쥐락펴락하려는 대통령이며 국회의원의 삽질은 당연지사일지도 모르겠다. 마침 며칠 전에 한 국회의원이 외국에서 노후 선박을 주택으로 개조하듯 노후 버스를 주택으로 개조해 청년층에 공급하자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애꿎은 청년층을 희생양 삼는다며 비난이 빗발치자 재빨리 발언을 철회한 모양이니 한심한 일이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그 결과물은 외국에서 빈곤층 주거지인 트레일러파크와도 유사할 터이니 반가울 리 없다. 다만 최근 캠핑카 방치가 골치인 지자체도 많다니, 차라리 그걸 다 몰수해 만든 트레일러파크를 헐값 분양하자 제안했다면 반응이 달랐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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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뜩이나 폭염이 한창인 와중에 알라딘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무려 세네카의 책이 1위를 차지하는 기현상이 벌어지는 중이다. 기후 변화 때문인가, 아니면 또 리센느 때문인가. 이미 붓다와 쇼펜하우어 책이 한 번씩 차지하고 내려간 다음이니 세네카라고 해서 예외로 칠 수는 없겠지만, 여기서의 문제는 그 세네카 책이 뭔가 함량 미달의 편역서로 보인다는 점이다.


문제의 세네카 책은 자기계발 콘텐츠로 구독자 90만 명을 찍었다는 유튜버 하와이대저택이 편저했다. 나름대로는 감명 받은 책이라고 해서 세네카의 저술을 직접 번역하고 재구성했다는데, 문제는 원문에 충실하지도 않고 뚜렷한 의도가 드러나지도 않아 영 애매하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세네카의 책도 아니고, 하와이대저택의 책도 아닌 애매한 물건일 뿐이다.


보통 고전을 편역한다면 완역과 달리 편역자 나름대로의 의도가 있을 것이다. 만약 나귀님더러 세네카의 저술을 편역하라면, 오늘날의 국내 독자에게는 영 생소할 수밖에 없는 로마 제국 당시의 인명과 관직명 같은 각종 고유명사를 모두 발라내고,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도 충분히 일리가 있을 법한 내용만 선별해서 어느 잘난 꼰대의 조언처럼 꾸며내고 말겠다.


그런데 문제의 책은 완역본인 천병희 번역서와 비교했을 때 내용을 군데군데 덜어내고 다르게 연결해서 뭔가 자연스럽지 않다. 일러두기에는 영역본을 대본으로 삼았다고 하지만,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에 있는 그 원문과 대조하니 그쪽과도 일치하진 않는다. 종종 축약과 첨언이 등장하다 보니 원래의 문맥과 사뭇 달라져 오해를 야기할 만한 부분도 없지 않다.[*]


세네카의 대화편에는 장절 구분이 있어서 편역서라면 그 출처를 표시하게 마련이고, '성공론' 분야의 편역서도 일부에선 이런 규약을 따랐는데, 이 책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분명히 세네카의 말과 비슷하게 시작하지만 곧이어 생소한 문장이 연이어 등장하는데, 이게 과연 다른 부분에 나온 세네카의 말을 가져온 것인지, 아니면 편저자의 첨언인 것인지 알 수 없다.


세네카의 대화편에도 애초의 문맥이 있었음을 감안하면, 편역서라고 한들 내용을 삭제하거나 순서를 뒤바꾸는 것이 항상 정당화될 수는 없다. 장절로 그 출처를 표시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도 그래서이니, 이를 통해 편역자가 어떤 의도와 논리로 세네카의 대화편을 재구성했는지를 확실히 보여주는 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편저자의 첨언이 과도하게 섞이면 문제다.


편저자의 독창적 해석을 내세울 의도였다면 차라리 해설서를 쓰는 게 맞다. 예를 들어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처럼 인용문을 내놓고 해설을 덧붙이는 방식이면 충분했을 텐데, 세네카의 텍스트라고 해놓고서 실제로는 누락과 첨언이 많다는 것은 문제일 수밖에 없다. 만약 하와이대저택의 유튜브 콘텐츠를 누군가 이처럼 멋대로 편집해 유포하면 수긍할 수 있을까?


여하간 나귀님 기준으로는 절대로 세네카의 책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이상한 편역서인데, 이런 책을 왜 만들고 왜 사는지 의문이다. 물론 하와이대저택은 '편역'이라는 말로 무사히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다. 지금도 영화 <오디세이> 개봉에 맞춰 각종 '편역서'가 난무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걸 읽은 독자라면 어디 가서 '세네카를 읽었다'고 자부하진 말아야 맞겠다.


이번 일로 인해 또 하나 걱정스러운 점은 앞으로의 부작용이다. 세네카의 말과 편저자의 말이 뒤섞인 책이 무려 베스트셀러씩에 등극했으니, 머지않아 양쪽의 말을 구분할 수 없는 까닭에 원문에는 없었던 편저자의 말이 세네카의 말로 와전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차라리 저 유튜버가 이미 여럿 나온 세네카 원전 번역서를 추천했다면 그 진정성도 인정했을 텐데.


그나저나 나귀님이 보기에 가장 큰 아이러니는 하와이대저택의 세네카 편역서가 무려 16,200원인데 천병희의 대화편 4종 완역본은 15,300원이라는 점이다. 비유하자면 재료도 덜 들어가고 조리도 애매한 음식을 더 비싸게 먹는 셈이니, 결과적으로는 독자만 손해 아닐까. 물론 그 독자가 하와이대저택의 구독자라서 군말 없이 책을 산다면 편저자에게는 이득이겠지만.


나귀님이야 저 편역서를 알라딘 미리보기로만 살펴보았으니 다음 구절도 거기 들어 있는지 여부는 모르겠지만, 뜬금없는 세네카 책 구매자들이라면 한 번쯤 귀담아 듣기 바란다. "더 나은 것이 다수의 마음에 든다면 좋으련만 인간은 그렇지가 못해요. 군중의 마음에 든다는 것은 곧 그것이 최악이라는 증거니까요."("행복한 삶에 관하여" 2장 1절, 천병희, 169쪽)




[*] 예를 들어 다음 구절에서 << >>로 표시한 대목을 원전 번역과 비교해 보면, 오히려 저자가 전달하려는 핵심 내용을 편역자가 빼먹은 셈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1. 하와이대저택 편역서:


아리스토텔레스조차 자연을 향해 따졌다. 어떤 동물에게는 수백

년을 허락해 놓고, 인간에게는 왜 이토록 짧은 시간만 주었느냐

고.


<< 그러나 전제 자체가 틀렸다.


문제는 시간의 양이 아니다. 쓰임이다. >>


거대한 왕의 재산도 나쁜 주인의 손에 들어가면 순식간에 

흩어진다. (18쪽)



2. 천병희 번역서:


아리스토텔레스도 자연에 대해 철학자답지 않게 시비를 걸었지요

. "자연은 동물에게는 인간보다 다섯 배 또는 열 배나 오래 살도

록 수명을 넉넉히 주었거늘 그토록 많은 일을, 그토록 큰일을 하

도록 태어난 인간에게는 그토록 짧은 수명을 정해놓다니" 하고 

말이오.


<< 그렇지만 우리는 수명이 짧은 것이 아니라 많은 시간을 낭비

하고 있는 것이오. 인생은 충분히 길며, 잘 쓰기만 한다면 우리

의 수명은 가장 큰 일을 해내기에도 넉넉하지요. 하지만 인생이

방탕과 무관심 속에서 흘러가버리면, 좋지 못한 일에 인생을 다

소모하고 나면, 그대는 마침내 죽음이라는 마지막 강요에 못 이

겨 인생이 가는 줄도 모르게 지나가버렸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이오.


짧은 수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수명을 짧게 만들었고, 수

명을 넉넉히 타고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수명을 낭비하는 것이라

오. >> 마치 왕에게나 어울릴 넉넉한 재산도 적합하지 않은 주인

을 만나면 금세 탕진되고, 얼마 안 되는 재산도 제 주인을 만나

면 사용함으로써 늘어나듯이, 우리의 수명도 제대로만 배분하면

크게 늘릴 수 있는 것이라오.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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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인가 알라딘 바탕 메뉴 한편에 "오뒷세이아"라는 붉은 링크가 생겨난 것을 보니, 이제 막 개봉했다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보통은 아닌 듯하다. 하긴 지난번에도 원자폭탄 개발을 지휘했던 과학자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 전국민이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얼마나 좋았을까"를 외치게 했으니 그 영향력을 충분히 알 만하다.


그래서인지 알라딘에서도 관련 도서 특별전 메뉴를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뭔가 싶어 클릭해 보니 영화 개봉에 맞춰 간행된 갖가지 해설서와 편역서가 나오고, 심지어 수년 전부터 준비했음직한 호메로스 원전 번역본까지도 여러 종 나오니, 이래저래 당분간은 '호메로스'와 '오디세이(아)'라는 키워드 따라 돌아가는 출판계와 서점계와 독서계가 아닐까 짐작된다.


물론 영화가 되었건 드라마가 되었건 간에 이번 기회에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읽어보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이전까지만 해도 간혹 방송에서 이 고전을 소개받는 사람 대부분이 '시 형식이라 어렵다'는 편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것을 감안하면, 그토록 굳건했던 대중의 편견이 고작 영화 한 편 때문에 무너졌다는 사실이야말로 살짝 우스워진다.


나귀님의 입장에서는 유명 영화의 영향력 덕분에 관련 단행본이 간행되는 것이 좋기보다는 싫다는 편인데, 왜냐하면 영화 개봉 일정에 맞춰 날림으로 번역되는 경우도 많고, 역시나 영화가 극장에서 내려감과 동시에 모조리 외면을 받기 때문이다. 과거 <트로이>나 <알렉산더>나 <베오울프> 같은 영화가 그러했으니, 지금은 저 영화만큼이나 관련서도 잊힌 상태이다.


이번 영화와 관련해서는 어느새 네 종으로 늘어난 호메로스 원전 번역을 서로 비교해 읽어보는 것 정도가 의미 있지 않을까 싶은데, 막상 저 영화는 2017년에 간행된 새로운 영역본을 토대로 한 것이라서 또 차이가 있다고 한다. 일각에선 가뜩이나 여성의 비중이 적은 고대 서사시인데도 불구하고 여성 번역자가 PC 색채를 입히려 애썼다(!)는 비판도 있는 듯하다.


고전 번역은 시대마다 새로워져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말이야 쉬워도 실제 결과물을 내놓기는 힘들게 마련이다. 서양에서야 그리스어와 각국 언어의 유사점 때문에라도 다양한 번역 시도가 가능할지 모르지만, 우리말로 옮기려 하면 아무래도 극복할 수 없는 차이점이 더 부각되지 않을까. 가만 보면 천병희 이후의 번역본 모두 이 점을 의식하고 있는 듯하다.


한 가지 바람이라면 언젠가는 고대 그리스어 지식과 시적 재능 모두를 보유한 이례적인 인재가 나타나서 마치 호메로스가 빙의한 것처럼 정확하면서도 때로는 과감한 번역을 시도하는 것인데, 과연 나귀님의 생전에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물론 산문역으로 호메로스를 처음 접한 나귀님으로서야 천병희를 위시한 운문역만 네 가지인 현실만 해도 감지덕지이지만.


그나저나 이번 영화의 차마 무시 못할 영향력 때문인지, 호메로스 서사시의 제목은 <오디세이아>이지만, 영화 제목에 맞춰 <오디세이>라고 표기하거나 아예 영어를 병기한 경우도 흔한 듯하다. 알라딘의 특별전 메뉴에 소개된 책들 중에서도 비전공자의 해설서와 편역서는 "오디세이아"로, 원전 번역자는 "오뒷세이아"로 쓰는 (알라딘도 덩달아 이쪽인) 모양새이다.


그리스어 철자 입실론(Y)을 '이'로 읽느냐 '위'로 읽느냐의 차이인 듯한데, 그리말 사전에 붙은 강대진의 설명처럼 '위'로 읽으면 '테티스'와 '테튀스'를 구분할 수 있어 편리한 점도 있다 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표기의 어려움 때문인지 편의상 '이'로 읽는 경우도 흔한 모양인데, 얼마 전 <국가>를 뒤적이니 박종현 선생도 편의성 면에서 '이'를 지지했었더랬다.


그나저나 알라딘의 "오뒷세이아" 특별전에 소개된 책 중에는 의외로 빠진 것이 더러 보인다. 우선 원전 번역 중에서 민음사의 김기영 번역본은 찾아볼 수 없어 이상한데, 때마침 영화에 편승하기 위해 기존 표지를 완전히 덮는 대형 띠지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 원작!"이라고 커다란 글씨로 적을 만큼 눈물겨운 노력까지 했으니 더욱 이상하다.


나귀님 같으면 호메로스 서사시의 후일담과 2차 창작에 해당하는 작품들도 소개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페늘롱의 <텔레마코스의 모험>이나, 카잔차키스의 <오디세이아> 같은 작품들이 그렇다. 저 서사시의 말미에서 주인공이 아내에게 전한 말 때문인지, 그의 여정은 저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새로 시작이라고 상상해 본 사람들도 옛날부터 적지 않았던 듯하다.


심지어 고대의 <오디세이아> 속편 중에는 <투 마더스>와 유사한 결말(!)도 있다고 전한다. 의외로 단테의 <신곡>에서도 오디세우스의 후일담이 등장하는데, 꾀를 자주 사용한 까닭인지 거짓말쟁이가 가는 지옥의 불길 속에서 저 시인에게 자신의 최후를 설명한다. 여기서 나온 묘사에 착안해 보르헤스는 오디세우스가 '남아메리카를 발견했다'고 지적하기도 했었다.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에서도 그 주인공의 여정 중에 <오디세이아>에서 소개되었던 몇몇 장소를 재방문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일부에서는 두려운 나머지 멀찍이 돌아가서 화를 면하기도 한다. 심지어 오디세우스의 동료 중 하나인 낙오자를 적군이었던 아이네이아스가 구출하는 대목도 있었으니, 이래저래 선행 작품을 의식하고 있었다고 봐야 하겠다.


<오디세이아>의 영향을 받은 현대 문학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당연히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아닐까. 나중에 가서는 저 서사시와의 비교가 불편했는지 그 유사성이나 영향 관계를 애써 부정했다고도 하지만, 조이스 소설의 제목이며 인물이며 구성에서도 호메로스를 떠올리지 않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양자의 유사성이라곤 딱 거기까지긴 하지만...




[*] 그나저나 영화에 편승해서 급조된 책들 중에서 가장 황당한 것은 <초판본 오디세이아>이다. 기원전부터 구전된 서사시에 초판본이 어디 있겠나 싶어 클릭해 보니 1616년의 채프먼 영역본 '속표지'를 가져다가 표지에 넣어 놓고 초판본으로 자처하는 것이니 황당할 따름이다. 이런 식이라면 조만간 <초판본 창세기>며 <초판본 사자의 서>도 간행되어 '저자 북토크'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뭐든지 좀 정도껏 하자.


[**] 영화에 편승해서 급조된 또 다른 물건 중에 역시나 꼴보기 싫은 것은 알라딘굿즈 티셔츠이다. 시꺼먼 바탕에 진한 색으로 인쇄되어 잘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그중 "항해" 디자인에 들어간 대형 범선은 호메로스 시대에 있지도 않았던 훨씬 더 후대의 것이니 고증 오류이다. 알라딘, 니들도 좀 적당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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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 전기 저자인 세라 베이크웰의 신간이 나왔다기에 뭔가 궁금해 클릭해 보니, 예전에 나왔다가 절판된 번역본을 출판사만 바꿔 재간행한 모양이다. 그런데 벌써부터 리뷰며 페이퍼에 출판사를 향한 성토가 등장했기에 또 무슨 영문인가 살펴보니, 황당하게도 구판에는 멀쩡히 들어 있던 후주와 참고문헌을 신판에서 빼 버리고 인터넷 링크로 대체한 모양이다.


원서에 후주와 참고문헌이 있었다면 번역서에도 넣는 게 당연한데, 무려 출판사에서 이를 불필요한 군더더기 취급한 셈이니 한심스런 일이다. 당연히 들어가야 할 것을 가리켜 '왜 들어가야 하느냐?'고 묻는 셈이니,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당혹스럽다. 심지어 책값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되었다(!)며 출판사의 결정을 두둔하는 글도 올라와 있으니 괴이한 일이다. 


무엇보다도 인공지능 시대에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는 인공지능 환각, 즉 사오정 답변의 원인부터가 정확한 출전을 찾아내고 종합하는 과정에서의 오류이니, 이것만 보아도 책에 붙어 있는 후주와 참고문헌 같은 출전 표시 장치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심심찮게 등장하는 논문이나 저술의 표절 시비 중 상당수가 출전 표시 미비로 촉발될 정도이니 말이다.


그러니 구간 출판사를 비롯해 학계와 출판계 모두가 준수하던 규약을 굳이 거스르려 작정한 신간 출판사의 행태는 스스로가 얼마나 무지하고 오만한지를 보여준 증거라 할 만하다. 아울러 그러한 무지와 오만에서 비롯되었을 신통찮은 행동이 책의 내용까지도 훼손했을 가능성 역시 의심해 볼 만하다. 당장 이번 신간의 첫 페이지 첫 문단부터 오역이 등장하니까.


"그보다 더 이전에는 하느님이 인간을 희롱하며 복종을 강요하는 놀이에 감히 의문을 제기했던 구약성서의 전도서나 욥기로 거슬러 올라가 찾을 수 있다."(11쪽) 여기서의 문제는 "하느님이 인간을 희롱하며 복종을 강요하는 놀이에 감히 의문을 제기했던"이란 구절(오역)이 "전도서나 욥기" 모두가 아니라 <욥기>의 주인공 "욥"만을 수식하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즉 원문대로 정확히 옮기자면 이렇게 되어야 한다. 실존주의의 기원은 더 이전인 19세기의 소설가, 더 이전의 파스칼, 더 이전의 아우구스티누스를 거쳐 "그보다 더 이전의 구약성서에 나오는 지쳐버린 전도자며 욥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여기서 욥은 하느님이 자신을 갖고 노는 것에 대해서 감히 의문을 제기했다가 윽박지름을 당하고는 굴복한 인물이다." 


여기서 첫 번째 오역은 바로 앞에서 소설가, 파스칼,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인물'을 연이어 거론했는데도 원문의 인명 '전도자'와 '욥'을 서명 <전도서>와 <욥기>로 바꾸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 오역은 욥에 대한 설명이자 <욥기>의 내용(하느님과 악마의 내기 때문에 억울한 고통을 받았던 욥이 항변하지만 하느님의 으름장에 깨갱)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오역은 구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구판에서는 "전도서의 욥"이라고 추가 오역한 대목을 신판에서는 "전도서와 욥기"라고 나름대로 수정씩이나 가했지만, 그런 수정조차도 여전히 오역임은 모르고서 내버려둔 셈이다. 구판의 오역을 수정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음이 드러난 셈이니, 아직 미확인된 오역이 신판 곳곳에 숨어 있지 않을까 짐작된다.


한 가지 우스운 점은 인터넷이 처음 도입된 사반세기 전에도 이처럼 부피와 가격만 늘리는 듯 보이던 도판과 후주와 참고문헌과 색인 등을 인터넷 링크며 씨디롬 부록으로 대체하려 시도했던 출판사가 일부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런 조치가 본격적인 대세나 유행이 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몰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불편해서 안 하는 거라 봐야 맞겠다.


사실 종이책의 가장 큰 장점은 그 자체로 완결된 상태라서 전기나 통신이 없어도 볼 수 있다는 점이니, 이제 와서 굳이 그 내용 일부를 인터넷으로 옮길 이유는 없다. 게다가 지금은 씨디롬 드라이브 자체도 사라져 버렸고, 인터넷도 영원하지는 않아 불과 몇 년 만에 소멸한 링크며 사이트가 허다하니, 한 번 만들면 50년씩 100년씩 가는 종이책에 비할 바가 아니다.


어쩌면 후주와 참고문헌을 링크로 대체하자고 제안한 편집자는 ("이달의 우수사원" 밈처럼) 25년 전에 남들이 시도했다 포기한 것을 뭔가 대단한 아이디어인 듯 떠올리고 으스댔을 수도 있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사실 후주와 참고문헌과 색인의 유용성은 그걸 실제로 써 본 사람만 안다. 결국 저 출판사에는 책을 속속들이 활용해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겠다.




[*] 근래에 접한 몇 가지 다른 사례(이른바 "처녀성을 떠맡은 자"와 엉터리 세네카 번역본)와 함께 출판계의 망조를 보여주는 사건이 아닌가 싶어 한 마디 꼬집어 주려고 기껏 글을 써서 다시 들어와 보니, 출판사에서도 논란을 의식했는지 하룻밤 사이에 책을 일시 품절시키고 새로 제작해서 몇 주 뒤에 재유통시킬 계획이라 한다. 십중팔구 이미 간행된 책을 재단해서 표지를 제거한 다음, 기존 본문에 앞서 누락되었던 부록을 추가하고 새로 제작한 표지를 씌워 다시 제본하지 않을까.(문제는 이렇게 되면 책 크기가 원래보다 사방 몇 밀리미터씩 줄어들게 된다는 점이다. 과거에 잘 안 팔리는 책을 몇 년 뒤에 '표지갈이' 해서 재간행한 경우가 그러했다). 이와 유사한 논란이 있어도 엉터리 책을 끝까지 고수하는 악덕 출판사도 많았음을 감안하면 해당 출판사의 신속한 조치는 대단한 결단이지만 (물론 애초에 무개념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만큼은 어디 가지 않는다), 앞서 지적했듯이 애초부터 오역이 있는 책이니 과연 이번 조치로 문제가 다 해결될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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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양반이 읽다 말고 놓아둔 박완서의 에세이집 <호미>를 오랜만에 뒤적이다 보니, 한 가지 흥미로운 내용이 등장한다. 언젠가 저자가 설비 수리를 하러 온 나이 지긋한 목수에게 뭘 물어보니 '당근'이라는 답변이 나오더란다. 무슨 말인가 싶어 한참 어리둥절하고 당혹스러워하다가, 뒤늦게야 '당근'이 '당연'을 뜻하는 유행어임을 깨닫고는 머쓱해졌다는 것이다.


기존 '박완서의 굴욕' 시리즈(컴퓨터가 바이러스 걸렸다기에 옆에 있던 디스켓을 멀리 치웠더니, 수리기사가 한심하게 쳐다보더란 이야기도 그중 하나)의 연장인 셈인데, 저자도 겸연쩍은 듯 이렇게 덧붙인다. "별로 유행을 탈 것 같지 않은 연령층과 직업인에게까지 당근이 당연으로 일반화됐다는 걸 느끼면서, 그럼 정작 당근은 뭐가 되나 걱정이 됐다."(121쪽)


나귀님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공감 가는 구절이었는데, 왜냐하면 최근의 '무섭노' 논란을 비롯해서 일베 용어 사용 논란이 대두할 때마다 이와 비슷한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과연 어디까지 일상 용어를 잠식당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일베 용어가 특정될 때마다 금기어로 간주한다면, 결과적으로는 일상어의 범위만 쪼그라들지 않겠냐는 것이다.


노무현을 비롯한 각종 표적에 대한 조롱과 합성에서 드러난 일베의 역량은 창작이 아니라 변형이다. 이른바 일베 용어도 기존 용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통용하는 것뿐이니, 일베 용어를 배제한다며 해당 단어를 배제하고 논란이 되는 표현들을 적극 기피하게 된다면, 결국에 가서는 일상어를 모조리 일베의 전유물로 순순히 넘겨주고 마는 꼴이 되지 않을까.


심지어 일베와는 무관한 나귀님조차도 공연히 오해를 받지 않으려 '노무'와 '운지' 같은 일베 용어를 기억하고, 생경한 신조어를 접할 때마다 그 출처가 무엇인지 일단 검색부터 해 보는 판이니, 이번 '무섭노' 논란 역시 역설적으로 일반 대중에게 일베 용어 학습 기회를 제공했다고 봐야 할 법하다. 일베로선 최초 문제 제기자에게 표창장이라도 주고 싶지 않을까?


더 큰 문제는 이번 논란에서 드러났듯, 어떤 표현이 일베 용어인지 판정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어렵다는 점이다. 같은 경상도 사람이라도 의견이 다르니, 자칫 일베 비판이 마녀사냥으로 번질 수 있음을 보여준 셈이었다. 물론 나귀님이 보기에 가장 아이러니한 점은 평소 마녀사냥의 희생자로 자처하던 조국 같은 사람조차도 마녀사냥을 거들고 나섰다는 점이었지만.


그나마 다행인 점은 박완서의 걱정이 아직까지는 기우라는 점이다. '당근'이야 여전히 '당연'을 뜻하는 말로 통용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근'의 원래 의미가 사라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당근'에 새로운 의미가 추가되었다고 봐야 할 테지만, 이 경우는 '당연'에 부정적 의미가 없어서일 뿐, 일베 용어처럼 부정적 의미가 깃들었다면 상황은 달랐을 수 있다.


그런데 박완서의 뜬금없는 당근 걱정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당근'은 남녀 관계에서 중요한 키워드이며, 그중에서도 특히 "당근, 당근"은 여성을 바짝 흥분시키는 암호이기 때문이다. 자칫 너무 흥분한 나머지 막무가내로 달려들 수 있으니 남성도 조심해야 하고, 특히나 주변에 납작하고 단단한 물건이 없게끔 각별히 주의해야만 할 정도이다.


물론 요즘 분위기만 보면 저 마법의 암호 "당근, 당근"도 여차 하면 학폭에 일진으로 처벌받기에 딱이니, '당근'이 '당연'으로 대체된 것도 그런 분위기의 반영은 아닐까 싶다. 같은 시기에 젊은이들의 연애와 결혼도 줄고, 출산율도 급감했으며, 입양아 학대와 교권 추락도 종종 벌어졌으니, 박완서의 뜬금없는 당근 걱정도 혹시 시대를 꿰뚫어 본 통찰이었을까...



[*] 그나저나 '거제야호'부터 '무섭노'까지 최근 연이어 나라를 뒤흔든 화제의 시발점은 번번이 리센느이니, 이번 정부의 향후 최대 과제는 주가 안정과 부동산 공급과 더불어 저 걸그룹의 입단속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최근의 국정 기조를 감안하면 결과적으로는 BTS나 블랙핑크 같은 초인기 아이돌에 대한 활동 일수 규제니, 호남 출신 신인 걸그룹 육성이니, 차트 순위 2배 반영 아이돌 굿즈 발매처럼 영 뚱딴지 같은 대책만 줄줄이 나올 것 같긴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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