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깨어서 뒤척이자마자 바깥양반이 문득 "애도의 장인"이라는 책이 있더라고 말하기에,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놓고 잠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장인(丈人)"일 가능성은 없으니, 십중팔구 "장인(匠人)"일 것인데, 그렇다면 <애도하는 사람>인가 하는 일본 소설의 내용과도 비슷하게 여기저기 문상 다니며 애도하는 전문가를 뜻하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애도의 장인"이 아니라 "에도의 장인"이라는 일본 만화를 말한 것이었다. 나귀님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으니, 지난번에 바깥양반이 갑자기 '에도에 관한 책이 있느냐'고 묻기에 일본사 여러 권과 에도의 미술이며 식물이며 패스트푸드에 이르는 여러 주제의 책을 꺼냈다가, '에도(江戶)'가 아니라 '애도(哀悼)'라고 하기에 머쓱했기 때문이다.


나귀님이 보기에는 '에도'와 '애도' 모두 최근에 와서 관련서가 여럿 나오는 등 새삼스레 주목을 받는 것 같다. 일본의 옛 도시에 대한 관심은 소설이나 만화 같은 일본 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과 맥을 같이 하는 듯하고, 상례의 한 과정을 가리키는 용어는 과거에만 해도 의례와 관련해서만 사용되었던 듯한데 최근 들어서는 개인과 관련해서도 사용되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바깥양반이 말한 만화는 결국 옛날 에도(江戶)에 살았던 장인(匠人)들의 이야기인 듯하다. 실용적이고 서민적인 성격이 강한 지역이자 시대였다고 알고 있으니, 대략 <일본영대장>에 수록된 것과 비슷한 내용은 아닐까. 그러고 보니 다니구치 지로의 '산책'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에도 산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도 그런 장인 가운데 하나일지 모르겠다.


제목 그대로 에도 시대에 산책을 핑계로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며 거리를 재고 지도를 그린 남자의 이야기인데, 일본의 지도 제작자인 이노 다다타카를 모델로 삼았다고 알고 있다. 거기 나온 다니구치 지로의 그림 중에는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판화 <명소에도백경>의 장면을 오마주한 것도 종종 나타나서 흥미로웠는데, 봄을 맞이해 오랜만에 다시 꺼내봐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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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북펀드 광고에 '첫차를 타는 사람' 운운하는 것이 있어서 혹시 그건가 싶어 눌러 보니, 아닌 게 아니라 노회찬의 연설에 등장해서 유명해진 6411번 버스 이야기의 재탕이었다. 워낙 생전에 말 잘 하기로 소문난 정치인의 발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니 재탕삼탕은 불가피하겠거니 싶은 한편으로, 이제는 그것도 유효 기간이 지나지 않았나 의문도 든다.


물론 저 버스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노동 현실이며 인권 문제를 깡그리 외면하자는 뜻은 아니다. 다만 저 연설을 내놓은 장본인의 솔직히 불미스러울 수밖에 없는 죽음으로부터 제법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인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담론에 머물러 있다는 것 자체가 자칭 '진보' 정치의 '퇴보'나 '제자리걸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문은 지난번 심상정이 마지막으로 대권 도전을 선언하면서도 6411번 버스 이야기를 꺼낸 것을 지켜보면서 처음 떠올리게 되었다. 십중팔구 노회찬의 연설 자체의 위력과 감동과 유효성 때문이겠지만, 뒤집어 보면 그의 죽음으로부터 여러 해가 지나는 사이에도 이에 버금가는 새로운 연설이나 담론을 자칭 진보 정치에서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심지어 지금도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 있을 때마다 '노회찬이라면 무슨 말을 했을까'를 떠올리는 지지자들이 많고, 이번 그림책 출간을 포함해 이른바 6411번 버스 연설에 대해서도 재탕삼탕이 이루어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결국 저 말 잘 하던 정치인도 박정희와 노무현의 뒤를 따라 불미스러운 죽음에 이은 개인 우상화의 길로 나아가는 것은 아닌가 의문이 든다.


돌이켜 보면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민노당의 국회 입성은 많은 사람에게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허구한 날 파업 주도하는 모습으로 국민 대다수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주던 노조 위원장이 하루아침에 국회의원이 되어 여의도에 나타난 것 자체가 파격이고 화제였으니까. 노회찬은 그렇게 새로운 바람을 약속한 정치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후 민노당의 분열과 소멸이며, 이후 자칭 진보 정치의 각종 논란과 이합집산은 기대만큼이나 큰 실망을 안겨줄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노회찬의 불미스러운 죽음은 그 개인의 한계뿐만 아니라 한때 그가 대표했던 자칭 진보 정치의 한계까지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니 6411번 버스 타령도 거기서 끝났어야 하지 않을까.


사실 민노당의 여러 담론 중에서 시대를 초월해서 유효성을 획득한 것이 있다면 노회찬의 6411번 버스 연설이 아니라 오히려 권영길의 '살림 좀 나아지셨습니까' 연설일 것이다. 실제로 국민의 살림살이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팍팍해지며 악화일로를 걷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권영길이 지금 다시 저 연설을 들고 나온다 해서 승승장구하리라는 보장까지는 없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자칭 진보 정치의 지지자들도 이제는 노회찬을 6411번 버스에 실어 보내고 뭔가 새로운 담론을, 한때 저 연설을 듣고 감동한 사람들의 마음을 한 번 더 움직일 새로운 연설을 모색할 때가 아닐까. 6411번 버스를 그 전신인 태진운수 62-1번 버스며 원래 노선인 62번 시절부터 수십 년째 꾸준히 이용해 온 단골로서 여러 생각이 들어 해 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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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에 따르면 이번 경상도에서 일어난 산불이 유난히 크게 번진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나치게 울창한 숲이 지목되는 모양이다. 어린 시절 목격한 민둥산의 헐벗은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는 나귀님으로선 그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분석인데, 왜냐하면 '메아리가 살게시리 나무를 심자'라는 동요 가사마냥, 지금까지 나무는 무조건 울창해야 좋다고 여긴 까닭이다.


예를 들어 국민학교 시절에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반 전체가 옆 동네 야산으로 청소 봉사를 나가 보니, 잡초와 덤불 약간을 제외하면 그냥 흙바닥과 쓰레기뿐이었고 나무는 구경조차도 할 수 없었다. 그랬던 야산이 지금은 나무와 덤불이 무성해서 멀리서도 진한 초록색을 뽐내고 있으니, 수십 년 세월 동안 상당한 변화가 진행되었음을 짐작해 볼 만하다.


문득 지난번에 알라딘 중고샵에서 구입한 <한국의 산림 녹화 70년>이라는 책이 기억나서 꺼내 뒤적여 보니, 그런 수십 년간의 변화가 어떠했는지를 개략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산림은 일제시대와 육이오를 겪으며 사실상 황폐화되고 말았으며, 그 보호와 육성이 본격화된 것은 박정희 정권부터였다고 한다.(비난할 건 비난해도 인정할 건 인정하자!)


우선 산림청이 설립되고 조림 사업과 화전 금지를 비롯한 체계적인 정책이 실시되었다. 장작과 목탄 대신 석탄과 석유가 연료로 일반화되면서 벌목이 감소한 것도 산림 보호에는 큰 영향을 끼쳤다. 결국 오늘날의 울창한 산림은 상당 부분 인공 조림의 결과이지만, 그런 시도 중에서는 드물게 성공 사례이기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는 후일담도 있다.


마침 나귀님 사는 곳 근처의 관공서에 가 보면, 1980년대에 개관 기념으로 심어 놓은 느티나무가 마치 정자나무처럼 자라난 모습을 볼 수 있으니, 수십 년 세월이면 묘목이 아름드리 나무로 성장하기에 충분함을 알 수 있다. 이번에 산불 확산의 원인으로 지목된 울창한 숲도 그런 식으로 오랜 세월 방치되어 자라난 나무들로 이루어졌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뉴스에 따르면 조림 사업에만 몰두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임도 형성과 노목 제거를 비롯해서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과거에 아름드리 나무를 잘라내는 산림청의 행태를 비판하는 환경 단체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보도하는 뉴스가 여러 번 있었는데, 혹시 숲 관리 차원에서 늙은 나무를 어린 나무로 교체하는 것을 오해한 사례는 아니었을까.


결국 나무고 숲이고 간에 무작정 오래, 무작정 많이, 무작정 크게 만든다고 해서 만사형통은 아니라니, 어쩌면 세상사의 이치와도 비슷할지 모르겠다. 이번 산불 진화의 어려움을 놓고도 임도 형성과 장비 도입 같은 문제가 많이 지적되었는데, 제아무리 임도와 장비가 있더라도 꾸준한 관리가 없다면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있으니, 결국 비용의 문제가 아니려나.


그 사이에 도시 풍경은 예전에 비해 나무가 사라지고 콘크리트 천지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나무가 도로 들어선 야산도 대부분 개발되어 아파트가 들어섰기 때문이고, 좁은 정원에라도 꽃나무며 과일나무를 심어놓았던 단독주택도 대부분 사라지고 상가나 아파트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아까워서인지 감나무를 남겨놓은 집도 있지만, 이젠 열매가 익어도 따지 않는다.


또 어제는 벚꽃 소식이 궁금해서 동네 공원에 가 보았더니 화단과 벤치를 없애고 잔디 광장을 만들면서 굵은 벚나무까지 모두 베어버렸다. 결국 동네 주민들만 즐기던 '숨은 벚꽃 명소'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사진 찍기도 찍히기도 싫어한 나귀님이 2년 전 무슨 변덕에선지 촬영했던 사진 몇 장 속에만 남아 있는 풍경이 되고 말았으니 이래저래 씁쓸할 뿐이다.


1990년대 중반엔가 강원도 어딘가에 크게 산불이 났는데, 몇 달 뒤에 단체 여행으로 버스를 타고 동해안을 지나다가 한쪽에는 푸른 바다, 한쪽에는 검고 황량한 언덕이 펼쳐지는 구간에 들어서자, 방금 전까지 웃고 떠드느라 시끌벅적하던 실내가 조용해진 적이 있었다. 숲이나 나무에 대해서 별 관심 없던 일행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모두 숙연해졌던 셈이다.


삶과 죽음은 자연의 이치이니, 숱한 변화 속에서 무상함을 깨닫게 되는 것도 불가피한 일이다. 묘목이 자라서 거목이 되더라도 하루아침에 베어져 나가게 마련이니, 지난 수십 년간 자주 오가며 지켜본 관공서의 정자나무도 조만간 청사 이전과 함께 사라질 운명이다. 깊은 산속의 거목이라 해서 가혹한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것도 이번 산불로 분명해졌고.


이번 산불의 피해자 인터뷰를 보면 '전쟁이나 다름없다'고 표현한 경우가 많았는데, 강한 바람에 불덩어리가 날아다니며 피해를 키웠다는 증언을 감안해 보면 상당히 그럴듯한 비유처럼 들린다. 이번 산불을 계기로 자연의 위력을 새삼스레 실감하게 되었던 것처럼, 앞으로 수십 년 사이에 자연의 회복력이 드러나는 모습도 지켜볼 수 있기를 조용히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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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베스트셀러 목록에 <대통령 윤석열 탄핵 사건 선고 결정문>이라는 것이 있기에, 참 약삭빠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 오전에 선고가 나왔는데 불과 하룻만에 (어쩌면 하루도 되지 않아서!) 책을 만들다니 이게 과연 말이 되나 싶어 클릭클릭해 보니, 지금 당장 나온 게 아니라 4월 10일에 나올 것을 예약 판매하는 듯하다. 그러면 그렇지.


심지어 전자책까지 포함한 주간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알라딘에서 자체 제작한 <대통령(윤석열) 탄핵 결정문> 무료 전자책이 1위이다. 탄핵 결정문이야 헌법재판소 홈페이지에 가면 아래한글 파일로 무료 다운로드가 가능한데, 굳이 이렇게 종이책이나 전자책으로 사고파는 의도가 또 무엇인지는 궁금하다. 젊은 사람들은 아래한글을 안 쓴다고 해서 그런 것일까.


희한한 점은 윤석열 탄핵 결정문 종이책을 만들겠다는 더휴먼이라는 출판사에서 이미 박근혜 탄핵 결정문 책도 만들어 팔고 있다는 점이다. 도대체 뭐 하는 출판사인가 궁금해 클릭클릭해 보니 문재인 관련 상품이 줄줄이 나오기에 깜짝 놀랐다. 책뿐만 아니라 달력이며 다이어리까지 줄줄이 내놓은 것으로 보아 전직 대통령 관련자나 지지자가 운영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문제는 전직 대통령 우상화에 앞장서는 이런 출판사에서 또 다른 전직 대통령의 탄핵 결정문 책을 만들어 판매하는 것이 그리 썩 보기 좋지는 않다는 점이다. 두 전직 대통령과 그 지지자의 성향을 감안해 보면 결국 대놓고 조롱하기가 아닌가. 막상 애초에 윤석열을 등용한 대통령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면 사실상 제 얼굴에 침 뱉기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이쯤 되면 헌법재판소며 대통령 관저 앞에 태극기 들고 운집한 탄핵 반대 세력뿐만 아니라 탄핵 찬성 세력까지도 자중하지 못하고 반대편을 향해서 위협과 조롱을 쏟아내는 셈이니, 과연 올바른 행동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결국 지난 정권과 이번 정권 내내 온 나라를 양분했던 진영 논리의 흔적을 알라딘에서도 재차 확인하게 된 셈이니 그저 씁쓸한 기분뿐이다.


한때는 이명박과 박근혜가 죽는 모습을 내 눈으로 봐야만 속이 풀릴 것만 같았는데, 막상 감옥 가는 모습을 생중계로 지켜보니 권력의 무상함에 씁쓸한 기분만 들었을 뿐이었다. 조국이 감옥 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으니, 저 꼴보기 싫은 문재인이나 윤석열이나 이재명이 감옥에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더라도 마찬가지로 씁쓸한 기분만 들지 않으려나.


탄핵 소식에 기뻐하며 환호한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국민 대부분은 벌써 두 번째인 탄핵 자체도 짜증나고, 이제부터 시작된 조기 대선의 소용돌이도 짜증나며,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달라질 수 없을 만큼 엉망진창인 현실도 짜증나지 않을까. 어제도 장장 22분 간의 탄핵 선고 결정문 낭독을 생중계로 지켜보며 역시 씁쓸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그래서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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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 '2025년 세계 양자과학기술의 해' 기념 이벤트를 하나 싶더니 지금은 또 지나간 모양이다. 양자과학의 기초 중 하나인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발표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유네스코에서 그렇게 지정한 모양인데, 정작 알라딘이 이벤트용으로 만든 '돈 주고 사는 사은품'은 무려 '슈뢰딩거의 고양이 티셔츠'라서 뭔가 좀 어색해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과가 아닌 나귀님이니 혹시나 잘못 이해한 바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꽤 오래 전에 하이젠베르크의 여러 에세이며 범양사 과학책 몇 권을 읽었던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하이젠베르크의 입자론과 슈뢰딩거의 파동론은 시작부터 상호 모순이라고 해서 논란이 있었으며, 그걸 억지로 화해시킨 것이 보어의 상보성 원리, 즉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알고 있다.


이에 대해 슈뢰딩거가 반발하며 내놓은 것이 저 유명한 고양이 사고 실험인데, 뚜껑을 열어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삶과 죽음이 중첩된 모순적인 상태일 수밖에 없다는 비판이 상당한 설득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이 비판이 오히려 양자과학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며 호의적으로 전용되어, 급기야 알라딘 고양이 티셔츠까지 나온 듯하다.


그런데 여기서 아이러니한 점은 슈뢰딩거의 실험이 결국 '고양이 죽이기'를 의도한 셈이니, 요즘 기준으로는 동물 학대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알라딘 이벤트에서야 '살아 있는 고양이'와 '유령 고양이'라고 에둘러 말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보면 '고양이' 아니면 '고양이 시체'가 나온다는 뜻이니, 실제로 고양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반길 만한 내용까지는 아니다.


물론 슈뢰딩거의 제안이야 어디까지나 사고 실험일 뿐이고 실현된 적까지는 없으니, 이걸 가지고 굳이 시비를 거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수 있겠다. 다만 '2025년 세계 양자과학기술의 해' 선정 자체부터 하이젠베르크와 보어 같은 주류를 기준으로 삼았다고 하니, 그저 사은품 디자인으로만 흔적을 남긴 비주류 슈뢰딩거의 처지가 새삼 안쓰러워 해 본 말일 뿐이다.



[*]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수많은 창작물에서 형상화된 바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네이버 웹툰 <집사레인저>에서 등장한 버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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