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첫 화면에 <이웃집 빙허각>이라는 아동 소설을 광고하기에, 이게 누구던가 싶어 클릭해 보니 <규합총서>의 저자였다. 옛 여성들은 이름이 없거나 망각되어 당호(집에서 따온 이름)로 지칭된 경우가 종종 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이다. '당'과 '헌' 모두 건축물을 가리키는 말이니,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신래미안과 허대방엘리움로얄카운티1차쯤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202호 신씨와 1001호 허씨이거나.


<규합총서>는 예전에 신구문고 판본으로 갖고 있었던 듯해 책장을 뒤져 보았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기린원 판본으로 갖고 있었나 싶어 또 다른 책장을 뒤져 보았지만 역시나 발견하지 못했다. 어쩌면 책더미 속 깊은 곳 다산과 실학 저자들의 각종 국역서 옆에 들어 있거나, 아니면 <제민요술>이나 요리 관련서, 아니면 서유구 관련서나 기타 다른 책에 곁들여 읽으려 꺼내 놓았다가 엉뚱한 데에 방치해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어쨌거나 국역본을 하나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후 여러 번이나 헌책방에서 <규합총서> 번역서를 보고도 딱히 구입할 생각은 없었다는 점이다. 이번에 구글링해 보니 판본이 여러 가지인데 특히 정양완의 번역본이 대표적이라 하니, 어쩐지 몇 번쯤 봤던 것 같은 그 책을 미리 구입하지 않은 것이 아쉽기도 하다. 참고로 정양완의 아버지는 위당 정인보, 남편은 국문학자 강신항, 아들은 논란이 있었던 수학자 강석진이다.


아동 소설의 줄거리를 살펴보니 몰락 양반가의 딸인 주인공 소녀가 이웃집 할머니 빙허각을 만나 <규합총서>의 저술에 일익을 담당하는 내용인 듯하다. 어쩐지 에밀리 디킨슨의 이웃집 소녀가 등장하는 그림책이 생각난다. 최근 꾸준한 인기를 누리는 '숨은 조력자' 모티프를 빙허각의 사례에 가져다 붙인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한데, 문제는 실존 인물을 소재로 삼은 경우에 자칫 역사며 사실 왜곡 논란이 발생하기 쉽다는 점이다.


'숨은 조력자'란 문자 그대로 어떤 업적의 주인공의 그늘에 가린 중요한 조력자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가리키는데, 최근의 유행에서의 시발점은 논픽션으로 시작해 영화로도 제작된 <교수와 광인>이 아니었나 싶다.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제작 과정에서 정신병원에 수감된 광인이 자료 조사를 자원했다는 실화를 다루었는데, 이후 <나랏말싸미>와 <말모이> 같은 한국 영화에서도 이 모티프를 차용한 바 있다.


문제는 두 편의 한국 영화 모두 역사 왜곡 논란에 휘말렸다는 점이다. <나랏말싸미>는 세종의 한글 창제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승려 신미가 핵심으로 관여했다는 줄거리이고, <말모이>는 일제 시대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 과정에서 전과자에 까막눈인 판수가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줄거리이다. 양쪽 모두 '숨은 조력자' 모티프에 충실하려다 보니, 역사적 사실을 과장하거나 무시함으로써 논란을 자초한 측면이 있다.


미국의 우주 개발에 관여했지만 주목 받지 못한 흑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히든 피겨스>와 그 원작인 <로켓걸스>, 비슷한 여성 서사를 원자폭탄과 암호해독으로 옮겨놓은 <아토믹걸스>와 <코드걸스>, 또는 일종의 도시 전설로 자리잡은 '아인슈타인에게 업적을 가로채이고 사회적으로 매장된 첫 번째 아내'에 대한 소문도 마찬가지이지만, 역사적 사실을 뒤집다 보면 사안을 실제보다 과장하고 왜곡할 위험이 상존한다.


왜냐하면 영화와 책에서 부각시킨 것과 달리, 위에 언급한 각종 '걸스'와 밀레바 아인슈타인이 각각의 유명한 업적에서 담당한 역할은 어디까지나 조연이기 때문이다. 즉 이들도 나름대로는 중요한 역할을 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도 많았다는 것이다. 에베레스트 초등에서도 텐징 노르가이의 공헌이 컸지만, 에드먼드 힐러리를 비롯한 영국 원정대가 없었다면 저 셰르파 혼자서 성공하지는 못했을 터이다.


'숨은 조력자' 모티프도 대중의 구미에 맞아 유행하는 것이겠지만, <나랏말싸미>와 <말모이>처럼 무작정 대입하다 보면 어느 순간 선을 넘으면서 역사 왜곡 논란으로 치닫게 되는 듯하다. 비교적 잘 대입한 경우에도 논란은 여전한데, 걸작으로 칭송되는 영화 <서편제>조차도 토속적인 소재라는 외양과 달리 핵심 줄거리는 한국적인 한의 모티프가 아니라 그리스 비극의 카타르시스라는 국문학자 조동일의 비판이 나오기도 했었다.


지난번 <고려거란전쟁> 드라마의 역사 왜곡 논란도 비슷한 맥락이 아니었나 싶은데, 그때 참고하려고 꺼냈던 박용구의 <역사소설입문>을 다시 뒤적이니, 역사소설은 사실에 충실하되 허구의 여지도 감안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즉 작가도 사실과 허구의 선을 명확히 그어야 하고, 독자도 상상의 여지를 충분히 허락해야 한다는 뜻인데, 갈수록 의견 대립이 첨예화하는 사회에서 그걸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번에 나온 <이웃집 빙허각> 역시 해당 인물에 관한 사료가 절대 부족한 점이 난관이었을 법한데, 과연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갔나 궁금하다. 흥미로운 점은 빙허각 이씨 자체야 사실상 무명에 가까운 채로 남았지만, 그 주변 인물 중에는 방대한 저술을 남긴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야 완역이 시도되었을 만큼 방대한 조선 시대의 실용 백과 <임원경제지>의 저자인 서유구가 바로 빙허각 이씨의 시동생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서유구가 젊은 시절 형수에게 글을 배웠다고도 전하니, <이웃집 빙허각>에서도 중요한 조연으로 등장하지 않을까 싶다. 서씨 집안에는 원래부터 전해 내려오는 장서가 많았다고 하니, <규합총서>와 <임원경제지> 모두 개인의 업적일 뿐만 아니라 가문의 장서와 학술적 기풍 같은 환경의 산물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또 누군가는 이걸 보고 '시동생에게 연구 성과를 빼앗긴 형수'의 이야기를 구상할지도 모르겠다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랜만에 알라딘을 돌아다니며 새로 나온 책을 살펴보니 '케임브리지 세계사'라는 시리즈가 눈에 띈다. 원서는 2015년에 전7권 9책으로 완간된 모양인데, 번역서는 다시 둘씩 쪼개 18책으로 완간할 예정이라 한다. 2021년부터 출간을 시작해서 2024년 말 현재 원서 VI-1권의 번역서인 11-12책까지 나왔으니, 잘만 하면 몇 년 안에 완간도 가능하겠다.


<케임브리지 세계사 콘사이스>(소와당, 2018)라는 요약본도 나온 모양인데, 같은 출판사에서 본편 간행을 염두에 두고 일종의 개요 성격으로 미리 내놓은 모양이다. 소와당은 예전에 <임원경제지> 중복 출간을 둘러싼 잡음 때문에 별로 좋지 못한 인상을 받은 출판사인데, 이후 역사 서적을 꾸준히 내놓는 것으로 보아 일회성으로 생겨난 곳은 아닌 듯하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케임브리지 세계사'라는 이름의 시리즈는 이전에도 몇 가지가 나와 있었다. 예를 들어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의 '약사'(A Concise History) 시리즈 중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편이 '케임브리지 세계사 강좌'(개마고원, 2000-2002)라는 이름으로 나왔고, 최근에는 스페인 편이 <케임브리지 스페인사>(글항아리, 2024)로 나왔다.


이름 그대로 도판을 곁들인 '케임브리지 도판 역사'(The Cambridge Illustrated History) 시리즈 중에서는 프랑스, 중국, 독일, 이슬람 편이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각국사'(시공사, 2001)라는 시리즈명으로 나왔다. 일반 역사가 아니라 개별 분야의 역사로는 <케임브리지 서양음악이론의 역사>(음악세계, 2022)라는 것이 간행되기도 했다.


단권사나 축약본이 아닌 케임브리지 통사로는 '케임브리지 중국사'(전15권)의 번역본인 '캠브리지 중국사'(새물결, 2007)가 우선 10권과 11권을 4책으로 간행하며 시작되었으나, 이후 20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도 추가 간행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결국 중도작파한 듯 보인다. 물론 책값을 터무니없이 높게 붙이는 출판사이니 완간되어도 문제겠지만.


케임브리지의 이름을 내건 교양서 시리즈도 그동안 꾸준히 나왔다. '입문'(Introduction) 시리즈인 <케임브리지 중국철학 입문>(유유, 2018)과 <케임브리지 카프카 입문>(그린비, 2024), '개론'(Companion) 시리즈인 <본회퍼 신학개론: 캠브리지 지침서>(종문화사, 2017)와 <도스토옙스키: 케임브리지 대학 추천 도서>(우물이있는집, 2018)가 대표적이다.


알라딘에서 '케임브리지'로 검색하다 보니 '케임브리지 7인'과 '케임브리지 5인'에 대한 책도 나오는데, 전자는 19세기 말에 중국 선교사로 투신한 그 학교 졸업생들을 가리키며, 후자는 20세기 초에 소련 스파이로 활동한 (그리하여 훗날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소재가 된) 그 학교 졸업생들을 가리킨다. 참으로 다방면에서 활동한 동문들이다.


때로는 '케임브리지'를 강조하려다 그만 삐끗한 경우도 있다.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소와당, 2019)는 비록 그 대학 출판부에서 나왔지만 원제는 '케임브리지' 없이 '중국경제사'뿐이다. 저자도 '캘리포니아 학파'를 대표하는 미국 학자라니, 출판사도 뒤늦게야 부적절하다 생각했는지 머지않아 <폰 글란의 중국경제사>로 제목을 바꿔서 재간행했다.


케임브리지 이야기를 한참 했으니 그 라이벌인 옥스퍼드도 빼놓을 수 없다. 알라딘에서 검색해 보니 단권본 '역사'(History)로는 <옥스퍼드 책의 역사>(교유서가, 2024), <옥스퍼드 영국사>(한울, 2006), <옥스퍼드 세계 영화사>(열린책들, 2005)가 나온다. 마지막 책은 이후 <세계 영화 대사전>(미메시스, 2015)으로 제목이 바뀌어서 재간행되기도 했다.


옥스퍼드의 통사로는 '옥스퍼드 미국사'(전12권 예정) 가운데 제2권인 <위대한 대의: 미국 혁명 1763-1789>(사회평론, 2017)가 번역되었다가 절판되고, 이후 <미국인 이야기>(사회평론, 2022)라는 제목으로 분권 신판이 나왔지만, 근간 예정이었던 4-6권은 무려 7년 뒤인 지금까지 간행되지 않았으니, 결국 시리즈 완간은 물 건너가 버렸다고 봐야 맞겠다.


'옥스퍼드 도판 역사'(The Oxford Illustrated History) 중에는 <(일러스트레이션판) 옥스퍼드 유럽 현대사>(한울, 2003), <옥스퍼드 과학사>(반니, 2019), <옥스퍼드 세계사>(교유서가, 2020)가 나왔다. '약사'(The Short History) 중에는 <옥스퍼드 영문학사>(동인, 2003)가 번역되었는데, 고유명사 표기가 지나치게 제멋대로라 문제였다고 기억한다.


짧은 분량으로 미루어 개론 수준에 가까워 보이는 '새로운 옥스퍼드 세계사'(New Oxford World History)라는 시리즈 중에서는 도시, 민주주의, 테크놀로지 편이 '옥스퍼드 세계사'(다른세상, 2016-2017)라는 시리즈명으로 간행되었고, 중국 편만 별도로 <옥스퍼드 중국사 수업>(유유, 2016)이란 제목으로 간행되었는데, 이후로는 소식이 없는 듯하다.


'옥스퍼드 미술사'(Oxford History of Art) 중에서는 중국 미술, 20세기 디자인, 포토그래피가 '옥스퍼드 히스토리 오브 아트'(시공사, 2007)라는 시리즈로 나왔다. 같은 출판사에서 더 먼저 나온 <옥스퍼드 20세기 미술사전>(시공사, 2001)과 <옥스퍼드 미술사전>(시공사, 2002)은 번역서 제목과 달리 원서가 사전이 아니라 '개론'(Companion)으로 분류된다.


'안내(Handbook)' 시리즈 중에는 <인지언어학 옥스퍼드 핸드북>(로고스라임, 2011), <옥스퍼드 음식의 역사>(따비, 2020), <정치네트워크론>(학고방, 2022), <옥스퍼드 세계도시문명사>(책과함께, 2023), <옥스퍼드 출판의 미래>(교유서가, 2024)가 번역되었고, '사전'(Dictionary) 시리즈 중에는 <옥스포드 교황 사전>(분도출판사, 2014)이 번역되었다.


옥스퍼드의 개론 시리즈로는 '짧은 개론'(A Short Introduction)과 '아주 짧은 개론'(A Very Short Introduction)이 있다. '짧은 개론' 중에는 생각, 감정, 신화, 선 편이 '옥스퍼드 인트로'(이소출판사, 2002-2004)라는 시리즈명으로 번역되었고, '아주 짧은 개론'은 '첫단추 시리즈'(교유서가)라는 이름으로 2015년부터 2024년 현재까지 50권 넘게 나왔다.


'옥스퍼드'라는 이름을 굳이 내세우지 않고 암약한 책도 있다. 옥스퍼드 대학 출판사에서 간행한 '일곱 가지 대죄'(The Seven Deadly Sins) 시리즈가 '우리를 지배하는 7가지 욕망의 심리학'(민음인, 2007)이라는 평범한 시리즈명으로 간행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앞서 언급한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처럼 '옥스퍼드'라는 이름 사용이 의아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옥스퍼드 오늘의 단어책>(월북, 2023)은 그 대학 출판부의 저 유명한 영어 사전을 담당했던 사람의 저서이기는 하지만, 원제에 '옥스퍼드'가 들어 있지도 않고, 그 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같은 논리라면 역시나 그 영어 사전 편집장이었던 사람의 저서 <단어 탐정>(지식너머, 2018)도 <옥스퍼드 단어 탐정>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쯤 되면 줄곧 경쟁만 일삼는 듯한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이지만, 의외로 양쪽의 협업이라 할 만한 책도 있다. 앞서 언급한 <케임브리지 카프카 입문>의 저자가 옥스퍼드 카프카 연구소의 대표이기 때문인데, 그러다 보니 <케임브리지 카프카 입문: 옥스퍼드 카프카연구소 소장이 쓴 카프카 입문 완전판>이라는 사뭇 카프카스러운 제목이 탄생하고 말았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외국 대학 이름 팔아먹기의 대표 주자는 하버드라서 각종 '하버드 수업'을 비롯한 책 대부분은 원제와 번역서 제목이 영 딴판이게 마련이다. 심지어 '하버드 중국사'(너머북스, 2014-2020)와 '하버드-C.H.베크 세계사'(민음인, 2018-2023)도 원제는 '중화제국사'(History of Imperial China)와 '세계사'(A History of the World)이다.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정식으로 그 학교 이름을 걸고 간행한 책뿐만 아니라, 단지 간행만 했을 뿐인 책은 물론이고, 심지어 그 대학이나 대학 출판부에 재직했던 사람들까지 너도나도 그 명칭을 가져다 쓰는 이유는 당연히 그 권위 때문일 것이다. 비유하자면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학문적 권위가 각 대학의 이름에도 배어 있다고나 할까.


따라서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책도 신뢰할 만한 자료로 손꼽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대학 출판부라면 우리나라나 외국이나 마찬가지여서 대부분은 열악한 상황에서 책을 간행하기 때문에 편집이나 디자인 면에서 일반 상업 출판사에 따라가지 못하는 수준이기 때문에,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같은 사례는 더욱 돋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모두 지금은 대학 이름으로 더 유명하지만, 원래는 지명이라는 것이다.(참고로 하버드 대학이 있는 미국의 지명도 '케임브리지'이다) 어원을 따지면 '옥스퍼드'는 '소'(ox)의 '여울'(ford)을 뜻하니, 직역하면 '쇠여울' 소재 '쇠여울 대학' 부설 '쇠여울 대학 출판부'에서 '쇠여울 세계사'와 '쇠여울 중국사'를 내놓은 셈이다.


일면 우스워 보이지만, 우리나라 대학 이름으로 대체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울대와 고려대 출판부에서 '서울 세계사'와 '고려 중국사'를 내놓으면 살짝 모순 같지 않겠나. 그나마 무난한 이름이라면 '연세 세계사'와 '연세 중국사' 정도인데, 이 대학은 어째서인지 아직까지는 우유와 크림빵 같은 식품 분야에 전념하고 있으니 아쉬울 뿐이다.


여자 대학은 문제가 더 복잡한데, 예를 들어 '이화 여자 세계사'나 '성신 여자 중국사'가 나오면 세계사인지 여성사인지 중국사인지 중국 여성사인지 헛갈릴 법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동덕 여자 세계사'가 나온다면 '학생들과 상의 없이 남성에 대해 서술했다'는 이유로 락카칠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 대학은 이제 출판부도 없어진 듯하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첫눈이 내렸는데 아직 초겨울인 11월임을 감안하면 의외로 양이 많아서 여기저기 사고며 불편을 초래한 모양이다. 어린 시절에야 눈 내리는 모습만 봐도 신이 나더니만, 어른이 되어서는 저걸 또 어떻게 치우나, 저걸 또 어떻게 피해 다니나 하는 생각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그나저나 눈 소식을 접하니 <만엽집>에 나오는 남녀의 문답가가 문득 떠오른다. 지난 여름에 어쩌다 보니 완역본 2종을 연이어 구입하게 되어서 관련서도 뒤적이다가, 우에노 마코토라는 연구자가 쓴 <천년의 연가 만엽집>이라는 해설서에서 우연히 접하고 흥미를 느낀 까닭이다.


이 책은 <만엽집>의 내용을 토대로 옛 일본인들의 기쁨, 분노, 비애, 즐거움을 설명하는데, 그중 기쁨에 관한 장에 "내리는 눈에 신명나서 떠들어대는 만엽 시대의 사람"이라는 절이 있다. 제목 그대로 <만엽집>에 수록된 작품을 남긴 시인들은 눈을 무척이나 귀하게 여겼다는 거다.


왜냐하면 그들 중 상당수의 거주지였던 긴키(近畿), 즉 오늘날의 간사이(関西) 지역은 원래부터 눈이 드문 곳이기 때문이다. 우에노 마코토는 이런 사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로 <만엽집> 권2에 나오는 덴무 천황(673-686 재위)과 후지와라 부인의 문답시를 제시한다.



내가 사는 곳에 큰 눈이 내렸구나

당신이 있는 후지와라의 낡아서 추레해진 마을에

내리는 것은 나중이겠지 (권2 103)



여기서 부인(夫人)은 왕비(妃) 다음가는 지위인데, 당시의 천황은 왕비 두 명과 부인 세 명을 비롯해서 여러 아내를 거느릴 수 있었다. 마침 후지와라 부인은 덴무 천황의 거처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따로 살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자 부인은 다음과 같은 답가를 보냈다.



그 눈은 언덕의 용신에게 제가 명령해서 내리게 한

눈의 일부가 그쪽에 내린 게 아닐까요 (권2 104)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남자가 '여기는 눈 오는데 거기는 후진 동네라 안 올거임. ㅋㅋ' 하고 문자를 보내자, 여자가 '어, 그 눈, 내가 내리라고 해서 내리는 거임. ㅋㅋ' 하고 답장 문자를 보내는 셈이다. 서로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임을 보여준다고 해야 맞겠다.


<만엽집>이라고 하면 일본 내에서도 정확한 해독이 어렵다는 평가가 있고, 우리말로는 한동안 번역이 없었던 까닭에 일각에서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둥, 그 안에 고대 한국과 관련된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둥 사실상 유사역사학에 가까운 주장도 나오곤 했다.


하지만 위의 눈 노래로도 알 수 있듯이, 실제로는 남녀의 애정을 비롯한 일반적인 주제에 대해서 노래한 다양한 시를 엮은 작품집이라고 해야 맞을 법하다. 한때 유교적 이상을 담았다고 여겨진 <시경>도 지금은 남녀의 애정 같은 다양한 주제의 노래집으로 재평가되었듯 말이다.


<만엽집> 완역본은 2종인데, <만요슈>(전3권, 최광준 옮김, 국학자료원, 2018)는 절판이고, <만엽집>(전14권, 이연숙 옮김, 박이정, 2012-2018)은 현재 일부 품절이다. 선집으로는 이와나미신서 중 하나인 <만요슈 선집>(사이토 모키치 지음, 김수희 옮김, 2020)을 참고할 만하다.


완역본 2종 가운데 이연숙의 번역은 원문의 운율까지 감안하여 시의 형태를 유지하려 노력한 직역이고, 최광준의 번역은 운율보다 의미 전달을 우선시한 의역으로 간혹 첨언도 서슴지 않은 듯하다. 위에서 언급한 덴무 천황과 후지와라 부인의 문답시를 보면 차이를 알 수 있다.



권2 103


이연숙: 우리 마을에 / 많은 눈이 내리네 / 오호하라의 / 그 한적한 마을에 / 내리는 건 후겠지


최광준: 우리 마을에 큰 눈 왔네. 당신이 있는 오하라처럼 오래 된 마을에는 나중에 내리겠지?


김수희: 우리 마을에 많은 눈이 내렸네 / 오하라의 한적한 마을에는 나중에 내리겠지.



권2 104


이연숙: 우리 마을의 / 용신에게 말해서 / 내리게 했던 / 눈의 그 조각들이 / 거기 내린 거겠죠


최광준: 내가 사는 언덕의 물의 신에게 부탁하여 그곳에 눈이 내린 것이예요. 그런 줄도 모르고 좋아하셨죠?


김수희: 이곳 언덕의 용신에게 고하여 내리게 했던 / 눈의 그 조각들이 그곳에 내렸군요



기억을 더듬어 보니 나귀님이 <만엽집>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것은 국문학자 김사엽이 저술한 대우학술총서의 <일본의 만엽집>이란 책을 통해서였다. 저자는 일본에서 오래 활동하며 <만엽집>의 우리말 번역도 시도했지만 중도에 타계하며 결국 완역하지는 못했다고 알고 있다.


두 번째 시도인 이연숙의 <만엽집>은 처음 1-3권이 나왔을 때만 해도 과연 완간이 가능할지 의심스러웠는데, 무려 6년의 노력 끝에 최초의 완역본이 탄생했으니 노고를 칭찬할 만하다. 세 번째 시도인 최광준의 완역본 <만요슈>는 이연숙보다 조금 늦게 세 권이 한꺼번에 나왔다.


나귀님이야 <만엽집> 완질을 구매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다만 중고가 나올 때마다 호기심에 한두 권씩 구입하다 보니 전권을 갖게 되었을 뿐이다. 이연숙 번역본은 12년에 1-3권, 16년에 4-5권, 22년에 9, 14권, 23년에 6-8, 11-13권, 24년에 10권을 무려 12년에 걸쳐 모았다.


최광준 번역은 <일한대역 만엽집 선>으로 처음 접했는데, 일본어 학습 교재를 의도한 까닭인지 시 자체는 번역하지 않고 해설 위주라서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절판본 <만요슈> 완질 중고가 알라딘 일산점에 있기에 충동구매를 하면서 얼떨결에 완역본 2종을 갖게 되었다.


앞서의 사례처럼 <만엽집>에는 남녀 간의 애정시가 많이 들어 있다. 이런 유서 깊은 사례만 놓고 보아도 최근 인터넷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남혐이니 여혐이니 하는 선동적인 주장은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헛소리일 수밖에 없는데, 나름 배웠다는 사람들도 동조하니 묘한 일이다.


인류학자 나폴레옹 샤농이 문화유물론의 괴수 마빈 해리스를 비판하며 말했듯이, 남녀가 "고기 먹게 사냥하자"고 노래하기보다는 "너랑 나랑 사랑하자"고 노래하기 더 쉬운 것이 인지상정이지 않겠나. 그건 절대로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도태될 운명일 터이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랜만에 다시 뒤적인 어슐러 르귄의 에세이집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바로 그의 어머니 시오도라 크로버에 대한 회고... 라고 쓰다가 혹시나 싶어 <남겨둘 시간이 없습니다>를 다시 펼쳐 보니 정작 그 내용은 없었다. 어제 함께 꺼냈던 다른 에세이집 가운데 하나에 섀클턴과 함께 들어 있었는데 여기 있다고 착각했던 모양이다.


생각해 보니, 나귀님은 그 딸보다 그 엄마 쪽을 더 먼저 책으로 접했다. 남편인 인류학자 앨프리드 크로버가 돌본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에 관한 논픽션을 아내가 썼는데, 그 책이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ABE 전집의 축약본 <마지막 인디언>으로 기억하지만, 완역본이 창작과비평사의 제3세계총서로도 나왔었다.


두 여자의 모녀 관계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더 나중의 일이었는데, 어려서부터 ABE와 ACE88 전집을 애지중지했던 친구가 어느 날 자기 방 책꽂이에 있는 <마지막 인디언>을 꺼내더니, 역자 해설에 나온 내용 중에서 '저자 시오도라의 딸 어슐러도 작가다' 운운 하는 대목을 지목하며 뭔가 대단한 비밀이라도 밝혀낸 것처럼 알려주어서였다.


그때까지 번역된 작품은 자유추리문고 <어둠의 왼손>과 ACE88 <매는 하늘에서만 빛난다> 뿐이었고, 당연히 인터넷도 없었던 상태였으니 '어슐러 르귄의 엄마도 작가였구나' 하고만 생각하고 넘어갔다가, 한참 뒤에야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의 저자가 바로 그 엄마이며, 어슐러 K. 르귄의 'K'가 바로 '크로버'의 약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내가 펼친 르귄의 책에는 크로버 이야기가 없다고 하니... 다시 딴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면, 여하간, 이 책에서 이번에 유난히 흥미롭게 느껴진 글은 "내면의 아이와 벌거벗은 정치인"이라는 것이었다. 한동안 인터넷에 르귄의 창작이라며 돌아다니던 인용문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다른 사람이 윤색한 문장이었다는 이야기다.


문제의 인용문은 "창의적인 어른은 살아남은 어린이다"라는 것인데, 저자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그런 문장을 쓴 적이 없어서 직접 책을 뒤지다가 결국 포기하고 답답한 마음을 자기 블로그에 표현했다. 그러자 머지않아 독자들이 그 출처로 보이는 르귄의 글(번역서에는 단편이라 오역했지만 실제로는 에세이다)을 찾아서 제보해 주었다.


알고 보니 르귄은 "나는 성숙이란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라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가 죽어서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어린이가 살아남아서 된 것이 어른이다"라고만 썼는데, 나중에 명언 인용문을 수집하던 누군가가 위와 같이 윤색된 내용을 게시하며 일파만파로 유포되었으며, 심지어 르귄이 직접 인증했다는 허위 글까지 생겼다.


최근 논란이 되는 가짜 뉴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문제는 이런 거짓 정보가 유포되기는 쉬워도 바로잡기는 어렵다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다. 르귄도 2011년에 문제의 인용문을 상업적으로 이용하게 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처음 그 존재를 알게 되어 최초 게시자에게 삭제를 부탁했지만, 몇 년 뒤까지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가짜 명언, 또는 출처 불명의 인용문의 사례는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크게 늘어나서 지금은 아예 그 진위 여부를 판별하는 전문 사이트까지 생겨났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런 정체불명의 멋진 말을 즐겨 유포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저 자기 SNS며 블로그를 남의 눈에 돋보이게 만드는 데에만 골몰하지, 그 사실 여부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


따라서 대중의 악의... 까지는 아니지만 무지와 허영과 속물근성 같은 일상의 악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온갖 가짜 뉴스와 허위 정보와 엉터리 인용문을 사방에 퍼트린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가끔은 어떤 인용문이 집단 창작인지 집단 지성인지를 거쳐 더 근사해지기도 하지만, 대개는 르귄이 질색팔색했듯 원래 의도를 왜곡한 헛소리가 된다.


얼마 전 나귀님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에 대해 쓰며 언급한 프리모 레비의 가짜 인용문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유대인이고, 오늘날 팔레스타인 사람은 이스라엘에게 유대인이다') 역시 해당 작가의 실제 발언에 전기 작가의 추가 발언이 덧붙으며, 마치 이 인용문 전체가 해당 작가의 발언인 것처럼 오해되어 유포된 사례였다.


흔히 '법정 스님의 개고기 반대 글'이라고 잘못 유포된 것 역시 '호주 시드니 정법사의 법전 스님'이라는 이가 불교 잡지에 기고한 글을 누군가가 인터넷에 옮겼고, 이후 그 내용이 유포되면서 '법전'이 '법정'으로 와전된 경우다. 현재 길상사 홈페이지에는 이를 바로잡은 게시물이 있긴 하지만, 불교 잡지 명칭을 여전히 잘못 적어놓고 있다.


때로는 악의라고는 없었던 황당무계한 농담조차 가짜 뉴스로 가공되어 두고두고 악명을 떨치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미국의 언론인 H. L. 멩켄의 '욕조의 역사'이다. 1917년에 그는 장난삼아 욕조의 발명과 백악관 최초 도입 등에 관한 황당무계한 헛소리를 갖가지 인명과 지명과 날짜까지 자세히 곁들여 순수하게 창작해서 한 신문에 기고했다.


그러자 사방에서 더 자세한 내용을 알려달라는 요청이 빗발쳤고, 미국 전역의 매체에서 관련 보도를 쏟아내는 등, 악의 없는 거짓말이 졸지에 기정사실화되기에 이르렀다. 10년 뒤에 멩켄은 '이거 다 거짓말인 것 아시죠?'라면서 욕조의 역사는 농담에 불과했다고 이실직고했지만, 수십 개 신문에 간행된 이 해명도 상황을 바로잡지는 못했다.


이 사건을 회고한 "진실 찬가"라는 글에 따르면, 멩켄은 거짓이 사실로 오해되고 진실이 허구에 굴복하는 상황을 지켜보며, "인간의 마음에는 본능적으로 허구를 추구하는 그 무엇이 있"(430쪽)다고 판단했다. "우리가 진실과 마주하기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꾸밈없는 진실은 주로 불쾌하고 전혀 위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431쪽)


"정상적인 사람은 진실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 진실은 소수의 (...) 병적인 사람들의 열정이다. 지혜의 장에서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은 (...) 참으로 유쾌한 일련의 거짓말이다. 그런 거짓말로부터 인간의 지식이라 불리는 것의 대부분이 생겨난다. 시로 시작된 것이 사실로 끝나고, 역사책에 기록되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433쪽)


그렇다면 허구를 상상하고 서술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작가야말로 거짓의 유혹에 가장 취약할 수 있는데, 어쩌면 멩켄이 그런 터무니없는 농담을 꾸며낼 수 있었던 이유도 그래서였을지 모르겠다. 물론 평소의 멩켄은 <편견집>이라는 저서 제목에 어울릴만큼 신랄하고, 냉소적이며, 우상파괴적이고, 독선과 아집을 조롱하는 글을 쓴 사람이었다.


멩켄을 읽어본 적 없는 사람이라도. 코니 윌리스의 단편 "내부 소행"에 등장한 그의 영혼만큼은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심령술사로 자처하며 돈을 갈취하는 사기꾼 집단의 강령회에서 어쩌다 보니 진짜 멩켄의 영혼이 나타나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작품이다. 비유하자면 박정희를 불러내려는 강령회에 장준하의 영혼이 나타나 호통을 친 격이랄까.


물론 악의는 없었다지만 때로는 실없는 농담 한 마디가 터무니없는 허위 사실의 정립이라는 예상 밖의 결과를 가져오니, 프로건 아마추어건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멩켄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 이건 르귄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에세이집을 뒤적이다 보니, "약간의 제안: 식물연민"이란 묘한 글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 제목에서부터 스위프트의 반어적 풍자 전통에 충실한 글이지만, 혹시나 이런 암시에 둔감한 사람이라면 자칫 동물도 불쌍하고 식물도 불쌍하니 내친 김에 육식과 채식을 넘어서 이제 공기식만 하는 '오건'으로 나아가자는 저자의 주장을 "창의적인 어른은 살아남은 어린이다"라는 인용문처럼 사실로 받아들일 위험도 없지 않아 보이기도 하니...





[*] 그나저나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는 번역/편집이 엉망이다. "호머"와 "스나티슬라프 렘"처럼 자기네 출판사에서도 냈던 저자명을 잘못 표기한 경우부터 시작해서, 르귄이 5미터 밖에 있는 방울뱀을 쳐다보았다는 대목에서는 그 거리가 무려 "500미터"로 대폭 늘어나기까지 했다.(진짜로 500미터 밖에 있는 방울뱀을 맨눈으로 볼 정도면, 이 80대 할머니 자체가 외계인 아닌가?) 번역을 엉망으로 했더라도 편집을 제대로 했더라면 충분히 걸러낼 수 있는 오류였으니, 이래저래 자기네 대표 작가의 작품을 아무렇게나 내놓을 정도로 홀대한 출판사의 잘못을 책망할 수밖에 없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덕여대에서 남녀 공학 전환을 둘러싸고 소란이 벌어졌다는 뉴스를 접하고 나니, 문득 어슐러 르귄이 에세이 가운데 하나에서 자신의 여대 체험에 대해서 언급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런데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라는 에세이집을 오랜만에 뒤적여 보니, 기억과는 다른 내용이라 이번 사건에 굳이 갖다 붙이기는 곤란할 듯했다.


이 에세이집의 제목이 유래한 "당신의 여가 시간에"라는 글 도입부에서 르귄은 하버드 대학으로부터 1951년도 졸업생 설문 조사 요청을 받았다고 밝힌다. 하지만 자기는 여성이라 래드클리프를 나와서 그간 동문 취급도 못 받았는데, 이제 와서 태세 전환하며 동문 대접하는 것이야말로 하버드 특유의 오만이 아니겠냐고 꼬집는다.


하버드 대학은 1636년 설립 이후 20세기 중반까지 남성에게만 개방되었으며, 그 대안으로 1879년에 여성 전용 래드클리프 대학을 자매 학교로 설립했다. 1999년에 두 학교가 통합되었기에 문제의 설문 조사를 실시한 2010년에는 래드클리프 1951년도 졸업생 르귄도 하버드 동문으로 간주되었지만, 이전까지는 아니었다는 거다.


나귀님이 래드클리프 대학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것은 영화 <러브스토리> 때문이다. 남주가 하버드 다니고 여주가 래드클리프 다니면서 처음 만나는데, 나중에 다른 매체에서는 하버드-래드클리프라고도 언급하는 것을 보고 두 학교가 무슨 관계인지 궁금했다가, 나중에야 한 재단에서 운영하는 자매 학교임을 알게 되었나 그랬다.


래드클리프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헬렌 켈러일 것이다. 그 외에도 우리에게도 익숙한 작가로는 거트루드 스타인, 바버라 터크먼, 에이드리언 리치, 앤 패디먼 등이 있고, 공상과학소설 분야에서는 "퍼언 연대기"의 저자 앤 맥카프리와 <시녀 이야기>의 저자 마거릿 애트우드가 각각 르귄의 동문 선배와 후배에 해당한다.


아쉽게도 르귄의 책에서는 여성 전용 대학에 다녔던 설움이라든지, 남녀 공학 전환의 폭력성과 비인간성에 대한 성토라든지, 키스 해링과 장미셸 바스키아 같은 그래피티 화가의 작품에서 락카칠이 차지하는 미술사적 의의에 대한 의견까지는 찾을 수 없었지만, 대신 분노를 자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설득력 있는 주장은 있었다.


"분노에 관하여"에서 저자는 페미니즘 역시 분노를 무기로 삼았던 과거와는 달라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양성 권리를 얻겠다고 그저 화를 내는 건 이제 딱히 효과가 없다."(214쪽) 페미니즘을 아기에 비유하자면, 처음에는 분노와 짜증으로 자신의 욕구와 불만을 표시할 수도 있지만, 나중에는 그 단계를 넘어서야만 한다는 것이다. 


"거부된 권리는 분노를 통해 강력히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분노로는 권리를 잘 이행할 수 없다. 권리는 집요하게 정의를 추구함으로써 제대로 행사할 수 있다."(215쪽) 예를 들어 미국의 낙태 찬반 논쟁에서도 지지자의 비폭력이 반대자의 폭력과 대조됨으로써 도덕적 우위를 점했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분노가 그 효용을 넘어 계속되면 정의롭지 않아지고, 나아가 위험으로 바뀐다. 분노 자체를 목적으로 성장하고, 분노 그 자체를 가치 있게 여겼다가는 목표를 잃고 만다. 분노는 적극적 행동주의 대신 퇴보, 집착, 복수, 독선을 땔감으로 쓰기 때문이다."(216쪽) 저자는 2000년대 초 미국 공화당의 모습이 딱 그랬다고 예시한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대중적 분노, 혹은 정치적 분노"(216쪽)에 대해 위와 같이 설명한 다음,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사사로운 분노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에서 대뜸 남성 작가들에 대한 열등감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헤밍웨이를 보면 발로 걷어차고 싶고, 조이스를 보면 이가 갈리고, 필립 로스를 보면 화가 치솟는다나 뭐라나.


"내 분노의 원인은 질투나 부러움보다 공포라 해야 맞을 것이다. 헤밍웨이, 조이스, 로스가 정말로 위대한 작가들이라면, 내가 정말 좋은 작가나 아주 존경받는 작가가 될 일은 전혀 없을지 모른다는 공포. 왜냐하면 나는 절대 그들과 같은 걸 써서 독자를 즐겁게 하고 비평가들을 흡족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220쪽)


물론 르귄이 언급한 남성 작가 세 명이 시대를 잘 만나서, 또는 독자와 비평가에게 영합해서 성공을 거둔 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인 남성 작가들인 그 세 명의 문학적 가치가 실제보다 과대평가되었던 것이 뒤늦게 확인되어 문학사적 위상이 낮아진다 한들, 그 반대급부로 르귄의 위상이 올라갈 일까지는 없을 것이다.


혹시 르귄의 문학 자체가 남성 작가에 대한 열등감의 산물이라도 되는 걸까? 섀클턴의 인듀어런스 모험을 읽고 감동하여 <어둠의 왼손>을 썼지만, 정작 저 모험가가 남긴 한 마디에 '인간'이나 '남녀' 대신 '남자'만 들어 있다는 이유로 분노를 드러내고, 급기야 아문센을 앞선 여성 탐험대에 대한 대체 역사 소설까지 썼으니 말이다.


포퍼와 비트겐슈타인의 부지깽이 싸움에서건, 이 나오미와 저 나오미의 도플갱어 싸움에서건, 결국에는 상대방을 더 많이 의식하는 쪽이 사실상 패배를 인정하는 셈이라는 점을 감안해 보면, 백인 남성 작가들의 성공이며 백인 남성 모험가의 한 마디에 사사로운 분노를 느꼈을 때부터 르귄의 문학은 패배를 자인했던 것이 아닐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