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작가 제임스 그레이디의 <콘돌의 6일>(1974)은 냉전 시대 첩보 소설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이 분야의 고전인 이언 플레밍이나 프레더릭 포사이스의 주요 작품이 적국이나 테러리스트 같은 외부의 적에 맞서 싸우는 엘리트 스파이의 활약을 보여주는 반면, 그레이디의 작품은 누명을 쓰고 내부의 적과 싸우는 평범한 주인공을 등장시켰다는 점이 특이했다.


어느 날, 워싱턴 DC 소재 CIA 산하 조직 사무실에 괴한이 침입해 총기를 난사한다. 혼자 살아남은 주인공(암호명 "콘돌")이 비상 연락망으로 피습 사실을 보고하지만, 상황을 수습하러 나타난 연락관은 오히려 그에게 총을 겨눈다. 가까스레 도망친 "콘돌"은 CIA 수뇌부가 자기네 부서를 숙청했음을 깨닫고, 조직의 추적을 피해 사건의 실체를 밝혀내려고 분투한다.


충성을 바친 조직에게 갑자기 배신당해 고립되고 추적당하는 첩보원이라는 줄거리만 놓고 보면 오늘날 각종 소설과 영화와 드라마에서 숱하게 반복된 클리셰인 듯하지만, 사실은 <콘돌의 6일>이야말로 그 원형을 제시한 작품 중 하나일 것이다. 실전 경험이 사실상 전무한 책상물림인 주인공이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모면하는 모습이 각별히 흥미와 공감을 자아낸다.


소설 <콘돌의 6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영화 <콘돌의 3일>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원작의 "6일"을 "3일"로 압축하는 등 각색이 이루어졌지만, 시드니 폴락 감독에 로버트 레드퍼드와 페이 더너웨이 주연으로 1975년 개봉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기에, 오늘날에는 "콘돌"이라면 소설보다 영화를 떠올리는 사람이 훨씬 많다.


사실은 나귀님도 소설보다 영화를 더 먼저 봤다. 우리나라에서는 <콘돌>이라는 제목으로 1990년에 예술 영화 상영을 표방하던 호암아트홀에서 개봉했는데,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수입이 금지되어 제작된 지 15년이 지나서야 개봉했다는 사실 때문에 당시에 큰 화제가 되었다. 물론 나귀님은 극장에서가 아니라 나중에 <토요명화>인지 <주말의 명화>인지로 봤지만.


그 즈음에는 로맨틱한 남자 주인공의 이미지로만 굳어버린 레드퍼드의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도 특이했고, 더너웨이의 미모도 매력적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인물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살인청부업자 역할의 막스 폰 시도("멀린!")였다. 물론 도입부에 레드퍼드의 애인(?)으로 나와서 한자를 써주며 꽁냥꽁냥하는 중국계(?) 여성도 기억에 남았지만.


소설에서는 처음부터 CIA 산하 조직임을 자세히 설명하고 들어가는 반면, 영화에서는 피습 직후 비상 연락망 가동을 통해서야 주인공이 속한 사무실의 성격이 천천히 드러나기 때문에 느낌이 많이 다르다. 즉 "3일"과 "6일"의 차이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의 성격과 행적에서 제법 차이가 있으니, 영화를 먼저 본 사람이라도 소설을 다시 읽어보면 역시 흥미로울 것이다.


소설과 영화 모두 큰 인기를 얻으면서, 제임스 그레이디는 1976년에 속편 <콘돌의 그림자>를 간행했고, 무려 40년 뒤인 2014년부터 "콘돌"이 등장하는 단편을 재발표하기 시작해 2015년에 장편 <콘돌의 마지막 날들>을 간행했다. 번역서로는 <콘돌의 6일>과 <콘돌의 마지막 날들>(단편 "콘돌의 다음날"도 수록)이 오픈하우스의 '버티고' 시리즈로 각각 간행되었다.


<콘돌의 6일>의 권말에는 저자가 작품 집필 과정과 후일담을 소개한 후기가 30페이지 넘게 수록되어서 흥미를 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속한 CIA 산하의 간행물 검토 부서는 저자의 순수 창작이었지만, 이 소설을 본 KGB에서 이를 실제라고 착각한 나머지 그 구조와 기능을 똑같이 모방한 부서를 만들었다는 후일담은 냉전 시대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해 주는 일화다.


단편 "콘돌의 다음날"과 <콘돌의 마지막 날들>은 "6일" 이후로도 CIA에서 일하다 퇴직한 주인공이 백발 노인이 되어 새로운 위협과 음모에 휘말리는 내용이다. 이미 깔끔하게 마무리된 "6일"에 덧붙인 사족 같아 아쉽기는 하지만, 단편 말미의 "할란 엘리슨을 위해"라는 헌사를 보면 저자에게 "콘돌" 후속편을 독촉했던 사람들이 일반 독자 외에도 꽤 많았던 듯하다.


그나저나 오래 전 중고로 구입해 줄곧 묵혀 놓았던 이 책을 지금 다시 읽게 된 계기는 역시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던 배우 로버트 레드퍼드의 타계 소식 때문이다. 사실은 작년 가을에 마루에서 무너진 책더미를 정리하다가 이 책을 발견하고는 '내가 이걸 왜 여기 두었나?' 싶어서 다른 곳에 정리하려고 빼 놓았는데, 희한하게도 바로 다음날에 타계 소식을 접했다.


폴 오스터 같으면 내친 김에 책이라도 한 권 썼을 법한 우연의 일치인데, 막상 레드퍼드에 대한 추모 글을 하나 쓰려다 보니 이후 다이앤 키튼이며 캐서린 오하라며 이순재와 안성기까지 국내외 영화배우 사망 소식이 줄줄이 이어지며 뭘 먼저 써야 하나 차일피일하다 말았다. 결국 "콘돌"도 꺼내만 놓고 해를 넘겨 버렸다가, 며칠 전에야 작정하고 읽어치운 거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가만 생각해 보니, 레드퍼드의 영화 중에 나귀님이 본 것은 그리 많지가 않다. 일단 <내일을 향해 쏴라>(1969), <스팅>(1973), <추억>(1973), <대통령의 사람들>(1976),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5) 등이 떠오르는데, 하나같이 공동 주연들의 호연이 더 돋보이던 작품들이다 보니, 레드퍼드의 대표작이라 하기에는 오히려 힘들지 않나 싶기도 하다.


버나드 맬러머드의 소설을 각색한 <내추럴>(1984), 전성기의 데브라 윙어(!)며 초창기의 대릴 해나(!)와 함께 나온 <리갈 이글>(1986), 존 디디온과 존 그레고리 던이 각본을 썼지만 오히려 셀린 디온의 주제가가 더 유명한 <업 클로즈 앤 퍼스널>(1996)도 있지만, 흥행 성공과 별개로 레드퍼드의 연기가 돋보이거나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들까지는 아니었던 듯하다.


그러니 나귀님으로선 거꾸로 <콘돌>(1975)을 보고 나서야 레드퍼드의 연기를 (물론 액션은 빼고) 진지하게 평가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메릴 스트립의 경우에도 유명 흥행작들에서는 별 느낌이 없었다가, 뒤늦게야 <실크우드>(1983)를 보고 그 탁월한 연기력을 실감했던 것과도 비슷하다고나 할까.(물론 이때도 조연으로 나온 셰어의 연기가 더 돋보이기는 했지만).


여하간 레드퍼드의 영화와 연기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 없는 나귀님이다 보니, 결국 "콘돌"을 핑계 삼아서야 간신히 그에 대한 추모글을 작성하게 된 셈이다. 물론 굳이 쓰려면야 <아웃 오브 아프리카>, <대통령의 사람들>, <내추럴>의 동명 원작이며 <스팅>의 원작인 <빅콘 게임>을 들먹였어도 상관없었겠지만, 그래도 아직 못 읽은 책은 바로 "콘돌" 시리즈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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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였나, 알라딘 첫화면에 두산 베어스 야구 선수 정수빈의 자서전인지 에세이인지의 광고가 나오기에 신기하다 싶었다. 혹시 은퇴했나 궁금해서 검색해 보니 아직 현역이라기에 한층 더 신기했다. 나귀님이 알기로는 최근 들어 국제 무대에서 대활약한 것도 아니고, 국내 무대에서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운 것도 아닌 선수인데 무려 책을 간행했으니 말이다.


기록이나 실력과는 무관하게 인기가 많은 까닭일까? 벌써 나이가 35세라니 은퇴를 염두에 두고 뭔가 정리하는 차원에서 나온 책일지도 모르겠다. 정수빈은 '잠실 아이돌' 취급을 받고 특히 여성 팬이 많다고 들었는데, 한때 응원가로 사용했던 "서핑 유에스에이"를 남녀 파트로 나누어 쨍쨍대고 부르는 것이 상당히 특이했다고 기억한다.(역시 아가씨들 무서워...)


정수빈이라면 일단 잘 치고 잘 뛰고 잘 막는 선수로 기억하는데, 지금 다시 확인해 보니 통산 기록 면에서는 딱히 내세울 것이 없지만, 한국시리즈 같은 단기전의 큰 경기에서는 상당히 인상적인 활약을 했다고 나온다. 그러고 보니 두산 팬까지는 아닌 나귀님조차도 기억하는 그의 '흙투성이 유니폼' 모습은 십중팔구 한국시리즈에서의 활약 때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나저나 두산 베어스에 대해서는 애증이 뒤섞인 감정을 느끼는 나귀님이다. 얼마 전 어떤 프로그램에서 유재석이 1982년 프로야구 원년에 OB 베어스 어린이 회원이었다고 자랑하는 모습이 나왔는데, 나귀님 역시 그때 OB 베어스 어린이 회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좋아서 가입한 것까지는 아니었고, 영등포 OB 맥주 공장까지 아버지에게 끌려 가서 가입한 거였다.


지금은 LG와 함께 서울을 연고지로 삼은 두산이지만, 프로야구 출범 초기에는 충청도를 연고지로 삼았기에, 아버지가 당신 본적에 따라 OB 베어스를 응원해야 한다고 결정한 것이었다. 물론 당신이야 예나 지금이나 야구에는 관심도 없고, 나귀님도 교회 선생님 따라 서울 운동장에 해태 경기를 보러 갔던 것을 빼면 프로야구 경기를 보러 간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당시 맥주 상자 싣고 오가는 트럭을 피해 공장 주차장 사무실쯤 되는 곳에 들어가, 담배 피우는 아저씨들 사이에서 가입서를 작성하고 기념품을 받아온 것으로 기억한다. 삼성과 롯데는 백화점에서 가입을 받고, MBC는 방송국에서 받았는데, OB는 술집에서 어린이 회원을 받을 수 없으니 공장에서 받은 것이 아닐까.(물론 삼미는 어디서 받았나 기억도 안 나지만).


OB 베어스는 어린이 회원 선물도 초라한 편이어서 딱히 어디 가서 자랑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삼성은 손바닥만한 지우개를 비롯해서 화끈한 선물이 나왔고, 롯데와 해태는 과자가 나왔고, MBC는 방송이 나왔고(?) 했지만, OB는 누르끼리한 더플백에 모자와 티셔츠 정도가 전부였다. 하긴 애들한테 맥주를 줄 수는 없었을 테니까.(그래도 삼미보단 나았을 거다).


구단 마스코트도 당시에 술집마다 걸려 있던 OB맥주의 곰 마스코트를 재활용한 것이다 보니 (지금은 "을지오비베어"라는 유명 맥주집의 간판으로만 남아 있는데, 거기서 곰이 들고 있던 맥주잔을 야구 방망이로 바꾼 것뿐이었다) 어린이의 입장에서 딱히 정이 갈 만한 모습까지는 아니었다.(물론 슈퍼맨이 빤쓰 바람으로 방망이를 휘두르는 삼미보다는 나았지만).


그러다가 OB 베어스가 프로야구 원년 우승을 덜컥 해버리는 바람에 두산그룹 계열사인 파카글라스에서 (이게 아마 '박가네 유리'라는 뜻이라던가) 우승 기념 유리컵을 1인당 5개씩 나눠주었는데, 아직 나귀님 집 찬장에 2개가 남아 있다. 40년도 넘은 물건이니 비싸면 중고로 팔아볼까 싶어 검색해 보니, 의외로 개당 5천 원쯤밖에 안 하는 것 같아서 포기해 버렸다.


딱히 열심히 응원하진 않았던 OB베어스였지만, 연고지 이전 이후로는 '치사하다' 싶어서 더욱 응원하지 않게 되었고, 훗날 각종 사건사고를 적립하며 '범죄두'라는 오명이 붙은 것을 보면서도 자업자득이니 쌤통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프로야구'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박철순과 김경문 배터리며 김우열, 윤동균, 신경식 같은 원년 선수지만.


이처럼 애증의 OB 베어스이니, 관련 기념품이라곤 앞에서 말했듯 원년 우승 기념 유리컵과 원년 어린이 회원 가입 당시 받은 연필 중 세 개만 남아 있다. 비록 더 나중의 것이기는 하지만 OB 베어스에서 만든 책도 있는데, 바로 <야구에는 민주주의가 없다: 메이저리그 명장 열전>(전2권, 레너드 코페트 지음, 이종남 옮김, OB베어스, 1995)이란 비매품 서적이다.


권두의 설명에 따르면, OB 베어스에서는 1988년부터 "챔피언 만들기"라는 시리즈로 미국 메이저리그에 관한 책을 번역해서 비매품으로 간행했는데, 제4/5집 <야구에는 민주주의가 없다>는 1995년 우승 기념으로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번역자 이종남은 당시 스포츠서울 야구부장으로 재직하며 저술과 번역으로 단행본을 여럿 간행했는데, 이 역시 그중 하나인 듯하다.


"메이저리그 명장 열전"이라는 부제대로 1900-1980년대의 주요 감독들의 약전을 담았기에 우리나라에서는 상당히 보기 드문 자료인 셈이다. 예전에 어느 헌책방에서 권당 1천 원씩에 집어들었는데, 지금 와서 구글링하면 이 책의 중고 가격이 오히려 원년 우승 기념 유리컵보다 더 비싼 듯하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물론 이것 역시 이미 30년 전 책이기는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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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앞두고 마르잔 사트라피의 타계 소식을 접하니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가는 데에야 순서 없다는 말도 있기는 하지만, 이제 50대 중반이라니 아직 한창 활동할 나이가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작년에 남편과 사별한 이후 심한 우울증으로 고생했다는데, 유족의 말로는 '사별로 인한 상심'이 사망 원인이라니 또 어떤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건지 궁금하기도 하다.


사트라피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역시나 자전 만화 <페르세폴리스>를 통해서이다. 1권에서는 팔라비 왕정 붕괴와 호메이니 독재 정권 수립 시기에 이란에서 보낸 유년기를 회고하고, 2권에서는 유럽에서 살다가 이란으로 귀국한 사춘기를 회고했으니, 이후 만화가로 명성을 얻은 과정을 설명하는 3권도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이제는 불가능해지지 않았나 싶다.


개인적으로 <페르세폴리스> 1권은 꽤 감탄하면서 읽었지만, 솔직히 2권은 살짝 실망스러운 부분도 없지 않았다. 부모는 혁명과 전쟁으로 가뜩이나 사회 불안이 일상화된 이란에 계속 머물다가는 딸이 큰 사고라도 겪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 무리해서 유럽 유학을 보내주었지만, 막상 저자는 거기 가서도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철딱서니없는 행동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작품에서도 간간히 드러나듯 저자의 부모는 이란에서도 유복한 편이었고, 왕정에서는 물론이고 호메이니 치하에서도 전문직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한 덕에 딸을 유럽에 유학보내는 부담을 충분히 감내할 만했다. 그렇게 보자면 마르잔 사트라피도 아리엘 도르프만이나 에드워드 사이드처럼 전형적인 '검머외 출신 조국의 대변자'라는 모순적인 입장에 처하지 않나 싶다. 


도르프만과 사이드도 유년기에 조국과 모국어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미국과 영어를 제2의 조국과 모국어로 선택했지만, 성인기에 와서야 비로소 제2의 조국에서 제2의 모국어로 각자의 조국을 대변하는 목소리로 변신했으니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다. 프랑스에 살면서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하는 사트라피가 이란 여성과 민주화의 대변자가 된 것도 유사해 보인다.


물론 도르프만과 사이드와 사트라피도 각자의 조국을 위해 나름대로 기여했다고는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특수하고 혜택 받은 과거를 생각해 보면, 이들의 대표 자격에 대해서는 자연스레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단적으로 한국에서 몇 년 살지도 않고 미국에 이민간 사람이 현재 한국의 각종 사안을 거론하며 대변자 역할을 한다면 이상하지 않겠나.


어쩌면 나귀님이 <페르세폴리스>의 성격을 오해했던 걸까. 자전 만화의 전범을 한 발 앞서 제시한 아트 슈피겔만의 <쥐>도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지만 실제로는 자전적 내용이 핵심이다. 즉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와의 갈등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이 목적이지, 역사적 사건에 대한 학술적, 객관적 서술을 의도한 것까지는 아니었다.


<페르세폴리스>의 장점과 단점도 그렇게 이해할 만하다. 저자의 관점은 이란 현대사에 대한 절대적 평가도 아니고, 단지 자신이 속한 계급과 집단의 관점을 보여준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일부 아쉬운 점이 있다 한들, 자신이 속하지도 않은 계급이나 집단까지 대변한다는 것은 위선일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그 한계야말로 솔직함의 이면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페르세폴리스> 이후 사트라피가 간행한 작품은 많지 않다. <바느질 수다>를 보면 타인의 일화를 재현하는 데에 뛰어난 듯하니,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처럼 최근 반세기 동안 이란인의 삶에 대한 인터뷰를 토대로 르포 만화를 작정하고 만들었다면 의외의 수작이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대신 저자는 영화 쪽으로 방향을 틀었던 듯하다.


저자는 대표작 <페르세폴리스>와 <자두치킨>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을 뿐만 아니라, 실사 영화도 여러 편 감독했다. 그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작품은 로렌 레드니스의 그래픽 노블을 각색한 <방사성>이다. 코로나 유행의 여파로 흥행에는 실패한 모양인데, 원작의 독특한 그림과 구성을 감안하여 차라리 애니메이션 각색을 했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페르세폴리스>는 이른바 '예술 만화'를 전문적으로 간행하던 새만화책에서 두 권으로 간행되었는데, 지금은 출판사가 없어진 탓인지 휴머니스트에서 합본으로 재간행된 듯하다. <바느질 수다>, <자두치킨>, <인생은 한숨>도 역시나 휴머니스트에서 나왔는데 지금은 모두 절판이다. 하나같이 가벼운 소품이니, 저자 사후인 지금 와서 재간행은 아마 어렵지 않을까.


그런데 <자두치킨>에 붙은 "까칠한 아티스트의 황당 자살기"라는 부제는 뭔가 부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애초에 그 내용 자체도 스포일러일 뿐만 아니라, '까칠'이나 '황당'도 올바른 설명까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희극처럼 보일지 몰라도, 인생의 회한을 다룬 엄연한 비극임을 감안하면, 뭔가 작품에 대한 몰이해가 개입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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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 뉴스 중에 플라톤의 명언 운운 하는 것이 있기에 뭔가 궁금해 알아보니, 무려 현직 대통령이 선거 당일 SNS에 올렸다는 다음과 같은 발언을 가리킨 것이었다. "플라톤의 말대로 최악의 저질들에게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투표 하셨나요?" 아마 세간에 떠도는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저질스러운 자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라는 말을 가리킨 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이 플라톤의 저서에 나오는 실제 문장이나 전체 맥락과는 무관하게 왜곡된 내용이라는 점이다. 지난번 우리나라에 번역된 토마스 만 에세이집에서 뜬금없이 인용되었기에 궁금해서 알아보고 쓴 글에서 언급했듯이, 이건 플라톤의 <국가> 제1권(347c)에서 소크라테스가 정치 참여자의 심리에 대해 분석한 내용 가운데 일부를 부정확하게 옮겼다.


해당 대목에서 소크라테스는 엘리트가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정치에 참여하는 이유를 가리켜, 금전도 명예도 아니고 오로지 '자기보다 못한 자에게 지배당하는' 굴욕을 면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박종현의 번역으로는 다음과 같다. "스스로 통치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을 경우에, 그에 대한 최대의 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통치를 당하는 것일세."(101쪽)


즉 플라톤의 원래 문장에서는 "최악의 저질들"이라는 표현이 없다. 단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인데, 여기서 말하는 "자기"는 뛰어난 능력을 지닌 "엘리트"이므로, 결국 엘리트보다 못하다고 해서 "최악의 저질들"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울러 앞에서 말했듯이, 이건 유권자의 심리를 설명한 것도 아니고, 출마자의 심리를 설명했다고 봐야만 정확하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안철수가 정치에 뛰어든 이유를 가리켜 금전이나 명예 때문이 아니라 '자기보다 못한 자에게 지배당하는' 굴욕을 면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하는 격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맥락부터 영 동떨어진 인용문을 가져다가 "최악의 저질들"이라는 노골적인 왜곡까지 더해 인용하며 투표 독려를 한다는 것 자체가 허위 정보 유포나 다름없는 셈이다.


굳이 플라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투표를 안 하면 최악의 저질이 당선된다'는 식의 논리는 터무니없다. 오늘날 선거 후보자는 각 정당의 검증을 거쳐 나오고, 거대 정당 두 곳의 후보 가운데 당락이 결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과연 "최악의 저질들"에 해당하는 후보가 공천될 수 있을까? 이는 '투표를 해야 최선의 후보가 당선된다'는 주장만큼이나 터무니없다.


결국 지난번 '환빠' 논란처럼, 대통령씩이나 하는 사람이 어디선가 주워 들은 말을 가지고 아는 척하다가 망신을 자초했다고 비난받아도 할 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굳이 언급했다 빈축을 사는 일이야 누구나 가능하지만, 현직 대통령은 원래부터 성급하고 경솔한 성격으로 막말이며 말실수가 잦았었으니 아무래도 곱게 보일 수 없다.


최근 들어서 가짜 뉴스 척결이니, 일베 사이트 폐쇄니를 거론한다는 현직 대통령이지만, 실제로는 본인이 앞장서서 플라톤 인용문을 왜곡하며 허위 정보를 유포하니 한심스러운 일이다. 청와대의 그 많은 참모들은 물론이고 이 내용을 옮겨 보도하는 기자들도 팩트체크 따위는 하지 않는 듯하니, 머지않아 저 왜곡된 인용문이 마치 사실인 양 곳곳에 언급되지 않을까.


하다못해 최근 <국가>를 완역했다는 정암학당 고전 연구자들이라도 나서서 '플라톤의 진의를 왜곡하면 안 된다'고 반발했더라면 노이즈 마케팅이라도 되었을 법한데, 어째서인지 플라톤을 안다고 자처할 법한 사람들 쪽의 반응은 의외로 잠잠한 듯하다. 지방선거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는 것인가, 아니면 빤히 보고도 각자의 정치 성향 때문에 못 본 척 하는 것인가.


지방선거 관련 후속 보도에서는 이번에 민주당이 받아든 '이겼지만 영 찜찜한' 성적표의 원인 중 하나로 대통령의 "최악의 저질들" 발언을 지목하기도 했다. 그냥 좋은 말로 투표를 독려했다면 조용히 넘어갔을 터인데, 굳이 자극하는 말을 입에 올리는 바람에 반발심만 불러일으키고 말았다는 것이니, 경솔한 행동으로 인해 손해를 자초한 셈이라고 해야 맞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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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W. 캠벨(1910-1971)은 이른바 SF의 황금시대인 1930-40년대를 주름잡은 미국 잡지 <어스타운딩>의 편집자로 유명하다. 그 분야의 3대 거장인 아이작 아시모프, 로버트 하인라인, 아서 클라크에다가 '작가들의 작가'인 시오도어 스터전까지 모두 발굴했다는 사실만 놓고 보아도 그 뛰어난 눈썰미며 폭넓은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나 대략 짐작할 수 있을 법하다.


그는 SF 창작도 병행했는데, 이중에서는 중편 "거기 누구냐?"가 가장 유명하다. 남극의 연구 기지에서 얼음에 파묻힌 외계인을 발굴하는데, 죽은 줄 알았던 시체가 부활해 날뛰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동물과 인간으로 의태하여 정체를 숨기는 바람에 대원들 사이에 의심과 불신이 급속히 퍼지며 외부 공격은 물론이고 내부 갈등까지도 겪는다는 이야기이다.


1950년대 매카시즘 공포를 반영했다고 평가되는 잭 피니의 <바디 스내처>와도 유사한 줄거리인데, 캠벨의 중편은 정작 저 반공주의 광풍보다 10여 년이나 먼저 비슷한 상황을 묘사했으니 이래저래 흥미로운 일이다. <바디 스내처>와 "거기 누구냐?" 모두 여러 차례 영화화되어 오래도록 인기를 누린 요인도 외계인보다 인간 갈등 묘사가 탁월한 까닭은 아닐까.


캠벨의 중편에서 특히 흥미로운 인물은 외계인의 부활 앞에서 공포에 질린 나머지 정신줄을 놓아 버린 생물학자이다. 횡설수설 해대는 그를 딱하게 여긴 동료들이 일단 창고에 감금하는데, 나중에 다시 가 보니 광증은 연기일 뿐이고 이미 외계인의 모습으로 변했고, 지구에는 없는 기술을 이용해 생전 처음 보는 기기며 무기며를 잔뜩 만들어내는 중이었다.


<우주선 비이글 호>에서도 엄청난 무력과 뛰어난 두뇌를 지닌 외계인을 멍청한 지구인이 우주선에 들이는 바람에 삽시간에 쑥대밭이 되는데, 가까스로 외계인을 제거하고 보니 짧은 시간인데도 비범한 사제 무기를 만들었기에 지구인이 기겁하는 장면이 나온다. 인간을 납치해서 자기 알을 심어놓는 그 외계인은 훗날 영화 <에일리언>에도 영감을 제공했다.


그나저나 새삼스레 캠벨의 소설을 다시 꺼내 읽은 까닭은 얼마 전 뉴스에서 한국 남극 기지의 흉기 난동 사건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대원들 간에 시비가 붙어서 당사자 두 사람을 다른 구역에 격리해 놓았다는데, 그중 한 명이 작업장에서 기계를 이용해 흉기를 제작해서 들고 다녔다는 이야기였다. 십중팔구 철판을 자르고 다듬어 만든 사제칼이 아니었을까.


비록 반중력장치나 광선총까지는 아니지만, 남극에서의 무기 제작이라 하니 캠벨의 소설 내용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남극 체류 경험자의 수기를 보면, 장기간 고립 상태로 지내야 하기 때문에 정신 건강의 양호함은 물론이고 대인 관계의 원만함도 필수 조건이라 했는데, 어쩌다 저 소설 내용에 버금가는 대참사가 일어날 뻔했던 건지 모르겠다.


나귀님이 본 책 중에서는 <얼음에 갇히다>라는 논픽션이 남극 기지의 생활상을 가장 자세하고 흥미롭게 묘사했던 것 같다. 중년 여성 의사가 남극 기지 근무를 자처해 난생 처음 월동에 들어가는데, 불운하게도 자신이 암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원격 진료와 자체 수술의 험난한 과정을 거쳐 위기를 벗어나긴 했지만, 환자라서 향후 남극 체류를 금지당한다.


저자의 서술에 따르면, 남극에서는 물자가 귀해서 사소한 물건도 내버리지 않고 재활용과 재재활용을 거치며, 주요 시설도 오래 되어 툭하면 고장 나기 때문에 불편 감내와 고통 분담은 선택 아닌 필수였다 한다. 대신 콜라에 만년설을 얹어 마시기, 사우나에서 나오자마자 남극의 눈밭에서 달리기 하고 들어가기 등 오로지 그곳에서만 가능한 보상도 있었다.


지난번 어느 방송국에서 예능 촬영을 한답시고 남극 기지에 찾아갔다가 가뜩이나 부족한 식량을 축내는 등 공연히 민폐만 끼치고 돌아왔다며 비판 여론이 일었는데, 이번에는 칼부림까지 일어날 뻔했다니 이래저래 수난의 남극 기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한편 비슷한 폭력이 전부터 비일비재했다는 지적도 있으니, 어쩌면 그것도 '한국형' 부조리의 연장일까.


그나저나 남극 최초의 칼부림 기록은 의외로 한국이 아니라 2018년에 러시아가 먼저 세웠다고 한다. 그 이유도 황당한데, 아직 읽지 않은 책의 결말을 동료가 먼저 이야기하는 바람에 빡친 사람이 칼을 휘둘렀다던가. 뭐, '스포일러라면 그럴 수도' 하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결국 나귀님도 이 글 한 편에 스포일러를 여럿 넣어버린 셈이니 살짝 뜨끔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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