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리 유제니디스의 <처녀들, 자살하다>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재간행된 모양인데, 어째선지 제목이 <버진 수어사이드>로 바뀌어 나왔다. 그렇다면 "그날 아침은 리즈번가에 남은 마지막 딸이 자살할 차례였다"라는 유명한 첫 문장도 "그날 모닝은 리즈번가에 남은 라스트 도터가 수어사이드할 턴이었다"로 바뀌었나 싶어 살펴 보았더니 아니라서 실망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처녀"와 "자살" 모두 최근 기피어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구글북스에서 "버진"으로 검색해 보니 내용상 "처녀(아가씨)", "동정녀(마리아)", "동정(첫경험)" 등 중의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책 소개글에서 "앳된"을 "애띤", "섬찟"을 "섬ㅉㅣㅅ "으로 쓴 것처럼 출판사 나름으로는 고심해서 내놓은 결과물인 것 같다.


사실 작품의 여러 가지 문맥 모두에 그나마 자연스레 어울리는 단어는 "동정"(童貞)"일 것인데, 제목부터 "처녀 자살"과 "동정 상실"(중간에 기묘한 시가 나온다!)로 중의적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의 번역 제목인 <처녀 자살 소동>을 그대로 가져다 쓰지 않은 것이 아쉬웠는데, 이제는 <처녀들, 자살하다>로도 더 이상 볼 수 없다니 안타까울 뿐이다.


물론 일본에서도 소설은 "자살한 다섯 자매", 영화는 "버진 수어사이드"로 다르게 옮기고, 중국에서는 소설과 영화 모두 "사망일기"이며, 다른 나라들도 "버진 수어사이드"로 음역한 경우가 대부분인 것을 보면, 어디서나 그놈의 제목 때문에 골치를 앓기는 앓았던 것 같다. 같은 작가의 첫 작품인 <미들섹스>도 마찬가지였으니, 이쯤 되면 상습적이라고 하겠다.


영어 초보인 한국 남성이 젊은 미국 여성에게 "버진이세요?"라고 물었다가 망신당했다는 일화는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보여주는 오래 된 유머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처녀"라는 단어에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일본에도 비슷한 유머가 있다. 미국 기차역 매표구에서 잠시 망설이던 일본인이 "에또..."라고 말하자 기차표 여덟 장이 나왔다는 거다!)


언젠가 유모차/유아차 논란에서도 언급했지만, 한 단어에 여러 가지 뜻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일상 대화를 비롯한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처녀"나 "아가씨" 같은 단어를 기피하는 최근의 풍조는 무지보다는 억지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즉 충분히 다른 뜻이 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아니라고 억지를 부리는 거다.


"총각"도 원래는 춘리 비슷한 헤어스타일에서 비롯된 단어라지만, 젊은 남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미 굳어진 그 말을 이제 와서 쓰지 말자고 주장하는 것도 억지스러울 수밖에 없다. "붉은 악마"처럼 원래는 비하와 멸칭이었던 단어조차도 긍정적인 맥락으로 해석하여 수용한 경우가 있으니, 한때 별다른 악의 없이 쓰던 단어를 이제 와서 기피하는 것도 이상하다.


물론 한끗차이인 "의원"과 "인원"을 가지고 헌법재판소에서 매일 같이 팽팽한 대립이 벌어지는 현재 상황을 보면, "처녀"가 "버진"이 된 것도 뭔가 의미심장해 보이고, 잘 살펴보면 "버진"이 아니라 "바진"이나 "비진"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처녀"가 "버진"으로 대체되는 것이 대세로 자리잡으면 결국에는 리처드 브랜슨만 혼자 웃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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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탱 게르 이야기를 하려니 자연스레 해당 일화에 대한 가장 유명한 기록 가운데 하나인 몽테뉴의 <수상록> 가운데 한 편인 "절름발이에 관하여"를 뒤적이게 되었다. 그 제목에서 가리키는 내용은 또다시 아랫도리 사정이고, 심지어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요즘 분위기에서는 논란이 될 만한 내용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진위 구분에 대한 이야기이다.


몽테뉴는 허무맹랑한 속설이 퍼지는 것에 관해 고찰하다가, 어떤 사안에 대한 사람들의 증언이 엇갈리는 와중에 '사실'의 유무보다는 '믿음'의 유무가 판단 기준으로 통용되는 세태를 꼬집는다. 즉 어떤 주장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기보다는, 그 주장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인데, 사실 이런 세태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대표적인 것이 최근 급부상한 탄핵 찬성 극우 세력의 사고방식이니, 자신들은 어떤 '사실'을 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객관적 근거 없는 주장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부정 선거며 내란 혐의는 물론이고 헌법 재판 같은 사법 체계 전반에 대해서까지도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니, 조만간 데카르트처럼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서까지도 회의하게 되지는 않을지.


특히 어떤 '사실'에 대한 '증언'의 혼란에 관해서라면 굳이 마르탱 게르나 몽테뉴까지 들먹일 필요 없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탄핵 재판이 잘 보여주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최근에는 비상 계엄 상황에서 주고받은 단어가 '의원'이냐 '인원'이냐를 두고 법정 안팎에서 여러 사람이 설전까지 벌이는 판이라니, 지켜보는 국민 입장에서는 자괴감만 커진다.


현직 대통령으로 말하자면 과거에도 미국 대통령을 만난 직후 욕설을 섞어서 막말을 내놓았다가, 뒤늦게 문제가 되자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 말했다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궤변을 내놓기도 했다. 이런 식이라면 조만간 '비상 계엄'도 '비싼데염'이란 혼잣말이 와전되었을 뿐이고, 사실 자기는 '대통령'이 아니라 '머통령'이라는 주장도 나올 만하겠다.


구체적인 맥락과 정황을 감안하면 둘 중 어느 쪽인지는 명백한데도 거짓말을 일삼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옛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했지만, 비상 계엄과 내란 혐의는 단순히 모음 하나 차이로 뒤집을 수 없는 수준 아닌가.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 단계는 지나갔으니 마지막 발버둥인 셈인데, 입을 열수록 부조리함만 더해간다.


'의원'인지 '인원'인지 어/아 구분이 그렇게 중요하면, 차라리 다음 대통령인지 머통령인지는 차라리 발음이 정확한 아나운서 출신 정치인을 뽑아야 하지 않을까. 물론 요즘 유행으로 봐서는 기껏 대통령 뽑아 놓았더니 프리랜서 선언하고 하차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테니 살짝 불안하지만, 그래도 기상캐스터 출신 정치인보다야 백 배 나을 수 있을 것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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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탄핵 재판이 진행되면서 슬금슬금 흘러나오는 여당의 차기 대권 주자 관련 뉴스 중에는 한동훈에 관한 것도 있었다. 비상 계엄 해제 직후 총리와 함께 국정을 책임진다며 나섰다가 안팎에서 주제넘은 짓이라며 몰매를 맞고 결국 여당 대표를 사임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잠깐이나마 정치의 맛을 보니 일말의 미련이 남았는지 또다시 움찔거리는 모양이다.


윤석열도 마찬가지였지만 한동훈도 자의보다는 타의로 정치판에 뛰어든 경우가 아니었나 싶다. 물론 기회가 생기자마자 선뜻 뛰어든 것을 보면 아예 관심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차라리 두 사람 모두 칼잡이 노릇만 했다면 평생 행복하지 않았을까. 지금까지의 행보를 보면 양쪽 모두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이라고는 없는 상태에서 등장해서 이 사달이 난 셈이니까.


비상 계엄 직후 여러 매체에서 쏟아낸 전문가 의견 중에는 당연히 한국 정치의 '스타 등용' 시스템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도 있었다. 문자 그대로 자기 분야에서 명성을 쌓아 대중적 인기가 높은 유명 인사를 섭외하여 정치계에 입문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한 나라의 영웅이고 한 분야의 스타인 사람을 영입했더라도 정치는 또 다른 영역이라는 것이 문제다.


제아무리 '야합'이라는 비판을 듣더라도 어찌저찌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라면, 학문이나 스포츠처럼 정답이나 승패가 확실한 분야에서 활동했던 사람의 성격에는 맞지 않을 수 있다. 이른바 스포츠 분야에서 스타 출신 지도자가 드문 것도 결국 같은 맥락이 아닐까. 뛰어난 운동 능력이 뛰어난 지도력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정치력도 마찬가지이리라.


아무리 한 분야의 스타라도 국회에 입성하면 300명 가운데 한 명에 불과하며, 종종 본인의 의견보다는 정당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한때 돌풍의 주역이었던 안철수도 국회의원이 되고나서부터는 존재감이 약해지고 말았으며,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만능까지는 아니라는 점이 윤석열의 임기 내내 반복해서 드러났었으니까.


윤석열의 행보를 보면 검찰 출신 정치인의 문제는 흑백논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 아닐까 싶은데, 이는 한동훈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특히 한동훈은 모범생 같은 이미지가 오히려 역효과를 자아낸 것도 같다. 제아무리 언변이 뛰어나도 명백한 모순까지 덮지는 못하고 종종 자가당착을 범했으니, 정치에는 수능처럼 정답이 없다는 점을 망각한 것은 아닐지.


그러고 보니 한동훈은 한때 책 선물로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2023년 12월에 법무부 장관을 그만 두고 여당 비대위원장이 되었을 때, 어느 고등학생에게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선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갑자기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기현상까지도 벌어졌다. 심지어 반년 뒤인 2024년 6월에도 어느 중학생을 만나서 똑같은 책을 선물했다고 전한다.


왜 하필 <모비 딕>인가? 관련 보도에 따르면 평소에도 각별히 감명 깊게 읽은 책이라고 언급했었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감명을 받았을까? 본인이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언급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의 관련 보도에서는 그 소설에 대한 흔한 이해대로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전념하는 주인공의 모습에 감명을 받은 것이 아니겠느냐는 해석을 내놓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모비 딕>이 단순히 '고래를 잡으려는 선장의 집념'뿐만 아니라, 심지어 '무모한 목표를 위해 본인뿐만 아니라 타인까지 희생시키려는 광기'도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좋게 말하면 집념이지만 정확히 말하면 아집에 사로잡힌 선장의 연설에 감명을 받아 하나로 똘똘 뭉친 피쿼드호야말로 죽음조차 불사하는 광신도 집단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미쳐 돌아가는 포경선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흔들리지 않은 사람이 1등 항해사인 스타벅인데, 냉정과 상식을 보유한 까닭에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점을 실감하면서도 속수무책이라 전전긍긍한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한동훈의 처지가 딱 스타벅과 비슷하지 않았나 싶다. 2023년 말에는 사태를 낙관했을지 몰라도, 2024년 중반에는 전전긍긍하지 않았을까.


따라서 똑같은 <모비 딕> 선물이라 하더라도, 2023년과 2024년의 심정은 서로 달랐을지 모른다. 처음에는 선장을 충실히 보좌하려는 마음가짐이었지만, 점차 광기로 치닫는 모습을 지켜보며 불안을 느끼지 않았을까. 하지만 항해사로서 선장을 설득하지도, 아예 하선하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비상 계엄 직후에야 역풍을 맞고서 쓸쓸히 물러나고 말았다.


그렇다면 한동훈은 광기에 사로잡혀 침몰하는 배와 운명을 같이 한 스타벅이 아니라, 동료의 관짝을 붙잡고 목숨을 부지하여 '나만 홀로 살아남아 고하러 왔소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이스마엘이었던 것일까. 본인도 이런 아이러니를 느끼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보자면 <모비 딕>을 선물했던 그의 행동이야말로 결국 자기실현적 예언은 아니었을지...




[*] 그나저나 저 고래잡이 소설을 단순히 '푯대를 향한 경주를 경주하고'로만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마치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고 '말[馬]들이 예쁘게 나오더라'고 엉뚱한 소감을 말했다는 어느 미국 보수 정치인과도 비슷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나귀님이야 앤 해서웨이의 젖통과 미셸 윌리엄스의 엉덩이가 근사했던 영화로 기억하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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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장안의 화제라는 드라마 <옥씨부인전>이 무려 "마르탱 게르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라기에 흥미가 생겼다. 물론 관심이 돋은 까닭에 드라마까지 봤다는 뜻은 아니고, 저 중세 프랑스의 기묘한 일화를 서술한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의 책을 정말 오랜만에 다시 꺼내 읽었다는 뜻일 뿐이다. 


드라마 줄거리의 또 다른 축은 이항복의 "유연전"이라는데, 그러고 보니 작년 말엔가 당쟁을 '중의 머리카락과 처녀의 불알'로 풍자했다는 그의 일화가 문득 생각나서 <국역 백사집>을 뒤적인 적이 있었다. 알고 보니 '처녀의 불알'이 아니라 '고자의 불알'이라고 해서 살짝 실망했었지만.


어쩌다 보니 또다시 아랫도리 이야기로 돌아간 나귀님인데, 마침 "마르탱 게르 이야기"에 대한 몽테뉴의 기록을 살피다 보니, 저 에세이스트 역시 남자가 하루에 몇 번을 할 수 있느냐, 여자는 하루에 몇 번을 원하느냐 하는 외설스러운 이야기를 시치미 떼고 은근슬쩍 잘도 늘어놓고 있었다.


물론 그런 이야기라면 몽테뉴보다는 동시대인 브랑톰이 한 수 위일 법하고, 비록 최악의 오역본이기는 하지만 그의 풍속담이 이미 우리나라에도 나와 있으므로 자세히 설명해 볼 만하지만, 여하간 오성부원군을 위시한 다른 이야기는 나중으로 기약하고 일단은 "마르탱 게르"에 집중해 보자.


줄거리는 꽤나 기묘하지만 의외로 단순하다. 마르탱 게르라는 남자가 아내를 두고 가출했다가 몇 년 만에 돌아와 재결합했는데, 이후 그가 가짜라고 주장하는 친척이 나와서 법적 분쟁이 벌어졌고, 뒤늦게 진짜 마르탱 게르가 귀향하면서 가짜 마르탱 게르가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몽테뉴도 <수상록>의 "절름발이에 관하여"라는 장에서 짧게 언급한 바 있었지만, 오늘날 이 내용과 관련해서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나 중세 프랑스 역사 전문가인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가 저술하여 이른바 미시사 분야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다.


흥미로운 점은 데이비스가 애초부터 책을 쓸 생각은 없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장클로드 카리에르와 다니엘 비뉴가 공동으로 집필하던 영화 <마르탱 게르의 귀향>에 역사 전문가로서 자문을 맡은 것을 계기 삼아, 본인의 말로는 영화/시나리오의 비역사성을 극복하기 위해 집필했다고 한다.


하지만 관련 사료가 부족하다 보니 데이비스도 저서 대부분을 배경 설명에 할애할 수밖에 없었고, 인물의 심리와 행동을 설명하는 과정에서는 상상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비교적 짧은 분량과 흥미로운 줄거리에도 불구하고 책 자체는 오히려 산만하고 지루한 느낌을 준다.


아울러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사료의 부족을 상상으로 때운 것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미시사란 무엇인가>에 수록된 로버트 핀레이의 "마르땡 게르 다시 만들기"가 그런 비판인데, 마침 데이비스의 반박문 "절름발이에 대하여"와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증거와 가능성"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핀레이는 데이비스가 사료보다 상상에 의존한 경우가 많으니 그 결과물도 역사보다 소설에 가깝다고 꼬집고, 데이비스는 핀레이가 비판의 근거로 삼는 전통적 해석 역시 절대적이지는 않다고 반박하며, 긴즈부르그는 역사와 소설의 경계가 항상 모호했었다고 지적하며 데이비스를 두둔한다.


나귀님 같은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데이비스는 굳이 남들이 "가지 않은 길"로 가려다 '에바' 한 것처럼도 보인다. 아내의 모호한 행동을 "여성의 주체성"으로 해석하고, 가짜의 사기 행각을 스티븐 그린블랫의 "자기 형성" 개념으로 해석한 것처럼 가장 비판을 받는 부분도 그렇다.


그런 식이라면 얼마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전청조가 여성이자 무일푼인 주제에 남성이자 재벌 후계자를 사칭한 것도 "자기 형성"으로 해석할 수 있고, 어이없게도 그런 얄팍한 술수에 넘어가서 동조했던 남현희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도 "여성의 주체성"으로 해석할 수 있을지?


미국 공중보건의 역사를 서술한 낸시 톰스는 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의 "순수와 불결" 개념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에이즈 창궐 당시 피임도구 사용을 권장했던 실제 사례에도 무작정 적용하면 오히려 부조리해진다고 지적한 바 있었는데, 혹시 데이비스도 비슷한 오류를 범한 것은 아닐까.


'가짜 마르탱 게르'와 전청조 모두 뛰어난 말재주와 대담함으로 경제적 이익을 도모했고, '마르탱 게르의 아내'와 남현희 역시 그 행동에 여전히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양쪽 모두에 "자기 형성"과 "여성의 주체성"을 끼워 맞추기는 어려워 보인다.


데이비스를 겨냥한 핀레이의 비판은 역사가의 서술이 어디까지나 사료가 보여주는 곳까지만 가야 한다는 뜻이므로 지당할 수밖에 없으며, 비록 긴즈부르그의 지적처럼 역사와 소설의 경계가 항상 뚜렷히 정해진 것까지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는 충분히 준수될 필요가 있는 기준처럼 보인다.


물론 데이비스는 "절름발이에 대하여"라는 답변에서 핀레이의 비판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자신의 해석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 제목의 유래이자 마르탱 게르에 대한 언급이 수록된 에세이에서 몽테뉴는 오히려 단언을 삼가고 가능성을 열어두라 권고한다는 것이다.


데이비스의 문제는 거꾸로 가능성에서 출발하여 무리한 단언으로 끝났다는 점이 아니었을까. 대신 마지막까지 몽테뉴처럼 '가능성이 있지만 진실은 아무도 단언 못한다'는 회의적 태도를 유지했거나, 차라리 카리에르와 비뉴가 훗날 시나리오를 개작한 것처럼 '소설'을 썼더라면 어땠을까.


아이러니한 점은 데이비스의 저서가 워낙 유명해지다 보니 또 하나의 권위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점이다. 오죽하면 스페인사 전문가인 존 H. 엘리엇이 마르탱 게르(Martin Guerre)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보다 유명해진 것이야말로 역사학계의 왜곡된 현실이라며 꼬집었을 정도니까.


물론 졸지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행방불명자 겸 오쟁이 진 남편이 된 것이 '진짜' 마르탱 게르의 잘못까지는 아니듯이, 졸지에 저 위대한 종교개혁가의 명성을 뛰어넘는 명성을 획득한 것 역시 마르탱 게르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루터의 명성 역시 게르보다는 더 오래 갈 것이고.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뒤 기록 대부분이 유실된 상태에서 극소수의 사료에만 의거해, 21세기 한국에서 "자기 형성"과 "여성의 주체성"의 대표 사례로서 전청조와 남현희가 거론되면 지금의 우리로서는 살짝 황당할 것도 같다. 물론 그것이 역사의 본질이자 한계라면 할 말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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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바깥양반과 산책하다가 옆동네에서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과 마주쳤는데, 푸러리인지 뭔지 알 수 없는 하얀 놈이 갑자기 나를 보고 미친 듯이 짖어대는 거다. 내가 먼저 위협한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지랄발광을 하는지 알 수 없어서 황당했고, 그걸 보고 제지하기는커녕 멀거니 서 있는 개주인의 행동 역시 황당했었다.


그냥 웃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인데 한동안 그 기억을 곰곰이 떠올려보게 된 까닭은 '그 개가 도대체 뭘 보고 그랬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다. 내 뒤에 다른 뭔가가 없었으니 분명 나를 보고 짖은 것일 터인데, 도대체 나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그 개의 눈에는 똑똑히 보인 걸까?


어쩌면 이런 의문이 든 까닭은 그보다 얼마 전에 읽은 J. D. 베레스포드의 단편 "인간 혐오"의 내용 때문일 수도 있다. 화자는 우연히 어느 외딴 섬을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혼자 살아가는 남자를 만나는데, 그 남자는 사람의 본성을 한눈에 파악하는 능력 때문에 인간 혐오를 느낀 끝에 사회를 떠나 혼자의 삶을 택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즉 남자는 누군가를 어깨 너머로 돌아보면 상대의 본성을 단숨에 이해하게 되는데, 그렇게 파악한 주위 사람들의 인성이 하나같이 부정적인 것뿐이라서 자연히 세상을 등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반신반의한 화자가 자기 인성도 한 번 감정해 달라고 부탁하자, 사양하던 남자도 화자가 배를 타고 떠나기 직전에 뒤를 돌아보기로 약속한다.


예정된 시간이 되어 화자가 섬을 떠나는 배에 올라타기 직전, 육지에 남아 있던 남자가 약속대로 멀리서 어깨 너머로 돌아보는데... 곧이어 그의 얼굴에 지독한 혐오의 표정이 떠오른다. "그는 바보처럼 혐오와 질색의 표정을 지었다. 나는 예전에 어느 천치 꼬마가 토하기 직전에 지었던 표정에서 이와 비슷한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


화자는 당황한 나머지 재빨리 뒤로 돌아서서 배에 올라타 그곳을 떠났으며, '그는 나에게서 무엇을 보았길래 그랬을까?' 하는 의문을 줄곧 떨치지 못했지만 차마 다시 가서 물어볼 수는 없었다며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도대체 남자는 화자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점잖은 외모 속에 과연 어떤 역겨운 악덕이며 단점이 숨어 있었던 걸까?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고대의 격언이야말로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임을 자각했다고 주장했는데, 베레스포드의 단편을 읽고 나면 그것이야말로 어려운 일을 넘어서서 자칫 세상에서 가장 싫은 일이 될 가능성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이미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단편 속 화자는 마치 누명이라도 쓴 듯한 투로 그 신비한 성격 판별법의 진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지만, 실제로 그가 평소에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본인 외에 아무도 모를 일이다. 아니, 어쩌면 화자는 자신의 평소 됨됨이며 마음가짐을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뭔가 찔려서 애써 변명을 내놓는 것은 아닐까?


최근에는 MBTI인지 TSMC인지 하는 성격 유형 판별법이 유행한다지만, 자기 성격이 어떤지를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미 아는 내용을 검증하기 위해서, 또는 다른 누군가의 더 권위 있는 목소리로 확인하고 싶어서 알아본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타로나 사주처럼 '재미'로 가장한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본성을 가감 없이 직면하게 된다면, 십중팔구 "인간 혐오"의 화자처럼 놀라고 당황하지 않을까. "늑대 눈썹"인지 "호랑이 눈썹"인지 하는 유사한 민담도 있다. 제목에 나온 마법 아이템을 이용해 사람을 쳐다보면 외양 너머 실체가 드러나는데, 주인공이 길에 나가 검증해 보니 진짜 사람은 없고 인간의 탈을 쓴 짐승뿐이었다.


그렇게 보자면 본인이건 타인이건 간에 사람의 성격을 미리부터 정확히 판단하는 재능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일 수 있겠다. "인간 혐오"와 "늑대 눈썹"의 주인공처럼, 또는 "젊은 굿맨 브라운"처럼 주위 사람들의 실체에 실망한 나머지 불신과 혐오에 빠져 우울하게 살아가거나, 아니면 아예 사회를 떠나 고립을 택하지 않으려나.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극도로 민감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령 당혹감을 느꼈더라도 더 이상은 굳이 캐묻지 않기로 작정했던 "인간 혐오"의 화자처럼, 마음 한편으로는 찜찜해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 않을까. 나도 완벽하지 않지만 상대방도 완벽하지 않으니, 그냥 모른척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MBTI니 TSMC니 하는 성격 유형을 새로운 세대의 신주단지처럼 툭하면 들먹이는 행동이 무의미해 보이는 이유도 그래서인데, '검사는 이렇게 나왔지만 실제로는 저런 쪽이더라'는 식의 변명이 종종 곁들여지기 때문이다. 맹신과 부정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셈이니, 이것이야말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은 아닐지.


결국 '나는 누구일까'라는 근본적인 물음은 스스로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젊어서는 모를 수도 있지만, 나이 들어서까지 모른다고 행세하는 것은 기만일 것이다. 어떤 면에서 나이 들며 겸손해진다는 것은 결국 각자의 한계를 더 많이 알아가는 것이며, 굳이 바란 적도 없었던 그런 앎은 하루가 다르게 갱신되므로...




[*] 위에 언급한 "인간 불신"은 <세계 괴기 소설 걸작선>(전3권, 유인경 옮김, 자유문학사, 2004)에 수록된 것으로 읽었다. 기존의 유사한 단편집과 중복된 작품도 더러 있지만, 여기에만 수록된 것들도 있으니 공포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하겠다.



1권

유령 저택 (불워 리턴)

에드먼드 옴 경 (헨리 제임스)

포인터 씨의 일기 (M. R. 제임스)

원숭이 손 (W. W. 제이콥스)

위대한 목신 (아서 매컨)

유충 (E. F. 벤슨)

비서의 기이한 이야기 (알제논 블랙우드)

염천 (W. F. 하비)

녹차 (조지프 셰리던 르 파누)


2권

생각하는 식물 (존 콜리어)

돌아온 소피 메이슨 (E. M. 델라필드)

배가 지나가지 않는 섬 (L. E. 스미스)

울부짖는 해골 (F. M. 크로포드)

스레드니 바쉬탈 (사키)

늑대 인간 (프레드릭 매리엇)

주택 임대 (헨리 커트너)

인간 불신 (J. D. 베레스포드)

난쟁이의 저주 (E. L. 화이트)

먼 훗날 (에디스 와튼)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피츠제임스 오브라이언)


3권

스페이드의 여왕 (알렉산드르 푸슈킨)

요물 (암브로스 비어스)

클라리몽드 (테오필 고티에)

신호원 (찰스 디킨스)

빌 부인의 망령 (다니엘 디포)

라파치니의 딸 (너새니얼 호손)

폐가 (에른스트 테오도르 아마데우스 호프만)

성찬제 (아나톨 프랑스)

환상의 인력거 (러디어드 키플링)

이층 침대 (프란시스 마리온 크로포드)

라자루스 (레오니드 니콜라이비치 안드레프)

유령 (기드 모파상)

유령의 이사 (프랜시스 리처드 스톡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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