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첫화면에서 뭘 또 잘못 눌러서 한동안 잊었던 "투비컨티뉴드" 메뉴로 들어가 보니, 거기 올라온 게시물 중에 눈에 익은 그림체의 만화가 보인다. 바로 네이버 웹툰에서 <모두에게 완자가>라는 일상툰을 연재했던 작가가 <너에게 완자가>라는 제목으로 신작을 연재하는 모양이다. 이제는 연인도 바뀌어서 '야부'("야채 부리토"의 준말?) 대신 '챔새'가 나온다.


이 만화의 특징은 저자가 동성애자이다 보니 레즈비언 커플의 일상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는 것이다. 소재의 특성상 저자의 사생활 노출부터 타인의 '아웃팅' 위험까지 포함해서 연재 중에 이런저런 논란도 다양하게 있었던 모양이다. 완결 이후 신작이 없어 궁금하더니만 의외의 장소에서 다시 만나게 된 셈인데, 이건 또 언제까지 이어나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


나귀님으로서는 딱히 공감할 만한 데가 거의 없다시피 한 만화를 여지껏 기억하고 있는 까닭은, 비교적 나중의 회차 가운데 상당히 인상적인 내용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에 하필이면 엄마가 아기를 낳게 되어, 아빠는 병원에 가고 완자 혼자서 학교에 간다. 입학식이 끝났지만 보호자가 없었으니 선생님마저 퇴근한 교실에 꼬맹이 혼자 남는다.


이날 벌어진 사건 중에는 한글을 아직 깨우치지 못한 완자가 자기 이름을 적어야 하는 상황에서 이름표를 보고 똑같이 따라 '그리는' 일이 있었다. 문제는 이름표를 붙인 채 고개를 숙여서 보고 그리다 보니 글자가 뒤집힌 채로 (예를 들어 "는"을 "극"으로, 또는 "너구리"를 "RtA"로) 잘못 쓰는 대목이다. 우습기도 하고 딱하기도 해서인지 유독 기억에 남는 일화였다.


투비컨티뉴드라는 것도 한때는 지금의 만권당 못지않게 광고를 요란하게 하더니만, 어느새 시들해진 듯하다. 사실 완자보다 <여탕 보고서>와 <극한견주>의 작가 마일로의 만화 때문에라도 자주 들러야 했을 터인데, 실제로는 그게 있다는 사실조차도 한동안 잊어버리고 있었으니 어째서일까. 물론 조회수만 놓고 보면 나귀님이 쓴 글보다는 훨씬 낫긴 하더라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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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력 좋지 않은 나귀님으로서는 이름도 외우기 힘든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헝가리 작가의 작품을 구경하다 보니, <라스트 울프>라는 것이 눈에 띄기에 저게 혹시 '그 책'인가 싶었다. 지난 여름엔가 영국 작가의 동명 단편을 구글링하다가, 그게 저 작가의 장편 내용이라고 서슴없이 거짓말을 늘어놓는 구글 AI의 "환각" 때문에 짜증이 막 치밀었기 때문이다.


그 발단은 추리소설 꽂아 놓은 책장을 뒤지다 예전에 구입한 단편 선집들을 꺼내본 거였다. 2000년의 저작권법 시행 이전에 나온 책이 대부분이다 보니, 외국의 단편 선집을 그대로 옮긴 것뿐만 아니라 국내 번역자나 출판사가 임의대로 엮어 만든 것도 있었다. 지금 와서 살펴보니 몇 가지 작품은 중복 수록되기도 했는데, 그만큼 유명하고 재미있는 까닭인 듯하다.


예를 들어 비행기에서 우연히 옆에 앉게 된 꼬마가 하는 말에 소름이 돋은 남자에 관한 이야기인 프레드 S. 토비의 단편 "여행 중인 아이"는 <존 딕슨 카를 읽은 사나이>(오일우 & 오수현 편역, 모음사, 1992)에도 "혼자 여행하는 아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고, <세계 서스펜스 명작여행>(정태원 편역, 우담, 1994)에도 "어린 여행객"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두 권 모두 '초단편'에 해당하는 짧은 작품을 주로 수록했는데, 편역서임을 감안하면 어쨌거나 저작권법이 적용되는 지금에 와서는 다시 나오기 힘든 희귀본들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중에는 후자에 수록된 헨리 스레사의 "시험날"처럼 1980년대 <환상특급> 리메이크로 영상화되어 유명해진 (나귀님도 소설보다 저 드라마 에피소드로 처음 접했다!) 작품도 있었다. 


"시험날"은 미래의 디스토피아 사회에서 정부 주관 시험을 앞두고 불안을 느끼는 소년과 그 부모의 이야기이다. 커트 보네거트의 "해리슨 버저론"과도 유사한 내용인데, 냉전 시대인 20세기 후반에는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억압당하는 디스토피아 사회를 묘사한 소설이 유행했다. <화씨 451>도 그중 하나인데, 흥미롭게도 여기서는 정치적 공정성이 억압을 가한다.


여하간 이번에 꺼낸 단편집 중에는 명지사의 '세계 미스테리 특선' 시리즈의 제5권 <영, 미, 캐나다 미스테리 걸작선>(정성호 편역, 1993)도 있었는데, 그중 레지날드 힐의 "마지막 늑대"라는 단편이 눈에 띄었다. 특이한 제목이라 한 번 읽어보았는데, 가뜩이나 모호한 내용에 번역도 자연스럽지 않아서 결말이 이해되지 않기에 원문을 찾아 대조하고 싶어졌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해질녘에 혼자서 산에서 내려오는 남자이다. 금세 날이 어두워져 발길을 재촉하는데, 갑자기 수상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가쁜 숨을 헐떡이고 눈빛을 번뜩이는 커다란 짐승의 형체가 앞길을 가로막는다. 혼비백산한 남자는 내려오던 산길을 되짚어 도망치며 늑대가 아닐까 의심하는데, 사실 영국의 '마지막 늑대'는 15세기에 이미 멸종했다 전한다.


그를 놀래킨 수수께끼의 존재를 실제 늑대로 바라보느냐, 아니면 불안한 심리에서 비롯된 헛것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이 작품은 공포 소설일 수도 있고 심리 소설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의외의 반전을 거쳐 범죄 소설일 수도 있다. 나귀님이 원문을 보고 싶어 하는 까닭도 바로 그런 여러 가지 해석의 가능성에 따라서 작품의 성격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Reginald Hill + The Last Wolf"로 구글링해 보니, 일반적인 검색 결과 대신 'AI 개요'가 맨 위에 나오는데, "이 작가의 작품 중에는 '마지막 늑대'란 것이 없고, 그건 다른 헝가리 작가의 작품"이라고 엉뚱한 소리를 서슴없이 늘어놓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헝가리 작가'가 바로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며, 해당 작품의 번역서가 <라스트 울프>이다.


십중팔구 제목이 같은 두 작품을 혼동한 모양인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이번에는 "Reginald Hill + short story + The Last Wolf"로 구글링했더니, 이 작가의 이 작품이 실제로 있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 내용에 대한 설명에서는 헝가리 작가의 동명 장편만 줄줄이 언급하고 있었다. 첫 단추는 어찌어찌 끼웠지만 다음부터는 역시나 삼천포로 빠져버렸달까.


이쯤 되니 바깥양반이 챗GPT를 사용하면서 종종 '얘가 거짓말을 잘 한다'고 투덜거렸던 내용이 무엇인지 알 만했다. 다수가 검색하는 흔한 영화에 대해서는 적중률도 높을지 몰라도,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를 검색하자 그런 영화는 없다는 둥, 다른 영화와 혼동했다는 둥, 제목은 같지만 내용이 다르다는 둥, 완전히 사실과 어긋난 주장만 서슴없는 늘어놓더라는 거다.


바깥양반도 자기 전문 분야에 대해 물어보니까 챗GPT가 용어부터 엉뚱하게 사용하기에, 야단치며(?) 일일이 교정해 주어서 이제는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게 길들였다(?) 자랑하던데, 가만 생각해 보면 결국 바깥양반이 인공지능에게 무료 과외를 해준 셈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나귀님도 구글 AI에게 그게 아니라고 야단쳤다면, 결국 정보만 제공해주는 셈일까.


차라리 예전 구글 검색처럼 "Reginald Hill"과 "The Last Wolf"가 겹치는 검색 결과부터 차례대로 보여주었더라면, 나귀님이 그 내용을 살펴보면서 해당 단편은 생각만큼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는 것이라든지, 어느 헝가리 작가의 동명 장편도 있다는 것이라든지 등등의 정보를 스스로 종합해서 알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구글 AI의 거짓말이 혼란만 키운다.


이것이야말로 테드 창이 "챗GPT는 웹의 흐릿한 JPEG이다"라는 기고문에서 지적한 문제점의 또 다른 사례인 셈이다. 모르면 그냥 모른다면 되는데 마치 아는 척하면서 엉터리 정보를 줄줄 늘어놓으니, 나귀님이 그 작품을 실제로 읽어보지 않았더라면 깜박 속지 않았을까. 이쯤 되면 과연 인공지능을 신뢰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을 해 봐야 할 것만 같다.


검색해 보니 구글AI나 챗GPT의 거짓말처럼 '실제로는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는 것'을 가리켜 '인공지능 환각'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조세호의 '가짜의 삶'처럼 자기 능력을 벗어나더라도 일단 주어진 질문에 반드시 대답해야 한다는 강박을 느끼다 보니, 사실이건 아니건 되는 대로 주워섬기는 것일까. 모르면 솔직히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학습'의 기본일 텐데.


이제는 <라스트 울프>의 저자가 급기야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했으니, 앞으로 "마지막 늑대"라는 소설에 관해 검색하면 십중팔구 이쪽에 관한 결과가 더 많이 나올 것이고, 레지날드 힐의 단편은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답변이 점차 굳어지지 않을까. 결국 AI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뭐가 더 유명한지에 따라서 존재 가치가 결정되는 셈이라 하겠다.


다만 한 가지 의외의 가능성도 남아 있으니, 바로 "마지막 늑대"를 검색하던 나귀님에게 전혀 생소한 작품인 <라스트 울프>의 가치를 애써 일깨워주려던 AI의 예지력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를 몇 달이나 앞둔 시점에서도, 혹시나 구글 AI는 특유의 알고리즘과 메커니즘과 기타 등등을 통해 그 결과를 미리 알고 나귀님께 넌지시 알려주려 했던 것이었을까?


이게 사실이라면 AI는 정보를 취합하고 정련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예언자이며 점쟁이로서의 위상을 이미 확보하게 되었다고 봐야 할 것도 같다. 물론 그보다는 노벨문학상 선정 위원 중 누군가가 심심풀이로 "AI야, <라스트 울프> 저자가 노벨문학상을 받으면 어떨 것 같아?" 하고 미리 물어본 것 때문에 결과가 누설되었을 가능성이 더 그럴싸해 보이긴 한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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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솔직히 누군지 모르겠다. 비아냥이 아니라 진짜 몰라서 하는 말이다. 사진만 볼 때에는 <나의 투쟁>이란 오해 받기 딱 좋은 제목의 책을 쓴 스칸디나비아 작가인가 싶었는데, 헝가리 소설가라니 모르는 사람이 확실했다. 하긴 작년 수상자 한강도 '한승원 딸'로만 알았던 나귀님이니, 이름조차 생소한 헝가리 작가를 알았을 리 만무하다.


물론 헝가리나 그 나라의 문학을 대놓고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나마 최근 몇 년 사이에 읽은 책 중에 그 나라 소설도 하나 있었다. 지난번 옥타보 미르보부터 장 주네에 이르는 '하녀 문학'(?)을 일별하던 중에 마주친 <에데시 언너>라는 작품인데, 줄곧 담담하면서도 뭔가 기괴했던 줄거리이다 보니 의외로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사실 헝가리라면 문학보다는 과학에서 오히려 더 두각을 나타낸 나라로서, 노벨상에서 평화상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부문에서 수상자를 배출했고, 과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만 13명에 달한다. 이른바 '케빈 베이컨 지수'의 원조인 폴 에어디시의 전기 제목처럼, 20세기 초에는 헝가리 출신 천재 과학자가 하도 많이 배출되어 '화성인 후손설'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그나저나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번역서를 알라딘에서 검색했더니, 표지가 의외로 친숙한 것이 어디서 본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세계적인 문학상을 연이어 수상했다지만 그리 대중적이지는 않아 보이는 생소한 작가의 책을 줄줄이 간행한 출판사가 있기에, 십중팔구 노벨문학상 특수를 노린 사전 포석인지 무모한 도박은 아닐까 생각했던 것도 기억나고 말이다.


그런데 번역서는 헝가리어 직역이 아니라 하나같이 영어와 독일어의 중역본으로 보인다. 국내에 해당 언어 구사자가 적을 터이니 일면 당연해 보이기도 하지만, 무려 23년 전에 임레 케르테스가 헝가리 작가로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고, 무려 35년 넘게 한국외대에 헝가리어를 가르치는 학과가 있었으니, 살짝 체면이 구겨지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겠다.


작년에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이른바 K-문학 '부심'에 빠져 살았던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사실 해외에서 한국어나 한국 문학 처지도 우리나라에서 헝가리어나 헝가리 문학의 처지와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을 만하다. 즉 우리나라에서 헝가리어가 비인기인 것만큼 외국에서 한국어도 마찬가지 아니냐는 거다.


헝가리어를 비롯해 한국외대에서만 개설된 학과의 언어가 비인기로 분류되는 까닭은 수요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수요가 부족하니 비인기이고, 비인기이니 공급이 부족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건 우리나라만의 상황도 아니다. 당장 박노자도 자기가 공부를 못해서 대학에서 가고 싶은 데 못 가고 한국어학과에 진학하게 되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한국어의 가치며 한국 문화의 개성을 세계에 알리는 데에는 골몰하면서도, 막상 그에 못지않은 가치와 개성을 지닌 외국어와 외국 문화를 아는 데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노벨문학상을 최초 수상했다는 사실에 한국어의 위상이 올라갔다며 '부심'을 느끼면서도, 정작 노벨문학상을 두 번씩이나 수상한 나라에 대해서는 여전히 잘 모른다.


물론 그 언어를 배운다고 해서 반드시 번역도 잘 하라는 법은 없다. 일부 동유럽 언어는 전공자인 원로 교수의 번역조차 오역투성이라 비난받는 실정이니, 저 헝가리 작가의 번역서를 간행한 출판사도 그런 난점을 고려해 영어와 독일어 번역가를 섭외하지 않았을까. 설령 헝가리어로 번역해도 편집 과정에서는 영어와 독일어 번역본을 참고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사실은 23년 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헝가리 작가 임레 케르테스와 관련해서도 오역 논란이 있었다. 한 출판사가 대표작 네 권을 연이어 간행했는데, 독일어에서 중역한 책뿐만 아니라 심지어 헝가리어에서 직역한 책까지도 오역 논란에 휘말렸다. 나귀님이 이 사건을 생생히 기억하는 까닭은 무려 외대 헝가리어과 동문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했던 까닭이다.


외대 동문도 헝가리어과 출신도 아닌 나귀님이 정확히 어떤 경로로 이 사실을 접하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찌어찌 소문을 듣고 찾아가 보니 해당 학과의 동문회 자유게시판에서 문제의 헝가리어 직역본에 대한 성토가 한창이었다. 해당 교수가 타교 타과 출신에다 헝가리어를 대학원부터 접해 기초가 부족하다는 인신공격 가까운 비난까지도 나오곤 했다.


이 논란과 아울러 비슷한 시기에 외대 총동문회인지 어딘지의 자유게시판에 올라온 또 다른 논란도 기억나는데, 이번에는 스페인어과의 어느 원로 교수가 같은 과 후배이며 당시 총장이었던 동료 교수를 겨냥해 내놓은 원색적인 비난이 중심이었다고 기억한다. 어쩐지 그 시절의 외대 동문회 게시판은 강자만 살아남는 살벌한 세계였던 것인가 하는 추측도 없지 않다.


그런데 사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에 와서 앞서의 논란들에 관해 검색해 보니 아무런 결과도 찾을 수 없었다. 십중팔구 그 사이에 웹사이트가 개편되고 자유게시판이 이전되는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스레 관련 내용도 인터넷에서 모습을 감춘 것이 아닌가 짐작되는데, 이쯤 되자 문득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인터넷의 한계를 얼핏 본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매일같이 어마어마한 분량의 정보를 토해내며 외관상 영원할 것만 같은 인터넷에서도 부지불식간에 유실되는 정보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 뜻밖에 확인된 셈이기 때문이다. 정확한 메커니즘까지는 모르겠지만, 세월이 흐르며 무관심 속에 정보의 바다 가장자리로 서서히 밀려난 기록이 결국 망각의 낭떠러지 너머로 떨어져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망각될 권리 차원에서야 뭔가가 인터넷 상에 영원히 박제되기보다는 차라리 낭떠러지행이 더 나을 수 있겠다. 다만 어딘가 살짝 허무한 그 유한성을 숙고해 보니, 무한과 전능의 경지를 감히 넘보는 듯한 인터넷도 우리의 하루살이 인생과 크게 다를 바 없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들기에, 역시나 머지않아 사라질 부유물 하나를 정보의 바다 한가운데 던져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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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의 (이 이름을 들으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손탁 호텔"이라 여전히 "손탁"으로 써버릇하는 나귀님이지만) 저서 <해석에 반대한다>의 새로운 번역본 <해석에 반하여>의 북펀드가 진행 중인 모양이다. 지난번 이후 구판의 번역자는 <채링크로스 84번지>를 말아먹은 사람이므로 이번 기회에 교체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벌써부터 느낌은 그리 안 좋다.


맨 먼저 눈에 거슬린 것은 북펀드의 목차에 나온 "나탈리 사토르와 소설"이라는 수록 에세이의 제목인데, 이후 구판에 나왔듯이 "나탈리 사로트와 소설"이라고 해야 맞다.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어진 프랑스 소설가이지만, 대표작 <어느 미지인의 초상화> 서문에서 사르트르가 명명해 유명해진 "신소설"(누보로망), 또는 "반소설(앙티로망)"의 대표 작가이다.


단순 오타일 수도 있지만, 막상 북펀드와 국내도서 항목에 올라온 책 소개를 읽다 보면 손택의 가장 유명한 에세이 제목도 "'캠프'에 관한 단상"과 "'캠프'에 관한 노트"로 서로 다르게 적혀 있으니, 과연 이걸 단순한 실수라고 해야 할지 살짝 망설여진다. 출판사는 '이제야 손택을 제대로 읽는다'며 자화자찬하지만, 먼저 '제대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귀님이 읽은 손택의 번역서 중에서 번역과 편집이 가장 나빴던 것은 이후에서 간행한 일기 선집이어서, 오역과 오타는 물론이고 고유명사 표기가 오락가락하는 등 전체적으로 편집을 건성으로 한 느낌이 든다. 특히 손택이 착각해서 쓴 부분을 지적하기 위해 편집자가 집어넣은 [sic](원문 그대로임) 표기를 번역 과정에서 빼버려서 원문에 없는 오류를 양산했다.


생각난 김에 지난번 언급했던 손택의 약력 속 오류도 지적하자면, "다섯 살에 마담 퀴리의 자서전을 읽고 생화학자가 되어 노벨상을 받기를 꿈꿨을 만큼 비범한 아이였다"라는 구절이다. 왜냐하면 퀴리 부인은 "자서전"을 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인터뷰집 <수전 손택의 말>에서는 '그 딸이 쓴 퀴리 부인 전기'로 정확히 옮겼던데, 어떻게 와전되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사소한 오류일 뿐이다. 퀴리 부인의 "전기"를 "자서전"이라 쓰고, "단상"과 "노트"를 혼동한들, 설마 "사울"이 "바울" 되듯 "손택"이 "발택"되고 "해석에 반하다"가 "해석에 꽂히다"가 되지는 않을 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손택도 아렌트처럼 과대평가된 '여성' 저자는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품은 나귀님의 입장에서는 이런 사소한 실수조차 의미심장해 보인다.


저자의 명성이 지나쳐서 독자는 물론이고 번역자나 편집자조차도 비판적으로 읽지 못하는 바람에, 정말 사소한 오류조차 어떤 의도인 양 오해되고 그냥 넘어가는 경우는 의외로 흔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피천득의 수필집 <인연>에서 셰익스피어 인용문의 '에어리얼'을 '에머리얼'로 잘못 입력했더니, 제자인 현직 교수가 그것조차도 '해석'하려 시도했던 일이다.


새로운 번역서에서도 손택의 대표 에세이로 내세운 '캠프'론의 경우, 그 단어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여전히 모호할 뿐이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도 저자가 책에서 두루뭉술한 정의만 내놓다 보니, 그 저서의 맥락보다는 오히려 대중화된 맥락에서 더 많이 사용하며 말 그대로 '꿈보다 해몽이 더 나은' 격이 되었는데, '캠프'도 비슷해 보인다.


이와 관련해서는 예전에 나온 <21세기 문화 미리 보기>(이영철 엮음, 시각과언어, 1999)라는 편역서의 "캠프 논쟁"이라는 장에 손택의 '캠프'론과 함께 수록된 모 메이어의 "캠프의 담론을 수정한다"("Reclaiming the Discourse of Camp," The Politics and Poetics of Camp, Moe Meyer, ed. London & New York: Routledge, 1994, pp. 1-22)를 참고할 만해 보인다.


메이어의 지적에 따르면 "캠프"는 본래 동성애자 진영에서 통하던 용어였기 때문에, 손택이 그 본래의 맥락에서 벗어나서 일반적인 의미로 전용한 것에 대해 동성애자 측의 비판도 만만찮았다고 한다. 문득 지난번 아이유의 노래 제목이 동성애자 진영의 구호와 비슷하다며 제기된 논란이 생각나는데, 사실 그건 <캔터베리 이야기>에도 나올 만큼 오래 된 구호였다.


말년에 가서야 넌지시 커밍아웃을 했던 손택이었으니, 굳이 동성애자 진영의 용어를 가져다가 대중화시키는 데에 일익을 담당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한 모양이다. 어쩌면 홍석천이 시트콤 출연 당시 동성애자 사이에서만 통하는 손짓 언어를 종종 집어넣었다고 회고했던 것처럼, 자신도 그들 중 하나임을 넌지시 알린 것은 아닐까.


하지만 유행이란 지나가게 마련이어서, '캠프'라는 단어도 지금은 망각된 편이고, 보통은 그저 간행된 지 60년이 다 된 손택의 에세이와 관련해서만 언급되는 정도에 불과해졌다. 한때는 여러 현악기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지만, 오늘날에는 하이든과 슈베르트의 소나타 제목으로만 음악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바리톤'과 '아르페지오'의 운명과도 비슷하다고 하려나.


나귀님이 수전 손택에 관심을 갖는 까닭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평생 걸친 사람'의 사례 가운데 하나로 보이기 때문이다. 성 정체성뿐만 아니라 직업 면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다니엘 슈라이버의 전기에 따르면 생계 유지를 위해 서평가로 활동하며 명성을 쌓았지만 정작 본인은 소설가로 더 인정받고 싶어 했다니, 어딘가 코넌 도일의 사례와도 유사하게 보인다.


아이자이어 벌린은 유명한 에세이에서 여러 작가와 사상가를 하나만 파는 '고슴도치형'과 다재다능한 '여우형'으로 분류한 다음, 다재다능한 문인으로서의 재능에도 불구하고 애써 금욕적인 성자의 삶을 추구했던 톨스토이를 가리켜 '고슴도치인 척하는 여우'라는 묘한 평가를 내렸는데, 어쩌면 수전 손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평가를 내릴 수 있을지는 않을지... 



[*] 얼마 전에 업다이크와 치버의 방한에 대한 자료를 뒤적이다 보니, 한국 펜(PEN) 지부 대표였던 전숙희의 회고에서 수전 손택이 등장한다. 손택이 미국 펜 지부 대표로 재직할 때, 문인을 투옥하는 독재 정권이라는 이유로 한국의 1988년도 총회 유치에 반대했고, 자신이 주도한 방해 공작이 투표로 좌절되자 분한 나머지 눈물(!)까지 흘렸다던가. 물론 일단 결정이 난 다음에는 총회를 위해 방한해서 "작가의 시대적 사명"이라는 연설까지 했다지만 말이다. 손택은 백남준과도 친분이 있었다지만, 한국 여성 작가와의 접촉은 어쩌면 전숙희가 처음이었을지도 모르는데, 피차 성향이 영 맞지 않았던 모양이니 과연 둘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을지 궁금하다. 하지만 전숙희는 이미 타계했으므로 그 내용은 이제 영영 알 수 없게 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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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언 전유성의 타계 소식을 접하고 보니, 예전에 사다 놓은 책들 중에 그의 인터뷰집도 있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원래 꽂아 두었던 옥탑방 계단 책장에는 없는 것 같았으니, 마루의 버릴 책더미에 섞여 들어갔는지 어쨌는지 몰라 차마 찾을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며칠 전 옥상 올라갔다 내려오며 살펴보니 원래의 자리에 그대로 꽂혀 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이 책은 그의 인터뷰집도 아니고 무려 남이 그에 대해서 쓴 책이었다. 말하자면 "인물 평론"이라고나 할까. 제목부터 <전유성론>(신동호 지음, 형상, 1997)인데, 부제가 "디오게네스와의 희극적 만남"이다 보니 언제부턴가 대담집이라고 착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인터뷰가 전혀 들어 있지 않고, 그의 저서 위주로 참고하고 인용해서만 쓴 책이다.


"형상대중문화총서"의 제1권인 이 책의 뒷날개를 펼치면 전유성, 주철환, 이현세, 강우석에 관한 책 네 권이 한꺼번에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결국 1990년대 후반에 주목받은 대중 문화 인물에 대한 평론 시리즈라고 해야 맞을 듯한데, 심지어 알라딘에도 서지 정보가 등록되었지만 근간 예정되었던 김수현, 박중훈, 산울림에 관한 책은 결국 간행이 불발된 듯하다.

 

특정 코미디언에 대한 평론서라고 하니 그 출간 자체에서 의의를 찾을 수도 있어 보이지만, 사실 자료로서는 가치가 별로 없다고 봐야 할 듯하다. 앞서 말했듯이 인터뷰를 통해 새로운 내용을 발굴한 것도 아니고, 기존 저서를 활용했지만 정확한 출처 표시까지는 없고, 해당 인물의 구체적인 이력에 대한 서술도 없이 저자가 받은 인상만 나열한 정도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코미디언에 대한 평론서라면 선례도 없지는 않다. '코미디의 황제'로 일컬어지는 이주일을 소재로 한 <삐딱한 광대>라는 책이 있기 때문인데, 신문 연예부 기자 둘이 공저해서 이주일의 등장이 당시의 사회에 던진 파장에 대해 서술한 것이다. 특히 당시의 주요 신문 기사를 전재한 내용이 대부분이라, 지금 와서는 자료로서 오히려 유용해 보인다.


인기 연예인의 에세이나 자서전이야 예나 지금이나 흔한 편이지만, <삐딱한 광대>처럼 남이 써준 전기나 평론은 드물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성격의 평론서라면 "최진실 신드롬"을 다룬 것과 드라마 <애인>을 다룬 것이 생각나는데, 양쪽 모두 가히 사회 현상이라고 일컬을 만큼의 인기와 영향이 있었던 사례이니 충분히 단행본 형식의 평론이 나오고도 남을 만했다.


이에 비하자면 전유성에 대한 책이 나왔다는 점은 상당히 이례적일 수밖에 없으니, 최근 그의 부고 기사에서도 반복해서 언급했듯이 오랜 이력에도 불구하고 주연보다는 조연으로 활동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책이 나온 당시에는 무대 위보다 오히려 밖에서의 활동으로 더 주목을 받으면서 명성이 오르면서 결국 재평가의 대상이 되었다고 봐야 할 법하다.


지금도 인기 좀 얻었다는 코미디언이라면 에세이를 한두 권 내기도 하는데, 전유성은 컴퓨터 입문기와 해외 여행기 등 다양한 주제로 저서를 펴내 주목을 받았고, 카페 운영 등의 사업도 병행하면서 뒤늦게야 그 팔방미인다운 역량이 주목받은 경우였다. 그의 대표 방송을 꼽아 보라면 대부분 망설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처럼 무대 밖의 명성이 더 컸기 때문이다.


코미디언 후배 홍윤화가 선배 김영철을 향해 '너는 이놈아 코미디언인데 남을 웃기지는 못하고 영어만 잘 한다니 말이 되니?' 하고 엄마 잔소리 버전으로 내놓았던 '디스'라든지, <무한도전> 시절 정형돈이 받았던 '웃기는 것 빼고 다 잘 하는 개그맨'이라는 평가는 사실 전유성에게도 비슷하게 적용가능해 보인다. 어찌 보면 한계이기도 했지만 특징이기도 했다. 


전유성이라면 '코미디언'과 구분되는 '개그맨' 1세대로 분류되고, 특히 그 명칭의 창안자로도 알려져 있는데, 나귀님 기억에는 1980년대에만 해도 전유성과 고영수 가운데 과연 누가 '개그맨'의 원조인지를 다루는 기사가 여러 건이었다. '개그맨'이란 명칭의 고안자는 전유성이지만, 방송에서 스스로를 '개그맨'으로 소개한 사람은 고영수라고 했었던 모양이다.


나귀님 생각에 '코미디언'과 '개그맨' 구분의 기준은 이른바 악극단 경력 유무가 아닐까 싶다. 과거의 코미디언은 악극단에서 활동하다가 방송국에 정착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이후에는 악극단 경력 없이 방송국에서 선발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악극단 출신으로 방송국에서 포텐을 터트린 '코미디의 황제' 이주일은 이 두 가지 흐름의 전환점에 해당한다.


물론 '개그맨'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콩글리시 논란이 줄곧 따라다녔으니, 대표적인 비판자가 번역가 안정효였다. <가짜영어사전>에서 '개그 콘서트'는 '구역질 공연'이라는 뜻일 뿐이라며 과격한 비판을 쏟아냈던 것이 기억난다. 하지만 <심슨 가족>의 도입부도 '소파 개그'(couch gag)로 지칭되는 것을 보면, 오히려 안정효 쪽에서 오해를 하지는 않았나 싶다.


역시나 '개그맨' 1세대로 꼽히는 고영수만 해도 뛰어난 언변으로 방송에만 나왔다 하면 무대를 쥐락펴락했었지만, 전유성은 항상 조연으로 슬그머니 얼굴을 내밀다 마는 수준이었으니, 제아무리 배후의 기획자로 뛰어났다 하더라도 그의 현역 시절을 기억하는 나귀님으로서는 언제부턴가 '코미디의 대부'로 평가되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또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비슷한 시기에 훨씬 더 잘 나갔던 심형래나 임하룡 같은 주연급이 방송에서 모습을 감춘 뒤에도 전유성만큼은 꾸준히 등장했었으니 역전인 셈이다. 그 다음가는 '대선배'인 이경규만 해도 5인조 (김창준, 조정현, 김정렬, 이경규, 김보화) 중에서는 오히려 처지는 편이었지만, 지금은 전유성 장례식에서 '숭구리당당' 춤을 춘 김정렬이 누군지 모를 사람이 더 많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전유성이라면 코미디보다는 오히려 책으로 더 성공한 코미디언인 동시에, 실제로도 책을 좋아한 것처럼 보인 코미디언이기도 했다. 과거 <무한도전>에서 독서에 관해 다루면서 (아마도 하하의 "오펜하이머" 독후감이 나온 회차가 아니었나 싶은데) 방송국 구내 서점에 관찰 카메라를 설치했더니, 가장 많이 찍힌 사람이 바로 전유성이었다.


어쩌다 한 번 들른 것도 아니고 거의 매일같이, 심지어 하루에도 여러 번 들러서 새로 나온 책을 뒤적이는 모습이 찍혔고, 서점 주인 말로도 단골 손님이라 했으니, 이래저래 남다른 사람이기는 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조동아리" 유튜브에 나온 코미디언 이홍렬의 증언에서도 책에 대한 전유성의 애정과 아이디어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나왔었다.


이홍렬이 후배들을 위해 무슨 좋은 일을 해볼까 고민하자, 전유성이 대뜸 '지금까지 코미디언이 쓴 책들만 한 자리에 모아 보라'고 제안했다는 거다. 이에 이홍렬이 무릎을 탁 치며 책을 수집하는 동시에, 그 활용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남산시립도서관에 무작정 찾아가서 부탁했더니만, 결국 내부에 '코미디언 서가'라고 별도의 컬렉션을 만들어주기로 했다는 거다.


도서관 중에는 특정 주제나 인물에 관한 문고(컬렉션)를 별도로 운영하는 경우가 있으니, 잘만 하면 '코미디언 서가'도 대중 문화 분야에서 특이한 기록물 보관소의 역할을 담당할 만하다. 물론 코미디언의 저서 대부분은 <전유성론>처럼 자료 가치가 미미할 수 있지만, 훗날 누군가가 한국의 코미디 역사에 대해서 연구하려 하면 나름대로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유튜브에서 해당 회차를 찾아보니, 이미 지난 여름에 '코미디언 서가'를 열었다고 한다. 남산 도서관 웹사이트에서 '큐레이션 > 북큐레이션 > 코미디언 서가' 메뉴로 들어가 보니 김영철의 영어 교재며, '옥동자'의 요리책이며, 심지어 개그맨 출신 치과의사이며 사랑니 전문가인 김영삼의 <(쉽고 빠르고 안전한) 사랑니 발치>라는 전문서까지도 망라되어 있었다.


다만 그 숫자가 적어서 아직 100권이 못 되는 초라한 모습인 듯하고, 전유성의 책은 다 있지만 <전유성론>은 없으며, 그나마도 현역 코미디언 위주이다 보니 나귀님이 소장한 구봉서, 남보원, 이주일의 저서 같은 것은 없다. 지난번 유튜브를 보고서도 기증을 해 볼까 하다가 어디 연락해야 할지 몰라 포기했는데, 이번 기회에 도서관에 연락해 볼까 싶기도 하다.


물론 작년에 집 근처 작은 도서관에 비매품 도서를 기증하려고 연락했더니 의외로 시큰둥한 반응이어서 결국 헌책방에 처분하고 말았던 것을 기억하자면, 애초부터 남 좋은 일일 뿐인 기증 따위 생각하지 말고 제값에 매각하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다. 이주일 책도 희귀본이지만 중고 가격이 몇만 원 수준인데, 생각이 있다면 연예인들이 그것 하나 못 샀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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