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신간 북펀드 광고 중에 "모차르트는 여자였다"라는 것이 있기에, 이건 또 무슨 신선한 음모론인가 싶어서 클릭해 보니 '난네를'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즉 저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누이' 비유처럼 모차르트의 누나를 비롯한 수많은 재녀들이 부당하게도 음악사에서 외면당했다는 내용인 듯하다.


이런 식의 억울한 피해자, 또는 세상이 외면한 천재를 다룬 책은 이미 숱하게 나왔지만, 종종 음모론에 가까워진다는 것이 문제다. 예를 들어 에디슨과 제너럴일렉트릭의 탐욕과 오만 때문에 테슬라가, 또는 각종 무한 에너지와 영구 기관 발명가들이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결과론적 주장은 '30년 전에 강남 아파트를 하나 사 두었더라면'이나 '10년 전에 비트코인을 조금 사 놓았더라면' 하는 후회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는 수십 년 뒤에 아파트와 비트코인이 떡상할 것을 미리 예측하지 못해 구매하지 않았던 것이 팩트이기 때문이다.


앞서 제논의 역설을 해결한 베르그송의 지적은 여기서도 딱 어울린다. 우리는 과거의 행적을 평면 위의 직선(I)이 수많은 선택지를 만나 갈림길(Y)을 만들어낸 모습으로 상상하기 쉽지만, 이것 역시 토끼와 거북이의 운동을 시각화한 제논의 눈속임처럼 시간의 흐름을 시각화한 눈속임에 불과하다.


즉 우리의 인생이 수많은 '가지 않은 길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착각일 뿐이고, 실제로는 우리가 이미 지나 온 길들만 있을 뿐이며, 사실은 그나마도 직선(I)이라기보다는 점 하나(.)로 비유해야 어울린다는 것이다. 우리의 과거 궤적은 그저 아쉬움이 빚어낸 허구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식으로 바라보자면 강남 아파트나 비트코인에 대한 아쉬움은 한낱 무의미한 푸념일 뿐이다. 과거에 부동산과 가상 화폐를 매입하지 않았던 것도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니, 설령 과거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미래를 알 수 없는 당사자로선 똑같은 결정을 최선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시대를 잘못 만났거나 여건이 좋지 않은 탓에 재능을 발휘하지 못했던 천재에 관한 통념은 비록 낭만적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허구의 산물이라고 봐야 한다. 제아무리 완벽한 조건이 갖추어졌다 하더라도 사람의 앞날은 알 수 없는 것이며, 워낙 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모차르트의 누나나 셰익스피어의 누이에 대한 비유가 과거 여성이 겪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고발이라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겠지만, 이들이 가능성을 보인 음악이나 문학 분야에서는 재능 못지않게 노력과 행운도 따라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의 성공을 쉽게 장담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유명한 화가나 음악가, 또는 최근 각광을 받는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를 살펴보면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뒤늦게야 재능이 만발한 사람도 없지 않다. 어려서부터 주목을 받은 신동 가운데 말년까지 재능을 유지한 사람이 오히려 드물다는 것도 각별히 주목해야 할 점이다.


엉뚱하게도 '친구 따라갔다가 오디션에 합격했다'거나 '언니가 먼저 시작해서 응원하러 갔다가 나도 따라하게 되었다'는 식의 증언이 적지 않음을 기억해 보면 행운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어 보인다. 충분한 재능이 있어도 각자의 결정이나 한계나 다른 이유로 중도 포기하는 사람 역시 적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개인의 재능뿐만이 아니라 노력과 행운도 중요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비록 난네를이 대단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하더라도 동생만큼 작곡가로 대성할 수 있었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거꾸로 동생이 너무 뛰어나기 때문에 누나에게까지도 똑같은 기대를 한다는 것이 부당한 일 아닐까?


예를 들어 '유전자 몰빵'의 사례로 유명한 배우 송중기의 누이만 하더라도 비록 외모에서 오빠만큼의 축복을 받지는 못한 듯하지만 다른 방면으로 대성했다고 하니, 아무리 남매라도 두 사람을 같은 선상에 놓고 (예를 들어 '동생은 왜 인기 여배우와 결혼 못했냐'며) 비교하는 것은 무리일 법하다.


아울러 셰익스피어의 누이가 실제로 있어서 정말로 혁혁한 결과물을 내놓았다 치더라도, 오늘날 그 오빠가 받는 평가를 감안해 보면 의외로 푸대접을 받았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왜냐하면 저 극작가는 세계 최고의 문인으로 추앙받는 한편,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의심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즉 셰익스피어의 전기 자료가 많지 않다는 점에 착안해서 실제로는 무명 극작가가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제 이름으로 발표한 것에 불과하다느니, 심지어 셰익스피어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 프랜시스 베이컨이나 크리스토퍼 말로 같은 당대의 유명 문인의 필명에 불과하다는 주장까지 나와 있을 정도다.


어느 학자의 지적처럼 이 모든 가설은 학력도 일천한 일개 극작가가 그토록 뛰어나고 다채로운 작품을 만들었을 리 없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니, 셰익스피어의 누이가 실제로 있었더라도 십중팔구 '오빠가 대신 써준 것'이라는 의심부터 시작해서 온갖 구구한 추측과 비난을 피할 수는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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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엔가 갑자기 옛날 공포 영화 <후라이트 나이트>가 생각나서 구글링을 하다 보니, 거기서 주인공인 흡혈귀로 나온 배우의 이름이 크리스 서랜던이다. 수전 서랜던과 같은 집안인가 궁금해서 알아보니 무려 전남편(!)이었다. 즉 본명이 수전 토말린인 여배우가 결혼 후에 남편의 성을 따라 수전 서랜던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던 거다.


나귀님도 마찬가지였지만, 크리스 서랜던이라면 아는 사람보다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것도 같은데, 막상 검색해 보니 의외로 유명한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많이 맡았던 사람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크리스마스의 악몽>에서 주인공인 해골머리 잭이고 <사탄의 인형>, <공주를 찾아서>, <뜨거운 오후> 등에도 출연했었다 한다.


제목만 대면 누구나 알 법한 영화이기는 한데, 기껏 주연을 맡았을 때에는 해골 애니메이션이나 흡혈귀 분장이고, 그나마 멀쩡한 역할로 나왔을 때에는 칼 들고 덤비는 인형이라든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황당무계한 전개라든지, 심지어 알 파치노가 워낙 인상적이다 보니 비교적 관객의 기억에 덜 남았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여자가 결혼하며 남편의 성을 따르는 제도는 서양 대부분의 나라와 일본 등에서 실시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유명인 중에서도 수전 서랜던처럼 전남편의 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듯하다. 지난번에 언급한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도 두 번째 남편의 성을 따른 경우였고, 첫 결혼 직후엔 린 세이건이었다.


어쩌면 남성우월 여성폄하의 대표적인 사회 부조리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 성(물려받은 이름)과 명(부여받은 이름)을 굳이 사용하게 되었던 이유를 고려해 보면, 부부의 성 통일도 억압을 위해서라기보다는 편의를 위해서라고 추론이 가능하며, 지금 와서는 의무까지는 아니게 되었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추론이 가능하다.


미국처럼 이민자가 많았던 나라에서는 결혼이나 이주를 통해 외국인의 느낌이 강한 원래 성 대신에 비교적 평범한 성을 얻음으로써 사회적 편견이나 차별에서 벗어나는 것을 선호했던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알고 있다. 여성의 경우에는 억압적인 부모의 성 대신 남편의 성을 따름으로써 일종의 해방감을 느낀 사람도 없지 않았던 듯하다.


영화에서는 별거 중이거나 이혼 상태인 아내가 남편의 성 대신 원래 성을 다시 쓰는 것이 심경 변화를 보여주는 장치로도 사용되는데, 예를 들어 <다이 하드>에서 한동안 멀어진 아내를 회사로 찾아간 브루스 윌리스가 경비실에서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아내가 남편 성 대신 원래 성을 쓴다는 사실을 알고 심란해 하는 장면이 그렇다.


그러다 보니 여성의 경우에는 비록 성이 같아도 혈연까지는 아닌 사례가 없지 않은데, 최근 나귀님이 궁금해서 알아본 사례로는 영국의 작가 엘리제베스 폰 아르님(1866-1841)과 독일의 작가 베티나 폰 아르님(1785-1859)이 그러했다. 양쪽 모두 결혼으로 아르님 가문에 들어온 사람이고, 워낙 대가문이다 보니 딱히 접점은 없는 듯하다.


베티나 폰 아르님은 어린 나이에 노년의 괴테와 교우하기도 했던 천재 소녀로 유명한데, 나중에 가서는 괴테 부인과 대판 싸움을 벌이는 바람에 결국 저 유명한 작가와도 거리가 멀어졌다. 원래 성은 브렌타노인데 동생 클레멘스의 친구이자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의 공저자인 루드비히와 결혼해서 아르님 가문의 일원이 된 경우이다.


엘리자베스 폰 아르님은 본명이 메리 보챔프이고 원래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인데, 첫 번째 남편이 독일의 귀족인 헤닝 아우구스트 폰 아르님슐라겐틴이었다. 사별 후에 만난 두 번째 남편이 버트런드 러셀의 형인 프랭크 러셀 백작이어서 자연히 엘리자베스 러셀로 통했지만, 필명으로는 여전히 엘리자베스 폰 아르님을 이용한 모양이다.


흥미로운 점은 엘리자베스 폰 아르님의 사촌이 영국의 유명한 소설가 캐서린 맨스필드라는 것이다. 이쪽도 본명은 캐서린 맨스필드 보챔프이고 저 유명한 필명은 본명 가운데 일부를 조합한 것이었다. 베티나 폰 아르님의 할머니도 당대의 저명한 소설가였다고 하니, 결국 문학적 재능이란 것도 물려 받는 것인가 하는 느낌이 없지 않다.


언젠가 언급했듯이 일본 중세 여성 문학의 대표 작가인 '미치쓰나의 어머니'의 후손 중에도 여성 문인이 여러 명 배출되었고, 우리나라 조선 시대 궁중 문학의 대표 작품인 <한중록>과 <계축일기> 역시 풍산 홍씨 가문의 여성들에게서 나왔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여성 문학에서의 혈통과 계보를 따져보는 것도 상당히 흥미로울 것 같다.


아울러 여성의 이름과 정체성의 문제도 생각할 만해 보인다. '미치쓰나의 어머니'나 '혜경궁 홍씨'는 자기 이름 없이 항상 가족이나 직책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이름을 가졌던 사람이니 말이다. 물론 '허난설헌'처럼 뒤늦게 문학사에서 지워지는 듯한 사람도 있음을 감안해 보면, 정말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작품 같기도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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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뭘 사러 나갔다가 시에서 운영하는 공공 건물 앞을 지나다 보니 "유아차 보관대"라는 것이 눈에 띄기에 새삼 유모차/유아차 명칭 논란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되었다. 미망인이나 애완동물 명칭 논란도 그렇지만, 멀쩡히 잘만 쓰던 단어에 굳이 시비를 거는 것이야말로 일부의 무지나 악의에서 비롯된 행동이니 아예 무시하는 게 상책이다.


이처럼 기존의 단어를 불신하고 폄하하는 사람들의 경우, 단어의 관용적이거나 비유적인 의미는 깡그리 무시하고, 의도적 오독을 거쳐 자기 목적에 걸맞게 악용한다. 한때 영어권에서 역사(HISTORY)라는 단어가 남성의(HIS) 전유물이므로 여사(HERSTORY)라고 바꾸어야 한다는 억지 주장이 나왔었는데, 이게 결국 우리나라까지 퍼진 건가 싶다.


예를 들어 애완동물(愛玩動物)을 "희롱하기 위한 동물"로, 미망인(未亡人)을 "아직 죽지 않은 사람"으로, 유모차(乳母車)를 "엄마만 끄는 수레"로 직독직해하는 일각의 주장이 그러한데, 사실 "애완"은 "완물상지"라는 격언에 나오듯 애지중지한다는 뜻이고, "미망인"은 유족의 크나큰 슬픔을 빗댄 것이며, "유모차"도 "유모"라는 직업에서 유래했다.


이처럼 애완동물이나 미망인이나 유모차를 직독직해하는 사람이라면 국어 과목에서 좋은 점수 받기는 글렀다고 볼 수 있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유명한 비유나 중의법이나 동음이의어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할 테니까. 일상 생활에서도 붕어빵을 사면서 왜 붕어가 없느냐며 따지고, "힘들어 죽겠다"는 친구의 푸념에 구급차를 부르지 않을까.


그런 사람이라면 아마 '여자'(女子)라는 단어부터 쓰지 말자고 주장할 법하다. 왜냐하면 국어사전에 나오는 1차적 의미만 놓고 보면 '계집'(女)이란 멸칭과 '아들'(子)의 조합이어서 그 명칭부터 비존재 겸 부조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집'이 멸칭으로 인식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며, '자'(子)에는 "아들" 말고 "사람"이란 뜻도 있다.


볼테르는 "신성로마제국"을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에 있지도 않으며, "제국"도 아니라고 조롱했지만, 정작 그 명칭으로 일컬어지던 나라는 무려 천 년 가까이 존속했다. 그런가 하면 "스텐 그릇"처럼 애초에 의도했던 뜻과는 정반대의 명칭을 갖게 된 경우도 있는데, 지금은 완전히 실생활에서 굳어져 별다른 불편 없이 사용되고 있다.


이런 사례만 보아도 한두 가지 단어를 바꾼다고 해서 세상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고, 설령 잘못된 단어라도 일상 생활에서는 별 문제 없이 사용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어원을 따지는 주장 자체는 단어를 굳이 분해해서 늘어놓은 트집잡기일 뿐이며, 어떤 면에서는 저 유명한 제논의 역설처럼 눈속임을 이용해 만들어낸 궤변에 불과하다. 


유명한 제논의 역설은 예를 들어 토끼와 거북이의 달리기에서 토끼가 몇 발자국 뒤에서 출발한다면 결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토끼가 거북이를 따라잡을 시간에, 거북이는 토끼를 피해서 조금이라도 전진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현실에서는 토끼가 거북이를 금세 앞지르겠지만, 왜 이 궤변은 논파가 어려울까?


왜냐하면 베르그송의 주장처럼 이 역설은 운동 그 자체가 아니라 운동의 시각화일 뿐이기 때문이다. 운동을 도면에 나타낼 경우에는 제논의 주장처럼 토끼가 거북이를 평생 따라잡지 못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의 운동은 베르그송의 지적처럼 도면에 나타난 궤적을 단숨에 휙 하고 지나가 버린다. 즉 제논의 역설은 눈속임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단어를 사용하는 방법도 그렇다. 제논의 역설처럼 글자 하나하나, 음절 하나하나를 따져서 "애+완+동+물"이나 "미+망+인"이나 "유+모+차"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애완동물"과 "미망인"과 "유모차"로 단숨에 휙 하고 인식해 버린다. 매번 어원이나 각 음절의 의미 하나하나를 따져보며 써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굳이 따져보자고 누군가가 판을 깔아주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애완동물에서 '희롱하다'를, 미망인에서 '죽지 못했다'를, 유모차에서 '엄마'를 똑 떼어서 떠올리지는 않는다. 그냥 귀여운 동물, 불쌍한 사람, 작고 소듕한 뭔가를 담은 도구로만 이해할 뿐이다. 그 명칭이야 어쨌건 간에 우리는 오로지 그 대상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이미 널리 사용되는 단어를 굳이 바꾸더라도 딱히 실익은 없으며, 그저 일부 불편러의 허영심만 채워줄 뿐이니, 애초에 언론이며 기관에서 이런 식의 억지 민원에 일일이 반응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심지어 나름대로 생각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까지도 소수 의견은 무조건 존중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동조하고 나서니 더욱 한심한 일이 아닌가.


혹시나 알라딘에 와서까지도 유모차와 미망인은 틀렸다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어원상 '알라 앗딘,' 즉 "신앙의 고귀함"이라는 아랍어를 사명으로 채택한 것으로 미루어 친이슬람, 반유대주의, 남성우월, 여성폄하 성향이 명백한 사이트에 찾아와서까지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할 이유가 있는지를 곰곰이 한 번 생각해 보면 좋겠다.



[*] 원래는 길었던 글을 군데군데 줄이다 보니 연결이 매끄럽지 않은 듯해서 일부 수정하고 첨언한 부분을 파란색으로 표시해 놓았다. 사실 아무리 좋은 뜻으로 만들거나 바꿔놓은 단어도 정작 사람들이 그렇게 쓰지 않으면 소용이 없게 마련인데, 대표적인 예가 '어린이'이다. 소파 선생은 어린애를 존대하자며 '어린이'라는 단어를 제안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요린이'나 '주린이'처럼 초짜를 가리키는 단어로 활용되자 급기야 차별적/혐오적 표현이라며 사용 자제 권고까지 나오는 판이다. 그러니 일각에서 유모차가 아니라 유아차가 맞다고 (또는 아린차나 미미차가 맞다고) 아무리 목소리를 높인들, 나중에 가서는 또 뭐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예를 들어 지금처럼 애를 낳기는 덜하고 개를 키우기는 더하다 보면, 나중에 가서는 부모보다 견주의 입김이 더 세지는 바람에 유모차도 유아차도 아닌 "개모차"라는 명칭이 대세가 될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당연히 그에 못지않은 세력으로 성장한 고양이 애호가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터이니, 여차 하면 양대 세력간의 갈등과 알력으로 제3차 세계대전이며 우주 전쟁까지도 벌어지지 않겠나... 여하간 한 마디로 쓸데 없는 논쟁이요, 부질없는 주장이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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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사에서 나온 로버트 하인라인 선집 가운데 아직 구하지 못해 아쉬웠던 <프라이데이>를 운 좋게도 알라딘 우주점에서 구입해 주말에 받아보았다. 이미 구입한 다른 네 권을 꺼내서 나란히 진열하려다 보니, 이참에 <여름으로 가는 문>은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 싶어서 일단 밖으로 빼놓았다.


아주 오래 전에 고려원 판본으로 처음 읽었고, 나중에 나온 (표지가 영 꼴불견이라 생각되는) 곤조 판본도 사다 놓았지만 아직 읽지 않은 차였다. 곤조 판본의 공역자 가운데 한 명의 이름이 새로 나온 시공사 판본의 번역자로 올라와 있던데, 결국 예전 번역을 손질해 재활용했다는 이야기인가 싶다.


이 작품을 지금 와서 새삼 다시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은 시공사 판본에 들어 있는 역자후기에서 상당히 의아한 구절을 하나 발견했기 때문이다. "댄[주인공]이 겪는 로맨스의 세부 내용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여성혐오와 소아성애의 흔적이 꽤 있다."(323쪽)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내가 기억하는 줄거리로는 딱히 이상하다 할 만한 내용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고발이었다. 천재 공학자인 주인공은 애인과 동업자에게 배신당해 강제로 냉동인간이 되어 30년 후에 깨어나고, 우여곡절 끝에 빼앗긴 재산을 되찾고 이제 성인이 된 동업자의 의붓딸과 결혼한다.


그렇다면 번역자의 비난은 십중팔구 주인공이 딸뻘인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 즉 서두에서는 12세였던 소녀가 결말에서는 20세의 성인이 되어 30세의 주인공을 다시 만난다는 것을 겨냥한 듯한데, 이건 비슷한 소재의 다른 작품처럼 나이차를 시간여행으로 극복한 것이니, 뭔가 과도한 트집 같다.


그래서 혹시 주인공이 12세 소녀를 보며 성적 매력을 느끼는 노골적인 묘사가 작품에 나오나 싶어 살펴보니, 막상 그런 대목까지는 없었다. 12세 소녀와 (심지어 그녀가 먼저 청혼해서!) 결혼을 약속하는 대목도 미래에서 20세의 모습을 보고 마음을 굳힌 채 돌아온 다음의 일이니 이상하지 않다.


주인공이 6세 때의 소녀를 '애인'이라고 부르고 '결혼 약속'까지 했다는 대목도 나오지만, 문맥상 생모를 잃고 의붓아버지와 사는 외로운 아이와 친근하게 장난을 치며 한 농담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어린아이가 멋모르고 아빠나 오빠를 결혼 상대로 지목하는 일은 현실에서도 흔하니까.


여하간 나귀님이 보기에 번역자의 주장처럼 <여름으로 가는 문>에서 소아성애의 징후를 발견한다는 것은 지나친 과장, 또는 트집일 수밖에 없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이와 종족 등의 큰 차이를 초자연적 능력으로 극복하는 것은 <도깨비>나 <별에서 온 그대>에서도 나왔던 장치였으니 말이다.


굳이 문학 작품 속의 소아성애를 가지고 논란을 만들고 싶다면 차라리 가르시아마르케스의 <백 년의 고독>에서 아우렐리아노가 초경도 치르기 전의 소녀 레메디오스를 아내로 삼았던 것을 물고 늘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 마침 조만간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로도 제작해 방영할 예정이라 하니까.


여성혐오라는 비난도 마찬가지인데, 이 책에서 주인공의 견해가 영 불편한 사람이라면 아마 기독교의 성서라든지, 호메로스나 플라톤의 작품처럼 노골적으로 여성을 하대하고, 외국인 혐오를 당연시하고, 심지어 노예제까지 긍정한 책들이 버젓이 유통된다는 사실에 경악하고도 남을 것 같다.


하지만 성서나 호메로스나 플라톤이 지금까지도 고전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여성 폄하나 외국인 혐오나 노예제 긍정 같은 단점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장점 때문이 아닐까? 마찬가지 맥락에서 <여름으로 가는 문>이 지금도 명작으로 손꼽히는 이유 역시 뭔가 다른 장점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오늘날의 잣대로 과거의 작품을 재단하는 것이야말로 무의미한 일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사소한 잘못으로 교사에게 가혹한 체벌을 당한 톰 소여는 아동 학대의 피해자일까? 평소에 담배를 즐겨 피우고 심지어 동네 아이들의 삥을 뜯고 일까지 시켰으니 세인트피터스버그의 일진일까?


번역자의 태도도 이상하다. 그토록 영 불편하게 느낀 책이라면 왜 굳이 번역을 맡았느냐고 반문하고 싶다. 게다가 개인의 생각을 굳이 역자후기에 밝힌 것은 지나치게 무례하지 않은가? 만약 고양이 싫어하는 번역자가 '고양이를 등장시킨 것이 영 불편했다'고 썼다면, 그건 정당하다고 봐야 할까?


번역자의 역할은 저자와 독자 사이를 중개하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부득이한 개입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번 책의 경우처럼 저자와 독자를 이간질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시간여행이라는 장르의 클리셰조차 이해하지 못해 나온 오해라면 더욱 곤란하지 않겠나.


번역자의 태도가 더욱 괘씸한 까닭은 사실 번역 자체가 좋지도 않기 때문이다. 당장 첫 페이지에서 주인공이 자기 집을 소개하면서 "바깥으로 나가려면 문을 열한 개나 거쳐야 한다는 게 결점이기는 했다. 피트[고양이]가 드나드는 문까지 헤아리면 열두 개지"(9쪽)라고 오역한 대목이 그렇다.


이건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된다. 무슨 교도소도 아닌데 집 한 번 드나드는 데 문을 열한 개인지 열두 개씩 지나가야 한다는 걸까? 원문을 대조하니 이건 결국 '밖으로 나가는 문이 열한 개. 고양이 문까지 열두 개였다'라는 뜻이었다. 아마 현관문, 뒷문, 베란다문, 창문까지 다 합친 게 아닐까.


이건 제목의 유래인 고양이의 행동을 묘사한 구절만 봐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 즉 겨울이 되어 바깥에 눈이 쌓이면 고양이가 자기 문으로 나가려 하지 않고, '네가 쓰는 문을 열어보라옹, 닝겐!' 하면서 보챈다는 뜻이다. 즉 다른 열한 개의 문 중에서 '여름으로 가는 문'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주인이 하나하나 열어서 보여준 다른 열한 개의 문 바깥에도 여름 대신 겨울만 온통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면, 그제야 못마땅하다는 듯 투덜대며 고양이 문으로 혼자 나가서 용변을 해결하고 돌아와 얼음을 털고는 한동안 삐진 채 주인 곁으로 다가오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웃기는 점은 같은 번역자의 곤조 구판에서도 똑같은 오역이 등장하고, 심지어 더 먼저 나온 다른 번역자의 고려원 판본에서도 똑같은 오역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곤조 구판은 표지도 영 무성의하게 만들어서 못마땅했었는데 번역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다행히 아작 신판은 제대로 옮겼다).


이것 외에도 문맥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 딴소리를 하는 문장도 여럿 눈에 띄었으니, 저자를 겨냥한 무의미한 비판을 내놓을 시간에 자기 문장이나 다시 한 번 살펴보지 그랬느냐는 핀잔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법하다. 여하간 곤조 판본과 시공사 판본 모두 절판된 것이 차라리 다행인가 싶다.




[*] 고약한 점은 시공사 판본이 선집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제 와서 버리기도 곤란하다는 것이다. 하라는 번역은 제대로 안 하고 공연한 시비만 걸어서 멀쩡한 책을 버려 놓았으니 한심한 일이다. 고려원 판본도 시리즈의 일부이기 때문에 버리기가 곤란한데, 이제 와서 원문과 대조해 보니 군데군데 부연 설명을 빼버리기도 해서 완역본까지는 아니었다. 가장 최근의 아작 판본도 번역은 무난하지만 역주에 오류가 있다. 고양이 이름의 유래인 고대 로마인을 설명하면서 네로 황제의 "법정 조신"이었다고 서술한 대목이 그런데, 십중팔구 "궁정"(court)을 "법정"(court)으로 오해한 까닭인 것으로 보인다. 이건 출판사에서 잡아냈어야 하는 오류인데, 아작이야 원래 편집 실력이 형편없는 곳이니 애초에 무리이지 않았을까. 여하간 예나 지금이나 이놈의 나라에서 장르 독자로 살아가기는 참으로 고달프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 사실 로버트 하인라인으로 말하자면 성 문제에 대해서 개방적이다 못해 급진적이기까지 한 견해를 표명한 인물로 유명하며, 일부 작품에서는 근친상간까지도 묘사해서 논란이 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성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나 종교에 대해서도 남다른 견해를 제시했던 인물임을 감안해 보면, 전체적인 맥락을 무시한 채 지엽적인 묘사만 가지고 소아성애자니 여성혐오자라는 비난을 가하는 것은 부당해 보인다. 한편으로는 과거 '빨갱이'나 '무신론자'라는 비난이 무분별하게 적용되었던 것만큼, 지금은 '소아성애자'나 '여성혐오자'라는 비난이 똑같이 적용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즉 이름만 달라졌지 우상은 그대로인 셈이다. 비난을 하더라도 아무렇게나 남발할 것이 아니라, 진짜 필요한 곳에다가 할 수 있도록 제발 좀 생각들을 하고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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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중에 웨이드 데이비스의 책이 있기에 이 양반, 아직 안 돌아가셨나 싶어서 살짝 신기했다. 대표작이 어쩌다 보니 아이티 좀비의 실존 가능성을 연구한 <뱀과 무지개>(번역서 제목은 지나치게 노골적인 <나는 좀비를 만났다>)이기 때문인지, 살짝 사이비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어서 책이야 여러 권 사 놓고도 외면하고 있었는데, 다시 한 번 들춰봐야 하려나 싶다.


좀비라고 하면 지금은 조지 로메로의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이래로 각종 영화나 드라마에서 형상화된 식인 괴물을 떠올리기가 쉽지만, 그 원산지(?)인 아이티의 좀비는 오늘날 유행하는 그런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다고 알고 있다. 즉 인간이기는 해도 죽었다가 되살아나는 과정에서 사고력을 상실하는 바람에 로봇처럼 주인의 명령에 복종해서 각종 노역을 떠맡는다.


인류학자 웨이드 데이비스는 아이티 좀비의 본질이 약물 중독을 통한 인위적 퇴행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즉 멀쩡한 사람에게 독극물을 주입해서 가사 상태로 만든 다음, 매장된 사람을 꺼내 해독제를 투여해서 살려내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멀쩡해지지는 않도록 독극물을 꾸준히 주입하면, 그 사람은 약에 취해 비몽사몽해진 상태에서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좀비를 만났다>는 데이비스가 실제로 아이티에 가서 좀비 전설의 실체를 파헤치는 과정을 그린 논픽션이다. 다만 이처럼 논란의 여지가 있는, 또는 믿거나말거나 싶은 내용의 책이 항상 그렇듯이, 확실한 증거를 파악해서 반박불가능하게 확답을 얻어낸 것까지는 아니고, 막판에 가서는 이런저런 차질과 문제로 인해 흐지부지 애매하게 끝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데이비스의 책을 훗날 웨스 크레이븐이 영화로도 각색했는데, 이게 좀비 영화인지 드라큘라 영화인지 판가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워낙 싼티 나는 포스터이다 보니 공포 영화에 관심 많은 나귀님도 선뜻 보고 싶은 생각까지는 없었던 기억이 난다. 그 저자의 이름에 '서양 강시선생'이라는 별명을 자연스럽게 결부시켰던 것도 아마 그 영화 포스터의 영향이었던 것 같다.


한때 홍콩 영화의 인기 장르 가운데 하나였던 강시 영화는 오늘날 거의 맥이 끊기지 않았나 싶은데, 처음에만 해도 쿵푸와 공포의 조합으로 상당히 큰 인기를 끌었다고 알고 있다. 이 시리즈의 주역은 도사님으로 나온 임정영이란 배우이지만, 그 원조는 몇 작품을 직접 감독까지 했던 홍금보라고 알고 있으며, 그 최초는 그가 주연한 <귀타귀>라는 영화라고 알고 있다.


얼마 전 <파묘>라는 영화가 한국의 무속 신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인기를 끌었다는데, 거기서 핵심 장치로 나온 맨살에 경문 써넣기 역시 <귀타귀> 시리즈 가운데 하나에서 이미 사용된 바 있었다. 어린 시절 동네 담벼락에 붙은 숱한 포스터 가운데 하나에서 홍금보가 온 몸에 이상한 글자를 적은 모습으로 나온 것을 보고 상당히 기괴하다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영화 <야만인 코난>에도 유사한 내용이 나오는데, 물론 퇴마용 방어책으로서의 불경이나 부적 써넣기는 일본 괴담 "귀 없는 호이치"가 원조일 듯하다. 장님 악사 호이치가 밤마다 공동묘지로 불려가 귀신들 앞에서 공연하자, 스님이 맨몸에 불경을 적어서 귀신의 눈에 안 보이게 만든다. 하지만 깜박 잊고 귀에는 글자를 적지 않는 바람에 귀신에게 귀를 뜯겼다는 것이다.


웨이드 데이비스의 다른 저서를 보면 이른바 비서구 문명의 각종 전승을 재해석하는 데에 관심이 많아 보이는데, 앞서 설명한 좀비 연구도 어쩌면 유사한 맥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연구를 놓고 숱한 논란과 비판이 제기된 것을 보면, 20세기에 동양의 영성이며 비서구의 지혜며를 추구한 다른 연구자들처럼 그 역시 살짝 균형을 잃지는 않았었나 싶기도 하다.



[*] 그나저나 웨이드 데이비스의 신간을 펴낸 아고라 출판사는 레닌 전집을 간행하다 말고 한동안 책을 내지 않는 것 같더니만 뜬금없이 강시선생 책이니, 이건 또 무슨 조홧속인지 모르겠다. 여기서는 고전 공상과학소설 시리즈를 내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지금 다시 살펴보니 그 시리즈 가운데 하나가 레닌의 <국가와 혁명>인 것을 보니, 결국 여기서는 레닌을 공상과학소설의 대표 작가 가운데 한 명 정도로 보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사실 레닌 전집도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만, 진짜로 아까운 것은 그 공상과학소설 시리즈이다. 이번 기회에 시리즈 재간이나 속간을 한 번 기대해 보고 싶다. 필요하다면 레닌이나, 아니면 마르크스 책을 한두 권 슬쩍 집어넣어도 모른 척 해줄 의향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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