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양반이 즐겨 보던 <틈만 나면>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의 새로운 시즌이 또다시 마무리된 모양이다. 유재석과 유연석이 게스트를 대동하고 사연 신청자의 틈새 시간에 찾아가서 간단한 게임으로 상품을 전달하는 내용인데, 지금은 실내에만 틀어박힌 <유퀴즈 온 더 블록>의 과거 진행 방식을 연상시킨 탓에 친밀감이 든 모양이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에서는 게임에 걸린 상품을 소개할 때에 행운의 과자를 이용한다. 만두처럼 길쭉한 과자를 쪼개면 그 안에 들어 있는 가느다란 띠에 이런저런 격언과 조언이 적혀 있는 물건이다. 예전에 미국 드라마를 보면 중국 음식점의 후식으로 종종 등장했었는데, 다시 확인해 보니 정통 중국 문화까지는 아닌 모양이다.


행운의 과자를 소재로 한 창작물이라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1980년대에 방영된 <환상특급>의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인 "불운의 쿠키"이다. 독설로 유명한 어느 신문의 음식 평론가가 어느 중국 음식점을 방문했는데, 놀랍게도 그곳에서 식후에 내놓는 행운의 과자 속 쪽지에는 손님의 가까운 미래를 예언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예를 들어 "4월이니 좋은 소식 예감"이라는 쪽지를 꺼낸 주인공은 지금이 9월인데 말이 되느냐고 짜증을 내며 일어났지만, 다음날 우연히 길에서 만난 멋진 여성에게 도움을 주고 데이트 약속까지 하고 보니 그녀의 이름이 바로 '에이프릴'(4월)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주인공은 아예 그녀를 데리고 중국 음식점에 다시 찾아간다.


하지만 식후에 여자가 꺼낸 행운의 과자 속 쪽지에는 '사람을 가려 만나라'는 경고가, 남자가 꺼낸 행운의 과자 속 쪽지에는 '당신은 곧 죽는다'는 경고가 들어 있었다. 격분한 음식 평론가는 중국 음식점 직원의 멱살을 잡는 등 행패를 부리고, 의외의 모습에 상대방의 실체를 깨달은 여자는 재빨리 작별을 고하고 나가버린다.


그런데 씩씩대며 밤거리로 나온 음식 평론가는 몇 걸음 못 가서 어마어마한 허기를 느끼며 배를 움켜쥔다. 때마침 저 앞에는 처음 보는 을씨년스러운 느낌의 중국 음식점이 나타나고, 남자가 들어가자마자 직원이 등장해서 아무 말 없이 의자에 앉히고 음식 접시를 날라온다. 주인공은 허겁지겁 음식을 손으로 퍼먹기 시작한다.


잠시 후, 빈 접시가 수북이 쌓일 정도로 게걸스레 음식을 삼키던 주인공은 영 허기가 가라앉지 않는 것에 이상한 느낌을 받는데, 곧이어 직원이 가져온 행운의 과자를 열어보니 그 안에서 '당신은 이미 죽었습니다'라는 쪽지가 나온다. 음식이 계속 쌓이는 가운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구글링해 보니 "불운의 과자"는 <환상특급>의 첫 리메이크(1985-1989)에서 1시즌 14번째 에피소드였고, <프렌즈>에서 모니카 아빠로 출연한 엘리엇 굴드가 성미 고약한 음식 평론가 역을 맡았다. 레이 브래드버리 원작의 "엘리베이터"며, 스티븐 킹 원작의 "할머니"와 함께 특히나 기괴한 내용으로 오래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그 시리즈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는 하루아침에 언어가 달라진 세상에 떨어진 남자의 이야기인 "말장난"이다. 나중에는 다른 인물의 대사가 문장 대신 무의미한 단어의 나열로 대체되는데, KBS 방영분에서도 그걸 그대로 옮기는 바람에 ('바닷물 굴러간다 프라이팬 자갈') 진짜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또 하나 인상적인 작품은 "어린이 동물원"이다. 하루 온종일 말다툼을 벌이는 부부가 딸의 학교 숙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어린이 동물원에 함께 온다. 입구에서부터 보호자는 대기실에서 기다리시면 된다는 안내에 만족스러워하며 말다툼을 재개하던 부부였지만, 알고 보니 이 동물원은 무자격 부모를 가두고 길들이는 곳이었다!


마치 수족관을 연상시키는 동물원 안에는 수많은 무자격 부모들이 유리장 속에 갇혀 있었다. 버튼을 누르면 목소리도 들을 수 있는데,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부부는 당장 문을 열라고 아이에게 윽박지르는 반면, 들어온 지 한참이라 자기네 행동을 반성한 듯한 부부는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면 좋은 부모가 되겠다고 맹세한다.


결국 아이는 다정한 목소리로 좋은 부모가 되겠다고 약속한 부부를 골라서 새로운 엄마아빠로 데려가고, 함께 왔던 친부모는 유리장 속에 갇힌 채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한동안 무자격 부모의 아동 학대 뉴스가 나올 때마다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올리게 되었던 에피소드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어린이 동물원" 에피소드를 감독한 사람이 로버트 다우니라는 점이다. 지금은 같은 이름으로 더 유명해진 아들(주니어) 때문에 아버지(시니어)라는 설명을 덧붙여야 하는데, 앞서 언급한 "말장난"에는 조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구글링 끝에 새삼스레 저 추억의 '미드'의 나이를 실감하게 되었다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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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홍상수의 이름이 뉴스에서 거론되기에 또 무슨 영문인가 살펴보았더니, 불륜 관계인 영화배우 김민희가 임신했다고 해서 화제인 모양이다. 사생활이니 남들이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지적도 타당하기는 한데, 그 과정이 그리 아름답지 못한 만큼 앞서 논란이 된 정우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주위의 빈축을 사게 되는 것만큼은 불가피한 귀결로 보인다.


그나저나 홍상수도 금수저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아서 지금 다시 확인해 보니, 부모 모두 1960년대부터 영화 제작자로 활약한 사람들이어서 그 아들도 어려서부터 영화계를 친숙하게 접하며 자라났다고 전한다. 여기까지 듣고 보니 문득 버드 슐버그가 생각났는데, 역시나 영화 제작자의 아들로 태어난 이 미국 작가의 단편을 연말에 읽었기 때문이다.


지난번 <악마의 형제들>을 읽고 나서 로버트 펜 워런의 다른 작품이 없나 검색해 보니, 예전에 삼성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 가운데 한 권으로 간행되었지만 나귀님은 아직 구하지 못한 <천사의 무리>의 또 다른 번역본이 있었다. 그것도 이미 갖고 있는 "현대미국문학전집"(전6권, 시사영어사, 1971)에 수록되어 있다기에, 얼른 책장을 뒤져 제5권을 꺼내 보았다.


번역자가 같은 것으로 미루어 <천사의 무리>는 시사영어사의 전집에 먼저 수록되었다가 10여 년 뒤에 출판사를 옮겨 삼성출판사의 전집에 재수록된 듯하다. "현대미국문학전집"은 대략 20년 전쯤에 어느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사다 놓았던 것인데, O. 헨리부터 필립 로스에 이르는 현대 미국 대표 작가들의 중편과 단편을 다양하게 수록한 보기 드문 번역서다.


제5권에는 <천사의 무리>를 비롯해서 제임스 미치너, 캐서린 앤 포터, 유도라 웰티처럼 귀에 익은 유명 작가들과 캐롤라인 고든, 잭 셰이퍼, 캐서린 웨스트, 호텐스 캘리셔처럼 귀에 낯선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 골고루 수록되어 있다. 그중에서 특히 관심이 가서 읽어보게 된 작품은 버드 슐버그의 세 가지 단편 "나의 크리스마스 캐롤", "각광", "도전"이었다.


버드 슐버그의 아버지는 한때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중역으로 재직했기 때문에, 연말 크리스마스 파티 때에는 유명 배우들이 갖가지 선물을 들고 집으로 찾아와서 시끌벅적했다고 한다. "나의 크리스마스 캐롤"은 그때의 기억이 반영된 단편으로 보이는데, 어느 해 크리스마스에는 단골 손님 한두 명을 제외하면 모두들 발을 끊어서 꼬마(화자)가 의아하게 여긴다.


나중에 방에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열어본 꼬마는 마치 여러 사람이 보낸 것처럼 보이는 선물에 동봉된 카드가 사실은 한 사람의 필체임을 깨닫게 되고, 잠시 후에 위층에 올라온 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영화사를 퇴직해서 독립했다가 사업에 실패하는 바람에 더 이상은 유명 배우들이 파티에 오지 않게 되었다는 어른의 속사정을 듣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실제로 버드 슐버그의 아버지는 파라마운트에서 독립해서 야심차게 새로운 제작사를 시작했으나, 절친했던 배우 대부분이 애초의 약속과는 달리 전속을 옮기지 않는 바람에 큰 손해만 보고 사업을 접고 아내와도 이혼하고 말았다. 반면 버드 슐버그의 어머니는 의외의 수완가인지, 이후 할리우드 배우들을 여럿 거느린 에이전시를 운영하며 승승장구했다 전한다.


매우 짧은 단편 "각광"도 저자의 할리우드 체험이 녹아든 것처럼 보이는 내용이다. 어느 영화 촬영장에서 감독이 나이 많은 엑스트라를 하나 골라 몇 마디 대사를 할 기회를 준다. 꿈에 그리던 기회가 찾아왔지만 이 할아버지는 마음과 달리 제대로 연기하지 못하고 실수를 연발하고, 몇 번이나 실패하자 짜증이 치민 감독은 결국 다른 엑스트라에게 기회를 넘긴다.


'아니, 옛날에 윌리 로빈슨이 했던 전설적인 연기 몰라요? 그것만 그대로 따라해도 될텐데, 쯧쯧!' 감독의 핀잔에 머쓱해진 엑스트라 노인은 쓸쓸하게 구석으로 밀려나 다른 사람의 연기를 구경하는데, 잠시 후에 스튜디오에 견학을 온 어느 영화광이 노인을 보고는 반색하며 사인을 요청한다. '세상에, 아직도 현역이셨군요. 정말 팬입니다. 윌리 로빈슨 선생님!'


마지막 단편 "도전"은 젊은 남성 화자가 어느 휴양지에서 만난 젊은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화자는 수상스키부터 수영까지 번번이 자기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여성의 진취적인 모습에 매료되지만, 결국 그녀가 한밤중에 혼자 바다에 나가서 헤엄을 치다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야 도전 정신이라 여겼던 것이 실제로는 자살 충동이었음을 깨닫는다.


아쉽게도 우리나라에 번역된 버드 슐버그의 작품은 이 세 가지 단편이 전부인 것으로 보이며, 번역서인 "현대미국문학전집"도 지금은 구하기 힘든 상태가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이 저자의 펜끝에서 나온 또 다른 작품을 접한 사람은 충분히 많을 것도 같다. 세계 영화사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칭송되는 <워터프론트>의 시나리오 작가가 버드 슐버그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부두 하역 현장에서 벌어지는 노조의 비리와 노동자의 저항을 묘사한다. 비리를 폭로하려던 노동자가 피살되자 가책을 느낀 노조의 행동대원(말론 브란도)이 사망자의 누이(에바 마리 세인트)에게 감화되어 정의파 신부(칼 몰든)와 손잡고 양심 선언에 나서다가 역시나 노조의 하수인인 형(로드 스타이거)을 잃고서 노조 위원장(리 J. 콥)과 현피를 뜬다.


막판에 자기를 봐서라도 한 번만 참고 넘어가 달라는 형의 설득에, 과거에도 형을 위해 승부 조작에 가담했다가 권투선수 경력을 망친 것을 거론하며 퍼붓는 브란도의 원망 섞인 대사가 유명한데, 비상 계엄 직후 국회 청문회에 나와 변명하는 군 지휘관들을 보고 있자니, 경직된 계급 문화에서 양심을 지키기란 얼마나 어려운가를 새삼 실감하게 되기도 했었다. 


그나저나 홍상수 영화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만 보고 말았는데, 이응경의 미모가 빛나고 조은숙의 더빙 알바가 인상적인 작품으로 기억한다. 주인공이 김의성이라는 것은 최근에 알았는데, 김수현 극본의 <작별>에서 유호정 상대역으로 나와 인상적이었으나 이후에 보이지 않아서 궁금하던 배우였다. 이제는 악역 전문 중년 배우라니 또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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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대통령의 탄핵과 내란 재판 모두에서 쟁점으로 부각되는 것이 부정 선거이다 보니, 어쩐지 예전에 부정선거의 모든 것을 한 권에 담은 책을 간행했던 출판사가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심지어 그 이름도 '프로파간다'이니,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영 수상쩍어 보일 수밖에 없다.


문제의 책은 <에센스 부정선거 도감>인데, 제목 그대로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각종 부정 선거의 기법과 사례와 인물을 도해와 함께 소개하고 있다. 심지어 인물편에서는 이승만, 이기붕, 김기춘, 권영해, 권은희, 원세훈 등과 함께 윤석열에 대한 항목이 두 페이지에 걸쳐 나와 있기도 하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때 불거진 국정원 댓글 사건의 특별수사팀장을 역임한 검사. 2013년 6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기소하는 과정에서 선거법 위반 적용을 두고 법무부와 갈등을 빚은 것으로 알려졌다."(162쪽) 그랬던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원세훈을 사면했으니 아이러니하다.


과거에는 국민의힘의 전신인 보수 정당 소속 이명박 정권의 부정 선거를 조사하며 이름을 알린 검사였는데, 나중에는 국민의힘 소속으로 대통령이 되어서 부정 선거 의혹을 들먹이고 앉아 있으니 희한한 노릇이다. 이쯤 되면 한국 역사상 부정 선거와 가장 연관이 많은 대통령이 되지 않겠나.


안타깝게도 <에센스 부정선거 도감>은 현재 절판이다. 탄핵 정국에서 부정 선거 논란이 주목 받고 있음을 감안하다면 출판사의 성급한 결정이 영 아쉽기만 하다. 어쩌면 출판사에서도 이런 사실을 충분히 감안하여 윤석열 항목에 대한 대대적인 보완과 함께 증보판을 준비할지도 모르겠다만.


또 한편으로는 <에센스 부정선거 도감>이 "민주주의 선거 제도에 대한 교육 자료"(10쪽)가 되기를 바란다는 출판사의 애초 의도와는 정반대로 현직 대통령을 비롯해서 부정 선거를 주장하는 음모론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지침서로 사용되고 있지는 않았나 하는 현실적인 우려도 해 보게 된다.


현직 대통령의 연령을 감안해 보면 유튜브 같은 영상 매체보다는 책이 더 편하게 느껴질 법한 사람이고, 어차피 부정 선거에 관한 단행본이라면 프로파간다의 책이 유일하니, 나귀님의 입장에서는 대통령 집무실이나 관저의 책장에 이 책이 버젓이 꽂혀 있다고 해도 굳이 놀라진 않을 법하다.


어쩌면 책장에는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비밀기지 만들기>도 꽂혀 있을 법하다. 차벽을 세우고 직원을 동원해 관저를 요새화한 상태에서 안 나오고 버티던 모습이 너무나도 초딩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쯤 되면 현직 대통령과 밀착된 프로파간다 출판사 자체도 좀 이상한 곳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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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맘바 이야기를 하느라 어슐러 르귄의 에세이를 다시 꺼내 뒤적이다 보니, 환상 문학의 특성을 설명하는 글에서 極(GK)체스터턴의 <정통>의 한 구절을 인용한 대목이 문득 눈에 띄었다. 마침 체스터턴의 대표작 세 가지가 새로운 번역으로 간행되었던데, 그 이야기를 해 볼까 하다가 살짝 방향을 틀어서 판타지의 규칙 이야기나 해 보자.


체스터턴은 환상의 세계에서도 1+1=2라는 규칙은 마찬가지이며, 다만 황금과 호랑이가 열리는 나무가 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환상의 세계라고 해서 배경에 자연 법칙이 없지는 않으며, 인물 역시 각자의 한계와 계약에 얽매인다는 뜻인데, 사실 인간 세계와도 유사한 그런 설정이 있어야만 인물과 사건과 배경 모두가 실감나게 마련이다.


"판타지 소설은 온갖 법 제도를 파괴하고 배수진을 치는 허무주의적 폭력까지는 허용하지 않는다. (...) 2 더하기 1은 3이다. (...) 작용은 반작용을 낳는다. (...) 운명, 운, 필연의 힘은 (...) 판타지 소설 속 중간계에서도 거침없이 발휘된다. 판타지 소설은 (...) 서사적 예술로서의 의무와 책임의 지배를 받는다."(<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133쪽)


<반지의 제왕> 영화가 나왔을 때 어느 초딩이 '마법사가 너무 약하게 나왔다'고 불평하는 감상문을 내놓아 모두의 웃음을 자아냈던 것도 그래서인데, 십중팔구 주문 한 마디로 대군을 쓸어버리는 게임이나 무협지의 묘사에 친숙한 까닭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르귄의 소설만 봐도 마법사는 자연에 최대한 순응하다가 최소한으로만 개입한다.


톨킨과 르귄의 작품에서는 물론이고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도 계약과 규칙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이마에 흉터를 가진 아이가 살아남게 된 것도 모종의 규칙 때문이며, 학대를 당했던 친척 집이 오히려 안전한 장소였던 것도 비슷한 규칙 때문이고, 결국 만악의 근원인 악당과의 일대일 대결에서 의외의 이유로 승리했던 것도 마찬가지이다.


닐 게이먼의 '샌드맨 시리즈'에서는 심지어 불멸의 존재조차도 계약과 규칙에 얽매인다. 주인공 꿈(모르페우스)은 필멸자의 마법 주문에 사로잡혀 수십 년간 갇혀 지내다가 결계가 실수로 깨지고서야 가까스로 탈출하고, 비슷하게 억류된 전처 무사(뮤즈) 칼리오페를 구출할 때에도 무작정 규칙을 깨는 대신 감금자를 찾아가 대화를 시도한다.


'샌드맨 시리즈'에서는 악마도 예외는 아니어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러 지옥에 온 꿈이 재치 대결에서 승리하자 루시퍼도 이를 갈며 순순히 보내준다. 역시나 DC 코믹스 세계관을 공유하는 영화 <콘스탄틴>에서 등장한 루시퍼 역시 계약과 규칙에서 자유롭지 않아서, 막판의 반전에 허를 찔리자 계약과 규칙 내에서 상황을 최대한 수정한다.


영화 <엑소시스트>에서도 소녀의 몸에 빙의한 악마는 십자가와 성수에 억제되는 규칙을 따르고, 기만의 명수답게 갖가지 말로 신부들을 미혹해서 풀려나고자 치밀한 심리전을 도모한다. <파우스트>와 <페터 슐레밀>을 비롯해 악마와의 계약을 소재로 하는 모든 문학 작품에서도 핵심은 계약의 빈틈을 각자에게 유리하게끔 이용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계약과 규칙이란 현실의 인간과 환상의 존재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해 보이는데, 우리나라의 현직 대통령은 도대체 무슨 존재이기에 상식도 법률도 위반하며 멋대로 행동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리스 신화에서 오만(hubris)의 죄를 범한 필멸자의 운명을 보면 그의 최후도 그리 아름답진 못할 듯하다만...



[*] "뱃사람의 낙원"으로서의 極체스터턴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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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 노래 중에는 제목이 "아마겟돈", "슈퍼노바", "위플래시" 등 귀에 익은 것이 많던데, 애초에 다른 의미로 유명했던 단어를 가져와서 새로 의미 부여해 써먹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중에서도 나귀님 보기에 제일 요상스러웠던 노래 제목은 "블랙 맘바"인데, 에스파 세계관에서는 악당의 이름이라 한다.


원래 맘바는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독사를 가리키는데, 블랙 맘바는 길이가 2-3미터에 성질머리도 사나워서 현지인도 질색하는 놈이라 한다. 사고로 세상을 떠난 코비 브라이언트의 별명이었다고도 기억하는데, 한국 걸그룹의 노래에까지 언급된 맥락은 저 NBA 농구선수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이름의 유래인 독사가 아닐까.


그런데 로알드 달의 청년 시절 회고록에서 블랙 맘바에 대한 일화를 본 것 같아서 <단독 비행>을 오랜만에 꺼내 보니, 거기 언급된 뱀은 사촌 격인 초록 맘바였다.[*] 셸 석유 회사의 아프리카 케냐 주재원으로 일하던 시절에 하루는 지인의 집에 찾아갔는데, 자기보다 한 발 앞서 초록 맘바 한 마리가 현관문으로 기어 들어가더라나.


기겁한 달이 소리를 질러 위험을 알리자, 집주인 남성은 침착하게 아내와 두 아이를 베란다 아래로 내려서 집밖으로 대피시키고 나서 땅꾼을 부르러 떠난다. 잠시 후에 도착한 땅꾼이 혼자 집에 들어가 뱀을 상대하는 사이, 창문 너머 상황을 살피던 달은 미처 대피하지 못한 커다란 애완견이 죽어 나자빠진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땅꾼은 조용히 뱀에게 접근한 다음, 일단 갈퀴로 뱀의 몸통 한가운데를 꾹 눌렀다. 그런 다음 갈퀴를 천천히 밀어서 뱀의 머리 바로 밑까지 가져가더니, 그 상태에서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어서 자루에 집어넣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어려서부터 방울뱀을 잡고 놀았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 역시 비슷한 수법을 소개했다는 점이다.


즉 윌슨은 끝이 Y자로 갈라진 나무 막대로 뱀의 몸통을 누른 다음, 역시나 막대를 천천히 밀어올려 머리 밑까지 가져간 상태에서 손으로 머리를 잡아 들어올리라고 조언한다. 그는 파푸아뉴기니 개미 채집 원정에서도 이 방법으로 큰 뱀을 생포해 원주민의 탄성을 자아내기도 했다. 물론 어린 시절에는 방심하다 물리기도 했지만.


그러고 보니 어슐러 르귄의 에세이에도 집 근처에 나타난 방울뱀을 처리하기 위해 이웃이 출동해서 플라스틱 파이프와 쓰레기통으로 해결하는 일화가 나왔었는데, 저자가 뱀과 대치할 때 서로의 거리가 '5미터'쯤 되었다고 서술한 대목을 무려 '500미터'라고 오역했던 바로 그 글이다. 그런데 뱀을 생포한 부분도 오역이 있었다.


번역서에는 이웃이 뱀 앞에 쓰레기통을 내려놓고, 쓰레기통 뒤로 가서 파이프를 뱀 위로 뻗어 흔들자, 놀란 뱀이 앞에 놓인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고 나왔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웃이 뱀 앞에 쓰레기통을 내려놓고, '뱀 뒤로 가서' 파이프를 뻗어 흔들자, 뒤에 있는 파이프에 놀란 뱀이 앞으로 도망가서 쓰레기통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기만 했어도 뭔가 앞뒤가 안 맞는다고 생각했어야 하는데, 번역자고 편집자고 별 생각 없었던 모양이다. 어슐러 르귄 정도면 고정 독자도 상당할 법한데, 좀 더 많은 애정을 쏟을 만한 관계자를 만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십중팔구 뭐가 틀렸는지 모를 테니 지금까지도 오역이 남아있지 않을까.


여하간 어찌어찌 하다 보니 에스파 이야기로 무려 글을 세 편이나 쓰게 되었다. 원래는 "푸른 산호초" 직후 팜하니 찬양글을 길게 한 번 쓰려고 이것저것 뒤적이고 있었는데, 이후 청문회 출석이며 여러 논란에 휘말리는 모습을 보며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방시혁도 이상하지만 민희진도 이상한데, 애들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뭐 음반을 산 것도 아니고, 응원봉을 산 것도 아니니 본격적인 덕질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하지만, 따지고 보면 나귀님이야말로 팬질을 하기에는 영 자격 미달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일단 금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넉넉하지는 않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트집 잡기 좋아하는 성격상 뭐 하나에 끝까지 헌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난번 이동진 유튜브에서 <스타워즈> 팬의 기준을 마블 영화 팬의 기준으로 (즉 모든 영화를 극장 개봉으로 관람해야 한다고) 설명하는 것을 보고, '아, 그렇다면 나는 평생 <스타워즈> 팬이 아니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아시다시피 <제국의 역습>은 최초 공개 당시 국내에 수입되지 않았다) 어쩐지 홀가분한 느낌도 있었다.


여기서 문득 생각나는 것이 톨스토이에 대한 고리키의 복잡한 감정이다. 후배 작가는 하늘 같은 저 선배를 우러러보았지만, 함께 있다 보니 어딘가 모르게 미운 감정이 들었다고도 말한다. 마치 최근 어느 예능에서 유재석이 개그맨 김영철을 놓고 '못 보면 궁금하지만, 만나면 피곤해지는 후배'라고 설명한 것도 비슷하다 할까.


이런 양가감정을 체홉도 비슷하게 느꼈는지, 톨스토이에 대해 종종 감탄한 듯 평가를 내놓으면서도 살짝 빈정거림을 곁들인다. 인간성에 대해 예리한 눈을 가진 후배 작가들이니, 러시아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성인으로 추앙되는 위대한 선배 작가의 이중적 측면을 꿰뚫어 본 까닭에 '팬'이나 '신도'는 되지 못했던 것이 아니려나.


사람에게는 누구나 부정적인 측면과 모순적인 측면이 있으며, 그런 사실은 굳이 MBTI인지 TSMC인지를 하지 않아도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본인이 그런 모습을 애써 인정하지 않는 것이 자기 기만이라면, 타인이 그런 모습을 감지하고도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최대한 긍정적인 모습만을 바라보는 것은 헌신이고 믿음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최근의 아이돌 팬 문화는 이른바 '영성에 관심은 있지만, 종교는 갖지 않은'(Spiritual, but not religious) 사람들에게 유의미한 길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닌 게 아니라 김호중 음주 운전 논란에서처럼 팬이 가수의 범죄까지 적극 비호하고 나선 것을 보면, 팬질을 넘어 컬트의 가능성마저 엿보이니...



[*] 글을 쓰고 나서 <단독 비행> 전반부를 다시 읽어보니, 초록 맘바 이야기 말고 블랙 맘바 이야기도 별도로 있기는 했다. 하루는 저자가 창밖을 내다보았더니 하인의 뒤쪽에서 블랙 맘바 한 마리가 몰래 접근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놀란 저자가 위험하다며 소리를 지르자, 상황을 파악한 하인은 침착하게 서 있다가 사정거리 안에 접근한 독사를 갈퀴로 때려 잡는 것으로 나온다. 그 외에 사자에게 물려간 여자의 일화도 있고, 카렌 블릭센(이자크 디네센)을 잘 아는 여자의 일화도 있고,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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