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스파 노래 중에는 제목이 "아마겟돈", "슈퍼노바", "위플래시" 등 귀에 익은 것이 많던데, 애초에 다른 의미로 유명했던 단어를 가져와서 새로 의미 부여해 써먹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중에서도 나귀님 보기에 제일 요상스러웠던 노래 제목은 "블랙 맘바"인데, 에스파 세계관에서는 악당의 이름이라 한다.
원래 맘바는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독사를 가리키는데, 블랙 맘바는 길이가 2-3미터에 성질머리도 사나워서 현지인도 질색하는 놈이라 한다. 사고로 세상을 떠난 코비 브라이언트의 별명이었다고도 기억하는데, 한국 걸그룹의 노래에까지 언급된 맥락은 저 NBA 농구선수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이름의 유래인 독사가 아닐까.
그런데 로알드 달의 청년 시절 회고록에서 블랙 맘바에 대한 일화를 본 것 같아서 <단독 비행>을 오랜만에 꺼내 보니, 거기 언급된 뱀은 사촌 격인 초록 맘바였다.[*] 셸 석유 회사의 아프리카 케냐 주재원으로 일하던 시절에 하루는 지인의 집에 찾아갔는데, 자기보다 한 발 앞서 초록 맘바 한 마리가 현관문으로 기어 들어가더라나.
기겁한 달이 소리를 질러 위험을 알리자, 집주인 남성은 침착하게 아내와 두 아이를 베란다 아래로 내려서 집밖으로 대피시키고 나서 땅꾼을 부르러 떠난다. 잠시 후에 도착한 땅꾼이 혼자 집에 들어가 뱀을 상대하는 사이, 창문 너머 상황을 살피던 달은 미처 대피하지 못한 커다란 애완견이 죽어 나자빠진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땅꾼은 조용히 뱀에게 접근한 다음, 일단 갈퀴로 뱀의 몸통 한가운데를 꾹 눌렀다. 그런 다음 갈퀴를 천천히 밀어서 뱀의 머리 바로 밑까지 가져가더니, 그 상태에서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어서 자루에 집어넣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어려서부터 방울뱀을 잡고 놀았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 역시 비슷한 수법을 소개했다는 점이다.
즉 윌슨은 끝이 Y자로 갈라진 나무 막대로 뱀의 몸통을 누른 다음, 역시나 막대를 천천히 밀어올려 머리 밑까지 가져간 상태에서 손으로 머리를 잡아 들어올리라고 조언한다. 그는 파푸아뉴기니 개미 채집 원정에서도 이 방법으로 큰 뱀을 생포해 원주민의 탄성을 자아내기도 했다. 물론 어린 시절에는 방심하다 물리기도 했지만.
그러고 보니 어슐러 르귄의 에세이에도 집 근처에 나타난 방울뱀을 처리하기 위해 이웃이 출동해서 플라스틱 파이프와 쓰레기통으로 해결하는 일화가 나왔었는데, 저자가 뱀과 대치할 때 서로의 거리가 '5미터'쯤 되었다고 서술한 대목을 무려 '500미터'라고 오역했던 바로 그 글이다. 그런데 뱀을 생포한 부분도 오역이 있었다.
번역서에는 이웃이 뱀 앞에 쓰레기통을 내려놓고, 쓰레기통 뒤로 가서 파이프를 뱀 위로 뻗어 흔들자, 놀란 뱀이 앞에 놓인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고 나왔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웃이 뱀 앞에 쓰레기통을 내려놓고, '뱀 뒤로 가서' 파이프를 뻗어 흔들자, 뒤에 있는 파이프에 놀란 뱀이 앞으로 도망가서 쓰레기통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기만 했어도 뭔가 앞뒤가 안 맞는다고 생각했어야 하는데, 번역자고 편집자고 별 생각 없었던 모양이다. 어슐러 르귄 정도면 고정 독자도 상당할 법한데, 좀 더 많은 애정을 쏟을 만한 관계자를 만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십중팔구 뭐가 틀렸는지 모를 테니 지금까지도 오역이 남아있지 않을까.
여하간 어찌어찌 하다 보니 에스파 이야기로 무려 글을 세 편이나 쓰게 되었다. 원래는 "푸른 산호초" 직후 팜하니 찬양글을 길게 한 번 쓰려고 이것저것 뒤적이고 있었는데, 이후 청문회 출석이며 여러 논란에 휘말리는 모습을 보며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방시혁도 이상하지만 민희진도 이상한데, 애들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뭐 음반을 산 것도 아니고, 응원봉을 산 것도 아니니 본격적인 덕질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하지만, 따지고 보면 나귀님이야말로 팬질을 하기에는 영 자격 미달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일단 금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넉넉하지는 않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트집 잡기 좋아하는 성격상 뭐 하나에 끝까지 헌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난번 이동진 유튜브에서 <스타워즈> 팬의 기준을 마블 영화 팬의 기준으로 (즉 모든 영화를 극장 개봉으로 관람해야 한다고) 설명하는 것을 보고, '아, 그렇다면 나는 평생 <스타워즈> 팬이 아니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아시다시피 <제국의 역습>은 최초 공개 당시 국내에 수입되지 않았다) 어쩐지 홀가분한 느낌도 있었다.
여기서 문득 생각나는 것이 톨스토이에 대한 고리키의 복잡한 감정이다. 후배 작가는 하늘 같은 저 선배를 우러러보았지만, 함께 있다 보니 어딘가 모르게 미운 감정이 들었다고도 말한다. 마치 최근 어느 예능에서 유재석이 개그맨 김영철을 놓고 '못 보면 궁금하지만, 만나면 피곤해지는 후배'라고 설명한 것도 비슷하다 할까.
이런 양가감정을 체홉도 비슷하게 느꼈는지, 톨스토이에 대해 종종 감탄한 듯 평가를 내놓으면서도 살짝 빈정거림을 곁들인다. 인간성에 대해 예리한 눈을 가진 후배 작가들이니, 러시아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성인으로 추앙되는 위대한 선배 작가의 이중적 측면을 꿰뚫어 본 까닭에 '팬'이나 '신도'는 되지 못했던 것이 아니려나.
사람에게는 누구나 부정적인 측면과 모순적인 측면이 있으며, 그런 사실은 굳이 MBTI인지 TSMC인지를 하지 않아도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본인이 그런 모습을 애써 인정하지 않는 것이 자기 기만이라면, 타인이 그런 모습을 감지하고도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최대한 긍정적인 모습만을 바라보는 것은 헌신이고 믿음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최근의 아이돌 팬 문화는 이른바 '영성에 관심은 있지만, 종교는 갖지 않은'(Spiritual, but not religious) 사람들에게 유의미한 길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닌 게 아니라 김호중 음주 운전 논란에서처럼 팬이 가수의 범죄까지 적극 비호하고 나선 것을 보면, 팬질을 넘어 컬트의 가능성마저 엿보이니...
[*] 글을 쓰고 나서 <단독 비행> 전반부를 다시 읽어보니, 초록 맘바 이야기 말고 블랙 맘바 이야기도 별도로 있기는 했다. 하루는 저자가 창밖을 내다보았더니 하인의 뒤쪽에서 블랙 맘바 한 마리가 몰래 접근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놀란 저자가 위험하다며 소리를 지르자, 상황을 파악한 하인은 침착하게 서 있다가 사정거리 안에 접근한 독사를 갈퀴로 때려 잡는 것으로 나온다. 그 외에 사자에게 물려간 여자의 일화도 있고, 카렌 블릭센(이자크 디네센)을 잘 아는 여자의 일화도 있고,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