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생자 행성>은 "린 마굴리스가 들려주는 공생 진화의 비밀"이라는 부제처럼 과학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제2장에서는 기존 견해와 다른 이단적 발상을 떠올린 계기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인 회고가 적잖이 곁들여지고 있다. 대표적인 일화가 어린 시절 부모님과 상의 없이 학교를 바꾼 것,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칼 세이건과 사귀고 결국 결혼한 것이다.


학교 이야기는 뭔가 하면, 원래 공립학교를 다니다가 4학년 때에 사립학교인 시카고 대학 부설학교로 전학했는데, 어째서인지 적응하지 못한 끝에 8학년을 마치고 예전에 다니던 학교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당돌하게도 부모님과 상의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재학 중인 학교나 새로 다닌 학교 양쪽에도 자신의 상황을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후 공립학교에서 이 사실을 먼저 알아내는 바람에 여차 하면 학교를 못 다닐 수도 있는 상황이 되었지만, 읍소 끝에 결국 9학년을 마치고 대학에 진학했다. 본인의 말마따나 학교에 다니며 연애질에만 몰두한 까닭인지 오히려 성적은 예전보다 떨어졌다 하지만, 원체 신동이어서 14세에 대학에 들어가 3년 반 만에 학사 학위와 남편을 모두 얻어가지고 조기 졸업했다.


여기서 말하는 남편이 바로 <코스모스>의 저자인 천문학자 칼 세이건인데, 연애 중에나 결혼 후에도 줄기차게 싸우고 헤어지기를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첫 만남에 대한 린 마굴리스의 회고에는 마치 무슨 영화나 애니의 한 장면 같은 애틋한 느낌도 없지 않다. "어느 날 수학 강의동인 에크하르트홀 계단을 뛰어 올라가다가 나는 말 그대로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 "학우이자 신예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나보다 다섯 살 연상이었다. 흑갈색 머리카락을 늘 덥수룩하게 기르고 다니던 그는 키가 크고 멋있었으며 말을 유창하게 잘했다. (...) 당시 열아홉 살이었던 세이건은 이제 막 천문학자 생활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그는 물리학과 대학원 학생이었고, 나는 그저 조급하고 열정적이며 무지한 소녀에 불과했다."(<공생자 행성>, 40쪽) <<<



결국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되었지만, 천재인만큼 허세가 있고 자기중심적이었던 세이건과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당신 아들이 천재인 것은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당신 며느리가 천재인 것까지는 굳이 바라지 않았던 시어머니 역시 부부 관계에 도움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린 마굴리스는 결혼 8년 만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며 두 아이와 함께 남편 곁을 떠났다.



>>> "칼,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이야. 나는 당신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당신이 진짜 성숙한 사랑을 할 능력이 있다고 믿어. 하지만 나하고는 안 돼. 당신도 그것을 알고 있어. (...) 당신의 직업적, 사회적 성공에서 엄청난 기쁨을 얻을 여자들을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거야. 당신의 발전을 통해 내 자아를 즐겁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어쩌면 나의 영원한 비극일 거야. 당신은 바로 그런 아내를 바라는 거니까."(<칼 세이건: 코스모스를 향한 열정>, 134쪽) <<<



1967년에 그녀는 결정학자 토머스 마굴리스와 재혼했지만 1980년에 또다시 이혼했다.('마굴리스'라는 성은 재혼의 결과물이다). "나는 아내라는 직업을 두 번이나 때려치워 봤어요. 좋은 아내 겸 좋은 엄마 겸 1급 과학자가 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가능하지가 않아요. 아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 뭔가를 희생해야만 하죠." 두 번의 결혼 체험에 대한 그녀의 평가다.


이쯤 되면 '나쁜 남자' 겸 '나쁜 남편' 칼 세이건에게 비난이 쏟아지는 것도 당연해 보이기도 하는데, 막상 린 마굴리스와의 관계가 불구대천의 지경으로 번지지는 않은 듯, 과학자에게는 큰 영예인 미국 국립과학아카데미의 회원 선발 과정에서 '지나치게 대중적'이라는 편견으로 전남편이 고배를 마시자, 이미 회원이었던 전처가 다음과 같은 위로 편지를 쓰기도 했다.



>>> "그들은 당신의 소통 기술, 매력, 좋은 외모, 뛰어난 외모와 특히 핵겨울을 질투해. 마누라에게 꼭 잡힌, 그렇게 높은 비율의 순응주의자들은 내 생각에 세 아내와 다섯 아이들을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아. 신다윈주의적 용어로 말하자면 당신은 적응력이 너무 뛰어난 것이지. (...) 요약하면 당신은 여러 해 전에 이미 국립과학아카데미에 선출될 수 있었고, 아직도 그래. 당신을 넣어주지 않은 것은 인간의 가장 고약한 허약함, 곧 질투심이야."(<칼 세이건: 코스모스를 향한 열정>, 621쪽) <<<



세이건은 이 편지에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때가 1992년으로 이혼한 지 사반세기가 넘은 뒤였으니 두 사람의 성격도 이전보다는 좀 더 누그러져 그랬을 수도 있다. 아니면 번번이 인습을 따르지 않고 이단적 견해를 지지했던 평소의 성격처럼 린 마굴리스가 이 방면에서도 성격 차이로 이혼한 부부의 일반적인 경우를 굳이 따르지 않기로 작정해서일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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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에밀리 디킨슨 이야기를 꺼냈으니 결국 린 마굴리스 이야기도 해야 할 것 같다. 시인과 생물학자라는 직업상 영 무관해 보이는 두 사람의 만남은 1988년에 마굴리스가 매사추세츠 대학 애머스트 캠퍼스에 교수로 부임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녀가 살게 된 집의 바로 옆집이 디킨슨의 생가 겸 박물관이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마굴리스는 이웃으로서의 본분을 다하여 디킨슨의 시에 푹 빠져들었으며, 그로부터 10년 뒤에 간행한 <공생자 행성>에서는 각 장의 서두에 디킨슨의 시를 인용할 정도가 되었다. 사후에 간행된 기념 문집 <린 마굴리스>에도 "에밀리 디킨슨의 이웃"이라는 제목으로 테리 Y. 앨런의 회고가 수록되었을 정도다.


그런데 앨런의 증언에 따르면 마굴리스는 디킨슨에게 푹 빠진 나머지 갖가지 "이단적인" 주장까지도 기꺼이 포용하고 말았다. 즉 평생 독신이었던 저 여성 시인이 "주인님"이라 지칭한 남자에 대한 주장은 물론이고, 그녀의 시가 은밀한 성생활에 대한 암호화 기록이라는 주장까지도 옹호하며 출판까지 주선했던 것이다.


이렇게 파격을 좋아하다 못해 종종 무리수를 두는 것이야말로 린 마굴리스의 평소 성격이었는데, 대표적인 업적으로 간주되는 세포의 공생 발생 이론이라든지, (제임스 러브록과의 공동 연구로 탄생한) 가이아 이론 역시 오늘날에는 상식처럼 되었지만 처음에만 해도 상당한 논란을 일으킨 이단적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기존의 권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심지어 에이즈 부정론이라든지 9/11 음모론에 대해서까지도 찬동했다는 (심지어 기념 문집에 유일하게 수록된 마굴리스 본인의 글 역시 일각의 9/11 음모론을 옹호하는 내용이다!) 것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념 문집에 나온 또 다른 지인의 증언처럼 남성성과 여성성과 페미니즘을 죄다 싫어했고, 쿠바의 카스트로는 칭찬해도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은 싫어했으며, 웬델 베리의 강연을 듣다 자리를 박차고 나갔지만 결국 서로 친해졌다는 등의 종잡을 수 없는 행적을 보면, 그녀는 자유로운 영혼이 맞았던 것도 같다.


다만 만사를 편 가르는 데 익숙해진 지금의 관점에서 그녀의 행동은 마치 좌충우돌처럼, 또는 모두에게 미움받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마치 작은 개체가 큰 덩어리를 이루어 생존한다는 점에서 공생의 좋은 사례라며 그녀가 사망 직전까지 각별히 애호했다는 큰빗이끼벌레가 한때 모두의 미움을 받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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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매장에 필요한 책이 하나 있어서 구입하려고 보니 배송비 내기가 아까웠다. 7,500원짜리 책을 더 고르면 되는데 아무리 뒤져도 관심 가는 것이 없기에 고민하다가 무려 22,600원이나 되는 비비안 마이어 도록을 함께 주문해 버렸다. 사실은 이것 자체만 해도 2만 원이 넘어 무료 배송이니 배보다 배꼽이 커진 격이다.


사진 찍는 메리 포핀스로 유명한 이 무명 사진가의 사진집이라면 <나는 카메라다>와 <셀프 포트레이트>를 이미 갖고 있었지만, 이런 책들과 달리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2022년 한국에서도 개최된 전시회 도록이라고 하니 또 무슨 내용일지 궁금했던 것이다. 수록된 해설 역시 기존 사진집에 수록된 것과는 달라 보였다.


노란색 종이 재질 하드커버로 이루어진 말끔한 도록을 받아서 훑어보니 기존 사진집에 수록된 것과 중복되는 작품도 일부 있었지만, 처음 보는 작품도 제법 있어서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괜찮았다. 사진 예술에 관한 논의에 치중한 해설보다는 가족의 기구한 사연을 발굴해 서술한 생애 부분이 흥미로웠다.


또 하나 특이했던 점은 뒤표지에 수록된 에밀리 디킨슨의 인용문이었다. 프랑스어로 작성되었기에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는데, 판권면에 "에밀리 디킨슨이 엘리자베스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 1856년 1월 20일, 네덜란드, 에밀리 디킨슨 아카이브"라고 나오기에, 구글링 끝에 그 편지의 영어 원문을 찾아 읽어보았다.


에밀리 디킨슨 박물관이라는 홈페이지에 올라온 원문인데, 텍스트 입력 과정에서 띄어쓰기 오류며 오타가 발생해 읽기에 편하지는 않았지만, 여하간 비비안 마이어 도록 뒤표지에 실린 인용문이 "나는 등불을 가지고 바깥에 나가서 나 자신을 찾고 있다"(I am out with laterns, looking for myself)임은 알 수 있었다.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니며 '사람'을 찾는다고 말했다는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일화가 떠오르는데, 이 편지는 디킨슨이 지인인 엘리자베스 홀랜드(Elizabeth Holland)에게 보낸 것으로 나온다. 즉 판권면의 설명에서 "네덜란드"는 "엘리자베스"의 성 "홀랜드"(Holland)를 "홀란드(네덜란드)"로 오독한 결과물로 보인다.


이미 갖고 있는 디킨슨 편지 선집(EMILY DICKINSON: SELECTED LETTERS, ed. by Thomas H. Johnson. Cambridge, MA: The Belknap/Harvard University Press, 1958, 1971, 1986)을 보니 이 편지가 들어 있지 않기에 어째서인가 서문을 살펴보니, 이 책 출간 당시인 1958년까지 확인된 편지는 그게 전부였다고 한다.


지금 다시 확인해 보니, 그 사이에 민음사에서 디킨슨의 편지를 번역한 선집이 나온 모양인데, 혹시 그 책에는 위의 인용문의 출처인 편지도 수록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시 번역본도 그 사이에 여러 가지가 더 나온 듯한데, 지난번에 말했듯이 민음사와 파시클의 번역본은 오역이 없지 않으니 피하는 게 상책일 듯하다.


그나저나 왜 비비안 마이어의 도록에 에밀리 디킨슨의 인용문을 굳이 수록했을까? 어쩌면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작품을 세상에 거의 공개하지 않고 평생 혼자만 간직했다는 공통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울러 사후에 가서야 뒤늦게 세상에 알려져 큰 찬사와 명성을 얻게 되었다는 또 다른 공통점 때문일 수도 있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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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까마귀가 행인을 습격하는 일이 빈번해졌다는 뉴스가 나온다. 문득 <새>라는 소설과 영화가 떠오르며 결국 조류 아포칼립스로 가는가 싶어 무슨 맥락인지 살펴보니, 가로수에 둥지를 지어 놓은 까마귀가 경계 본능이 발동한 나머지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을 적으로 인식한 까닭이라 한다.


당장 환경 파괴, 지구 온난화, 명품백 수수, 고가 기내식 등이 구체적인 원인으로 제시되는 듯하지만, 일단은 자연에서보다 도시에서 먹이 구하고 천적 피하기가 쉬우니 까마귀도 머리를 쓴 결과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뾰족한 해결책이 없어서 행인에게 조심하라고 당부하는 것만이 현재로선 최선이라니 답답하다.


일본 만화 <산적 다이어리>를 보면 수렵 면허를 가진 주인공이 농가의 의뢰를 받고 공기총으로 까마귀를 퇴치하러 나서는 일화가 나오는데, 이때에도 그 새는 워낙 똑똑하기 때문에 상당히 골치를 썩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국 영리해서 잘 적응한 놈이니 그 숫자며 영향력이 늘어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이치가 아닐까.


서울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까마귀 숫자가 늘어나서 소음과 오물과 미관(?) 피해가 적지 않다는 이야기를 꽤 오래 전부터 들었던 것 같은데, 딱히 천적도 없는 상황이라면 당분간은 까마귀가 득세하는 세상이 제법 오래 갈 것 같다. 적어도 까마귀가 정력 증진 효과가 있다는 연구 보고서가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까마귀의 영리함에 관해서는 동물행동학자 콘라트 로렌츠가 <솔로몬 왕의 반지>에서 잘 설명했었다. 고기 조각을 손으로 집어서 먹이는 방식으로 까마귀를 길들였더니만, 한 번은 야외에서 소변을 보려고 지퍼를 내리고 자지를 꺼내자마자 까마귀가 '오, 고기!' 하고 날아와 쪼는 바람에 혼비백산했던 일화도 나온다.


까마귀의 영리함이 대략 이 정도이니, 당분간 도심 한복판의 가로수 근처를 지나갈 때에는 혹시 머리 위로 까마귀가 날아오는지 각별히 주의해야 하겠고, 혹시나 낌새가 이상하면 재빨리 피해야 하겠으며, 아울러 남성의 경우에는 설령 취중이라 하더라도 감히 노상방뇨를 시도해서는 절대로, 절대로 안 될 것만 같다.



[*] 글을 쓰다 보니 베른트 하인리히의 까마귀 책이며, 마츠바라 하지메의 까마귀 책이며, 아나 토렌트의 까마귀 영화 노래며 등등이 연이어 생각나는데, 지금으로선 딱히 끼워 넣을 곳이 없어 다음 기회로 미룬다. Porque te v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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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6월이면 서울국제도서전에 찾아가던 때도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딱 10년 전인 2014년에 다녀온 이후로는 영 가지 않게 되고 말았다. 나귀님 기억으로는 90년대 초부터 다닌 것 같으니, 대략 20년 넘게 거의 매년 찾아가던 행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외면하게 된 셈이다.


나귀님 같은 독자의 입장에서 도서전은 단지 책을 구경하고 싸게 구입하는 기회일 뿐만 아니라,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무료 배포하는 도서목록도 챙기고, 나아가 현장에 나와 있는 출판사 관계자에게 이런저런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고 답변을 얻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마지막 몇 번은 참가하는 출판사 숫자도 크게 줄었고, 부스마다 판매며 이벤트에 열중하다 보니 정작 책에 대해 물어볼 기회도 없어지면서, 이제는 굳이 입장료까지 내 가면서 갈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굳어지게 되었고, 그러면서 결국 자연스레 발걸음이 끊어지게 된 듯하다.


해외에서 도서전이라 하면 근간 및 신간 도서를 소개하고 판권을 교섭하는 출판인들만의 행사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책을 홍보하고 판매하는 전시회로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저 책을 전시하고 할인 판매하고 각종 이벤트까지 곁들이는 행사 정도로 인식된다.


그나마도 잘만 운영하면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지만, 매년 각종 논란이 곁들여지곤 해서 문제다. 지난번에는 이전 정부 블랙리스트 작성 관여 인사가 주최측에 포함되었다고 해서 논란이 있었고, 이번에는 행사 수익금 처리 문제며 과도하게 비싼 참가비 등으로 논란이 있는 모양이다.


이전부터 말이 많았던 도서전인데, 이번에는 정부와 대놓고 설전까지 벌이고 있으니, 이러다가는 머지않아 없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애초부터 성격이 애매한 행사였으니, 이번 기회에 차라리 싹 없애 버리고 대신 와우북처럼 책 할인 판매 행사를 벌이는 게 차라리 나을까.


그나저나 2024년 서울국제도서전의 주제는 무려 '후이늠'이라 하는데, 이건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나라에서 야만적인 인간 '야후'와 달리 이성을 갖춘 말들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도대체 왜 하필 '후이늠'일까 궁금해서 공식 홈페이지에 찾아가 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 2024 서울국제도서전 주제전시는 우리가 바라는 세상으로 가기 위한 지도를 그립니다. ‘후이늠’의 세계가 해법이 아니라면 어떤 방식으로 미래를 그려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 나눕니다. 막연한 낙관을 넘어서 기꺼이 환대할 현실을 모색합니다. 함께 '후이늠’을 키워드로 큐레이션된 400권의 도서를 통해 후이늠의 세계를 여행하면서 ‘세상의 비참’을 줄이고 ‘미래의 행복’을 사유하며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



또 이런 설명도 있다.



>>> 심술, 둔감, 무지, 변덕, 호색, 오만, 고집, 무례, 비겁, 야비, 잔인, 사악, 거만, 비굴, 추악, 교활과 같은 말은 인간의 어두운 면을 묘사할 때 쓰는 말이다. 이런 어두운 면들은 인간이 자기만 더 먹고, 더 갖겠다는 욕망을 만들고 서로의 이해에 따라 편을 가른다. 침략, 약탈, 살인과 전쟁은 어둠의 가장 비참한 결과이다. 걸리버는 여행에서 이런 면이 전혀 없는 종족, '후이늠'을 만난다. 이성적, 상식적으로 완벽한 ‘후이늠’의 세상을 만들면, 우리는 전쟁을 그칠 수 있을까? 유능한 인공지능은 우리 미래에 ‘후이늠’이 되어 줄 것인가? ‘후이늠’의 세계가 해법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떤 미래를 그려야 할까?


우리는 배려, 민감, 지혜, 믿음, 사랑, 유연, 예의, 용기, 격조, 품위, 인정, 겸손, 아름다움, 정직 같은 말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 2024 서울국제도서전은 독자들과 함께, 우리가 바라는 세상으로 가기 위한 지도를 그린다. 지난 300년간 지도를 그리기 위해서 길을 찾아 헤매었던 걸리버, 사람과 같은 법적 권리를 찾기 위해 노력 중인 제돌이와 함께 출발했다. 95년 만에 저작권의 굴레에서 벗어난 미키 마우스에게도 길을 청했는데, 여전히 상표권에 매여 있어 뒤에 숨어 함께 간다. 함께 나선 독자들과, 뒤에 숨어 따르는 모든 이들이 걸리버의 발자취를 따라, 후이늠의 세계를 여행하면서 ‘세계의 비참’을 줄이고 ‘미래의 행복’을 찾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도서전 측의 설명만 보면 후이늠의 세계를 미래 사회의 한 가지 이상으로 삼겠다는 것 같은데, 하고많은 이상향의 사례 중에서 왜 하필 그것인지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실 풍자 문학인 <걸리버 여행기>에서 후이늠은 어디까지나 야후의 야만성을 드러내는 장치일 뿐이니까.


아울러 스위프트의 소설에서도 후이늠이 하나부터 열까지 이상적인 존재로만 묘사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걸리버는 인간 사회의 온갖 문제점을 열거하며 후이늠 사회의 미덕을 예찬하지만, 정작 거기도 주인과 하인의 신분 차별이 있고 야후를 천시하는 편견이 있다.


급기야 후이늠은 걸리버가 말하는 야후로서 이성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다른 야만적인 야후 떼를 선동하여 사회에 위협이 될까 우려하여 축출하기까지 했으니, 제아무리 이성적인 말대가리라 하더라도 불안이나 공포 같은 비이성적인 감정까지 억누르지는 못했던 셈이다.


즉 후이늠의 세계라고 완전무결까지는 아니니, 어떤 면에서 이번 도서전의 주제 설정은 지나친 의미부여 같기도 하다. 물론 2023년과 2022년과 2021년의 주제가 각각 '비인간'과 '반걸음'과 '긋닛'이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처럼 뜬금없어 보이는 전시 내용도 새로운 전통인가 싶다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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