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북한에서 정체불명의 물건을 풍선에 매달아 남쪽으로 내려 보내는 바람에 긴급문자가 뜨는 소동이 벌어졌다던데, 날이 밝고 나서 확인해 보니 갖가지 오물을 집어넣은 비닐봉지가 여럿 발견된 모양이다. 휴전선 접경 지역뿐만 아니라 서울이며 더 남쪽의 후방까지도 침투한 모양이니, 비록 피해가 크지는 않더라도 앞으로 상당히 신경이 쓰이게 생겼다.


오물 소식을 접하자마자 이거야말로 진짜 '더러운 폭탄'(dirty bomb)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핵탄두 대신 핵 폐기물이나 기타 오염 물질을 넣음으로써 목표 지역의 환경을 오염시키는 종류의 폭탄을 바로 그런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인데, 이번에는 그 주체가 북한이라는 점에서 '가난한 자의 핵폭탄'이란 또 다른 별칭과도 딱 맞아 떨어지는 듯 보인다.


교묘한 도발인지, 아니면 신경질적 화풀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서 무인기가 서울 상공을 신나게 헤집고 돌아다녀도 속수무책 방관할 수밖에 없었던 선례를 떠올려 보면, 제아무리 유럽에 수출하는 최첨단 초강력 무기로 무장했다는 국군조차 정작 이런 재래식, 또는 원시적 공격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점은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다.


비유하자면 어마어마한 덩치와 힘을 자랑하던 골리앗이 소년 다윗의 돌팔매에 그만 뻗어 버린 것과 비슷한 형국인데, 실제로 세계 각지의 테러 집단에서는 강대국만큼의 무기며 자원이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갖가지 교묘한 방법을 고안한다고 알고 있다. 지난번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에서 명중률은 떨어지지만 저렴한 수제 미사일을 활용했던 사례도 그렇다.


이번 북한의 '더러운 폭탄' 공격은 정체불명의 오물이 들어 있었다는 점에서 세균전의 일종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중세에는 공성 과정에서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나 동물의 시체를 투석기에 넣어 성내로 날려보내는 섬뜩한 방법도 사용했다던데, 구체적인 출처를 찾아보려 지금 다시 구글링해 보니 이제 와서는 신빙성이 떨어지는 날조나 전설로 치부되는 모양이다. 


중세를 실감나게 (즉 야만스럽고 지저분하게) 묘사한 것으로 유명한 폴 버호벤의 영화 <살과 피>에도 바로 그런 장면이 등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룻거 하우어가 연기한 도적단 두목은 나중에 <베르세르크>에서 주인공을 거두어 키워 준 용병 대장의 모습으로 오마주되었다고 알고 있다. 바로 주인공의 "등짝"을 팔아넘겼다가 결국 목숨을 내놓아야 했던 그 사람이다).


세균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한국 전쟁 당시 미군을 둘러싼 소문이다. 당시 중국 정부에서 북한 소식통을 인용해 미군이 자행한 세균전의 증거를 모아 놓았다며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바람에 잠시나마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객관적이고 유의미한 증거라고는 전무한 상태에서 중국과 북한이 일반적인 주장만 가지고 펼친 여론전이었다.


냉정히 따져 보면 모순과 억지만 가득했던 그런 주장에 사람들이 솔깃했던 까닭은 당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던 영국의 생화학자 조지프 니덤이 중국 측 조사 위원회의 일원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열렬한 중국 애호가로서 머지않아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과학사 저술로 명성을 얻게 되는 그는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중국 정부 주요 인사와도 친분이 있었다.


그래서 중국 정부의 제안에 흔쾌하게 조사단에 이름을 올리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공산당의 선전선동에 자신의 명성만 빌려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허술한 보고서가 발표되자 중국이나 북한 정부보다는 오히려 세계적 석학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조사하지도 않은 저 생화학자를 향해 비난이 집중되었고, 그의 화려한 경력에서 뚜렷한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


조지 스타이너의 회고에 따르면, 제법 세월이 지난 후 니덤을 만나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던 중에 세균전 보고서 이야기를 꺼내자 갑자기 상대방의 안색이 달라지더라는 일화도 있었다. 희한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세균전 주장을 믿는 사람이 많은 듯, 수년 전 문제의 허위 보고서를 "발굴"했다며 대서특필한 "진보" 언론사도 있었다.


그런 사람이라면 이번 오물 풍선조차도 "인민의 표현의 자유"이자 "진정어린 성의의 선물"이라는 북한의 주장을 기꺼이 받아들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귀님 눈에는 핵 실험과 미사일과 방사포와 무인기를 뒤이은 '더러운 폭탄'이 졸지에 각자의 분변을 집어 상대방에게 던지며 반감을 표현하는 유인원 수준으로 떨어진 남북의 현 상황을 상징하는 듯해 씁쓸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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