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탑방에서도 제일 구석진 곳이어서 10년 넘게 손대지 않았던 책무더기를 뒤지다 보니 <行動과 죽음의 美學>(三島由紀夫 지음, 權五奭 옮김, 人文出版社, 1971)이라는 책이 있기에 꺼내보았다. 그렇잖아도 최근 "풍요의 바다" 4부작을 비롯해서 이 저자의 단편집이며 전기까지 줄줄이 간행되기에, 또 한 세대가 지나가니 유행도 돌아오는가 하는 생각이 들던 차였다.


이 책은 제1장 에세이 <행동학 입문>(1969-1970), 제2장 에세이 <끝의 미학>(1966), 제3장 에세이 "혁명철학으로서의 양명학"(1970), 제4장 단편 소설 "우국"(1961)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세 가지 저작은 저자의 논란 많은 할복 자살을 한 달 앞두고 일본에서 <행동학 입문>이란 제목으로 합본 간행되었으니, 사실상 자기 행동에 대한 예고의 성격도 지닌 듯하다.


역시나 그 최후를 예견했다고도 간주되는 단편 "우국"을 말미에 추가했는데, 역자 서문에 나오듯이 의아하기 짝이 없는 그 저자의 최후를 이해하기 위한 시도라고 해야 할 듯하다. 그런데 수록 작품 중에서도 나귀님이 보기에 가장 뜬금없는 것은 제3장 "혁명철학으로서의 양명학"이었다. 저자의 무리하고 황당무계한 궐기 주장이 양명학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양명학은 중국의 사상가 왕양명이 창시한 유학의 분파로, 한동안 주류를 차지한 주자학과는 상반되는 입장을 표명한 까닭에 자연스레 비주류로 취급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양명학이라면 기본적으로는 심성의 문제를 논의하는 관념론인데, 제아무리 비주류에 심지어 이단 취급까지 받았더라도 미시마의 할복 자살 같은 극단적 행동의 동기까지 될 수 있을까?


알고 보니 미시마 유키오의 "양명학"은 어디까지나 일본식으로 변용된 양명학, 그중에서도 특히 행동주의를 주장하는 분파의 주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실제로 해당 에세이에서도 왕양명에 대한 내용보다는 오히려 그 사상 가운데 "지행합일"의 원리를 "혁명 철학"으로 원용한 에도 시대 유학자 출신 반란자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생애에 대한 내용이 더 많으니까.


<사대부의 시대: 주자학과 양명학 새롭게 읽기>의 저자 고지마 쓰요사의 지적에 따르면, 일본에서의 양명학은 근현대의 각종 지사(志士)들의 "찰나적이고 파괴적인 테러리즘"의 원리로 오용되기도 했다. 따라서 같은 맥락에 있는 미시마의 에세이 제목이기도 한 "'혁명 철학으로서의 양명학'은 왕양명이 의도했던 '성인(聖人)의 학'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 한다.


결국 양명학의 일면만을 받아들여 각자의 행동을 정당화했던 혁명가들의 논리를 답습한 꼴이니, 이름만 같지 사실상 왕양명의 사상과는 무관하다고 봐야 맞겠다. 국내 저자 김형의 논문 "미시마 유키오의 양명학: 문화방위와 남성미의 부활"(한국양명학회논문집 <양명학> 제61호, 2021)도 미시마의 양명학 에세이를 분석하며 역시나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 듯하다. 


그런데 굳이 왕양명에게서 혁명에 유용할 법한 조언을 얻으려 했다면, 그의 사상보다는 차라리 생애를 살펴보는 편이 더 나았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왕양명은 철학자이자 관료였으며, 특히 가는 곳마다 연전연승한 유능한 장수였기 때문이다. 군인으로서의 행적을 조명한 전기인 <칼과 책>에는 "전쟁의 신 왕양명의 기이한 생애"라는 부제까지 달려 있을 정도다.


그러니 오시오 헤이하치로나 미시마 유키오가 진지하게 봉기를 모의했더라면, 단순히 "양지"나 "지행합일" 같은 사상의 경지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그 사상의 창시자의 행적을 통해 병력 운용의 실제에 대해서 배우는 편이 더 유용하지 않았을까. 물론 사상도 중요하지만, 여전히 의아할 따름인 미시마의 최후를 보면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느낌이 강하니 말이다.


그나저나 앞서도 말했듯이 최근 미시마 유키오의 저서 번역이 활발해졌다. 생각해 보니 이제 타계 55주기라서 거의 두 세대가 지났으니, 새로운 세대에게는 그의 저술이 오히려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올 수도 있어 보인다. 고전의 경우에는 한때 유행하다 시들해져도 한 세대 지나면 자연스레 다시 주목받게 마련이라는 '30년 주기설'이 다시 한 번 입증된 셈이려나.


하지만 작가로서의 뛰어난 역량과 별개로 극우 행보만 놓고 보면 일본 작가 중에서는 가장 우리에게 껄끄러워야 할 법하니, 얼마 전까지 'NO재팬' 선동이 대세였음을 감안하면 지금 미시마 유키오의 인기는 더욱 의아하고 우습기만 하다. 이러다가 또 독도나 위안부나 다른 뭔가가 '긁히는' 날에는 또다시 'NO재팬, NO미시마, NO오구라유나' 선동이 먹혀들지 않으려나.


이럴 때마다 나오는 말이 '업적과 논란은 별개'라는 것이지만, 그렇다 치면 지금은 매장당한 친일 작가나 심지어 고은도 언젠가는 재평가될 수 있다는 뜻인가 싶기도 하다. 문득 극우 성향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를 두둔하려 '업적과 논란은 별개'라고 주장한 사람들을 향해서, 그럼 앞으로는 항상 '파시스트 파운드'라 부르자고 꼬집은 조지 오웰의 글이 생각난다.


지지자들의 주장처럼 '업적과 논란은 별개'라면 사람들도 항상 객관적 평가가 가능할 터이니, 그의 치부를 매번 언급해도 그의 명예에는 무해하지 않겠느냐는 논리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양자를 별개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터이니, 당장 '내란범 윤석열'이니 '욕쟁이 이재명'이라고 지극히 사실대로 말하기만 해도 지지자들이 격분해서 난리를 치지 않을까.


미시마 유키오의 새삼스러운 인기가 더욱 흥미로운 까닭은, 얼마 전 일본의 중의원 선거에서 극우 성향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이 압승해서, 여차하면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 변모하게끔 헌법 개정조차 가능한 상황이 되었다는 뉴스 때문이다. 양명학까지 들먹이면서 부조리한 죽음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미시마의 염원(?)이 55년 만에 결국 성취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 나귀님이 가진 책 중에는 미시마 유키오가 각색한 현대극 노(能)의 영역본도 있다. 마침 예전에 구입한 아서 웨일리의 전통극 노(能) 영역본이 있어서 함께 읽어보려고 꺼내 놓았다가 차일피일하며 잊어버렸는데, 결국에는 엉뚱한 "양명학" 에세이부터 먼저 읽고 말았으니 우스운 일이다. 노(能)에 관한 책은 예전 열화당의 일본 전통극 시리즈로 처음 접했는데, 같은 시리즈에서 분라쿠와 교겐과 가부키까지 나왔다고 기억한다. 마침 얼마 전에 일본에서 가부키를 소재로 한 영화가 큰 인기였다고 하던데, 그 원작 소설도 번역된 모양이다. 예전에 비해 관련 자료가 늘어났으니, 기회를 봐서 한 번 훑어보고 정리해야 되겠다.


[**] <행동학 입문>에는 미시마가 1969년 대한항공 납북 사고를 딱 하루 차이로 모면한 이야기가 나온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국 동해안에 가서 게릴라 침투 지역을 탐방하고 12월 10일에 강릉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는데, 아마도 저 유명한 '이승복 사건'이 유래한 1968년의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바로 다음날인 11일에 대한항공 납북 사고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행동학 입문>으로 간행된 내용이 본래 잡지 연재물이어서인지, 더 나중에 가서는 이듬해 1970년 3월 31일의 (최근 넷플릭스 영화로 제작되어 화제가 되었다던) 요도호 사건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납치범들의 "행동"을 분석한다. 이쯤 되면 본인이 말하는 "행동"의 이론에는 바삭했던 모양이지만, 그 실천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죽음으로 마무리되었으니 이래저래 기묘한 일이다. 결국 이것도 마이크 타이슨의 말마따나 '누구나 계획을 갖고 있다. 한 대 처맞기 전까지는'의 사례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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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글 못 쓰는 지식인" 가운데 하나로도 선정되었다던 주디스 버틀러의 저서가 새로 번역되었다기에 궁금해서 미리보기를 클릭해 보았다. 나귀님으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의 연속이지만, 그나마 눈에 익은 고유명사가 등장한 몇 구절을 구글북스 원문과 대조해 보았더니 역시나 오역이었다. 공짜 알바를 할 의향은 없으니 하나만 지적하자.

 

"문제가 되는 것은 '떠맡음'의 의미이며, 이때 '떠맡겨진다는 것'은 '처녀성을 떠맡은 자'라는 말에서와 같이 더 고양된 영역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29쪽) 역주에는 "'처녀성을 떠맡은 자', 즉 '성모[동정녀] 마리아'는 "The Assumption of the Virgin"을 번역한 것이며, 이는 뒤이은 말인 "더 고양된 영역으로 받아들여진다"와 의미상 연결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 오역이다. "The Assumption of the Virgin"은 "성모 승천"이라는 뜻이니까. 즉 성모 마리아가 죽지 않고 하늘로 들려올라갔다는 가톨릭 전승을 말하며, 신성을 지닌 예수의 '자력 승천'(ascension)과 달리 에녹이나 엘리야처럼 인간이 하느님에게 "들려올라갔다"고 하는 '타력 승천'(assumption)이라 몽소승천(蒙召昇天), 피승천(被昇天)이라고도 한다.


버틀러가 페미니스트 이론가이고, 책에서 젠더/성에 대한 논의가 지속된다는 사실 때문에 "virgin = 처녀(성)"라고 번역자의 생각 자체가 굳어버린 탓일까? 하지만 원래의 문맥에서 버틀러의 발언 맥락은 "처녀성을 떠맡은 자"가 아니라 "성모 승천"일 뿐이다. 즉 그 대목에서 연거푸 나오는 영어 단어 assumption의 여러 뜻 중에 "승천"도 있다고 덧붙인 것뿐이다.


즉 제대로 옮기면 이렇다: "문제가 되는 것은 '떠맡음'(assumption)의 의미인데, 이때 '떠맡겨진다'(assumed)에는 "성모 승천"(The Assumption of the Virgin)의 사례에서처럼 더 고양된 영역으로 들려올라간다는 뜻도 있다." 결국 번역자/편집자/감수자 중 누구 하나도 가톨릭을 몰라서 벌어진 실수이고, 역주 7도 그런 무지를 변명하느라고 설명이 길어졌을 뿐이다.


이건 "식자우환"의 사례일 수도 있다.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가 엘리아데 대담집을 번역하면서 "바흐"란 이름이 나오자마자 더 유명한 작곡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대신 덜 유명한 종교학자 "요아힘 바흐"라고 오역했고, 또 교수 둘이 공역한 아리엘 도르프만 회고록에서 "라이너스의 담요"가 나오자 "노벨상 수상자 라이너스 폴링의 담요"라고 오역했듯 말이다.


또는 앤 카슨의 책에서 토라를 "narrow sex"에 비유한 표현이 나오자 "좁은 음문" 대신 "한정된 교미"라는 번역어가 나온 것과도 유사하다고 해야 하겠다. 쉽게 말해 '에이 설마 그거겠어?' 하는 생각에 뭔가 그럴싸한 해석을 복잡하게 고안해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설마 그거'가 정답이었던 거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다 보니 오히려 쉬운 답을 놓친 격이라 할까.


문제는 책 자체가 워낙 아리까리한 내용이다 보니, 독자는 오역조차 모르고 넘어가 버린다는 거다. 피천득의 저서에서 '에어리엘'이란 단어를 샘터 편집부가 '에머리엘'로 오입력하자, 저자의 제자인 한 교수가 이걸 또 의미심장한 뜻으로 굳이 해석하는 글을 썼던 것처럼, 저자의 권위가 높다 보면 독자 역시 무비판적으로 동조하여 오역과 오타조차 맞다고 여긴다.


버틀러의 이번 신간에서는 오역을 저질러놓고 무슨 뜻인지 다시 검토하긴커녕, 문맥과 동떨어진 역주를 길게 달아서 '꿈보다 해몽'을 도모한 번역자의 태도를 비판할 만하다. 이해가 안 되면 혹시 내가 잘못 옮겼는가 걱정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살펴봐야지, 말이 안 되게 번역해놓고 그걸 말 되게 한답시고 역시나 말이 안 되는 역주를 달아놓는 게 말이 되는가!


나귀님이 주디스 버틀러 같은 현대 철학자들을 불신하는 까닭은 그 논의 자체가 이렇게 번역조차 어려울 만큼 각자의 모국어에 '속박된' 상태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당장 그들의 모국어인 영어나 프랑스어와 호환되지 않는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우리 입장에서 보자면, 아무리 정교한 논의라도 번역이라는 검증을 견뎌내지 못할 만큼 허약한 장난감에 불과하다.


그래도 다들 떠받드는 것을 보면 뭔가 있긴 있나보다 싶어서 알아보려 해도 막상 나오는 책마다 오역본이니, 설령 '모든 것의 이론'이 들어 있다 하더라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어서 사실상 무용지물이다. 자기는 이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설명도 역시 모호할 따름이니, 결국 다들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야바위판인가 싶기도 하다.


지금까지 간행된 버틀러의 번역서는 하나같이 오역 논란이 따라붙었으니, 이쯤 되면 이 저자 자체가 우리나라에서는 오역을 "떠맡는"(assumed) 운명이라도 된 듯하다. 그렇다면 오역을 지적하는 비판자들은 저 난해한 문장을 제대로 옮길 수 있는가? 아무래도 꼭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이번에 나온 책 역시 북펀드 단계부터 '새롭고 정확한 번역'을 장담했었으니까.


원문 자체도 이해하기 힘든데, 번역자도 제대로 이해 못한 것을 독자더러 이해하라니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다. 과연 번역자는 "성모 승천"을 "처녀성을 떠맡은 자"로 옮기면서 말이 된다고 생각했던 걸까? 참고로 구판에서는 "하늘나라에 받아들여진 동정녀 마리아"라고 옮겼다. 구판도 오역이 많다고 들었지만, 이쯤 되면 신판 역시 믿을 수 없는 수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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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알라딘 서재에 접속했더니 지난번까지는 없었던 '2025년 서재의 달인' 엠블럼이 첫 화면에 나타난다. 영 눈에 거슬리는 물건이어서 없애려고 '서재관리 > 레이아웃/메뉴 > 사이드바이미지 설정' 메뉴로 들어가 보았더니, 앞서 선정된 2008년, 2014년, 2015년 엠블럼은 공개 여부 선택 메뉴가 있지만, 이번에 선정된 2025년 엠블럼은 그런 메뉴 자체가 없다.


애초에 설정 자체가 없었다면 모를까, 원래 있었는데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서 사용이 불가능하다니 뭔가 이상할 수밖에 없다. 가장 큰 원인은 역시 세월일 것이다. 알라딘 서재가 생긴 지도 20년이 넘었고, 이른바 '서재 2.0'이라는 대대적인 개편이 이루어진 지도 20년이 다 되어 가는 상황이니 낡은 부분도 많을 것이고, 오랫동안 방치된 부분도 많을 것이다. 


알라딘 서재 자체의 가치 하락도 원인이지 않을까. 딱히 황금알을 낳아주는 곳도 아니니 유지비가 아까울 법하다. 블로그 전문 사이트들도 이미 문 닫은 곳이 여럿이니, 여차 하면 알라딘도 블로그 문 닫기를 고민할 상황에서 열심히 업데이트할 이유가 없을 듯하다. 스마트폰이 도래하며 북플 사용을 권장하는 추세더니만, 결국 서재는 자연스레 찬밥이 된 걸까.


물론 스마트폰으로도 알라딘 서재를 이용할 수는 있지만, 원래 PC에 특화된 디자인이다 보니 '서재관리' 같은 설정은 여전히 웹사이트로 재접속해야 가능하다. 그런데 앞서 말한 엠블럼 공개 여부처럼 이제 와서는 유명무실해진 기능도 많아지니, 이쯤 되면 제대로 관리되기는커녕 사실상 폐쇄까지 염두에 둔 방치 상태에 놓인 것은 아닌가 의문마저 드는 것이다.


아니면, 이건 좀 더 섬뜩한 상상이지만, 알라딘 서재 자체는 오래 전 이미 사라졌고, 나귀님처럼 순진한 극소수 사용자를 제외하면 모조리 AI봇으로 대체된 상태에서 일종의 사회 실험이 진행 중인 것일 수도 있다. 최근 올라오는 게시물 대부분이 각종 이벤트며 서평단의 엇비슷한 홍보글임을 감안하면, 이런 의심마저 지나친 상상이라 일축하지는 못할 듯한데...





[26. 02. 12. 추가] 오랜만에 다시 서재에 들렀더니 위에서 꼬집었던 설정 메뉴가 슬그머니 수정되어 있다. AI봇들이 알라딘 서재의 동향을 최신 열심히 일러바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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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우주점에 오에 겐자부로의 <그리운 시절로 띄우는 편지>의 구판본이 있기에 구입했다. 흔치 않은 절판본이지만 최근에 신판도 나와 희귀본 대접까지는 받지 못한 까닭인지, 어영부영 요령 없는 나귀님 손에까지 들어오게 되었으니 희한한 일이다. 딱히 애호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어쩌다 보이면 하나씩 구입하다 보니 구판 전집을 하나 빼고 다 모으게 되었다.

 

고려원의 "오에 겐자부로 소설문학전집"은 전24권(마지막 권은 하스미 시게히코의 <오에 겐자부로론>으로 예정되었으니, 오에의 저서는 총23권뿐이다)으로 추진되었지만, 1995년부터 2000년까지 전체의 5분의 3인 열다섯 권만 간행하고 출판사 부도로 중단되었는데, 간행 개시 시점에서 최신작 위주로 간행하다 보니 대부분 뒷번호의 중후기 작품 위주로만 나왔다.


그나마도 출판사가 있던 시절에는 교보문고 등에서 할인 행사를 해도 '완간되면 한꺼번에 사자'고 외면했고, 출판사가 망하고 나서는 헌책방에 워낙 많이 굴러다니기에 '천천히 사도 되겠지' 싶어서 무시했는데, 뒤늦게야 본격적으로 읽어볼까 싶어 찾아보니, 그 많던 책이 다 어디 갔는지 안 보이고, 가격도 천정부지로 올라 아차 싶기도 하고 약이 오르기도 했다.


오히려 그 사이에 오에 겐자부로의 에세이나 대담집을 짬짬이 구해 읽으면서도 소설을 외면했던 까닭은 뭔가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특유의 현학적 내용이 거슬렸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이른바 '백치 아들 서사'를 중심으로 한 사소설이 반복되는 듯해서 본인의 '사연팔이' 이외에 작가의 능력이 있는지도 살짝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백치 아들 서사'라는 표현은 오에 겐자부로와 히카리 부자를 다룬 린즐리 캐머런의 논픽션 <빛의 음악>에서 처음 접했는데, 저 소설가를 연구하는 비평가 사이에서는 종종 통용되는 듯하다. 십중팔구 자폐증이면서도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작곡가로도 활동했던 히카리가 이른바 "백치 석학"(idiot savant), 흔히 말하는 "서번트"임에 착안한 표현이 아닐까.


이번에 구입한 <그리운 시절로 띄우는 편지>도 외관상 회고록 형식의 소설이지만, 내용 중에 역시나 '백치 아들 서사'를 포함한 저자의 실제 체험과 작품 활동 관련 일화가 등장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자전적인 내용이 아닐까 싶은 인상을 주게 된다. 현학적인 부분도 마찬가지여서 수시로 각종 작품과 인명과 이론이 언급되어 뭔가 정신사나운 느낌마저 없지 않다.


물론 사소설이나 자전소설도 어디까지나 '소설'일 뿐이므로, 이를 수기나 자서전과 혼동하면 곤란할 것이다. 오에 역시 자신의 작품 속 내용을 독자와 언론이 실제 사실로 혼동하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나타낸 적이 여러 번이라고도 전한다. 하지만 애초에 본인과 저서가 실명으로 등장하는 상황에서 '이건 어디까지나 허구'라고 강조하는 셈이니 설득력은 떨어진다.


이처럼 소설에서는 '장애아를 둔 진보 성향의 전업 작가'인 주인공이 거듭 등장하고, 에세이에서도 본인의 주장보다는 독서나 교유에서 얻은 바를 옮겨서 말하는 수준에 불과한 경우가 종종 있다 보니, 과연 이 작가에게는 독창성이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는 걸까, 어찌 보면 가족사의 비극과 그 극복 노력이라는 특징이 과대평가된 것은 아닐까 의구심도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 책을 구입하면서 내친 김에 이전에 구입한 그의 초기작까지 꺼내 일별해 보니, 초기의 오에 겐자부로는 내가 알던 모습과 상당히 '다른' 작가임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물론 여기서도 '아이의 눈으로 본 폭력과 부조리의 세상'이라는 주제가 반복되기는 하지만, 이후의 현학성과 상반되는 상당히 거칠고 사나운 느낌이 오히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번에 읽은 작품은 현대문학의 세계문학 단편선 <오에 겐자부로>의 제1부 "초기 단편"에 수록된 "기묘한 아르바이트", "사자의 잘난 척", "남의 다리", "사육", "인간 양", "돌연한 벙어리", "세븐틴", "공중 괴물 아구이"와 문지에서 단행본으로 나온 첫 장편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이다. 고려원 전집에서는 1-3권으로 예정되었지만 간행 불발된 작품들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 중 맨 처음 읽은 것이 중앙일보사 "오늘의 세계문학" 전집에 수록된 중편 "성적 인간"이었다. 이른바 '취미로 치한을 하는 사람'인 청년과 중년이 그 업계(?)에 첫 발을 담근 소년을 만나 가르침을 베푼다는 상당히 기괴한 내용이다 보니, 나중에 바로 그 작가가 무려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이렇게 처음 읽은 작품의 대담함과 의외성이 마음에 들어 중후기 장편도 집어들었지만, 앞에서 설명했듯이 자전적 '작가 소설'의 반복인 듯해서 금세 흥미를 잃고 말았는데, 이제 와서 다시 보니 초기 단편과 장편에서는 예전의 그 거친 느낌이 생생히 살아 있어서 반가운 마음마저 들었다. 반대로 중후기 장편을 먼저 접했던 독자라면 이질감마저 느끼지 않을까.


초기의 작품이므로 여기서도 몇 가지 유사한 주제가 반복된다. 예를 들어 "기묘한 아르바이트"와 "사자의 잘난 척"과 "공중 괴물 아구이"는 외관상 무해해 보이는 '일'이 의외의 결과로 이어진다는 내용이다. "남의 다리", "사육", "돌연한 벙어리"와 <새싹 뽑기>는 폐쇄 공간 거주자의 경계와 불신이 공감과 애정으로 변모되다 역시 의외의 결과로 맺어지는 내용이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역시나 최연소 아쿠다가와상 수상 기록을 세운 중편 "사육"이다. 전쟁 중 고립된 산간 마을에 미군 비행기가 떨어지며 흑인 병사가 생포되고, 주인공 소년이 사는 집에 쇠사슬로 묶인 채 제목 그대로 '사육'을 당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에 비하면 최근 아쿠다가와상 수상작이라는 "괴테" 어쩌구는 솔직히 애들 장난 같은 느낌이다.


<새싹 뽑기>도 전쟁 중에 외딴 산간 마을로 피난한 소년원 아이들이 뜻하지 않은 고립 생활을 하면서 불신과 적의, 음모와 죽음으로 점철된 어른들의 어두운 세계를 엿보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른바 '아이들만의 나라'라는 이상과 현실의 충돌과 파국이라는 점에서는 <십오 소년 표류기>에서부터 <파리 대왕>을 비롯한 갖가지 유사한 소재의 소설을 떠올리게 된다.


극우 사상에 경도되어 좌파 정치인을 살해한 열일곱 살짜리 소년의 실화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세븐틴" 역시 인상적이었고, 어찌 보면 민주화 교육을 받은 젊은 세대 중에 극우 동조자가 늘어나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감안하면 더욱 주목할 만한 작품이 아닌가 싶다. 저자는 이 작품과 이후 더 큰 논란을 빚은 속편 때문에 한동안 극우 지지자의 표적이 되었다 한다.


급기야 극우 지지자가 오에 겐자부로의 자폐증 아들을 납치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는데, 재발을 우려해 차마 공개하지도 못했던 이 사건의 충격이 컸던지, 이후의 '백치 아들 서사'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여러 번 반복되었던 모양이다. 약력상 1961년 아들 히카리의 출생 시점부터 대략 작가 경력의 중기가 시작되는데, 우리가 익히 아는 대표 장편소설이 이즈음 발표된다.


이때부터 반복된 사소설과 현학성이 저자 나름대로는 불행한 가정사를 숙고하고 반추하며 일종의 해답을 찾으려는 몸부림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초기의 거칠고 예리한, 심지어 폭력과 엽기가 돋보인 소재와 내용에 비하면 아무래도 필봉이 무뎌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사상이나 인간으로서는 더 성숙해졌을지 몰라도 이야기꾼으로서는 영 아쉬워졌다고나 할까.


고려원 전집이 중단된 이래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은 한동안 에세이 위주로만 간행되는 듯하더니, 여러 출판사에서 세계문학전집을 간행하면서 이제 다시 대표 장편이 재간행되고 있다. 고려원에서 나왔던 것은 물론이고 근간 예고만 되고 못 나온 것도 간행되었으니, 잘만 하면 전작 번역도 가능하겠지만, 일부는 또 그 사이에 다시 절판된 모양이니 쉽지는 않겠다.


아울러 작품 수도 많은 데다, 일본은 물론이고 외국에서도 인지도에 비해 대중성은 부족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인 작가이니, 어찌저찌 대표작이 간행되더라도 초기작보다는 중후기의 작품 위주로 나오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 우후죽순으로 나왔던 번역서도 대부분 중후기에 편중되었고 초기 작품은 비교적 드물었던 것도 그래서였나.


이런 현실을 감안하고 보자면, 초기 대표작을 여럿 수록한 저자의 자선(自選) 중단편집의 번역서인 현대문학의 <오에 겐자부로>는 이 저자의 초기 활동을 알 수 있는 상당히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오랫동안 이 작가의 역량에 대해서 의문을 품어 왔던 나귀님으로서는 특히나 속이 다 시원한 느낌이다. 물론 중후기 장편은 아직 그리 끌리지 않는다만서도...



[*] 오에 겐자부로에 대한 해설서가 없는 상황에서는 앞서 언급한 린즐리 캐머런의 책이 '백치 아들 서사'가 지배적인 중후기 작품 세계를 엿보는 창문 역할을 어느 정도 해주지 않나 싶다. 아쉽게도 지금은 그마저도 절판인 듯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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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한 치킨집에서 엔비디아의 젠슨 황, 삼성의 이재용, 현대자동차의 정의선이 함께 식사하는 장면이 공개되어 화제였다. 이후로 셋이 앉았던 자리에 나도 한 번 앉아보겠다는 사람이 줄을 서서, 해당 좌석의 이용 시간을 1시간으로 제한했다고도 전한다. 세 사람이 사용한 식탁에 각 기업 로고와 이름 명패도 붙였으니, 이쯤 되면 현대판 성유물인 셈이다.


여기서 가장 아이러니한 점은 저 세 사람이 반도체와 자동차 등 첨단 산업 분야에서 주도적인 기업들의 대표라는 점이다. 어찌 보면 현대 기술의 상징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런 사람들의 '좋은 기운'을 받겠다는 미신적인 이유로 그 좌석을 원하는 사람들이 줄을 선다니, 새삼스레 인간의 비합리성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달까.


다만 셋 중 두 명은 자기 능력보다 혈통 덕분에 그 자리에 갔음을 감안한다면,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저 '기운'의 실체도 대략 짐작된다. 개인 역량과는 무관하게 순수한 우연을 통해 부잣집에 태어나 3대째 재벌로 행세하는 사람들이니, 그 행운이 전염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주 잘못까진 아닌 듯하고, 미신적 추구의 대상인 현대의 성유물이 충분히 될 만해 보인다. 


성유물이란 불교의 사리처럼 명성이 높은 종교인의 사후에 남은 유해나 유품을 가리킨다. 서양에서는 가톨릭에서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모양인데, 특히 중세에는 '짝퉁' 성유물이 하도 많아서 예수의 '진품' 십자가만 수십 개에 달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종교개혁가 칼뱅의 "성해론(성물론)"은 이런 부조리에 대해 합리적인 차원에서의 반박을 시도한 글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에서는 성인으로 추앙받던 수도사가 사망하자 모두들 그 시신이 썩지 않고 향기를 풍길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정작 반나절도 되지 않아 시신이 썩으며 물이 줄줄 흐르자 '그렇다면 저 사람은 성인이 아니라 위선자였던 건가?' 하고 다들 '현타'를 느끼는 장면이 나오는데, 역시나 성유물에 대한 미신적 집착을 꼬집는 장면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는 '법력이 높으면 사리가 많다'는 믿음이 팽배해서 성철 같은 저명한 고승이 사망하면 그 사리 수습에 대중의 관심이 집중된 바 있다. 불교계에서도 이를 미신이라 간주해서인지 법정의 사례에서처럼 지금은 사리 수습 없이 다비식을 마치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리가 많이 나왔다'는 소문은 암암리에 퍼지는 듯하지만).


칼뱅이 비판했던 예수의 각종 '진품' 성유물과 비슷하게, 불교에서도 부처의 시신 일부인 '진신사리'라는 것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진신사리를 보유했다고 주장하는 사찰이 여러 군데인데, 이 경우에는 진짜 부처를 모신 까닭에 불상을 놓아두지는 않는 것이 특징이라 한다. 마침 바깥양반도 얼마 전 여행 중에 그런 절에 다녀왔다기에 의외로 많구나 싶기도 했다.


그렇다면 최근 화제가 된 저 치킨집의 성유물은 과연 진짜일까. 만약 앞서 다녀간 세 사람의 능력과 행운 덕분에 누구나 그 자리에 앉기만 해도 '좋은 기운'을 받을 수 있다고 치면, 당장 치킨집 주인부터 그 식탁과 의자를 가져다가 자기 집에 놓고 혼자만 이용하지 않을까. 아니, 당장 치킨집 본사에서 가져다가 사장실에 놓아두고 정말 뽕을 뽑으려 하지 않을까.


혹시 나중에 그 치킨집이 문을 닫기라도 하면, 그 식탁과 의자의 행방은 어떻게 될까? 미국 기록보관소에서 가져다 보관한다는 태프트의 대형 욕조처럼 이것도 21세기 한국과 세계 경제의 결정적 장면의 소품으로 인정되어 삼성전자 박물관이나 현대자동차 기록관이나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될까? 아니면 그냥 폐기물로 분류되어 쓰레기장 신세로 전락할까?


문득 언젠가 어느 KFC 지점에서 커널 샌더스 입상을 내다버린 모습을 본 것이 기억난다. 지점 앞 길가에 세워 놓고 등짝에 대형 폐기물 스티커를 붙여 놓은 것을 본 바깥양반이 노인 공경을 하지 않는다며 분기탱천했는데, 여기저기 낡고 도색이 벗겨진 모습을 보니 제아무리 친근하고 상징적인 물건이라도 용도가 다하면 결국 플라스틱 쓰레기에 불과함을 느꼈다.


좋은 자리와 나쁜 자리 이야기가 나오니, 문득 세월호 사고 직후 체육관에 모인 실종자 가족들의 일화도 떠오른다. 나중에는 시신이라도 빨리 찾으려는 마음에, 옆사람이 시신을 수습해 나가면 얼른 그 자리로 옮겨 앉으며 행운을 바랐다는 일화가 있었으니 말이다. 이것 역시 존 디디온의 말처럼 '마술적 사고'의 한 가지 눈물겨운 사례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고보니 며칠 전이 '무안공항 참사'인지 '제주공항 사고'인지의 1주기였다. 마침 지난 주에 김건희 특검의 결과 발표도 있어서 시간 참 빠르다 싶었는데, 특검 시작보다 더 먼저인 이 비행기 사고만큼은 어째서인지 수사도 처벌도 영 지지부진해 보이니 희한한 노릇이다. 유족의 애끓는 심정으로야 저 치킨집에 있다는 '행운의 자리'라도 빌려오고 싶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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