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매장에 필요한 책이 하나 있어서 구입하려고 보니 배송비 내기가 아까웠다. 7,500원짜리 책을 더 고르면 되는데 아무리 뒤져도 관심 가는 것이 없기에 고민하다가 무려 22,600원이나 되는 비비안 마이어 도록을 함께 주문해 버렸다. 사실은 이것 자체만 해도 2만 원이 넘어 무료 배송이니 배보다 배꼽이 커진 격이다.
사진 찍는 메리 포핀스로 유명한 이 무명 사진가의 사진집이라면 <나는 카메라다>와 <셀프 포트레이트>를 이미 갖고 있었지만, 이런 책들과 달리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2022년 한국에서도 개최된 전시회 도록이라고 하니 또 무슨 내용일지 궁금했던 것이다. 수록된 해설 역시 기존 사진집에 수록된 것과는 달라 보였다.
노란색 종이 재질 하드커버로 이루어진 말끔한 도록을 받아서 훑어보니 기존 사진집에 수록된 것과 중복되는 작품도 일부 있었지만, 처음 보는 작품도 제법 있어서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괜찮았다. 사진 예술에 관한 논의에 치중한 해설보다는 가족의 기구한 사연을 발굴해 서술한 생애 부분이 흥미로웠다.
또 하나 특이했던 점은 뒤표지에 수록된 에밀리 디킨슨의 인용문이었다. 프랑스어로 작성되었기에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는데, 판권면에 "에밀리 디킨슨이 엘리자베스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 1856년 1월 20일, 네덜란드, 에밀리 디킨슨 아카이브"라고 나오기에, 구글링 끝에 그 편지의 영어 원문을 찾아 읽어보았다.
에밀리 디킨슨 박물관이라는 홈페이지에 올라온 원문인데, 텍스트 입력 과정에서 띄어쓰기 오류며 오타가 발생해 읽기에 편하지는 않았지만, 여하간 비비안 마이어 도록 뒤표지에 실린 인용문이 "나는 등불을 가지고 바깥에 나가서 나 자신을 찾고 있다"(I am out with laterns, looking for myself)임은 알 수 있었다.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니며 '사람'을 찾는다고 말했다는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일화가 떠오르는데, 이 편지는 디킨슨이 지인인 엘리자베스 홀랜드(Elizabeth Holland)에게 보낸 것으로 나온다. 즉 판권면의 설명에서 "네덜란드"는 "엘리자베스"의 성 "홀랜드"(Holland)를 "홀란드(네덜란드)"로 오독한 결과물로 보인다.
이미 갖고 있는 디킨슨 편지 선집(EMILY DICKINSON: SELECTED LETTERS, ed. by Thomas H. Johnson. Cambridge, MA: The Belknap/Harvard University Press, 1958, 1971, 1986)을 보니 이 편지가 들어 있지 않기에 어째서인가 서문을 살펴보니, 이 책 출간 당시인 1958년까지 확인된 편지는 그게 전부였다고 한다.
지금 다시 확인해 보니, 그 사이에 민음사에서 디킨슨의 편지를 번역한 선집이 나온 모양인데, 혹시 그 책에는 위의 인용문의 출처인 편지도 수록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시 번역본도 그 사이에 여러 가지가 더 나온 듯한데, 지난번에 말했듯이 민음사와 파시클의 번역본은 오역이 없지 않으니 피하는 게 상책일 듯하다.
그나저나 왜 비비안 마이어의 도록에 에밀리 디킨슨의 인용문을 굳이 수록했을까? 어쩌면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작품을 세상에 거의 공개하지 않고 평생 혼자만 간직했다는 공통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울러 사후에 가서야 뒤늦게 세상에 알려져 큰 찬사와 명성을 얻게 되었다는 또 다른 공통점 때문일 수도 있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