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구입한 윌슨과 횔도블러의 공저 <초유기체>를 보니 개미 둥지 주물 제작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이전에 윌슨 책에서 간혹 그 사진과 언급이 나오기는 했지만, 책상 위에 놓아둔 물건이라고 하기에 기껏해야 농구공 크기 정도인 줄로만 착각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훨씬 더 거대한 물건이었다!


<초유기체>의 제10장 "둥지 건축과 새 보금자리 찾기"를 보면, 개미 둥지 주물 모형 제작 전문가인 월터 칭켈이라는 사람이 직접 만든 물건 옆에 서 있는 사진이 두 장 나오는데, 양쪽 모두 2미터 넘는 깊이에 걸쳐서 산재한 수많은 방들이 가느다란 통로로 이리저리 이어지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그 월터 칭켈의 저서가 (저자명은 월터 "칭클"로 표기되었다) <개미 건축>이라는 제목으로 이번에 번역된 모양이니 놀랍고도 반가울 뿐이다. <초유기체>에서는 그 제작 과정을 간략하게만 언급하고 넘어갔기에 신기한 만큼이나 궁금하기 짝이 없었는데, <개미 건축>으로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법하다.


늘 그렇듯이 Yes24의 고화질 미리보기로 살펴보았더니, 개미 둥지 입구에 부어 넣을 주물의 종류 선정 과정에서부터 상당히 자세하게 서술된다. 좁은 구멍을 따라 한참 흘러가야 하기 때문에 천천히 식는 주물이 필요해서, 처음에는 석고를 쓰다가 나중에는 아연과 알루미늄 같은 재료로 바꿨다고 한다.


귀하의 주택이 곧 모형화될 예정이니 모두 대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운운 하는 사전 공지를 냈을 리가 만무하니, 주물 제작 과정에서 그 안에 들어 있던 개미와 애벌레는 모조리 죽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개미야 하루에도 숱하게 죽고 또 태어나는 미물이니 굳이 슬프거나 안타까워할 이유는 없을 법하다.


물론 윌슨이나 칭켈 같은 개미학자라고 해서 생명의 소중함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것이야 아니겠지만, 생물학 연구의 대의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희생은 필요하다는 점을 역시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윌슨은 황폐화한 섬의 생물 재정착 실험을 위해 작은 무인도에 살충제를 살포한 전력도 있으니까.


간혹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식으로 경중의 차이를 애써 무시하려는 사람도 있는데, <던전밥>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생물의 생존은 다른 생물의 죽음을 가정하는 것이니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기껏해야 내 목숨을 위해 희생되는 다른 목숨이 있음을 기억하며 더 겸손하게 살려 노력하는 것이 최선 아닐까.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는 이런 사실을 뭔가 더 극적인 사례로 설명한다. 즉 등장인물 가운데 한 명이 수건으로 뭔가를 쓱 하고 닦는 순간, 그 수건 속에 기생하던 고도로 발달한 미생물 문명이 단숨에 멸망을 맞이해 버린다는 것이다. 넓은 견지에서는 세상만사도 그렇지 않을까.


기독교에서는 하느님 눈에 인간이 미물에 불과하다고 강조하고, 불교에서도 영겁의 시간 속에서 인간의 집착은 무의미할 뿐이라고 강조한다. 비록 그런 가르침대로 살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인간의 관점과 개미의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상상하다 보면, 우리가 더 겸손해야 할 이유도 깨닫게 된다.


물론 우리가 미처 모르는 어떤 거대한 원리나 법칙, 또는 운명이나 맹목이 있다고 가정한다 해서 지상의 모든 불행과 불의가 선뜻 손쉽게 이해되는 것까지는 아니다. 마치 엊그제 갑자기 일어나서 온 나라를 놀라게, 슬프게, 안타깝게, 분노하게 만들었던 서울 시청 인근 차량 폭주 사고의 경우처럼 말이다.


피해자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하나둘씩 밝혀지며 안타까움을 더해주는데, 뉴스 보도에서 '아빠가 아니라고 말해달라'던 어느 유족의 절규가 유난히 귓가에 맴돈다. 이런 소식 앞에서야 개미와 인간이며, 지구와 우주며, 영겁과 순간이며 하는 이야기도 부질없고, 그저 딱하고 눈물겨운 것이 인지상정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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