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 살 결심 - 개인주의자 문유석의 두번째 선택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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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후진이 없다. 직진밖에 모르는 초보 운전자다. D-두 자릿수. 정신없이 지내다 확인하니 십의 자리가 확 바뀌어있다. 출퇴근이 반복되는 첫 번째 삶을 마무리하기까지 남은 기간이다. 디데이가 오기는 오는구나. 한동안은 매일 출석 체크하듯 확인해도 그리 더디더니, 두 자리로 줄어든 후로는 능숙한 운전자로 빙의했나 가속이 붙는다. 막연하던 날짜의 존재감이 선명하다.

새로운 근무지로 출근한 작년 3월, 정년퇴직을 당연하게 여기던 초임 시절을 떠올리며 그런대로 견딜 만하면 더 해볼까 생각도 했다. 명예롭게 퇴직하기로 결정하기까지는 채 한 달도 걸리지 않았지만. 쉬는 시간마다 난무하는 고성과 비속어가 귓가를 울릴 때면 조금씩 숨이 막혔다. 나이가 면죄부라도 되는 양 거침없이 휘둘러지는 무례의 칼날은 수시로 심장에 생채기를 냈다. 무의욕을 덮고 엎드려 있는 장면을 무덤덤하게 바라보며 적막한 교실에서 몇안되는 눈빛에 의지한 채 홀로 울리는 나의 음성을 들을 때면 무기력함이 한기처럼 배어 나왔다.

나를 둘러싼 공간의 질감을 감당하기 버거웠다. 긍정의 에너지가 점점 고갈 되어감을 감지한다. 소소한 보람과 보석 같은 웃음들로 치유하며 버티기에는 상처가 생기는 속도가 그보다 빨랐다. 자가 처치의 한계를 절감하다 직원 화장실 거울에서 표정 없는 자화상을 목도한다. 더 이상 이 공간에 나를 두고 싶지 않아. 첫 번째 삶을 마무리할 결심을 굳힌 날, 제일 먼저 카카오톡 프로필에 디데이를 설정한다.

 

줄어드는 디데이의 숫자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문유석의 에세이 《나로 살 결심》을 만난다. 판사였던 작가가 23년 법관의 삶을 마무리하고, 전업 작가로서의 삶을 선택하기까지의 노정을 적은 책이다. 1부에서는 첫 번째 삶을 떠나기까지의 과정을, 2부에서는 두 번째 삶에서 겪게 되는 과도기적인 시행착오를, 3부에서는 두 번째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일기처럼 진솔하게 그려진다.

두 번째 삶을 앞둔 시기에 하필 경험자의 이야기가 날아든 건 운명일까. 몇 가지 공통 분모를 발견하며 커다란 울림으로 공감한다. 첫째, 두 번째 삶을 선택했다는 점. 둘째, 그 삶이 글 쓰는 삶이라는 점. 셋째,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아서 첫 번째 삶을 마무리한 점. 넷째, 처음에는 평생 첫 번째 삶으로 살고 싶었다는 점. 다섯째, 첫 번째 삶과 연관된 등록도 하지 않은 점. 여섯째, 개인주의자라는 점이다.

내년 2월 28일로 35년간의 교직 생활을 마무리할 생각이며, 구체적인 계획은 세우지 않았으나 어떤 식으로든 글을 쓰는 삶을 이어갈 생각이다. 다행히 바로 연금이 나와 생계에 대한 불안감을 덜 수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열심히 일한 당신으로 떠날 수 있어서. 스스로 떠날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 때, 나는 교실에서 제일 신이 나고 행복한 사람이었다. 이제는 과거형이지만. 퇴직 이후 학교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을 작정인 나는 개인주의자다.

 

3년 전, 《개인주의자 선언》으로 저자의 세상을 접한다. 나만 위하며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는 이기주의자도 아니고, 헌신적으로 타인을 위하는 이타주의자도 아니며, 나를 중심으로 살지만 굳이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니 스스로 개인주의자라 여기며 살아가던 중이었다. 반가웠다. 나만 하는 생각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필이 통하는 동갑내기 친구를 발견한 듯 위로 받았던 기억이 있다.

좋은 기억 속에 담긴 작가라서 그가 쓴 《나로 살 결심》 역시 가뿐하게 펼치리라 예상한다. 한데 표지를 넘기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제목 때문이다. 제목은 독자가 처음으로 접하는 작가의 글, 그의 세상을 여는 문고리이다. 첫인상처럼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표지를 넘기기 전이면 매번 제목을 곱씹으며 상상한다. 이 제목을 붙인 이유는 뭘까, 어떤 내용이 담긴 주머니를 매달고 있을까.

독서 모임 도서로 선정될 경우, 비슷한 제목을 훑어본다. 주문하는 책의 제목이 이왕이면 유니크하기를 바란다. 인터넷 서점에서 '나로 살'까지 검색어를 입력하니 연관 제목들이 뜬다. '나로 살아가는 연습,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다만 나로 살 뿐,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나로 살아가는 기쁨'. 나로 사는 일이 많은 이의 관심사임을 반영한다. 동일한 제목은 나오지 않는다. 이 책의 특이점이 '결심'에 있음을 깨닫는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결심'의 중의적 의미를 설명한다. 흔히 우리가 아는, 마음먹는다는 뜻의 '결심(決心)' 이외에도 재판을 마무리한다는 의미의 '결심(結審)'도 있다고 말한다. '재판을 종결하면 더 이상의 주장도, 증거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직 판결만 있을 뿐이다. 1년 넘게 법원에 대한 미련 때문에 고민하고 망설였지만, 이제는 결심해야 할 순간이었다.' 그는 변호사 등록도 하지 않으며 첫 번째 삶과의 연결 고리를 말끔하게 정리한다.

결심의, 결심에 의한, 결심을 위한 책이다. '결심'을 중심으로 개인적인 서사가 펼쳐진다. 작가는 현실을 앞에 두고 결심한다는 건 만만치 않은 일임을 인정한다. 첫 번째 삶에 대한 미련 때문에 망설였던 결심까지의 과정을 담담하게 드러낸다. 막상 결심을 실행했지만, 두 번째 삶 역시 녹록하지 않음을 고백한다. '세상은 교과서대로 움직이지 않으며' 결심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므로'. 그 안에서 그는 적절한 무게 중심을 찾으며 삶을 당당하게 이어간다.

여러 가지 이유로 좋았다. 미사여구로 포장하지 않아서. 객관적으로 자랑할 조건이 많음에도 잘난 척을 하지 않아서. 다큐멘터리처럼 현실적인 글이라서. 나만 그런 건 아니라는 생각에. 글을 쓰며 살아가는 일상의 이면까지 보여주어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둡거나 칙칙해지지 않아서. 풋! 책장 사이사이에 간지처럼 끼워진 유머도. 무엇보다 긍정적으로 삶에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마음에 든다.

 

글은 사람을 닮아가나. '문유석'이 담긴 글을 보며 글과 사람의 관계를 생각한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니 글에 솔직한 그가 비친다. 어떤 면은 가까이 있는 자신보다 일정한 거리만큼 떨어진 타인이 잘 볼 수 있는 걸까. 투명 수채화 같다. 글에 담은 거짓은 포장한 흔적까지 금세 드러난다. 덧칠한 자국도, 물로 희석한 색채도 보인다. 나의 글도 그러하리라는 생각이 미치자, 키보드를 걸어가는 손가락이 잠시 주춤한다.

에라, 솔직해지자. 내가 쓰는 글이 한 줌의 뻥도 없는 100% 진실의 퓨어 워터는 아니라는 사실을, 가끔은 자뻑하여 다소 과한 액션을 취하는 경우도 있음을 고백한다. 뭐, 그렇다고 근거 없는 사실을 무턱대고 끌어오지 않는 양심은 있다. 서사의 완성도를 위해 글자 크기 11을 15정도로 다소 키울 뿐, 함초롬바탕체를 양재샤넬체로 변신시키는 무모함을 시전하지는 않습니다요. 문학적 허용이라고 당당하게 우기는 중이다.

'당당함'는 예전의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가난의 무게에 주눅 들어 바람 빠진 풍선마냥 쪼그라든 채, 주로 구석을 찾아 그림처럼 걸려있는 내성적인 인간이었다. MBTI의 극 I 였다. "네가 교사를 한다고?" 학교에서 말을 잘 하지 않았기에 목소리도 들어보지 못했던 초등학교 동창들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물론 친구들에게 가르쳐주는 행위를 좋아하기는 했다, 자리에 앉아 살며시 속삭이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말없이 염화미소를 짓는 내게 친구들은 종종 물었다. 말수가 적으니, 생각이 깊을 거라 여겼을까. 말의 양과 생각의 깊이는 반비례하는 듯 보이니까. 한데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말이 없는 나는 사실 생각도 별로 하지 않았다. 그냥 있었을 뿐인데 뭔가 있어 보였나. 주변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관심 가는 분야는 깊이 파고들었지만, 관심 없는 분야에는 최소한의 상식조차 보유하고 있지 않아 관심도에 따른 편차가 컸다.

"그 과목을 가르친다고요?" 의외라는 반응은 가르치는 과목에도 있었다. 가정이나 도덕, 국어를 전공할 것 같은 얼굴로 '과학'이라니! 처음 본 누구도 나의 과목을 상상하지 못했다. 몇 번의 사소한 선택을 따라가니 어느새 나는 과학 선생님이 되어있었다. "아무래도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 30여 년 지나니 알겠어. 진로를 잘못 선택한 바람직한 예가 바로 나야." 사회화된 I 의 보유자는 이렇게 떠들고 다녔다.

처음부터 작가의 삶을 선택했어야 옳았을까. 글 쓰는 건 어릴 때부터 좋아했으니까. '첫 번째 삶에서의 경험과 고민이 그동안 쓴 글의 씨앗이 되었듯이 어쩌면 '두 번째 삶'에서 경험한 나의 불안, 회의, 어리석음, 나태, 방황 이 모든 것 역시 언젠가 좋은 글의 씨앗이 되지 않을까.'라는 문장이 시선을 붙든다. 지나온 '나'를 진지하게 바라본다. 지금껏 첫 번째 삶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고 있었음을 불현듯 깨닫는다.

 

과학 교사로서의 삶은 두 가지 면에서 나의 성향에 최적화된 천직이었던 거다.

첫째, 내성적인 나에게 맞춤형 직업은 교사였다. 35년 가까이 오만가지 인간상을 접하며 '인간'이란 존재를 타발적으로나마 이해하게 되었으니까. 이럴 수도 있음을, 그러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이도 저도 아닌 경우도 생각보다 많음을. 교사가 아니었다면 사교성이 없는 내가 그 많은 인간을 어떻게 만날 수 있었을까.

둘째, 외골수적인 나에게 과학 과목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글쓰기를 좋아해서 국어를 선택했더라면 과학 분야로 고개를 돌리기나 했었을까. 생각을 글로 풀어내는 능력이 조금은 있는 것 같으니, 덕분에 풍부한 표현을 장착한 문이과 통합형 인간이 된 게 아닌가. 간혹 과학적인 현상을 빗대어 비유하는 글을 쓸 때, '이럴 수가! 이토록 감탄스러운 표현을!' 자작하다 취한 양 내 글에 내가 취해서 히죽거리며 자신감을 충전하곤 했으니까.

문유석 작가처럼 첫 번째 삶에서의 경험을 글에 조금씩 녹여내게 될 듯하다. 나아가 지금까지의 경험 모두를. 이제는 웃으며 말하는 가난 덕분에, 외로움 덕분에, 슬픔 덕분에 삶의 추위와 더위를 더욱 생생하게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첫 번째 삶은 감사하게도 삶과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을 조금씩 넓혀주었던 거다. 글을 쓰며 걸어가고 싶은 두 번째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내가 선택한 삶의 길은 언제나 정답이었다.

 

명예퇴직신청서를 작성하다 사유를 적는 칸에서 주춤했다. 지긋지긋한 관절염은 나이 때문이니 건강이상이라기에는 민망하고, 입원할 정도로 아픈 가족은 없으니 간병도 아니고, '등단할테다!' 마음먹은 야심 찬 자기 계발도 아니고, 그나마 근접한 사유가 업무 부담 및 부적응인데, 이렇게 적자니 스스로 실패자 같아서, '자기 계발'로 포장하고 '자기 보호'로 읽던 참이다. 이제는 후련하게 작성할 수 있겠다. 글 쓰는 삶을 위한 자기 계발로.

글은 콜드브루다. 차갑거나 미지근한 하루하루의 방울들을 인내하면 마침내 깊은맛을 보여준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상처를 입었다는 건 무언가를 했다는 증거이다. 상처 입은 경험들은 든든한 빽이 되어 내일의 글을 받쳐준다. 첫 번째 삶을 지나온 나의 빽을 믿고, 두 번째 삶을 시작하려 한다. 콜드브루로 거듭난 글을 마주할 미래의 어느 순간, 나 역시 글을 닮아 깊어져 있으리라 기대하며.

혼자만의 힐링 시간, 아홉 개의 조명 너머로 햇살에 얼굴을 부비는 초록 잎들이 간간이 흔들린다. 왼쪽에서 첫 번째 창에 그림인 양 걸린 풍경이다. 이어폰을 통해 '일하면서 듣기 좋은 카페 음악'이 흘러 들어온다. 단골 카페 2층, 매번 앉는 자리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노트북을 두드린다. 지금 이 순간을 돌려보며 콜드브루로 업그레이드된 글을 쓰고 있는 미래의 나? 새살이 돋은 심장이 간질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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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 (40만 부 기념 스페셜 리커버)
태수 지음 / 페이지2(page2)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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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에 막연히 상상했던 나이의 상한선은 서른이다. 무려 50대가 내게도 올까. 60대가 머지않은 지금의 나이가 당시에는 TV 속 연예인처럼 비현실적으로 자리한다. 80대 어머니의 나이와 나의 미래가 선뜻 겹치지 않는 것처럼. 서른 살이면 성숙한 어른일 테니 뭐든 척척 해결하며 살겠지? 지금보다 두 배 이상의 기간은 어른이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잖아? 고작 서른 살을, 겨우 10대는 무적의 어른인 양 우러러본다. 성인과 어른의 개념을 착각한다.

19세 이상 맞아? 인증해 봐. 드넓은 뷰가 야릇하게 펼쳐질 꼬야, 흐흐흐. 붉은빛 OTT가 끈적하게 묻는다. 훗~ 일말의 거리낌도 없다. 성인의 관문을 열어젖히는 열쇠는 몸의 나이에만 다다르면 누구에게나 생기니까. 생년월일 등 소수의 정보만 입력하면 입성 가능한 세계, 몇 개는 묻지만 따지지는 않는 영역 아닌가.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지는 OX문제처럼 답이 명확하다. 노안으로 잘못 클릭하여 낭패를 볼지언정. 

어른 맞아? 인증해 봐.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무엇으로 증명하나. 성인과 비슷해 보이지만 어른은 정신적인 의미가 더 크니 말이다. 하여 어른의 자격은 신체의 나이와 비례하지 않는다. 10대에 '스럽다'는 표현으로 불리는가 하면, 중년에 '어른이'라는 신조어로 지칭되기도 한다. '답다'라는 디폴트의 범주에 입성하는 게 의외로 까다롭다. 주관식 답처럼 판단이 모호하다. 성인이 확실한 나는 어른일까, 어른이 되는 과정에 있는 걸까.


'어른'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 계기는 자그마한 몸집을 가진 에세이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이다. 책 위에 손바닥을 펼치면 꽉 찰 정도로 아담하다. 288g, 288쪽의 가뿐한 모습이 뽀득뽀득 세수시킨 말간 어린아이 같다. 모자를 쓴 채 바다를 응시하는 표지 속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은은한 파스텔톤 백사장과 부드러운 옥색 바다에 물들어버리기라도 한 듯 덩달아 마음이 차분해진다.

살짝 튀어 오르는 하얀 점들은 파도 방울인가. 표지의 중앙을 손끝으로 더듬자, 눈에 띄지 않던 점자가 톡톡 존재감을 드러낸다. 숨은 글씨 찾기에 성공한 듯 작은 희열을 느낀다. 감각 기관을 가르칠 때, 점자 관련 활동을 한 이후로 엘리베이터만 타면 점자에 눈길이 가던 차다. 무슨 뜻일까. 책 제목인가. 질문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답변을 시전하여 신뢰도에 제 발등을 찍지만, 여전히 방대한 지식을 보유한 J에게 표지를 보여준다.

사진을 찍어서 요청하니, '바다가 들려'입니다. 이미지를 회전하고 다시 읽어 달라니, '해바라기'입니다. 책 제목을 알려주니,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가 맞습니다. 1번에서 6번까지의 점자 배치를 파악하여 번호를 제시하니, '아아 르논본배 번 작야어드브'란다. 하아. 그래, 좋은 말이겠지. 이쯤에서 포기한다. 정답은 의외의 순간에 허탈하게 드러난다. 알라딘 책 소개를 진작 노트북으로 읽어볼걸. 핸드폰을 한 번 더 두드려 전문을 보았더라도.


책날개에 적힌 설명을 보기는 했다. 리커버 공모전의 참여작 1,080점 중에 선정된 표지 디자인, 수상자의 의도를 반영한 디자인적 장치라는 점이다. 핸드폰 액정에 드러난 알라딘 책 소개의 초기 화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거기까지만 읽은 나는, 무슨 글씨인지 단순한 궁금증만을 가진다. 대륙붕 언저리에서 깔짝거리던 내 앞에 심해가 펼쳐질 때까지.

'바닷가에서 잔잔하고 조용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과 손에 닿는 행복의 의미를 담아 '푸른 바다가 반짝인 어느 날'을 점자로 수놓은'게 진정한 의도라고 한다. 행복의 본질을 관통하는 의미에 순간적으로 전율이 인다. 첫째, 행복은 섬세한 솜털처럼 자칫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이니 손끝을 내밀어 천천히 느껴야 닿을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 행복은 늘 거기에 존재하지만 바다 위의 윤슬이 반짝이는 순간을 발견하는 건 찾는 이의 몫이라는 점이다.

점자의 루프에서 빠져나오니 이번에는 제목이 시선을 붙든다. '어른'과 '행복'이란 두 단어의 무게 때문이다. 나는 어른일까. 어른은 성인 인증하듯 당연한 명칭이 아니니 스스로 하는 질문 앞에서 주춤한다. 여전히 결정이 어렵고 종종 책임을 버거워하는 나를 어른이라 할 수 있을까. 나는 행복한가. 어느 순간에 '행복'이라는 명사를 붙일 수 있을까. 책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제목 앞을 서성인다.


'아'와 '어'의 교체를 반복하니 조사에서조차 강아지풀 같은 까슬한 차이가 느껴져 글이 섬세해진다. 의미를 지닌 명사는 그 차이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갈수록 명사가 낯설다. 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라도 된 양 반복적으로 단어를 곱씹는다. 당신이 말하는 '사랑'과 나의 '사랑'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부터이다. 그가 말하는 '행복'의 빛깔과 나의 것이 다르듯이, '어른'의 의미도 마찬가지이리라.

자세히 바라보는 이에게 보통 명사는 고유 명사로 탈피한다. 질감, 냄새, 리듬, 온도, 색깔, 무게 같은 비언어적 물리량으로 만들어진 옷을 새로 착장하면, 강렬한 인상을 지닌 단어가 된다. 어쩌면 모든 명사는 존재하는 사람의 수만큼 명도와 채도가 다른 동음이의어가 아닐까.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저자 소개에 눈길이 간다. 그와 나 사이에 놓인 시간의 간극이 20여 년이어도 '평범'은 여전히 어려운 명사이기에. 태수 작가에게 '어른'과 '행복'은 어떤 의미를 지닌 명사일까. 그의 해석이 궁금해진다. 화면을 느리게 재생하듯 천천히 책장을 넘긴다.

두 종류의 세상을 보게 되리라. 작가가 바라보는 세상과 그런 세상을 바라보며 스스로 돌아보는 나의 세상이다. 두 세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늠하며, 책이라는 통역사를 통해 저자와 대화하는 시간을 보낼 예정이다.


빛을 선명하게 바라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아는가. 어둠과 나란히 놓는 거다. 작가의 문장은 전반적으로 대조와 대구의 형식을 취한다. 똑똑한 우울증보다는 행복한 바보로 살 거라 말하고, 행복을 설명하는 데 불행이 등장한다. 행복에 대한 그의 정의는 '불행이 없는 상태'이다. 막연히 '상상'만 하던 행복을 '일상'에 있는 불행 가까이 끌어당겨 불행으로부터 한 걸음 남짓 벗어난 영역으로 독자의 시선을 이끈다. 에필로그의 제목처럼 '우린 너무 쓸데없이 불행하고 너무 복잡하게 행복'하기에.

행복하다고 느끼는 경우만큼 불행하다고 여기는 극단의 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고? 그렇다면 지금 불행한가. 뭐, 그렇다고 불행하다고 말할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그렇다면 당신의 삶은 행복의 영역에 있는 게 분명하다. 과도한 자극에 익숙해져 사락사락 반짝이는 행복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행복은 윤슬을 닮았다. 분명 거기에서 보일 것임을 알아도 매 순간 보이지 않는 잔물결 말이다. 삶의 바다가 심하게 출렁일 때면 여유롭게 바라볼 엄두를 내지 못하며, 바람 한 점 없는 순간에도 반짝임은 보이지 않는다. 강렬한 태양 아래에서는 과도한 눈부심으로 외면하게 만든다. 바라보는 각도와 빛과 물결의 일렁임이 조화로울 때, 비로소 윤슬은 존재감을 드러낸다. 편안하게 숨 쉬며 삶과 함께 리듬을 타는 순간, 우리는 물결을 보듬는 빛의 손길을 알아챈다. 작가가 말하는 '어른의 조용한 행복'을 나는 이런 느낌으로 해석한다.


행복의 몇 가지 물리량을 나만의 시선으로 정의해본다.

행복의 맛은? 드시기 전에 충분히 흔들어줘야 느낄 수 있는 0.1%의 소금만 첨가된 무가당 두유 맛.

행복의 온도는?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늘 곁에 있으나 알아차리기 어려운 일상적인 온도, 상온. 극한의 열기나 냉기가 삶을 훑고 갔을 때, 폭풍 후에 불어오는 최초의 바람으로부터 전해지는 온기. 

행복의 질감은? 구석구석 방 청소를 하며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는 마음으로 단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손걸음을 옮길 때, 가만가만 어루만지는 손끝으로 흘러 들어오는 다정한 점자의 감촉. 

행복의 무게는? 있는 듯 없는 듯 평상시에는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지만, 사방에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게 분명한 공기의 무게.

물질로 비유하는 행복의 상태는? 압축하면 급격하게 줄어들지만 팽창하면 한껏 확장되는 기체.

행복이 내는 소리의 크기는? 나뭇잎 뒤척이는 소리, 시계 초침 소리, 속삭임과 잘 어우러지는 20~30데시벨.

행복의 냄새는? 커피 향으로 우아하게 흘러들다 순식간에 청국장 냄새 풍풍 풍겨도 여전히 매력적인 향기. 삶이 코로나에 걸리는 시기에는 후각처럼 마비되기도 하며 야누스적인 변화무쌍함을 보이기에 정체를 특정하기 어려운 냄새.

행복의 시제는? 언제나 현재. 지나 보니 '행복이더라'는 지나갈 때 잡지 못하고 떠나보낸 회한, 앞으로 '행복할 예정이다'는 매번 앞서가기에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상상이니, '행복하다'만이 유일하게 감각 할 수 있는 지금의 경험이리라.


특별할 것 없는 말들이 작가의 경험을 통과하니 물 만난 꽃차처럼 생생해진다. 문장의 형태로 차례에 제시된 제목만 읽어도 겉바속촉의 소금빵을 먹는 듯 기분 좋은 맛을 선사한다.       

'다정함은 체력에서 나온다, 트럼프가 총에 맞았을 때 나는 내 주식이 가장 먼저 걱정됐다, 진짜 사이코패스는 감옥에 있지 않다, 왜 한국인의 최선은 90%가 아니라 110%일까, 무례한 사람들은 자신을 솔직하다고 소개한다, 불행은 견딜 수 있지만 '너보다' 불행한 건 싫어, 성공은 어렵다. 쉬운 건 성공이 쉽다는 말 한마디일 뿐, 내 인생이 잘되길 바라는 건 의외로 나밖에 없다.' 바삭한 문장들이 촌철살인의 후련함을 뿜어낸다.

'그만두는 것도 용기, 그만두지 않는 것도 용기,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다, 마음이 아픈 사람은 가장 먼저 아프지 않은 척을 한다,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은 거야, 너무 잘하고 싶어지면 반대로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게 돼.' 몰랑몰랑한 촉촉함을 안겨주는 문장들이다.

무엇보다 마음이 드는 건 그의 관점이다. '포기가 습관이 되면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것까지 포기하게 된다. 자신이다, 내 인생의 가장 큰 안티는 나였다, 우린 언제나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높이 날 수 있는 사람이다.' 본문 속 문장들이 답정너 화살표가 되어 '나'를 맞추니 마음이 후련해진다.


천천히 글을 쓰다 저녁 준비를 한다. 남편이 어제 사 온 백합 봉지를 냉장고에서 슬그머니 꺼내 놓는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2초 외과 의사로 빙의하여 주방 가위로 비닐을 절개한다. 자신 있게 공기의 감촉을 선사했지만, 순간 주춤한다. 실로 오랜만에 백선생님을 영접했기 때문이다. 사촌인 바선생도 한동안 찾지 않았기에 순서가 헷갈린다. 처음부터? 끓은 다음? 손안의 비서, J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하아. BGM의 볼륨 조절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깨끗하게 인정한다. 조개 향을 첨가한 완성작이 되고 말았으니. 순간 고급 재료를 저급한 실력으로 발라버렸다는 민망함에 은밀한 심폐소생술을 시도한다. 일단 화이어! 다시 우르르 오케스트라를 시전할 때, 마법의 링 투하! 휴, 일단 조개의 정체성은 살렸다. 그럼, 그건? 당신의 예상이 맞다. 식감은 지못미. 오래 가열하여 질겨졌지만 제 발이 저린 당사자를 제외하고 한 사람만 희생하면 되니까 괜찮다.

드넓은 궁중 팬 안에서 백합들이 한가로이 헤엄을 친다. 간만에 재료를 사 온 1인에게 괜스레 미안해서 식탁에 놓으며 한 마디를 꺼낸다. "물이 너무 많네." "배 띄우면 되지." 순간, 웃음이 윤슬처럼 반짝인다. "오늘 들은 말 중에 제일 웃겨." 웃지 않는 척하는 희생자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진다. 책을 읽는 동안 작가의 글이 토닥토닥 내 마음을 어루만져준 걸까. 심장이 몰랑몰랑한 밀가루가 된 기분이다. 작은 말에도 금세 반응하여 간지럼을 탄다.


'자신에게 선물하게 되는 순간부터 어른'이라는 문장을 천천히 어루만진다. 나에게 무언가를 선물했던 순간이 언제더라. 좋아하는 장소로 나를 데려가고, 좋아하는 음식을 먹이고, 좋아하는 이들과 보내는 시간을 만들어주던 기억 말이다. 드문드문 떠오른다. 자신 있게 말하기에는 많이 부족하지만, 예전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나에게 잘해주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산책하듯 카페로 가서 커피를 옆에 두고 이어폰을 통해 흘러 들어오는 음악 속에서 글을 쓰는 이 순간처럼. 나는 점점 어른이 되어가는 중일까.

태수 작가의 문장들은 자극적이지 않다. 점자처럼 톡톡 심장을 두드린다. 잔잔한 비에 젖어 드는 몸처럼 심장이 조금씩 들썩인다. 미세한 리듬으로 덩달아 울리는 행복이 조용하게 출렁인다.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님의 깨달음처럼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이 책이 행복을 향해 나를 끌어당긴 걸까.

글로 박제되어 있던 행복이 어느 순간 책에서 빠져나와 가만히 자유 낙하를 한다. 나의 마음은 저항 없는 중력으로 담백한 세상을 끌어당긴다. 행복은 잔잔한 마음으로 느끼는 실시간의 감각이다. '쿵 소리를 내는 아찔한 진동'이 아니기에 내가 할 일은 고요한 물리량을 지닌 채 가까이에 머무는 행복을 다만, 깨닫는 것일 뿐. 어쩐지 보드라운 윤슬이 눈앞에서 반짝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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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없는 약속 (초판본)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성미 옮김 / 북플라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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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어려워지는 단어가 있다. 치우침 없이 평평하고 널리 두루 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글자, '평범(平凡)'이다. 두 글자 합쳐봐야 고작 8획의 한자로 이루어진 단어. 명사는 이토록 단순한데, 삶에서 동사로 구현될라치면 이만큼 까다로운 글자도 드물다. 평범은 선이 아니라 점에 가까운 걸까. 외줄타기 광대가 수시로 잡아야 하는 무게 중심처럼 방심하다가는 순식간에 균형이 깨지니 말이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평범한 삶을 꿈꾼다. '많은 욕심 부리지 않아요. 그저 나날이 평범한 일상이면 좋겠어요.' 평범을 꿈꾸는 나 역시 종종 이런 말을 한다. 한데 '평범'을 곱씹을수록 문장 안의 '그저'라는 말이 어색해진다.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적이고 좋은 삶은 유토피아에 가까울 정도로 도달하기 어려운 상태인지 모른다. 섬광인 듯 순식간에 머물다 지나가니, 더욱 소중하게 여겨야 하리라.

야쿠마루 가쿠의 추리소설 『돌이킬 수 없는 약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무카이도 평범한 삶을 꿈꾸는 인물이다. 15년 전의 과거를 버리고 진중한 동료와 레스토랑의 공동 경영자로 새출발한다. 가장으로서 아내와 딸과 함께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그는 지금 행복하다. 작가는 주인공의 삶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통해 '평범한 삶'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을 던진다. 죄를 지은 사람이 평범한 삶을 꿈꾸어도 되는 거냐고.

 

죄를 지으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 상식적으로 보이는 법칙이다. 문제는 이 룰이 종종 깨어진다는 데 있다. 현실에서는 어이없게도 죄와 벌이 비례하지 않는다. 많은 작가가 이러한 불합리함을 소설에 투사한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이 빵 한 조각을 훔친 대가로 19년간 복역했던 상황처럼. 야쿠마루 가쿠 역시 이 작품을 통해 '죄와 벌'의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소설 속에서는 죄를 지은 인간들이 등장한다. 놈놈놈 시리즈를 보는 듯 나쁜 놈들이다. 뭐 이런 노무시키들을 봤나! 분개하다 보면, 만만치 않은 놈이 또 나온다. 사람 닮은 짐승이라 여겨도 될만하다. 이들을 응징하는 건 정당한 행위일까. 작가는 '올바른 형벌이 내려지지 않는 세상과 사법 현실에 대해' 절망한 인물의 심정을 밖으로 끄집어낸다. 죄를 저질렀지만, 시간이 흘러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었다면, 이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까. 용서의 범주에 허용되는 죄의 상한선은 어디까지일까.

인간의 본성은 뭐라 정의하면 될까. 성선설에 가까울까, 성악설에 가까울까. 장발장을 보면 성선설이 맞는가 싶다가도, 사회 면을 통해 보도되는 촉법소년들의 죄상을 보면 성악설이 맞는가 싶을 때도 있다. 아니면 선함이나 악함은 '선천성'에 가까울까. MBTI로 구분되는 성격처럼 타고난 기질 중 하나일까. 다만 고정불변의 것은 아니고 맹자나 순자가 공통적으로 지향한 것처럼, 교육을 통해 선함을 지키거나 악함이 고쳐질 수 있는 건 아닐까.

 

선과 악은 절대적인 가치라 여겨왔다. 착한 건 착한 거고, 나쁜 건 나쁜 거니까. 한데 경험과 책을 통해 세상을 알아갈수록 혼란스러워진다. OX로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이 생각보다 많아서 오히려 상대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A에게 나쁜 사람이 B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는 은인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사람에 대한 판단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는 교훈을 얻는다. 부분적인 모습으로 한 사람의 전체를 규정짓는 오류를 경계해야 한다고.

드라마 <김부장>의 주인공 김부장은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제목이 주제를 관통한다. 최부장이나 소부장도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흔한 성을 붙인 데는 눈에 띄지 않고 살아가고자 하는 주인공의 바람이 담긴다. 자발적인 평범함이다. 힘숨찐의 능력은 사람이 깔리는 위기의 순간에 마차를 들어 올리는 괴력을 발휘한 장발장처럼, 딸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발휘된다.

소설 속 주인공 무카이의 역린은 딸이다. 딸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종횡무진하는 아빠 김부장의 모습에 그가 겹쳐진다. '예전의 나는 단지 무언가를 빼앗기 위해서 여러 나쁜 짓을 해 왔지만, 지금의 나는 지켜야 할 사람을 위해 그 일을 하는 것이다.' 배우 소지섭이 연기하는 김부장은 선한 걸까, 악한 걸까. 그의 손에 쓰러진 이들의 관점에서는 악한일 수도 있으니 애매하다.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의 원제는 '서약(誓約)'이다. 일상적인 약속보다 훨씬 무거운 책임감이 따르는 말이다. 주인공은 15년 전에 서약에 가까운 약속을 한다. 장발장 역시 미리엘 주교 앞에서 '평생 정직하고 선하게 살겠다'고 서약한다. 이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을 때, 정신적으로 버티는 힘이 되어준다. 반면, 무카이의 서약은 '독자의 목줄을 죄는 장편 미스터리 추리소설'이라는 홍보 문구처럼 주인공의 목줄을 죈다.

이보다 더 가벼울 수 없는 로코를 지향하는 드라매니아에게 드라마 <김부장>은 그리 매력적인 작품은 아니었다. 홍보 내용도 아빠의 부성애와 안경 쓴 아저씨들만 잔뜩 나오는 데다 제목까지 평범하니 우연히 1화를 보기 전까지는 아웃 오브 안중이었다. 드라마를 이끄는 건 궁금의 향연이라 했던가.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그다음 전개가 또 궁금해서, 어제의 나는 이 드라마를 본방 사수까지 하고야 만다. 몰입감에 엄지척한다.

근래 접했던 소설 중에 이토록 강한 몰입감을 안겨준 작품이 있던가. 소설계의 <김부장>을 보는 듯 380쪽을 완독하는 데 불과 며칠이 걸리지 않는다. 주인공의 갈등과 심리 묘사를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전개에 흡인력이 있다. 외국 작가의 소설이라는 생각을 잊을 정도로 번역 또한 자연스러워서 가독성이 좋다. 엔딩까지도 깔끔한 디저트를 먹은 듯 개운하다. 낭비되는 복선이 없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이름까지 의미를 담아 설정한 점도 좋다. 두 가지가 생각난다.

하나, 주인공이 경영하는 레스토랑의 이름 'HEATH'이다. 소설 속에서 히스는 '스코틀랜드 황무지에서 군생하는 키 작은 식물'을 의미한다고 언급된다. 척박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피어나는 식물처럼 강인함을 상징하며 섬광처럼 빛나는 희망을 보여준다.

둘, 등장인물의 이름 '고헤이'이다. 고헤이는 한자로 '공평(公平)'으로 '공평하게 나누어주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미래에 얼마만큼의 빛이 내리쬘지' 초조해했던 주인공 무카이는 고헤이에게 '자신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빛은 보이는 거야.'라는 말을 건넨다. 이는 작용과 반작용의 문학 버전이 구현되기라도 하듯 고헤이가 주인공에게 하는 말로 되돌아온다. '노력하시기에 따라 얼마든지 빛이 보일 거예요.'라고 말이다.

책날개와 뒤표지에 소개된 내용만 리뷰 작성에 사용하려고 노력한 나를 스스로 칭찬한다. 잠시 언급한 책 속의 문장도 미스터리의 열쇠가 되지는 않으니 스포 사수에는 성공한 듯하다. 이 글의 빅픽처는 궁금증을 유발하여 책장을 펼치도록 만드는 데 있다. 직접 읽어보고 판단하시라고. 책을 완독한 다음, 나의 리뷰를 다시 접하면 평범한 느낌이 조금은 특별해질까.   

 

삶에서 '평범'은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한 빛이다. 장발장의 소망은 그저 전과자라는 낙인 없이 딸과 함께 평범하게 살아가는 삶이건만, 김부장의 소망은 그저 간첩이라는 낙인 없이 딸과 함께 평범하게 살아가는 삶이건만, 무카이의 소망 역시 그저 사랑하는 가족과의 평범한 삶이건만. 세상은 '그저'를 거저 줄 정도로 만만하지 않다.

우주계에서는 엔트로피의 법칙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질서도가 항상 증가하는 방향으로만 진행된다는 규칙 말이다. 청소하지 않고 가만히 둔 방이 어질러지는 게 당연한 현상인 것처럼 내버려둔 방이 저절로 깨끗해지는 기현상은 절대 발생하지 않는다. 거저 얹어지는 질서는 없다. 인간의 의지가 작용해야 한다.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빛이 보인다는 야쿠마루 가쿠 작가의 다독임을 믿는다. 평범도 같은 맥락으로 바라본다. 어쩌면 평범의 속성은 '힘숨찐 비범'인지도 모른다. 수시로 삶의 균형을 맞추며 주변과 나를 돌아보고 노력해서 얻어내는 상태이니,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비범한 고수인가.

당신은 지금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진정한 고수가 맞다. 다만 여기에서 안주하면 균형은 금세 깨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 역시 평범이라는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삶을 똑바로 응시하려 한다. 빛은 보려고 하는 이의 눈에만 스며들어올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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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길이 닿는 순간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 - 촉각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의 과학
마르틴 그룬발트 지음, 강영옥 옮김 / 자음과모음 / 2019년 2월
평점 :
절판


제목만으로 그저 좋았다. 가사 내용이 뭔지도 모르면서 떠올리기만 해도 좋은 노래, <Touch by Touch>다. 디스코 리듬을 선호하는 건 아니다. 발라드를 좋아하던 시기였으니 이 노래를 좋아하게 된 건 순전히 한 단어 때문이다. 'kiss'라는 단어만 보아도 몽글몽글했던 고딩의 갬성은 'touch'라는 단어에 제대로 저격당한다. 오랜만에 유튜브를 찾아 추억의 80년대 팝송에 포함된 노래를 듣는다.

여전히 내용은 모르지만, 굳이 해석하고 싶지는 않다. 노래가 전해주는 느낌을 그저 받아들이고 싶어서이다. 여전히 좋다. 당시의 기억이 각인되어서인지 듣는 순간 살짝 두근거린다. 반복해서 들으니 뭉클하면서 찡한 느낌이 크다. 갓 따낸 복숭아 같은 설렘보다는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에 가까우리라. 40여 년 흘러간 시간이 건네주는 선물일까.

커피 맛을 음미하듯 '접촉'이란 말을 속으로 발음해 본다. 어릴 적 기억이 떠오른다. 마음으로 찍은 스냅 사진인 양 두 가지 장면이 선명하다. 하나, 아파트 앞 공터를 서성이는 엄마 등에 업혔던 장면이다. 4살 아기를 덮고 있던 올리브색 털스웨터가 기억난다. 온몸을 감싸던 느낌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둘, 공중목욕탕에서 나를 안은 엄마가 머리를 감겨주시던 장면이다. 부드럽고 따뜻한 가슴이 얼굴에 닿았던 감촉이 마냥 좋았다.

 

돌이켜보면 예전부터 나는 접촉을 좋아했던 듯하다. 20대 초반에는 이 사실을 몰랐다. 풍문으로 들은 세 종류의 사랑에 심취했던 시기였다. 간혹 철학에서 언급되는 아가페, 에로스, 플라토닉 러브 말이다. 당시에는 플라토닉 러브가 어찌나 매력적으로 보이던지. '정신적인 사랑이야말로 순수함의 결정체 아닌가!'라는 생각이 마음을 지배한다. 접촉의 위력을 몰랐던 시절이다.

'세상이 어떻게 니맘대로 되니!' 흔한 드라마의 대사처럼 마음과 현실의 속도는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접촉을 갈구하던 시기에 현실은 마음대로 구현되지 않는다. 사랑을 글로 배우는 인간에 빙의하여 접촉과 관련된 책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들인다. <터치>,<몸의 일기>,<손길이 닿는 순간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이 이런 목적으로 사들인 책이다.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이 되었기에 보유만 했다.

당신은 운명적인 만남을 믿는가! 세상이 동화 같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운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되는 몇몇 만남은 존재하는 듯하다. 사람에 대해서도, 책에 대해서도 말이다. 2019년 3월에 구입한 책을 7년도 더 지난 지금, 불현듯 펼쳐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뭘까. 접촉과 관련된 책 중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예전에 받았던 편지의 문구처럼 '만나지 않으면 안 되었을 운명' 같은 끌림이었을까.

 

<손길이 닿는 순간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은 촉각에 관한 실험 결과가 기록된 책이다. 원제는 'Homo Hapticus'로, '햅틱(Haptik)'은 인간과 동물의 촉각 체계와 이를 통해 지각할 수 있는 대상의 특성을 연구하는 영역이다. 저자 마르틴 그룬발트는 심리학, 산업 심리학, 생물학, 철학을 전공하고 '햅틱 연구소'를 설립한 사람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연구소에서 진행한 연구 결과를 심도 있게 다룬다.

제목만 보고 MBTI의 F식 전개를 연상한다면 낭패를 본다. 극강의 T를 시전하는 연구 보고서에 가깝기 때문이다. 책 표지 윗부분에 있는 문구, '촉각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의 과학'이 이 책의 정체성에 가깝다. 책에 의하면 인간의 촉각 작용 방식이 사고, 감각, 행동에 끼치는 영향은 상상 이상으로 강력하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촉각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이 생긴다.

중학교 3학년 과학 '자극과 반응' 단원에서 등장하는 감각 기관이 생각난다. 교과서에서는 눈, 귀, 코, 혀, 피부 등 인간의 오감과 관련된 기관의 구조와 기능을 다룬다. 그중 시각의 비중이 가장 크며 청각이 두 번째 분량을 차지한다. 드라마 캐릭터로 치면, 눈은 남주, 귀는 서브남주, 코와 혀는 조연 정도랄까. 피부는 다만 거들 뿐인 지나가는 행인 1 정도로 엑스트라에 가깝다. 두 달만 더 일찍 읽었더라면 수업의 방향이 달라졌을 텐데.

 

무지는 무시를 불러온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은연중에 교과서 분량에 비례하여 피부 감각을 무시한 나를 반성한다. 인간의 기관 중에 피부가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건 생명체의 빅픽처였던 거다. 저자는 서문에서 촉각이 시각이나 청각에 비하여 여전히 대중적 인식이 낮은 점을 말하며, 인간은 촉각 없이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생사를 가른다는 말은 너무 과하지 않나. 처음 든 생각은 책 속에 제시된 연구 결과를 보며 서서히 바뀐다.

'촉각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라는 문구에 걸맞게 저자의 글은 태아로부터 출발한다. <1장: 촉각, 최초의 감각>에서는 생물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오감 중 촉각이 가장 먼저 발달한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엄마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수록 태아가 자신의 얼굴을 만지는 횟수가 늘어난다는 연구 결과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본능적으로 접촉을 통해 안정감을 찾는 행동이라고 한다.

<2장: 스킨십은 아이에게 밥이다>는 신생아가 건강하게 자라기 위한 조건으로, 정상적으로 반응하는 촉각 체계와 적절한 신체 자극을 말한다. '같은 종의 동물들이 가까이에서 몸을 부대끼고 살 때 생물학적으로 의미 있는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것'. 수유할 때도 아이가 젖에 주는 자극이 엄마의 옥시토신 호르몬의 분비로 이어져 생리적 상태뿐 아니라 감정과 인지적 상태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는 거다.

 

<3장: 자극이 있는 일상>에서는 신체의 움직임에도 촉각의 영향력이 막중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피부, 관절, 힘줄, 근육에 존재하는 자극의 수용기들이 정확하고 지속적으로 활동해야 몸을 움직일 수 있다고 말이다.

<4장: 느끼는 자에게 변화가 생기리니>는 촉각이 감정에 미치는 영향력을 다룬다. 자기 접촉은 심리적 상태를 흥분에서 평정으로 되돌린다는 문장에서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에 나오는 장면을 떠올린다. 여주인공이 감정의 동요를 일으켰을 때, 남주인공은 스스로 다독이는 방법을 알려준다. 두 팔을 교차하여 스스로 안아주는 방식이다.

적절한 신체 접촉을 통해 '인체의 약국'이 작동할 수 있다고 한다. 무생물을 접촉하는 순간조차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실험 결과가 놀랍다. 거칠고 차가운 물질을 접했던 피실험자들은 부정적 반응을, 부드럽고 따뜻한 물질을 만졌던 사람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니! 뜨거운 홍차와 푹신한 소파를 상대에게 제공하는 것이 나에게 유리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틱 반응을 보이던 아이를 잠시 안아주었던 기억이 난다.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괜찮다' 토닥거리며 안아주었던 게 과학적으로도 효과가 있었던 거다. 어떤 감각이나 말도 신체 접촉처럼 즉각적으로 긍정적인 감정을 전달할 수 없음을 강조한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자극과 반응' 단원에서 중추 신경계를 가르치면서 연수의 중요성을 어필하던 순간이 떠오른다. 대뇌, 소뇌, 간뇌, 중간뇌, 연수, 척수 모두 중요하지만, 생명과 직결되는 중추는 연수라고. 연수는 호흡, 심장 박동 등을 관장하기 때문이다. 대뇌를 다치면 기억을 잃거나 팔다리를 못 쓰게 될지언정 죽지는 않으니까. 같은 맥락으로 눈이 멀거나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죽지는 않지만, 촉각에 이상이 생기면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고 한다.

<5장: 만약 촉각이 사라진다면>에서는 촉각과 관련된 의학적인 질병을 다룬다. 용어들이 생소해 개론적인 의학서적을 보는 기분이 들지만, 촉각 이상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사실은 제대로 수긍할 수 있다.

몇 가지 알게 된 사실을 나열하면, 아토피 피부염 등 피부 질환 치료제에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함유되어 있다는 것, 해당 신체 부위를 정확하게 지각하지 못한다는 다발성 신경병증은 접촉과 온도 자극에 과민 반응을 보인다는 것, 촉각 민감성의 둔화로 당뇨병성 족부병변이 생긴다는 것, 선천적 무통증은 땀 분비와 온도 조절 능력의 문제로 생긴다는 것, 우측 두정엽의 통합 능력 장애로 좌측 신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지각하는 '니글렉트 신드롬'이 발생한다는 것, 알츠하이머병성 치매를 초기 진단할 때 촉각 이상 여부를 확인한다는 것, 왜곡된 신체 환상과 거식증을 햅티미터라는 촉각 검사 장치로 연구하고 네오프렌 소재의 옷을 개발하여 치료를 시도하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 등이다.

 

<6장: 햅틱 디자인과 뉴로마케팅>에서는 질병뿐 아니라 제품의 마케팅에도 촉각을 적용하는 사례를 소개한다. 인간의 신체가 '만물의 척도'라는 문장이 인상적이다. 저자는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제품이 인체를 근거로 만들어짐을 일깨운다. 칫솔에 적용되는 구강의 해부학적 구조라든지, 손의 구조가 반영된 가위 손잡이 구멍의 직경, 자동차 핸들의 직경, 다리미의 손잡이, 어린이용 자전거의 핸드 브레이크 같은 제품을 예로 든다.

더 나아가 기업들은 촉각 체험이 시각적인 인상보다 사용자의 판단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이용한다. 볼펜 판매대 옆에 필기감을 체험할 수 있는 종이가 매달려있는 데에도 이유가 있었던 거다. 같은 굵기의 볼펜이라도 각자 선호하는 필기감은 다르니까. 직접 써보고 제품을 선택하게 만든 건 매우 영리한 영업 전략이리라.

자동차 핸들의 감촉에서 출발한 변화는 주방기기, 종이, 가구, 휴대폰, 신발, 옷, 화장품 등의 분야로 확대된다. 저자가 몸담고 있는 연구소에서는 '햅틱 디자인'이라는 단어를 발표한다. 인간의 촉각 체계의 요구와 기능성의 관점에서 제품을 만든다는 것이다.

메시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전략으로 선택된 '뉴로마케팅'이 급부상하는 이유도 인간이 촉각적 광고 문구에 민감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기업들은 이제 제품을 직접 만져볼 수 있을 때 제품에 대한 신뢰도가 쌓여 구매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을 이용한다.

 

연구소에서 진행하고 있는 과제들을 소개하는 <7장: 앞으로의 연구 과제들>을 보니 뭉클하다. 이렇게나 집요하게 파고들다니! 신생아, 우는 아기, 중증 질환자, 거식증 환자, 우울증 환자, 과체중 비만 환자 등 다양한 질병의 치료 방법부터 신체 자극을 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효과, 촉각 민감성으로 예민한 유형 구분하기, 지능과 촉각 기능 사이의 상관관계, 햅틱 추적 시스템 개발, 피부 융선과 지각 기능의 관계, 촉각 중단 현상의 메커니즘, 단세포 생물의 촉각 작용, 인체의 촉각 수용체 상태에 관한 정확한 분석 등을 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연구 결과의 신뢰도와는 별개로 '촉각'에 대하여 알기 위한 노력을 보니 인간의 순수한 호기심에 경외감이 든다. 이런 과정이 모여서 학문이 서서히 발전하는 거겠지. 피부 감각 구조의 모식도를 무심코 지나치던 순간이 떠오른다. 발견한 과학자들의 이름을 본뜬 명칭을 각각의 감각점에서 확인하며 수많은 이들의 노력과 땀을 가늠해 본다. 인체에 있는 하나의 점을 발견하기 위해 수년을 탐구한 마음을 생각하니 찡한 감동이 다가온다.

책을 읽으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낸다. 다만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내용이 있어 다소 어렵게 느껴진 것과는 별개로 오타가 너무 많아 몰입감이 깨진다는 점을 치명적인 단점으로 꼽고 싶다. 절판 도서라 재출판의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촉각에 관한 도서인 만큼 다른 책과 겉표지의 감촉을 차별화하면 어땠을까. 책 속에 등장하는 돋을새김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책 표지의 감촉이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아서 들었던 생각이다.


맞닿는 감각은 어떤 감각보다 느낌이 짙다. 손길과 손길이 닿는 순간, 유의미한 변화가 일어난다. 본능적으로 인간은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음이 분명하다. 책을 접하기 전에 시도했던 나의 액션을 떠올려보면 말이다.

제일 좋아하는 스킨십은 손을 잡는 거다. 심히 안타까운 건 손을 잡아줄 인간이 없다는 것. 직계비속은 다른 머스마의 손을 선호하는 나이가 되어버렸고, 80대 노모의 손을 잡기도 새삼스럽다. 50대가 되어버린 형제자매의 손을 잡기도 어색하다. 가장 많은 기회가 보장된 사람과 함께 살고 있지 않냐고? 간지럽다니! 손을 만지는 게 어찌 간지러울 일인가 말이다! 즐겨 입던 터틀넥 스웨터를 입지 못하게 되어서야 이해 모드가 가동된다. 나이가 들면 촉각에 변화가 생긴다는 점을 인정하게 된 거다.

이대로 물러설 순 없다. 감전된 듯 움찔하는 모습을 관찰하며 조금씩 접촉 부위에 변화를 준다. 불굴의 시도 결과, 딱 한 군데 태풍의 눈을 찾아낸다. 심 봤다! 감질나는 범위이지만 이게 어디냐. 감사할 따름이다.

더불어 시도 때도 없이 현관에서 "안아주떼염~"을 시전하며 이중 공략을 펼친다. 접촉 면적과 압력은 반비례한다는 법칙을 적용하여 자극을 분산시키자는 전략이다. 인간이 적응의 동물인 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처음에는 움찔하더니 이제는 자연스러워졌다. 스킨십이 감정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과학적 근거를 빵빵하게 장착한 나는 '터치 바이 터치'를 들으며 '유아 마이 올타임 러버'가 실현되는 빅픽처를 그린다. 훗~! 비실비실 회심의 미소가 새어 나온다.

 

※

p63, 6째줄: 단어을 → 단어를

p140, 밑에서 9째줄: 자극에 관한 실험했을 → ~ 실험을 했을

p152, 맨 아래줄: 끼치는 영향을 끼치는지 → 영향을 끼치는지 또는 끼치는 영향을

p155, 3째줄: 모델을 개발은 → 모델 개발은

p182, 5째줄: 정학히 → 정확히

p194, 5째줄: 신경 통해 → 신경을 통해

p198, 9째줄: 에너지가 필요하는 증상 → ~ 필요한

p208, 밑에서 5째줄: 어렵기 않기 때문에 → 어렵기 때문에

p215, 밑에서 9째줄: 증가하고 하는 → ~ 있는

p236, 밑에서 2째줄: 받아드려 → 받아들여

p250, 밑에서 3째줄: 특별한 기술적 도움 없이도 관찰할 수 없다. → ~ 도움 없이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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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 제172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스즈키 유이 지음, 이지수 옮김 / 리프 / 2025년 11월
평점 :
품절


저마다 바라보는 세상을 이미지로 구현해 본다. 커피숍에 앉아 잠시 고개를 든 지금, 내 앞에는 은은한 조명 몇 개, 창 너머로 흔들리는 나뭇잎, 습기를 머금어 살짝 뿌연 공기, 연한 황토색 탁자, 자료를 들추며 노트북을 두드리는 건너편의 여자가 있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하얀 종이와 모니터의 세상이 펼쳐질 터이다. 시간과 공간을 공유한다 해도 우리가 보는 세상은 모두 다르다.

다른 세상을 살던 두 사람이 '가족'이라는 사회 제도로 묶일 때, 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까. 스즈키 유이의 소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에 그 답이 있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된다는 노랫말을 들어보았는가. 또한 부모의 DNA를 공유한다 해도 생물학적 유전이 정서적 연결까지 보장하지는 않을 터. 가족 구성원 사이의 관계는 생각보다 견고하지 않다. 어쩌면 한시적으로 시공을 공유하는 개별적인 존재인지 모른다.

'관계'의 눈으로 이 소설을 바라보면, 가족 간의 심리적인 거리가 좁혀지는 과정에서 따끈하고 담백한 두부 맛이 난다. 학문적인 관점으로 따라가면, '인용'에 대한 심오한 고찰에서 알싸한 맛이 느껴진다. 진실을 탐구하는 순수한 '열정'을 지켜볼 때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 반짝이는 천일염의 맛이 전해진다. '세계관'으로 접근하면 광대한 바다인 양 탁 트인 시야에서 달큰한 바람 내음이 스며든다. 키워드에 따라 맛의 편차가 큰 작품이다.

 

'괴테'라는 자물쇠로 채워진 소설. 문안으로 펼쳐지는 세상은 상상과 다르다. 하나의 문장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세계관에 대한 사유로까지 확장된다. 엄지보다 얇은 두께라고 방심하면 낭패다. 내용이 방대하여 휘리릭 읽기 어렵다. 시를 마주한 듯 함축된 의미를 곱씹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오미자처럼 다양한 맛이 나니 호불호가 갈리리라 예상한다.

괴테 연구 일인자 도이치 교수의 결혼기념일, 레스토랑에서 이루어진 가족 식사. 그는 후식으로 나온 녹차 티백에 새겨진 명언의 출처를 보고 동공 지진을 일으킨다. '사랑은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만들지 않고 한데 섞는다.'라는 영문 뒤에 적힌 '괴테'라는 글자 때문이다. 괴테가 한 말은 다방면으로 많지만, 과연 이 말도 했을까. 어디서 들어본 듯하지만, 확신은 없다. 확실한 출처를 찾기 위한 학자로서의 추적이 시작된다.

'괴테가 말하기를'은 괴테의 권위를 앞세워 자신의 주장을 펼칠 때 말하는 관용구라고 한다. '명언을 인용할 때 그게 누구의 말인지 모르거나 실은 본인이 생각해 낸 말일 때도' 습관적인 접두사처럼 말한다나. 방대한 저작을 남겼던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으니까. 저자는 거장 뒤에 숨는 독일인들의 습관을 날카롭게 풍자하며 '인용'의 본질을 톺아본다.

 

인용의, 인용에 의한, 인용을 위한 책을 만들 테닷! 스즈키 유이는 작정한 게 분명하다. 소설 전체에서 인용 쓰나미가 몰려온다. 창고 대 방출된 인용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갈 지경이다. 배경지식이 얄팍하니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이 가장 문제다.

실존 인물인 괴테가 진짜로 한 말인지, 소설 속 괴테 연구자에 빙의한 작가가 창작한 가상의 말인지 헷갈린다. 경구들이 언급될 때마다 수시로 AI의 도움을 받는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는 말이 독일에 실제로 있어?', '「비유적 및 경구풍으로」라는 괴테의 작품이 있나?'. 이런 식으로 말이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의 동료 학자 시카리는 명언의 세 가지 유형을 언급한다. '원래 말의 복잡한 의미가 단순하게 변하고, 걸핏하면 뜻이 거꾸로 뒤집히는' 요약형, '닳고 닳을 정도로 쓰여서 원전이 뭔지도 알 수 없는' 전승형, 그럴듯하게 '작가가 지어낸' 위작형이다.

그는 인용의 날조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는데도 당당하다. '작가나 사상가는 어딘가에서 날아온 나뭇잎 한 장으로 자신의 숲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라며, '사람은 자신의 사상 전체가 아니라 파편으로 이해된다.'라는 주장을 피력한다.

 

파편은 진실인가, 거짓인가. '장님 코끼리 만지기' 일화가 떠오른다. 코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가 길고 유연한 뱀이나 밧줄처럼 생겼다 말한다. 다리를 만진 사람은 단단하고 굵은 나무 기둥, 귀를 만진 이는 곡식 키나 부채 같다고 한다. 배를 만지며 거대하고 단단한 장독을 상상하고, 꼬리를 만지곤 쓸개 빠진 빗자루 같다고 제각기 주장했다는 우화 말이다.

그들의 주장은 전체 모습과 확연히 다르므로 거짓일까. 느낀 그대로 말한 입장에서는 억울할 터이다. 그렇다면 진실일까. 진실 혹은 거짓의 기준으로 답을 특정하기가 난감하다. 그러니 파편은 야누스적이다.

한 인간이 모든 세상을 볼 수는 없으니, 개인의 세상은 파편일 수밖에 없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말에서 키워드를 찾는다. 결국 '거리'의 문제다. 볼록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물체의 이미지가 거리에 따라 다른 것처럼. 렌즈를 통과한 빛은 거꾸로 선 작은 상, 거꾸로 선 큰 상, 똑바로 선 큰 상, 상이 맺히지 않는 경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기준은 초점이다. 초점에서는 상이 생기지 않으니, 렌즈를 통해 물체를 보려면 초점을 벗어나 움직여야 한다. 어느 정도의 거리에서 대상을 바라볼지는 내가 정할 일이다. 세계관 역시 마찬가지다.

 

소설에서는 상반된 두 세계관이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 잼적 세계와 샐러드적 세계이다.

처음으로 딸기쨈을 만들어 본 기억이 생생하다. 방대한 양의 설탕과 딸기를 찜통에 넣어 졸이느라 어찌나 쫄았던지. 마그마처럼 꿀렁대며 덤벼드는 혼합물의 위협에 주방 장갑에 앞치마로 무장을 한다. 가스레인지 앞에 의자를 놓고 그 위로 올라간다. 최장신 주걱을 간택하여 몸을 사리며 인고의 시간을 보낸다. 설탕과 딸기의 원형이 시간의 블랙홀로 사라졌을 때, 걸쭉한 결과물이 탄생한다.

잼을 만드는 과정도 거리에 따라 다르게 보이리라. 평화롭게 주걱을 젓는 면봉 크기의 여인은 수시로 튀는 건더기와 사투를 벌이며 삐질삐질 땀을 흘리는 여인과 동일인이다.

'거리'라는 키워드로 소설 속 세계관의 차이를 이해하려 한다. '잼적 세계란 모든 것이 하나로 녹아든 상태, 샐러드적 세계란 사물이 개별적 구체성을 유지한 채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는 상태를 가리킨다.' 먼 거리에서는 희극적으로 보이는 잼적 세계가, 가까운 거리에서는 사소한 움직임조차 까슬까슬한 솜털처럼 감각되어 비극적으로도 보이는 샐러드적 세계가 존재한다고 말이다.

 

'세계는 어떤 식으로 하나여야 하는가'. 저자는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 위해 괴테가 남긴 두 가지 경구를 언급한다. '세계는 죽이나 잼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딱딱한 음식을 씹어야 한다.', '세계는 말하자면 안초비 샐러드다. 모든 것을 하나로 뒤섞어 먹어야 한다.'라는 문장이다.

다시 추적! 녹차 티백의 시간이다. 괴테의 경구를 보면 티백 문장의 핵심 개념이 등장하는 듯하다. 세계관을 사랑에 적용하여, '사랑은 모든 사물을 잼처럼 혼동시키지 않고 샐러드처럼 혼연일체로 만든다.'라고 번역한 다음, 괴테님의 영역에 포함시켜도 되는 걸까. 주인공의 갈등에 덩달아 마음을 얹는다. 답은 끝까지 보이지 않는다. 소설 속 서사의 흐름은 명쾌하지만, 증강 현실을 보는 듯 몽롱함이 남아 다큐적인 답에는 의문이 남는다.

사실 답이 무엇인지는 상관없다. 중요한 건 이 말들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력이다. '그렇게 인용만 하지 말고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게 어때?' 나는 소설의 맛을 보고 얼마만큼 소화했을까. 소설에서 언급된 세계관을 '가족'의 범주에 적용해 본다. 세상에는 크고 작은 프랙털이 존재하며 사회의 최소 단위는 가족이니까.

가족도 거리에 따라 잼으로도, 샐러드적으로도 존재하는 게 아닐까. 멀리서 보면 혼연일체가 된 잼으로 보여도, 가까이서 보면 샐러드의 개별적인 모습으로 존재하는 관계로 말이다. 괴테는 샐러드파, 소설 속 서사로 판단한다면 저자도 샐러드파다. 나도 한 표를 더한다.

 

샐러드적 세계관은 음미할수록 매력적이다. '따로 또 같이'를 이상적으로 구현하는 상태 아닌가. 저자는 서서히 변화되는 도이치 가족의 관계를 통해 샐러드적 세계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남편과의 25년보다 딸과의 22년에 훨씬 말할 맛'을 느끼는 도이치의 아내는 괴테의 작품을 기억하지도, 남편이 번역해서 바친 작품을 읽었는지도 알 수 없다. 아내는 거실 TV로 자신이 좋아하는 유튜버의 영상을 수시로 보지만, 남편은 그 유튜버가 독일인 정원사라는 사실 이외에 어떤 사실도 알지 못하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녹차 티백으로 공통된 대화를 잠시 나누던 가족은 '각자의 취미에 몰두해 삼위일체와는 완전히 거리가 멀어'진다. '거실에 있어봤자 아내와 나눌 이야깃거리도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샐러드 볼에 함께 담겨있을 뿐, 각자 겉도는 재료로 존재하는 구성원이다.

괴테 티백이 샐러드 소스가 되는 순간, 이들의 관계는 서서히 어우러진다. 도이치의 출처 찾기 프로젝트에 한 사람씩 가담하기 시작한다. 5년 만에 딸의 방에 들어가고, 독일에 함께 가서 아내의 최애 유튜버를 만나고, 딸의 남자 친구를 정식으로 소개받고, 장인어른까지 합세한다. 어떤 식으로든 괴테와 연결된 구성원들은 괴테 패밀리로 대동단결한다. 방대하게 뻗어나가는 가계도의 연결 고리에 같은 소스로 버무려진 샐러드가 탄생한다.

 

도이치 패밀리는 독일어 원문으로, 영문판으로, 일본어판으로, 번역한 판본과 방송용 원고 등 언어는 다르지만 같은 『파우스트』를 읽으며 시간을 보내게 된다. "『파우스트』, 재밌더라." 아내의 한마디로 남편은 '모든 게 좋다.' 조화로운 가족의 풍경은 녹차 티백의 문구와 자연스레 겹친다. '말은 전부 미래로 던져진 기도다.' 샐러드처럼 혼연일체로 만드는 사랑의 말이 구현된 장면이다.

가족 사이에 연결되는 관계는 계속 변화한다. 부부의 출발은 이보다 선명할 수 없는 감정으로 가득했으리라. 아내를 보았을 때 '눈동자 안쪽부터 눈꺼풀 뒤쪽까지 그녀의 색으로 가득 찼던’ 도이치처럼. 엔트로피의 법칙처럼 시간이 벌여 놓는 관계의 거리는 자연스러운 현상일지 모른다.

거리를 좁히는 데는 노력이 필요하다. 도이치는 그의 아내가 남편이 선물한 책에 나오는 정원을 제일 먼저 작품으로 도전했음을 알게 된다. 진실을 알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면 서로를 바라보려 하는 작은 시도를 만난다. 바라보려 하지 않았으면 영원히 몰랐거나 너무 늦게 알았을 마음이다. 너무 가깝거나 멀지 않게, 독립된 존재로 살아가면서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차릴 만한 거리에서 말로, 행동으로 적절한 온기를 전할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은 이미 말해졌고, 우리는 기껏해야 그것을 다른 형식이나 표현으로 되풀이할 뿐이야.' 소설 속 인물의 말은 문학 창작의 본질을 꿰뚫는다. '사랑'을 주제로 얼마나 많은 작품이 탄생했는가. 바다에 던져진 전설의 맷돌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네버 엔딩 스토리가 쏟아지고 있으리라.

'사랑'이라는 보통 명사를 고유 명사로 바꾸어 작품 안에 박제하는 일, 문학을 창작하는 작가의 몫이다. 다수의 사람이 선택하는 틀에 박힌 붉은 색 말고, 직접 고른 물감을 혼합하여 채도와 명도를 변화시키거나 과감한 색상을 선택하여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색깔로 구현하는 것. 작가의 고민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기성복은 익숙한 맛처럼 다수의 독자에게 그런대로 맞지만, 개성이 없다. 맞춤복은 한 벌 뿐이지만 소수에게만 편안하다. 극단의 선택지 사이에서 적절한 무게 중심을 찾아내기 위해 작가는 시행착오를 반복한다. 무게 중심은 선이 아니라 점이니 매 순간 깨어있어야 한다. 신선하면서 편안한 착장을 독자에게 건네기 위해서는.

이런 관점에서 이 책을 분석하면 '신선함'은 성공적이다. 문학의 거장, '괴테'를 소재로 사용했으니 말이다. 실제로 작품을 접해보지는 않았어도 풍문으로 명성을 들었거나 요약된 줄거리 정도는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는 인물 아닌가. 그를 공통분모로 '인용, 열정, 관계, 사랑, 세계관' 등의 요소를 구현한다는 발상이 파격적이다.

 

이상적인 가족 관계의 샐러드는 어떤 맛인가. 나의 결론은 '조화로운 맛'이다. 사실 샐러드 만들기에는 복잡한 레시피가 없다. '모든 재료를 썰어서 그릇에 담는다. 소스를 뿌린다. 잘 섞는다.' 이게 전부다. 가족 구성원들이 모두 어우러지는 소스를 발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레시피이리라. 샐러드적 세계관이 적용되는 거리에 서서 공통점을 찾아내기 위한 대화가 필요하다.

원문에 담긴 수많은 인물과 생소한 문화를 설명하는 데 필요했겠지만, 인용의 쓰나미는 주석의 쓰나미로 복제된다. 프롤로그에 1개, 1부 20개, 2부 21개, 3부 26개, 4부 31개, 5부 15개, 6부 12개, 에필로그에 10개, 저자 후기에 2개. 245쪽의 본문에 138개의 주석이 달린다. 본문을 읽다, 아래쪽 주석을 읽다, 다시 올라가기를 수시로 반복하니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과한 친절이 안개 속을 헤매게 만든다.

괴테는 이 세계에 언제나 안개가 끼어 있다고 본다. '세계는 완전한 빛과 어둠의 중간에 있다.'고. 빛과 어둠의 대립이 색을 이루어 모든 색이 각각 빛나야 한다고 말한다.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의 색깔을 인정해 줄 때, 빛나는 색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 "다음에 보여줘." "전에 보여줬잖아." "그래? 그럼 다시 한번 보여줘. 집에 가면 만드는 방법도 가르쳐 주고. 나도 만들어 보고 싶어졌어." 도이치 부부의 대화에서 은은하게 전해지는 샐러드 맛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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