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돌이킬 수 없는 약속 (초판본)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성미 옮김 / 북플라자 / 2026년 2월
평점 :
갈수록 어려워지는 단어가 있다. 치우침 없이 평평하고 널리 두루 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글자, '평범(平凡)'이다. 두 글자 합쳐봐야 고작 8획의 한자로 이루어진 단어. 명사는 이토록 단순한데, 삶에서 동사로 구현될라치면 이만큼 까다로운 글자도 드물다. 평범은 선이 아니라 점에 가까운 걸까. 외줄타기 광대가 수시로 잡아야 하는 무게 중심처럼 방심하다가는 순식간에 균형이 깨지니 말이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평범한 삶을 꿈꾼다. '많은 욕심 부리지 않아요. 그저 나날이 평범한 일상이면 좋겠어요.' 평범을 꿈꾸는 나 역시 종종 이런 말을 한다. 한데 '평범'을 곱씹을수록 문장 안의 '그저'라는 말이 어색해진다.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적이고 좋은 삶은 유토피아에 가까울 정도로 도달하기 어려운 상태인지 모른다. 섬광인 듯 순식간에 머물다 지나가니, 더욱 소중하게 여겨야 하리라.
야쿠마루 가쿠의 추리소설 『돌이킬 수 없는 약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무카이도 평범한 삶을 꿈꾸는 인물이다. 15년 전의 과거를 버리고 진중한 동료와 레스토랑의 공동 경영자로 새출발한다. 가장으로서 아내와 딸과 함께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그는 지금 행복하다. 작가는 주인공의 삶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통해 '평범한 삶'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을 던진다. 죄를 지은 사람이 평범한 삶을 꿈꾸어도 되는 거냐고.
죄를 지으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 상식적으로 보이는 법칙이다. 문제는 이 룰이 종종 깨어진다는 데 있다. 현실에서는 어이없게도 죄와 벌이 비례하지 않는다. 많은 작가가 이러한 불합리함을 소설에 투사한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이 빵 한 조각을 훔친 대가로 19년간 복역했던 상황처럼. 야쿠마루 가쿠 역시 이 작품을 통해 '죄와 벌'의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소설 속에서는 죄를 지은 인간들이 등장한다. 놈놈놈 시리즈를 보는 듯 나쁜 놈들이다. 뭐 이런 노무시키들을 봤나! 분개하다 보면, 만만치 않은 놈이 또 나온다. 사람 닮은 짐승이라 여겨도 될만하다. 이들을 응징하는 건 정당한 행위일까. 작가는 '올바른 형벌이 내려지지 않는 세상과 사법 현실에 대해' 절망한 인물의 심정을 밖으로 끄집어낸다. 죄를 저질렀지만, 시간이 흘러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었다면, 이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까. 용서의 범주에 허용되는 죄의 상한선은 어디까지일까.
인간의 본성은 뭐라 정의하면 될까. 성선설에 가까울까, 성악설에 가까울까. 장발장을 보면 성선설이 맞는가 싶다가도, 사회 면을 통해 보도되는 촉법소년들의 죄상을 보면 성악설이 맞는가 싶을 때도 있다. 아니면 선함이나 악함은 '선천성'에 가까울까. MBTI로 구분되는 성격처럼 타고난 기질 중 하나일까. 다만 고정불변의 것은 아니고 맹자나 순자가 공통적으로 지향한 것처럼, 교육을 통해 선함을 지키거나 악함이 고쳐질 수 있는 건 아닐까.
선과 악은 절대적인 가치라 여겨왔다. 착한 건 착한 거고, 나쁜 건 나쁜 거니까. 한데 경험과 책을 통해 세상을 알아갈수록 혼란스러워진다. OX로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이 생각보다 많아서 오히려 상대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A에게 나쁜 사람이 B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는 은인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사람에 대한 판단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는 교훈을 얻는다. 부분적인 모습으로 한 사람의 전체를 규정짓는 오류를 경계해야 한다고.
드라마 <김부장>의 주인공 김부장은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제목이 주제를 관통한다. 최부장이나 소부장도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흔한 성을 붙인 데는 눈에 띄지 않고 살아가고자 하는 주인공의 바람이 담긴다. 자발적인 평범함이다. 힘숨찐의 능력은 사람이 깔리는 위기의 순간에 마차를 들어 올리는 괴력을 발휘한 장발장처럼, 딸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발휘된다.
소설 속 주인공 무카이의 역린은 딸이다. 딸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종횡무진하는 아빠 김부장의 모습에 그가 겹쳐진다. '예전의 나는 단지 무언가를 빼앗기 위해서 여러 나쁜 짓을 해 왔지만, 지금의 나는 지켜야 할 사람을 위해 그 일을 하는 것이다.' 배우 소지섭이 연기하는 김부장은 선한 걸까, 악한 걸까. 그의 손에 쓰러진 이들의 관점에서는 악한일 수도 있으니 애매하다.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의 원제는 '서약(誓約)'이다. 일상적인 약속보다 훨씬 무거운 책임감이 따르는 말이다. 주인공은 15년 전에 서약에 가까운 약속을 한다. 장발장 역시 미리엘 주교 앞에서 '평생 정직하고 선하게 살겠다'고 서약한다. 이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을 때, 정신적으로 버티는 힘이 되어준다. 반면, 무카이의 서약은 '독자의 목줄을 죄는 장편 미스터리 추리소설'이라는 홍보 문구처럼 주인공의 목줄을 죈다.
이보다 더 가벼울 수 없는 로코를 지향하는 드라매니아에게 드라마 <김부장>은 그리 매력적인 작품은 아니었다. 홍보 내용도 아빠의 부성애와 안경 쓴 아저씨들만 잔뜩 나오는 데다 제목까지 평범하니 우연히 1화를 보기 전까지는 아웃 오브 안중이었다. 드라마를 이끄는 건 궁금의 향연이라 했던가.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그다음 전개가 또 궁금해서, 어제의 나는 이 드라마를 본방 사수까지 하고야 만다. 몰입감에 엄지척한다.
근래 접했던 소설 중에 이토록 강한 몰입감을 안겨준 작품이 있던가. 소설계의 <김부장>을 보는 듯 380쪽을 완독하는 데 불과 며칠이 걸리지 않는다. 주인공의 갈등과 심리 묘사를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전개에 흡인력이 있다. 외국 작가의 소설이라는 생각을 잊을 정도로 번역 또한 자연스러워서 가독성이 좋다. 엔딩까지도 깔끔한 디저트를 먹은 듯 개운하다. 낭비되는 복선이 없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이름까지 의미를 담아 설정한 점도 좋다. 두 가지가 생각난다.
하나, 주인공이 경영하는 레스토랑의 이름 'HEATH'이다. 소설 속에서 히스는 '스코틀랜드 황무지에서 군생하는 키 작은 식물'을 의미한다고 언급된다. 척박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피어나는 식물처럼 강인함을 상징하며 섬광처럼 빛나는 희망을 보여준다.
둘, 등장인물의 이름 '고헤이'이다. 고헤이는 한자로 '공평(公平)'으로 '공평하게 나누어주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미래에 얼마만큼의 빛이 내리쬘지' 초조해했던 주인공 무카이는 고헤이에게 '자신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빛은 보이는 거야.'라는 말을 건넨다. 이는 작용과 반작용의 문학 버전이 구현되기라도 하듯 고헤이가 주인공에게 하는 말로 되돌아온다. '노력하시기에 따라 얼마든지 빛이 보일 거예요.'라고 말이다.
책날개와 뒤표지에 소개된 내용만 리뷰 작성에 사용하려고 노력한 나를 스스로 칭찬한다. 잠시 언급한 책 속의 문장도 미스터리의 열쇠가 되지는 않으니 스포 사수에는 성공한 듯하다. 이 글의 빅픽처는 궁금증을 유발하여 책장을 펼치도록 만드는 데 있다. 직접 읽어보고 판단하시라고. 책을 완독한 다음, 나의 리뷰를 다시 접하면 평범한 느낌이 조금은 특별해질까.
삶에서 '평범'은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한 빛이다. 장발장의 소망은 그저 전과자라는 낙인 없이 딸과 함께 평범하게 살아가는 삶이건만, 김부장의 소망은 그저 간첩이라는 낙인 없이 딸과 함께 평범하게 살아가는 삶이건만, 무카이의 소망 역시 그저 사랑하는 가족과의 평범한 삶이건만. 세상은 '그저'를 거저 줄 정도로 만만하지 않다.
우주계에서는 엔트로피의 법칙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질서도가 항상 증가하는 방향으로만 진행된다는 규칙 말이다. 청소하지 않고 가만히 둔 방이 어질러지는 게 당연한 현상인 것처럼 내버려둔 방이 저절로 깨끗해지는 기현상은 절대 발생하지 않는다. 거저 얹어지는 질서는 없다. 인간의 의지가 작용해야 한다.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빛이 보인다는 야쿠마루 가쿠 작가의 다독임을 믿는다. 평범도 같은 맥락으로 바라본다. 어쩌면 평범의 속성은 '힘숨찐 비범'인지도 모른다. 수시로 삶의 균형을 맞추며 주변과 나를 돌아보고 노력해서 얻어내는 상태이니,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비범한 고수인가.
당신은 지금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진정한 고수가 맞다. 다만 여기에서 안주하면 균형은 금세 깨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 역시 평범이라는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삶을 똑바로 응시하려 한다. 빛은 보려고 하는 이의 눈에만 스며들어올 수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