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 제172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스즈키 유이 지음, 이지수 옮김 / 리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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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바라보는 세상을 이미지로 구현해 본다. 커피숍에 앉아 잠시 고개를 든 지금, 내 앞에는 은은한 조명 몇 개, 창 너머로 흔들리는 나뭇잎, 습기를 머금어 살짝 뿌연 공기, 연한 황토색 탁자, 자료를 들추며 노트북을 두드리는 건너편의 여자가 있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하얀 종이와 모니터의 세상이 펼쳐질 터이다. 시간과 공간을 공유한다 해도 우리가 보는 세상은 모두 다르다.

다른 세상을 살던 두 사람이 '가족'이라는 사회 제도로 묶일 때, 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까. 스즈키 유이의 소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에 그 답이 있다. ''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이 된다는 노랫말을 들어보았는가. 또한 부모의 DNA를 공유한다 해도 생물학적 유전이 정서적 연결까지 보장하지는 않을 터. 가족 구성원 사이의 관계는 생각보다 견고하지 않다. 어쩌면 한시적으로 시공을 공유하는 개별적인 존재인지 모른다.

'관계'의 눈으로 이 소설을 바라보면, 가족 간의 심리적인 거리가 좁혀지는 과정에서 따끈하고 담백한 두부 맛이 난다. 학문적인 관점으로 따라가면, '인용'에 대한 심오한 고찰에서 알싸한 맛이 느껴진다. 진실을 탐구하는 순수한 '열정'을 지켜볼 때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 반짝이는 천일염의 맛이 전해진다. '세계관'으로 접근하면 광대한 바다인 양 탁 트인 시야에서 달큰한 바람 내음이 스며든다. 키워드에 따라 맛의 편차가 큰 작품이다.

 

'괴테'라는 자물쇠로 채워진 소설. 문안으로 펼쳐지는 세상은 상상과 다르다. 하나의 문장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세계관에 대한 사유로까지 확장된다. 엄지보다 얇은 두께라고 방심하면 낭패다. 내용이 방대하여 휘리릭 읽기 어렵다. 시를 마주한 듯 함축된 의미를 곱씹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오미자처럼 다양한 맛이 나니 호불호가 갈리리라 예상한다.

괴테 연구 일인자 도이치 교수의 결혼기념일, 레스토랑에서 이루어진 가족 식사. 그는 후식으로 나온 녹차 티백에 새겨진 명언의 출처를 보고 동공 지진을 일으킨다. '사랑은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만들지 않고 한데 섞는다.'라는 영문 뒤에 적힌 '괴테'라는 글자 때문이다. 괴테가 한 말은 다방면으로 많지만, 과연 이 말도 했을까. 어디서 들어본 듯하지만, 확신은 없다. 확실한 출처를 찾기 위한 학자로서의 추적이 시작된다.

'괴테가 말하기를'은 괴테의 권위를 앞세워 자신의 주장을 펼칠 때 말하는 관용구라고 한다. '명언을 인용할 때 그게 누구의 말인지 모르거나 실은 본인이 생각해 낸 말일 때도' 습관적인 접두사처럼 말한다나. 방대한 저작을 남겼던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으니까. 저자는 거장 뒤에 숨는 독일인들의 습관을 날카롭게 풍자하며 '인용'의 본질을 톺아본다.

 

인용의, 인용에 의한, 인용을 위한 책을 만들 테닷! 스즈키 유이는 작정한 게 분명하다. 소설 전체에서 인용 쓰나미가 몰려온다. 창고 대 방출된 인용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갈 지경이다. 배경지식이 얄팍하니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이 가장 문제다.

실존 인물인 괴테가 진짜로 한 말인지, 소설 속 괴테 연구자에 빙의한 작가가 창작한 가상의 말인지 헷갈린다. 경구들이 언급될 때마다 수시로 AI의 도움을 받는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는 말이 독일에 실제로 있어?', '비유적 및 경구풍으로라는 괴테의 작품이 있나?'. 이런 식으로 말이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의 동료 학자 시카리는 명언의 세 가지 유형을 언급한다. '원래 말의 복잡한 의미가 단순하게 변하고, 걸핏하면 뜻이 거꾸로 뒤집히는' 요약형, '닳고 닳을 정도로 쓰여서 원전이 뭔지도 알 수 없는' 전승형, 그럴듯하게 '작가가 지어낸' 위작형이다.

그는 인용의 날조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는데도 당당하다. '작가나 사상가는 어딘가에서 날아온 나뭇잎 한 장으로 자신의 숲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라며, '사람은 자신의 사상 전체가 아니라 파편으로 이해된다.'라는 주장을 피력한다.

 

파편은 진실인가, 거짓인가. '장님 코끼리 만지기' 일화가 떠오른다. 코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가 길고 유연한 뱀이나 밧줄처럼 생겼다 말한다. 다리를 만진 사람은 단단하고 굵은 나무 기둥, 귀를 만진 이는 곡식 키나 부채 같다고 한다. 배를 만지며 거대하고 단단한 장독을 상상하고, 꼬리를 만지곤 쓸개 빠진 빗자루 같다고 제각기 주장했다는 우화 말이다.

그들의 주장은 전체 모습과 확연히 다르므로 거짓일까. 느낀 그대로 말한 입장에서는 억울할 터이다. 그렇다면 진실일까. 진실 혹은 거짓의 기준으로 답을 특정하기가 난감하다. 그러니 파편은 야누스적이다.

한 인간이 모든 세상을 볼 수는 없으니, 개인의 세상은 파편일 수밖에 없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말에서 키워드를 찾는다. 결국 '거리'의 문제다. 볼록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물체의 이미지가 거리에 따라 다른 것처럼. 렌즈를 통과한 빛은 거꾸로 선 작은 상, 거꾸로 선 큰 상, 똑바로 선 큰 상, 상이 맺히지 않는 경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기준은 초점이다. 초점에서는 상이 생기지 않으니, 렌즈를 통해 물체를 보려면 초점을 벗어나 움직여야 한다. 어느 정도의 거리에서 대상을 바라볼지는 내가 정할 일이다. 세계관 역시 마찬가지다.

 

소설에서는 상반된 두 세계관이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 잼적 세계와 샐러드적 세계이다.

처음으로 딸기쨈을 만들어 본 기억이 생생하다. 방대한 양의 설탕과 딸기를 찜통에 넣어 졸이느라 어찌나 쫄았던지. 마그마처럼 꿀렁대며 덤벼드는 혼합물의 위협에 주방 장갑에 앞치마로 무장을 한다. 가스레인지 앞에 의자를 놓고 그 위로 올라간다. 최장신 주걱을 간택하여 몸을 사리며 인고의 시간을 보낸다. 설탕과 딸기의 원형이 시간의 블랙홀로 사라졌을 때, 걸쭉한 결과물이 탄생한다.

잼을 만드는 과정도 거리에 따라 다르게 보이리라. 평화롭게 주걱을 젓는 면봉 크기의 여인은 수시로 튀는 건더기와 사투를 벌이며 삐질삐질 땀을 흘리는 여인과 동일인이다.

'거리'라는 키워드로 소설 속 세계관의 차이를 이해하려 한다. '잼적 세계란 모든 것이 하나로 녹아든 상태, 샐러드적 세계란 사물이 개별적 구체성을 유지한 채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는 상태를 가리킨다.' 먼 거리에서는 희극적으로 보이는 잼적 세계가, 가까운 거리에서는 사소한 움직임조차 까슬까슬한 솜털처럼 감각되어 비극적으로도 보이는 샐러드적 세계가 존재한다고 말이다.

 

'세계는 어떤 식으로 하나여야 하는가'. 저자는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 위해 괴테가 남긴 두 가지 경구를 언급한다. '세계는 죽이나 잼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딱딱한 음식을 씹어야 한다.', '세계는 말하자면 안초비 샐러드다. 모든 것을 하나로 뒤섞어 먹어야 한다.'라는 문장이다.

다시 추적! 녹차 티백의 시간이다. 괴테의 경구를 보면 티백 문장의 핵심 개념이 등장하는 듯하다. 세계관을 사랑에 적용하여, '사랑은 모든 사물을 잼처럼 혼동시키지 않고 샐러드처럼 혼연일체로 만든다.'라고 번역한 다음, 괴테님의 영역에 포함시켜도 되는 걸까. 주인공의 갈등에 덩달아 마음을 얹는다. 답은 끝까지 보이지 않는다. 소설 속 서사의 흐름은 명쾌하지만, 증강 현실을 보는 듯 몽롱함이 남아 다큐적인 답에는 의문이 남는다.

사실 답이 무엇인지는 상관없다. 중요한 건 이 말들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력이다. '그렇게 인용만 하지 말고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게 어때?' 나는 소설의 맛을 보고 얼마만큼 소화했을까. 소설에서 언급된 세계관을 '가족'의 범주에 적용해 본다. 세상에는 크고 작은 프랙털이 존재하며 사회의 최소 단위는 가족이니까.

가족도 거리에 따라 잼으로도, 샐러드적으로도 존재하는 게 아닐까. 멀리서 보면 혼연일체가 된 잼으로 보여도, 가까이서 보면 샐러드의 개별적인 모습으로 존재하는 관계로 말이다. 괴테는 샐러드파, 소설 속 서사로 판단한다면 저자도 샐러드파다. 나도 한 표를 더한다.

 

샐러드적 세계관은 음미할수록 매력적이다. '따로 또 같이'를 이상적으로 구현하는 상태 아닌가. 저자는 서서히 변화되는 도이치 가족의 관계를 통해 샐러드적 세계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남편과의 25년보다 딸과의 22년에 훨씬 말할 맛'을 느끼는 도이치의 아내는 괴테의 작품을 기억하지도, 남편이 번역해서 바친 작품을 읽었는지도 알 수 없다. 아내는 거실 TV로 자신이 좋아하는 유튜버의 영상을 수시로 보지만, 남편은 그 유튜버가 독일인 정원사라는 사실 이외에 어떤 사실도 알지 못하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녹차 티백으로 공통된 대화를 잠시 나누던 가족은 '각자의 취미에 몰두해 삼위일체와는 완전히 거리가 멀어'진다. '거실에 있어봤자 아내와 나눌 이야깃거리도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샐러드 볼에 함께 담겨있을 뿐, 각자 겉도는 재료로 존재하는 구성원이다.

괴테 티백이 샐러드 소스가 되는 순간, 이들의 관계는 서서히 어우러진다. 도이치의 출처 찾기 프로젝트에 한 사람씩 가담하기 시작한다. 5년 만에 딸의 방에 들어가고, 독일에 함께 가서 아내의 최애 유튜버를 만나고, 딸의 남자 친구를 정식으로 소개받고, 장인어른까지 합세한다. 어떤 식으로든 괴테와 연결된 구성원들은 괴테 패밀리로 대동단결한다. 방대하게 뻗어나가는 가계도의 연결 고리에 같은 소스로 버무려진 샐러드가 탄생한다.

 

도이치 패밀리는 독일어 원문으로, 영문판으로, 일본어판으로, 번역한 판본과 방송용 원고 등 언어는 다르지만 같은 파우스트를 읽으며 시간을 보내게 된다. "파우스트, 재밌더라." 아내의 한마디로 남편은 '모든 게 좋다.' 조화로운 가족의 풍경은 녹차 티백의 문구와 자연스레 겹친다. '말은 전부 미래로 던져진 기도다.' 샐러드처럼 혼연일체로 만드는 사랑의 말이 구현된 장면이다.

가족 사이에 연결되는 관계는 계속 변화한다. 부부의 출발은 이보다 선명할 수 없는 감정으로 가득했으리라. 아내를 보았을 때 '눈동자 안쪽부터 눈꺼풀 뒤쪽까지 그녀의 색으로 가득 찼던도이치처럼. 엔트로피의 법칙처럼 시간은 벌여 놓는 관계의 거리는 자연스러운 현상일지 모른다.

거리를 좁히는 데는 노력이 필요하다. 도이치는 그의 아내가 남편이 선물한 책에 나오는 정원을 제일 먼저 작품으로 도전했음을 알게 된다. 진실을 알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면 서로를 바라보려 하는 작은 시도를 만난다. 바라보려 하지 않았으면 영원히 몰랐거나 너무 늦게 알았을 마음이다. 너무 가깝거나 멀지 않게, 독립된 존재로 살아가면서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차릴 만한 거리에서 말로, 행동으로 적절한 온기를 전할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은 이미 말해졌고, 우리는 기껏해야 그것을 다른 형식이나 표현으로 되풀이할 뿐이야.' 소설 속 인물의 말은 문학 창작의 본질을 꿰뚫는다. '사랑'을 주제로 얼마나 많은 작품이 탄생했는가. 바다에 던져진 전설의 맷돌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네버 엔딩 스토리가 쏟아지고 있으리라.

'사랑'이라는 보통 명사를 고유 명사로 바꾸어 작품 안에 박제하는 일, 문학을 창작하는 작가의 몫이다. 다수의 사람이 선택하는 틀에 박힌 붉은 색 말고, 직접 고른 물감을 혼합하여 채도와 명도를 변화시키거나 과감한 색상을 선택하여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색깔로 구현하는 것. 작가의 고민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기성복은 익숙한 맛처럼 다수의 독자에게 그런대로 맞지만, 개성이 없다. 맞춤복은 한 벌 뿐이지만 소수에게만 편안하다. 극단의 선택지 사이에서 적절한 무게 중심을 찾아내기 위해 작가는 시행착오를 반복한다. 무게 중심은 선이 아니라 점이니 매 순간 깨어있어야 한다. 신선하면서 편안한 착장을 독자에게 건네기 위해서는.

이런 관점에서 이 책을 분석하면 '신선함'은 성공적이다. 문학의 거장, '괴테'를 소재로 사용했으니 말이다. 실제로 작품을 접해보지는 않았어도 풍문으로 명성을 들었거나 요약된 줄거리 정도는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는 인물 아닌가. 그를 공통분모로 '인용, 열정, 관계, 사랑, 세계관' 등의 요소를 구현한다는 발상이 파격적이다.

 

이상적인 가족 관계의 샐러드는 어떤 맛인가. 나의 결론은 '조화로운 맛'이다. 사실 샐러드 만들기에는 복잡한 레시피가 없다. '모든 재료를 썰어서 그릇에 담는다. 소스를 뿌린다. 잘 섞는다.' 이게 전부다. 가족 구성원들이 모두 어우러지는 소스를 발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레시피이리라. 샐러드적 세계관이 적용되는 거리에 서서 공통점을 찾아내기 위한 대화가 필요하다.

원문에 담긴 수많은 인물과 생소한 문화를 설명하는 데 필요했겠지만, 인용의 쓰나미는 주석의 쓰나미로 복제된다. 프롤로그에 1, 120, 221, 326, 431, 515, 612, 에필로그에 10, 저자 후기에 2. 245쪽의 본문에 138개의 주석이 달린다. 본문을 읽다, 아래쪽 주석을 읽다, 다시 올라가기를 수시로 반복하니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과한 친절이 안개 속을 헤매게 만든다.

괴테는 이 세계에 언제나 안개가 끼어 있다고 본다. '세계는 완전한 빛과 어둠의 중간에 있다.'. 빛과 어둠의 대립이 색을 이루어 모든 색이 각각 빛나야 한다고 말한다.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의 색깔을 인정해 줄 때, 빛나는 색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 "다음에 보여줘." "전에 보여줬잖아." "그래? 그럼 다시 한번 보여줘. 집에 가면 만드는 방법도 가르쳐 주고. 나도 만들어 보고 싶어졌어." 도이치 부부의 대화에서 은은하게 전해지는 샐러드 맛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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