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주로 일하던

어미의 소원은

이팝꽃처럼 솔솔

갓 지어낸 밥 한 공기

내 새끼 뱃속에 담아

배불리는 것이었다

 

부처님 공양하고

남은 밥 찐 도시락

어느 날 삭아버려

축 늘어진 이팝꽃

자식은 밥을 버리며

철없이 투덜댔다

 

30년 뒤 절 마당

갓 지어낸 밥 한 공기

이팝꽃처럼 솔솔

지어주고 싶었지

버려진 이팝꽃은

노모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뜨겁게

피어나고 있었다

 

 

* 2017. 5. 20. H백일장(글제: 이팝꽃이 피면), 금상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17-07-04 0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04 0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 방향으로만 가던 삶이었다. 고지식하고 소심하고 평범한 모범생이었다. 아까 오다가 봤던 떡볶이 집, 학교 끝나고 가볼래? ? 그런 게 있었어? 등하굣길을 같이 오가던 친구가 본 것을 못 볼 정도로 걸을 때조차 앞만 보던 아이였다. 그런 삶을 걸어 중학교 과학 교사가 되었다.

직진만 하는 빛이었던 나는 수업은 그런대로 잘했다. 하지만 간혹 아이들과 면담을 하거나 생활지도를 할 때면 스스로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를 느껴야 했다. 모범생들에게는 더없이 바람직한 교사였으나 소위 날라리 학생들에게는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꽉 막힌 교사였다.

몰려드는 학교 일에 육아와 가사를 더한 삶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30대 후반까지 회색빛 시간은 강한 탄성력으로 나를 찾아왔다.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넘쳐나던 일들은 무거운 자석이 된 몸에 철가루처럼 들러붙었다. 밤이 되면 몸은 쭉 가라앉았고 마음은 텅 비어 황량한 바람으로 그득했다.

 

샘은 되게 자유롭게 보여요. 수업을 들어가지 않는 반의 방과후 수업을 하고 난 후였다. 앞자리에 앉은 녀석이 킥킥 대며 말을 건넨다. 뿌듯해진 나는 훗~ 썩소를 날리며 상큼한 바람이 되어 쉬는 시간 속으로 정신없이 빠진 복도를 휘리릭 날아갔다.

그랬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처럼 녀석들의 ** 샘은 달라져있었다. 수업 시간에 자유롭게 웃는 자연인이었고, 가끔은 썰렁한 농담으로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어설픈 개그맨이었으며, 아픔이 있는 아이들에게는 편안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상담자였다. 더 이상 한 방향만 바라보지 않는, 둘레둘레 주변을 살피는 교사가 된 나는, 큰 딸이 가장 존경하는 친구 같은 엄마이기도 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이전과 달라진 삶의 터닝 포인트를 찾아 시간을 조금씩 거슬러 올라간다. 시작은 시 한 편이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먹먹한 일이지만, 2005, 근무하던 학교의 한 아이가 자살을 했다. 전날까지 그 반 수업을 했기에 한동안 나는 심한 무력감에 휩싸였다. 어찌할 바 모르는 마음 끝에 마음의 색맹이라는 시를 썼다. 내 옆 자리는 국어 선생님이셨는데 우연히 시를 본 선생님께서는 문장을 조금 수정해주셨다. 어순만 바뀌었을 뿐인데 느낌이 확 달라졌다. 소질이 있으신데요? 글을 써보세요. 제가요? 아는 것도 별로 없고 배경지식이 워낙 습자지처럼 얄팍해서요. 나는 멋쩍게 웃었다.

 

책을 좀 읽어보시는 건 어떠세요? 얼마 뒤 선생님은 교육에 관한 책을 소개해주셨고 가끔씩 다양한 장르의 책을 권해주셨다.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며 마음에 남는 문장을 적어보고 독후감을 써보라고도 하셨다. 내 삶의 길에 책들이 한 권 두 권 레드카펫처럼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12여년을 책과 함께 했다.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모범생이 되어 꾸역꾸역 책을 읽었다. 드라마 <도깨비>에 나오는 멘트처럼 책과 함께 한 모든 날들이 좋았다.’라 외치지는 못하겠다. 700쪽이 넘는 기세춘의 장자를 읽을 때에는 토할 뻔했다. 책을 펼친 날보다 베고 잔 날이 더 많았다. 같이 나이 들어가는 친한 제자가 전화할 때마다 나는 책을 읽고 있었다. ! 뭐하세요? , 책 읽어. 곧 주무시겠네요? 책 읽는 속도가 느렸던 나에게 독서는 차라리 스스로 선택한 고행이었다.

 

마을에 독서 모임을 같이 만들어볼래요? 2008, 마침 사는 동네가 같았던 선생님께서는 지역의 청소년문화의집을 거점으로 하여 청소년 독서모임을 제안하셨다. 제가요? 전공도 아닌데 어찌. 책 읽는 데 전공 구분이 있나요? 뭐든 3명만 되면 시작할 수 있어요. 선생님의 수업과 책을 좋아하는 제자 두 명을 포섭하여 4명으로 출발했다. 2009년에는 어린이 독서모임을, 2010년에는 성인 독서모임이 만들어졌다. 자발적인 모임이기에 구성원들은 수시로 변동되었다. 매월 같은 책을 한두 권 읽고 토론을 했는데, 적게는 3명에서 많게는 15명이 넘어설 때도 있었다. 꾸준히 지속하는 게 중요하다 하셨다. 모임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업그레이드되며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다. 그동안 내공을 키운 나는 어린이 독서모임의 진행자가 되었다.

 

2012, 인터넷 서점에 리뷰를 써보는 건 어때요? 독서모임 3종 세트에 매달 두 권 정도씩, 최소 5~6권의 책을 읽고 토론 자료를 제작하는 데 슬그머니 지쳐갔던 내게 선생님은 새로운 제안을 하셨다. 정혜윤의 삶을 바꾸는 책 읽기의 리뷰를 시작으로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서재에 리뷰를 올리기 시작했다. ‘책이 자꾸 자신을 만나게 한다.’던 작가의 말처럼 지금까지 100편의 리뷰를 올리며 100번 이상의 나를 만났다. 걸어오는 중간에 시에 매료되어 오늘까지 349편의 시를 올렸다.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글을 쓰고 싶었다. 시인이 되고 싶은 꿈을 품게 되었다.

 

빛은 매질을 경계로 굴절한다. 내 삶은 선생님을 만나고, 450여 권의 책을 매질로 만나면서 서서히 바뀌어가며 빛이 났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길은 멀고, 그보다 더 먼 길은 발바닥까지 가는 길이라고 했다. 책을 읽으면서 나를 돌아보고,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나를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주변을 돌아보며 어둡고 소외되고 낮은 곳을 바라보는 마음까지 다가갔다. 둘째 아이와 촛불을 들며 구호를 외쳤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당당하게 의사 표현을 했다. 아직은 발바닥만 가끔 들썩일 정도로 많이 부족하지만, 머지않아 마음 가는 곳으로 용기 있게 뛰어갈 날이 올 것이다. ‘나무에 앉은 새는 가지가 부러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무가 아니라 자신의 날개를 믿기 때문이다.’라고 한 류시화 시인의 말처럼, 나는 나의 날개를 믿기 때문이다.

 

 

* 2017. 5. D수기 공모전(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17-07-01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01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교과서속 화석인 양

굳어버린 몇 글자

덤덤하게 박힌 채

스쳐가던 이름인데

당신이 걸어온 자취

숨죽이며 따라가 보니

어느 순간 내 심장이

욱신욱신 꿈틀댑니다

 

눈가엔 붉은 꽃잎

코끝엔 맑은 이슬

두 손은 축축해지고

두 볼은 달아올라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발바닥으로

어느 순간 내 시간이

덜컹덜컹 흔들립니다

 

사십구 년 나의 삶은

나만 보며 평범했는데

사십구 년 당신 삶은

조국을 보며 치열했군요

사람으로 살기 위해

행동으로 살기 위해

죽음까지 당당했던

마지막까지 한결같던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죽는다하며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을 산다하는가

죽어도 죽지 않은

당신의 쟁쟁한 외침

내 삶의 온도가

조금씩 올라갑니다

 

백십 년을 건너온

당신의 굳은 의지

내내 숭고한 숨결로

내 숨결로 이어져

여전히

생생합니다

아직도

뜨겁습니다

 

스키드 마크처럼

선명하게 새겨진 이여!

서서히 뜨거워지는

나의 발걸음은

어디를 향해갈까요

지금

살기 위해

나는

 

 

* 2017. 6. I추모글쓰기대회, 장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17-07-01 15: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01 1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
이동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12년째다. 읽기만 하다가 쓰기가 더해지더니 독서모임에서 말하고 듣기까지 하고 있으니 드디어 초딩 국어 4종 세트를 완벽하게 갖춘 인간으로 거듭났다. 이런 시간들이 고통이던 때도 있었다. 빠르게 휘리릭 읽어재끼고 싶어도 느려터지기만 한 독서 속도에 얼마나 갑갑했던가. 갈 길은 까마득했다. 이것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나 회의가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드문드문 찾아오던 그런 순간들이 마라토너에게 찾아온다는 데드 포인트가 아니었나 싶다. 책 읽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은 편안하다. 계속 걸어가다 보니 길이 나왔다. 이제 세컨드 윈드로 들어선 걸까.

 

여전히 마음 한 구석 해결되지 않은 답이 있기는 했다. 내가 왜 책을 읽지? 책을 읽으며 시시때때로 질문을 던졌다. 작사가나 시인이 되고 싶어서? 뭔가 1% 부족하다. 반드시 그런 목적만은 아닌데. 그럼, ? ……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드디어 이 책에서 답을 찾았다.

 

서문의 첫 문장을 보고 선택한 책이다. ‘책을 펼쳐 들면 순식간에 나만 남습니다.(p5)’ 그 느낌이 뭔지 알 것 같아서. 홀로 자유로워지는 느낌을 알 것 같기에. 이 한 문장에 홀딱 반해서 주문했다.

평소 책을 선택하는 기준은 주로 세 가지이다. 서문을 읽고 작가의 의도를 파악한 다음, 차례를 훑어보며 내 성향과 맞을까 짐작한다. 마지막으로 한겨레신문까지 추천해주면 대부분 낙점이다. 이동진 작가가 말한 세 가지 방법 중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일치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말한 방법은 책에서 3분의 2지점을 펼쳐서 읽는다는 것이다. 그 근거가 은근히 설득력이 있다. 대부분의 저자는 책의 3분의 2지점쯤 되면 힘이 빠지는데, 그 부분마저 훌륭하다면 나머지도 좋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다. 에세이나 시는 편집 방법에 따라 순서를 뒤섞을 수 있으니 이 방법을 적용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지만, 소설을 선택하기에는 타당한 방법으로 판단된다.

 

이동진의 빨간 책방이란 이름은 많이 들어봤고, 내 책장에는 김중혁과 함께 쓴우리가 사랑한 소설들질문하는 책들이 꽂혀있다. 문제는 두 권 다 사놓기만 하고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며, 나는 팟 캐스트가 도대체 뭐를 하는 건지 전혀 모른다는 거다. 어떤 분야에 대해서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 거의 바닥상태라는 게 내가 가진 결정적인 단점이다. 한 마디로 이 책을 통해서 이동진의 세계를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책을 읽는다는 건, 저자가 만들어낸 지적인 세계, 그러니까 한 사람의 세계와 통째로 만나는 것입니다.(p79)’ 사는 무대가 다르기에 그와 내가 평생 만날 일은 아마도 없겠지만, 썩 괜찮은 세상을 알게 된 느낌이다.

 

17천 권의 책을 소유한 사람의 독서법이 담겨있다. 17천이란 숫자에 강한 의미를 부여한다. 물론 그가 이 많은 책들을 다 읽은 것은 아니지만, 17천 권의 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각각의 책들을 선택하기 위해 17천 번의 생각을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은 생각이라는 도구를 통해 다듬어진다. 존재는 끝도 없이 깊어지거나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이아몬드를 세공하는 것처럼 다듬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각도에서 몇 번을 커팅 하느냐에 따라 빛의 반사는 미묘하게 달라진다. 생각이 섬세하게 다듬어진 사람은 세상이 뿜어내는 빛도 섬세하게 받아들인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고통에도 민감하게 공감하며 반짝인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고 마치 재미있는 책을 또 한 권 읽는 느낌을 줍니다.(p6)’ 대화뿐 아니라 책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 쓴 글을 읽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저자와의 공통점을 찾으며 위안을 받았다. 나와는 다른 점도 많았다. 새로운 방법을 알게 된 듯 신선했다.

 

<1>생각이라는 주제로 책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이유를 소개한다.

책을 읽는 이유를 정보를 얻기 위해, 있어 보이기 위해, 재미있으니까.’등 세 가지로 제시한다. 그가 말한 세 번째 이유가 바로 내가 찾은 답이다. 재미있다는 데, 뭐 다른 이유가 필요하단 말인가. 사람을 좋아하는 데에도 이유가 없듯이 책도 마찬가지인거다. 그냥 좋으니까, 재미있으니까 읽는 거다. 읽어지는 거다. 단순하면서도 명쾌하고 쿨한 답이다.

소설을 읽는 이유에 마음이 크게 움직인다. 소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장르였다. 실제 이야기를 토대로 한다 해도 어디까지나 이야기니까. 소설 속에 설정된 극단적인 상황과 인위적인 이야기의 흐름이 싫었다. 현실과 괴리감이 느껴지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인 것만 같았다. ‘인간의 실존적인 상황, 그 한계를 좀 더 체계적이고도 집중적인 설정 속에서 인식하게 하고 고민을 숙고하게 만들죠.(p29)’, ‘직접적인 경험보다 간접적인 경험이 더 핵심을 보게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p30)’ 궁금해졌다. 인간 내부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감정들의 색깔이. 소설 몇 권을 거부감 없이 구입했다. 두근거렸다.

저자는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인간은 한 번 밖에 못 살기 때문, 언어를 예민하게 다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공감한다. 읽은 책이 늘어날수록 점점 더 말을 조심하게 되었으니까. ‘다르고 다름을 좀 더 민감하게 말하고, 비언어적 행동도 자세히 관찰한다. 사람의 감정은 의외로 작은 것에 흔들리고 상처받는다. 책을 읽으면서 점점 섬세해진다. 미묘한 공기의 흐름과 호흡의 차이점을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

트라우마까지는 아니더라도 소위 고전에 대한 찜찜함을 가지고 있었다. 학창 시절 독서의 주된 대상은 교과서였기에, 개나 소나 다 아는 필수 고전 중 안 읽어본 책이 꽤 많다.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은 없습니다.(p36)’라는 저자의 말에서 상당한 위안을 받았다.

독서에서 정말 신비로운 순간은, 책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 마음에 있는 것도 아니고 책을 읽을 때 책과 나 사이 어디인가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p80)’ 책에서 흘러나오는 기운과 책으로 향하는 내 마음이 만나는 그 적절한 지점에는 가슴을 뛰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그 무엇을 공감대라 해석한다.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공감대의 균형이 잘 맞는 책을 만나는 순간, 가장 편안한 기분을 느끼는 것 같다.

 

<2>는 이다혜 작가와의 대화가 담겨있다.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지만 행복에 관하여 나눈 대화가 가장 인상적이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고 빈도라고.(p141)’, ‘우리 삶을 이루는 것 중 상당수는 사실 습관이고, 이 습관이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거예요.(p142)’ 이어폰을 끼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집 근처 커피숍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책을 읽고 책에 대한 느낌을 쓰는 일이 이제는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엄청나게 돈을 버는 직업은 아니지만, 하루 한 번쯤은 좋아하는 일을 하는 데에 쓸 수 있는 시간과 커피 값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돈을 벌고 있음에 감사한다.

 

<3>에는 이동진의 추천도서 500권의 목록이 있다. 이 중 내가 읽은 책은 7권이고, 읽지는 않았지만 책장에 있는 책이 16권이니, 아직 알라딘 인터넷 서점에 있을 책은 477권이다. 관점의 전환이 일어났나. 예전 같으면 나의 무지함에 괜히 주눅이 들어 마음이 쪼그라들었을 터이다. 이제는 그의 추천도서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의 생각과 내 생각이 겹쳐지는 책이 23권이고, 평소 관심을 갖지 않던 책이 477권이라는 것뿐이다. 그의 독서법에 의한 목록이니 다만 내게 맞는 책을 선택하는 데에 참고로 하면 될 것이다. 그 중 내가 선택한 책을 읽어간다면 477권이 빚어내던 생각의 차이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I have read, I'm reading, I haven't read’ 알라딘 인터넷 서점의 북플 북엔드에 적힌 글귀이다. 읽은 책이 있고, 읽고 있는 책이 있고, 읽을 책이 있는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6-30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6-30 0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6-30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서 모은 책들이 몇 권인지 궁금해서 2년 전에 책을 세어 보는 작업을 시도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다 세어보지 못하고 포기했어요.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작업이었어요. ^^;;

나비종 2017-07-01 04:58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래서 전 알라딘에서만 구입하니까 구매목록으로 대략만 압니다. 알라딘 중고에 판 것도 꽤 되는데. .^^;
 
서민적 정치 - 좌·우파를 넘어 서민파를 위한 발칙한 통찰
서민 지음 / 생각정원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어릴 때 매일 빠짐없이 신문을 보긴 했다. ‘TV편성표띠별 오늘의 운세. 두 가지 코너가 신문을 통해 접하던 세상의 전부였다. 사실 세상이랄 것도 없었다. 오늘 텔레비전에서 무슨 프로그램을 하는 지, 12분의 1의 확률로 똑같은 행운을 갖게 되는 닭띠들의 운명을 확인하는 일로 세상을 알 수는 없었으니까. 그 때의 내게 정치라든지 경제라든지 사회 분야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딴 세상의 일이었다. 인쇄되어 지면에 담긴 실제 세상은 박제된 글씨에 불과했다. ‘정보는 넘쳐 난다지만 내가 보고 싶은 것만 사실이 된다.(p44)’ 보고 싶은 것만 보던 나의 세상은 매우 밋밋했고, 그 밖을 메우던 나머지 세상은 미지의 검은 대륙처럼 거대하고 멀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p65)’ 젊었을 때는 뭔가를 스스로 판단해본 기억이 별로 없다. 하라면 하고, 가라면 가는 수동적인 인간은 판단을 할 필요가 없었으니. 당황스러울 때도 있었다.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흔히 오르던 단골 주제는 정치였는데 나는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관심 분야에 대한 호불호가 워낙 극명하게 갈리는 성격이다. 좋아하는 분야는 끝까지 파고들었지만 관심 없는 분야에 대한 상식은  최소한이라는 하한선이 전혀 없는 제로 상태였던 거다. 우리,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거 맞니? 어떻게 이 사람을 모를 수가 있지? 친구의 핀잔에 속으로 항변했다. 모든 분야를 다 알 필요는 없잖아. 난 단지 정치에 관심이 없을 뿐이야. 플라톤이 했다는 말은 과거의 나를 향해 죽비를 내리친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다.(p65)’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었던 것을.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p158)’ 프랑스 정치학자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말했다고 한다. ‘의식이 존재를 배반한다.’던 홍세화 선생님의 말씀이 디졸브 된다. 몇 년 전에 들었는데도 아직까지 또렷하다. 강연장에서 그 말을 듣던 순간 조용하던 내 세상에 균열이 일어나는 듯했던 느낌도 생각난다. 2080의 사회에서 1090으로 점점 격차가 벌어지는 이유를 이보다 더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싶었다.

 

큰아이가 대학교 3학년이 되니 서서히 취업 걱정이 된다. 뱃속에 있을 때는 배 밖으로만 나오면 만사가 해결될 것 같더니. 이유식을 먹다가 내가 지은 밥에 어떤 변형을 가하지 않고도 식사가 가능해졌을 때, 이제는 되었다 싶더니.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다 될 줄 알았다. 무려 대학생이 되었을 때, 이번이야말로 더 이상 할 걱정이 없다 했다. 어미에게 자식은 네버 엔딩 스토리인가. 오십이 다 되어가는 딸을 아직도 걱정하시는 우리 엄마를 보면 나 역시 예외는 아닐 것 같다.

청년 문제에 대한 내용이 가장 현실적으로 와 닿는다.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드라마 <쌈 마이웨이>에서는 아나운서 면접에 지원하는 여주인공이 등장한다. 변변치 않은 대학을 나오고 스펙도 없는 그녀의 합격 여부는 말도 꺼내보기 전에 이미 스캔되어 결정된다.  ‘지금까지는 아무도 이런 것을 물어보지 않았습니다.(p194)’ 책에서 언급된 상황이 내 아이의 일이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서늘해진다.

 

저자의 글은 억지스럽지 않아서 좋다. 아직도 정치에 대해서는 문외한에 가까운 나 같은 사람에게도 부담가지 않게 사회를 알려준다. 묘하게 도발적인 면도 있다.  ‘상황이 이런데, 당신은 어쩔래?’ 라는 멘트를 간간이 은밀하게 날린다. 기생충을 향한 접근 방식에 신선한 매력을 느끼고, 글쓰기에 대한 경험담에 경계심이 풀렸던 걸까. 그래서 용기를 얻었나보다. 몇 년 전까지 상상할 수 없던 일이 일어났으니. 내가 정치에 관해 쓰인 책을 스스로 구입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고요하던 내 삶으로서는 분명 파격적인 사건이다.

 

설마 진짜 안 보게 될까 전날까지도 긴가민가했던, 어제 시행되었을 지도 모를 학업성취도평가도 폐지되었다.  ‘대선이 끝나면 정치 책을 읽는 일에는 시들해(p9)’ 질 거라는 그의 말이 내게는 틀린 말이 되어버렸다. 변화가 피부로 확 와 닿는 요즘, 정치에 더욱 관심이 가기 때문이다.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배분할지 결정할 수 있도록 힘을 행사하는 것, 이게 바로 정치의 힘(p177)’ 정치의 영향력에 관한 그의 정의가 명쾌하다.  ‘지구의 자원은 모든 사람의 필요를 위해서는 충분하지만 소수의 탐욕을 위해서는 부족하다.’ 했다던 간디의 말이 생각난다. 판단하고 싶어졌다. 내 밖의 세상이라고 여겼던, 나를 담고 있는 이 세상을 좀 더 알고 싶어졌다.

 

 

p155, 밑에서 3째 줄: ~이회창 후보 김대중 후보의~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