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마음산책 짧은 소설
이기호 지음, 박선경 그림 / 마음산책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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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프를 그릴 때마다 원점에 주목한다. 가로축의 값이 0일 때 세로축도 0이 되는가. 원점에서 출발하는 그래프도 있지만 애매하게 시작하는 것도 다수이기 때문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어느 지점에선가 제로 상태에서 시작은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운동하고 있는 물체의 운동을 분석하려면 그래프는 중간부터 그려질 수밖에 없다.

등속직선운동의 그래프를 그릴 때면 웃음이 나온다. 시간-속력 그래프 때문이다. 일정한 속력으로 운동하는 상황이니 그래프는 가로축과 나란한 모양이다. 이 때 원점에서는 순간 이동하듯 뜬금없이 특정 속력을 나타내는 점을 찍어야 한다. 정지 상태에서 운동 상태로 변화하는 과정은 깔끔하게 편집된다. 그 구간은 등속이 아니니까. 그래프를 설명할 때마다 단서를 붙인다. 어쨌든 출발해서 이미 등속 운동하는 물체의 어느 한 장면을 분석한 것이라고.

소설 쓰는 행위가 다양한 그래프를 그리는 과정이라면 원점을 시작하는 포인트는 작가의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어디부터를 출발 지점으로 정해 삶의 모습을 드러낼 것인지는 그리는 사람의 몫이니까. 입체적인 삶의 장면을 그래프로 단순화한다는 것 자체가 억지스럽지만 바라보는 시각에서의 장면은 어차피 평면이니. 우리는 평면으로 이루어진 장면 장면을 모자이크로 짜깁기한 모습을 입체로 상상할 뿐이다. 인공위성에서 촬영한 수많은 사진들을 모아서 세계 지도를 완성하는 과정처럼.

 

40편의 짧은 소설을 접하면서 2차원 그래프를 떠올린다. 입체적으로 완성된 깔끔한 모습 이전의, 짜깁기하기 전의 초판본을 본 느낌이랄까. 아이돌을 향한 오십대 아저씨의 팬심, 취업을 못한 청년들이 짊어진 일상의 무게, 기혼 여성의 삶과 공간, 자살을 결심한 사내, SNS 안에 투영된 모습과 현실과의 괴리, 반려 동물의 의미, 가족의 상실로 인한 아픔, 부모와 자식의 관계,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삶에서의 착각, 가장의 역할이 주는 묵직함, 아파트 주민의 이기심, 귀농에의 무모한 도전, 폐교되는 시골 학교, 사회적 강자에 대한 상대적인 비애감, 한국 사회의 자화상 등을 통해 주변의 평범한 삶을 짤막하게 그려냈다. 소설 속 이야기들은 다양하지만 굵직한 테마는 두 가지 정도로 가닥이 잡힌다. 가족과 직업이다.

가족 구성원과의 관계가 그려진 소설들 중 부모님에 관한 것은 특히 자식들이 놓치고 있는 것을 날카롭게 풍자한다. 당신들도 부모님이기 전에 한 명의 인간이었음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부모님께 어떻게 하고 있나, 늦기 전에 더욱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중간 중간에 밀려오는 찡함 위에 얹는다.

직업과 관련된 소설들은 직업을 얻기 위한 청년들의 간절함과 직업을 가졌다 해도 그 고달픔이 자아내는 갈등과 사회적인 장벽을 현실감 있게 그린다. 뉴스에서 종종 접하던 사연들이기에 소설인지 다큐인지 혼동이 될 만큼 씁쓸하다. ‘어찌된 게 이놈의 나라는 한번 눈높이를 낮추면 영원히 그 눈높이에 맞춰 살아야만 했다. (중략) 내 땀과 대기업 다니는 친구들의 땀의 무게가 다른 나라.(p26)’는 먼 나라 이웃 나라가 아니라 바로 내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대학 졸업을 반 학기 남겨둔 딸의 일상은 요즘 숨 막히도록 바쁘다. 학원에서 토익과 오픽 준비를 하느라 근 9시간을 영어 공부에 매달린다. 오늘 오후에는 면접용 정장을 사러 함께 옷 가게에 다녀왔다. 구멍 날 때까지 옷을 입으리라 결심한 엄마의 옷장에는 정장 비스무리한 것도 없기에. 50%, 80% 할인된 가격이 그 가격이라니! 이거 할인된 가격인가요? 몇 번이나 묻는다. 36만 원짜리 세트는 핏도 좋고 가볍지만 가격이 마음에 안 들고, 22만 원짜리는 가격은 마음에 들지만 다소 무거운 모양이다. 결국 36만 원짜리로 낙찰을 본다. 딸아이가 매장을 나오면서 미안한 표정으로 말한다. “에휴! 돈을 벌기 위해 돈을 써야 한다니!” 옷이 문제가 아니라 치열한 취업의 문을 향해 걸어갈 딸내미를 생각하니 안쓰럽고 짠하다. 소설 속 인물의 갈등과 비애가 남의 일 같지가 않다. 한여름, 은행에서 볼 일을 본 후 문을 열고나올 때 확 끼얹어지는 열기처럼 현실이 피부에 직접 와 닿는 느낌이다.

 

웃음이 잔뜩 담긴 소설일 줄 알았다.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는 제목 역시 뚝 떼어놓고 볼 때에는 오리털 패딩의 모자 털처럼 가뿐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겉표지를 열고 들어가니 의미는 180도 달랐다.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과 땀에서 배우라는 말, 그 말들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점점 무표정하게 변해갔고, 결국은 지금 준수가 짓고 있는 저 표정, 그것이 평상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웬만하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p26)’ 수많은 좌절과 삶에 대한 쓰라림으로 굳은살처럼 되어버린 표정이었다. 내 아이가 가까운 미래에 이런 표정을 짓게 될까봐 나는 이 문장이 무서웠다. 아무렇지 않은 듯 살다가 커다란 고통조차 감각할 수 없는 3도 화상을 입을까봐 두렵다.

책 표지의 그림이 <아파트먼트 세르파>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표지를 보는 것조차 편하지 않았다. 마음 아프지만 아주 적절한 표현이었다. 배달원들의 엘리베이터 이용을 금지시키는 아파트 주민들의 이기심은  아파트에 사니까 아파트만 생각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p143)’라는 답변으로 설명된다. 마음이 차갑고 높고 딱딱한 건물로 화석화되어버린 걸까.

 

소설들의 초반부를 읽을 때에는 뭐 이런 마무리가 있나 싶었다. 쭉 걸어가다 뜬금없이 낭떠러지에 도달한 기분, 도착 지점이 없는 듯해서 찜찜했다. 개운한 카타르시스도 없고 웃기다고 하기도 애매했고, 마냥 슬프지도 않았다. 최규석의 만화 울기엔 좀 애매한이 연상되었다. 그런데, 후반부의 한 문장을 읽는 순간 뭔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쩐지 자신이 원고지가 아닌 삶 속에서 소설을 쓰고 있는 기분이었다네.(p211)’ 삶 자체가 애매한 대상이므로 그 단편을 담은 소설 역시 애매할 수밖에 없다. 깔끔한 마무리가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삶은 지금 이 순간도 나를, 주변 사람들을 통과한다. 그것은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소설이란 삶의 이야기를 중간에 잘라내어 옮기는 작업이니 시작도, 마무리도 어쩐지 어정쩡한 모습인지도 모른다. 소설가란 그가 생각한 시점을 원점으로 하여 끝없이 이어지는 삶의 중간 즈음에 그래프 그리기를 멈출 수밖에 없다. 다만 앞으로 그려질 누군가의 소설 속 그래프의 선은 보다 부드럽고 촉촉했으면 좋겠다. 낮은 곳에 있는 삶이 그대로 투영되는 소설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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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진 옷장을 정리하며 - 힘들고 아픈 나를 위한 치유의 심리학
게오르크 피퍼 지음, 유영미 옮김 / 부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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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에 불이 났다. 운동장으로 대피했다가 연기가 너무 많아지자 인근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장 가까이에서 불을 접했던 기억이다. 불이 시작되었다는 화학실 쪽을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다. 영문도 모른 채 얼떨결에 운동장으로 우르르 몰려나갔다. 시뻘건 불꽃은 보이지도 않았다. 불이 나면 잿빛 연기가 엄청나게 많이 난다는 것을 그때 절감했다. 우리들을 대피시키시던 가정선생님의 얼굴도 생각난다. 임신하셔서 배가 많이 부르셨는데. 소방차가 뿌린 물은 생각보다 많아서 화재가 진압된 후 교실로 복귀하러 올라가던 언덕길에는 장마 진 것처럼 물이 콸콸 흘렀다.

몇 달 동안 중앙 현관의 안쪽 공간이 교무실이 되었고 교실이 불탄 이과 반 선배들은 강당에 조립식 칸막이를 치고 수업을 받았다. 64일이었다. 날짜가 잊히지 않는 것을 보면 머릿속에 강하게 새겨진 날이긴 한데 마음의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누구도 다치거나 죽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날의 기억은 나와는 무관하다고 여겨왔던 일이 순식간에 닥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주었을 뿐이다.

 

비교적 가벼운 트라우마는 개에 대한 기억이다. 개를 키울 수 없는 이유는 개털이 날려서도, 목욕을 시키거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도 아니다. 무서워서다.

어릴 때 세 들어 살던 주인집에서는 개를 키웠다. 어느 날 개집과 건물 벽 사이에 개가 들어가 앉아있었다. 무언가를 먹고 있었던 것 같다. 그 개를 쓰다듬고 싶었던 걸까. 어쨌든 나는 개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 때 새끼손가락을 물렸다.

개를 무서워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 후로는 아무리 앙증맞은 강아지라도 손을 뻗을 수 없었다. 개만 보면 몸이 과도하게 소스라치는 반응을 보였다. ‘몸은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늘 피드백을 해준다.(p27)’는 말이 맞았다. 몸이 개 때문에 놀랐던 기억을 끌어내고 먼저 반응했다.

몇 년 전에야 가까스로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친구가 머리와 다리를 붙들고 있는 동안 두어 번 만져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부드러운 감촉에 놀랐다. 개에 대한 트라우마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머리를 쓰다듬어본 이후로는 두려움이 많이 줄었다.

 

트라우마라고 여길만한 기억은 중학교 3학년의 수요일 오후에 겪은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내게 일어났던 일은 아주 많이 놀랐다는 것뿐이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8년 가까이 묵직하게 가라앉아있다 때때로 나에게 작용했던 것 같다. 알약을 먹고 나서 한참 지난 후에야 약효가 퍼지는 것처럼 느리게 영향을 미치던 트라우마였다. 원인도 모른 채 특정 상황에 과민해지던 이유를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동네 초등학교 옆길을 지나치는데 차를 탄 아저씨가 나를 불러 세웠다. “학생! ***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지?” 친절하게 설명해드렸다. “잘 모르겠는데 잠깐 같이 타고 가면서 설명해줄 수 있을까?” 같이 차를 타고 가면서 아저씨가 중간에 한 번 내려서 어딘가로 전화를 할 때에도, 인적이 드문 도심의 천변으로 갈 때까지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때까지의 나는 인간에 대한 신뢰감이 바보스럽게 컸다.

가는 장소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아저씨는 갑자기 차를 세웠다. 조수석의 의자를 뒤로 젖혔다.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지고 있던 검은색의 둥그런 보온 도시락 통을 품에 꼭 안았다. 아저씨는 내게서 그 도시락 통을 내려놓으려고 했다. 그게 방탄조끼라도 되는 듯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아저씨가 눈을 감으라고 화를 냈던 것 같은데 이 부분은 확실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중간 중간 암전이 되는 것처럼 기억이 조각나있기 때문이다. 눈앞 1cm 직전까지 다가왔던 아저씨의 얼굴만 선명하다. 눈을 더욱 크게 뜨고 왜 그러시느냐고 말하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느 순간 아저씨가 행동을 멈추었다. 잠시 운전석에 앉아있더니 밖으로 나가서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차 밖을 몇 번 왔다 갔다 하더니 다시 차 안으로 들어왔다. 한숨을 푹 쉬더니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눴던 얘기는 뜬금없게도 진로에 관한 것이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문과를 택할지 이과를 택할지 고민이라며 아저씨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청주에 사는 24살의 문과를 택했다던 남자였다. 16세의 나는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집에 갈 때까지 나를 보호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차에서 내리는 나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던 아저씨의 마지막 말이 기억난다.

심리적인 시간 감각이었던 걸까.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었다. 처음 차를 탔던 장소에서 내렸다. 집까지 어떻게 걸어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식구들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특별활동이 늦게 끝났다고 거짓말을 했다. 엄마의 음성이 다른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높은 산에 올라간 것처럼 귀가 멍했다. 내 목소리가 TV 속 영화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윙윙 울렸다. 그날의 느낌은 몇 년 동안 종종 생생한 느낌으로 떠올랐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깨진 것은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던 몇 년 동안 느끼지 못하는 사이 남자에 대한 경계심이 생겼다.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누군가 다가오는 것에 대하여 과민 반응을 보였다. “너는 스스럼이 없는 것 같아도 어느 정도 가까워지려고 하면 벽이 느껴져.” 대학교 때 같은 과 남자애가 말했다.

커가면서 그것이 일종의 트라우마로 인한 반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아무 일도 없던 일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도. 내 자신이 순진하다 못해 얼마나 바보스러웠던 지도. 객관적으로 판단해보면 성폭행이나 인신매매나 죽음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던 일이었다. 그 때만 생각하면 종종 아찔했다. 어떤 의도로 나를 차에 태웠는지, 무엇이 그 아저씨의 행동을 멈추게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나를 멀쩡히 돌려보냈던 것을 보면 생각보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극적인 경험은 아니었지만 생각해보면 그럴 뻔한 일이었다. 몇 년 동안 계속되던 트라우마는 8년 쯤 지나 그날을 밖으로 꺼내어 가까운 이에게 털어놓은 이후부터 서서히 극복되기 시작했다. 그것도 가장 불신하던 남자라는 존재에게. 역시 사랑은 위대했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일은 극복이 가능하다.(p120)’라 했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에 공감한다. 말로 표현을 하자 놀라울 정도로 무게감이 줄어들었다. 이제껏 미련하게 이 일을 왜 안고 힘들어했나 싶을 정도로 별거 아닌 일로 보여서 억울한 마음까지 들었다. ‘우리를 압박하고 힘들게 하는 모든 상황은 근본적인 수용을 통해서만 제어가 가능하다. 그것을 통해서만 견딜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출구를 찾을 수 있다.(p90)’ 그날에 대한 말을 하면서 그 일을, 그 안에 있던 인물들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객관적인 거리감이 이성적인 판단력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길을 찾아갔던 것 같다. 저자의 말처럼 누구에게나 회복 탄력성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것은 생존에 대한 강한 본능에 속하는 영역인 걸까.

 

위기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 준다. 평범한 일상에서 때때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직시한다면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p283)’ 오랫동안 남자에 대한 불신과 스킨십에 대한 두려움으로 힘들었지만 그날의 트라우마는 나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해 가족을 못 볼 수도 있었겠다 싶은 생각이 들자 그렇게도 춥던 집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로 곤충의 탈피가 일어나 듯 훌쩍 컸다. 가족이 소중해졌고 가난하지만 내가 살던 공간의 소중함도 깨달았다.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매순간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되었다. 마지막 순간 나를 돌려보내주었던 20대 청년의 근본적인 양심을 생각하면 그래도 마지막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인 것 같기도 하고. 그 날 쏟아졌던 옷장은 이렇게 느리면서도 차곡차곡 정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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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2-18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라우마에 대한 불쾌한 기억이 너무 많으면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회복 탄력성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해요. 트라우마를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감정 상태‘로 받아들이는 고정관념을 먼저 버려야해요. 그러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대로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나비종 2018-02-18 08:03   좋아요 0 | URL
독일 사람이 쓴 책이지만 실증적인 예를 들어가면서 트라우마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극복 방법을 상세하게 적어놓았더라구요.
cyrus님께서 하신 말씀도 책에 있었습니다. 공감했던 내용이었구요.^^
 
무엇이든 쓰게 된다 - 소설가 김중혁의 창작의 비밀
김중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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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을 때마다 망설인다. 독후감을 쓰거나 시를 짓거나 일상을 산문으로 표현할 때마다 종종 갖게 되는 마음이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빈 오선지로 흘러가는 시간 위에 나의 글을 한 편 두 편 음표로 그려 넣는 일이 어떤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걸까. 글쓰기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있을까.

 

활자화되어 회자되는 글이 아닌지라 내가 글을 잘 쓰는 건지, 인터넷 서재에 올린 나의 글을 읽는 소수의 사람들은 어떤 느낌을 받을까에 대한 궁금함이 늘 있다. 이 정도면 최악은 아니야, 나쁘지는 않아 라고 스스로 다독이며 여기까지 왔다. 그래서 찡했다. ‘예술가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자신의 작품을 참고 견디는 사람’(p143) 이라는 문장을 보는 순간이. 전공과는 동떨어져 제대로 된 기본 형식도 갖추지 못한 글을 쓰고 있는 내게 이 책 안에 적힌 많은 문장들이 격려의 말을 건네주었다.

 

톡톡 튀는 김중혁만의 유머러스한 문장들이 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떠올리지? 감탄이 나오는 기발함이 많다. 하지만 이 책이 보다 의미 있게 다가온 것은 서툴게나마 나의 글을 쓰는 어깨를 따스한 안마로 토닥여주는 문장들 때문이었다. 마음 한 구석 가끔 지치는 나에게 계속 걸어가도 괜찮다며 속삭이는 듯한. ‘시간이 쌓이면 언젠가는 잘하게 될 테니’(p5) ‘세상에서 오직 나 혼자만 아는 이야기’(p60)리드미컬한 글’(p113)로 써보라고 한다. ‘특별할 필요가 없다. 오래 하다 보면 특별해진다.’(p286), ‘우리의 임무는 세상을 정리정돈 하는 게 아니다. 더 어지럽게, 더 헝클어뜨려서 더 많은 것들이 생겨나게 하는 것’(p188)이라며.

 

<Intro>에서 관찰의 중요성을 말한 저자의 생각에 공감한다. 리뷰를 쓰고, 시와 글을 쓰면서 나에게 생긴 가장 큰 변화는 관찰력이 길러진 점이었다. ‘남들과 똑같은 걸 보지만 결국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봐야 한다. (중략) 다른 곳에서 봐야 하고, 더 오래 봐야 하고, 더 많이 움직이며 봐야 한다. (중략) 너무 빨리 보지 않고, 천천히 봐야 이해할 수 있다.’(p10~11)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고 일상과 사물의 미세한 모습을 관찰했다. 움직이지 않는 것 같은 대상을 관찰하니 현미경으로 플랑크톤을 들여다보듯 꿈틀거렸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조차 내지 못하는 존재를 관찰하니 망원경으로 은하수를 들여다보는 듯 숨 막히는 별들이 안개꽃처럼 펼쳐졌다. 세상은 좀 더 섬세했고, 무수히 많은 색채들로 채도를 달리하며 존재했다. 삶이 이전보다 풍성해졌다.

 

글을 쓰다 보니 내안에서 얼어붙은 화석으로 가라앉아 있던 감정들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분리시키는 일이고, ‘나를 바라보는 나가 대화하는 일’(p136)이었다. 내가 쓴 글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무언가를 만드는 일은, 현실을 껴안는 일’(p285)이었다. 글을 통해 현재의 나를 힘차게 껴안을 수 있었다. ‘글을 쓰는 일은 좌표를 찍는 일이랑 비슷하니까,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일’(p23)이라는 말처럼, 글을 쓰면서 나의 삶에 선명한 점들을 찍어 나갔다. 부유하며 떠도는 듯 종종 방황하던 내게 그건 매우 의미 깊은 일이었다.

 

올해 목표 중 하나로 매일 글쓰기를 정했다. 오늘이 211일이니 42일째다. 정전기로 빗에 들어붙는 머리카락처럼 나태함이 슬금슬금 들러붙는 순간마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일임을 느끼지만 아직까지는 11글이 지켜지고 있다. 매일 글을 쓰다 보니 삶이 촘촘해지고 때론 느슨해지고 말랑말랑해진다. 시나 산문이나 독후감이나 뭐를 쓰든 삶의 모습이 반영되어야 하기에 평범한 눈으로 모든 순간들을 무심코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글쓰기는 나의 삶을 조금씩 변화시켰다.

이 책을 읽고 힘을 얻는다. 무엇이든 쓰게 된다는 책 제목은 무엇이든 쓰면 된다는 말을 담고 있다. 그래서 좀 더 씩씩하게 써보려 한다. 한없이 초라해 보이는 글을 올릴 때에는 지금처럼 엔터키 위에 있는 손가락이 차마 내려앉지 못하고 어정쩡한 대기 모드가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엔터키를 눌러보려 한다. 이렇게 쓰다 보면 어딘가로 갈 수 있겠지, 무엇이든 변화하겠지, 삶을 꼭꼭 씹다보면 무슨 맛이든 나겠지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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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1 2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비종 2018-02-11 22:31   좋아요 1 | URL
피로 회복을 시켜주는 비타민 C 같은 책이었습니다.^^

cyrus 2018-02-12 14: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쓰기를 ‘나‘를 제대로 보는 방식과 같은 의미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이게 꼭 좋은 점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타인이 내 글을 어떻게 보는지 살피는 것도 중요해요. 타인이 내 글을 보면서 생각하는 것도 나 자신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됩니다. 타인이 내 글을 보지 않는다면 내가 타인의 글을 보면 됩니다. 그런데 ‘나를 바라보기 위한 글쓰기‘에 지나치게 몰두해서 나 이외의 글을 외면할 수 있어요. 여기 북플에는 글 쓰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요. ‘나를 바라보는 글‘을 쓰는 사람은 많아요. 하지만 ‘타인이 나를 바라보면서 쓴 글‘은 보지 않으려고 해요. 그 글이 자신을 향한 비난의 화살처럼 느껴지니까요.

나비종 2018-02-13 00:19   좋아요 1 | URL
나를 바라보는 글쓰기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는 거라 생각합니다. 타인이 나를 바라보면서 쓰는 글은 그보다 먼 거리와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이구요. 이 때 타인의 글이 내게로 향한 비난으로 느껴지는 건 ‘다름‘과 ‘틀림‘에 대한 혼돈에서 비롯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다른 관점에서 그대의 옆 모습은 이렇습니다 얘기해주는 것일 뿐인데, 거울 속에서 정면만을 보아왔던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습과 다른 말을 해주니 스스로 틀린 건가 생각하게 되는 거죠.
저는 다름을 틀림으로 자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기저에는 낮은 자존감이 자리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시야가 좁아지고 마음이 쪼그라들어 나를 조금만 건드려도 움찔하며 쉽게 상처받기 때문이 아닌가 하구요.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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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만의 일타삼피로 포털 메인 화면까지 바뀌었다. 지구와 가까워져 14% 더 크게 30% 더 밝게 보이는 슈퍼문, 한 달에 뜨는 두 번째 보름달 블루문, 붉은 색으로 보이는 개기월식 블러드문. 2018131일 오늘밤 일어난다는 천문 현상이다. 수도꼭지의 냉수와 온수 표식처럼 블루와 블러드는 정반대의 색깔을 상징한다. 실질적으로 달은 붉은 빛으로 보이겠지만, 보이는 것과 상징하는 것이 합치되는 데다 커다랗고 밝기까지 하니 사뭇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지금 내 머릿속과 비슷하다는 생각에 잠시 웃는다. 정반대의 개념이 마구 들어가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상황이랄까.

 

묘한 느낌을 주는 책이다. 커다란 양팔 저울이 머릿속에 들어앉은 기분이다. 정반대 개념들이 양쪽 접시에 가득 들어앉아 균형을 이룰만한 무게감으로 영점을 오락가락한다. 혼란이라고 표현하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평정심을 갖게 된 것도 아니다. 깊은 바다 속을 밑바닥까지 내려갔다 올 수 있다면 이런 느낌이 들까? 해수는 깊이에 따른 수온 분포를 기준으로 혼합층, 수온약층, 심해층으로 나뉜다. 혼합층은 태양 복사 에너지의 영향으로 가장 온도가 높으면서 바람으로 인하여 물이 섞이기 때문에 수온이 일정하다. 중간에 있는 수온약층은 수온이 갑자기 도약하듯 낮아지는 층이며, 빛도 도달하지 않고 일정한 온도의 고요를 간직한 층이 심해층이다. 내 사유의 깊이는 지극히 얕은 혼합층이었는데, 수온약층을 지나 가장 묵직한 심해층을 마주하고 온 기분이다.

 

정반대의 출발은 책의 두께로부터 시작한다. 본문만 124, 옮긴이의 말까지 확장해도 고작 142쪽이다. 하루 정도면 가뿐히 읽을 줄 알았다. 그런데 첫 장부터 만만치 않다. 마지막 장을 덮는 데 일주일 걸렸다. 주인공을 따라 신화작인 인물들, 고대 그리스의 건축 양식, 작가와 철학자, 이와 관련된 일화를 지나오면서 나의 삶이 좀 더 풍족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몰랐던 인물을 새롭게 알게 되었고, 이름을 알았다 해도 왜 이 시점에서 이 인물이 언급되었을까 궁금하여 검색을 하다 보니 더욱 걸음이 느려졌다. 글자를 읽은 시간보다 의미를 곱씹은 시간이 훨씬 길었다. ‘태양만이 흑점을 지닐 권리가 있다.(p7)’ 라 말했다는 괴테의 단 한 줄부터 몇 십 분이 걸렸다. 마음에 방점이 찍힌 부분은 흑점권리이다. 흑점을 지니는 것이 권리라니! 흑점에 의미를 부여하니 이토록 묵직할 수가 없는 거다. 강한 자기장이 형성되어 있는 곳, 태양 중심으로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열을 차단하여 상대적으로 주변보다 검게 보이는, 실제로는 4,500도의 온도를 지닌 뜨거운 방패이다. 삶의 뜨거운 어둠을 간직하려면 자신을 태워서 주변을 밝히는 태양 정도나 되어야 한다는 말로 해석했다.

 

제목 앞에서도 한참을 서성였다.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p18)’ 여러 가지 생각들이 가득한 상황을 묘사하는 이 문장을 보니 시끄럽다고 표현한 제목이 이해된다.

1인칭 시점에서 삼십오 년째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해온 한탸의 삶을 담담하게 그렸다. 처음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정반대의 개념이 겹쳐진 순간들을 수없이 만났다. 그 문턱마다 쉼표를 찍어가며 의미를 곱씹었다.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하면서 파괴 행위에 깃든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시작했다.(p23)’ 했을 때, ‘글을 쓸 줄 안다면, 사람들의 지극한 불행과 지극한 행복에 대한 책을 쓰겠다.(p12)’ 했을 때, ‘시궁창을 철벅이며 걷다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면 이제껏 한 번도 보거나 깨닫지 못했던 것이 불쑥 시야에 들어온다.(p38)’ 했을 때, 4장에서 예수를 미래로의 전진으로 노자를 근원으로의 후퇴로 비교했을 때, ‘프로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근원으로의 전진)과 레그레수스 아드 푸투룸(미래로의 후퇴)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이제야 깨닫기 시작한다.(p70)’ 했을 때, 폐지 압축기를 작동시키는 녹색 버튼과 붉은색 버튼으로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면서 이것이 세상의 기본적인 움직임(p44)’ 이라 했을 때, 6장에서 괴물 같은 거대 압축기를 작동시키면서 책을 함부로 대하는 젊은이들을 보며 무엇보다 그들이 낀 장갑에 나는 모욕을 느꼈다. 종이의 감촉을 더 잘 느끼고 두 손 가득 음미하기 위해 나는 절대로 장갑을 끼지 않았으니까.(p89)’ 라 했을 때.

 

종이로 된 책의 의미를 생각한다. 전자책보다는 종이 냄새가 나는 책을 좋아한다. 주인공처럼 종이의 감촉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종이의 근원을 생각하면 망설여지는 느낌이 있다. 종이는 나무를 재료로 만들어졌으니 종이책을 만들려면 그만큼 나무의 생명을 파괴해야 한다는 점이 생각나서이다. 자주 가는 커피숍 화장실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화장지 하루 한 장을 아끼면 일 년에 나무 한 그루를 살릴 수 있다는. 나무의 죽음으로 책이 생명력을 가지게 되니, 먹이사슬처럼 여겨야 하는 걸까. 세상은 이렇게 정반대의 작용들로 채워져 있는 지도 모르겠다.

 

작가에게 삶의 의미는 어떠했을까. 마지막 8장에서 앞서 나온 정반대의 개념들이 중첩되는 결론을 발견한다. ‘전진이 곧 후퇴인 셈이지.(p119)’ 라 생각한 주인공이 스스로 선택한 죽음의 순간에 들고 있던 책은 의미가 깊다. 삶과 죽음의 일체를 말하며 과거 지향적인 예언자로 불리던, 낭만파를 가장 순수하게 표현했다는 독일의 시인 노발리스의 책. 인터넷 자료로 그를 찾아보며 자연스레 주인공의 삶과 죽음을 떠올린다. 전진을 의미하는 녹색 버튼을 누르며 삼십오 년 동안 애착을 갖고 일하던 폐지 압축기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은 먹먹한 장엄함으로 물컹하다. 책 속에 등장하는 개념인 프로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 근원으로의 전진이다.

인간의 몸은 모래시계라는 생각이 든다. 위에 있던 것이 밑으로 가고 밑에 있던 것이 위로 가며, 두 개의 삼각형이 서로 통한다.(p124)’ 라는 말을 다시 음미한다. 모래시계를 계속 작동시키려면 손으로 직접 들어 방향을 바꾸어주어야 한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여 전진하거나 후퇴하듯이. 나는 이 모래시계라는 말이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은 그 무엇도 나를 내 지하실에서 몰아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자리를 바꾸게 할 수 없을 것이다.(p131)’ 라 독백하며 인간의 탄생 직전, 자궁에서 웅크린 생명의 자세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 순간은 죽음과 삶이 중첩되는, 지극한 불행인 동시에 지극한 행복이었을, 모래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바로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프라하의 봄이후 이십여 년 간 출판이 금지되었어도 끝내 조국을 떠나지 않고 체코어로 작품을 썼다는 작가. 책의 저작권에 대한 설명을 보니 1980년이다. 40여 년 전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뭉클한 깊이감을 주다니! 고전의 가치가 이런 것이구나 싶다.

저자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한다.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려다 5층 창문에서 떨어져 사망했다는. 주인공 한탸의 죽음이 다시 떠오른다. 작가의 죽음, 그것은 지극한 불행이었을까 지극한 행복이었을까. 문득 그의 죽음 역시 삶과 겹쳐지는 상황이라는 스친다. 자유를 상징하는 비둘기의 삶을 위해 죽음을 맞이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감히 지극한 행복이라 표현해도 되지 않을까.

 

슈퍼 블루 블러드문. 내 일생에 다시 오지 않을 지도 모를 천문현상이 일어나는 날이다. 1월의 마지막 날, 삶과 죽음의 의미가 깊게 담긴 책에 대한 느낌을 정리한다는 사실이 뭉클하면서 묘하다. 다시 모래시계를 돌리며 출발하는 절묘한 순간이 시작되는 느낌이랄까. 이 얇은 책이 담고 있는 심해를 갓 빠져나와 새로 호흡하는 기분으로 달을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p51 1째 줄, 같은 해 같은 날 태어난 셸링과 헤겔 셸링은 17751월에, 헤겔은 17708월에 태어났다던데...

p51 마지막 줄, 중성자와 양자 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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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1주년 한정 리커버 특별판) - 나, 타인, 세계를 이어주는 40가지 눈부신 이야기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7년 12월
평점 :
품절


필통 크기 만한 방망이로 직접 밀어서 만드는 만두피, 노트만큼 펼쳐진 밀가루를 찹찹 접어서 나무로 된 도마 위에서 써는 손칼국수의 면발, 양재기에 직접 쑤는 청포묵, 엿기름으로 만드는 식혜, 하루 왼종일 고아서 말간 국물이 우러나는 사골 국물, 시커멓고 찐득찐득한 껍질을 직접 벗겨서 방망이로 두드린 다음 쭉쭉 찢어서 양념장에 버무린 더덕무침. 당신에게 요리란 천연 재료로부터 출발하여 거의 모든 과정을 손으로 만들어 완성하는 과정이었다.

어머님의 세계는 달랐다. 슈퍼마켓 진열장에서 출발하며 비닐봉지를 뜯고 가열만 하면 바로 끝나는 내 세상과는 아주 많이. 결혼 후 많은 기간 동안 그 다름을 틀렸다고 생각했다. 이해할 수 없어 속으로 투덜댔다. 몇 시간이나 걸쳐 노동을 한 결과물이 허무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수학적으로 계산하면 늘 마이너스가 나왔다. 그냥 편하게 사먹으면 될 걸 힘들게 왜 저러실까, 금전적으로도 별반 차이도 없는데. 오히려 돈이 더 들어가는 경우를 종종 바라보면 답답했다.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다고들 한다. ‘이해의 앞에는 언제나 체험이 있다.(p178)’ 달라도 너무 달랐던 당신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는 20여년의 시행착오가 담긴 시간이 필요했던 거다. 10년 전 아니, 5년 전까지만 해도 당신을 소재로 글을 쓰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한 적이 없다.

뻑뻑했던 관계가 부드러워지기 시작한 시점은 작년이었다. 조계사에서 화쟁 사상을 주제로 한 독후감 공모를 주최했는데, 담론(신영복, 돌베개, 2015.4.)을 읽은 후 독후감을 보냈더랬다. 관계가 주제였기에 당시 가장 불편했던 어머님과의 관계를 글로 풀어갈 수밖에 없었다.

놀라운 변화는 그 후에 일어났다. 언행불일치의 삶을 적잖이 살아왔지만, 적어도 세상에 발표한 글과 너무 이질적인 삶을 이어간다는 건 양심에 찔렸다. 당신과의 관계가 서서히 풀려가는 시기였지만, 객관적으로 정돈된 이야기가 글로 나오자 그 속도는 급격하게 빨라졌다. 적절히 달궈진 프라이팬처럼 관계 위에 얹는 에피소드마다 알맞게 익어갔다. ‘이야기는 도구다. 그것은 세계와 나를 이어준다.(p144)’ 이야기는 세계뿐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도 이어주었다. 당신과의 이야기가 당신과 나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이어주었다. 스스로도 당황스러운 변화였다. 그 후로 어머님은 지금처럼 종종 내 글의 소재가 되어 주셨다.

 

관계의 해동기에 이 책을 만난 건 차라리 행운이었다. 결정적인 한 방이랄까. 장르별로 책을 꽂을 수 있는 깔끔한 책장을 만난 느낌이었다. 채사장의 글을 따라가면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깔끔하게 정리해서 꽂을 수 있었다. 네가 이런 생각을 한 건 이것 때문이고, 그럴 때 이랬던 건 이래서야 하며 체계적으로 요점 정리를 해준 책이었다. 그의 풀이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말과 글은 간결해도 충분하다. 꾸미거나 덧붙일 필요가 없다. 수식어를 걷어내고 정갈하게 정돈된 언어를 정확히 구사한다면 인위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나의 언어는 타인의 가슴에 강렬하게 박힌다.(p172)’ 그의 글이 그랬다.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간결한 문체로 핵심을 찔렀다. 미사여구 하나 없이 깔끔한 느낌이 철학적인 시를 읽는 것 같았다. 인문학 장르로 분류되어있지만 철학적인 내용이 다분히 많았다. 스피노자나 니체의 철학처럼 채사장의 철학이랄까. 나를 중심으로 존재하는 타인과 세계, 그들과 나를 이어주는 도구로써의 이야기, 이 모든 것들을 통찰하여 결론처럼 맺어주는 의미론적인 고찰에는 삶과 죽음과 관계가 담겨있었다. 그의 관점은 신선했고 이제껏 생각해보지 않은 방향에서 나와 타인과 세계를 바라보게 해주었다.

 

나의 세계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 문장을 만났다. 처음 접한 순간 강하게 나를 흔들더니 마지막 책장을 덮고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상에서 여진이 되어 불쑥 불쑥 튀어나왔다. ‘우리는 각자의 세계 속을 살아간다. 당신과 나는 서로 다른 세계를 걷고 있다.(p32)’ 이 문장을 보는 순간 어머님 생각이 났다. 당신과 나는 다른 세계를 살고 있었다. 관계를 이해하는 데 이보다 더 적절한 생각이 있을까. 서로 다른 세계라니! 손으로 밥을 먹는 나라에서 숟가락을 안 쓴다고 뭐라고 할 것이 아니며, 우리나라에서 왜 포크로 밥을 안 먹느냐며 말하는 것은 누가 봐도 우습다. 각 나라의 식생활에 맞는 적절한 문화가 있으니까. 다른 세계에 계신 당신을 내게로 끌어와 왜 그리 하실까 여긴다는 건 억지스러운 생각이었다. 아무리 해도 이해가 되지 않던 건 당연했다.

 

방앗간 이야기, 아파트 경비 아저씨 이야기, 4층 사시는 할머니 이야기, 정년퇴직한 그 집의 할아버지 이야기, 말을 잘 옮기시는 경로당 할머니 이야기, 큰 길 건너 토마토 장수 이야기, 아파트 수요 장터의 견과류 파는 아주머니 이야기, 마트 계산대의 친절한 아주머니 이야기. 어머님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이야기를 요즘 들어 자주 말씀하신다. 덕분에 나는 얼굴도 모르는 분들의 일상과 성격과 에피소드까지 알게 되었다.

어떤 이는 현재에 살지만 다른 이는 과거에 살고, 또 다른 이는 미래에 산다.(p99)’ 한 때 나는 과거에 살았다. 무채색으로 기억되는 30대에는 예전에 좋았던 시절을 자주 회상했다.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를 끌어와 암담하게 재단하며 아득한 미래를 살기도 했다. ‘당신이 보아야 할 것은 보이지 않는 어딘가의 목표점이 아니라 지금 딛고 서 있는 그 들판이다.(p85)’ 어머님은 늘 현재의 풍경을 말씀하신다. 들판을 바라보시는 당신의 모습을 상상하니 은근히 미소가 지어진다. 관계가 부드러워지니 나도 당신의 따라쟁이가 된다. 무거운 과거를 내려놓고, 미래도 굳이 가져오지 않고 현재만 생각하니까 너무도 가뿐한 것이. 지금 이 순간이 편하고 행복하다.

옷 살 돈으로 책 산다며 지금 입고 있는 옷을 구멍 날 때까지 입기로 생각하니까 언니가 가끔 예쁜 옷을 물려주는 선물 같은 일이 일어났다. 늘 직진만 하며 걷던 삶의 방식이 점차 바뀌어갔다. 주변 사람들과 세상을 많이 둘러보게 되었다. ‘길가를 둘러보며 여유 있게 걷는다는 것. 그것은 한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가기 위해 신중히 걷는 것이다.(p84)’ 이 문장을 보니 힘이 났다.

 

예전에는 별 느낌이 없었는데 요즘 들어 점점 연세 드신다는 사실이 진하게 다가온다. 짠 하는 마음과 함께. 나와는 딱 30년 차이, 올해 그냥 나이로 여든 되신다. 나이 들어 너무 오래 살면 자식들 고생시킨다며 그러지 않기를 바라신다는 말씀을 종종 하신다. 아직 못 들은 이야기도 많은데, 그 많은 음식에 깃든 노하우도 전수받지 못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자 멀미를 하듯 울렁거린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읽어서였을까. 다음 문장을 읽는 순간 울컥한다. ‘그곳에는 그의 세계가 남겨놓은 시간과 이야기와 성숙과 이해가 조개껍질이 되어 모래사장을 보석처럼 빛나게 하고 있을 테니.(p34)’

 

모든 보는 존재는 충분하고 완벽한 세계를 자기 내면으로 갖고 있고, 그 내면의 빛은 그 존재를 부족함 없이 사로잡는다.(p241)’ 나와 다르다 하여 틀리다 여기면 안 되는 것이었다. 당신과 공유한 시간 속에서 나는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음식을 먹어왔던 거다. 어머님의 세계는 완벽한 핸드메이드 월드였다.

아담한 초가집. 방금 비질을 한 너른 마당이 있고 온돌방 이불 속에는 메주가 띄워져 있는, 볕 좋은 마당 한편에는 장닭 몇 마리가 바닥을 콕콕 찍고, 빨랫줄에 널린 광목천이 바람결 따라 흔들리는, 마당 중앙에는 빠알간 고추가 한 층으로 펼쳐져 있는. 당신 안에 펼쳐진 세계는 이런 이미지일까. 인공의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MSG적인 풍경 하나 없이 담백한 두부 맛이 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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