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편의점 2 (단풍 에디션) 불편한 편의점 2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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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글자들의 숲이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모여 숲을 이루듯 의미를 지닌 글자들이 무성해지면 거대한 숲이 된다. 숲이 살아있는 생명체들의 집합인 것처럼, 숲을 이룬 책은 생명체처럼 기능한다. 어떤 이에게는 지저귀는 새로, 곧게 뻗은 나무로, 살랑살랑 흔들리는 풀잎으로, 꾸준히 꿀을 실어 나르는 꿀벌로 다가온다.

어떤 책은 그림 같다. 음악 같은 책도, 음식 같은 책도 있다. 우리의 시각과 청각, 미각과 후각, 피부 감각을 자극하며 의미를 전달한다. 이런 이유로 책은 감각적인 생명체다. 무생물인 종이에 실린 글자가 펼쳐지는 순간, 독자들에게 서서히 스며 들어가 숨을 쉰다.

 

불편한 편의점2는 피부 감각을 자극하는 소설이다. 편의점 온장고 속 호빵처럼 소박하게 따스하다. 등장인물들은 한결같이 나름의 이유로 한겨울을 지나는 중이다. 그 안에 호빵 같은 주인공이 그들 마음속의 허기를 채워주며 두 손에 온기를 나누어준다.

전편처럼 시트콤 같은 구성을 보인다. 시놉시스를 연상케 하는 문장을 따라가면 머릿속에는 동영상이 재생된다. 등장인물들의 목소리와 공간적 배경과 이야기가 음악 소리 들리는 산타 할아버지 입체 카드처럼 생생하다. 인물, 사건, 배경 모두가 살아있다. 현실에서 마주칠 법한 이야기, 다큐스러우면서 그 안에 담긴 온기가 나는 좋다.

 

점장 오선숙을 시작으로 익숙한 캐릭터가 문을 열고 새로운 등장인물들이 한 명씩 에피소드의 주인공이 된다. 소설 중간에는 본격적으로 주인공의 서사가 등장하여 그를 중심으로 인물 사이의 연결 고리가 드러난다. 하나도 버릴 것 없이 긴밀하게 엮인다. 캐논변주곡처럼 전편의 익숙한 멜로디에 약간의 변주를 준다. 지루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속편으로 연결된다.

김호연 클라스는 독보적이다. 2편에서도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인물의 서사에 궁금증을 유발하여 이야기를 끌어가는 흡인력은 여전하다. 전편과의 차이점은 시대적 배경의 비중이 커지고, 점장과 정육식당 사장과 편의점 주인 등 관리자 입장의 에피소드가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시대의 흐름은 아날로그적이지만 인간의 역사를 디지털로 묘사한다면 지난 3년은 격변의 경계라 칭할만하다. 2020120일 이후 세상을 굵직한 나이테적 사건을 경험한다. 코로나 이후로 우리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약간의 굳은 살은 배겼지만, 변화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글은 시대상을 반영한다. 시대상을 반영해야 겉돌지 않고 독자의 심장으로 스며들 수 있다. 생활이라 표현하면 밋밋할 정도로 삶이 달라졌다. 코로나를 소재로 하는 문학작품들이 쏟아졌다. 질병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책, 팬데믹의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하는 책 등 현실을 생중계하는 다큐멘터리가 많다. 몇몇 책들을 읽었지만, 별반 해답을 얻을 수 없어 여전히 답답했다.

 

내내 품고 있던 답답함이 해소된다. 상황이 엄청나게 달라진 건 아니지만 어느 방향으로, 어떤 의지로 삶을 걸어가야 하나 어렴풋이 답을 얻는다.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에게 빙의하여 진지하게 상황을 직시하니 내가 보인다.

소설은 거리두기를 만들어준다. 주인공들의 행동과 심리를 관찰자로서 바라보면서 독자는 스스로 삶을 비추어본다. 나라면 저렇게 행동하지 않을 텐데 혹은 맞아, 맞아, 나도 그랬을 거야 하며 공감한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삶을 바라본다. 코로나를 녹여낸 작품 덕분에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다 더 이해하게 된다. 더불어 나의 삶도 둘러본다.

 

편의점에 관한 책을 읽는 중이어서였을까. 인터넷 뉴스에서 편의점 체험이 담긴 기사문이 눈에 들어온다. “소주병 '쾅'무례함에 심장 '쿵쿵'...'심야 편의점' 알바해봤다[남기자의 체헐리즘]”(2023.01.14. 머니투데이 남형도 기자)이라는 제목이다.

수습기자 때 휠체어를 타고 서울시내를 다녀 봤습니다. 불편한 세상이 처음 펼쳐졌습니다. 직접 체험해 깨닫고 알리는 기획 기사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체헐리즘'입니다. 체험과 저널리즘을 합친 말입니다. 사서 고생하는 맘으로 현장 곳곳을 누비겠습니다. 깊숙한 이면을 알리고, 그늘에 따뜻한 관심을 불어넣겠습니다. 라는 편집자 주를 읽고 아! 이 기자 찐이구나 싶다.

 

책을 통해 편의점 예습이 이루어진 상태여서일까. 기자의 체험담이 현장감 있게 다가온다. 몰입감을 주는 문장과 중간중간 사진 설명 글에서 파편처럼 뿜어져 나오는 재치 덕분에 재미있는 소설을 보듯 정신없이 읽는다. 유튜브도 아닌데 결국 내 손가락은 구독과 응원을 누르고야 만다.

기자의 기사문들을 모은 메인 페이지를 방문한다. “쓰레기를 치우는 여사님께서 쓰레기통에 앉아 쉬시는 걸 보고 기자가 됐습니다. 소외된 곳을 떠들어 작은 거라도 바꾸겠습니다.” 에 적힌 비전이 마음에 든다. 세상 곳곳에서 누군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모퉁이의 모습을 알리고 있구나. 작가는 소설로, 기자는 기사문으로 무심코 흘려보내는 장면을 붙드는구나.

 

이 책과 기사문을 읽고 나니 뚝배기가 된 기분이다. 글은 독자를 각기 다른 그릇으로 만드는 걸까. 커다란 용광로로, 작은 종지로, 뚝배기로, 라면 냄비로 말이다. 폭발적인 열정이나 오소소 스릴러나 처절한 냉기는 없어도 오가는 이야기들이 물컹하고 따뜻하다. 심장을 은근하게 데워준다. 데워지는 데 오래 걸리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온기가 한동안 머문다.

등장인물들의 배경은 한결같이 시리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이 되어준다. 웃어서 뭘 먹은 효과가 난다는, 걱정은 독이고 비교는 암이라는 주인공의 말이 불씨로 날아온다. 이 불씨에 나만의 신선한 산소를 모아 삶을 뜨거운 열정으로 이끌어 시린 이들과 더불어 걸어가고 싶어진다.

 

관성에 의해 굴러가는 세상을 바꾸기는 어렵다고 비관한 적도 있다. 내가 이런다고 세상이 바뀔까. 흔히 듣는 말, 흔히 하는 생각처럼. 이제는 달라졌다. 어쩌면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한 권의 책과 한 편의 기사문으로 편의점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달라졌듯이. 찬란하게 빛나는 별도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기체인 수소가 꾸준히 모여들어 만들어지니까.

세상은 꾸준히 두드리는 '하나'들로 변한다. 작은 거라도 꾸준히 두드리면 서서히 반향을 바꾸어가면서 다듬어진다. 어쩌면 내가 쓴 이 글이 누군가의 심장을 두드려 세상의 어느 한 부분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꿀지 모른다고 믿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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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생각하기 - 나무처럼 자연의 질서 속에서 다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하여
자크 타상 지음, 구영옥 옮김 / 더숲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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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로 만들어진 탁자를 좋아한다. 나이테로 물결치는 무늬 앞에서 나의 심장은 느리게 뛴다. 규칙적으로 줄 맞추기를 좋아하는 성향이면서도 나무의 불규칙함에서는 안정감을 느낀다. 이유가 뭘까. 탁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무늬를 만드는 결에서 답을 찾는다. 대리석의 유려한 무늬와는 다른 점이 눈에 들어온다.

물결인 듯 보이는 진한 선은 무수하게 짧은 빗금의 집합이다. 자잘한 털들이 모여 숯 검댕이 눈썹을 만드는 것처럼. 한 뼘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이 빗금은 선이라기보다 촘촘하고 살짝 긴 점에 가깝다. 스스로 삶을 확장하기 위한 탈피의 흔적으로 이루어진 길처럼 보인다.

결은 길이다. 곤충의 탈피가 성장의 자취이듯 나무의 결은 자라온 시간을 담는다. 사람이 겪는 성장통처럼 나무는 나이테의 결을 만들 때 고통스러울까. 상처의 흔적으로도 보이는 빗금이 모여 굵직한 선으로 그어질 때까지 어떤 삶의 길을 걸을까.

 

나무처럼 생각하기는 나무의 삶과 존재 방식에 대하여 다양한 각도로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책이다. 저자인 자크 타상의 관점에 의하면 지구는 나무의 행성이다. 흔히 지구를 물의 행성이라 일컫는다. 지표면의 70% 이상이 바닷물로 채워져 있으니 당연한 정의이다. 겉으로 보기에 지구는 태양계에서 푸른 구슬로 존재한다. 생명체를 기준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생태계를 생각하니 먹이피라미드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식물은 제일 아래에서 든든하게 생태계를 떠받치는 생산자이니 나무의 행성이라 해도 무리는 없으리라.

책 속에서 이루어지는 저자의 모든 사유는 나무에서 시작해서 나무로 끝난다. 나무의, 나무에 의한, 나무를 위한 책이다. 인간에게서 나무의 흔적을 찾고 나무가 세상에 존재하는 법을 말하며 나무와 함께 살아가기를 권유한다. 숲을 이루는 나무의 화합에서 교향곡을 들으며 인간의 역사와 함께 걸어온 나무의 의미를 찾는다. 나무를 함부로 대하는 인간에게 지속가능한 발전의 길을 제안한다.

 

독자로서 모든 책을 읽는 목적은 하나로 귀결된다. 나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쓴 목적도 역시 인간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데 있다. 식물학자로서 그가 선택한 매개체가 나무일 뿐이다.

바라보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다. 박웅현은 여덟 단어에서 ()’을 언급한다. 시각적인 정보만이 뇌에 전달되어 인지하는 게 아니라 그 너머의 본질까지 바라보는 게 진짜 보는 거라고. 이런 이유로 어떤 대상을 통해 볼 수 있는 요소는 땅에서 우주만큼의 차이를 보인다. ‘어떻게얼마나를 결정한다.

자크 타상 덕분에 엄지손가락을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다. 엄지는 다른 손가락과 마주 보고 있다는 문장 덕분이다. 책 속의 문맥과는 다르지만, 새삼 엄지 손끝을 나머지 손가락 끝에 차례로 대어본다. 이웃한 어떤 손가락들도 그들끼리는 마주 볼 수 없다. 가까운 손가락을 겹쳐도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다. 멀리 있어도 어떤 손가락에든 닿을 수 있고 유일하게 다른 손가락을 마주 볼 수 있는 존재라니!

 

사람은 왜 품종이라 하지 않아?” 뜬금없이 딸이 묻는다. 사과의 품종은 부사, 홍옥, 아오리 등이거나, 개의 품종도 푸들, 몰티즈, 닥스훈트 등 다양하지 않은가. “그건 사람이 기준이라 그런 거 아닐까.” 잠시 망설이다 답한다. 세상은 사람을 기준으로 해석되고 정의된다. 그리고 관점은 그가 사는 세상의 크기를 결정한다.

식물의 감각이 인간처럼 오감 이상으로 존재하리라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식물에게 20여 가지의 다른 감각이 있다는 말에 놀랐던 건 이런 이유이리라. 나를 기준으로 식물을 판단해왔으니까. 곰곰 생각하면 우리가 3차원을 산다고 우주가 그리 존재하는 건 아닌데 말이다.

우주와 나무를 연결하는 저자의 문장을 따라가니 상상하는 공간의 크기가 넓어진다. 땅과 우주의 무언가에 나무라는 고리가 걸려 연결된 선을 붙잡으면 우주의 기운이 훅 끼얹어질 것 같다. 나무 아래 서면 우주의 기운을 들이마셔 확장된 폐가 적당히 서늘해질 것 같다.

 

멋진 은유가 많은 책이다. 다만 너무 과도하다. 나무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아는 저자의 열정은 충분히 이해하나 전체적으로 산만하다. 설익은 과일을 잔뜩 가져다 놓은 듯 어느 걸 맛보아도 살짝 떫다. 느긋한 산책길도 아니고 전력 질주도 아니고 어정쩡한 속도로 걸어가는 문장을 지켜보는 기분이다.

문장을 꺼냈으나 이를 뒷받침하는 근육이 부족하다. 슬림한 몸도 근육 짱짱한 식스팩도 아닌, 어설프게 운동하는 아마추어를 보는 듯하다. 서사의 날개가 활짝 펼쳐지지 못하는 느낌이랄까.

뚝뚝 끊기는 내용이 몰입을 방해한다. 식어버린 피자치즈 같다. 문장의 흐름을 따라가다 작가가 애초에 무슨 말을 꺼냈었더라 갈 길을 잃어 몇 번이나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확실한 장점은 관점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점이다. 나무는 생각보다 더 굉장한 존재라는 것. 특히 주변과의 상호작용이 중요함을 인지하게 된다. 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만 우는 게 아니라 줄기와 뿌리와 잎이, 햇살과 비와 바람과 흙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나무의 복수형은 나무들이 아니다. 숲이다. 숲은 나무뿐 아니라 공간까지 품는다. 나무 사이를 흐르는 공기, 흙내음, 나무 위에 생명을 누인 자그마한 벌레, 새들, 짐승들까지 아우른다. 이들로 둘러싸인 나무의 존재 의미를 생각한다.

비를 기다리고 바람을 기다리고 햇살을 기다리다 그들이 오면 미련 없이 떠나보낸다. 빛으로 뜨개질한 양분과 산소를 정갈하게 다듬어 밖으로 내어준다. 소유하는 거라고는 잠시 머금고 있는 물뿐이다. 이마저 절반 이상은 공간으로 돌려보낸다. 나무는 기다림과 무소유의 다른 이름일까.

과학 교사에게 광합성은 무심코 들이마시는 공기처럼 일상의 언어에 속한다. 명반응과 암반응 등 화학적 과정으로 얽혀 있는 에너지와 물질 전환의 과정이다. 습관처럼 머무는 학문적 개념이라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적은 없다. 초록의 잎에서 일어나는 경이로운 장면이 드러내는 본질적인 의미를. 빛을 흡수하는 생명체라니! 무형으로부터 유형의 것을 만들어낸다니! 상상할수록 전율이 인다.

 

어떤 개체도 자신이 아닌 것과의 연결 없이는 유지되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개체가 자신의 환경과 분리될 수 없는 한, 개체는 잠재성 그 자체다. 개체로 존재하기 위해서 자신 속에 없는 것과 융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p101~102)

환경과 자연스럽게 손을 잡는 담대함을 나무에서 발견한다. 자연스럽다는 건 힘을 빼는 거다. 공기 반 소리 반을 말하는 누군가도 외치지 않았는가. 어깨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노래하라고. 힘을 뺀다는 건 사실 대단한 용기 아닌가. 새로운 환경 앞에서 주춤하는 본능을 극복한 결과일 테니까.

나이테의 결을 만들 때 나무는 고통스러웠을까. 온통 나무로 이루어진 책의 숲을 통과하니 자연스레 결론에 도달한다. 나의 답은 아니다이다. 날이 추우면 촘촘하게, 더우면 느슨하게, 힘을 빼고 자연스레 파도타기를 하는 능숙한 프로였던 거다. 경계를 허물어 무소유를 실천한 나무가 얻은 것은 한껏 품은 우주였을까.

 

 

p30, 각주의 마지막 줄: 잘환 질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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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통재라, 오호! 애재라. 300여 일간 탄생했던 무수한 나의 파일들이여, 폴더의 노예였던 파일들이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20223월 이래 차곡차곡 정리되었던 정보들이 한순간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 통재라, 오호! 애재라. 파일이여! 파일이여!”

1905,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던 거룩한 애국자의 외침을 이 시점에 떠올릴 일이더냐! <시일야방성대곡>을 부르짖으며 황당신문에라도 싣고 싶은 심정이었다.

 

꿈이라면 좋았을 사건 개요는 이렇다.

-언제: 202212

-어디서: 3학년 1반의 교탁과 전자칠판 사이

-내용: 묵직한 노트북의 자유낙하로 옆구리에 빌붙어 있다 미처 피신 못한 플라스틱 USB, 충격 흡수의 여파로 경추 탈골! 노트북은 찰과상.

운동신경의 반응속도는 그들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후의 시도들은 유경험자들이 거치는 흔한 단계이다. 몇 번이나 꽂았다 빼기, 해부 후 현실 자각, 파일 복구 업체를 알아보다 예상을 웃도는 가격에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며 포기. USB의 거룩한 희생의 대가는 파일 0개였다. 식은땀이 흘렀다.

 

예상 못했던 건 아니다. 손실이나 분실이라도 되면 낭패이니 하드에도 백업받아놓아야지. 노트북 앞에서 생각한 적은 있다. 문제는 생각만 했다는 거다. 실행에 옮기기 전에 발등을 찍은 자, 바로 나다.

침착하자! 계획서 파일은 업무포털에 업로드되어있다. 아쉬운 건 사소한 양식들이다. 실험 실습일지, 실험보고서, 시약 목록 같은 것 말이다. 순식간에 RGB 255,255,255가 된 기억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다행인 건 프리웨어로 주변인들에게 투척했던 흔적이 존재한다는 거다. 홍익인간의 이념을 실천한 나를 눈물 머금고 칭찬한다. 초고속 카메라의 영상을 거꾸로 재생하듯 흩어진 파일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지인이 위로한다.

업무는 거의 마무리되었잖아. 중요한 건 업무포털에서 다운받으면 되고. 학년말이라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봐.”

맞다. 마무리 업무 파일도 주무 부서에 제출한 상태이니까.

위로 끝에 지인은 한마디 덧붙인다.

근데, J 맞아?”

나의 MBTIINFJ이다. IN은 기분 내키는 대로 달라지지만 FJ는 변하지 않는다. 특히 확고부동한 영역은 J이다. 계획적으로 움직이는 나는 100%에 가까운 위용을 떨친다. 무척 치밀한 인간⋯⋯...

 

정리의 기본 3단계는 모조리 꺼내기, 분류하기, 재정비하기이다. 염전에서 일하듯 파일 부스러기를 닥닥 긁어모아 다시 폴더를 만들고 정돈하는 중이다.

박웅현은 여덟 단어에서 리처드 파인먼의 말을 인용한다. ‘현상은 복잡하다. 법칙은 단순하다. ⋯⋯ 버릴 게 무엇인지 알아내라.’ 잃고 나니 본질이 보인다. 최소한의 필요와 없어도 아쉬울 게 없는 게 구분된다.

USB로 인해 긍정적인 트라우마가 생겼나. 일하다가도 수업 종이 나면 USB 탈착을 잊지 않는다. 수시로 자료를 백업한다. 새로운 USB는 강철 갑옷을 입고 있다. 지나가던 동료가 말한다. “부장님! 단단한 걸로 바꾸셨군요. .. 부러지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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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단어 -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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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떼어놓고 보면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일들이라도 겹겹이 중첩되면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혼란스러운 상황과 결정짓지 못한 일과 망설임으로 채워진 갈등과 의기소침과 스스로 들여다보는 가식과 자책과 실망감과 불안함이 뒤섞였다. 소소한 일상들이 조금씩 심장을 할퀴었다. 영혼이 난시라도 된 듯 부정확한 초점으로 흔들렸다.

삶이 어떤 풍경으로 펼쳐지느냐, 마음이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마주치는 책은 다른 의미로 남는다. 이를테면 마실 때마다 다른 느낌을 주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같다. 씁쓸한 듯싶다가도 시원함을 아작아작 부숴 넘기는 통쾌함을 안겨준다. 간질간질 향이 코끝을 어루만지는가 하면 손바닥이 시릴 정도로 냉철함이 스며든다. 차분한 갈색이 목구멍을 보듬다가도 헛헛한 낙엽이 미적지근하게 굴러들어온다.

책장에 줄지어 선 세상을 하릴없이 왕복했다. 36.5도가 너무 뜨거웠다. 사계절을 지나온 나무가 품은 담담한 말들에 기대고 싶었다. 아무 책이라도 좋았지만 아무 책이어서는 안 되었다. 사둔 지 몇 년이나 지난 이 책에 눈길이 머무는 순간을 시작으로 우연히 끌려 온 여덟 개의 별똥별은 내 삶의 대기권으로 날아들었다. 섬광처럼 빛을 내다 심장에 선명한 느낌표를 찍었다. 갈증 날 때 발견한 물처럼 필요로 하는 절묘한 타이밍에 마주친 책이었다.

 

여덟 단어20, 30대를 대상으로 2012년에 두 달여 간 이루어진 강의를 엮은 책이다. 작가 박웅현은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주제로 여덟 개의 키워드를 정한다. 자존, 본질, 고전, (), 현재, 권위, 소통, 인생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는 TBWA KOREA에서 크리에이티브 대표(CCO)로 일하는 광고인이다. 광고는 축약된 메시지를 15초에 담아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시키는 일이다. 직업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작가의 글에 묻어난다. 문장은 간결하고 시선은 청중의 눈높이와 나란하며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명확하다.

겉표지부터 내 스타일이다. 책 제목과 작가 이름을 이용하여 사람의 이미지를 표현한 점이 광고를 연상케 한다. 각각의 강연을 여는 페이지에는 제목 밑에 광고의 카피를 연상케 하는 한 줄의 보조문장이 적혀있다. 키워드를 관통하는 문장들이다.

뒷장을 넘기면 인상적인 이미지가 펼쳐진다. 작가의 글씨로 기록된 듯한 강의 메모 수첩이다. 살짝 훑어본다. 본문을 다 읽고 나서 되돌아가 다시 읽는다. 콘티 역할을 한 스케치일까. 강연 내용과 대조해본다. 처음의 의도가 반영된 내용도 있지만 빠지거나 추가된 부분도 보인다. 순간순간의 순발력으로 강의가 업그레이드된다는 거다. 투박한 메모에 보이는 고민의 흔적들과 정갈한 강연으로 다듬어진 내용을 함께 보니 괜스레 뭉클하다.

 

책을 읽을 때 음악을 즐겨 듣는다. 소설책을 펼칠 때 배경음악이 적절하게 어우러지면 등장인물의 감정에 더욱 잘 이입된다. 영화나 드라마에 삽입되는 OST가 감동을 짙게 만드는 경우와 비슷하다. 시각과 청각이 어우러진 공감각은 느낌의 깊이를 더한다. 문장의 맛이 풍부해진다. 애끓는 이별 장면에 드럼의 신들린 연주가 곁들여지면 곤란하겠지만 말이다.

글을 쓸 때도 음악을 들으면 헝클어져 있던 생각이 정돈된다. 쓰고자 하는 글의 성격에 따라 적절한 노동요를 선정하여 OST로 깔아준다. 방앗간 가래떡처럼 정갈하고 꼬들꼬들한 문장들이 방언인 듯 터져 나올 때가 있다. 글과 음악에도 궁합이 존재한다면 이 둘은 천생연분의 커플이리라.

이 책의 BGM으로는 <캐논 변주곡>이 적당하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주변의 공간이 3차원의 거대한 TV로 변한다. 그 속에서 나는 순간적으로 드라마 주인공이 된다. 다양한 버전의 선율이 흐른다. 가야금, 피아노, 첼로, 드럼, 바이올린, 일렉 기타, 어쿠스틱 기타, 하프, 테크노. 여덟 단어를 주제로 하는 에피소드가 하나씩 펼쳐지면 내가 겪은 일이 다양한 음색으로 울린다. 조화로운 음으로 편안하게 가끔은 불협화음의 시간으로 나를 데려간다.

박웅현의 여덟 단어가 마법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버튼이 된다. 친구가 되었다가 토닥토닥 다정한 손길이 되었다가 포근한 이불이 되었다가 예리한 얼음으로 화들짝 놀라게 만든다. 책 속의 문장과 내 삶의 문장들이 씨실과 날실로 얽힌다.

 

현상은 복잡하다. 법칙은 단순하다.……버릴 게 무엇인지 알아내라.’는 리처드 파인먼의 말은 선분으로 존재하던 나의 문제에 화살표의 머리를 만들어준다. 더하기보다 어려운 건 빼기이다. 수학뿐 아니라 많은 분야에서 적용되는 원리이다. 정리할 때도 버릴 물건을 정하는 과정이 훨씬 어려우니까. 미련 내지는 욕심 때문이다. 2강의 <본질>의 입구에 놓인 이 문장을 시작으로 지금 풀어내야 할 문제의 해결책이 담긴 정답의 노다지를 만난다. 불쑥 떠오르는 문제에 대하여 본질을 묻는다.

첫째, 내 글의 본질은 무엇인가?

글은 종이에 기록되는 목소리이다. 한때 즐겨보던 TV 프로그램 <복면가왕>이 떠오른다. 얼굴을 가려도 임을 알아볼 수 있는 건 이게 만드는 목소리의 본질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나의 글을 나의 글이게 하는 본질은 뭘까.

둘째, 나는 왜 화가 났을까?

얼마 전 과학실 뒷정리를 하다 실험대 위의 아크릴 칸막이를 보고 분노한다. 볼펜이나 연필 낙서는 애교다. 알콜 성분이 들어간 소독제를 한 번 뿌리면 클리어되니까. 한데 칼로 조각된 저 거대한 물음표 형상은 어쩌란 말이냐! 심장을 칼로 긁힌 듯 부르르 떨었다. ~ ~ 커터칼을 들었을 저 어린 장수를 어찌 처단할까. 그날 저녁에 만난 <본질>은 내가 그토록 분노했던 이유를 알려준다. 아이의 인성 때문이 아니었다. 내 수업을 지루해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이유가 가장 컸던 거다.

 

평범한 문장이 시인의 눈을 통과하면 특별한 전율로 살아난다. ‘저녁이야 /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안도현의 시 <스며드는 것>에 나오는 문장을 보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뭉클한 서사를 안겨주는 시인의 시선에 경외감이 들었다. 무슨 내용인지 궁금한가. 직접 찾아 시의 전문을 보기를 권한다. 시에 담긴 소재를 보는 시각이 사뭇 달라지는 체험을 하게 되리라.

수업 태도로 매번 신경 쓰이게 만드는 아이와 갈등이 있었다. 시작은 사소했으나 결말은 다소 창대해졌다. 나의 의도대로 행동하지 않는 아이와 몇 번의 강한 말이 오갔다. 평소보다 높은 진폭으로 감정이 일렁였다. 해프닝 정도의 일이었지만 찜찜한 기분이 며칠을 갔다. 그즈음 <()>을 만나 아이를 보는 시각을 곰곰 생각했다. 난 그 아이를 제대로 본 것일까. 제대로 알고 싶어 하지도 이해하고 싶어 하지도 대화하고 싶어 하지도 않고 본질을 놓친 채 그저 껍데기의 까칠함만 본 건 아닐까. 습관처럼 아이들을 불변하는 가구인 듯 보아왔던 건 아닐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다 보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다음 주 헤헤거리며 나를 대하는 아이를 보니 머쓱한 앙금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이미 마신 커피를 떠올리느냐 미처 들어오지 못한 얼음을 바라보느냐, 컵을 보느냐, 빨대를 보느냐. 고동색 커피, 투명한 얼음, 하얀 머그잔, 붉은 빨대 등 다양한 요소가 나의 선택을 기다린다. 안팎으로 기다리는 소재 중 무엇을 볼 것인가.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매너리즘 없이 세상을 처음 보는 아이의 맑은 시선을 가져야 하리라. 사물이든 사람이든 스스로 내면을 바라볼 때조차.

 

몸이 움찔하게 되는 건 사소하게 베인 상처 때문일 때가 많다. 일상의 지질한 일들이 의외로 마음에 생채기를 낸다. 그럴 때마다 본질을 응시하고 제대로 바라본다면 조금 덜 아프게 다시 걸어 나갈 힘을 얻게 되리라.

2013년에 출간된 후로 10년이 다 되어가는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울림이 생기는 건 그가 언급한 문장 ‘Everything Changes but Nothing Changes.’처럼 책 안에 담긴 본질이 나무처럼 곧게 자리하고 있는 까닭이리라.

리뷰를 쓸 때면 무의식적으로 그때 일어난 일들, 그때 보았던 드라마, 그때 읽었던 책, 그때 나누었던 대화, 그때 맡았던 향기가 소재가 되어 녹아들었다. 슬픔에 관한 책이라면 이 모든 환경에서 슬픔을, 행복이 주제라면 같은 환경에서 행복을 뽑아내어 그 실로 뜨개질을 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선택한 다음에 그걸 정답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문장에서 공통적인 맥락을 발견한다. 고민하는 선택 상황에서도 같은 방식을 적용하면 되는 거였다. 신중하게 선택할 것, 선택한 나의 답이 정답이니 다만 그 길을 향해 노력할 것. 작가의 문장들이 응원의 에너지를 전해준다.

마지막 책 장을 덮고 음악을 멈춘다. 박웅현 작가가 쓴 드라마 1부가 끝이 났다. 이제 배경음악부터 모든 걸 디자인하는 2부는 나의 몫이다. 다큐멘터리로 뛰어드는 대본 없는 실전이다. 내 안에서 빛나고 있을 나만의 별을 찾아 지금부터 큐!

 

p85 인용문 6째줄: 1년의 달수 ~ 날수

p85 인용문 6째줄: 대양 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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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림없는 소리! 친구의 떠남을 명분으로 세운 공부 멈춤 전략이렷다. 무릇 송별회라 하면 풍선 팡팡 색색 종이 부스러기들이 번쩍번쩍 흩날릴 것 같은 BGM이 희미하게라도 묻어있기 마련이건만. 녀석들의 분위기는 결코 송별회의 그것이 아니다.

송별회 해줘야 해요.”

몇몇 녀석들이 다시 합창한다.

“K가 내일 경기도에 있는 시골로 멀리 가요.”

내일 안 와?”

학교 끝나고 가요.”

그럼 내일 하면 되겠네.”

수많은 아이의 밀물과 썰물을 접했던 교사의 사전에 송별회 이브는 없다.

, ~ 오늘은 별의 연주시차 할 차례 군.”

운동하는 K가 진학을 위해 타 시도로 가는 모양이다. 수업하다 힐끗 보니 아이의 표정이 시선 끝에 매달린다.

오늘은 여기까지! 10분 정도 남았는데 송별회 해봐.”

순간 출렁! 공간이 들썩인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A가 벌떡 일어난다.

배경 음악 틀어도 되나요?”

푸하! 들으나 마나 시끌벅적한 음악이리라.

옆 반 방해 안 되게 조그맣게 틀어 봐.”

우리 처음 만났던 어색했던 그 표정 속에~’ 어라? 이 익숙한 멜로디와 가사는?

이 노래를 아니?”
그럼요!”

1991년에 발매된 015B<이젠 안녕>을 아는 2007년생이라니! ‘안녕이라는 말을 해 짧은 시간을 뒤로 한 채로~’ 폴 킴의 <안녕>, ‘오래전에 함께 듣던 노래가 발걸음을 다시 멈춰 서게 해~’ 스탠딩 에그의 <오래된 노래>가 연이어 애잔하다.

이런 분위기라면 옆 반 방해가 안 될 것 같다. 슬그머니 앞으로 가서 볼륨을 키운 건 바로 나다. ! 절묘한 타이밍에 싸이님 등장하신다.

이거 이별 노래 맞냐?”

소중했던 내 사람아 이젠 안녕~’ 경쾌한 랩 뒤로 성시경이 <뜨거운 안녕>을 건넨다.

 

평소에는 누운 풀잎이던 녀석들이 주섬주섬 일어난다. 은하의 중심인 듯 K를 향해 사물함 앞쪽으로 하나둘 모여든다. 꼬리 끝에 아쉬움을 매단 혜성들이 오늘의 주인공을 향한다. 반장이 색색의 별들이 꾹꾹 박힌 하얀 우주를 친구에게 건넨다. 뭐지? 이 익숙한 느낌의 종이는? 그랬구나, 그런 거였구나. 오늘따라 교과서에 광년과 파섹을 열심히 받아 적는 줄 착각해서 미안하다. 교과서는 롤링 페이퍼 받침대였구나.

이별 선물로 받은 듯 인절미 색 벙어리장갑을 낀 아이, 온풍기 빵빵한 교실 안에서 북극곰 털처럼 부슬부슬 한 장갑을 꼭 끼고 있던 아이가 고개를 숙인다. 흐르는 음표 사이로 훌쩍이는 소리가 쉼표처럼 찍힌다.

이별 앞에서 서성이는 영혼들은 몇 방울의 눈물로 금세 젖어버리는 얇은 휴지 같다. 별다른 말이 오가지 않아도 공간을 꽉 채운 채 파도처럼 일렁이며 오가는 마음이 보인다.

 

아이들은 자체로 자신만의 삶을 그린다. 그들의 우주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푸릇한 세상을 난, 너무 작게 보았구나. K의 주변을 빙 둘러싼 충혈된 눈동자들이 물기 아래로 반짝인다, 쉰두 개의 붉은 별처럼.

우주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던가. 별들이 모여드는 맑은 은하를 목격했던 십여 분이 초고속 사진을 재생하듯 흐른다. 별을 보내는 소박한 의식이 몽글몽글한 솜뭉치가 되어 심장 안을 굴러다닌다.



230112 g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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