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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생각하기 - 나무처럼 자연의 질서 속에서 다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하여
자크 타상 지음, 구영옥 옮김 / 더숲 / 2019년 7월
평점 :
나무로 만들어진 탁자를 좋아한다. 나이테로 물결치는 무늬 앞에서 나의 심장은 느리게 뛴다. 규칙적으로 줄 맞추기를 좋아하는 성향이면서도 나무의 불규칙함에서는 안정감을 느낀다. 이유가 뭘까. 탁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무늬를 만드는 결에서 답을 찾는다. 대리석의 유려한 무늬와는 다른 점이 눈에 들어온다.
물결인 듯 보이는 진한 선은 무수하게 짧은 빗금의 집합이다. 자잘한 털들이 모여 숯 검댕이 눈썹을 만드는 것처럼. 한 뼘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이 빗금은 선이라기보다 촘촘하고 살짝 긴 점에 가깝다. 스스로 삶을 확장하기 위한 탈피의 흔적으로 이루어진 길처럼 보인다.
결은 길이다. 곤충의 탈피가 성장의 자취이듯 나무의 결은 자라온 시간을 담는다. 사람이 겪는 성장통처럼 나무는 나이테의 결을 만들 때 고통스러울까. 상처의 흔적으로도 보이는 빗금이 모여 굵직한 선으로 그어질 때까지 어떤 삶의 길을 걸을까.
『나무처럼 생각하기』는 나무의 삶과 존재 방식에 대하여 다양한 각도로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책이다. 저자인 자크 타상의 관점에 의하면 지구는 나무의 행성이다. 흔히 지구를 물의 행성이라 일컫는다. 지표면의 70% 이상이 바닷물로 채워져 있으니 당연한 정의이다. 겉으로 보기에 지구는 태양계에서 푸른 구슬로 존재한다. 생명체를 기준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생태계를 생각하니 먹이피라미드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식물은 제일 아래에서 든든하게 생태계를 떠받치는 생산자이니 나무의 행성이라 해도 무리는 없으리라.
책 속에서 이루어지는 저자의 모든 사유는 나무에서 시작해서 나무로 끝난다. 나무의, 나무에 의한, 나무를 위한 책이다. 인간에게서 나무의 흔적을 찾고 나무가 세상에 존재하는 법을 말하며 나무와 함께 살아가기를 권유한다. 숲을 이루는 나무의 화합에서 교향곡을 들으며 인간의 역사와 함께 걸어온 나무의 의미를 찾는다. 나무를 함부로 대하는 인간에게 지속가능한 발전의 길을 제안한다.
독자로서 모든 책을 읽는 목적은 하나로 귀결된다. 나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쓴 목적도 역시 인간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데 있다. 식물학자로서 그가 선택한 매개체가 나무일 뿐이다.
바라보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다. 박웅현은 『여덟 단어』에서 ‘견(見)’을 언급한다. 시각적인 정보만이 뇌에 전달되어 인지하는 게 아니라 그 너머의 본질까지 바라보는 게 진짜 보는 거라고. 이런 이유로 어떤 대상을 통해 볼 수 있는 요소는 땅에서 우주만큼의 차이를 보인다. ‘어떻게’가 ‘얼마나’를 결정한다.
자크 타상 덕분에 엄지손가락을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다. 엄지는 다른 손가락과 마주 보고 있다는 문장 덕분이다. 책 속의 문맥과는 다르지만, 새삼 엄지 손끝을 나머지 손가락 끝에 차례로 대어본다. 이웃한 어떤 손가락들도 그들끼리는 마주 볼 수 없다. 가까운 손가락을 겹쳐도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다. 멀리 있어도 어떤 손가락에든 닿을 수 있고 유일하게 다른 손가락을 마주 볼 수 있는 존재라니!
“사람은 왜 ‘품종’이라 하지 않아?” 뜬금없이 딸이 묻는다. 사과의 품종은 부사, 홍옥, 아오리 등이거나, 개의 품종도 푸들, 몰티즈, 닥스훈트 등 다양하지 않은가. “그건 사람이 기준이라 그런 거 아닐까.” 잠시 망설이다 답한다. 세상은 사람을 기준으로 해석되고 정의된다. 그리고 관점은 그가 사는 세상의 크기를 결정한다.
식물의 감각이 인간처럼 오감 이상으로 존재하리라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식물에게 20여 가지의 다른 감각이 있다는 말에 놀랐던 건 이런 이유이리라. 나를 기준으로 식물을 판단해왔으니까. 곰곰 생각하면 우리가 3차원을 산다고 우주가 그리 존재하는 건 아닌데 말이다.
우주와 나무를 연결하는 저자의 문장을 따라가니 상상하는 공간의 크기가 넓어진다. 땅과 우주의 무언가에 나무라는 고리가 걸려 연결된 선을 붙잡으면 우주의 기운이 훅 끼얹어질 것 같다. 나무 아래 서면 우주의 기운을 들이마셔 확장된 폐가 적당히 서늘해질 것 같다.
멋진 은유가 많은 책이다. 다만 너무 과도하다. 나무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아는 저자의 열정은 충분히 이해하나 전체적으로 산만하다. 설익은 과일을 잔뜩 가져다 놓은 듯 어느 걸 맛보아도 살짝 떫다. 느긋한 산책길도 아니고 전력 질주도 아니고 어정쩡한 속도로 걸어가는 문장을 지켜보는 기분이다.
문장을 꺼냈으나 이를 뒷받침하는 근육이 부족하다. 슬림한 몸도 근육 짱짱한 식스팩도 아닌, 어설프게 운동하는 아마추어를 보는 듯하다. 서사의 날개가 활짝 펼쳐지지 못하는 느낌이랄까.
뚝뚝 끊기는 내용이 몰입을 방해한다. 식어버린 피자치즈 같다. 문장의 흐름을 따라가다 작가가 애초에 무슨 말을 꺼냈었더라 갈 길을 잃어 몇 번이나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확실한 장점은 관점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점이다. 나무는 생각보다 더 굉장한 존재라는 것. 특히 주변과의 상호작용이 중요함을 인지하게 된다. 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만 우는 게 아니라 줄기와 뿌리와 잎이, 햇살과 비와 바람과 흙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나무의 복수형은 ‘나무들’이 아니다. 숲이다. 숲은 나무뿐 아니라 공간까지 품는다. 나무 사이를 흐르는 공기, 흙내음, 나무 위에 생명을 누인 자그마한 벌레, 새들, 짐승들까지 아우른다. 이들로 둘러싸인 나무의 존재 의미를 생각한다.
비를 기다리고 바람을 기다리고 햇살을 기다리다 그들이 오면 미련 없이 떠나보낸다. 빛으로 뜨개질한 양분과 산소를 정갈하게 다듬어 밖으로 내어준다. 소유하는 거라고는 잠시 머금고 있는 물뿐이다. 이마저 절반 이상은 공간으로 돌려보낸다. 나무는 기다림과 무소유의 다른 이름일까.
과학 교사에게 ‘광합성’은 무심코 들이마시는 공기처럼 일상의 언어에 속한다. 명반응과 암반응 등 화학적 과정으로 얽혀 있는 에너지와 물질 전환의 과정이다. 습관처럼 머무는 학문적 개념이라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적은 없다. 초록의 잎에서 일어나는 경이로운 장면이 드러내는 본질적인 의미를. 빛을 흡수하는 생명체라니! 무형으로부터 유형의 것을 만들어낸다니! 상상할수록 전율이 인다.
‘어떤 개체도 자신이 아닌 것과의 연결 없이는 유지되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개체가 자신의 환경과 분리될 수 없는 한, 개체는 잠재성 그 자체다. 개체로 존재하기 위해서 자신 속에 없는 것과 융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p101~102)
환경과 자연스럽게 손을 잡는 담대함을 나무에서 발견한다. 자연스럽다는 건 힘을 빼는 거다. 공기 반 소리 반을 말하는 누군가도 외치지 않았는가. 어깨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노래하라고. 힘을 뺀다는 건 사실 대단한 용기 아닌가. 새로운 환경 앞에서 주춤하는 본능을 극복한 결과일 테니까.
나이테의 결을 만들 때 나무는 고통스러웠을까. 온통 나무로 이루어진 책의 숲을 통과하니 자연스레 결론에 도달한다. 나의 답은 ‘아니다’이다. 날이 추우면 촘촘하게, 더우면 느슨하게, 힘을 빼고 자연스레 파도타기를 하는 능숙한 프로였던 거다. 경계를 허물어 무소유를 실천한 나무가 얻은 것은 한껏 품은 우주였을까.
※p30, 각주의 마지막 줄: 잘환 → 질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