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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노보 핸드셰이크 - 우리가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하여
버네사 우즈 지음, 김진원 옮김 / 디플롯 / 2022년 11월
평점 :
“보노보가 뭐예요?”
요즘 읽는 책 이야기를 나누던 중 직장 동료가 묻는다. 난감하다. 보노보의 정체성을 어떻게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까.
“음... 침팬지스러운데 아주 다른, 몸집이 작은 유인원이라네요.”
빙산의 일각 같은 답을 하면서 영상으로도 본 적 없는 이 작은 동물에게 미안해진다. 주변 사람들에게라도 이 책을 읽고 받은 느낌을 설파하고 싶건만 표현력의 한계에 갇힌다.
보노보 이름인가. 서문의 전 장에 ‘말루를 위하여’라 적혀있다. 반은 맞았다. 저자의 남편이 아끼던 보노보 이름이면서 저자의 딸 이름이라고 한다. 얼마나 의미 있는 존재이길래 딸에게까지 이름을 붙였을까.
다른 동물의 삶을 통해 인간은 어떤 의미를 찾고 무엇을 얼마나 배울 수 있을까. 사람과 닮은 점이 매우 많다는 이 유인원의 삶이 궁금해진다.
‘보노보 핸드셰이크’는 보노보의 성적 행동을 의미한다. 보노보는 타자를 환대할 때 흥분 상태에서 이런 행동을 보인다. <보노보 핸드셰이크>는 진화인류학자인 저자 버네사 우즈가 보노보의 삶을 연구하면서 겪은 체험담이다. 크게 세 가지 내용이 주를 이룬다.
첫째, 실험으로 밝혀낸 보노보의 삶이다. 같은 진화인류학자인 남편 브라이언 헤어는 침팬지를 대상으로 한 실험의 잔인성에 회의를 느끼다 보노보 연구를 시작한다. 저자와의 만남도 여기에서 이루어진다. 남편과의 만남을 계기로 연구에 동참한 저자의 삶이 보노보와 연결되기 시작한다.
둘째, 콩고 내전이다. 보노보는 특이하게도 콩고민주공화국에서만 산다. 저자는 남편과 함께 세계에서 유일한 보노보 보호구역인 ‘롤라 야 보노보’를 찾아간다. 여러 보노보와 보노보를 돌보는 이들과 인연을 맺는다. 이 과정에서 내전이 끊이지 않는 콩고의 상황이 세세히 묘사된다.
셋째, 저자 개인의 삶이다. 이 책은 함께 진화인류학을 연구하는 부부의 고군분투기이다. 보노보 연구 과정을 배경으로 서술되는 수필이 경쾌하고 소박하다.
동물 실험을 통해 인간이 이루어낸 성취는 어마어마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생명체의 몸짓을 분석하여 패턴을 찾아내고 미래의 행동을 예측한다. 다양한 실험 결과를 토대로 침팬지와 보노보의 차이점이 기술된다. 심리학적인 변화를 객관적인 수치로 증명한다는 건 어찌 보면 무모하지만 그런 시도라도 해보려는 인간의 지적 욕구는 높이 평가할만하다.
평화롭게 방아를 찧는 토끼 문신을 새긴 위성, 달. 평생 지구에서 떠나지 않는 이는 달의 뒷면을 맨눈으로는 볼 수 없다. 자전 주기와 공전 주기가 같아 한쪽 면만을 보이기 때문이다. 침팬지와 보노보를 대상으로 하는 과학 연구의 잔인한 이면을 보며 보름달을 떠올린다. 이제껏 나는 고개만 까딱 들고 달을 바라보며 달 표면 전체를 안다고 착각하는 인간이지 않았을까.
의료 분과와 현장 분과에서 이루어지는 연구 실태를 보며 과학적인 연구에 회의를 느낀다. 인간에게 다른 생명을 좌지우지하거나 해할 권리가 있는가. 해부나 동물 실험을 당연하게 여기던 지난날이 밀물인 듯 마음을 철썩철썩 두드린다.
침팬지를 대상으로 진행되는 실험 과정을 보는 브라이언의 마음은 점점 무거워진다. 그는 철창과 우리라는 공간의 관점이 아니라 선택의 관점에서 대상의 삶을 바라본다. 실험동물들은 학자들이 설계하고 의도한 대로 움직임을 제한당한다. 스스로 갑갑한 상황을 어느 정도 인지할까. 동물이 인간보다 하등하거나 둔감하리라 여기는 건 철저히 인간의 관점에서 내리는 지극히 편한 가정이 아닌가.
누군가 결정을 해주면 정말 편할 텐데. 결정을 잘 내리지 못하던 예전의 나는 종종 이런 바람을 갖는다. 실험 과정에서 선택의 자유를 억압받는 침팬지의 삶을 생각한다. 나는 참 행복한 고민을 했던 걸까. 나의 바람은 결정하거나 결정하지 않거나 선택지가 둘 다 열려있을 때 할 수 있는 종류의 고민이었음을. 스스로 다시 묻는다. 누군가 결정을 해주는 삶은 누군가의 삶인가, 나의 삶인가. 답은 하나이며 당신의 답과 나의 것은 같다.
갇혀있는 인간은 정상적으로 행동하기 어렵다. 가둬놓고 진행하는 동물 대상 실험 결과의 대다수가 혹시 이런 변인 통제의 영향을 받은 건 아니었을까. 누구도 확실하게 답하기 어려우리라.
유인원을 진화인류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저자 역시 보노보 실험을 하면서 그 종이 인간과 다른 길을 걸어간 이유를 깊이 사유한다. ‘어떤 변화가 가장 먼저 일어났을까? 어떤 변화가 나머지 모든 변화로 이어졌을까? 언어였을까? 문화였을까? 지능이었을까?’ 저자의 생각을 천천히 따라가며 덩달아 생각해본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인간이 침팬지나 보노보를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한다고 그들보다 우수하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우수함이 잔인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손가락 끝이 잘린, 음경이 잘린, 사타구니 살이 잘린 침팬지들을 상상하며 몸서리친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두 딸의 인육을 먹어 치웠다는 군인들의 행위를 알리고 죽은 ‘자이나보’라는 여인의 이야기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침팬지가 폭력적이고 이기적이라는 실험 결과와 자이나보의 일화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인간이 드러내는 무자비한 야생성은 본성인가 후천적인가. 인간의 잔인성은 어느 만큼의 한계를 지니는가. 한계가 있기는 한가. 둥둥 떠다니는 물음표에 숨이 턱 막힐 듯 답답하다.
우리가 사람으로 자리매김하는 이유를 밝히는 데 저자의 남편 브라이언은 지극히 자발적인 협력에 초점을 둔다. 이유 없는 관대함이 내포된 행동이다. 그들 부부의 실험에서 보노보는 침팬지와는 다른 성향을 보인다. 사람에 가까운 관대함과 협력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저자는 실험 결과를 보고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어째서 침팬지는 보노보보다 덜 관대할까? 서로 싸우고 죽이기 때문에 편협함을 배우는 걸까? 아니면 편협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서로 싸우고 죽이는 걸까? (중략) 선천적일까, 후천적일까? 아니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걸까? 선천적인 면도 후천적인 면도 조금씩 있는 걸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선택지처럼 결론 내리기 모호하다.
침팬지와 보노보의 감정생활 비교 실험을 보며 동물의 타고난 본성을 생각한다. 보노보 이야기를 통해 사람의 본성을 들여다본다. 전쟁에서 자행되는 폭력성에서 사람의 본성에 내재한 동물성을 바라본다. 숭고한 마음으로 시작된 일이 변질되는 건 뿌리 깊게 놓인 본성 때문일까. 약탈을 일삼는 군인들에게서 핏빛의 비릿함이 훅 끼얹어진다. 후텁지근한 땀 냄새가 섞인 장면을 연상하니 동물과 사람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저자가 실험을 시작한 이유는 유인원과 사람의 차이점을 알기 위함이다. 사람이 그토록 똑똑해진 계기를, 침팬지보다 인간의 본성과 더욱 가까워 보이는 보노보에게 어떤 점이 부족하길래 결정적으로 진화의 가지가 갈라졌는지 궁금해서이다.
결과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다고 어느 만화가가 말했다던가. 보노보는 저자에게 훨씬 폭이 넓고 깊은 문제를 안겨준다.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이다. 인간에게는 뛰어난 지능과 찬란한 문명이 있지만, 저자는 보노보에게서 가장 귀중한 걸 발견한다. 평화이다. 콩고 내전을 포함하여 지역만 달리할 뿐 지구에서 끊이지 않는 전쟁의 참상을 겹쳐보며 깨닫게 된 결론이다.
우리가 과연 보노보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는 생명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과 나처럼 비교적 평범한 사람들 말고 하루 10달러도 되지 않는 돈으로 생계를 꾸리고 빈곤과 질병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을 함께 아우를 때 말이다.
보노보를 돌보고 함께 하며 보노보의 삶을 들여다본 저자가 오랜 난제에 대하여 내린 결론은 깔끔하다. ‘현재의 우리를 있게 하는 건 우리다. 하지만 환경이 우리를 빚기도 한다.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는 문제가 아니다. 항상 선천적인 동시에 후천적이다.’
애초에 선택형이 아니었던 거다. 여성도 부신과 난소에서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을 소량 분비한다지 않은가. 환경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생명체는 선천성과 후천성을 모두 지니게 되는 것을. 비율의 차이로 드러나는 정도가 다를 뿐인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이라면 실험을 통해 보였다는 침팬지의 잔인성도 100% 신뢰할만한 결과는 아니리라. 자유로운 자연이 또 다른 변수가 되었을 것이므로.
방사는 모든 보호구역의 꿈이라고 한다. 보호구역에 오는 보노보들은 한결같이 어미 잃은 새끼들이다. 꺼져가는 생명을 돌보는 사람들은 보노보를 보살펴 태어난 숲으로 돌려보내려는 바람을 지닌다. 자연의 일부인 생물을 자연으로 돌아가도록 만드는 건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희망일 터이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처럼 이 모든 과정이 자연스럽게 지켜지기를 바란다.
세상에 독립적인 행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이어져 있다. 직접적이냐 간접적이냐 드러나는 단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콩고 내전을 묘사한 문장을 따라가며 반성한다. 나와는 무관하다고 여겨오던 전쟁이 원인을 거슬러 가면 나와도 닿아있음을 깨닫는다. 무심코 하는 나의 행동으로 누군가는 영향을 받는다. 나의 배부름이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서 굶주리는 한 아이의 기아와 무관하지 않듯이.
우리는 다른 생물들과도 당연히 이어져 있을 터이다. 자연에서 인간만이 특별한 존재일까. 몇몇 이들은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 유일한 존재이고, 이는 우리만이 진정 슬픔을 느끼기 때문이라 여긴다고 한다. 동료 보노보를 잃었을 때 죽은 생명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는 행동에서 인간의 오만한 선입견을 본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슬픔이 있다’는 저자의 문장이 짐짓 날카롭다.
저자는 끝내 침팬지도 사랑하게 된다. 그 고집과 힘을 그대로 인정하는 현명한 시각을 갖는다. 보노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보노보와 교감한 결과이다.
동물과의 교감은 어디까지 가능한 걸까. 책의 뒷부분에 실린 사진 속에서 흑요석처럼 빛나는 보노보의 눈동자를 떠올린다. 저자의 곁에 앉아 그녀의 팔을 붙들고 머리칼을 쓰다듬는 동물의 온화한 표정을 응시한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진화는 여정이다. 아주 작은 변화가 다음 변화로 이어진다.’ 진화인류학자의 관점이 담긴 문장을 지나며 생명을 다시 바라본다. DNA를 통해 물질뿐 아니라 본성까지 전달된다는 사실은 기적이다. 보노보가 인간만이 지니고 있다고 여기던 이타주의를 지녔음을 입증한 실험 결과를 보며 생명의 신비와 경이를 느낀다. 생명체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 자연에서 우월한 삶은 없다.
여전히 나는 보노보를 정의하기 어렵다. 고작 한 권의 책을 읽은 것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저자는 감사의 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내 기억으로 선물을 만드는 것’이라 말한다. 보노보의 삶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이후로 나는 삶이 조심스러워졌음을 말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생명의 무게가 이리도 무거움을 새삼 깨달았다고 천천히 숨을 쉬며 적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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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1, 2번째 단락 4째줄: 라돈다 → 라돈나
p248, 10째줄: 콩코 → 콩고
p356, 밑에서 8째줄: 못을 → 못할
p356, 밑에서 4째줄: ‘카카caca → ‘카카caca’
p368, 11째줄: 첨지 → 참지
p403, 4째줄: 모르다. →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