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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1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평점 :
미끈한 바디감을 자랑하는 옷장이 한쪽 벽면을 채운다. 무수히 많은 서랍에는 깔끔한 라벨도 부착되어 있다. 갑자기 순간 이동하여 이번엔 거실이다. 왼쪽에 타조 한 마리가 우뚝 서 있다. 기린, 코끼리 몇 마리쯤은 훗! 애완동물로 보유한 동물원 주인 모드를 장착한 인간이 1m 거리에서 태연하게 타조를 바라본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시체를 봐도 눈 하나 꿈쩍 않는 담대 인간. 누구냐, 넌!
당신의 짐작이 맞다. 나의 꿈 이야기다. 이야기라 부르기에는 한없이 빈약하다. 몇 장의 스냅 사진이거나 전송 불량으로 버벅대는 TV 방송사고 영상에 가깝다. 시간은 느리게 흐르다가도 갑자기 정지 버튼이 눌린다. 밥 잘 먹다 눈 한 번 깜빡하면 우아한 조류로 빙의하여 하늘을 쏘다니다 응가의 바다에서 허우적댄다. 기승전결 따위는 눈 씻고 찾아보기 전에 그냥 없다. 혼자서 다 해 먹는 모노드라마의 주인공. 맥락 없음이 이토록 당당한 갑툭튀. 내 안에서 꺼낸 세상인데 나도 모른다.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존재. 내 안에 있는 꿈속의 너, 도대체 누구냐?
두 팔을 활짝 벌린 인간이 서 있는『데미안』의 겉표지. 흐릿한 경계를 보니 꿈이 연상된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이게 나야! 외치는 듯 당당한 뒷모습이다. 어느 순간 어깻죽지 양쪽에서 날개가 뻗어 나와 순식간에 날아버릴 것 같기도 하다. 그림일까, 사진일까. 누구의 작품일까. 검색해보니 작가는 Kamil Vojnar, 체코 슬로바키아 모라비아 출신으로 사진을 이용하여 회화적 작품을 만드는 화가라고 한다. 사진과 그림의 합체인 셈이다. 그의 작품들을 훑어보니 대체로 몽환적이다. 안개 낀 숲 너머의 형체들을 보는 듯하다. 책을 읽고 나서 다시 표지를 보니 책에 담긴 내용과 닮은 속성이 보인다.
2018년 12월, 『데미안』을 처음으로 만났다. 두 번째 만나는『데미안』은 어떤 느낌일까. 2년 치의 경험과 사고를 품은 나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그때 쓴 리뷰는 일부러 다시 읽지 않았다. 똑같은 거리를 걸어도 어제와 오늘의 내가 느끼는 마음은 분명 다를 테니. 글자로 이루어진 거리의 풍경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갈수록 호기심이 점점 강해졌다.
매력적인 1분 듣기인양 3페이지를 읽었을 뿐인데 작가의 관점에 확 끌려든다. 인간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동시에 언급하는데도 억지스럽지 않다. 공감이 가는 문장이 많았다. 40대 초반의 헤세가 지녔던 생각에 반해버렸다. 주인공도 등장하지 않은 데다 구체적인 내용은 나오지도 않았건만. 차례에도 표시되어있지 않는 3페이지를 건너며 벌써 좋았다.
이 책에는 상반된 매력을 지닌 두 세계가 겹겹이 담겨있다. 대륙붕에서 심해저 버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커플이 준비되어 있다. 어디까지 다녀왔니? 발만 담그고 돌아온 대로, 잠수복 장착하고 해구까지 갔다 온 대로 독자들이 체험한 풍경은 다양하다.
두 개의 세계라 하니 ‘마리아’가 포함된 노래가 떠오른다. 파이프오르간 BGM이 우아한 공기 위로 성스럽게 울려 퍼지는 <아베마리아>. 반면 ‘자 지금 시작해 조금씩 뜨겁게 우~~ 두려워하지마 펼쳐진 눈앞에 저 태양이 길을 비춰 우~~ 절대 멈추지마’라 외치는 <마리아>도 있다. ‘태양’이란 단어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크 모드 상남자 포스를 뿜어대며 후련함을 선사한 노래이다. 아베마리아의 두 가지 버전은 상반된 색채를 띤 채 모두 매력적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두 개의 세계처럼.
레벨 1. 처음에는 빛과 그림자로 비유할 수 있는 세계를 가볍게 묘사한다. 말 잘 듣는 모범생과 말썽만 피우는 소위 문제아가 살아가는 세계이다. 양지에 있던 주인공 싱클레어의 방황은 음지의 세계에 발을 담그면서 시작된다. 두 세계는 모두 겉으로 드러나 있어 각각의 차이점이 구체적으로 와 닿는다.
레벨 2.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시작으로 주인공의 양대 산맥, 데미안이 등장한다. 책 제목이기도 한 『데미안』은 주인공의 여정에서 도화선이 되어주는 친구 이름이다. 이는 악마를 의미하는 단어와 관련성을 보인다. 작가는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대화를 통해 선과 악이라는 주제에 접근한다. 종교적 색채가 짙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 이야기, 베아트리체, 야곱의 싸움 등을 언급하면서 인간의 본질에 한 걸음 더 들어간다. 데미안의 주장은 혁신적이다. 신만큼 악마의 존재도 인지해야 함을 말한다.
종종 인간의 본성은 성악설에 가깝다고 생각하곤 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생각이 조금 달라진다. 어쩌면 인간은 선과 악을 모두 지닌 채로 태어나는 게 아닐까. 그러다 개개의 기질에 따라 다르게 발현되는 것이 아닐까. 나이가 들수록 타고난 성과 반대쪽 성호르몬이 많아진다는 말처럼 두 가지를 모두 지니고 있다가 말이다. 그렇다면 뼛속부터 천사일 것 같은 분과 반대 성향의 인간과 착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쁜 놈의 존재가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레벨 3. 껍질을 까서 조금 더 걸어 들어가면 정신세계를 만나게 된다.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이다. 의식 세계에만 머물던 주인공 싱클레어는 무의식 세계의 존재를 깨닫는다. 몽환적인 분위기로 꿈속을 넘나들면서 현실과의 경계가 무너진다. 판타지적인 요소가 등장한다. 하긴 데미안의 등장부터가 살짝 설화적인 냄새가 나기는 했다. 이 순간만을 기다린 작가. 지금껏 드러났던 내용을 모아 모아서 심리학적 세상으로 끌고 들어간다. 제목만 보면 데미안은 분명 싱클레어와 쌍벽을 이루는 주인공 투탑이다. 하지만 데미안은 대나무의 마디처럼 싱클레어의 삶에 중간중간 경계로 작용할 뿐이다. 나머지는 싱클레어의 몫이다. 주인공은 여러 인물과 만나면서 허들을 넘듯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 이 책을 연극화한다고 가정했을 때 대화 장면만을 따로 놓고 보면 오르간 연주자인 피스토리우스의 대사도 만만치 않다. 대사량이 엄청 많았던 오르간 연주자를 통해 삶의 전체성을 의미하는 아프락사스를 향하는 본격적인 포문이 열린다.
밝은 세계, 오롯이 천사만 살 것 같은 세계에는 우리가 의식하는 ‘나’, 에고(ego)가 있다. 이와는 정반대의 위치에 어두운 세계가 있다. 그 안에 있는 무의식적인 ‘나’를 포괄하여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 버전이 진짜 나, 자기(The Self)이다. 두 세계를 상징하는 경험의 허들을 넘으면서 방황하던 주인공은 결국 두 세계가 통합된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찾는다. 진정한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레벨 3까지 조금이라도 들어갔다 온 걸까. 자신은 없지만, 이 책의 별칭을 하나 지어본다. 일명 ‘양파 북’? 깐 만큼 보이니까.
꿈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관심이 많았다. 꿈에서 깨어난 직후에는 기억에서 사라지기 전에 검색부터 했다. 신묘한 분위기의 도사님 말투부터 취미 정도의 가벼운 말투까지 다양한 해석이 쏟아졌다. 검색어 ‘옷장’에 이토록 수많은 해석이 존재할 줄이야. 옷장이 열리는 꿈, 닫히는 꿈, 옮기는 꿈, 사라지는 꿈, 정리하는 꿈, 부서지는 꿈, 거기서 뭔가 나오는 꿈. 256색상 환을 연상케 하는 해석들이 ‘옷장’이란 두 글자 뒤에 줄줄이 매달렸다. 몇 가지 해석을 읽은 다음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나를 가장 잘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나라고. 각자의 삶이 다르고 대상들과 연결된 수많은 요소는 개별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같은 단어를 사용할 뿐 개개인에게 ‘옷장’의 의미는 고유할 수밖에 없다.
무의식적인 세계는 꿈속에서만 표현되는 건 아닐 터이다. 무의식에 끌려 행동하게 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고 들었다. 나도 모르는 손짓, 무심코 바라본 눈길을 통해서도 내면의 조각들이 떨어져나온다고 생각한다. 미워하는 인간에 대한 반응 역시 그의 모습이 내 안의 어딘가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심리학자들은 무의식의 세계를 중요하게 다룬다. 보이지 않아 알지 못하는 세계를 무시하기에는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유명 심리학자의 저서 중 유일하게 읽은 작품이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다. 프로이트 못지않게 언급되는 심리학자가 융이다. 두 학자가 주장하는 이론의 차이점을 언급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융의 이론이 꽤 흥미로웠다는 느낌은 기억한다. 『데미안』의 심리학적 해석 기반은 융의 심리학이라고 한다. 언젠가는 융의 책에도 도전해보고 싶다. 의외로 자신을 자세히 관찰하는 사람은 적다. 데미안이 싱클레어를 포함하여 다른 이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과정의 핵심은 관찰이다. 헤세는 무의식의 세계를 진지하게 알아가야 함을 말한다. 무의식은 누구나 품고 있지만, 단순히 지니고만 있느냐, 이를 알기도 하느냐는 아주 큰 차이라고.
200쪽도 안 되는 얇은 책을 일주일 넘게 붙들고 있었다. 삶의 가장 원초적인 부위에 접근한 책이어서일까. 문장 하나하나에 빠질수록 책장은 느리게 넘어갔다. 묵직한 심해저의 바닷물에 마음을 실으면 이런 기분이 들까. 깊고 느리고 차가운 메시지가 마음으로 들어왔다. 예전에는 새의 알까기가 은근히 간지나 보이더니 이번에는 다른 느낌이다. 작가는 양면성을 지닌 대상들을 그대로 인정해야 함을 주장한다. 빛과 어둠이 분리될 수 없는 커플로 존재하듯 신과 악마의 존재 역시. 두 가지 세계를 인정한 ‘나’란 존재가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를 모두 안고 진짜 ‘나’가 되는 것처럼.
이 책에는 세계가 담겨있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라기보다 한 사람이 담고 있는 세계를 의미한다. 한데 의미를 확장한다면 프랙탈의 원리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내 몸 안에 있는 바이러스의 입장에서는 나의 몸이 우주가 되는 것처럼. ‘나’라는 한 사람을 정확하게 알아가는 과정은 ‘우주’를 알아가는 과정과 본질적인 면에서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무의식에는 어떤 본성이 담겼을까. 꿈을 통해 무의식의 방으로 들어가는 거라면 꿈속의 세계야말로 굉장하지 않은가. 바라보는 것들이, 듣고 만지고 오감으로 흡수되는 모든 것들이 무의식의 세계에 차곡차곡 쌓인다면?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어느 순간 저절로 튀어나온다면? 살짝 소름이 돋는다. 『데미안』을 읽고 나니 밖으로 향하던 시선이 내 안을 향하게 된다. ‘나’이지만 내가 모르는 ‘나’를 알고 싶어진다. 일생이 걸리는 여정을 조금 더 걸어가게 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