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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평점 :
이진법은 명쾌하면서도 단순하다. 0과 1로만 숫자 표현이 가능하다. 짤막한 아라비아 숫자라도 엿가락처럼 쭉 늘어난다. 걱정 없다. 컴퓨터에게 길이는 문제가 되지 않으니. 이진법을 사용하는 로봇. 기계에게는 망설임이 없다. 잘못된 결론일지라도 오류 앞에서 당당하다. 참 또는 거짓을 바로 외친다. 로봇의 삶은 ON과 OFF로 이루어진다. 삶이 1이라면 죽음은 0. 중간이 없다.
반면 인간은 복잡하다. 애매모호하다. 결론을 내리기까지 수많은 망설임을 거친다. 어정쩡한 세모가 삶의 전 과정에 장맛비처럼 쏟아진다. 인간의 삶은 0과 1사이를 무수히 오가는 순간들의 집합이다.
만일 당신에게 삶과 죽음의 명쾌한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불로장생 GO? 이제 그만 STOP? 워워,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름다운 동양화는 잠시 접어두자.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란 말이다. 당연히 사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과연 그럴까? 진지하게 다시 물으니까 불로장생을 외치려다 불초소생 모드가 된다고? 여기 판단을 돕기 위한 소설이 있다.
『작별인사』는 로봇과 인간이 공존하는 미래를 그린 이야기이다. 작가의 말처럼 이야기는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삶을 수백 배, 수천 배로 증폭시켜주는 놀라운 장치이며, 살 수도 있었던 삶을 상상 속에서 살아보게 해주니까. 이 책의 주제는 한마디로 ‘선택’이니 얼떨결에 햄릿이 된 당신의 선택지는 윤곽을 드러내리라.
선택을 중심으로 소설을 바라본다면 주인공은 철이, 선이, 민이 등 세 명이다. 이들은 각각 인간형 로봇, 인간, 로봇을 대변하는 캐릭터이다. 이야기는 휴머노이드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주연급 조연인 최 박사의 연구 주제로 언급되는 <인공지능의 윤리적 선택>은 작품의 주제를 관통한다. 인간에 가깝게 구현된 로봇은 인간 삶의 궤도를 선택할 것인가, 로봇의 삶을 따를 것인가. 인간의 삶과 로봇의 삶으로부터 각 존재의 죽음을 목도한 휴머노이드는 결국 그가 생각하는 최선의 끝을 선택한다.
모바일 캡슐, 생분해되는 그릇, 휴머노이드, 하이퍼 리얼 휴머노이드, 인간다운 휴머노이드, 재생 휴머노이드, 휴머노이드 재활용 업체, 폐휴머노이드, 폐로봇, 플라잉캡슐, 사용감이 없는 아이, 유전자 배양육, 아파트형 농장, 무선통신모듈, 디지털 구름, 기계지능. 상상만 해도 빠른 속도감을 안겨주는 미래의 용어들이 보물 상자의 금화인 듯 쏟아져 나왔다. 아직은 현실감 없는 이야기이면서도 언젠가는 이런 풍경이 펼쳐질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에 묘했다.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 이야기에 처음부터 빠져들었다. 이런 모습이 아닐 수도 있지만 이런 모습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0과 1사이를 롤러코스터처럼 오가며 미래를 상상하는 시간을 보냈다.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한 공유님의 심장처럼 내 마음은 책 한 권을 통과하는 동안 우주에서 인간까지 진자운동을 하였다. 작가는 순간순간 인간의 삶에 대한 질문을 두고 갔다. 그 안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찾아보라고, 가장 적절한 마침표를 선택해보라고.
제목을 볼 때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다. 사랑이야기인가. 겉표지만 보고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며 멍하니 바다를 응시하는 내용이라 지레짐작했다. 왜 책 제목을 보고 연인과의 관계를 떠올렸을까. <뇌의 착각>을 제목으로 하는 내셔널지오그래픽채널의 짧은 영상이 생각난다. 뇌는 주변의 상황을 조합한 다음, 이미 있는 데이터와의 싱크로율을 비교분석하여 짧은 시간에 상황을 판단한다는 거다. 이런 이유로 종종 오류를 일으킬 수 있다나.
착각이 깨지는 것이 성장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유튜브 영상에서 어느 뇌 과학자는 말한다. 인간의 뇌는 실패를 하면서 점점 그것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좌절만 하지 않으면 실패가 데이터화되어 보다 나은 결과가 도출된다고 한다. 더 많이 느끼고 타인과 교감할수록 훨씬 풍부해진다는 작가의 문장처럼. 감정의 데이터도 뇌에 축적되면서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리라.
아마도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담겨있을 거다. 기쁨, 슬픔, 노여움, 아픔, 행복 같은 감정의 영역에서부터 논리, 비교, 분석 같은 이성적인 영역, 삶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살아가면서 경험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모든 정보들이 보편적이고 특별한 장소에 새겨져있으리라. 다만 전원 버튼을 누르지 않아 눌리지 않은 스위치처럼 비활성상태로 잠들어있을 지도 모른다.
책은 질문이 담긴 스위치이다. 『작별인사』는 삶과 죽음과 우주와 인간과 미래의 스위치를 누른다. 인간답다는 건 무엇인가.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가. 육체와 영혼이 결합된 생명체에서 하나만이 존재한대도 인간이라 칭할 수 있는가. 기계와 인간이 결합된다면 어디까지를 인간이라 말할 수 있는가. AI 발달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감정도 0과 1의 코드로 입력이 가능한가.
인간과 기계의 가장 큰 차이는 감정을 포함하는 마음의 영역이리라. 작가는 묻는다. 마음은 기억일까, 어떤 데이터 뭉치일까, 외부 자극에 대응하는 감정의 집합일까 하고.
내 생각에 마음은 감정의 감각이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피부감각 등 몸은 다섯 가지 감각의 형태로 외부 자극을 수용한다. 몸과 마음은 연결이 되어있다고 본다. 몸으로 느끼는 감각이 뇌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감정의 문을 두드리며 지나가는 거라고. 다양한 몸의 감각은 반드시 감정의 영역을 통과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감정의 스위치가 켜져 마음으로 나타나는 거라고 생각한다.
간단한 감정이라도 뇌와 몸의 모든 부분이 함께 작용하여 느껴야 한다는 문장이 인상 깊다. 뺨을 간질이는 햇살처럼 결이 섬세하다. 문장 하나도 허투루 쓰이지 않았다는 느낌이랄까. 챕터의 연결이 자연스러워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흡인력 있는 전개로 가독성이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읽기를 권한다. 각각의 챕터에서도 완성된 퍼즐만큼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메바와 세균 등 단세포 생물의 번식력은 엄청나다. 세상을 뒤덮어버릴 듯 증가한다.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다. 미세한 변수에도 전멸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결국 생태계의 주도권은 다양한 변수로 재현 가능한 존재가 쥐는 듯하다.
인공지능에서 단세포 생물을 떠올린다. 0과 1로 존재하는 대상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다양성을 지닌 한 약해보이더라도 희망은 있다. 만일 로봇이 인간만큼의 다양성을 지닌 존재로 거듭난다면? 환경에 따라 유성생식과 무성생식을 하는 히드라와 같은 성향을 보이게 된다면? 여기까지. 나머지 상상은 당신의 몫이다.
MBTI 붐이다. 무료간이검사를 해보니 ISFJ 였다 최근엔 INFJ 로 나온다. 언젠가는 E가 나온 적도 있다. 불과 몇 년 새에도 조금씩 뒤집히는 게 인간의 성격이다. 16가지 유형이지만 두 가지로 나뉜 성향의 %까지 고려하면 무수히 많은 채도의 스펙트럼으로 표현되리라.
소설 속 박사가 AI 고양이를 만들면서 성격을 설정하는 데 고민하는 장면에 놀란다. 로봇의 성격이라니!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발상이다. 표준화된 AI의 성격은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설정 권한이 주어진 이에게 달려있으리라. 인종이나 민족을 구분해온 인류의 역사를 돌아본다. 미래에는 AI의 성격 결정권을 쟁탈하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책 속에 등장하는 천자문 속 문장들은 우주의 속성을 자연스레 끌어온다. 가끔 우주를 상상하면 몸이 붕 뜨는 것 같다. 검고 검은 고요의 세계. 소리조차 전달되지 않는 광막한 공간. 독자의 시야는 순식간에 우주로 확장되다 그 안의 인간 존재로 시선이 머문다.
우주 사이에서 밀고 당기는 천체들의 힘을 상상한다. 색에도 넓이가 있다면 가장 넓은 색은 검은색이 아닐까. 블랙홀인양 모든 존재들을 흡수하니까. 이미 우주 자체가 거대한 블랙홀인지도 모른다.
밤의 하늘이 본질에 가깝다는 옛 중국인들의 생각에 공감한다. 낮에는 태양의 강렬한 빛 때문에 우주의 본모습이 가려진 거라는 문장을 읽으며 태양빛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안대를 상상한다. 습관적으로 하늘 천, 따 지를 외칠 때만해도 ‘천지현황’의 의미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건만.
우주의 대부분은 그냥 텅 비어있다. 원자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은 프랙털의 중첩인걸까. 우주 안에서 별들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크고 작은 천체들이 얼핏 원자핵 주위를 도는 전자들과 흡사해 보인다. 전자구름으로 모호하게 표현하더라도 거시적으로 바라보면 비슷한 느낌이다.
‘무해하고 장엄한 카오스’라는 작가의 문장이 마음에 들어온다. 열역학 제2법칙이 지배하는 거대한 우주. 헝클어진 채 아무 일도 없던 듯 수많은 삶과 죽음을 품는다. 질서를 세워도 무너뜨리는 거대한 힘이 담긴 대상이다. 지구의 시간과 우주의 시간을 언급하는 작가를 따라가며 그 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시간을 생각한다.
전체 블록을 설정하고 Ctrl+C 키를 누를 때마다 숨을 멈춘다. 손가락 하나 잘못 놀리다가는 1초 만에 망하기 때문이다. 삭제가 간단해지는 세상이다. 지우개가 왕복하는 시간만큼 느리게 삭제되던 시절을 건너 Backspace 키나 Del키 하나로 순식간에 삭제되는 시대에 서있다. 글을 쓰는 동안 나만 아는 이야기는 우주에서 태어나고 죽는 존재들처럼 탄생과 소멸을 반복한다.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간단하게 보내버릴 수 있는 미래, 선택받은 소수가 원자핵인양 세상을 조종하고 나머지 존재들이 전자처럼 떠도는 세상이 펼쳐질까.
삶은 평생 나를 바라보는 여정이다. 매순간 나를 바라보기 위해 초점을 맞추는 과정으로 채워진다. 지금 이순간도 나의 마음은 다양한 환경의 자극에 반응하며 0과 1사이를 오간다. 운전석 앞 유리에 그려진다는 내비게이션처럼 마음이 색깔 있는 홀로그램으로 펼쳐진다면 어떨까.
영원하지 않은 것을 보고 덧없음을 느끼던 때도 있었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는 데 성공했다면 삶이 행복했을까. 육체를 옷처럼 바꿔 입고 데이터로 지속되는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영원한 삶과 영원하지 않은 삶 중 어느 쪽이 더 의미가 있을까. 몇 년이 지나도 그대로인 조화보다 며칠 만에 져버리는 생화가 지금의 내게는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한계는 절실함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이 예정되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있는 사람과 나의 감정이 유일한 의미로 절실해지리라. 절실한 순간을 촘촘하게 건너온 마침표는 또 다른 시작의 스위치로 작용할 테니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작별인사의 의미를 여기서 찾아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