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12월
평점 :
나비인 듯 꽃인 듯 날개인 듯 펼쳐지는 무늬를 좋아했다. 반으로 접어 가까이 하기 전까지는 어떤 무늬가 만들어질지 전혀 예측하기 어려운 스릴감이 있다. 이윽고 나타난 화면은 와! 라는 감탄사를 이끌어낼 정도로 화려하다. 어릴 적 미술 시간에 좋아했던 기법이다. ‘데칼코마니’가 좋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별 것 아닌 소박한 무늬가 별 것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거울처럼 빛내주는 효과 때문이다. 그림에서 배어나오던 ‘공감’과 따뜻한 분위기가 마냥 좋았던 걸까.
이 책은‘여자, 존재, 사랑, 일’이라는 4개의 소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책 안에 담긴 문장들에서 수많은 공감을 느낀다. 그것은 작가만의 이야기가 아니었고 나의 이야기이자 또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였다. 담담하고 당당하고 솔직하게 그려낸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와 데칼코마니가 되어 활짝 펼쳐졌다.
‘고통스러운 감정은 정확하게 묘사하는 순간 멈춘다고 했던가.’(p7) 감정과 느낌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문장은 치열한 고통에 관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쾌한 사이다가 된다. ‘내가 구상하는 좋은 세상은 고통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는 세상이다.’(p12)라는 문장은 부드러운 연고가 되어 예전에 말라붙어 흔적으로 남아있는 눈물자국을 솔솔 어루만진다.
‘삶은 행복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날들로 이루어지는 것’(p10)이라는 문장을 읽고는 박음질을 하듯 매순간을 살아가고 싶어진다.
여자라는 ‘본분’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1부. 여자로 태어나 여자로 살아가는 영혼의 고민과 울컥함을 이토록 세세하게 묘사한 책이 또 있을까. 이제껏 읽어본 여성의 삶에 대한 글 중 가장 속 시원하게 서술된 책이다.
스스로에게, 세상을 향해 수없이 던졌던 물음들에 저자는 ‘모든 물음은 질문자의 입장과 욕망을 내포하는 법이다.’(p35)라며 냉철한 시선을 던진다.
결혼 후, 많은 여성들에게‘밥’이 가져다주는 일상적인 스트레스는 당사자가 아니면 이해하지 못할 무게감을 지닌다. ‘밥에 묶인 삶, 늘 떠남의 욕망에 시달린다.’(p56), ‘나에게 밥은 (중략) 그 밥을 대체 누가 차리느냐의 문제다’(p67) 남이 차려주는 밥이 가장 맛있어진 나는 맞아, 맞아! 하며 맞장구를 친다.
‘한쪽의 수고로 한쪽이 안락을 누리지 않아야 좋은 관계다.’(p44~45)는 울컥했던 문장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무심코 가해지는 폭력을 생각한다. 이 땅의 수많은 어머니들은 가장 가까워야할 대상과 그리 좋은 관계는 아닌듯하여 씁쓸하다.
중간이나 끝 부분에 삽입된 시의 구절도 좋았다. 1부에서 가장 좋았던 시는 정일근의 <그 후>이다. ‘내 생을 담은 한 잔 물이 / 잠시 흔들렸을 뿐이다 / 단지 그것뿐이다’뭐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느낌으로 확 와 닿은 행이다.
은유라는 작가의 글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했다. 글로 만난 존재의 실체가 실재의 모습과 얼마나 근접해 있을지 모르지만, 책 한 권을 통해 개인적인 느낌으로만 감히 판단하건데, 그녀는 존재의 삶에 대하여 끊임없이 고민하고 물음을 던진 이이다. 존재라는 ‘물음’을 담고 있는 2부. 한 문장, 한 문장에서 정갈하게 구워진 도자기의 시간이 오롯이 느껴진다.
하루에도 몇 번씩 덮쳐오는 순간들이 있었다. ‘소낙비를 맞고 나면 우산이 필요 없다.’(p123), ‘나는 삶 외부에서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신이 아닌 나의 하루를 모셔야 했다.’(p126) 나의 하루를 모신다는 서술이 지금 이 순간에 서있기까지 통과해온 시간들을 생각나게 한다. 바늘 끝으로 콕콕 찌르는 듯 마음이 따끔따끔하다.
질문을 하는 자에겐 가볍고, 질문을 받는 자에겐 한 없이 무거운 질문이 있다. ‘그 때 왜 그랬니?’무심코 상대의 마음을 아프고도 답답하게 하는 말이다. 누구나 그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최선을 길을 가는 것이므로. 저자의 한 문장에서 위안을 얻는다. ‘아무도 모른다. 그가 그렇게 된 것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므로.’(p140)
관계에 대한 생각이 신선하다. ‘생의 시기마다 필요한 옷이 있고 어울리는 색과 취향이 있듯이 삶의 체형에 맞게 인연도 변해간다.’(p130) 스스로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멀리 하게 된 인연들이 있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간혹 마음이 묵직했는데 이 말을 곱씹어보니 어렴풋이 이유를 알 것 같다.
결혼을 했든 안했든, 나이가 많든 적든, 남자든 여자든 관계에 대한 갈증이 일 때가 있다. ‘역할이 아니라 영혼이 만나 마주하니 좋았다.’(p162) 그런 사람 한 사람쯤 내 곁에 두고 싶다는 욕심에 살짝 자책감이 들곤 했는데, 이 문장에서 많은 위안을 얻는다. 외적인 모든 조건을 떠난 영혼을 만나 마주하는 좋은 느낌. 언젠가 그런 영혼을 만날 수 있을까.
나를 옭아맨 테두리를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 가슴 뛰는 두근거림으로 급하게 만남의 장소로 향하던 몇몇 순간이 기억난다. ‘누구를 만나고 싶은 자가 아니라 어디로 떠나고 싶은 자가 달린다.’(p163) 생각해보니 그랬다. 만날 사람을 보고 싶은 마음보다 일상을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장면이 있었다.
3부는 사랑이라는 ‘의미’를 다룬다. 꽤 오랜 동안 삶의 목적이 ‘사랑’이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 때 했던 수많은 고민들을 회상해본다. 책에서 다룬 이야기들에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아쉽게도 뭔가 채워지지 못한 느낌이 있다. 다른 3개의 주제에 비해 내 마음과 접점으로 만나 크게 울리는 내용은 찾기 어려웠다.
일이라는 ‘가치’를 말한 4부에서는 경계하고 추구해야 할 삶의 자세를 배운다. ‘돈의 쓰임이 곧 삶의 자세이다.’(p237)라는 문장을 읽고 나서 소비 생활이 조금 더 과감해진다.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선물을 할까 말까, 책을 구입할까 말까 망설였을 때,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하는 지침서가 되었다.
‘난 그것을 늙음의 징조로 본다. 살지 않고 삶을 판단하는 것.’(p242) ‘사회적 약자는 가진 게 없는 사람이 아니라 무리한 질문에 답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몸으로 겪었다.’(p280) 항상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문장이다. 젊거나 어리다고해서, 이만큼 살아왔다고 해서 그 어떤 삶도 쉽게 단정 짓거나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일이다.
4부에서는 삶의 깊이를 생각하게 하는 좋은 시도 만났다. 이영광의 <헌책들>(p244~245)과 김수영의 <구름의 파수병>(p271~272)이 기억이 남는다. 그들의 시를 읽고 나니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겸허해진다. 내가 걸어가야 할 삶의 방향을 곰곰이 생각한다.
작가는‘어떻게 할까는 누구와 할까의 문제로 풀면 낫더라는 것.’(p295)을 배웠다고 했다. ‘누구와’의 범위를 좀 더 넓혀본다. 책을 통해서 얽힌 문제들을 풀어가는 것도 괜찮겠다. 이 책을 통해 평소 고민하던 문제에 대한 답을 많이 얻었으니까. 내 삶에 대한 답은 물론 내게서 나오는 것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내 마음 속 어딘가에 숨어있는 답을 조금 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 한 권의 책은 끊임없이 치열하게 세상과 싸우는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가 보여주는 삶은 점점 투명해져서 나의 삶도 투명한 공감으로 울린다. 책 표지의 그림이 마음에 남는다. 스스로 혹은 타인의 뒷모습도 살펴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뒷모습을 보이고 앉아있는 이는 속옷만을 입고 있다. 속옷만 입고 있을 수 있는 장소는 자신의 민낯을 드러낼 수 있는 곳이다. 사람들의 민낯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투명한 풍선은 약해보이지 않는다. 누군가의 시에 묘사된 ‘연약한 속살에 단단한 씨를 숨기고 있는 앵두’처럼 단단한 무언가가 담겨있을 것 같다.
‘세상에는 무수한 삶이 있다. 이 말은 세상에는 무수한 아픔이 있다는 뜻이다. 알고 싶은. 그러나 알 수 없는. 그래서 보고도 모르는.’(p174)
내 삶을, 내가 바라보는 주변의 삶을 투명하게 만들고 싶어진다. 물기어린 삶들이 만들어내는 흐릿한 유리창을 조용히 닦아 투명하게 보여주는 글을 쓰고 싶다. 내 글을 읽고 데칼코마니를 떠올리는 누군가의 삶을 상상해본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 오타
p5 7번째 줄 : 부끄러운 일었다. → 일이었다.
p83 밑에서 7번째 줄, p161 마지막 줄 : 베시시 → 배시시
p105 마지막 줄 : 젊은들이 → 젊은이들이 또는 젊음들이
p213 밑에서 2번째 줄 : D, E. F → E와 F 사이에 쉼표가 와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