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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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프일까. 한 달이 넘게 어떤 글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마음에 변비라도 걸린 듯 혼란스러운 감정과 생각의 찌꺼기가 쌓이고 또 쌓인다. 의도적이지 않은 쌓임의 덩어리는 실체가 없다. 찬란하게 빛나는 육각의 눈 결정이 아니라 무게에 꾹꾹 눌려 뭉뚱그려지다 잿빛 얼음덩이로 그늘진 구석에 숨어들어 간다. 문장이라도, 단어라도 끌어올리려 안간힘을 쓴다. 절뚝거리는 손가락이 간헐적으로 키보드를 걷는다. 말을 처음 배우는 아기처럼 분절된 문구가 더듬더듬 드러난다.

글은 양방향 화살표인가. 나로부터 나오지 않는 글은 내게 들어오지도 않을 작정인가. 책 속의 글자가 설익은 밥알인 양 심장의 외피를 겉돌다 떼구르르 달아난다. 질척한 감정들 사이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듯이. 책장을 몇 번이나 들춰보다 덮기를 반복한다. 책상 위에 놓인 책 표지를 바라만 보다 근 한 달을 어정쩡하게 날려 보낸다.

다른 이의 말에 집중하기가 어렵다. 양옆 시야를 가린 경주마처럼 종종 주변 풍경을 놓친다. 융통성 없는 시선은 어찌 눈앞만 질주하는가. 키오스크에서 코앞에 버젓이 드러나 있는 메뉴를 발견하지 못한다. 몇 번의 동공 지진 후, "먼저 하세요." 타발적인 양보심을 발휘한다. 생각한 대로 잠시 바뀌어 보이는 글자의 변신술을 경험한다. 방금 들은 말도 기억나지 않거나 헷갈린다.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나이로 인한 인지 장애를 슬그머니 의심해 본다.

 

온 식구의 생일과 전화번호를 또렷이 기억하시는 80대 중반의 친정어머니가 스친다. 당신에 비하면 아직도 팔팔한 50대 청춘이니 세월에 책임을 전가하기에는 다소 민망하다. 어쨌든 빠르게 녹아내리는 눈인 양 자존감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푸념인 듯 중얼거린 잿빛 시간, 자존감이 바닥을 구르던 시간을 과거형으로 표현한 건 지금은 서서히 벗어나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 시작에는 김기태의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이 있다.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자에게 주어진 기간 미션이었으니까. 독서 모임 날짜가 임박해 간다는 건 벼락치는 읽기라도 시작하지 않으면 리뷰고 나발이고 몽땅 망해버릴 데드 라인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의무감이 슬럼프의 등을 밟고 올라선다.

'작가의 말' 없이 세상을 향해 던져진 글 덩어리를 접한다. 작가는 글로 말하는 존재이니 굳이 '작가의 말'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한 번 펼치니까 느리게나마 읽힌다. 다행이다.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내용을 기억하려 긴장하지 않아도, 맥락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이해가 되는 내용이다. 단편 모음집이니 짤막한 호흡으로도 감당이 된다. 대하소설이거나 스펙터클다이내믹한 이야기였으면 어쩔 뻔했을까. 질식할 듯 마음이 답답하거나 감성의 온도 차로 인해 유리화된 멘탈에 균열이 생겼을지 모를 일이다.

 

그의 문장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다. '일하면서 듣기 좋은 카페 음악, 생각 없이 틀어만 놔봐~' 음악을 듣는 기분이랄까. 산책하는 속도로 독자를 이끄는 글이다. 그렇다고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피라미드같은 사회 구조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들, 생태계로 비유하자면 생산자의 범주에 포함되는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이다.

역도 선수 소녀, 케이팝 아이돌 그룹의 팬, 사회가 요구하는 무난한 삶을 걸어가는 직장인, 가난으로 공감대가 형성되는 두 사람, 짝짓기 예능 프로그램에 참여한 여자, 불안을 품고 사는 노인, 교육적 딜레마 사이에서 고민하는 교사, 강박증에 얽매인 남자,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 배출한 스타와 팬. 각자의 자리에서 진지하게 살아가는 아홉 편의 서사 앞에서 마음은 서서히 차분해진다.

사회라는 연극 무대에 서는 소수의 주인공이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 1이거나 무대 배경으로 오도카니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이거나 주인공을 비추는 핀 조명이거나 군무를 추는 N분의 1인이거나 은은하게 흐르는 BGM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그들의 독백과 외침을 경청하며 공감하게 만드는 흡인력, 김기태 작가의 글이 지닌 힘이다.

작가의 의식의 흐름을 대략이나마 따라가고 싶어 최초의 작품부터 출간 순서대로 읽기로 한다. 여덟 번째로 배치된 작품의 문고리를 잡아당긴다. 2022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 당선작 무겁고 높은부터 시작한 건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 된다.

 

무겁고 높은에서 역도 선수인 고3 송희의 목표는 100킬로그램의 바벨을 버려보는 거다. 들어보는 게 아니라 버려보는 것. 그녀는 버려보기 위해 들어 올린다. 버리는 것과 떨어뜨리는 게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전자와 후자를 판단하는 기준은 자발성이다. 스스로의 의지로 무게로부터 벗어나는 행위는 삶의 속성과도 자연스레 중첩된다. 시선의 반전을 꾀하는 작가의 관점에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녹록하지 않은 가정 환경이 묘사되면서 주인공을 둘러싼 삶의 무게가 그려진다. 그녀의 독백을 따라가면 삶을 마주하는 진지하고 맑은 용기를 만난다. 묵직하면서 당당한 태도는 절로 내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이 된다. '역도' 대신 ''으로 주어를 바꾸어 읽어도 괴리감이 없다. '앉아서 시작하고 일어서서 끝낸다'던지, '들어보고 싶다기보다 버려보고 싶었다'던지, '내 손안에 있는 내 것. 내 몫의 약속'이라든지. 시린 삶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삶에 대한 열기를 감지한다. 저온 고압에서 만들어진다는 불타는 얼음 '하이드레이트'를 떠올린다.

작가는 노력 끝에 성공한다는 평범한 전개를 거부한다. 현실은 동화가 아니니까. 선발전에서 목표 달성을 하지 못하고 바벨을 떨어뜨린 주인공은 운동과는 무관한 길을 걷게 될 예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그녀의 목표는 자신과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드디어 100킬로그램을 깔끔하게 버리고 역도를 그만두는 장면에서는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문장의 온도가 고스란히 마음에 스며들어 덩달아 심장이 뜨거워진다.

 

조금씩 마음이 열리면서 문장 길 산책에 약간의 속도가 붙는다. 세상 모든 바다에서는 공연장 안에만 있는 평화를 바라보고, 전조등에서는 뭔가 다른 게 되어볼 수 있지 않느냐는 문장 앞에 멈추며 한 인간의 본질을 가늠한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서는 미미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헤아리며 '친한 사이'를 정의해보기도 한다.

'친한 사이'는 어떤 설명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지인들의 얼굴을 영화 필름이 만들어내는 파노라마인 양 돌려본다. 함께 있는 장면이 어쩐지 어색한 사람, 매번 그래왔던 듯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사람, 아무런 느낌 없이 스쳐 가는 사람들이 차례로 떠오른다. '마주 보고 앉았을 때 어떤 이질감도 없는 사이, 자기 검열을 거치지 않고 대화해도 부담 없는 사이'로 나만의 정의를 내려본다.

롤링 선더 러브에서는 배경을 제거한 사람에 대하여, 주인공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을 나에게도 던져보며 내가 원하는 것을 손꼽아본다. 지난주, 발령받은 학교에 출근했을 때 교사 연수 중 이루어졌던 아이스브레이킹 활동이 생각난다. 모둠별로 돌아가면서 나의 장점 10개를 말하면서 손가락 접기. 역지사지를 떠올리던 날이다. 예전에 담임 학급의 학생들에게 적어내라고 했던, 열 가지도 없냐며 잘 생각해 보라고 웃으면서 다그치던 인간은 손가락의 개수가 이렇게나 많았나 새삼 깨달으며 반성한다. 지금 복기하며 천천히 꼽아보니 발가락까지 동원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아이들은 장점이 없었던 게 아니라 얼마 전의 나처럼 나의 장점을 헤아려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게 아닐까.

 

마음속에 여유 대신 불안을 품은 노인의 이야기 태엽은 121/2바퀴에서는 '왜 시도도 안 해봤을까'라는 문장이 맥락과 관계없이 심장에 꽂힌다. 겁이 많아서, 이렇게 하면 저렇게 될까 봐.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당겨와서 걱정하느라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흘려보냈던가. 그래서 달라질 수 있었던 삶의 풍경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홀로그램이다. 시도해 보지 않아 결코 알 수 없는 나의 모습이 문득 궁금해진다.

이상적인 수업을 꿈꾸는 교사의 이야기 보편 교양에서 가장 오랜 시간 머문다. 충분한 연금 수령액에 도달하려면 십오 년은 더 일해야 하며 그 연금을 실제로 받으려면 이십오 년이 남아있는 주인공. 다행히 나를 비껴갔지만, 젊은 주변 선생님들의 현실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교육은 예전에 끝났어', '제가 뭘 가르쳤다고 하던가요?' 다큐멘터리를 목도 하듯 사실적으로 묘사된 교실 풍경이 너무나 익숙해서 소름이 돋는다. 크고 작은 교실 붕괴를 경험하며 근근이 버텨가는 삶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수업 첫날의 수강생은 교사의 책임이 아니다. 그러나 수업 마지막 날의 수강생은 교사의 책임이다.' 반은 체념하는 마음이 크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도 수업을 잘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무모하리만치 열심히 수업을 준비하는 주인공을 바라보며 첫 학교에서의 내 모습을 떠올린다. 때로는 실수도 하고 어설펐지만, 새로운 시도에 겁이 없던 장면들이 재생된다. 괜스레 코끝이 찡해진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어떤 실수는 바로잡을 수 없을 뿐이다.'팍스 아토미카에서 묘사되는 강박증을 보며 나를 살핀다. 주인공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나 역시 정리 정돈에서 약간의 강박을 보인다. 싱크대 수납장에 라면 봉지를 넣을 때 무늬를 맞춘다든지, 책을 높이별, 색깔별로 정리한다든지, 패턴에 맞춰 물건을 종류별로 배열한다든지. 정돈된 환경에서 마음의 안정감을 느낀다. 다른 이에게는 이를 강요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마음이 불편하면 그 방향을 바라보지 않는 것으로 나름 자신과 타협을 본다.

로나, 우리의 별에 대해서는 메모해 놓은 내용이 없다.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본방 사수했던 예전이라면 달랐으리라. 격하게 공감하며 또 다른 문장을 독해하고 있을지 모른다. 현재의 나로서는 관심에서 벗어난 영역이라 특별한 울림점은 찾지 못한다.

학교를 옮기는 해이다. 매년 가르치는 학생들은 달라지지만, 교수 환경의 변화에서 오는 긴장감이 크다. 나의 관심사는 변화하는 환경에 어떻게 잘 녹아 들어갈까이다. 이런 이유로 보편 교양에 많은 공감을 하며 덩달아 수업과 학생 지도를 고민하는 시간을 가진다.

마음 군데군데 작은 뾰루지가 나 있는 이미지를 상상한다. 그걸 건드리는 문장들에 반응하게 되는 걸까. 누구에게나 좋은 책은 없다. 고민으로 생긴 뾰루지를 짜주거나 연고를 발라주고 밴드를 붙여주는 책을 누군가 좋아하게 될 뿐이다.

 

고민이 많았던 이유를 알겠다. 어색한 공간, 어색한 사람들, 어색한 시간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서성이며 방황할까 두려운 거였다. 나를 전혀 모르는 집단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며 집단의 일부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걸릴 진공의 낯섦이 묵직하게 다가와서 그랬던 거다.

두려움의 다른 이름은 설렘 아닐까. 작가의 의도든 아니든 이런 생각이 나오는 데 이 책의 지분은 상당하다. 문체일 수도 있고, 문장의 속도일 수도, 서사의 색채나 온도 때문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게 번갈아 다가오면서 내 고민을 톡톡 건드렸나. 낯선 장소에서 방황하다 친근한 도로로 들어선 듯 안도감이 생긴다.

나에게는 아직도 나흘의 준비 기간이 남아있다. 다행이다. 개학 하기 전에 정신 차려서. 오랜만에 하는 3학년 담임, 과학 기획 업무, 스마트 교육, 달라진 출판사의 교과서 지도, 평균 수업시수 22시간이라도 잘 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명예롭게 퇴직하기 위해 스스로 정한 2년의 남은 기간 동안 신규 교사의 마음으로 열심히 마무리하고 싶다.

사물함의 이름표를 붙이고, 얼굴도 모르는 아이의 이름을 한 명씩 발음하며 책상 이름표를 붙이고, 교실 바닥을 쓸고, 불필요한 물건들을 버리고, 청소 도구함을 정리하고 왔다.

손끝을 맴도는 은은한 온기에 심장이 서서히 데워진다.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다. 시작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눌려있던 나의 열정은 불타는 얼음이 되어 이제 세상 밖으로 드러날 준비를 하고 있다. 시작을 준비하는 마음, 이건 분명 설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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