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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북꾸 에디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실제로 본 적도 없으면서 자주 떠올리는 자연물이 있다. 바다 위로 드러난 순백의 뾰족함 아래, 드러나지 않은 거대함을 가늠한다. 몸체를 지탱하지만, 결코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영역 말이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바다 밑으로 잠긴 빙하를 인간의 무의식에 비유한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나를 지탱하나 결코 의식할 수 없는 영역이니 맥락이 닿는다.
『꿈의 해석』을 처음 접한 건 20대이다. 오랜만에 과거의 나를 떠올린다. 내가 좋아했던 것을 떠올린다는 게 적확한 표현이리라. 당시 매력을 느꼈던 분야는 심리학이다. 자연 과학처럼 실험으로 증명하기에 어려운 면이 많지만, 이 또한 신비주의 연예인을 영접한다고 여긴다. 의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선물 포장을 벗기는 것만으로 두근거리는 아이가 되어 책장을 넘긴 기억이 난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소설판『꿈의 해석』이다. 프로이트가 언급한 의식, 전의식, 무의식에 관한 이론을 소설로 구현한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물론 나만의 해석이다. 하루키는 한 존재의 정신 영역 전체를 가시적으로 묘사하려 한 듯하다. 바다 밑에 잠긴 빙산의 부분까지 말이다. 해수면을 기준으로 빙산의 영역을 구분해도 본질은 결국 하나의 덩어리이다. 같은 맥락으로 한 존재는 속성에 따라 구분된 정신세계의 모든 영역을 아우른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공간적 배경은 대조적인 두 영역을 상징한다. 첫 번째, 평범한 현실 세계는 의식의 영역이다. 두 번째, 비현실적 세계로 묘사되는 '도시'는 무의식의 영역이다. 두 영역의 경계에는 불확실한 벽이 존재한다. 살아있는 생명체인 양 모양도 바뀌고 견고함도 달라지는 몽환적인 벽이다. 벽은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있다는 전의식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출렁이는 바다 밑으로 잠겼다 드러남을 반복하는 빙산의 영역처럼.
처음부터 작가의 빅 픽처가 그려지는 건 아니다. 1부는 10대 소년과 소녀의 첫사랑에 대한 시적인 묘사로 포문을 연다. 풋풋하고 섬세한 문장이 잔잔한 물결로 흐른다. 소녀를 향한 순수가 고스란히 투영되니 문장을 따라가는 나의 심장도 덩달아 투명해진다. 간결한 시를 느슨하게 풀어나가는 문장이 그림을 그린다. 같은 공간 속에 나란히 앉아 있는 시간, 그들의 세계에는 서로의 이름조차 무의미하다. 기억만이 선명할 뿐이다.
차례 이전에는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의 시 「쿠블라 칸」이 등장한다. 드러나는 심상이 본문의 분위기와 닮아있다. 몽환적으로 그려진 대서사시의 일부. '땅 아래 암흑의 바다'가 무의식의 정체성과 겹쳐진다. ‘도시’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소설에는 안개가 스멀스멀 스며든다. 현실의 색채가 흐릿해지고 주인공은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든다. 끝까지 읽고 전체적인 얼개를 그려보면 소설의 진가가 드러난다. 모든 퍼즐이 완성되는 순간, 안개가 싹 걷힌다.
주인공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일관되게 '나'로 서술된 건 심오한 의도가 담긴 설정이다. 이 책 한 권은 주인공의 정신세계 전체를 상징하니 '나'는 나의 이름을 부를 필요가 없다. 다만 주인공은 하나의 본질을 가진 두 명이다. 한 명은 의식의 영역에 있는 '나', 다른 한 명은 무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나'이다. 내 안의 또 다른 나, 나이면서 내가 모르는 나, 무의식의 존재를 의식과 구분하여 어떻게 묘사한단 말인가.
공간적 배경에 배치한 인물 설정을 보며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한다. 이러한 속성을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대상으로 '그림자'를 설정하다니! 나와 떨어지지 않고 늘 함께하지만 온전한 나라고 말하기 어려운 존재이다. 게다가 작가는 그림자를 본체와 분리한다. 그림자와의 분리가 새삼스럽지는 않다. 이미 우리는 피터 팬이 옷장 서랍에 두고 온 늘어진 그림자에 단련되었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림자의 본질이다.
하루키는 그림자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단순히 생각하면 그림자는 뒤에서 나를 따라다니는 존재이므로 무의식의 범주에 넣기 쉽다. 작가는 여기에서 반전을 꾀한다. 대다수가 앞을 볼 때 뒤로 돌아 빛을 등진 채 어둠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림자를 제대로 볼 수 있도록. 그는 분신인 그림자를 의식의 영역에, 진정한 자아를 무의식의 영역에 배치한다.
무심코 하는 행동은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나도 몰랐던 모습이 진정한 자아를 반영할 때가 많다. 거짓 표정과 말을 지어내도 무의식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최면 요법으로 진실을 알아내는 이유도 대게는 비슷하리라. 진실이 담긴 공간이지만 우리는 그 안에 있는 마음들을 의식하지 못한다. 종종 멈추어 서서 마음과 꿈과 욕구를 살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거기에 진실된 내가 있으므로.
'도시'의 도서관에는 오랫동안 축적된 꿈들이 먼지에 덮인 채 있다. 무의식에 있는 '나'의 꿈이기에 그 꿈을 읽을 자격은 내게 있다. '나'만이 꿈 읽는 이가 되어 오래된 꿈을 펼쳐볼 수 있다. 소녀는 ‘나’에게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존재를 알려주고 사라진다. 이윽고 40대가 된 '나'는 10대의 설렘을 주고 사라져 버린 소녀를 찾아 도시로 들어간다. 그곳에 소녀가 있다. 모습은 같지만 '나'를 모르는 존재이다.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 의식이 필요하다. 첫째, 자신의 그림자를 떼어버리는 것. 둘째, 눈에 상처를 내는 것. 도시로의 입장이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라 가정해 본다. 그림자를 버리는 건 가식을 버린다는 의미로, 외부 세상을 볼 수 있는 수단을 차단하는 건 올곧게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한 목적이라 여긴다. 1부의 주체는 그림자를 '그'라고 지칭하는 '나'이다. 도시에서 불필요한 그림자는 그림자 쉼터에 있다 시간이 흐르면 죽어버린다.
분침과 시침이 없는 디지털시계를 사용하면 시간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도시'의 시계에는 바늘이 없다. 시간은 흐르지만, 오직 현재뿐이며 모든 것이 덮어 쓰이고 갱신된다. 흐름을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시시각각 시간을 확인하며 살아가는 하루를 떠올린다. '도시'의 시간을 상상하니 호흡이 점차 느려진다. 너무 빨리 뛰어온 건 아닐까. 산책하는 심장의 속도로 오랜 꿈들을 꺼내어보며 조금은 천천히 걸어갈 수도 있을 텐데.
작가가 묘사하는 도시를 상상하는 동안 나의 시곗바늘은 느려진다. 일상에서 발생했던 불편한 마음이 섬세한 진동으로 잦아들며 마음이 느슨해진다. 하루키 문장의 매력이 이런 모습일까. 억지스럽지 않고 따라가는 이의 긴장을 이완시키는 면모가 있다. 구멍이 송송 뚫린 듯해도 어느 순간 공기층을 머금어 포근하게 목을 감싸는 털목도리 같다. 시적인 표현 역시 책의 무게에 부력으로 작용한다.
이 책을 읽으며 시간의 상대성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다. 첫사랑 소녀에 대한 기억에서 소년의 시간은 멈춘다. 얼핏 사랑이 주를 이루는 듯하지만 작가가 건네는 메시지에는 사랑을 포함한 인간의 삶이 담긴다. 필요 없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도시'에 시곗바늘이 없다는 건 많은 시사점을 준다. 작가는 마음속에 내가 충분히 알지 못하는 영역, 시간도 손을 대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며 무의식의 영역을 암시한다.
1부의 무대는 '도시'이며 주인공은 '나'다. 내가 도시로 들어오기까지의 배경을 설명하며 현실과 도시가 번갈아 전환된다. 그림자는 아직 정체성을 부여 받기 전이다. 도시로 입장할 때 분리되어 서서히 죽어가던 그림자는 본체를 설득해 탈출을 시도한다. '나'는 불확실한 벽 앞에서 선택의 순간을 맞는다. 이 도시에 남을 것인가, 저 세상으로 갈 것인가. 결국 '나'는 도시에 남겠다는 선택을 하고 그림자만 내보낸다. 새로운 국면의 전환이다.
2부의 무대는 도시 밖 ‘현실 세계’이며 주인공은 도시 밖으로 나간 '그림자'다. 그는 이제 내가 되어 살아간다. 본체가 도시에서 매일 오래된 꿈을 읽는 동안, 분신인 그림자는 '나'의 기억을 고스란히 지닌 채 '나'로 살아간다. 어차피 둘은 하나로 이어져 있는 존재이니. 그는 스스로 그림자임을 인지하지 못한다.
도시의 스위치는 잠시 꺼지고 현실의 전원이 들어온다. 시골의 도서관장으로 일하게 된 '나'는 세 명의 인물과 서사를 이룬다. 첫째, 인물이라고 칭하기 애매한 전임 도서관장 고야스 씨의 유령이다. '나'는 이미 비현실적인 '도시' 체험자이므로 위화감은 없다. 멘토와 멘티처럼 대화가 오간다. 둘째, 엘로 서브마린 점퍼를 입고 매일 도서관에 드나들며 책을 읽어 치우는 서번트 증후군 소년이다. 셋째, 고야스 씨의 무덤을 들렀다 오는 길목에 있는 카페 주인이다. '나'의 마음에 새로운 봄꽃을 피우는 여성이다. 이들 중 나의 시선을 당기는 캐릭터는 앞의 두 존재이다.
고야스 씨의 영혼은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서브마린 소년과 먼저 라포를 형성한 사람도 생전의 그이다. 주인공이 그의 무덤에서 한 독백을 듣고 소년은 '도시'를 꿈꾸기 시작한다. ‘서브마린’이란 별칭도 잠재적인 사물을 연상하게 만드니 사소한 별칭까지도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이 고야스 씨의 무덤을 찾으면서 카페 주인 여성과의 인연이 시작되니 삶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의 중심에 죽음의 상징이 있는 셈이다.
죽음 이후 존재의 흩어짐을 생각한다. 물질과 에너지는 동급이며 우주의 에너지는 보존된다니, 육체를 이루고 있던 물질은 분해가 되어 다른 무언가로 변한 다음 흩어질 터이다. 지구 중력장의 영향을 받으며 세상 어딘가를 여행하리라.
영혼도 중력장의 영향을 받을까. 육체처럼 흐트러지거나 다른 무언가로 변할까. 속성이 다르니 영역에 구애받지 않고 우주 어딘가로 날아가 버릴까. 문학 작품에서 종종 등장하는 유령처럼 지구 어딘가에 붙들려 있을까. 혹은 인간의 가청 진동수를 넘어서는 초음파가 존재하듯 가시 범위를 넘어선 형태로 머물고 싶은 장소를 서성이고 있을까.
소설 속 유령의 모습을 보며 예전에 했던 상상을 떠올린다. 영혼의 모습은 육체의 그것과 동일할까. 나의 영혼은 육체와 얼마나 닮아있을까.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은 다른 형상을 지닐까.
서브마린 소년은 육체와 영혼의 모습이 확실히 다른 듯하다. 3부에는 '도시'로 들어와 주인공과 역할 분담을 하며 꿈을 읽는 소년이 등장한다. 서번트 증후군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던 신규 때 한 아이를 만났다. 교사 이름과 세계의 수도를 기가 막히게 맞추던 아이였다. 나는 다만 지켜볼 뿐이었다. 어쩔 줄 모르는 묘한 시선으로. 지금도 주로 지켜보는 일밖에는 할 수 없지만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시선으로 보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까.
소설 속 '나'와 소년과의 대화 장면을 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현실 세계에서는 단 한 마디도 제대로 말하지 않던 아이가 '도시' 안에서 주인공 '나'와 대화를 나눌 때는 더없이 유려한 언어를 구사하기 때문이다. 그토록 많은 책을 읽어 탄탄한 의식을 지닌 아이의 영혼은 심지가 굳다. 부족해 보이는 모습은 의식적인 세상에서만 비추어지는 모습이었던 거다.
소년이 마지막으로 주인공에게 건네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 마음과 의식은 다른 곳에 있으며 본체나 그림자가 어느 쪽에 있는지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것, 각자 서로의 소중한 분신이니 분신을 믿는 건 자신을 믿는다는 뜻이라는 것. 결국 진짜 '나'는 '그림자'가 있는 현실 세계를 향하여 '도시'를 떠난다. 의식과 무의식의 합체를 예상할 수 있는 완벽한 결말이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상대가 나에게는 글이다. 노트북 앞에 앉기 전까지는 어떤 글을 쓰게 될지 모른다. 불완전한 문장이 될지라도 그저 한 발을 내딛는 용기를 낼 뿐이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서 과감하게 한 발을 디디면 낭떠러지 건너편으로 연결되는 다리가 나타나는 장면처럼. 막연한 믿음이 있다. 빈 문서 1을 앞에 두면 무슨 얘기든 털어놓으리라는 것을. 감정의 미세한 울림을 읽고 글을 준비하고 있는 무의식 속의 나를.
책의 내용에 공감하든 아귀가 맞지 않는 듯 삐걱대든 일단 정독한다. 문장이 좋아도, 문장이 좋지 않아도, 모든 문장을 좋아라 하실 문학계의 도깨비님까지는 아니더라도. 중간중간 과속방지턱을 마주친 듯 멈춘다. 책 밖으로 흘러나와 나에게 닿는 문장들을 메모하며 작가의 세상을 걷는다. 나를 통과하여 이윽고 세상에 없던 단 한 편, 나의 글이 흘러나올 때까지.
나의 향기가 짙게 배어 나오는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을 보며 종종 전율한다. 내가 제일 잘 나간다는 자만이 아니다. '이런 문장들이 나의 무의식 안에 있었구나'라는 의외의 발견에 가깝다. 무의식의 공간에 혼재되어 있다 적당한 시기가 되어 흘러나오는 문장들이 나는 좋다. 나는 무의식의 나를 가장 알고 싶은 최애의 독자니까. 내가 나비의 꿈을 꾸든 나비가 나를 꿈꾸든, 내가 글이 되든 글이 내가 되든 상관없다. 어느 쪽이든 어차피 '나'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