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 청년 새끼 - 망가진 나라의 청년 생존썰
최서윤.이진송.김송희 지음 / 미래의창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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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이란 참 오만하다. 그것은 자연 그대로의 빛을 차단하는 선글라스와 같아서 하나의 단어나 단 한 줄의 문장이라도 가치관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 다소 과격한 이야기를 상상했다. 제목에 버젓이 새끼라는 말이 등장하는 책은 흔하지 않으니까. 청년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지금은 맨 눈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이건 그냥 이야기다. 거기서 우리를 발견한다면 다행이겠다.(p7)’치열하게 고민하며 스스로의 삶을 당당하게 걸어가고 있는 이들. 마음 한 구석이 찡하다. 그대로의 삶이 반짝반짝 빛나보여서이다. 눈부신 햇살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뭉클함이랄까.

 

청년세대에 대하여 세 명의 청년이 적은 그들 자신의, 그들이 바라본 세상의 이야기이다. <먹고사니즘>, <정치>, <문화>, <연애>, <주거>등 다섯 분야로 나누어 이에 대한 생각과 경험을 서술한다.

 

<먹고사니즘>을 읽으며 드라마 쌈 마이웨이에서 본 장면을 생각한다. 아나운서를 꿈꾸는 여주인공. 면접 장소에서 그녀에게는 어떤 질문도 주어지지 않는다. 면접관은 말한다. 남들 어학연수, 유학 다녀오는 그 시간에 당신은 대체 무엇을 했느냐고. 공백으로 비어있는 이력서를 펄럭이며 스펙을 위해 아무 것도 못한 그녀를 비난한다. “! 벌었는데요!”떨리는 음성을 애써 누르며 말하는 그녀. 계속 마음에 남는 대사이다. ‘그 한 줄 너머에는 긴 시간이 존재한다.(p45)’는 저자의 말과 겹쳐진다. 주인공이 내뱉은 그 짧은 문장 너머에는 지리하고도 치열한 시간들이 존재할 것이다. 드라마를 넘어 현실에 수없이 존재할 다큐가 생각나서 마음이 답답하다. 화려한 스펙을 자랑하며 여유 있게 면접을 마친 또 다른 지원자, 번쩍이는 부모의 차를 타고 유유히 돌아간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표정이 처연하다. 생존을 위해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구조적인 모순을 감추고 있는 사회는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개인에게 냉정하고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댄다.

 

업무를 하다보면 조심스럽고 불편할 때가 있다. 예컨대 학생들에게 건강보험료 8만원 이하를 납부했다는 증명서가 필요하다는 말을 전할 때이다. 저자 대담에서 끊임없이 내 불행을 증명하거나, 쓸모를 입증해야만 어느 정도의 인간다운 삶을 쟁취할 수 있잖아요.(p26)’란 문장을 접하며, 몇 달 전을 떠올린다. 저소득층을 지원하는 취지에서 진행되는 프로그램이라 자신이 얼마나 저소득층인지 명확하게 증명을 해야 참여할 수 있다. 취지는 좋지만 업무 담당자의 입장은 종종 난감하다.

 

어린 시절을 많이 생각나게 하는 이야기는 <주거>이다. 방과 장거리 통학러, 집에 대한 저자의 경험담에 나의 10대와 20대를 떠올린다.

내방을 가져보는 게 소원이던 적이 있다. 여섯 식구가 살았던 집의 대부분은 단칸방이었다. 결혼 직전에는 방이 3개로까지 발전하지만, 부모님, 남동생, 세 자매의 공간으로 나뉘다보니 나만의 공간은 확보될 길이 없었다. 끝내 완벽한 내 방을 가져보지 못했다. 지금은 한 면에 책장이 있는 안방을 내 방화시키고 있지만, 이 역시 완벽한 내 공간은 아니다. ‘이 다음에 돈 많이 벌면에 해당하는 직업군이 아니라 영 글러먹은 꿈이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내 방에 대한 로망이 있다.

대학교 때는 통학을 했다. 집에서 시내버스, 시외버스,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내려 강의실까지 도착하는 데, 도보와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까지 합치면 두 시간 가까이 소요되었다. 기숙사나 자취는 꿈도 꾸지 못했다. 500원의 백반 값을 아끼려 300원짜리 국수를 사먹던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때, 나와 동갑이던 주인집 아들은 우리 집과 연결된 초인종을 자주 눌렀다. 자기 집 초인종이 버젓이 있는데도 굳이 우리 집 것을 누르는 그 녀석이 기분 나빴다. 여동생을 시켜 우리 집 초인종 누르지 마!”라 말하게 했다. 그 집이 진정한 우리 집이 아닌 것을, 그 모든 공간이 주인집의 소유인 것을 당시에는 인지하지 못했다. 어린 나는 내가 거기 살고 있으므로 그 공간이 내 공간이라 착각했나보다. 그날 낮잠을 자던 잠결에, 주인집 아주머니가 우리 엄마에게 뭐라 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의 하극상을 따지셨던 것 같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만이 타인과 자신의 삶을 완전히 분리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p335)’더 많은 것을 가져보지 못한, 타인의 삶과 나의 삶을 완전히 분리할 수 없던 경험은 이 문장을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든다. 구병모의방주로 오세요, 정아은의 잠실동 사람들에서 그들만의 공간을 가졌던 집단이 생각나기도 한다.

 

<연애> 이야기에서는 불쑥 유성생식의 장점을 떠올린다. 부모가 같다 해도 복잡하게 이루어지는 유전자 조합으로 인하여 완벽하게 똑같은 아이는 단 한 명도 태어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의 연애도 그렇지 않을까. ‘사랑이라는 제목만 같을 뿐 나의 연애와 너의 연애는 제각기 다르다. 그리고 연애의 대상이 꼭 사람일 필요는 없다. 지금 연애 중이 아니라 격하게 공감하면서 읽지는 못했지만, 연애가 선택이라는 저자의 생각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정치> 이야기를 읽다 1인 출판사 최측의농간이 생각났다. 작년 2, 책을 보내준다는 이메일을 받고, ‘공짜로? 이 험악한 세상에 왜에? 제목도 어쩐지 수상해라며 한동안 의심의 눈초리를 품고 그 의도를 파악하고자 집요하게 메일을 주고받았던 적이 있다. ‘어차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돈 벌기가 쉽지 않다면 마음대로나 해보자는 것이다.(p122)’ ‘최측의농간의 신동혁 대표는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은빛 물고기와 함께 동봉해온 그의 손 편지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는 이들만이 뿜어낼 수 있는 열정을 보았다. 그 후로 여림의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과 허만하의 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를 구입했다.

 

<문화> 이야기에서는 나를 돌아보고, 미래를 상상해본다.

낯선 눈으로 자신과 일상을 돌아보게 하고, 낯선 것들과 부딪히며 삶의 실감을 느끼게 하는 점이 여행의 매력이라고 의견이 모였다.(p187)’혼자 여행을 하고 싶은 마음이 다시 들썩인다.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왜 그것을 좋아하는지, 거기에는 어떤 사고방식이 내포돼 있는지 답하다보면 스스로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다.(p194)’나란 인간에 대하여 가끔 생각하는데, 이전에 알던 모습과 다른 면을 발견할 때가 있다. 상금에 관계없이 글짓기대회에서 상을 타고 좋아라했던 때를 생각하면, 의외로 명예를 좋아하는 인간인가 싶다.

자기를 서사화하는 과정은 스스로의 아픔과 슬픔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도록 돕는다.(p206)’여러 책에서 비슷한 얘기를 한다. 볼 때마다 공감이 가는 내용이다. 리뷰에 내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섞어내는 것도 서사화라 주장해본다. 남의 사적인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드물다. 하지만 비슷한 이야기를 품고 내 이야기를 읽는 누군가는 공감을 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이런 생각에 꿋꿋하게 내 이야기를 담는다. 책에 담긴 저자들의 이야기에 자주 공감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현재를 둘러보거나 미래를 상상하게 하는 책이 있다. 이 책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3종 세트를 모두 돌아보게 한다. 내 어린 시절을 생각했고, 청년 시절을 떠올렸으며, 현재의 나를 바라보고 앞으로의 나도 상상해보았으니까.

삶은 결국 수많은 서사들의 연속이다. 똑같은 삶은 없지만 공명할 수 있는 삶은 있다. 우리는 글이나 그림, 음악이나 영화 등을 통해 다양한 서사들을 접한다. 20대의 서사 앞에서 나는 단지 구경꾼의 역할에 지나지 않을 줄 알았다. 그 세대로부터 20년을 넘어 50대에 접어들기 직전이기에, 서서히 분리되는 마법의 고리처럼 그들과의 접점이 거의 없을 줄 알았다. 이 책을 읽고 알았다. 세대의 구분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20대든, 30대 혹은 40대든 삶의 이야기는 인간이라는 동일한 출발선상에서 시작되는 현재형이라는 것을. 공감의 폭은 나이차가 아니라 생각의 차이, 가치관의 차이, 사람의 차이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은 그 자체로 살아내는 것이고, 살아지는 것이므로.

 

*p318, 밑에서 2째 줄 : 모르는 마주치는 게 싫어서... 문맥이 어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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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6-16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삶을 서사화하는 기본 과정이 일기입니다. 어렸을 때 일기를 꾸준히 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른이 돼서도 일기를 계속 씁니다. 그리고 일기 외에 다른 글도 잘 쓰는 것 같습니다. ^^

나비종 2017-06-16 16:43   좋아요 0 | URL
중학교 때까지는 전시용 벼락치기 소설 일기를 썼는데요, 고등학교 때부터는 자발적으로 쓰게 되더군요. 중간에 끊긴 적도 있지만, 생각해보니 어떤 형태로든 꾸준하게 기록을 적어왔네요. 알라디너가 되어 다이어리를 득템한 이후로는 위클리에 핵심 단어만 적는 기록을 써오고 있습니다. 그렇게만 해도 신기하게 그날이 기억나더라구요. 서사화의 기본 과정이 일기라는 말씀에 격하게 동의합니다ㅎㅎ
 
제후의 선택 - 제17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70
김태호 지음, 노인경 그림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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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바라본 세상의 대부분은 평범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잔잔한 바다처럼 평온하고 아름다운 빛깔이었다. 하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상은 바다라기보다 바다를 그리워하는 갯벌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치열한 생명력을 뿜어내며 살아가야 하는, 세상은 차라리 그런 모습에 가까웠다.

 

책에 실린 9편의 단편에서 갯벌을 연상한다. 멀리서 바라다보면 그저 질척거리는 공간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꿈틀거리는 생명들을 무수히 안고 있는 공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수시로 파도가 덮치는 절박한 세상을 견뎌야 하는 존재들. 절반 이상의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의 모습은 종종 아이들과 겹쳐진다. 어린이문학상을 심사한 작가 김지은의 말처럼 이 시대 어린이가 겪는 현실은 동물의 처지와 닮았다.(p168)’

 

독특한 시선을 가진 작가이다. <토끼전>, <손톱 먹은 쥐>와 같은 동화나 민담을 절묘하게 접목시켜 현실을 살아가는 아이들의 삶을 묘사한다. 어른들이 이끄는 세상에서 아이들은 폭력 앞에 내몰린다. ‘아이의 손가락 끝은 모두 빨갛게 멍울이 져 있었다.(제후의 선택, p46)’자신의 손톱을 뜯어 쥐에게 먹이며 가짜 나를 만들어낸 제후. 아이가 선택한 행동에 덜컹 가슴이 내려앉는다. 선택지는 첨예하게 좁다. ‘넌 먹어야 살고, 엄마는 굶어야 살았던 거야. 아빠는 죽을 것처럼 일해야 살았던 거고. 각자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던 거지.(구멍 난 손, p133)’살기 위해 할 수 있는 행동이 스스로 할퀴는 것밖에 없는 아이들이 먹먹하다.

 

작가의 시선은 아이들뿐 아니라 동물이나 꽃, 자연에 존재하는 생명에게 닿는다. 의인화된 거북이, 고양이, , 개와 모기에게까지 그들의 처지를 항변할 기회를 부여한다. 그들 앞에서 지배자인양 행동하는 인간의 오만함은 자연의 역습을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무모하다. ‘우리에겐 적이 없어요.(나리꽃은 지지 않는다, p141)’라 말하는 꽃을 무참히 꺾어버리는 대장의 행동에서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을 본다. 자정 작용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강물, 점점 설 곳을 잃어가는 북극곰의 눈물, 서서히 멈추어가는 거대한 심층수의 흐름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두렵다.

 

2의 지구, 화성을 향한 프로젝트가 ‘NASA’를 중심으로 진행 중이라고 한다. 우주 공간 어딘가에 또 다른 생명체가 숨 쉬고 있을지 모른다는 상상은 분명 두근거리는 설렘이다. 하지만 지적 호기심을 떠나 프로젝트를 향한 천문학적인 비용과 에너지 소모를 생각하는 입장에서 나는 우주 개발을 반대한다. 지구온난화, 환경오염으로 내가 살고 있는 지구가 엉망이 되어 가는데, 그런 분야에 시선을 집중한다는 것이 모순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훌륭한 과학으로 지구를 구하지 못하고 왜 떠나려 합니까?(꽃지뢰, p157)’작가는 눈부신 과학적 성취가 지닌 맹점을 외계인인 아토인의 말을 통해 날카롭게 지적한다. 과학 기술의 발달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진지하게 숙고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어린이들은 스스로 선택하고 탈출하고 자신을 지키기 시작했다.(심사평, p171)’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꿋꿋하게 걸어가려는 아이들의 모습에는 안쓰러움을 넘어 삶을 이끌어내는 의지가 있다. 자동차에 치인 고양이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동생 모기를 온기 있는 공간으로 옮겨 살게 하려고 고군분투하는 어린 형의 모습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본다. 아이들이 건네는 작고 따뜻한 불씨가 있어 세상은, 아직 희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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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온도 (100만부 돌파 기념 양장 특별판) - 말과 글에는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
이기주 지음 / 말글터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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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컥했다. 요즘은 왜 이리 울컥하는 순간이 많은 지. 세상을 향한 감정의 가닥이 강아지풀처럼 섬세해진 기분이다. 한 줄의 문장에도, 한 마디 말에도, 손바닥의 마주침에도 코끝이 찡해진다. 아까 오전만 해도 나를 멈춰 세우고 손 크기를 비교해보곤 제 손이 더 크다며 좋아라하는 여학생에 울컥하는 것이 아닌가. 아이 손답지 않게 습진에 걸린 듯 군데군데 허물이 벗겨진 건조함을 맞대는 순간 갑자기 찡해지는 거다. 이 책이 그랬다. 책 속에 있는 두 문장이 팽팽하던 마음의 줄을 튕겼다. 그렇게 생긴 진동은 오랜 여운으로 마음을 흔들었다.

 

여전히 많은 것이 가능합니다.(p9)’서문의 말미에 있는 문장이다. 지인들에게 농담처럼 나 갱년기인가 봐.’라 말한다. 어느 정도 진심이 담겨있는 말이다. 눈도 쉽게 피로해지고, 날밤을 세워도 끄떡없던 체력이 점점 떨어진다. 자꾸 뭔가 잊어버리고, 완벽함을 자랑하던 일처리에 간혹 허술한 구멍이 뚫리는, 뭐 대략 이런 증상들이다. 그래서 가끔 울적했다. 내년이면 오십의 나이에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이와 같은 부류의 생각이 한가득 일 때, 이 문장을 만났다. 저자를 향해 되묻는다. 여전히 많은 것이 가능한가요? 얼굴조차 모르는, 앞으로 만날 일도 거의 없을 것 같은 사람이지만, 물론이죠! 라며 따뜻한 목소리로 답해줄 것만 같다.

 

두 번째로 나를 흔들던 문장은 그냥에 관한 것이다. ‘그냥 걸었다는 말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겁고 표현의 온도는 자못 따듯하다.(p33)’순간이동으로 그 때, 그 날, 그 순간으로 날아간다. 꽤 오래전에 그저 좋은 사람이 있었다. 온종일 생각나고, 나도 모르게 시선이 머물던 사람.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 행동했지만 그것은 몇 번의 심호흡 끝에 겨우 나온 몸짓이었다. 만나면 늘 조심스럽던, 거슬러 올라가면 설렘으로 가슴 뛰는 사람이었다. 넘쳐나는 마음을 담고 있기 버거웠던 어느 토요일, 그에게 문자를 보내기로 결심한다. 뭐라고 보낼까. 문장을 고르고, 단어를 정제하고, 1시간을 고민한 끝에 드디어 전송버튼을 누른다. “그냥..” “뭐예요ㅎㅎ그가 피식 웃으며 몇 문장을 더한 가벼운 답문을 보내왔다. 그는 아마도 이 두 글자와 말미에 이어진 두 개의 점이 지니고 있던 무게를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에 대한 기억을 매달고 있는 그냥이란 말은 그래서 매우 특별하고 소중한 단어이다. ‘그냥은 정말이지 그냥이 아니다.(p34)’라는 말의 깊이를 알기에 이 책의 나머지 90%를 읽기도 전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말과 글과 행에 관한 에세이다. 말은 마음에 새기는 것(p10)’, 글은 지지 않는 꽃(p11)’, 행은 살아 있다는 증거(p12)’라는 부재로 일상의 경험이나 단상을 어원과 유래를 섞어가며 산책하듯 서술했다.

온기 있는 언어는 슬픔을 감싸 안아줍니다.(p8)’란 말처럼 그의 언어는 따뜻하고 부드럽다.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이란다.(p18)’란 말에서는 토닥토닥 아픈 배를 문질러주는 엄마의 까슬까슬한 손길이 연상된다. 아는 만큼 보이기 마련이니, 내가 아팠던 만큼 상대방의 아픔에 좀 더 깊은 공감을 할 수 있다는 말이리라. 가끔씩 찾아오던 아픔의 순간을 더듬어본다. 아팠던 만큼 사람들의 아픔을 잘 이해하는 글을 쓸 수 있겠지. 겪어온 모든 일들이 꼭 필요한 것 이었겠다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스티비 원더의‘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가 흘러나온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때 우린 행복하다.(p306)’가볍게 흥얼거리는 그의 목소리에서 생경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별 감정 없이 흘려듣던 노래였는데, 왜 눈물이 핑 도는 걸까. 우연히 마주친 일화가 떠올라서일까. 선천적으로 앞을 보지 못했던 그는 사랑하는 딸과 아내의 얼굴을 보기 위해 성공한다 해도 15분 정도밖에 보지 못하는 수술을 감행했다 한다. 안타깝게도 수술은 실패로 끝났지만 딸아이를 위해서 눈이 보이는 척을 했다나. 안 보이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지 못한다. 언젠가 인터넷 동영상으로 본 공연 장면에서 멋으로 쓰고 나온 줄 알았던 선글라스의 진실을 알았을 때,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의 음악에서는 밝은 에너지가 풍겨 나온다. ‘향기의 매력은 퍼짐에 있다.(p293)’더니. 더없이 행복한 향기가 퍼져 나오는 것만 같다. 그 안에는 얼마나 많은 삶의 굴곡이 담겨있을까. 삶의 배경을 알고 듣는 노래는 더한 깊이로 마음을 울린다.

 

글쓰기는 그림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공통분모는 그리움이다.(p116)’나는 무엇을 그리워하며 시를 쓰거나 독후감을 쓰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담겨있기도, 감정이 담겨있기도, 내가 담겨있기도 했다. 그것이 그리움이었나. 어떤 그리움은 따뜻했고, 뜨거웠고, 아팠다. 또 다른 그리움은 무지개로 빛났고, 무채색으로 가라앉았다. 부드럽고, 투박하고, 뾰족한 그리움도 있었다.

저자는 언어의 온도를 얘기했지만, 언어에는 색깔도 있고, 감촉도 있고, 향기도 있다. 언어는 오감으로 느껴지는 자극이다. 나의 언어는 다른 이에게 어떤 감각으로 느껴질까. 내 삶의 장면과 겹쳐진 글이 다중노출사진처럼 누군가의 마음에 더해져서 공명을 일으킨다면 좋겠다. 나의 그리움이 다른 이의 그리움과 겹쳐지는 순간이 온다면 마음이 한결 따뜻해질 것 같기에. 여전히 많은 것이 가능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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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6-01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소한 경험이라도 글로 기록해두면 좋아요. 그러면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글쓰기가 사진 찍는 행위와 같다고 생각해요. 옛날에 쓴 글을 읽으면 부끄러워요. 마치 어린 시절 제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는 것처럼 느껴져요. ^^

나비종 2017-06-01 13:1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글로 기록해두면 당시 느꼈던 감정이 고스란히 재현되거든요. 사진 찍는 행위와 같다는 말씀, 적절한 비유이십니다.
예전에 썼던 글을 읽으면 풋사과 맛이 나요. 지금 생각하면 별 일도 아닌데, 당시에는 어찌나 진지 모드였던지^^;;
 
물 흐르고 꽃은 피네 - 좋은 때를 놓치지 않고 사는 법
금강 지음 / 불광출판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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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맑은 아침에 집을 나설 때면 가끔 눈물이 난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바람이 볼을 어루만지다 지나간다. 적당히 갈라진 햇빛의 가느다란 살은 강아지풀처럼 눈썹을 스친다. 언뜻 흘러드는 초록 내음은 한 입 머금은 솔잎차인 듯 향긋하다. 치열하게 붙들고 놓지 못하는 욕심과 미련을 훌훌 털어버리라 한다. , , , 나를 둘러싼 세상이 부드러운 촉수로 마음을 건드린다.

그냥 눈물이 났다. 앞표지의 연꽃봉오리가 뒤표지에서는 서서히 벌어지는 모습을 보는 순간 울컥한다. 슬프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은데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 코끝이 찡해지면서 마음을 묶고 있던 끈이 사르르 풀린다. 시간의 힘에 기대어 스스로를 잘 토닥이며 지나왔다고 생각했는데, , 조금은 힘이 들었나보다.

 

읽을수록 지식이 쌓이는 책이 있는가하면 비우고 싶어지는 책이 있다. 304페이지의 책장을 넘기면서 304번 마음을 비웠다. 진공청소기로 휘리릭 청소하는 것과는 다른, 오래된 빗자루로 마음 구석구석을 정갈하게 청소하는 느낌이다.

차례를 본 순간, 내용을 읽기도 전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본래 마음, 내려놓음, 무문관, 좌선, 스승, 도량, 발심, 묵언, , 자비, 비움, 수행, 무심, 공양, 공동체, 선업, 무아, 도반, 대의단, 깨어있기, 공생, , 무상, 깨달음, 초심. 25개로 이루어진 소제목은 화두가 되어 마음에 점을 찍는다.

 

이승우 작가의 <사막은 샘을 품고 있다>가 생각난다. <사막은 샘을 품고 있다>가 성경 구절을 제시하고 기독교적 관점에서 관련된 이야기로 삶을 풀었다면, 이 책은 한자 구절을 제시하고 불교적 관점에서 삶을 말한다.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다른 방향에서 접근해도 결국은 하나로 모아진다. 어느 것이 더 낫다 하기 어려울 정도로 각기 매력적인 책들이다.

 

책 제목처럼 내용이 물 흐르듯이 마음으로 흘러든다.

아침에 한 사람을 기쁘게 해주고 저녁에 한 사람의 슬픔을 덜어주기를(p3, 270)’나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어떤 경지에 이르러야 한 권의 책을 내면서 종이의 원료가 된 나무들에게 미안(p7)’해할 수 있는 걸까. 무심코 지나치다 다시 되짚으며 그 의미를 되새겼을 때, 철렁했던 문장이다. 이제껏 읽어온 어떤 작가의 글에도 이런 관점을 본 적이 없다. 주변의 물건들을 찬찬히 바라본다. 하나의 물건이 만들어지기까지 사용되었을 수많은 재료와 정성을 떠올린다. 어떤 물건이든 더욱 소중하게 다루고 아껴야함을 깨닫는다. 밥을 먹을 때도 생각난다. 한 톨의 쌀이 만들어지기까지 그 속에 깃든 바람, , 햇살, , 농부의 손길을 상상한다.

사람마다 발 아래 맑은 바람 불고 있네.(p16)’라는 문장을 읽으니 어쩐지 내 운동화 아래에서도 맑은 바람이 한 줄기 흘러드는 것 같다.

손 모양과 마음의 상태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p24)’고 한다. 합장하듯 두 손을 모아보고, 따뜻해진 두 손으로 스스로를 감싸본다.

깨끗하고 단정한 공간에 맑은 기운이 깃든다.(p67)’는 말씀이 마음에 흘러드니 곧바로 몸이 움직여진다. 한동안 미뤄왔던 불필요한 서류더미를 파쇄 한다. 얹힌 속이 뻥 뚫린 듯 후련하다.

향은 불에 타고 차는 끓는 물에서 우러나옵니다.(p253)’는 글 앞에서는 스스로를 태워야 빛과 열을 낼 수 있는 별을 생각한다. 향기로운, 서서히 우러나는 차와 같은, 별처럼 빛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마음은 아픈 곳에 있다.(p153)’. 이 짧은 문장에서 오래 머무른다.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내 마음이 거기로 가 있는 것이구나.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해야 하는 지 알 것 같다.

자연은 곳곳에서 살아 숨 쉬는 교과서이다. ‘지난해 가을의 열매를 생각하지 않는(p280)’나무, ‘겨울을 이겨낸 나무들의 행복한 시간(p10)’이 되는 봄 앞에 내 삶을 비추어본다.

문장을 따라 흐르다보니 마음에 소박한 꽃이 핀다.

 

참사람의 향기는 금강 스님이 계신 땅끝마을 미황사에서 2005년부터 진행되어온 일반인 대상 참선 수행 프로그램이다. 1회 꾸준히 진행되었는데, 올해로 100회를 맞이했다고 들었다. 78일 동안 묵언하면서 수행한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말하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가끔 말하고 싶지 않을 때가 온다. 꼭 필요한 말을 제외하고 말 수를 줄여본다. 말을 덜 하니 사람들의 말이 더 잘 들린다. 다른 감각이 깨어나 이제껏 말들에 가려 무심코 지나치던 새로움이 보인다. ‘참사람의 향기를 거쳐 간 많은 사람들의 진솔한 후기가 자꾸 나를 유혹한다. 버킷리스트 하나가 추가된다.

마음도 쉬어야 한다. (중략) 우리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 이 순간을 보는 것이 마음을 쉬는 것이다.(p282)’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천천히 내쉰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다. 이 순간의 나를 본다. 한결 가벼워진 나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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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돈 벌러 갑니다 창비아동문고 287
진형민 지음, 주성희 그림 / 창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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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를 읽을 때마다 생각이 많아진다. 주인공이 어린이이고, 아이들의 용어로 쓰였다는 점만 빼고는 책이 담고 있는 메시지가 성인 소설 못지않게 묵직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시선에서 묘사되는 투명한 문장 앞에서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진형민의 동화는 언제나 개운하다. <기호 3번 안석뽕>을 시작으로 <꼴뚜기>,<소리 질러, 운동장>등 이제껏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일부러 이름을 검색해서 책을 찾는 몇 안 되는 저자이다. 초등학교 5학년에 다니는 세 친구가 돈을 벌기위해 세상에 뛰어들면서 겪는 에피소드가 담겨 있는 동화이다. 시종일관 유쾌함이 배경음악처럼 흐른다. 취향을 저격하는 문체이다.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자연스러우면서 직선적이다. 가벼운 촌철살인이랄까.

 

하루 종일 마늘을 깐 대가로 만 원을 받는 초원이의 할머니, 순진한 초등학생을 속인 대가로 이득을 챙기려는 전단지 사장, 먹이사슬을 연상케 하는 삥 뜯는 언니들, 돈 많은 부모님을 만나 영어 단어 한 개를 외우는데 200원을 받는 반장. 다양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삶을 통해 돈을 번다는 것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한다.

아이들의 눈에 비춰진 어른의 모습이 부끄럽다. 초등학생인 줄 뻔히 알면서 일을 시키는 전단지 사장의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 낯선 풍경이 아니다. 택배 일을 하는 청소년들이 떠오른다. 열악한 환경에서 최저 시급도 보장받지 못한 채 일하는 청년들이, 백화점 입구에서 흰 장갑을 끼고 교통정리를 하는 청춘들이 생각난다. 그마저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거리는, ‘알바천국이 되는 적나라한 현실에 마음이 아프다.

 

대학교 1학년 때, 과외를 하여 처음으로 돈을 벌었다. 졸업 때까지 과외를 했다. 3학년의 어느 주말에는 세 탕을 뛴 적도 있다. 20세 이후 주말마다 쉬어본 적이 없던 나는 주말이 싫었다. 내게 주말은 쉬는 날이 아니라 일을 하는 날이었기에. 이른 아침부터 한밤중까지 식당 서빙을 하던 어머니 앞에서 힘들어하는 마음은 차라리 사치였지만, 힘든 건 힘든 거였다.

몸보다 견디기 어려웠던 건 마음이었다. 지겹도록 공부했던 영어나 수학을 대학생이 되어서도 다시 가르쳐야 한다는, 설명해도 이해를 못하는 아이들에 속이 터졌던, 돈 많은 부모를 만난 그들이 부러워질 때마다 가라앉던 그 마음들이. 그 때 생각이 나면 가끔 울컥한다. 학생 입장에서는 다른 아르바이트에 비해 일한 시간 대비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였지만.

 

월급날 즈음만 잠시 통장에 머물다 가는 숫자들을 볼 때마다 돈을 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분명 좋아서 선택한 직업이고, 보람을 느끼는 순간들도 있다. 하지만 가끔 기계적으로 일한다는 생각이 들고 남의 떡이 더 커 보일 때면 다른 일로 돈을 벌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한다. 6살 위의 직장 동료는 이 나이에 어디서 이만큼 돈을 버냐 하신다. 지금 그만 두면 어디 써주는 데도 없다며 힘닿는 데까지 다니라며 우스갯소리로 말씀하신다.

2017년의 최저시급 6,470원을 생각하면 내가 하는 푸념은 너무나 배부른 소리임을 안다. 어쩌면 저쪽에서 모자를 쓰고 제복을 입은 채로 아메리카노를 만드는 알바생은 그보다 훨씬 적게 받을 지도 모를 일이다. 낮 동안에는 수시로 열 받는 순간들이 난무하지만, 소설 <사랑의 생애>에서도 우리는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하는 대단한 일을 하며 살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 순간을 기다리면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일을 견딘다.’고 했으니. 퇴근 후에라도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으니 한편으로 다행인건 맞지만.

 

너무 힘들지 않게, 계속 재미있게, 거짓말하지 않고도 누구나 돈을 벌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그러면 오래오래 기분 좋게 일할 수 있을 텐데.(p148~149)’라는 문장을 읽다 보니 꿈을 꾸고 싶은 거다. 생계형 맞벌이라 돈을 벌지 않으면 가정 경제가 무너지는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 좋아하는 글을 쓰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싶은, 글로 돈을 벌고 싶다기보다는 책을 읽고 글만 써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었으면 하는, 글짓기대회에서 1만원의 문화상품권을 받고 벅찼던 기쁨을 더 자주 느끼고 싶다는 꿈을.

욕심이 생겨서 문제인데, 이런 마음이 욕심이 아닌 것이 되는 세상이 왔으면 하는 욕심이 또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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