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인과 제왕 - 문화인류학 3부작 넥스트 3
마빈 해리스 / 한길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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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시원해 보이는 강물 줄기, 연초록의 가뿐한 나무들, 외국의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지층. 컴퓨터 바탕화면의 이미지를 보는 순간 가슴이 탁 트인다. 체온을 넘어서던 2018년의 여름을 가까스로 넘겼다. 아침저녁으로 가을이 묻은 바람이 분다. 파란 강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고대 중국, 인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등 강을 중심으로 발달되었다는 문명들이 떠오른다. 물을 지배하던 절대 권력과 전제군주제 아래에서 수력 사회를 살아가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책을 읽고 나서 바라보는 물은 더 이상 편하게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가 1977년에 쓴 책이다. 처음에는 주춤했다. 과학이 발달되어가는 속도가 하루가 다르게 가속화되는 세상인데, 40여 년 전에 쓰인 내용이 얼마나 실효성을 나타낼 수 있을까. 절판된 책이라 중고로 구입해야 한다는 점도 망설임의 이유를 더했다. 꾸준히 읽히는 책은 아니라는 말이니. 따분하지는 않을까. 40년의 간극이 이질감으로 채워지지는 않을까. 선뜻 손이 가지 않았지만 이 모든 망설임보다 호기심이 조금이나마 컸던 것이 책장을 펼친 이유다. 나는 책이 쓰인 시점으로부터 40년 동안 일어난 변화를 이미 아는 입장이니, 문화의 흐름을 읽는 저자의 예측이 요즘 세상과 얼마나 일치될 수 있을까가 궁금했다. 옮긴이는 책을 번역하면서 1994년 여름의 혹독한 더위를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고 했다. 2018년 여름, 독자에게는 어떤 느낌을 줄까. 타임머신을 탄 기분으로 인류의 기원을 향했다.

 

문화인류학이라니! 생소한 분야였다. 내게 있어 문화란 움집, 초가집, 이글루, 수상가옥 등 거주 형태의 다양성이거나 한식, 양식, 분식, 중식, 일식 등 음식의 나열이거나 의복 형태의 변천사 같은 의미였다. 학창시절, 역사나 세계사 교과서에서 스치듯 배운 내용이 아는 지식의 대부분이었다. 더군다나 인류라는 거창한 말까지 결합되니 규모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져서 내가 이해할만한 분야가 아닐 것만 같았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들의 역사를 알아서 어쩌자는 건지 싶기도 하고.

식인과 제왕이라는 제목부터 탐탁지 않았다. 세상 어딘가에는 아직도 식인종이 있다지만 극히 일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제목으로 대표하기에는 과하다 싶어서. ‘식인제왕이란 말 역시 아무리 연관을 지어보려 해도 접점이 보이지 않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식인 문화는 일부 독특한 인종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여기에 정치, 종교, 경제, 사회 문제 등이 인과 관계를 이루며 사람들과 얽혀있었다. 일련의 역사가 야만적이라며 무조건 비난할 수 없을 만큼 합리적인 이유로 존재했다.

 

에세이형식이면서도 인류학에 대한 이론이 풍부하게 담겨있어 교과서를 공부하는 듯 했다. 저자는 문화 발전에 일종의 프로세서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생식압력(인구증가압력)에서 시작한 과정은 생산증강을 가져오고 이로 인해 생태 환경의 파괴와 고갈이 발생하면 새로운 생산 양식이 출현한다고 설명한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이제껏 발생했던 문화는 자연환경에 대한 인간의 적응과 자기조절 과정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과거의 유적들과 현존하는 일부 부족의 모습과 동서양의 사례들을 근거로 제시하며 인류 문화의 발달 과정을 말한다. 문화를 바라보는 거대한 틀을 제시하는 책이다.

교과서를 저런 식으로 배웠으면 어땠을까. 어른이 되어서 접하는 내용들이 새삼스럽다. 나이 들면서 생긴다는 통찰력은 죽어가던 지식에 생명력을 주는가. 학교 다닐 때에는 글자로만 인식되던 지식들이 마음에 들어와서 꿈틀댄다. 종종 느꼈지만 세상에 저절로 이루어진 건 단 하나도 없었다. 한 줄의 문장에 담긴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세월의 무게가 벅차고 먹먹했다.

 

동굴 안에서 발견되었다는 석공 기술의 흔적이나 엄청난 뼈 더미는 석기시대의 생활이 지극히 어려웠을 거라는 가정을 여지없이 깨어버린다. 남자 177cm, 여자 165cm. 구석기 시대 성인의 평균 신장으로 추정되는 데이터라고 한다. 생각보다 풍족한 삶을 누렸을 거라는 증거다.

일부 식물학자들은 식물이 움직일 수 없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광합성으로 스스로 양분을 만들어낼 수 있기에, 먹이를 찾아 헤매야 하는 동물과는 달리 움직일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이 책에서도 인간이 천성적으로 정착하기를 원해서 농사를 지은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석기시대에 농사를 짓지 않은 것은 지식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농사를 지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다. 고대로부터의 인류의 생활은 비례관계 그래프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나아지는 방향으로 발달되었다고. 근거 없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은 얼마나 오만한 것인가.

 

농업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빙하 시대 말기, 지구의 온난화로부터 출발한다. 기후 변화로 목초지가 소멸되면서 육식하는 인간에 의해 거대 동물의 멸종이 일어나고, 좀 더 작은 짐승을 거쳐 곡물 쪽으로까지 관심 대상이 확산되면서 농업적 생산 양식이 유발된다. 짐승이나 농사에 이용되는 가축의 분포에 따라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의 구세계와 아메리카로 대표되는 신세계의 촌락 생활에도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저자는 농사를 지으면서 인류가 정착 생활을 하게 된 기원을 이렇게 본다. 타고난 성향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발생한 생산 양식이라는 것이다.

변화는 멈추지 않고 일어난다.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환경이 소모되고 자원이 고갈된다. 생활수준의 하락을 막기 위한 대가가 필요해진다. 인간과 자원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수렵채집인들의 선택은 전쟁과 여아 살해이다. 전쟁에 참여하는 남성들과 연관이 되어 부계제나 모계제가 출현한다. 저자는 남성지배제와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원인도 전쟁에 있다고 본다. 남성에 의한 무기 독점의 부산물로 성차별적인 관습과 제도가 생겼다는 것이다.

농업 생산을 강화하다보니 이를 주도적으로 밀고 나갈 필요가 생긴다. 원시국가가 발흥한다. 국가는 자유로부터 예속으로 내려앉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 안에서 생산의 증강을 이끄는 자들은 빅맨이나 무미라 불렸고, 식량을 분배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권력은 막강해진다.

 

강도 높은 생산 활동으로 다시 인구가 증가한다. 가축이 드물었던 메소아메리카(중부아메리카와 멕시코)로서는 동물성 단백질의 공급원으로 인육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하기 위한 과정은 정황상 이해가 된다 해도 섬찟하다. 아즈텍이나 톨테카족, 마야족 등의 문화에서 종교적 희생의식으로 거행되었다는 인신공희. 인신공희를 위한 방편으로 전쟁을 일으켰고 주로 포로들이 식인의 대상이 된다. 상당수의 노예나 청년, 처녀들도 희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한다. 인간을 죽이는 과정이나 인육으로 잔치를 벌이는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된 부분은 매우 원초적이었다. 육식동물이 피식 동물을 취하는 과정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여 자주 움찔했다.

가축이 이렇게나 고마운 존재였던가. 적국의 병사들은 덕분에 식량의 생산자로 이용된다. 인육이나 가축이 동물성 단백질의 공급원으로 선택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비용 대비 효과의 문제이다. 라마의 먹이는 사람이 먹지 못하는 풀들이다. 잉카는 다행스럽게도 라마 덕분에 인육을 먹는 것을 그만둘 수 있게 된다.

유목민 사회의 돼지고기 금지도 필요에 의해 생겨난 문화이다. 육식의 계속적인 이용이 기존 생존 양식을 위태롭게 했기에 생겼다고 한다. 금기 대상은 물질적인 비용과 이득을 따져본 결과로 정해진다. 힌두교에서의 소고기 금지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동물 고기에 대한 일반 대중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어려워지자, 육식은 브라만 등 선택된 계층만이 누리는 특권이 된다. 인구밀도가 증가하면서 농사기간동안 쟁기를 끌어야했던 소는 금기시된다. 불규칙한 몬순 강우에 의존해야 하는 농사의 특성 상 암소와 황소 보호가 긴박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힌두교도의 채식주의가 물질에 대한 정신의 승리가 아니라 생산력에 대한 생식력의 승리라고 본다.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은 물을 지배하는 고대 제국적 통치제도의 복원이다. 생산을 집중적으로 강화하기 위한 과정에서 전제주의가 통치 형태로 탄생했다는 것이다. 물에 의한 올가미는 몇 천 년 동안 인간의 지성과 의지를 무력화시킨다. 물을 중심으로 발생한 문명사회에서 거대한 성곽, 피라미드 등 수많은 인력이 동원된 구조물의 건축이 가능했던 이유다.

자본주의가 유독 유럽에서 발달한 이유도 생산 양식과 무관하지 않다. 봉건 제도로 농노제가 실시되고 생산의 기본 단위가 장원의 영지로 분화되면서 출발한다. 전염병과 전쟁과 여러 가지 요인 등으로 장원 제도가 붕괴될 위기가 오자 과학 기술과 기계 생산에 기초한 제도가 절실해진다. 이윤을 극대화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그 결과 자본주의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어린이는 문화 발달 과정에서 꾸준한 희생양이 되어왔다. 구석기 시대의 유아 살해율은 50%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자행된 잔인한 행위가 석기 시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는 점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유아 살해는 취락 규모의 지나친 팽창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종종 이용되었다.

직접 살해뿐 아니라 간접 살해도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18세기 영국에서는 정부가 세운 영아 양육원이 사실상 어린이의 살해 장소로 이용된다. 수천 명의 기아들을 죽이는 유모들까지 존재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이로 인해 높은 출생률과 못지않게 사망률도 높았다. 19세기 초까지 양육기관에 있는 유아의 80%~90%가 출생 후 첫해에 죽어갔다니 경악할 일이다.

18세기 말 유럽에서는 드디어 어린이의 사망률이 감소하는데 그 이유에 화가 치민다. 어린이를 노동에 이용하기 위해서였다니. 생존의 문제라 어쩔 수 없던 면도 있었을 거다. 어른들의 이기심이라고만 치부하기 어렵기에 마음이 더욱 무겁다.

자식들과 함께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사회면 뉴스를 보니 다시 답답해졌다. 예나 지금이나 어린이들은 약자일 수밖에 없는 걸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를 희생시키는 방법이 유일한 선택지였을까. 속속들이 이어져온 역사적인 사실이 함께 떠오르면서 한동안 가슴이 아팠다.

 

19세기 산업 혁명이 일어나면서 인구 증가율은 감소된다. 인구통계상의 과도기로 불리는 시기가 나타났다. 저자는 그 원인을 3가지로 분석한다. 연료와 피임과 직업의 혁명이다.

직업의 혁명으로 경제 활동의 구조가 달라지면서 어린이에 대한 양육비가 증가한다. 이에 비해 극소 부분만 돈이나 재화나 용역으로 돌아온다. 이는 출생률의 감소로 나타난다. 21세기인 지금도 우리나라를 본다면 마찬가지 아닌가. 올해 우리나라의 2분기 합계출산율이 0.97명이라는 뉴스를 보았다. 0명대는 전쟁과 같은 극한 상황에서나 나타날 법한 현상이라는데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인구 감소 현상은 자원 분배라는 단순한 시각으로만 보면 바람직한 일이다. 가장 큰 문제는 연료의 혁명에 있다. 석탄이나 석유라는 연료가 재생 불가능하다는 점이 치명적이다. 현재의 식량 생산은 절대적으로 석유 공급에 의존한다. 저자는 감소되는 인구 증가율에도 불구하고 투입된 연료가 인구증가율을 따라잡지 못하게 될 것이라 예측한다. 대체에너지 전환의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태풍 솔릭이 지나간 후 요 며칠 장마처럼 비가 왔다. 긴장된 마음으로 뉴스 보도에 귀를 기울이며 기상 위성 사진을 가장 많이 보았던 지난주였다. 태양을 향해 정밀한 탐사선을 쏘아 올리고 우주여행상품이 개발되는 시대이지만 아직도 인간은 자연재해에 무기력하다. 지구온난화의 결과물은 상상 이상이다. 일기예보조차 보란 듯이 추측을 벗어난다. 환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이 만든 환경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기분이다.

다양한 문화는 환경의 영향을 받은 인류가 생존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결과물이다. 문화현상들의 연결고리가 놀랍다. 나타날 수 없는 문화의 형태는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함부로 속단하면 안 된다는 점도 배웠다.

저자가 제시한 문화 발전 과정으로 본다면 대체적으로 지금 이 시기는 생태환경의 파괴와 고갈이 일어나는 단계로 판단된다. 곳곳에서 일어나는 기상 이변과 화석연료의 고갈에 대한 데이터가 쏟아질수록 점점 분명해진다. 새로운 생산 양식이 나타날 시점이 온 것이다.

 

역사적 결정론을 지닌 저자의 입장에서 문화는 패턴처럼 되풀이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한다. 과정만을 본다면 환경에 순응할 수밖에 없나 하고 비관적인 듯 보이지만 저자는 조금씩 다른 선택을 하는 인간들의 대응방식에 주목한다. 유사한 듯 동일하지 않고, 확정적인 듯 확률적이라는 것이다. 하고 많은 선택지들 중에서 하필이면 그 선택을 하는 데에는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 보다 합리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노력하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의식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려면 이 세계가 어떻게 유지되고 변화되어왔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매우 유용했다.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이 부채 살을 편 듯 확 늘어난 느낌이다.

도미노를 떠올린다. 인접해있는 블록이 다음 블록을 건드리면 쓰러지지만 조금이라도 방향이 틀어지면 가다가 멈추고 만다. 도미노의 성공여부는 미세한 차이를 두고 바뀌는 방향에 있다. 문화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책을 쓴 마빈 해리스로부터, 책을 옮긴 정도영에게로, 책을 읽은 나로부터, 이 리뷰를 읽는 당신에게로 이어지는 인식 변화의 도미노. 거대한 폭풍이 나비 효과의 어느 지점에서 시작될지 불확실하지만 이렇게 이어지는 과정 어딘가에 아직 희망은 존재한다고 믿고 싶다.

 

p234, 2번째 단락 10째줄 : 암소을 암소를

p240, 2번째 단락 마지막 줄 : 우수꽝스런 우스꽝스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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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메모수첩 2018-08-30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이들의 사망율 감소와 증가 원인이 충격적이네요 ㅠㅠ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이 요약만으로 책을 안 읽어도 될 거 같ㅇ....으면 안 되고 기회 될 때 꼭 읽어보려고 합니다

나비종 2018-08-30 15:25   좋아요 1 | URL
독서모임 책으로 선정된 거라 대략적인 요약에 최선을 다했으나 내용 자체가 엄~~~청 방대합니다ㅎㅎ 세계사 내용 요약 숙제한다 생각하고 읽었습니다ㅋㅋ
 
컬러의 말 : 모든 색에는 이름이 있다 컬러 시리즈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 지음, 이용재 옮김 / 윌북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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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다홍, 주황, 귤색, 노랑, 노란연두, 연두, 풀색, 녹색, 초록, 청록, 바다색, 파랑, 감청, 남색, 남보라, 보라, 붉은보라, 자주, 연지. 초등학교 때 외웠던 20색상환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내 가슴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게 노란연두냐 연두냐 실물을 들이댄다면 당연히 구분도 못할 거면서 어째 아직까지 이름만은 생생하단 말이냐. 주입식 교육의 결과물이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그 이유만은 아니다.

켜켜이 접혀있던 무지개가 한껏 기지개라도 편 것처럼 좍 펼쳐진 색의 스펙트럼. 볼 때마다 마냥 좋았다. 한참 바라보노라면 심장이 살짝살짝 뛰면서 은은한 음악이 들리는 듯했다. 가지런히 누워있는 크레파스 앞에서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고 잘 사용하지도 않는 색연필 세트를 바라볼 때면 아직까지도 흐뭇해지는 내게 색깔은 이런 의미였다.

 

모든 색에는 이름이 있다니. <컬러의 말>이라는 책제목과 부제와 먼셀의 20색상환을 연상시키는 표지만으로 책을 구입할 이유는 넘쳤다. 책이 도착한 날 옆모습을 보고 한 번 더 반했다. 화려한 공작새의 날개 같기도 한 종이들을 손끝으로 훑어 내리는 나는 멋들어지게 채색된 피아노 건반을 연주하는 음악가처럼 의기양양했다.

75가지 색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과 이에 얽힌 역사와 문화가 담긴 책이다. 이토록 많은 이름이 존재했던가. 꼴랑 20개만 들어있던 나의 색채 월드가 팝콘처럼 튀겨졌다. 색이란 화가의 전유물이며 미술사의 영역에서만 다뤄지리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해왔나. 오징어 집 스낵을 베어 물기라도 한 듯 색에 대한 편견이 바삭 깨졌다. ‘색은 주관적인 문화의 창조물로 받아들여야 한다.(p27)’ 벌레에서 추출한 염료에는 생물학이 얽혀있었으며, 연금술사들이나 독극물과 관련된 화학이 담겨있었으며, 특권 계층의 의복으로 점유된 이력이 있는 문화였으며, 경쟁적으로 차지하려는 전쟁을 발발시키거나 막대한 자본이 오고 가는 등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역사였으며, 인간들의 정신적인 영역을 지배한 심리학이었으며, 많은 이들의 삶과 죽음이 얽힌 철학이었다.

 

색이 주는 심리적인 효과나 상징적인 의미는 이 책의 곳곳에서도 드러난다. ‘빛은 색이니, 그림자는 색의 결핍이다.(p12, J.M.W.터너, 1818)’ 빛은 에너지이니 색에도 고유의 에너지가 있다. 인간마다 지닌 자체 에너지와 공명을 일으키는 파장의 빛도 존재할 것이라 생각한다. 36.5도에 해당하는 적외선 말고 사람마다 뿜어내는 기 같은 것 말이다. 어떤 이에게 유난히 어울리는 색이 있다면 이 에너지들이 서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입은 옷이나 지니고 있는 물건의 색감만으로 왠지 자신감이 생기고 기분 좋아지는 때가 있는 것을 보면.

<소셜 컨트롤>이라는 네이버캐스트의 칼럼에도 색이 등장한다. 사람들의 행동이 바뀌면 세상도 바뀐다는 부제로 짤막하게 나오는 3개의 동영상 중에는 색과 관련된 흥미로운 실험이 하나 있다. 자연계에는 블루베리를 제외하고 먹거리의 색으로 파란색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이용하여 과식을 억제하는 환경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한 실험이다. 뷔페식당의 절반을 식탁보, 조명, 의자, 벽면에 이르기까지 온통 파란색 환경으로 만들어준 다음, 나머지 평범한 공간에서의 식사량과 비교한다. 실험의 결과는 놀라운 수치로 드러난다. 음식을 더 먹으려 왔다 갔다 하는 횟수가 줄어들고 식사량 역시 감소한다. 실제로 접시 색깔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식사량을 줄일 수 있다는 팁으로 실험은 결론을 맺는다.

 

컴퓨터 안에서 구현되는 몇 백 개의 색상 안에는 얼마나 많은 세월들이 켜켜이 담겨있는 걸까. ‘디지털 사진 기술의 발전으로, 그저 클릭 몇 번이면 갓 찍어낸 생생한 이미지에 한 세기의 세월을 불어넣을 수 있다.(p255)’ 한글 화면의 글자색을 클릭하다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든다. 존재 자체를 당연한 것으로 알았던 컬러.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발색의 과정에는 지난하고 치열한 인내가 담겨있었다. 구현해내기 불가능하리라 여겨졌던 색의 탄생은 치열한 땀방울의 결과물이다. 색에 관한한 무에서 창조된 유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완독하는 데 한참 걸렸다. 몇 번이나 집어던지고 싶었다. 색의 이름 자체도 생소하였거니와 색의 역사를 말하는 내용이다 보니 발음도 어려운 외국인들의 이름과 문화적인 용어가 설겅설겅하게 씹혔다. 첫 문장을 들여 쓰지 않고 앞부분에 맞춰 정렬한 편집 체계도 문단을 구분하여 내용을 파악하려는 데 방해가 되었다.

가장 난감했던 부분은 번역이었다. 원어민 선생님 앞에서는 과묵한 외국인이 되며 간혹 마주치면 오른손을 들고 하이!”만을 일관되게 외치는 내가 꺼낼 말은 아닐 듯싶지만, 많은 문장들이 갈치 가시처럼 자꾸 목에 걸렸다. 유용한 정보가 듬뿍한 것은 알겠는데 당최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모르겠는 거다. 세계사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이들에게라면 뒷동산을 산책하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저자 역시 서문에서 색의 깊은 역사를 다루지 않는다. (중략) 간략사와 성격 묘사 중간의 어딘가에 속하는 이야기를 썼다.(p11)’라고 했으니. 다만 지극히 얄팍한 지식을 보유한 나란 인간은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하기라도 한 듯 헐떡였다는 거다. 원문에 최대한 가깝게 직역하려는 역자의 의도였겠지만 조금만 더 자연스러운 용어로 바꾸거나 몇 가닥 더 풀어헤쳤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얼굴에 바른 파운데이션이 군데군데 뭉쳐져 말라버린 느낌의 문장이랄까. 부드럽고 가뿐하게 펼쳤으면 훨씬 좋았을 것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해본다.

 

두더지 잡기 게임처럼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과속방지턱을 가까스로 넘어가며 간신히 완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이나 발상만으로도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미술 관련 책을 읽었는데 음악을 감상한 기분이다. 색깔을 상상하고 바라보며 읽어가는 내내 리드미컬한 음악이 눈 속에서 춤을 추었다. ‘리듬(rhythm)’이란 흐른다는 의미의 동사를 어원으로 하는 그리스어 ‘rhythmos’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무수히 많은 컬러가 마음속으로 계속 흘러들어와 리듬처럼 펼쳐졌다. 하루에 색상 하나씩 읽기로 정해두고 오랜 시간 곱씹는다면 의미 있는 맛이 날 것 같다. 무지개 너머 존재하는 색채의 드넓은 세상을 분명 보여줄 책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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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 - 홍승희 에세이
홍승희 지음 / 김영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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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를 감싸고 있는 초록색 옷을 벗긴다. 가방에 책을 넣고 뺄 때 물건들에 걸리면 찢길까 신경 쓰여서이다. ! 홀딱 벗고 다리를 벌린 채 물구나무를 선 여인의 그림이 가운데 떠억 버티고 있다. 슬그머니 다시 덮는다. 무엇이 부끄러워서였을까. 무엇을 감추고 싶었던 걸까, 나는.

 

웅크리거나 몸을 반으로 접거나 거꾸로 서있거나 어딘가에 매달려 있다. 중간 중간 실린 그림 속 여인들의 자세이다. 전부 옷을 입고 있지 않다. 프리다 칼로가 스친다. 피 철철 흐르는 강렬한 색상도 아니고 전체적으로 섬세한 선인데 무엇이 그녀를 연상시킨 걸까.

몇 점 감상하다보니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자유. 왜 하나같이 옷을 입고 있지 않은지 알 것 같다.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감추고 있는 외피를 벗어던짐으로써 세상과의 경계를 없애고자 했던 걸까.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고자 하는 열망이 뿜어져 나온다. 자유라는 과녁을 향해 쏘아 올린 화살처럼 강렬하다.

 

자살을 시도한 이야기, 감옥에 간 이야기, 가정사 등 민낯의 이야기들이 담담하게 담긴 책이다. 삶에 대한 허무가 짙게 깔려 텅 빈 듯 보이지만 투명한 공간에는 무언가 담겨있다. ‘살면서 느끼는 감정을 압축적으로 몽땅 뱉고 나면 다 살아버린 것 같아 모든 게 허무하게 느껴진다. 기분 좋은 허무다.(p54)’ 광섬유처럼 넘실거리는 허무의 끄트머리에서 삶이 섬세하게 반짝인다. 켜켜이 담겨있는 감수성을 조심스럽게 따라간다.

작가에 대하여 더 알고 싶어서 인터넷 자료를 찾아본다.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인터뷰 장면 중 이 책에 관한 작가의 답변이다. 나의 글은 아직도 몇 겹의 옷을 입고 있는데 거추장스러운 옷 따위는 훌훌 벗어던져버린 듯 거침이 없어 보인다. ‘애국이란 태극기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물에 빠진 아이들을 구하는 것입니다.’ 효녀연합 퍼포먼스를 하는 그녀의 미소가 당당하게 빛난다.

 

나는 미디엄 레어를 좋아하는 가끔 채식주의자다. 가끔 고기가 당기는 날도 있고 회식을 하면 고기에 몰두하며 본능적으로 흡입한다. ‘서툴러도 채식주의자이고 싶다 / 조금이라도 내 존재가 덜 가해할 수 있도록(p28)’ 고기 먹는 모순된 채식주의자라 채식주의자라 말을 꺼내기가 다소 민망하지만 저변에 깔려있는 마음은 채식주의다. 고기를 조금 덜 먹으리라 다짐한다. ‘덜 가해할 수 있도록이라는 말이 마음을 툭툭 건드린다.

 

주변 사람들을 얼마나 알아야 아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는 걸까. 그들의 생각과 가치관과 아픔과 기쁨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 걸까. ‘같은 언어로 소통하면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하기 쉽다.(p151)’는 말에 공감한다. 사람들이 나를 잘 모르는 것처럼 나 역시 그들을 잘 알지 못한다. 일부만을 보고 전부를 아는 양 착각하는 지도 모르고. 속단은 오만이다. 3, <당신을 모른다>를 읽고 나니 사람들을 대하기가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핸드폰에 저장된 주소록을 천천히 넘겨본다. 벌써 마지막 목록이다. 예상은 했지만 당황스럽다. 어설피 아는 사람들뿐이다. 자신 있게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니. 어떤 사람을 완전하게 안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생각한다. 그림과 같은 글을 쓰는 사람이구나. 그림에서 벗어던진 가식이 글에도 고스란히 묻어나온다. 파스텔 톤의 부드러운 색상의 그림에 마음이 몰랑몰랑해지더니 글도 비슷한 느낌이다. 울어도 전혀 창피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랄까. 울면 안아주는 게 원칙인 남신 라도 만난 듯 책장을 넘기다보니 눈물이 핑 돈다. 작가의 이야기가 슬퍼서도 연민이 느껴져서도 아닌데. 어느 순간 책을 통해 나를 바라본다. ‘눈물은 무능이 아니라 열린 감각의 증거다.(p80)’ 단단하게 누르고 있던 덮개가 스르르 벗겨진 듯 마음이 촉촉해진다. 논바닥처럼 갈라진 감자 껍질을 벗기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속살을 마주한 기분이다.

 

책 표지를 덮고 있던 껍질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진초록의 머리칼에 그믐달이 그려진 여인의 뒷모습이다. 그믐달. 해 뜨기 전 새벽에 뜨는 달이다. 어깨에 그려진 문신 부근 지평선 아래에는 태양이 있다. 이제 곧 태양이 떠오를 거라 속삭이는 것 같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누드가 야하다는 생각은 편견이었다. 아무 것도 입지 않았다는 것은 존재 자체를 말하는 것인데 야하다는 발상이야말로 이상한 것을. 두 번째 읽을 때에는 껍데기를 훌러덩 벗기고 당당하게 카페로 갔다.

 

글에도 누드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가식과 허울을 다 벗어던지고 인간 본연의 감성과 허무와 죽음을 그린 글. ‘그런데 아파도 돼.(p5, 들어가며)’라는 작가의 말이 아픈 마음을 드러내도 괜찮아, 괜찮아라 말하는 것 같다.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글들이 이제 곧 연두 잎이 돋아날 거라며 마음을 토닥인다.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자신을 드러낸 글이 주는 위안이란 이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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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플갱어를 잡아라! - 제7회 웅진주니어 문학상 단편 부문 대상 수상작 웅진책마을
이윤 지음, 홍정선 그림 / 웅진주니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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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퇴근 후 피아노를 배우고 강을 끼고 도는 산책로를 거의 매일 간다고 했지만 그마저 썩 즐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좋아하는 것을 찾아봐. 친구에게 말했다. 학생들과 상담할 때에도 종종 해주던 말이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계속 찾아보라고. 친구와 대화하는데 이 책이 떠올랐다. 도플갱어와 얼굴을 비볐을 때 사라질 듯 투명해지던 주인공의 모습이 친구와 겹쳐졌다. 투명한 외로움이 해파리처럼 물컹하게 잡히는 듯했다. 내게도 종종 머물다 가는.

 

맛있는 것도 같이 먹고 바다에 발도 담그고, 초록의 숲길도 실컷 보았다. 행복한 사진들 속에서 환하게 웃는 친구의 미소가 눈부시다. 집에 도착했다는 카카오 톡을 보내니 답변이 온다.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역 열호아. 친구의 삶에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들기를 바라며 피곤한 몸을 뉘었다.

마음의 갈증이 완벽하게 해소되지는 않았으리라. 자신과 같은 친구 한 명만 가까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외로울 때 함께 있어주고 답답할 때 푸념을 들어줄 수 있는 그런 친구, 내 마음의 어디가 가려운지 정확하게 긁어줄 수 있는 존재 말이다. 외롭거나 답답할 때마다 막연한 바람을 갖곤 했다. 조금 더 어릴 때에는 내 대신 학교를 가거나 싫어하는 일을 해준다면 좋을 텐데 하며 짜릿한 상상도 했다. 누구나 한번쯤은 상상해보았을 또 다른 나. 상상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글을 읽어 내려가는 기분이 참 묘하다.

 

표제작 <도플갱어를 잡아라!>는 진정한 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돌아보게 되는 동화이다. 함께 실린 <집으로 가는 아주 먼 길>대신 로 치환하여 읽어도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이 된다. <지구 관찰자들>에서는 평화의 중요성을, <할아버지와 꽃신>에서는 평균 수명이 길어진 미래에서의 노인 소외 문제를 다루고 있다. <집으로 가는 아주 먼 길>을 제외한 3편의 동화는 판타지적인 요소가 바탕이 된다. 달을 보고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나 싶고, 말하는 신발에 관한 아이디어도 참신하다. 높이 평가하고 싶은 점은 동화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있는 주제이다. 현실에서 한 번쯤 되돌아보아야 할 화두가 선명하게 담겨있다.

 

짧은 동화를 읽으면서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제껏 나는 시키는 대로 척척 해주는 로봇과 같은 존재를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동화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 진정한 는 오로지 한 명뿐이다. 존재로서의 는 사람들의 눈치 따위는 보지 않고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당당한 사람인가 끊임없이 묻는다.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본심을 숨기고 허깨비로 살아간다면 도플갱어와 다를 바 없음을 말한다. 도플갱어에 얼굴을 비볐을 때 점점 투명해지는 주인공의 모습은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지금 온전한 로 존재하고 있나요? 라고.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사람들의 내면을 거울 속 친구로 비유한다. ‘거울 속 친구와 대화하기 위해 필요한 건 오직 하나뿐이야. 용기, 바로 그것이지.(p123)’ 오랫동안 의식하지 못했다. 간혹 의식했을 때에도 종종 외면해왔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마지막에 실린 동화 <집으로 가는 아주 먼 길>에서 주인공 영도가 미로를 헤매는 흰쥐를 보고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는 장면도 결국 에게 이르는 여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거라 생각한다. 내게 있어 터닝 포인트는 책을 읽는 일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느린 독서 속도는 책을 내팽개치지 않고 붙들고 있게 하는 용기를 필요로 했다. 그 과정에서 글을 쓰게 되었고 내가 쓰는 글은 자연스럽게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답답하거나 외로울 때 글을 쓰면 후련해진다. 좋아하는 일은 확실히 찾았는데 요즘은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무엇을 쓰고 싶은지, 내 글이 걸어갈 장르와 방향 말이다. 짧게 쓸 수 있는 내용은 시로 표현하려 한다. 하지만 시 쓰기가 내게 맞는 길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쓰다 보면 글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어 아직도 산문이 편하지만 소설은 호흡이 길고 치밀해서 엄두가 나지 않는다. 수필은 내 얘기를 누가 재미있어할까 싶어 아직은 시도하고 싶지 않다. 나중에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나의 글을 읽게 되고 삶의 에피소드를 묘사할 기회가 온다면 모를까 나부터도 타인의 신변잡기에는 선뜻 시선이 가지 않으니까.

 

계속 나에게 말을 거는 중이다. 나비종, 너는 무엇을 좋아하니? 무엇을 원하니? 어디로 가고 싶은 거야? 거울 속의 친구를 자주 들여다보면 어느 순간 환하게 웃음 짓는 얼굴을 볼 날도 오지 않을까. 바로 그 순간을 알고 싶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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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 시집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50. 서서히 노안이 나타날 나이. 작은 글씨가 안 보인다는 또래 사람들의 말이 남의 일 같지 않다. 라식 수술을 한 사람들은 근시 증상이 다시 나타나는 것이 노안이 왔다는 증거라던데 요즘 부쩍 멀리 있는 물체가 흐릿한 것을 보면 내게도 드디어 왔구나 싶다. 눈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이 와 닿을 때마다 언제까지 노트북에 글을 쓰며 지낼 수 있을까 불안하다. 눈이 어리어리해서 책조차 보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종종 울적하다.

 

어쩌다가 글 쓰는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고/ 고도와도 같고 암실과도 같은 공간/ 그곳이 길이 되어 주었고/ 스승이 되어 주었고/ 친구가 되어 나를 지켜 주었다’(p33~34, <천성>) 책을 읽고 리뷰를 쓰고 시를 쓰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하루 중 많은 시간은 직장일과 집안일로 할애되지만, 퇴근 후나 휴일에는 대부분 글과 함께 보낸다. 절대적으로 적지만 환한 여백으로 채워지며 내 삶을 빛나게 하는 시간이다. 책읽기와 리뷰와 시 쓰기의 시작은 작은 우연의 연속이었다. 여러 겹으로 겹쳐진 우연은 단단한 화장지의 심이 되어 나의 시간을 돌돌 말아가기 시작했다. 10여년이 넘어서자 이 모든 시간들이 필연의 의미를 띄었다. 뭉툭하던 연필 끝이 점점 가늘어지면서 서툴지만 가끔은 삶이 지닌 디테일을 나만의 질감으로 묘사할 수 있었다.

 

글이 매력적인 것은 읽는 사람마다 다른 색채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어머니>라는 부제의 2장에서는 생경한 낱말들이 어찌나 많던지. 서문안, 달비, 철기날개, 관사, 숙고사, 자미사, 법단, 양단, 세루, 스란치마, 은조사, 우장, 장무새, 적산, 측천무후, 모본단, 차부, 마메다쿠시. 인터넷 사전을 찾아가며 음미하다보니 종종 걸음으로 촘촘하게 걸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를 떠올리게 한 부분은 오히려 <가을>이라는 부제가 달린 3장이다. 주변 생명들에 대한 시를 음미하며 나의 어머니를 자주 떠올렸다.

가난하다고/ 다 인색한 것은 아니다/ 부자라고/ 모두가 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됨됨이에 따라 다르다’(p88, <사람의 됨됨이>) 궁핍하게 살았지만 어머니는 베푸는 모습을 몸소 보여주셨다. 어릴 때부터 자연스러운 의미를 지닌 동사로서의 나눔을 알려주신 분이다.

백일장 대회에 나가 <이팝꽃처럼 솔솔>이란 시로 입상을 한 적이 있다. 공양주로 일하시던 어머니께서 절에서 남은 밥을 가져오셔서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어느 날 그 밥이 삭아버려 버렸던 경험에서 만들어진 시이다. 입상 결과가 발표나자 자랑하듯 이메일로 시를 보내드렸다. 내 시를 보고 우셨다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우쭐했다. 으흣~ 드디어 나도 정말 감동적인 시를 쓰게 된 거야 라고. 당신께 내 시는 보다 진한 색채였다는 사실은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의 생생한 하루. 그게 내 기억의 전부였건만,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났던가 보다. 많은 하루들을 모조리 담고 계셨던 당신의 울림은 생각보다 깊었다. ‘육신의 아픔은 감각이지만/ 마음의 상처는/ 삶의 본질과 닿아 있기 때문일까/ 그것을 한이라 하는가’(p106, <>) 그 시절들이 어쩌면 당신께는 한이었던 걸까. 이 시를 읽다보니 불현 듯 이런 생각이 든다.

 

마음에 와 닿는 글의 공통점이 있다.

첫째, 안과 밖의 묘사가 균형을 이룬다. 내면의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면서도 그의 사유는 안으로만 함몰되지 않고 바깥세상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동양화에서 붓으로 그려지는 대상과 여백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며 감흥을 자아내듯이. 세상을 꼬집는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이 통쾌하다. ‘음식이 썩어 나고/ 음식 쓰레기가 연간 수천 억이라지만/ 비닐에 꽁꽁 싸이고 또 땅에 묻히고/ 배고픈 새들 짐승들/ 그림의 떡, 그림의 떡이라/ 아아 풍요로움의 비정함이여’(p113, <까치설>)

둘째, 작가만의 이야기가 있다. 그만의 표현 방식과 그만의 이야기가 담긴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이야기이기에 독자는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대하소설을 쓴 소설가로만 알고 있던 박경리님의 시를 보서 깨닫는다. 당신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가 담겨있구나 하고. 당신과 글과 어머니와 가족과 주변과 사회의 모습을 그려낸 글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색채를 띤다.

 

나는 아직도 나이가 들어간다는 사실이 두렵다. 언제쯤 되어야 늙어가는 것이 편안해지는 경지에 오를까.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p16, <옛날의 그 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말이 계속 마음을 두드린다. 이토록 가뿐해 보이는 문장들이 왜 이리 묵직하게 다가오는지. 소설 <토지>를 집필한 25년의 세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을 지나온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걸까. 희끗해진 머리. 돋보기를 쓰고 펜을 움켜쥔 채 책 표지 안쪽에 무언가를 적고 있는 노작가의 모습이 담긴 사진(p140)이 오랜 잔상으로 남는다.

 

그것 다 바느질이 아니었던가/ 개미 쳇바퀴 돌 듯/ 한 땀 한 땀 기워 나간 흔적들이/ 글줄로 남은 게 아니었을까’(p30, <바느질>) 십여 년이 지난 오늘 노작가의 생애가 기록된 약력을 담담한 마음으로 따라가며 글 쓰는 삶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수제 퀼트. 글을 쓴다는 건 이런 의미일까. 자신만의 글 안에 시간도 꿰고 마음도 꿰며 삶이라는 작품을 완성해가는 과정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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