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의 무게 휴먼어린이 고학년 문고 1
이현 지음, 오윤화 그림 / 휴먼어린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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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놓아줘요. 보낼 때는 보내줘야지. 출근하자마자 화분에 물부터 주는 나를 보고 짝꿍 샘이 말씀하신다. ~ 아니에요. 저 밑바닥에서는 아직 살아있을 지도 몰라요.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마음으로 물을 준지 일주일째다. 내일 아침이라도 연두 빛 이파리가 고개를 내밀 것만 같단 말이다.

처음부터 물을 준 것은 아니다. 스승의 날 즈음이었나. 누군가 졸업한 제자에게서 받으신 듯 보이는 화분이 교무실 창가에 놓였다. 쪽파처럼 생긴 초록 잎이 무성하게 심어져있었다. 내가 받은 것도 아니기에 무관심했다. 얼마간을 무심코 지나쳤다.

그 문구가 눈에 띈 것은 우연이었다. 기분이 우울하던 6월의 어느 날, 싱크대에서 손을 씻고 고개를 돌리는데 화분이 보인다. 하얀 플라스틱 바탕에 박힌 검은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I LOVE YOU SO MUCH! 화분 안에 담긴 식물이 격하게 나를 사랑한다고 말을 거는 것 같아 피식 웃음이 나온다. 조금 옅어진 이파리 사이로 갈색 잎이 삐죽삐죽 섞여있는 것을 보는 순간 방치되고 있음을 알았다. 흠뻑 젖을 만큼 물을 주었다. NOBBY. 화분에 붙어있는 스티커를 보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너에게 이름을 지어주겠어! ~ 이제부터 너는 노비야!

 

악당이라는 이름을 붙인 유기견과 아이와의 이야기. 요즘 동화는 왜 이리 뭉클한 작품들이 많은지. 웬만한 소설을 읽을 때보다 더 가슴이 먹먹해진다. ‘!(p161)’ 한 글자가 나오는 순간, 책 속에서 총알처럼 불쑥 튀어나온 글자가 눈가를 스치기라도 한 듯 눈물이 핑 돈다. 주인공 수용이가 쓰러진 악당을 품에 안는 장면이 이어지자 제목이 지닌 묵직한 존재감이 다가온다. 악당의 무게. ‘무게가 이런 의미였구나. 현실에서도 이런 저런 이유로 스러져가는 생명들을 생각하니 책을 읽기 전에는 평범하게 지나치던 제목이 뜨거워진다.

언젠가 라디오 방송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작은 새 한 마리의 무게만큼 자신의 살점을 떼어주기로 약속한 이. 아무리 살을 도려내어 올려놓아도 저울은 새가 놓인 쪽으로만 기운다. 저울의 균형은 그가 저울 위에 올라서는 순간 비로소 맞는다. 생명의 가치는 동일하다는 깨달음을 주는 일화이다. ‘사람은 이유 없이 개를 괴롭혀도 되고, 개는 사람한테 절대 대들면 안 되는 거야?(p99)’ 맑은 시선으로 생명을 바라보는 아이의 항변은 동화 밖에서 행해지는 어른들의 부당함을 향한 고귀한 외침이다.

 

동물을 키워본 경험이 거의 없다. 아이가 어렸을 때 유치원 숙제로 같이 키우던 누에와 달팽이가 경험의 전부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죽어버린 생명들을 버리며 씁쓸했던 기억이 있다. ‘나쁜 사람들이 개를 버리는 게 아니야. 개를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나쁜 짓을 하게 되는 거지.(p79)’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라.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말이다.

타고난 성향으로 보았을 때 내게는 동물보다는 식물이 더 맞는다. 선인장도 말려 죽이는 경이로운 손의 소유자였지만 재작년 여름 이후로 달라진다. 나의 손에서 식물이 살아나기 시작한 거다. 방학식을 하던 날, 교무실 창가에 있던 화분을 가져왔다. 그즈음 나는 교무실에서 매일 화분에 물을 주며 점점 피어나는 분홍색 꽃을 보는 재미에 빠져있었다. 방학이 가까워지자 혹시나 말라죽을까 염려되었다. 집으로 가져왔다.

앞 베란다에 놓고 열심히 물을 주었다. 그러다 무지하게 더웠던 며칠, 바쁘게 왔다 갔다 하다가 화분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만다. 방치된 화분은 태양의 열기에 타버린 듯 갈색으로 변해있었다. 갈색 잎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아래쪽 구석에 코딱지만 한 초록 잎 두어 장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얘네들이라도 살려보자. 미안한 마음으로 정성껏 물을 주었다. 며칠이 지난 뒤 나는 질긴 생명의 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p178)’ 어린이 독서 모임을 진행하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사람 이외의 존재를 생각나는 대로 열 가지만 말해보라고. 동물과 식물 이름이 술술 쏟아져 나온다. 열 가지 정도 이름대기는 까짓것 일도 아니다. 이런 생명들이 먹이사슬로 얽히면서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거야. 우린 모두 한 때는 살아있던 것들을 먹으며 살아가지. 오늘 아침과 점심 때 먹었던 음식들을 생각해봐. 어느 것 하나 생명이 아닌 것이 없지 않니? ~ 빵은요? 그건 살아있던 밀로 만들지. 밥은요? 살아있던 쌀로 만들잖아. ? 정말 그러네요.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생명을 먹을 수밖에 없지만 그들에게 늘 고마움을 잊지 말아야 해. 순진한 눈망울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주방 창가에는 4개의 작은 화분이 있다. 가끔 식물들이 살아 숨 쉬는 모습을 상상한다. 이 공간에 가족 이외에 숨을 쉬는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생명력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모든 생명이 타고나는 힘일까, 햇살과 바람과 흙과 물이 지닌 신비로운 기운이 합쳐져 생명을 지켜내는 걸까. 2년 전의 그 화분은 눈곱만 한 연두 잎이 서서히 영역을 넓혀가더니 되살아났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지금까지 주방 창가에서 풍성하게 잘 크고 있다. 새끼손톱만한 꽃이 번갈아 피어나며 여섯 장의 꽃잎을 흔든다.

정성껏 물을 주며 시든 잎을 떼어내건만 어쩐지 노비는 점점 생기를 잃어간다. 급기야 몸 전체가 연한 황토색으로 변했다. 가위로 이발을 해주었다. 아랫부분까지 메말라있었다. 그렇게 해놓으니까 봉분 같애. 그만 포기해요. 이미 죽었어. 물을 주는 나를 보며 짝꿍 샘이 다시 말씀하신다. 일주일만 더 키워 보려고요. 키운다는 표현이 무색하게 정지 화면처럼 미동도 않는 노비를 보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요즘 매일 아침 나의 눈은 현미경이 되어 노비를 구석구석 살핀다. 초록의 흔적을 한 점이라도 볼 수 있을까 숨을 죽이고 관찰한다. 질긴 생명의 힘을 엿본 경험이 노비를 보내지 못하는 마음으로 작용하는 걸까. 노비에게 물을 준 한 달여 넘는 시간이 압축되어 버티고 있는 뿌리 끝에 이슬 방울만한 생명으로 매달려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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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물리학
림태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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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어린이용 약병과도 같다. 아귀가 맞춰지지 않으면 뱅글 뱅글 헛바퀴만 돌 뿐 잘 열리지 않는. 가장 가까우면서 가장 멀리 느껴지는 거리에 이런 모습의 그가 있다. ‘몸이 느껴지지 않아야 건강한 겁니다.(p259)’ 관계에 관한 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나의 시선은 그를 향한다. 그가 느껴지는 걸 보면 우리의 관계, 아직 건강하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몇 번을 망설이다 다시 시도 해보아야지 하며 슬쩍 마개를 돌린다. 다가간 거리만큼의 탄성이 작용하면 되돌아온 공간은 텅 빈 공기로 가득하다. 가끔 두려웠다. 돌리고 돌리다 지쳐 어느 순간 돌리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될까봐.

 

따뜻한 봄 같은 사람이라 좋아. 주변 사람들이 그에 대해 물을 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스웨터가 따듯한 이유는 털실의 보푸라기들이 틈 사이에 온기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p46)’ 그렇게 수북하던 털실들이 끈끈한 일상에 묻어 한 올 한 올 빠져나간 걸까. 점점 온기가 그리워졌다. 언제부터였을까. 이 때부터였을까, 아님 그 후였던가. 그 때는 늦지 않았던 걸까. 골조만 남아있는 빈 집의 이미지가 겹쳐질 때면 종종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시작도 기억나지 않는 어긋남을 바라보는 일은 매번 오한이 느껴지는 슬픔이다. 한 때 열기를 뿜어내던 관계의 끄트머리가 이렇게 투명해질 수도 있다니. 이런 생각이 온몸에 열기로 퍼질 때면 매번 마음은 감기를 앓았다.

 

책날개로 펼쳐지는 첫 문장에 시선이 꽂힌다. ‘살아보니 삶의 전부가 관계였다.’ 요즘 자주 떠올리는 생각이다.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간혹 나를 힘겹게 했던 것은 관계였지만 잠시 몸을 기대 위안을 받은 것 역시 관계였다. 관계의 여집합은 관계가 아닌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관계인 걸까.

관계의 본질을 꿰뚫는 작가다. ‘관계는 빛이 아니라 열에 가깝다.(p115)’ 열이 이동하듯 관계는 계속 변하니까.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려면 무언가를 태우는 희생이 필요하듯 좋은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니까. 고온에서 저온으로 열이 이동하듯 관계에서도 내가 따뜻한 열기를 유지해야 타인의 체온을 함부로 빼앗는 일이 없(p116)’어지는 것이니.

 

냉정하게 판단해보면 시선을 먼저 돌린 것은 나였다. 그의 무심함을 탓했던 많은 날들은 나를 합리화하기 위한 핑계였다. 내가 먼저 등을 보였다.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던 것도, 마음을 냉동실에 집어넣어 딱딱하게 얼린 것도 내 자신이었다. 서운함은 켜켜이 쌓여 빙하처럼 단단한 벽이 되어버렸다. 절대로 변할 것 같지 않아. 다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아. 잘해준대도 내가 싫어. 굳어진 관계를 확신하며 가까운 친구에게 무덤덤하게 말하곤 했다.

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나. 관계에 대한 확신을 내린다는 것은. 며칠 전, 브라스 공연 중 연주되던 캐논을 듣다보니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그가 좋아하던 음악이다. 여러 악기 버전으로 나온 이 곡을 내내 듣던 때도 있었지. 나도 모르는 새 온기가 스며들어 있었나. 얼어붙은 마음의 끄트머리가 살짝 녹아 눈물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함께 음악을 듣던 순간들을 안고 흘러나왔다. ‘캐논이 담고 있던 봄날의 시간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라는 낱말은 관계의 사전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건지도 몰랐다.

 

변화는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고기를 먹을 때 파인애플을 구워서 제일 먼저 내 접시에 올려주었을 때, 출근복도 못 갈아입고 널브러져 잠든 방의 불을 슬며시 꺼주었을 때, 분리수거를 내놓고 티셔츠를 손빨래하고 스스로 밥을 차려먹었을 때부터.

글에 마음을 실어 조금씩 덜어내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조금씩 일어나는 변화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가 변한 건지 내가 변한 건지 둘 다 변한 건지 모르지만 관계의 색채가 변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켜켜이 쌓여 꽉 들어차있던 감정들이 마음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해왔던 걸까.

마음은 잡동사니를 쌓아두는 창고가 아니라 비워두는 무의 공간이다.(p244)’ 빈 공간으로 새로운 공기가 조금씩 스며드는 것 같다. 계속 덜어내려 한다. 이 공간에 온기가 스며들 수 있도록. 관계가 이라면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언젠가 나의 온기를 나누어줄 수 있을 정도로.

 

진정한 관계란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미는 힘으로 서로의 확장을 돕는 일이다.(p38)’ 지금까지는 단지 확장을 위해 밀어내는 시기였을 뿐이라 생각하기로 한다. 외로울 때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던 시간만큼 나는 확실히 넓어진 것 같으니까. 그리움의 시간이 길었을 뿐이라고.

첫 장에 실린 능소화의 꽃말처럼 그리움이 가득한 책이었다. 강아지풀을 한 올 한 올 쓸어내리듯 책장을 넘기는 동안 그리움의 꽃가루가 손끝에 묻어나는 듯했다. 관계에 대한 또 다른 책을 만난다면, 아마도 나는 다시 그를 떠올리며 그에 대한 글을 쓸 것이다. 오랫동안 묻어두던 마음이 심장을 할퀴며 쓰라리겠지만 그믐달의 모습으로 있는 관계가 초승달을 지나 보름을 향할 수 있도록 느린 걸음을 내밀어보려고 한다.

 

서로 마음에 난 길이 관계다.(p7)’ 참 멋진 문장인데 눈이 시큰하다. 마음이 맞는다면 서로를 향한 감정들은 고속도로를 달릴 테지만, 어긋난 관계의 길은 뚝 끊어진 낭떠러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본 것 같은 거대한 낭떠러지. 건너편까지의 간극은 아득하고 바닥은 보이지도 않는. 주인공은 눈을 질끈 감고 한 발을 내딛는다. 순간, 신기루처럼 길이 나타난다. 제목도, 주인공의 얼굴도, 그가 여자였는지 남자였는지조차 가물가물하지만 이 장면만은 또렷하다. 공간을 툭 건드린 발바닥이 마법의 봉이라도 된 양 순식간에 이어지던 길. 관계를 향하는 걸음을 생각하며 이 장면을 떠올린다. 아직은 종종 아득해도 한 발씩 내딛다보면 점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리라 믿고 싶다. 그에게로 가는 길, 끊어진 듯 보이는 아득함을 향해 나는 계속 한 걸음을 내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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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가게 - 제13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53
이나영 지음, 윤정주 그림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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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학교에서의 쉬는 시간 10분은 화장실에 다녀오고 옆 반 교실에서 교과서를 빌리러 갔다 올 수 있는 시간이다. ‘just ten minute~’ 노랫말에 담긴 10분은 이성을 유혹할 수 있는 시간이며, “10분만~” 꿀잠에서 깨어야 하는 아침 시간 10분은 아이가 엄마와 실랑이를 벌이는 시간이다. 나만 쓸 수 있는 10분이라니. 시간 가게를 통해 주인공에게 주어진 10분은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심적 갈등이 시작되는 순간은 이렇게 달콤했다.

 

오늘날 아이들의 모습을 둘러본다. 주인공이 사용했던 10분의 용도를 곱씹어본다.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10분을 사용하는 행동이 온전히 아이 탓일까.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라와 있다는 생각’(p77)을 하며 공장에서 필요한 부품으로 최상의 제품을 찍어내는 것처럼, 나도 공부 잘하는 아이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느낌’(p77)을 받는 아이들, 밤늦게까지 불이 켜진 학원건물을 보며 양계장에 갇혀 있는 닭들’(p78)을 연상하는 아이들, ‘엄마와 선생님의 말을 듣고 있자니 마치 내가 주인의 취향대로 조립되는 DIY가구 같다는 생각’(p107)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안쓰럽다.

주말마다 학원을 오가는 둘째 아이가 떠오른다. 강요를 하지는 않지만 나 역시 아이가 이왕이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를 바란다. 대학 입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부모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다.

 

문학 작품 속에서의 시간이란 가공되지 않은 지점토와 같다. 만드는 이의 의도에 따라 이토록 다양한 의미를 전해주는 소재가 있을까. 타임리프와 로맨스가 결합된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 수명시계와 삶의 의미가 결합된 드라마 <어바웃 타임>, 타임머신과 SF가 결합된 영화 <백 투 더 퓨처>에 이르기까지. 판타지적 요소가 포함되면서도 현실을 슬그머니 끌어당기는 작품들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 평범해 보이는 시간은 담고 있는 의미에 따라 제각기 특별해진다.

이런 점에서 이나영 작가의 의도는 특별하다. 작품을 통해 시간과 결합된 의미는 두 가지이다. 아이들의 삶을 조명하고,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일까 묻는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시간과 얽혀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려면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를. ‘분명한 건, 행복이란 내가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말하고 싶은 것에 대해 생각해 봐야겠다. 그리고 내 시간을 내가 주인이 되어 써야 할 것이다.’(p197) 작가의 결론에 공감한다.

 

사진처럼 담겨지는 시간이 있다. 멈추고 싶은 마음이 셔터가 되어 찍히는 시간들이다. 심장에 차곡차곡 접혀있다 어느 순간 꺼내어보면 두근거림으로 되살아나는 행복한 기억이다. 10분을 거래한 대가로 주인공이 빼앗기는 기억들을 따라가며, 행복했던 나의 기억을 좇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푸른 염화코발트 종이 같던 심장이 투명한 물방울처럼 다가오는 기억에 닿자마자 불그스름하게 변한다. 우산을 쓰고 나란히 걷던 길에 찍히던 설렘, 나를 향해 조심스레 다가오던 떨림이 재생되는 순간, 행복한 과거의 사진들은 생생한 현재로 타임리프 된다. 시간과 시간이 겹쳐지는 순간, 서로를 향해 마주 선 마음이 맞닿던 순간. 멈추고 싶은 순간들은 언제나 가슴 뛰는 기억이다. 드라이플라워처럼 말라간다는 생각을 간혹 하게 되는 중년의 나는 어느새 20대의 소녀가 된다. 그래, 그렇게 빛나던 순간도 있었지. 오롯이 두 사람만 공유하던 선명한 느낌이 찻잔에 띄운 꽃차의 잎처럼 되살아난다. 행복이 우러나는 향긋한 맛이다.

 

커피숍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길, 하지를 이틀 지난 하늘에 낮의 온기가 설핏 남아있다. 음력 10, 상현을 지나온 달은 왼쪽을 향해 살짝 부풀어 빛난다. 조금 떨어진 왼편에서 목성이 빛을 낸다. 오른쪽으로 성큼 고개를 돌리니 조금 더 빛나는 금성도 보인다. 가슴이 살짝 뛴다. 이들이 빛나는 단 하나의 이유는 지평선 아래로 지나버린 태양이다. 태양을 중심에 놓고 금성, 지구, , 목성의 커다란 궤도를 그려본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시간부터 있었을, 미래의 어느 시간 내가 사라진다 해도 여전히 돌게 될 존재들의 현재를. 일상을 지나오면서 마음에 묻게 되는 서글픔, 슬픔, 외로움, 고민의 부스러기들이 별 것 아닌 듯 여겨진다. 행복한 기억이란 이런 의미일까. 밤하늘에 가끔 나타나서 마음을 토닥여주는 천체들처럼 닿을 수는 없지만 잠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다시 태양과 함께 할 내일의 시간을 힘차게 걸어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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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 털보 과학관장이 들려주는 세상물정의 과학 저도 어렵습니다만 1
이정모 지음 / 바틀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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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요?” 의외라는 듯 다시 한 번 나를 본다. “국어나 가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전공을 잘못 선택한 바른 예죠.” 열에 여덟은 물리교육을 전공했다고 하면 매칭이 안 된다고 한다. 책을 읽고 독서 모임에 참여하고 시와 리뷰를 쓸 때면 종종 생각했다. 아무래도 나, 전공을 잘못 선택한 모양이야. 감성적인 마음이 공식과 실험 데이터에 부딪히며 마찰음을 냈다. 사포로 된 바닥에서 물체를 끄는 사람이 되어버린 듯 어색하게 주춤거렸다.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나.

물론 과학이 나의 본성과 전혀 동떨어진 분야는 아니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수학이었으니. 깔끔하고 명료한 점이 매력이었다. 애매모호하고 두루뭉술한 서술은 질색이다. 체계적인 알고리즘을 따라 사고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과학적인 면이 아주 없지는 않다. 다만 글과 시가 조금 더 강한 인력으로 내 마음을 끌어당길 뿐이다.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책 제목이 마음을 몰랑하게 만든다. 이해하지 못했던 방대한 내용들을 억지로 머리에 구겨 넣으며 공부했던 대학 시절이 떠오른다. 정확히 표현하면 이해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시험을 보거나 리포트를 쓸 때에는 임시방편으로 외우거나 자료를 찾아보면서 근근이 버텼다. 물리교육을 전공했다고 말하기 부끄러운 모습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작가의 말을 읽고 깨닫는다. 4년 동안 전공을 공부하고 27년째 과학 수업을 해오면서 내가 무엇을 놓쳐왔던가를. ‘과학이란 무엇인가?’ 가장 먼저 던졌어야 할 질문이다.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기에 답변이 궁색해진다. 과학의 근본을 끊임없이 질문해온 걸까. 이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은 명쾌하다. ‘과학은 삶의 태도다.(p6)’ 라고. 이 문장이 이제껏 나의 고민을 묶고 있던 실의 끄트머리를 붙잡는다. 4페이지에 담긴 내용이 실 끝을 가만히 잡아당긴다.

과학과 문학. 커다란 삶의 테두리 안에서 두 분야는 단지 방법의 차이일 뿐이라 정의해본다. 과학이 생각하는 방법이라면 문학은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굳이 경계 짓지 않아도 되는.

 

나는 무엇을 가르쳐왔던가. 냉철하게 판단해보니 주를 이루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다. 에모토 마사루의물은 답을 알고 있다(p113)에 관한 내용을 읽고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다.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물의 결정 사진을 인터넷으로 보여주면서 양파로 한 번 실험을 해보라는 둥 떠들어댔다. ‘공포의 전자레인지(p143~147)’ 에서는 휴대폰과 전자레인지에서 나오는 전자기파에 대한 내용을 읽고 나서 머리를 떨군다. 고차원적인 본질을 가르치지는 못할망정 엉성하게 틀린 지식이었다니.

교과서에 기록된 지식이 절대적이 아니라는 말을 자주 하기는 했다. 지금 여러분들이 배우는 지식은 현재까지의 진리라서 언제든 바뀔 수 있다고. 무지에 대한 변명으로는 빈약하다. 조금 더 고민하고 제대로 찾아보았어야 했다. 그나마 과학자는 매일 실패하는 사람들이다.(p264)’ 라는 말로 위안을 삼는다.

 

많은 발명품들이 자연을 모방한다. 거미줄 소재 방탄복, 연잎의 나노 구조를 활용한 초발수 유리, 개코도마뱀 발바닥을 모방한 장갑이나 접착제, 홍합에서 단백질을 추출하여 의료용 접착제를 만들어낸다. 어떻게 저런 동식물을 보고 저걸 만들 생각을 했을까. 과학 뉴스를 검색할 때마다 매번 감탄한다. 기발한 물건들이 참 많다. ‘창의성이란 있는 것들을 이렇게 엮고 저렇게 편집하여 새로운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p286)’ 홍합탕을 맛있는 먹거리로만 생각했다면 이런 발명품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생물들은 응용할 점이 무궁무진한 대상이다.

글이나 시를 쓸 때에도 비슷한 룰이 적용된다. 얕은 지식이나마 내가 아는 과학 지식이나 관점은 적절한 비유에 매우 유용하게 동원된다. 어떻게 이런 상황을 여기에 비유할 생각을 했지? 가끔 듣는 말이다. 하루의 많은 부분을 과학책과 가까이 지내다보니 생각이 절로 과학과 연결 지어지는 것일까.

 

삶과 동떨어진 과학은 의미가 없다. 저자의 글은 과학적인 요소를 삶에 적용하는 데 탁월했다. 사회적인 이슈에 과학이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과정이 감탄스럽다. 작은 꽃이 번식하는 과정인가 싶더니 어느덧 연대로 이어진다. ‘시민 한 명 한 명의 힘은 작다. 우리가 주인이 되는 길은 벚꽃처럼 서둘러 흐드러지게 피는 수밖에 없다.(p52)’ 라고.

곳곳에 배치된 깊이 있는 유머는 짧게 웃고 길게 생각하게 만든다. 과학교과서가 이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잠시 상상해본다.

 

버려야 빛난다.(p57)’ 라는 문장이 문신인양 강렬하게 새겨진다. 본질을 생각할수록 이 책의 가치를 빛내주기에 충분하다. ‘빛은 빨아들이고 커질 때 나오는 게 아니라 버리고 작아질 때 나오는 것이다.(p60)’ 수업 시간에 태양을 가르치면서 스스로 타는 유일한 항성이라고 얼마나 반복해왔던가. 그 과정에서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생각이다. ‘에너지를 버릴 때 빛이 난다. (중략) 태양에서 빛이 날 때는 더 많은 것을 가져서가 아니라 자기의 것을 버리기 때문이다.(p57)’ 몇 번을 읽고 또 읽는다. 별의 일생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삶의 태도가 빛이 발한다. 버려서 빛이 나는 삶이라. 그런 삶을 그대로 닮은, 그래서 아름답게 빛을 내는 글을 쓰고 싶어졌다.

 

문학과 과학 사이의 어느 지점을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있던 시기에 이 책을 만난 걸까. 나에게 적절하게 날아든 행운이었다. 책 속에 나온 지식이 술술 읽히는 순간에는 과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잠시 잊고 있었다.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신중함은 실험을 통해 얻어진 것이었음을. 과학적으로 사고하면서 사유의 폭이 넓어지고 있었음을. 관찰을 하면서 사실과 의견을 구분해온 습관이 대화에 적용되어 팩트와 스토리를 구분하고 있었음을. 과학은 지식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지혜였다. 과학과 삶이 깔끔하게 연결되는 순간 생각했다. 여전히 어렵지만 과학을 선택하길 참 잘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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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폰을 개통하시겠습니까? - 제22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고학년 부문 대상 수상작 창비아동문고 292
박하익 지음, 손지희 그림 / 창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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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폰하고 노는 게 재미있어서 책 읽기 싫어ㅠㅠ

B : ㅋㅋ처음이라 그럴 거야... 그래도 스마트폰 중독되면 안 돼...알지?

A : 알았어염ㅋㅋ 대화하고.. 사진 찍어서 글 올리고..그게 다야..

B : ㅋㅋ그게 다인데도 그것만 하면 시간 훅 간다?

5년 전, 큰 딸과 주고받은 대화이다. A, B 중 누가 엄마일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카카오스토리와 페이스 북을 메뚜기처럼 왕복하면서 글과 사진이 담긴 일상을 올렸다. 밴드와 카카오 톡도 매력적이었다. 짬만 나면 동물을 줄 세워서 팡팡 터뜨렸다. 간혹 지루하다싶으면 과일로 대상을 갈아탔다. 놀라운 세상이었다. 하루라도 글을 올리지 않으면 숙제를 안 한 듯 찜찜했다. 눈이 시뻘개지도록 피곤해도 피곤하다는 글로 나의 상태를 어필해야 마음이 안정되었다. 시선은 손바닥만 한 직사각형 공간에 수시로 빨려들어갔다. 핸드폰의 주인은 분명 나인데 노예처럼 스마트폰에 끌려 다녔다. 수시로 들여다보았고 곁에 없으면 허전했다. 눈뜰 때부터 잠들 때까지 내 가장 가까이에 머물렀다. ‘마음을 지키는 건…… 절대로 쉬운 게 아니야.(p186)’ 책속에 나온 문장을 보고 당시의 모습을 떠올렸다.

1년 남짓 스마트폰에 마음을 빼앗긴 채 살다 어느 순간 이러면 안 되겠다 싶었다. 카카오스토리와 페이스 북 앱을 지웠다. 밴드도 필요한 공지를 올릴 때에만 들어갔다. 카카오 톡은 주로 업무의 목적으로 이용했다. 중간 중간 금단 증상이 오면서 앱이 깔리다 지워지기를 반복했지만 결국 극복했다. ‘사람의 영혼은 본디 고요하다. 그 고요함 속에 깊이 잠기면 마음이 회복되고 새로워진단다.(p185)’ 스마트폰의 주인이 되자 어수선하고 조바심 일던 마음이 평온해졌다.

 

훤칠하신 공배우, 바닷가에서 간지나게 목화 꽃다발 쓱 내밀 때 TV를 뚫고 설레는 바람이 불었다. 배경음악까지 뷰티풀 했던 드라마 <도깨비>. 도깨비 캐릭터에 대한 호감은 201612월 이후 비약적으로 업그레이드된다. 본질적으로 귀신과 별반 다르지 않건만 구수한 된장 냄새가 날 것 같고 익살스런 이미지를 가진다. <혹부리 영감>에 출연했을 때에도 우스꽝스러웠고 방망이조차 아몬드 빼빼로를 뻥튀기한 듯 친근하다.

 

도깨비와 스마트폰의 콜라보? 제목부터 호기심을 자극했다. 도무지 상상되지 않던 이야기 안에서 현실의 스마트폰과 가상의 도깨비가, 과거의 놀이 문화와 현대의 그것이 자연스레 조화를 이룬다. 작가는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소재들을 절묘하게 결합시키며 이야기를 끌어간다. 기발한 앱들, 도깨비를 세는 단위, 방향 표시법, 스마트폰 번호, 내비게이션 멘트의 응용, 대화창, 다양한 모드, 날대야 택배, 기의 9단계, 스마트폰 중독을 경고하는 방법이 신선하다. 기획이 놀라웠다. 새로운 방식으로 주제를 표현하며 흐르는 이야기에 나태하게 졸던 의식이 확 깨는 듯했다.

 

보편적으로 느끼는 감성들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주제를 드러내는 표현 방법이다. 이야기는 복합현실기술처럼 제공된다. 작품을 구상하는 작가의 관점을 따라 독자는 가상현실을 진짜처럼 경험한다.

인간의 영혼에 담겨 있다는 세 가지 생명의 기운에 대한 서술이 마음에 남는다. ‘무언가를 만드는 즐거움, 깊게 몰입할 때 맛보는 행복감, 이 세상에 없던 새로운 것을 창조할 때의 기쁨.(p184)’ 이 세 가지 기운을 관통하는 일이 있다. 바로 글쓰기이다. 글쓰기 지침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팁이 떠오른다.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라는. 도깨비 방망이를 두드리듯 마지막 장을 탁 덮는다. 새로운 이야기를 시도하고 싶은 마음이 툭 튀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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