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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2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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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방황은 없었다. 학창 시절을 돌아본다면 나는 순하고 착한 아이였다.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지도 않았지만 딱히 못하지도 않았다. 어른이 정해준 길을 따라 비교적 순응하며 성장했다. 가지 말라는 길은 가지 않았고 하지 말라는 일은 하지 않았다. 노선이 정해진 수레바퀴를 따라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그저 걸었다. 십대를 이런 모습으로 지나왔다. 방황은 오히려 이십대 후반 이후에 겪었으니 십대가 당면한 혼란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한다.
교사 집단의 정체성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공부로 말하면 잘하는 축에 속했겠지만 특출 나지는 않았을 애매함, 수레바퀴 아래보다는 위에서 수레와 함께 굴러가는 축에 속했을 집단이다. 개별성을 차치하고라도 다소 어정쩡한 이들이 영혼을 돕고 가르치는 교사가 된다. 교사로서 한계를 느끼게 만드는 요인이다.
물론 직접 겪어야 공감이 가능한 건 아니다. 책이나 뉴스를 접하면서도 얼마든지 공명할 수 있다. 설령 비슷한 경험을 직접 했다하더라도 개개의 상황은 다를 테니 학생에 대하여 완벽한 감정이입은 불가능하리라.
다만 아이들의 영혼을 향해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느냐, 그들을 바라보는 거리의 문제라고 본다. 이런 이유로 나는 교사에게 필요한 주요 덕목으로 ‘용기’과 ‘기다림’을 꼽는다. 영혼과의 거리를 좁히는 데는 다가가는 용기가 필요하며 아이들의 영혼이 꽃피기 위해서는 저마다의 시간이 필요하니까.
소설『수레바퀴 아래서』는 주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어른들이 정해준 길로 삶의 수레바퀴를 굴리던 주인공 한스가 신학교에서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친구 하일너를 만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지하고 방황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주변인들은 신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는 아이에게 상반된 반응을 보인다. 데미안을 연상시키는 구둣방 주인은 시험에 떨어진다 해도 부끄러울 것이 없으며 하느님은 모든 영혼에 특별한 의도를 갖고 계신다고 격려한다. 나머지 인물들에게 한스가 시험에 떨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학교의 선생님들, 목사님,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갖는 기대감은 아이의 영혼을 무겁게 조인다.
주인공 한스는 끝내 ‘수레바퀴 아래에’ 깔린다. 차라리 바퀴가 굴러가는 길을 벗어나 다른 길로 뛰쳐나갔더라면, 혹은 스스로의 의지로 굴러갔더라면 달라질 수도 있었으리라. 그가 수레바퀴에 깔린 이유는 주변에 떠밀려 바퀴가 지나는 길에 힘없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다니던 학교의 교장 선생님은 아이의 죽음을 바라보며 갑.자.기 불행이 연이어 닥쳤다고 말한다. 삶의 마침표가 과연 갑자기 찍힌 걸까. 바퀴가 지나는 길에 길들여진 주인공은 길에서 벗어날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저 바퀴만을 바라본 채 오랜 시간 구르다 서서히 힘을 잃는다.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나 궤도를 벗어날 용기조차 내지 못한다. 바퀴와 함께 굴러가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바퀴를 놓지 못했으니 끼어들어가 짓눌리게 되었으리라.
정답이 되는 삶의 궤도가 과연 존재하는가. 방학 중에도 미리 공부해둘 것을 제안하는 어른들은 말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궤도를 벗어나기 쉽다고. 어쩌다 좋아하는 낚시나 산책을 할 때조차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끔 만드는 궤도가 아이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그에게 수학 공부와 수업은 평탄한 국도를 걷는 것이다. 탁 트인 전망을 볼 수 있는 산을 갑자기 만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삶이다. 어른들이 정해놓은 노선을 따라 가는 아이는 자신의 삶이 어디를 향해 흘러가는지 인지하지 못한다. 그저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갈 뿐이다. 어엿한 남자가 되는 친구 하일너처럼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사회적 편견에 당당하게 맞서지 못한다.
시험 전후에는 그리도 불안해하더니 막상 2등으로 입학시험에 합격했다는 결과가 나오니 1등을 못해서 분하다고 말하는 주인공. 인간의 마음이란 참, 이리도 간사한 것을. 아이는 동급생들을 앞지르고 싶어 하는 데도 왜 그래야 하는지 스스로 알지 못한다. 그가 품고 있는 바람이 자신에게서 우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설 제목이기도 한 ‘스프링벅’은 아프리카에 사는 양의 이름이다. 무리가 커지면 풀을 뜯기 위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마구 뛰다가 나중에는 원래의 목적을 잊는다고 한다. 오로지 앞서겠다는 일념으로 그저 뛴다나. 해안 절벽이 나타나도 가속도에 의해 앞만 쫓다 끝내 바다에 빠지고 만다는 동물이다. 한스의 모습에서 스프링벅이 겹쳐진다.
목적이 없었다. 한스 친구 하일너의 말처럼 나 역시 공부가 좋아서 한 건 아니었다. 내게 공부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하는 거였다. 물음표가 존재하지 않는 영역이었다. 배우는 내용이 과연 타당한가, 이게 왜 이래야 하냐며 의문을 제기하는 친구들을 종종 한심한 시선으로 보았다. 왜 시간 낭비를 하지? 그냥 무조건 외우면 되잖아. 질문은 나에게 시간 낭비와 동등한 행위였다.
공부가 기쁨이던 순간이 있었던가. 자발적인 공부는 테두리 밖의 일이었다. 공부의 신남은 교사가 되어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된다. 디지털카메라로 접사를 찍으며 야생화의 이름을 검색할 때 가슴이 뛰었다. 교과서에 등장한 성도가 새벽녘 아파트 옥상 위에서 실물로 펼쳐졌을 때, 무서움과 추위 따위는 한순간에 증발했다. 이 모든 순간에게는 공통점이 존재했다. 자발적이었다.
신학에 대한 관점을 서술한 내용에서 글쓰기의 자발성을 떠올린다. 헤세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학’과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학’을 비교한다. 비평과 창작, 학문과 예술을 언급하면서 전자는 항상 옳지만 어떤 이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하며 후자는 영원에 대한 예감, 믿음, 사랑, 위로, 아름다움의 씨앗을 뿌린다고 말한다. 문학이야말로 글을 도구로 하는 자발적인 창작 예술 행위 아닌가.
새로운 시도는 크고 작은 고통을 수반한다. 소설 『데미안』에 등장하는 것처럼 알을 깨고 나오려면 고통을 감내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글을 쓸 때마다 고통과 환희의 순간을 선물로 맞이하는 것처럼. 자발성은 진통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접속사를 건네주며 영혼의 성장 통을 감내하게 만들어준다.
여름에 피는 다양한 꽃들의 이미지를 검색하면서 읽었다. 천천히 여름을 호흡하는 느낌이 좋았다. 헤세의 문장은 서두르지 않는 속도감을 갖는다. 차분해지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따라간다. 시간에 천천히 색깔이 입혀진다. 간간이 흔들리는 꽃들, 물고기의 움직임, 주변 풍경들에 대한 담담한 묘사가 고요히 흡수된다.
작가의 문장을 감각적으로 비유한다면 단연 시각적이다. 그에 의하면 노란 햇빛이 이끼 위에 내려앉아 반짝이는 모습은 따뜻한 얼룩이 된다. 금빛 띠와 얼룩 몇 개가 방에 흘러들어와 잠든 소년들의 꿈 옆에 가만히 눕는다. 새로운 행복이 갓 담근 포도주처럼 발효하여 피와 생각 속을 돌아다닌다고 표현하는 감성이라니! 단순한 풍경 묘사에 그치지 않고 주인공의 심리와 더불어 중의적으로 이미지를 그린다.
헤세는 시험 전후의 불안함을 한스가 바라보는 풍경의 변화로 표현한다. 주변의 환경조차 심리를 투사하는 매개체로 활용한다. 시적인 묘사는 주인공의 상황과 어우러지면서 심리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그토록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는데 아이의 삶은 나무도막이 하나씩 빠져나가는 젠가의 본체처럼 위태롭다. 작가의 묘사를 따라가며 생각한다. 세상에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풍경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고. 풍경의 아름다움은 상대적인 건 아닐까. 풍경이 아름다워 보이는 건 이를 아름답다고 여기는 시선 혹은 심리가 투영되어서일 테니까.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을 기르는 것은 학교가 추구하는 주요한 목적이다. 한데 우리는 이보다 앞서야 할 전제를 종종 망각한다. 인간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은 바다 아래 잠겨있는 90%의 빙산처럼 묵직하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10%만 바라보며 종종 그 답을 잊는다. 인간은 존재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교사를 향한 작가의 문장이 짐짓 날카롭다. 교사의 직무란 소년들의 거친 힘과 자연의 욕망을 제어해 뿌리부터 송두리째 뽑아버리고 국가가 인정하는 차분하고 절도 있는 이상을 심어주는 거라는 것. 소년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을 깨뜨리고 위험한 불꽃은 끄고 밟아버려야 한다는 것. 맡은 반에 천재 한 명이 있는 것보다 차라리 멍청한 바보 몇 명이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는 것. 교사들은 항상 살아 있는 학생을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눈으로 죽은 학생을 바라본다는 것. 평소 별생각 없이 학생들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죽은 학생을 보면 모든 생명과 젊음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며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잠시나마 뼈저리게 느낀다는 것이다.
한스의 수학교사는 비례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인생에 아무 도움도 안 될 것 같지만 비례식이 논리적인 능력을 키워주고 명확하고 냉철하고 효과적인 사고력의 토대를 만들어준다는 이유를 그럴 듯하게 포장한다. 예전의 나 역시 과학 공부의 중요성을 비슷하게 어필하곤 했다. 당연한 듯 내뱉던 말들이 품었던 폭력성을 발견하고 흠칫한다. 학창 시절에 읽었더라면 주인공의 시점만을 좇았으리라. 교사의 관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소설 속 교사들의 모습에서 나를 돌아본다.
116년 전에 출간된 책이 우리의 현실과 괴리감 없이 읽힌다. 뽑히지 않을 뿌리처럼 사회 깊숙이 박혀 아이들을 옭아매는 덩굴로 자라나는 상황을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다. 작가의 문장력에 감탄하면서도 한 세기가 지나도 여전히 이어지는 모습에 마음이 복잡해진다.
주인공의 걸음을 따라가며 김 필의 노래 <그 때 그 아인>을 떠올린다. ‘가슴에 박힌 선명한 기억/ 나를 비웃듯 스쳐 가는 얼굴들/ 잡힐 듯 멀리 손을 뻗으면/ 달아나듯 조각난 나의 꿈들만/ (중략) / 지나온 모든 순간은 어린/ 슬픔만 간직한 채 커버렸구나/ (중략) / 아직 허기진 소망이/ 가득 메워질 때까지/ 시간은 벌써 나를 키우고/ 세상 앞으로 이젠 나가 보라고/ 어제의 나는 내게 묻겠지/ 웃을 만큼 행복해진 것 같냐고/ 아주 먼 훗날 그때 그 아인/ 꿈꿔왔던 모든 걸 가진 거냐고.’ 자신의 상황을 서서히 인지해가던 한스를 생각한다. 느릿느릿 아이를 잠식했을 무게감을 가늠해본다. 책 제목에도 나오는 것처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달라졌을까. 한스도, 한스를 바라보는 내 자신도. 마음 한 켠이 뜨끈해진다.
단 하나의 좁은 길밖에 없던 소년의 모습에서 외바퀴 수레를 떠올린다. 외바퀴 수레는 혼자서 적은 힘을 들이면서도 좁은 길을 효율적으로 나아간다.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단점만 극복한다면 말이다. 사회와 학교의 요구에 흔들리며 균형을 잡지 못한 영혼은 끝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어른들이 조금 더 기다려줄 수는 없었을까. 아이 스스로 균형을 잡고 걸어갈 길을 선택할 때까지. 그랬더라면 좁은 길임에도 불구하고 몇 번을 넘어졌대도 아이는 결국 수레를 굴리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