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깊은 상념과 생각에 몰두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간단히 목숨을 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65)
설을 지나고 돌아와 비로소 책을 쥘 수 있었다. 책조차 방기할만큼 마음이 복잡했던 시기가 이제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오래전에 몇 장 읽고 놓아두었던 제발트의 [현기증 감정들].
위의 문장을 읽는 순간, 마치 위로받듯이, 내 마음 내 상태가 바로 그러했다고 내가 그에게 털어놓듯이 공감했다.
그가 베네치아로부터 배를 타고 주데카 만으로 들어가 어느 호텔방에 틀어박혀 상념과 생각에 몰두했던 것처럼.......
이번 결정은 쉽지 않다. 너무 어려운 숙제다. 내 인생 통 틀어 가장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할 일에 부딪혔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마음먹기는 쉽지 않고, 결국 일단 생각을 접었다. 결론을 내려야 할 때까지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일단 보류했다. 나의 봄은 과연 어떠할 것인가.
생각을 멈추고 결정을 보류하자 비로소 책을 쥘 수 있었는데, 여행과 기억과, '지독한 쇠락'(39)과 폐허의 기억을 더듬는 제발트의 이번 여행을 읽으며 어제 하루 묘한 슬픔에 잠겨 보냈다. 제발트가 연상해내는 기억의 여행기가 나와 무관할지라도 그가 불러내주는 기억에서 수많은 감정들을 떠올리며 빠져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 소설은.
스탕달, 카프카를 비롯해 제발트가 소환해내는 인물들에 대한 기술과 묘사에서도 기억이 자아내는 감정들이 실려있다.
나는 특히 <외국에서> 장에서의 클로스터노이부르크(빈의 도시, 카프카가 세상을 떠난 곳)의 한 요양원에서 연금으로 살아가는 에른스트 헤르베크를 만나는 장면을 좋아한다. 한문장 한문장이 그냥 무심히 쓰여져 있는데, 놀랄만큼 감성을 자극하는 명문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무심한 문장들인데도.
번역자인 배수아는 제발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그가 기억을 불러내오는 독특한 기술에 매혹되곤 한다는데 자전적인 내용이 포함된 <귀향> 이라는 장을 읽어내는 데는 특히 유효한 진술이었다. <귀향>은 독일인인 제발트가 고향을 버린 후 수십년이 지나서 다시 찾아간 고향에서 유년의 기억들을 통해 카프카의 단편 [사냥꾼 그라쿠스]와 연관된 환상을 연결시키고, '파괴의 비전'을 꿈꾸며 대단원이 지어지는 부분이다.
읽다보면 나는 이상하게도 영화, 유럽영화에서 많이 보았던 사내아이의 눈으로 본 유년의 어떤 분위기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눈. 밖에는 눈보라가 치고, 사내아이는 죽음의 장면들과 정사를 목격한 후 감당하지 못하고 병을 앓는다. 침대에 누워 창밖으로 내리치는 눈보라와 창문을 때리는 늘어진 나뭇가지의 그림자와 소리에 공포를 느끼지만 고열로 인한 환청과 환각에 시달릴 뿐 움직일 수 없는. 몽환적인 겨울밤을 보는 듯한. <닥터지바고>의 어린 유리의 모습이 떠올려지기도 하고.
사방은 눈으로 가득하여 천지가 크리스털처럼 반짝였고, 내 머리 위로 밤하늘을 가득채운 무수한 별들이 영롱한 빛을 깜빡이고 있었다. 머리 없는 거인 오리온이 광채를 내뿜는 단검을 허리에 차고 막 검푸른 산그늘을 올라가는 중이었다. 한겨울 밤의 숨 막히는 장관 아래 나는 오래오래 서서 살을 에는 냉기에 몸을 맡긴 채, 하늘의 모든 발광체가 자신의 궤적을 따라 느리게 움직이며 내는 소리에 귀기울이고 있었다. (222)
고향에서는 여관에서 살았는데, 귀향해서 돌아와보니 건물은 개조된 채 그대로 있고 나는 거기에 머문다.
그곳에서 유년시절 로지나 초벨이라는 여관 건물의 여주인에 관한 기억 대목을 읽으면 또 한편의 영화를 떠올릴 수 있다.
소설과 기억과 영화로 이어지는 연상은 책을 읽는 내내 일종의 향수, 회한, 놓아버리고 온 아름다운 기억들, 그리고 왠지 자꾸만 허망하게도 황폐한 현실 속에 버려진 듯한 쓸쓸함 등 갖가지 감정들을 불러모으면서 소설을 이렇게 쓸 수도 있구나, 라는 감탄을 하게 만든다. 온전히 감정에 빠져 있다 나오면 한뼘쯤 인생을 알 것만 같다.
다시 한번 읽고 싶다.
기억이라는 주제 하나만으로 문학을 얘기해보는 것, 작가들은 기억을 어떻게 다루고 무엇을 창조해내는지.
제발트, 토마스 베른하르트, 우엘벡 등이 최근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작가들이다. 모두 뭐라 딱히 규정할 수 없는 슬픔을 안겨준 작가들이다.
정승환이 어제 선곡해 부른 에코브릿지(with 나얼)의 <첫째날>을 들으며 이제는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피아노 반주가 그 영화를 기억나게 하는 방아쇠였다. 정승환의 노래 또한 그랬고.
아주 오래전에 본 영화인데 내용도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딱 한 장면만을 여전히 잊지 못했다.
아마도 마리아 칼라스의 생을 모티브로 해서 만들었던 영화 아닌가 싶은데, 프랑스 뉴웨이브 끝물에 있었던 영화였던 것도 같고. 아마 남편이자 제작자였던 이가 떠나자 무대를 떠나 은둔해버린 오페라 흑인 여가수를 만나게 된 청년(기자였었는지 가수였는지 정확하지 않다)의 얘기였던 것 같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꺼리던 여가수를 청년은 마침내 그녀의 집에서 만나게 된다.
청년은 그녀를 그녀 스스로 유폐시켰던 집으로부터 거리로 데리고 나온다. 파리를 산책하는 씬이 바로 내가 기억하는 장면이다.
<첫째날>과 비슷한 피아노반주가 배경음악으로 깔리며 거리 윗부분에서 카메라로 잡은 장면인데, 아래 거리부분으로부터 여자의 양산이 나타난다. 그녀는 여전히 예전 시대의 무대 옷차림과 같은 클래식한 옷차림과 고혹적인 양산을 받쳐들고 파리의 거리를 걷는다. 그 뒤로 남자가 그녀를 보는듯 무심한 듯 함께 걷는다. 그녀가 양산을 들고 벤치에 나른하게 앉아 있는 장면에 흐르는 피아노 곡은 또 어떻고. 두 사람은 그냥 산책을 하는데, 한가로운듯하면서도 다소 몽환적이고 묘한 슬픔이 담긴 장면이었다. 그 장면과 그 피아노 소리만큼은 아마 20년이 될지도 모르는 시간 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그렇게 기억의 연상은 이어지고 있었다.
기억이 마음을 유리처럼 만드는 지도 모른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위태로운 유리같은 상태다.
유희열이 정승환에게 남자멜로디를 부르라는 말은 아쉬웠다. 남자멜로디에 유폐시키는 것처럼 들려서.
나얼은 매끈하고 시원하면서도 화려하다. 김범수의 노래도 김범수답게 막힘없이 세련됐다. 두 사람 모두 뛰어난 가수다.
그렇지만 요즘 나는 이 아이 노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게 위로든 도피든 어쨌든 생각을 멈추고 결정을 보류한 채 이 아이 노래만 들으며 나고 있다. 그 아이가 부르는 김광석 노래는, 김광석이 아쉽지 않은 느낌을 받은 드문 경우였다. 다음주에 또 한 곡의 김광석 노래를 부른다.
정승환의 영상에 달린 댓글 중 유독 눈에 뜨인 글이 있었다. 정승환을 아예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한번 들으면 중독되지 않긴 드물다, 뭐 이런 내용이었는데,
배수아가 [현기증 감정들]에 붙인 해설 <그렇게, 제발트를>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제발트를 아예 읽지 않은 많은 사람이 있겠지만, 제발트를 한 권만 읽고 끝내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생각한다고.
그 댓글 작성자는 혹 제발디언이었던가. 풋,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