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다 웃어본지가 백만년은 된듯하다. 어제 히가시노 게이고의 [매스커레이드 호텔]을 읽다가 그런 일이 발생했다.

어찌나 웃기든지. 실실 웃음이 나온 대목은 어디선가 본듯한 중년의 남자 구리하라 겐지가 연쇄살인사건 해결을 위해 호텔 프런트 직원으로 위장잠입해 있는 닛타에게 사사건건 딴지를 걸면서 두 사람 사이의 유치찬란하고 퐝당한 일들이 벌어지는 부분이다. 나는 무쟈게 웃기던데.

 

[신참자]도 그렇지만 히가시노 게이고 이 사람, 앞으로 뭐가 되려고 하는지, 어떤 소설들을 쓰고 싶어하는 건지, 작가 생활 25년이라는데 많이 변했고 지금도 변하고 있는 중이다. [신참자]나 [매스커레이드 호텔]은 공통적으로 소설을 관통하는 하나의 사건, 즉 살인사건이라든지 연쇄살인형태의 사건이 중심에 자리잡으면서 이 사건 해결을 해나가는 와중에 중심 사건과는 관계가 없으나 수사 과정 때문에 발생하는 인간관계와 소소한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며 거기에 얽혀 있은 인간의 모습들, 이면에 감춰진 진심 혹은 진실 혹은 악의 등을 드러내는 구성과 주제에 천착하고 있다. 이런 구성과 얘기에 재미들여 있는 것이 요즘의 게이고인 것 같다. [매스커레이드 호텔]은 호텔 각 층 각 방마다 각각 다른 얘기들을 품고 있는 각각의 방들이 있는 것처럼 인간세상의 축소판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호텔이라는 적절한 장소를 선택한 것 같다. 호텔에 오는 사람들은 저마다 가면을 쓰고 오고 호텔리어들은 고객의 가면을 지켜주고자 하며, 사건 땜에 위장잠입한 형사 닛타는 바로 그 가면을 벗기는 일을 하는 사람이니 여자와 남자, 나오미와 닛타의 전문가로서의 서로의 역할이 처음에 충돌하다가 점차 직업 이상의 감정을 느끼게끔 전개되는 것은 이 소설이 주는 재미이면서 동시에 다소 상투적이기도 하다.

알라딘 소설 MD 최원호는 (게이고가)'마치 발자크처럼, 대중소설의 스타일을 흡수한 채로 세계라거나 인간 같은 것들을 말하고 싶어하는 게 아닐까'라고 추측한다. 발자크? 발자크라면 [인간희극]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가동한 작가 아닌가.

그러나 최근의 게이고는 다소 어정쩡한 것 같다. 인간들의 모습이라고 하나 다소 밋밋한 차카니즘에 빠져있는 것도 같고. 인물들도 강력한 한 방을 갖고 있는 인물들이 없는 것 같다. 솔직히 닛타나 가가 교이치로나 또는 유가와를 구분할 수 있는 명확한 특징들을 설명할 수 있는가? 잘 모르겠다. 의도적으로 영웅적 캐릭터를 만들지 않는 건지도 모르나 그 인물들의 미세한 차이들이 사건해결이나 얘기에 큰 균열을 내는 지 언뜻 잘 떠오르지 않는다. 솔직히, 지금쯤은 히가시노 게이고가 그냥 좋다. 뭔 짓을 해도(?) 좋은 걸 어떡하냐. 더위 잊고 스트레스 해소, 게이고는 내게 그런 작가다. 보고 싶은 배우들이 너무 오래 잠수하지 말고 일정 수준정도의 영화로 자주 좀 나와주길 바라는 마음과 같다. 히히.

 

"어떤 일로 인간이 상처를 입는지, 타인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게이고가 주목하는 인간의 어둡고 불행한 면이다. 잊어버리지 못하고 고단한 일, 복수. 아, 지독한 사람들이다.

 

발자크 좀 읽어봐야겠다. 최원호 MD 생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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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소설/예술MD 2012-08-08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편집장의 선택 카피를 읽어주시는 분이 정말로 계시네요(웃음). 감사합니다.

발자크를 언급했을 때 사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미야베 미유키의 변화상에 더 가깝지 않나 싶었습니다만(특히 차카니즘이라거나..), 그들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들이 추구하는 세계가 궁극적으로는 발자크의 인간 희극이나 졸라의 루공 마카르와 같은 이상을 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로 그 이상에 접근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마도 (아직은) 마쓰모토 세이초 뿐이겠지만 말이죠.

고전 걸작을 읽는 것과 달리 현재 진행형의 작가를 읽는 즐거움은 그런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 이상에 다다르지 못했고 거기에 다다를 수 있을지조차 아무도 모르는 작가의 신간을 받아들었을 때의 두근거림 말이죠. 물론 실망스러운 경우도 많지만요. ㅎㅎ

계속될 독서에 행운이 따르시길 바랍니다.

포스트잇 2012-08-09 11:19   좋아요 0 | URL
미야베 미유키나 마쓰모토 세이초를 읽어본지가 백만년쯤 된것 같습니다.점점 장황해져 간다고 느껴지면서 관심이 끊어진 셈인데요,편집장님의 견해를 등불삼아 미야베나 마쓰모토도 다시 살펴봐야겠습니다.현재 진행형의 작가와 함께 한다는 건 모험을 함께 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지 싶습니다.그가 보여줄 다음 작품은 미지의 세계잖아요.두근거림과 두려움(혹 실망할까봐요,소심X3ㅠㅠ)으로 보는 거니까,편집장님께서 늘 고견을 주셔야 합니다용~ 보는 눈이 많다는 거!

외국소설/예술MD 2012-08-09 15:36   좋아요 0 | URL
미야베 미유키의 최근 행보와 히가시노 게이고의 행보는 닮은 면이 있는데, 사회파의 부흥기에 두각을 드러낸 두 작가의 진행 상황이 비슷하다는 게 재미있어요. 시스템의 부조리를 캐릭터의 선함으로 상대할 수밖에 없는 건가, 사회파 미스터리의 후계자들은 더 절망적인 상황에 망연자실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죠... 마쓰모토 세이초는 그 단계를 겪지 않거나 넘어섰고.. 누가 그 뒤를 이을지 저도 기대반 걱정반입니다. ㅎ

포스트잇 2012-08-10 15:55   좋아요 0 | URL
시스템의 부조리를 캐릭터의 선함으로 상대한다...라, 소박해보입니다요^^
제가 한동안 멀어져 있는 사이 미야베와 마쓰모토의 책들이 많이도 나왔네요, 이건 또 언제 한번 읽어보나,에쿠.
전 누가 일본판 [즐거운 살인]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나 [블러디 머더] 같은 책을 내줬으면 좋겠어요.저같이 게으른 사람들을 위해 기냥 한번에 쫙 훑어볼 수 있게시리 해주면 존경할텐데요,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