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봤자...지금 10대나 20대 사람들보다 오래 살 것 같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갖춰진 생각이나 방식으로 보자면 앞날이 그냥 두렵다. 하긴 젊은것들은 나름 생기로 살아가는 건데, 뭔 걱정이겠냐. 종편채널의 개국 드라마들이 속속 모습을 갖춰나가는 듯싶다. 일단 질러야하니까 인물들이 만만치않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사람들의 의식이 중요하겠지만 그 믿음을 품는 것조차 너무 순진해져버렸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 갖춰야할 덕목이다.  

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표백]은 신형철이 핵심을 잘 짚어준 리뷰 덕분에 읽게 됐다. 난 신형철빠다.  

 

 

 

 

 

 

 

 

"어떤 모순도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지만 또 어떤 모순도 혁명이 일어날 정도로 쌓이지 못한다. 

...... 

나는 나의 새롭고 무시무시한 자유를 확인하기 위해 자살할 것이다." 

소설에 나오는 자살선언서의 일부다. 신형철은 이 소설이 다루는 '조직적 자살'에 기여하는 3단 논리를 잘 정리해줬다.  

1. 오늘날 세계는 완성됐다. 2. 그래서 삶은 무의미하다. 3. 그러므로 자살만이 대안이다.  

여기에 이끌어져온 고전들은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역사의 종말]), '카뮈의 부조리론'([시지프신화]), '도스토예프스키의 논리적 자살론'([악령)). 

 

 

 

 

 

 

 

 

  

'악마적인 논리'를 차곡차곡 쌓아가며 조직적인 자살들이 이어지는 이야기는 참 기함할 얘기고 '이 소설은 맹독을 지녔다'고 소설가 김선우가 말한 것처럼 '벼락같이' 내리치는 독한 면이 있었다. 자살을 이토록 '운동'적 차원에서 다룬 한국 소설이 있었나싶다. [악령]을 꽤 오래전에 읽었는데 아, 또 다시 읽고 싶지는 않은데. 최근에 읽은 오종우의 [백야에서 삶을 찾다]에서 시베리아 유형 이후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경향을 갖게 된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서 악령들린 상태를 떠올리기도 했다고 언급한 대목이 있다. 오종우는 '정치팜플랫' 성격의 소설이 [악령]이라고 짤막한 평을 했었다. 자세한 기억은 없지만 [악령]을 읽을 때 도스토예프스키의 그런 혐오와 두려움을 느낄 수는 있었던 것 같다.   

[표백]의 작가 장강명은 조직적 저항으로서 자살을 주창한 세연에 맞서 평범하고 사소한 삶의 가치를 역설하면서 '와이두유리브닷컴'에 대항하는 '디스이즈리즌닷컴'을 계획하며 삶을 추스리는 주인공의 결심으로 소설의 결말을 삼는다.  

주인공 '나'는 세연에 대해 생각한다. 문제적 인간인 세연의 주장은 '어린이다운 것이었다'고, '위대한 일을 하고자 하는 욕망은 사람들에게서 잊히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고 그것은 곧 다른 사람의 애정과 관심을 바라는 욕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누군가 어른스럽게 삶을 사는 법을 세연에게 보여줬어야 했다."고 분석한다. 세연은 자살로써 자신의 주장에 힘을 불어넣었고 그 선언을 제대로 반박하려면 반대로 멋있게 사는 법을 직접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다. "위대한 정신이라면 ([그것이 빛을 발하고 인정될 때까지])그 고독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라고 주인공은 생각한다. 꼭 위대한 정신이나 "아무도 전에 시도하지 못했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일, 그 일 이후에는 모든 사람의 생각이 바뀌게 되는 것, 반대하는 사람이라도 무시할 수는 없게 되는 그런 일, 진화론이나 상대성이론 같은 것"'을 해내지 못하더라도, 그저 사는 것 자체가 고독한 것인데 그 고독을 견디며 가는 것 자체가 위대할 수 있다는 생각, 그게 대항논리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결국 세연은 자살을 실행에 옮기기까지 두려움에 제 정신이 아니었고 자기 주장을 부정하는 모습까지 보였다고 얘기해준다. '와이두유리브닷컴'을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주도하는 세력이 형성되고 '나' 는 여기에 맞서는 형국으로 드라마는 끝을 내는데, 우스꽝스러운 소동극처럼 느껴졌다. 이 대결은 시시해졌다.   

신형철은 '작가와 작품의 격전'이라고 봤다. 그 전례로 '톨스토이의 소설에서는 작가가 이기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서는 작품이 이겼다'고 결론내렸다. 그리고 묻는다. 이 소설에서는 어느 쪽이 이겼나?  "어느 쪽이건 이것은 패자가 없는 싸움이다."   

도발적이고 선언적 의미로서 이 시대의 '조직적 자살'을 생각한 건 문학적이라기 보다는 사회적 울림이 있는 것같아 보였다. 어떤 논리나 주장, 의지 따위가 아예 구축되지 않는 도저한 허무로서 자살, 자신의 생을 거두는 것, 글루미. 사회적 의미를 깨알같이 찾아 갖다붙이기 전에 홀로 존재하는 자살, 그게 더 막막하고 진짜로 무서운 거 아닐까.   

다소 놀랍고 아찔했던 건, 고시원에 퍼진 스팸냄새를 묘사한 대목이었다. 이 정도인가. ...  

"구운 스팸 따위 때문에 그렇게 구차해지는 꼴이라니..... . 그런데 정말 먹고 싶었다. 고시원 방까지 스팸 냄새가 따라오는 듯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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