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바다의 기별](생각의 나무/2008) 중에서 흥미롭게 읽은 글은 '말과 사물'이었다.

또 밑줄 그은 말들은 이런 것들이다.

날이 저물어서, 마을과 강가를 어슬렁거리며 사람 사는 구석들을 기웃거릴 때, 쓴 글과 읽은 글이 모두 무효임을 나는 안다. (책머리에)

나는 사실만을 가지런하게 챙기는 문장이 마음에 듭니다.(p.141)

나는 내가 쓰는 언어가,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아주 명석한 사실에 입각한 과학성에 도달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이루어내기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니더군요.(p.150)

우리는 한국어로 아주 아름다운 서정시를 쓸 수가 있어요. 그런데 한국말로 법전을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법전 읽기를 아주 좋아합니다. 법전에는 아주 명석한 개념과 간결한 문장과 혼란이 없는 논리적 세계가 드러나 있어요. 나는 민법보다는 형법을 좋아합니다. 여러분도 형법을 한 번 읽어보세요. (p.152)

(아마 형법 관련해서는 다음 소설 쯤에서 한 대목이 나오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같은 책을 보고도 얼마나 다른 생각과 표현을 할 수 있는지, 나는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면서 다시 한번 절감했다. 아주 어렸을 때 집에 뒹굴고 있던 이 [난중일기]를 (동화책이 아니라 어른들이 읽는 책으로) 분명 읽었었는데 그 대단한 장군의 변변찮은 글솜씨에 의아했고, 시원찮은 건강에 놀랐었고(특히 코피를 흘렸다는 부분들은, 당시 혈관이 튼튼치 못해서였는지 툭하면 코피가 자주 났던 나를 담박에 사로잡았었다, 뭐... 그때는 혈관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부실했으니까... ), 부하를 틈만 나면(?) 죽이는 그 살벌함에 아, 이 장군이 그 장군 맞는가 했었다.

그 장군이 김훈에 의해 [칼의 노래]로 되살아났을 때 나는 진짜 깜짝 놀랐다. 무엇보다 김훈의 [난중일기] 읽기는 놀람을 넘어 절망스러움을 느끼게 했다. 이래서 작가구나, 이 쯤은 되어야 한 문장한다고 하겠다, 뭐 그런... .

'명석성'. 이런 걸 갈구하는 저변의 심리는 어떤 것일까? 김훈은 어쩔 수 없이 연필로 종이에 한 글자 한 글자씩 그려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책에서는 붓 대신 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색을 입히는 화가 오치균에 대한 글이 있다. 책 말미에 오치균의 그림 몇 점이 실렸는데 처음 봤을 때 사북이라는 지역의 역사를 떠올리고 화가가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 지레 짐작했었다. 그런데 막상 본문에서 갤러리 전시를 앞두고 나눈 학고재 출판사 주간 손철주와 오치균의 대화는 나의 이런 짐작이 헛다리짚었다는 것을 알게 했다.

손철주 : 당신의 사북 그림과 사북의 역사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오치균 : 별 관계가 없다. 나의 그림은 스토리텔링이 아니다. 스토리텔링은 나의 예술이 아니다. 나는 설명을 제거하고 본질을 보여주고 싶다.

손철주 : 그렇다면 사북의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오치균 : 또 설명해야 되나. 사북에는 가난과 슬픔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무너지는 것들의 아름다움도 있다. 사북에서는 그 부조화한 빨강과 파랑이 내 가슴을 때렸다. 녹슨 양철 지붕 위에 눈처럼 쌓인 탄가루는 아름다웠다. (p.113)

내게 울림을 주었던 것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김훈의 글이다. 앞의 손철주와 오치균의 대화 바로 다음에 한 줄 띄고 김훈의 글이 이어진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전두환 대장의 신군부가 권력에의 욕망을 은폐한 채 아직 웅크리고 있던 1970년대 말, 모든 억눌려 있던 것들은 한꺼번에 폭발했고 사북탄광 노동자들의 격렬한 노동쟁의는 그 연쇄 폭발의 절정을 이루었다. 지금 사북 일대의 탄광은 대부분 폐광되었고 탄광노동자들은 사북을 떠났다. 고원에 카지노 호텔이 들어서서 관광객과 도박꾼으로 붐비고, 탄광노동자들의 아들딸들은 카지노 회사의 직원이 되어 아버지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규폐(硅肺)병원에서는 늙고 병든 광부들이 산소호흡기를 코에 꼽고 여생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몇년 전에 규폐병원에 갔더니 규폐에는 담배가 치명적이라던데, 휠체어를 탄 늙은 광부들은 산소 호스를 길게 늘어뜨리고 휴게실에 모여 담배를 피우면서, 젊어서 탄광 매몰 사고로 죽은 동료들의 일을 이야기했고 병원직원들은 환자들의 흡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들여다보지 않았다. 주말이면, 카지노 회사에 취직해서 말쑥한 양복을 차려입은 아들딸들이 아버지들의 병실에 문병 온다. 

 오치균의 삶과 그림이 접합되고 또 갈라서는 마음의 풍경에 관하여 그의 [사북그림집](2002년 9월)은 약간의 비밀을 공개하고 있다. 오치균은 사북을 소재로 200여 점의 그림을 그릴 때까지 사북의 지난 일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1980년대에 입대했고, 제대 후에 유학을 떠난 경력을 감안하면 그 사태를 모를 수도 있겠지만, 현실에 대한 그의 무관심은 지나치다 싶었다. (113~115)

 
   

이 글은 '무너져가는 것에서 빚어지는 새로운 것 ; 오치균은 묻지 않고 다만 그린다'라는 글에 나온다. 이 책 전체에서 이 글에 담긴 온전한 의미를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뭔가 있다. ......

이 글의 첫 문장은  '색과 형태는 사물에 고유한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나는 늘 머뭇거리고 있다' 이다. 사실과 사물과 그것을 드러내는 손길 사이의 불화(不和)가 이 글의 화두인 듯 싶다.

오치균이 붓을 버리고 손으로 색의 재료를 장악하여 화폭에 담는 과정과 손으로 연필을 잡고 언어를 다루는 자신의 행태와의 연대와 차이를 하소연하면서,

'삶은 가지런할 수가 없는 것이고'와 같이, 김훈 자신과 사북의 역사성을 알지 못하고서 사북이 자신에게 '아름다움'을 비치는 그 순간만을 그리는 오치균의 어떻게든 불화하는 사물, 사실, 예술간의 '난감한 몽매(蒙昧)'를 다시 한 번 되풀이하는 것 같다.

다시 한 번, '명석성'을 갈구하는 심리란 어떤 것일까?

'손가락과 맥킨토시와 키보드를 믿는다'라고 했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최근 대담이 문학사상 12월호에 실렸다니 그 또한 찾아 읽어봐야겠다.  

P.S. 현대사를 다룬 소설을 준비중이라는 소식이 들리는데, 김훈이 유독 '명석성'과 '사실'과 '의견'의 구분, '소통' 등에 대해 고민하는 행간에서 무엇을 염려하고 또는 '도전'하려는지 설핏 진동이 느껴진다. [남한산성]은 어쩌면 전략적으로, 영리하게 그 전조를 시험해봤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다음 소설은 [남한산성] 보다는 시끄러운 것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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