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isa Sannia - Mela Granada
마리사 산니아 연주 / 이엠아이(EMI)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노래 칸초네를 담은 음반. 국내에는 거의 인지도가 없는 가수 마리사 사니아가 부른 것이지만, 음반 내용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사니아는 1947년 지중해에서 시칠리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섬 사르테냐에서 태어나 1966년 이탈리아 RAI 방송사에서 주최한 음악제에서 우승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 뒤 본격적인 가수로 활동했고, 돈 베키가 만든 화제의 곡 ‘Casa Bianca’(KBS '여름향기‘ 피아노 테마의 원곡)로 스타덤에 올랐다. 이 노래는 국내에도 소개돼 1970년대 당시 많은 인기를 끌었다. 1970년과 71년에는 칸초네 가수의 등용문 산 레모 가요제에 결선에 오르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76년 ‘Lapasta Scota’ 앨범을 끝으로 활동이 뜸했다가 1993년 이후로 활동을 재개했다.

이 음반은 그녀가 1997년에 선보인 것이다. 간간이 편집 음반에 수록돼 알려졌던 ‘하얀 집’의 목소리보다 약간 굵게 변모했지만, 그 목소리가 더욱 칸초네다운 맛을 더해주고 있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음반에 담긴 가사가 이탈리아어가 아닌 사르데냐 어라는 점이다. 곧 이 음반에 담겨 있는 음악은 정통 칸초네라기보다는 사르데냐(이탈리아 지중해 서부에 있는 섬들 가운데 시칠리아 다음으로 큰 섬. 한때 사르데냐 왕국도 있었다.)의 민속음악과 칸초네, 팝 선율이 뒤섞인 음악인 것이다. 그렇지만 칸초네의 특성이 가장 강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좀더 듣기 좋게 꾸미기 위해 팝 음률을 첨가하긴 했지만, 모든 노래에는 칸초네의 밝고 정열적인 모습이 전면에 부각되어 있다.

이 음반에서도 드러나지만 사실 칸초네라는 장르에는 이것이다라고 정의내릴 만큼 확고한 법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의 대중가요를 통틀어 부르면서도 어떤 느낌이 살아 있는 음악을 칸초네라고 부르는데, 이것도 시대에 따라 계속 변해가고 있다. 13세기 나폴리에서 유행하던 나폴레타나라는 대중가요가 칸초네의 시초라고 부르지만, 이 노래를 실제 들어보면 지금의 칸초네와 상당히 다르다. 그리고 국내에도 내한한 바 있는 토니 달라라의 노래와 지금 소개하는 사니아의 노래도 다르고, 마찬가지로 피노 단지오와 산드로 조코베의 음악도 서로 다르다. 하지만 이들 노래에는 ‘이것이 칸초네구나’라고 느껴질 감성과 선율이 있다. 사니아의 노래에도 정통 칸초네는 아니지만, 이탈리아의 칸초네라고 부를 수 있는 요소가 많이 베어 있는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앞서 말했듯이 청초한 느낌보다는 중년의 걸걸한 목소리에 더 가깝다. 칸초네의 국제적인 스타 밀바의 목소리와는 사뭇 다르지만, 밀바가 가지고 있는 깊이 있는 표현력이 사니아의 목소리에도 감지된다. 세자리아 에보라, 메르세데스 소사 등 세계를 대표하는 월드뮤직의 여성 가수들에게서 느껴지는 진한 감동과 표현의 깊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사니아의 목소리에는 그에 버금가는 호소력이 담겨 있다. 특히 ‘Una Istella’, 'Melagranda Ruju'와 같은 곡에서 그녀는 진한 삶의 느낌을 표현하며 듣는 이의 가슴을 사로잡는다. 이 곡뿐만 아니라 다른 곡에서도 발랄하고 산뜻한 감정으로 칸초네를 친숙하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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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조인간
시마다 마사히코 지음, 양억관 옮김 / 북스토리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지은이가 주장한 바는 잘 알겠다. 그것에 대해서는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지은이가 전개하는 방식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나와는 잘 맞지 않았는지 그 전개 방법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인공은 앙큼하고, 자학을 하며, 어찌보면 사악하기도 하다. 이 주인공의 개성과 소설의 설정은 정말 매력적이다. 그리고 초반부의 소설 전개는 이 주인공의 매력을 한껏 발산시킨다. 하지만 중반에 이르러 소설은 축 처지고 만다. 전반부에서는 주인공이 겪은 여러 정황들이 소설의 주축을 이루지만 중반부 이후부터는 주인공의 사변에 의해서 소설이 전개된다. 그 부분이 개인적으로 정말 지루했다. 초반에 설정된 주인공의 성격을 더 멋들어지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더 필요할 텐데 저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주인공의 얕은 철학관이 드러난 것 같아 더욱 지루했다. 서술이 묘사나 이야기의 힘보다는 약하다는 사실을 한번 더 깨닫게 해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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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지난 2002년 연말 무렵 문망에 오르내렸던 글들을 찾아 읽고 있습니다. 그 무렵 이곳 문망에서는 진보와 개혁,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시 민주당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입장과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를 지지하는 입장들이 이곳 문망에서 격돌했던 시절이었지요. 오늘 지방 선거 결과를 바라보면서 그래도 그때는 행복했구나 라는 생각을 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대통령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노무현 대통령의 약력을 살펴보니 간단하게는 아래와 같이 정리되어 있더군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경남 김해의 시골 농가에서 태어나 1966년 부산상고를 졸업했다. 1975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대전지법 판사를 지내다 1978년부터 변호사로 활동했다. 1981년 시국 사건의 변호를 맡기 시작하면서 인권변호사로 변신해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등 민주화의 한길을 걸었다. 1988년부터는 정치에 참여해 원칙과 소신을 지키며 정치변화를 선도했다. 제13, 15대 국회의원과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했고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을 지냈다. 이 과정에서 지역주의의 장벽에 막혀 네 번이나 낙선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현실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2002년 최초의 국민경선제에 의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고, 그 해 12월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지지로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출처 : http://www.president.go.kr/cwd/kr/president/story/basic.html


1981년 부림사건 변호를 맡으며 인권변호사가 된 노무현 대통령은 이후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으로, 대우조선 사건으로 구속되어 변호사 업무 정지 처분을 받고, 이듬해인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5공청문회를 통해 유명해졌습니다. 그는 전두환에게 명패를 집어던지며 그의 순수한 분노를, 아니 우리들의 분노를 대신 몸소 실천하여 우리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0년 3당 합당을 거부하며 지역주의의 벽 앞에서 연이어 낙선의 고배를 마시는, 스스로 가시밭길을 선택해 걷는 올곧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따지고보면 그에겐 변호사, 국회의원들에게 그리 흔한 서울대학교는 커녕, 대학 졸업장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학연으로 지원받을 수 없는 그가 스스로 든든한 배경이 될 수도 있는 지연마저 거부하였습니다. 그의 순수한 분노와 학연, 지역주의를 타파하려던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우리에게 감동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2002년 12월... 저 역시 많은 고민을 했더랬다. 정당이냐, 인물이냐를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노무현이란 한 개인은 매력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안정된 지위가 보장되는 변호사에서 인권변호사로, 명패를 집어던지는 순수한 분노가, 노회한 3김 시대의 지역주의 정치를 거스르는, 그가 걸어온 가시밭길이 순수하였기에 그가 말하는 개혁이 기존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운동권 출신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정당에 비해 현실적으로 보였기에 우리는 그를 놓고 그렇게 열띤 토론을 벌였고, 무수한 사람들이 무수한 시간을 공들여 거리에서, 직장에서 그를 위해 논쟁하고, 그를 위해 희망돼지를 모았습니다. 아름다웠습니다. 솔직히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이들을 곳곳에서 만나며 나도 저들과 함께였다면 좋았을 텐데 하며 부러운 마음을 갖기도 했다. 글 쓰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연극하는 이들을 부러워하기 마련이지요. 가난하기야 피차 일반이더라도 그들에겐 관객의 열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백컨대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던 이들의 그 열광과 열정, 호응이 부러웠습니다.

지난 2004년 3월 12일 국회본회의장에서 야당 국회의원 195명 중에서 193명이 찬성하여 진행된 우리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태 때 저도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그 끝을 보고 있는 기분입니다. 아직 개표 결과가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누구도 개표 결과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워낙 일방적인 게임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단 한 차례도 순위가 바뀌지 않은 채 당선 유력, 당선 확정으로 개표 방송이 진행될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주와 대전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곳에서 열린우리당의 대패는 선거 훨씬 전부터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였습니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단 한 차례도 이런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한나라당 국회의원이자 고위 당직자의 동아일보 여기자 성추행 파문에도, 공천비리 파문에도 분위기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17대 총선에서 당시 분위기가 열린우리당 일방에게 거의 파란이라 할 만큼 불어갈 때조차도 지금과 같은 몰표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민심이 돌변한 까닭에 대해... 이제 많은 정치분석가들이, 시사평론가들이 분석을 하겠지요.  

어떤 이들은 노무현 정부의 무능과 독선을 비판할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노무현 정부의 기본적인 성격이 신자유주의적 인데서 그 원인을 찾을 것입니다. 그리고 열린우리당 내에서 이번 지방선거의 희생양을 찾아내기 위한 마녀사냥이 시작되겠지요. 당이냐, 대통령이냐? 어떤 한 사람이 배우자를 골라 결혼을 하고 3-4년을 살다가 헤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원인을 따지자면 결국 그 책임을 골고루 돌아가기 마련일 겁니다. 그만큼 당이냐, 대통령이냐라는 책임 소재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소모적 공방에 불과합니다. 굳이 잘못을 논하자면 대통령의 잘못이 더 클 것이고, 그 잘못은 대선 진행 과정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도 민주주의 시대의 대통령을 권위주의 시대의 대통령 모시듯, 떠받든 사람들, 혹은 무슨 구세주라도 되는 양 대통령 개인을 찬양하느라 입이 닳도록 떠들어댄 숱한 선동가들이 골고루 나눠져야 할 겁니다.

이 땅의 많은 지식인들이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열렬한 지지와 호응을 표명했었습니다. 그런 이들조차 이제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에 대해 등을 돌립니다. 그 이유를 간단히 말하자면 지난 3년 3개월여에 걸친 참여정부의 국정운영이 민중의 삶과 괴리된 채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간 노무현 대통령 개인에 대한 많은 진단과 분석이 있어 왔지만, 저는 그와같은 대통령 개인에 대한 리더십 분석은 마치 마케팅 이론에서 무수히 많이 등장했던 "모모 리더십" 트렌드와 같이 하등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담론들에 불과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대통령 개인의 인기와 이미지에 기대 정치인 개인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에 불과하기 때문이지요. 대통령은 단순한 인기스타가 아니라 정치인이며, 정치는 우리들 모두의 일상을 지배하고, 영향을 끼치는 자리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정책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대신하여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 초반부에 많은 지식인들, 아니 우리들 자신은 슬금슬금 그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고, 그에 대한 실망감과 불신감을 표출하거나 지지를 철회하는 방식으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어왔던 것은 아닌가 반성해야만 합니다. 그런 점에서 바로 오늘 우리가 느끼게 되는 이 낭패감은 어쩌면 우리들 자신이 자초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참여정부는 철학은 커녕 생각도 없는 정부였고, 설령 철학이 있더라도 그것을 수행할 정책이 없었고, 정책이 있더라도 어느 정책이 좀더 중요하고, 어느 정책이 중요하지 않은지 판단하기에 앞서 무조건 올인하고 보자는 무책임한 정책으로 일관하였고, 그나마도 일관성 없이 추진되어 국민의 신뢰를 잃어버린 정부였습니다.

충청, 호남, 경남 일부가 연합하여 영남 고립 전략으로 당선된 대통령이 지역주의 타파를 논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것을 따지기에 앞서 그렇게 당선된 대통령이 연일 호남 때리기를 하고, 민주당을 탈당한 대통령이 도리어 한나라당이 정권 잡아도 괜찮다는 발언을 하며 대연정 제안을 하여 영남 패권주의를 부추겼습니다. 집권 초반부터 애초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을 지지했던 이들의 바램을 연달아 실망시켰습니다. 노동 문제가 그러했고, 환경 문제가 그러했습니다. 참여 정부 안에 그 어떤 이도 제대로 된 노동정책전문가가 없었고, 환경 문제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해결할 의지조차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이렇다 할 대처도, 정책도 만들어보지 못한 채 그대로 휩쓸려 들어가 버렸고, 외교 정책면에서도 처음에는 동북아 균형론을 주장하다가 나중엔 이라크에 앞장서 파병하더니 나중에는 파병을 연장하고, 이젠 평택 대규모 미군기지를 건설하는 데까지 나가버렸습니다.

참여정부의 정책 추진 방향은커녕 이 정부의 자세를 보면 과연 이 정부가 스스로를 정부로 생각하는지, 시민단체로 생각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의 철부지 같은 정치 마인드 밖에 갖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참여정부의 대언론 정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수구언론과의 싸움에 정부가 직접 나서는 바람에 시민단체들이 수구언론들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보이는 것 자체가 그대로 정부를 지지하는 것처럼 비추게 만들어 시민단체들이나 언론감시기구들이 제 역할을 못하도록 도리어 봉쇄하였고, 이후 참여정부가 벌이는 수구언론과의 싸움은 연일 수구언론의 좋은 기사거리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스스로의 정체성 혼돈은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 스스로를 "신자유주의적 좌파"로 규정한 언설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런 형용 모순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발설될 수 있다는 그런 단세포적인 정치가 대립각을 세워야 할 대상에 대해선 제대로 대립각을 세울 수도 없게 만들었고, 친자본적인 정책으로 일관했음에도 자본에게 버림받고, 자신의 정체성을 세워야 할 순간마다 자신을 지지해줄 세력들을 내치는 정책만을 추진했던  총체적 혼돈의 정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참여정부와 노무현 대통령의 실책보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이 모든 실패와 패착의 결과가 개혁 세력, 진보 세력 전체의 무능과 부재로 낙인 찍혀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 단적인 사례가 바로 이번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의 정책과 대안들이 유권자들에게 별로 큰 호소력으로 다가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번 선거 결과가 보여준 가장 가슴 아픈 부분입니다. 나쁜 정책 집행자를 처벌하기 위한 결과가 더 나쁜 정책 집행자를 불러들이는 패착으로 귀결되는 이 결과... 여당 사상 최악의 패배 보다 저를 더욱 경악시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비록 민주노동당이 진보세력을 홀로 대표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정당 형태로 진화된 진보정치세력으로 의미를 둘 수 있다는 점에서 지난 2002년의 지지율 8.1%에 비해 불과 2.9%밖에 늘어나지 못했다는 현실은 한나라당의 압승에 비추어 보았을 때, 또 그동안 민주노동당의 아성으로 인식되어 왔던 울산 지역의 지지율이 오히려 줄어들었고, 울산 동구에서는 무소속 후보가 구청장에 당선되었다는 점을 크게 느껴야만 합니다.

영남의 지역주의가 계속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호남에서 민주당이 부활하고, 충청권에서 국민중심당이란 지역주의에 기초한 정당이 창당된 결과를 보아도 알 수 있듯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질기고 질긴 지역주의의 망령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결과들을 단순히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무능과 독선에서만 찾아서도 안 될 것이며, 기존의 정치 질서를 개혁하는데 시간이 너무 짧았다고 볼 문제만도 아닙니다. 또한 이런 사태를 우리 민족이나 지역의 기질적인 차원이나 지역주의적 차원에서만 인식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위에서 제가 혹은 다른 이들이 내리고 있는 분석은 물론 진실이겠으나 그것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먼저 이 사태를 마르크스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상호작용"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만 합니다. 인간은 생존에 필요한 재화를 생산하는 새로운 방식을 개발하며, 새로운 생산방식은 이전의 물질적 어려움을 덜어줄 것(혹은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보입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적 세계체제는 새로운 생산방식과 더불어 노동과 자본의 에 대한 새로운 재현체계를 만들어냈다. 새롭게 구성되는 생산양식과 물적 토대는 사회구성원들에게 새로운 사회관계를 수용하던지 아니면 이와 같은 체제를 전면적으로 거부할 것인지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불행히도 이번 선거의 결과를 바라보건데 사회구성원들은 새로운 생산양식을 받아들이고, 이를 내면화하는 선택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속에서 사회구성원들 사이에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역학관계와 동학에 주목해야만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올바로 알아야 대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Wise Up(올바로)알다

Aimee Mann
(Magnolia. O.S.T)

It's not what you thought
When you first began it
You got what you want
now You can hardly stand it thought by now you know

내가 생각하던 그런 것이 아냐
네가 처음 그것을 시작했을 때
너는 얻었어 네가 원하는 것을
이제 너는 힘겹게 겨우 서 있어 네가 이제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

It's not going to stop It's not going to stop
It's not going to stop 'til you wise up

멈추지 않을꺼야 멈추지 않을 꺼야
멈추지 않을꺼야 네가 알때까지

You're sure there's a cure and
You have finally found it you think one drink
Will shrink you til you're underground and living down
but it's not going to stop It's not going to stop
it's not going to stop 'til you wise up

확신하고 있잖아 치유될 수 있다는 걸
너는 마침내 그걸 발견했잖아, 너는 한잔을 생각하고
움츠려 들려하니? 네가 이해하고 잊게될 때까지
멈추지 않을꺼야 멈추지 않을꺼야
멈추지 않을꺼야 네가 알때까지


Prepare a list of what you need
before you sign away and do the deed
Cause it's not going to stop
it's not going to stop it's not going to stop
'til you wise up no it's not going to stop
'til you wise up no it's not going to sop
So just give up

네가 필요한 것들의 목록을 준비해
네가 사라지는 신호를 주기 전에, 행동하기 전에
멈추지 않을 것이기에
멈추지 않을 꺼야 멈추지 않을 꺼야
네가 알 때까지 멈추지 않을 꺼야
네가 알 때까지 멈추지 않을 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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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라주미힌 > 반혁명과 귀고리, 그리고 누드모델

반혁명과 귀고리, 그리고 누드모델

문화대혁명때 동료의 밀고로 감옥에서 17년을 보낸 장따예의 기구한 사연…부모를 자기 손으로 죽여야 했던 어느 여의사의 이야기도 상상을 초월

▣ 베이징=박현숙 전문위원 strugil15@hanmail.net

2003년 1월17일로 기억한다. 장따예(따예는 할아버지라는 뜻)는 베이징의 낡고 오래된 후통(골목) 길가에 혼자서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긴 백발 머리와 머리만큼이나 길고 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그의 표정은 한없이 쓸쓸하고 무료해 보였다. 옆으로 다가가 반가운 웃음을 건네자 장따예의 표정이 금세 환해졌다. 그러고는 다 빠져서 이가 하나도 없는 잇속을 드러내며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장따예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무심코 거울 속에서 모델의 길을 찾다

그의 첫인상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낀 건, 칠순을 넘긴 ‘꼬부랑’ 할아버지가 양쪽 귀에 커다란 링 귀고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귀고리에 얽힌 사연을 듣다 보니 그의 ‘남다른’ 과거가 자연스레 들춰졌다.


△ 동료의 밀고로 17년을 감옥에서 보낸 장따예. 그를 가장 절망하게 만든 것은 ‘인간성에 대한 혐오’였다.(사진/ 박현숙 기자)

장따예는 문혁이 막 끝나갈 무렵인 1976년 ‘반혁명죄’로 붙잡혀 1993년 출옥할 때까지 무려 17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무시무시한 ‘반혁명죄’는 실은 사소한 말 한마디에서 비롯됐다. 당시 베이징 교외의 한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는 어느 날 동료들과 잡담을 나누다 “마오쩌둥이 류샤오치를 박해·타도한 일은 잘못된 것이며, 문화대혁명도 뭔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말했다. 며칠 뒤, 자신이 근무하던 학교에 장따예를 ‘인민의 적’으로 고발하는 비판 대자보가 붙었다. 같이 잡담을 나누던 동료가 밀고를 한 것이다.

장따예는 문혁 이전인 1957년 반우파 투쟁 당시에도 ‘우파분자’로 몰려 7년 동안 농촌으로 보내져 ‘노동개조’ 교육을 받았다. 평소에도 ‘바른말’ 하기를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세치 혀’로 인한 화를 많이 입었지만, ‘반혁명 분자’로 몰리면서 그의 인생은 송두리째 뒤흔들렸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부인과도 이혼을 했다고 했다.

17년 동안 감옥에 갇혀 지내면서 장따예를 가장 절망하게 만든 일은 바로 ‘인간성에 대한 혐오’였다. 동료의 밀고로 반혁명 분자가 된 것도 그렇지만, 감옥 안에서 그를 괴롭히는 무수한 ‘잡배’들을 대하면서 장따예는 인간에 대한 철저한 절망과 분노를 느꼈다고 토로했다. 그때 가장 큰 소원이 있었다면 “나쁜 놈들을 모조리 때려 죽이는 것”이었다고 한다.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보다 그 ‘나쁜 놈들’과 매일 대면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 미치고 두려운 일’이었다는 것이다.

영원히 감옥 안에서 정지된 줄로만 알았던 시간은 그래도 흘러 흘러서 드디어 출옥을 할 수 있게 됐다. 출옥을 한 뒤 장따예는 예전에 살던 후통으로 돌아왔다. 1976년 이후 바깥세상에 처음 나와본 장따예는 1993년 당시 베이징 길거리와 사람들의 변화한 모습을 보고 한동안 넋이 나갔다고 한다. 그 뒤 얼마 동안은 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자신은 여전히 1976년에 머물러 있는데 세상은 그동안 천지개벽을 했으니 그 심정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 뒤 장따예가 ‘먹고살기 위해서’ 시작한 일은 미술대학 누드모델이다. 감옥에서 나온 뒤 앞으로 이 나이에 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어느 날, 무심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다가 ‘모델을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그 뒤 장따예는 직접 자신이 쓴 모델 추천서를 들고 각 대학교를 찾아다니며 모델 ‘구직활동’을 했고, 다행히 몇 군데 대학에서 연락이 오면서 지금까지 꾸준히 모델 일을 해오고 있다.

자살을 막아준 링 귀고리의 꿈

처음 만났을 당시 장따예가 귀에 걸고 있던 링 귀고리에 관한 사연은 이렇다. 2001년 어느 날 혼자서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다가 문득 귀고리를 해보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남자들도 귀고리 하지 말란 법 있나.” 자기 외모에 커다란 링 귀고리를 하면 더 ‘예술적으로’ 보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단다. 앞으로 살 날도 얼마 안 남았고, 옛날 문혁 시절과 다른 세상이니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은 최대한 다 ‘실천’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 ‘흑색분자를 척결하라!’ 문혁 당시 만연했던 비판투쟁장의 모습. ‘반혁명분자’로 몰린 사람이 기다란 고깔모자를 쓴 채 곤욕을 치르고 있다.

장따예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평등한 관계’와 서로를 억압하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이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17년간 반혁명 분자로 감옥에서 보내는 동안 자신이 자살하지 않고 견딜 수 있었던 것도 이렇게 언젠가는 귀고리도 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는 ‘희망’ 때문이었을 거라고도 했다. 헤어질 무렵 그는 주소와 연락처가 적힌 쪽지를 주면서 그 뒷면에 “인생에 대해 논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환영”이라고 썼다.

지금 장따예가 살던 후통은 지난해 철거되고 없어졌다. 지난해를 마지막으로 장따예와의 연락도 끊어졌다. 장따예는 링 귀고리를 하고 여전히 미술대학 누드모델 일을 하고 있을까. 일이 없을 때는 대낮의 무료함을 견디기 위해 혼자 독한 술을 훌쩍인다는 장따예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중국에는 수많은 장따예들이 있다. 그들이 거쳐온 삶의 행로는 과거 중국의 ‘정치시대’를 반영하는 자화상이다. 1957년 반우파 투쟁을 기점으로 1976년 문혁이 끝날 때까지 중국에서는 ‘인간의 얼굴을 한 정치’가 실종됐다. 수많은 사람들이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삶을 감내해야 했다. 가장 ‘혁명적인 것’은 가장 ‘인간적인 것’이다. 40년 전 중국에서 벌어진 문혁은 가장 ‘비인간적인’ 혁명이었다.

중국의 기록문학 작가 펑진차이는 <100사람의 10년>이란 책에서 그 ‘비인간성’의 역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100사람의 10년>은 문혁을 겪었던 보통 중국 사람들의 생생한 경험담을 취재·기록한 구술문학집이다. 장따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책에서 기록하고 있는 사람들의 문혁 구술담을 절대 100% 믿지 않았을 것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구술담 가운데 특히 잊혀지지 않는 얘기가 있다. 1966년 문혁 당시 서른 살이었던 한 아동병원 여의사의 사연이다. 그는 홍위병들에게 ‘인민의 적’으로 찍혀 매일같이 고문과 고통을 당하는 부모를 직접 ‘죽였다’. 부모의 간청 때문이었다. 그들 세 가족은 홍위병들에게 시달리다 못해 함께 죽기로 결정했다. 부모는 의사인 딸에게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동맥을 끊어달라고 했고, 그 다음에 자살하라고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의 동맥을 막 끊었을 때, 사람들에게 발각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구차한’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구술을 끝내며 이렇게 물었다. “세월이 지난 뒤 사람들은 가끔 나에게 이렇게 말해요. ‘너는 잘 살아야 해. 그래야만 죽은 네 부모님 볼 면목이 있는 거야’라고요. 정말 내가 잘 살아야 하는 게 맞는 건가요?”

‘100사람의 10년’은 계속되고 있다

펑진차이는 책 서문에서 “20세기 인류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두 가지다. 파시스트의 만행과 문화대혁명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아직도 비극의 역사가 끝나지 않았다. 온전히 그것을 마주 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비극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는 방법은 “숨기고 잊어버리거나 또는 일부러 모른 체하는 것이 아니라 냉정하게 되돌아보고 투명하게 밝혀내는 것”이란 게 그의 지적이다. 그가 책을 낸 것은 10년 전 문혁 발발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그 뒤 또다시 10년이 지났다. 문혁 40주년을 맞는 오늘 중국에서 ‘100사람의 10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http://www.hani.co.kr/section-021005000/2006/05/02100500020060525061106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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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 > "5월 그날이 다시 오면"의 원곡 - Michel Polnareff의 샹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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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 y avait, du temps de grand-maman,
Des fleurs qui poussaient dans son jardin.
Le temps a passé. Seules restent les pensées
Et dans tes mains ne reste plus rien.

Qui a tué grand maman ?
Est-ce le temps ou les hommes
Qui n'ont plus le temps de passer le temps ?
La la la...

Il y avait, du temps de grand-maman,
Du silence à écouter,
Des branches sur des arbres, des feuilles sur des arbres,
Des oiseaux sur les feuilles et qui chantaient.

Qui a tué grand maman ?
Est-ce le temps ou les hommes
Qui n'ont plus le temps de passer le temps ?
La la la...

Le bulldozer a tué grand-maman
Et changé ses fleurs en marteaux-piqueurs.
Les oiseaux, pour chanter, ne trouvent que des chantiers.
Est-ce pour cela que l'on vous pleure ?

Qui a tué grand maman ?
Est-ce le temps ou les hommes
Qui n'ont plus le temps de passer le temps ?
La la la...


<오월 그 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오월 그 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80년대 5월에 부르던 이 운동가요는
미셸 뽈나레프가 부른 샹송의 번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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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할머니를 죽였나요?


우리 할머니가 살던 시절이 있었다네.
정원에는 꽃들이 피고 있던 시절...
시간은 흘러가고 기억만 남았네.
그리고 너의 손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네.

누가 할머니를 죽였는가?
시대가 죽인건가, 인간이 죽인건가?
더 이상 흘려보낼 시간을
갖지 못한 시대와 인간들. 라- 라- 라-

우리 할머니가 살던 시절이 있었다네.
들어보아야 할 침묵의 시대가 있었다네.
나무 위에 가지들이 있고, 가지 위에는 잎새들,
잎새들 위에는 새들이... 그리고 새들은
노래하고 있었다네.

누가 할머니를 죽였는가?
시대가 죽인건가, 인간이 죽인건가?
더 이상 흘려보낼 시간을
갖지 못한 시대와 인간들. 라- 라- 라-

불도저가 할머니를 밀어버렸다네.
그리고 꽃들은 망치를 든 노동자로 변했다네.
새들이 노래할 곳은 작업장밖에 없었다네.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울고 있는가?

누가 할머니를 죽였는가?
시대가 죽인건가, 인간이 죽인건가?
더 이상 흘려보낼 시간을
갖지 못한 시대와 인간들. 라- 라-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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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el Polnareff



미셀 폴라레프는 대표적인 프렌치 팝 가수로 삶의 꿈과
희망을 소재로 한 노래를 불러 팝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44년 파리에서 태어나 아버지인 유명한 작곡가 레오 폴의
영향을 받으며 5세부터 정식 음악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군복무 후 한동안 보헤미안이 되어 방랑 생활을 하다가
'66년에 우연히 친구의 도움으로 내놓은 싱글들이 잇달아
히트하면서 인기가수로서 자리를 굳혀 나갔지만 인기에
아랑곳 않고 자유분방한 생활을 노래와 독특한 패션으로
표현하면서 음악 생활을 해 나갔다.

그의 음성은 남성임에도 고운 미성에 노래 또한 아름답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대표곡 "Qui A Tue Grand'
Maman"(누가 할머니를 죽였나요)은 몇 해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겨울연가"에서 피아노 삽입곡으로 익숙해졌다.

Love Me, Please Love Me는 1966년 첫 싱글 후 발매된
미쉘의 대표곡 중 하나. 오케스트레이션에 치중하던 전통
샹송과는 다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피아노 연주와 함께
현악의 첨가는 곡의 애절함을 더욱 증가시키고 가성을
이용한 미쉘의 특이한 창법과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자신만의 스타일이 나타나는 곡이다.




 

오월의 노래는 1980년 광주 민중 항쟁을 주제로 한 민중가요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현재 그리 많이 불리지 않는다.

그러나 1980년 광주 민중 항쟁을 현재 진행형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이 노래를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이 노래가 프랑스 샹송을 원곡으로 하는 걸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오월의 노래'는 Michel Polnareff라는 가수가 부른 "Qui a tue grand maman"이라는

노래가 원곡이다.

노래 제목을 한글로 옮기면 "누가 할머니를 죽였나?"가 된다.

지금 배경 노래로 흘러나오는 곡이 바로 그것이다.

 

원곡 또한 그리 범상치 않은 제목과 내용을 담고 있다.

원곡의 주인공인 할머니는 프랑스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에서 희생당한 사람이다.

Lucien Morrisse는 재개발 지역에 속한 자신의 정원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다

결국 희생을 당하게 된다.

1971년 그녀를 추모하며 만들어진 곡이 바로 "누가 할머니를 죽였나?"라는 곡이다.

피아니스트인 이루마씨가 "When The Love Falls"라는 제목으로 이 곡을 옮기기도 했다.

 

원곡은 매우 서정적인데 비해 번안곡인 '오월의 노래'는 행진곡풍으로 리듬이 많이 바뀌어 있다. 또한 많은 노래패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연주되었다. 영화 속에도 가끔 인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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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출처: 산하를 찾아서  http://blog.daum.net/philsailer/828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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