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기획:슬라보예 지젝과 가라타니 고진의 가상대담
“문제는 정치경제학이다!”
2006년 09월 12일 (화) 23:35:33 복도훈 문학평론가 editor@kyosu.net

   
  지젝  
 
코기토(Cogito)……: 정신분석과 맑스주의


슬라보예 지젝: 안녕하십니까. 93년이었던가요, 제가 가라타니 고진 씨가 관여하던 ‘비평공간’에 초대되어 선생의 후배인 아사다 아키라 씨와 대담을 나눈 지가. 그 잡지에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을 연재번역한 때로부터 참으로 많은 시간이 지났군요. 상이한 조건 속에서도 비슷한 작업을 하는 지식인들을 만나는 일은 제겐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특히 맑스주의적 정치경제학비판에 대한 선생의 끈질긴 열정은 감동적입니다.


   
  고진  
 
가라타니 고진: 벌써 그렇게 됐나요. 최근에 선생께서 제 책인 ‘트랜스크리틱: 칸트와 맑스’(2003; 영문판)에 대해 쓰신 서평 ‘시차視差적 관점The Parallax View’(2004)은 잘 읽어보았습니다. 저 역시 선생님의 역작인 ‘까다로운 주체’(2005; 일역판)에 대해 짧게나마 서평을 썼습니다. 거기서 해체론을 포함하는 탈근대주의 이론에 맞서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옹호하는 선생의 제스처는 제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일찍이 저도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하던 일본에서 ‘탐구’1·2(1986; 89)와 같은 이론적 저작을 통해 데카르트적 코기토를 옹호한 바 있지요. 그래서 선생의 책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선생 말마따나 상이한 공간에서 작업을 하는 데도 ‘섬뜩하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말 그대로 시차(時差, 視差)죠(웃음). 그 전에 독자들을 위해 간단히 자기 경력을 이야기하면 어떨까요?


지젝: 좋습니다. 저는 49년에 지금은 해체된 유고슬라비아의 연방 국가였던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공산국가였기 때문에 저는 맑스주의와 친숙한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맑스주의, 특히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당과 체제의 공식이론이었고 저는 거기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별도로 프랑스의 (탈)구조주의에 적극 관심을 가졌습니다. 제가 친구들과 함께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1967)를 대학 1학년 때 번역했는데, 68년의 일이었으니 아마 세계 최초의 번역이 될 겁니다(웃음). 이후에 저는 라캉정신분석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습니다. 80년대 초반, 저와 친구인 믈라덴 돌라르와 함께 이론정신분석학회를 창립하고 라캉의 사위이자 수제자인 자크-알랭 밀레를 초청했습니다. 그때 밀레가 저와 돌라르에게 유학을 권해서 함께 파리 8대학에 갔습니다. 저는 88년에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증자: 헤겔이 지나간다’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듬해 영어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펴냈습니다. 동구사회주의가 무너질 즈음이고 자유주의 만세의 합창이 울려 퍼지던 분위기였죠. 그 무렵 유고슬라비아도 해체되었고 저는 슬로베니아 대통령후보로 출마했다가 다행히 떨어졌지요(웃음). 그로부터 약 20여 년 동안 저는 주로 영어권에서 활동하여 30권 가량의 책을 펴냈는데, 최근에 당신 책에 대한 서평을 토대로 ‘시차적 관점’을 냈죠. 저는 슬로베니아 라캉학파의 좌장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그런 학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웃음). 그냥 저와 돌라르가 이론정신분석학회를 창립해 각각 회장, 부회장을 맡은 격이지요. 그렇지만 돌라르를 비롯한 제 동료들인 알렌카 주판치치, 레나타 살레츨, 미란 보조비치 등은 매우 독창적인 저작을 펴내고 있지요. 저는 현재 라캉정신분석과 헤겔철학, 맑스주의적 정치경제학비판을 결합하여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맞설 보편성이라는 문제에 대해 고심하고 있습니다.


고진: 저는 41년생입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는 한편 당시의 좌익운동이었던 전공투에 몸담았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좌익운동이 테러리즘으로 귀결되고 난 후 저는 문학비평을 하는 동시에 ‘맑스, 그 가능성의 중심’(1974)과 같은 저작을 썼습니다. 맑스주의를 죽은 개 취급할 그 당시에 맑스에 관한 책을 써서 욕 좀 먹었지요(웃음). 한편으로 저는 ‘일본근대문학의 기원’(1980)과 같은 문학비평적 저작을 통해 근대문학이 제국주의적 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와 공모하고 그것을 은폐한 흔적을 쫓으면서 일종의 해체론적 비평을 감행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푸코의 구성주의나 데리다의 해체주의와 연관성이 있지만, 이른바 그것들의 속류판인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다릅니다. 나쓰메 소세키라는 일본근대 초창기의 대작가에서 저는 문학의 다른 가능성을 엿보았지요. ‘트랜스크리틱’을 쓴 최근까지 제 관심사는 자본=국민=국가라는 보로메오 매듭을 해체하는 신연합운동(New Association Movement)의 구체적인 형태를 구성하는 데에 있습니다. 실패로 끝났지만 지역통화(LETS)에 기반을 둔 NAM운동을 했던 것도 그런 연유였지요. 돌이켜보면, ‘맑스, 그 가능성의 중심’의 자본주의 비판,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에서의 국민국가비판이 ‘트랜스크리틱’에서 종합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트랜스크리틱’까지 저는 맑스주의 정치경제학비판과 문학비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느라 부심했지요. 최근에 ‘근대문학의 종언’(2005)을 통해 저는 문학을 떠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습니다. 문학의 사회적 역할이 그 소임을 다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저는 혼자서 1인 2역을 담당하느라고 거의 분열될 지경이었지요. 라캉학파 정신분석가에게 정신분석치료를 받다가 그만두었을 정도니까요(웃음). 아시다시피 일본은 라캉학파 시장(市場)입니다.


……에르고(Ergo)……: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 비판


지젝: 저 역시 밀레로부터 정신분석임상훈련을 받다가 그만두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둘이서 교활한 분석가 대 음험한 히스테리증자로 지적 곡예를 벌였다는 느낌이지요. 그나저나 그때부터 저는 라캉정신분석의 임상치료에 대해 거리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밀레와도 사이가 소원해 졌죠. 물론 라캉에 대한 그의 정교화작업은 여전히 찬탄을 불러일으키지만요. 저는 정신분석의 사회적·문화적 활용을 더 중요시 합니다. 저는 선생이 문학에 대해 비평작업을 수행한 것에 상응해서 대중문화에 대한 일종의 ‘증상적 독해’를 해왔지요. 그러나 저는 ‘삐딱하게 보기’(1991)나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1992) 등을 통해 할리우드 영화와 고급이론을 접목시키고 거기서 사람들이 대중문화를 ‘즐기는’ 방식을 관찰했습니다. 거기서 저는 온갖 정치적·사회적 이데올로기적 꿈, 말실수, 소망충족, 특히 죽음충동과 향유(jouissance)의 뒤틀린 형태를 발견했죠.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저는 포스트이데올로기 시대의 인간은 이데올로기로부터 거리를 둔 냉소적(풍자적) 형태로 이데올로기에 붙들려있다는 공식을 내놓았습니다. 단순히 이데올로기에 대한 거리를 둔, 맑스로부터 알튀세에 이르는 비판적 독해로는 만족할 수 없었죠.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에서 바로 자신들이 ‘즐길만한’ 뭔가를 발견하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그릇된 것인 줄 알면서도 (거리를 두면서도) 그것을 행하는 (그것에 참여하는) 이상한 역설이 생겨납니다. 예컨대 90년대 이후의 인종주의, 특히 제 조국이 속해있던 발칸반도에서 벌어진 인종적 증오와 폭력의 향유는 사실 그에 대해 경악한 서구의 냉소주의와 구조적으로 상동관계입니다. 돌라르는 발칸반도는 서구유럽의 무의식이라고 했죠. 저는 라캉, 특히 후기라캉의 정신분석을 이데올로기비판의 강력한 형태로 재가공했습니다. 실재(The Real)와 향유, 증환(sinthome) 등과 같은 개념이 제게 중요하죠.


고진: 저는 선생과는 조금 다르게 맑스, 특히 ‘자본론’을 제 비판적 사유의 준거점으로 삼고 출발했습니다. 제가 하부구조만 선생이 상부구조만 문제시했다는 건 오해가 되겠죠. 저와 선생 모두 상품형식에 대한 맑스의 비판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정치경제라는 매트릭스를 문제 삼고 있죠. 저도 ‘일본정신분석’이라는 글에서 정신증적 폐제(foreclosure)라는 라캉의 개념을 통해 안으로는 포스트모던적이지만 밖으로는 자폐적인 일본의 담론공간을 분석한 바 있습니다. 뭐, 일본의 어떤 포스트모던 역사학자들은 일본의 남경대학살(1938)은 구성된 담론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말하니까요(웃음). 지나가면서 언급했지만 ‘트랜스크리틱’에서 자본=국민(nation)=국가(state)라는 삼항조는 실재=상상계=상징계라는 라캉적 보로메오 매듭과 연결됩니다. 이건 단순한 유비는 아닙니다. 저는 오랫동안 ‘자본론’을 읽으면서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의 숨 막힐 듯한 영구적 순환이 자본주의경제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의 기묘한 틈새, 예컨대 공황(위기)을 통해 자본주의가 더욱 가속화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젝: 상처는 상처를 낸 창만이 치유한다!


고진: 그렇죠. 예컨대 물건은 팔리지 않으면, 다시 말해 유통과정에 참여하지 않으면 상품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특유의 ‘목숨을 건 비약’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황 때에 생산된 물건을 바다에 내다 버리는 것이지요. 그건 상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유통과정, 즉 화폐(M)-상품(C)-화폐(M) 사이에 틈새, 생산자인 노동자들이 동시에 소비자가 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의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은 생산과정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파업, 스트라이크와 같은 폭력적 형태로 자본주의에 저항해왔지만, 거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오히려 유통과정에 주목하면 문제가 풀리죠. 생산자는 곧 소비자이기도 합니다. 맑스가 2천년 동안 지속해온 수수께끼라고 말했던 잉여가치는 노동자가 물건을 생산해서 상품이 될 때 넘겨지는 차액이지만, 이것은 또한 노동자=소비자가 상품을 구매할 때도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역통화나 NAM을 통해 잉여가치가 0(zero)인 교환형태를 구상했던 것입니다. ‘당신의 노동력 상품을 팔지 마라’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이론과 함께 ‘자본가의 상품을 사지 마라’는 간디의 노력은 소중합니다. 지금까지 자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듯하지만, 그것은 오늘날 비판만으로는 사라지지 않는 국민=국가를 재조명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국민에 대해 소비자연합을, 국가에 대해 소비자 연합단체나 기구를 상상해보면 됩니다. 그것은 국민=국가 ‘사이에 존재하는’(in between) 새로운 코뮌의 기반이 될 것입니다.


……숨(Sum): 레닌주의와 신연합운동


지젝: 칸트 식으로 말하면 국민=국가=자본은 초월적 가상과 같은 것이라서 계몽주의적 비판만으로는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유행하는 다문화주의적 탈식민주의와 국민국가비판에 대해 제가 마뜩해하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죠. 선생도 이에 대해 언급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칸트철학에서 초월적 가상은 보통 신·세계·영혼 같은 것인데, 이것은 이성 자체에서 연유하는 형이상학적 가상이라는 점에서 문제적입니다. 비판의 탄환으로 쏘아 죽였다싶더라도 흡혈귀처럼 살아남죠. 억압된 것의 회귀입니다. 그러고 보면 선생이나 저나 오늘날에 벌어지는 ‘칸트로의 회귀’에 일조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의견차가 있을 듯 합니다. 저는 독일관념론에서 헤겔을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 생각하는데, 선생은 좀 다른 듯 합니다. 선생의 헤겔 비판은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전형적인 헤겔 비판, 즉 절대지에 가보지도 않고 의식과 절대지의 순환을 처음부터 닫힌 체계로 파악하는 듯…


고진: 이제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는 일만 남은 건가요(웃음). 선생의 책을 읽다보면 참조하는 철학자의 계열이 다르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선생은 데카르트-칸트-셸링-헤겔과 함께 기독교철학자인 말브랑슈-파스칼-키르케고르를 중요시하지요. 현대철학자 중에서는 플라톤주의자인 알랭 바디우가 선생의 이론적 동지이고요. 저는 데카르트-스피노자-칸트-니체와 함께 데리다-푸코-들뢰즈의 사유노선에 아무래도 가까운 듯 합니다. 참, ‘신체 없는 기관: 들뢰즈와 결과들’(2004)을 읽어보니 선생은 모두가 사랑하는 스피노자를 홀로 싫어하고 계시더군요. 상징계를 고려하지 않은 상상계의 철학자라고(웃음).


지젝: 들뢰즈의 표현을 비틀어 저는 그것을 스피노자 뒤에서 하는 헤겔의 비역질이라고 했죠(웃음). 사실 헤겔의 절대지는 의식의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그것이 끊임없이 실패하는 구조적 불가능성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저는 그것을 실재라고 부릅니다. 사드 소설에는 자신의 성기를 자신의 항문에 삽입하는 기괴한 장면이 나오는데, 그런 점에서 의식을 절대지 뒤에 삽입시켜 닫힌 원환 고리를 완성하는 도착증적 꿈을 꾸는 자들은 바로 헤겔에 대한 비판자들인 거죠.


고진: 글쎄요. 정신분석적인 사후(事後)의 시점에서 헤겔을 전유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공평을 기하자면, 헤겔의 ‘법철학’과 같은 저서는 중요합니다. 헤겔은 다양한 욕망의 형태를 긍정하는 시민사회(자유)를 인정하면서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불평등을 제어할 수 있는 국가(평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둘의 불일치는 국민(형제애)이라는 상상력으로 보완되지요. 이것은 나중에 맑스가 각각 ‘루이보나파르트 브뤼메르 18일’(1852)과 ‘자본론’(1867)에서 행했던 근대국민국가비판과 정치경제학비판으로 이어집니다. 공교롭게도 맑스는 헤겔에 대한 긍정적 언급으로 두 책을 시작하고 있죠. 헤겔에겐 확실히 이러한 잠재력이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타인을 수단뿐만 아니라 목적으로도 대하라’라고 말하는 칸트에서 코뮤니즘의 시작을 보고 싶습니다. 그는 계몽에 내재하는 ‘적대’(antagonism)에 대해 누구보다도 민감했습니다. 칸트는 계몽이 먼 미래에는 완성될 것이라고 보았지만, 스탈린주의자처럼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죠. 우리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손을 상상하고 투쟁해도 좋습니다. 환경문제나 석유전쟁, 기아, 치명적 전염병 등이 일어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체제에서 칸트의 정언명법은 훌륭한 21세기 윤리입니다.


지젝: 그렇군요.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전지구적 자본주의 쪽으로 옮겨가고 있는데요. 오늘날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자본에 대한 대항운동에 대해 의견을 나누면서 짧은 대담을 끝낼까 합니다. 네그리·하트의 ‘다중multitude’(2005)에 대해 말해보죠.


고진: 점점 더 가혹해지고 있는 후기자본주의체제에서 다중은 분명 긍정할 만한 요소가 있는 대항운동의 우세한 작인이지만, 뭐랄까, 지나치게 낭만적(문학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체제가 허용하는 한에서의 일시적 축제라고나 할까요. 다중은 맑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1848)에서 말한 프롤레타리아트의 21세기 판본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요점은 ‘만국의 노동자여, 일하지 말자’입니다. 하지만 아까 말한 것처럼 이것 역시 생산력의 측면에서 자본에 대한 대항운동을 구상하는 전통적 발상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국가개념에 대한 성찰이 없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제국주의에 대항한다면 알 카에다도 다중이 아닙니까. 다중은 애매모호합니다.


지젝: 다중은 이렇게 말하죠. ‘나는 동성애자이고 전업주부이며, 비정규직 노동자이고 팔레스타인인이다…’ 이것은 은유, 시(詩)라면 문제가 없지만, 분명 정치는 아닙니다. 연대는 필요합니다만, 저는 다른 관점에서 다중이 성, 인종 등의 범주를 들여오면서 계급문제를 흘려버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그들도 계급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성, 인종과 같은 종(鍾)으로 격하됩니다. 계급은 종이되 종이면서 유(類)입니다. 유일무이한 적대죠. 역시 문제는 정치경제학입니다(웃음)! 다중이론가들은 스피노자의 정동(affect)개념을 근간으로 삼지만, 이 정동이야말로 파시즘의 구성요소이기도 하죠. 그들은 ‘권력 없는 권력’을 원한다 말하지만, 이건 손안대고 코풀자는 거 아닙니까. 만일 그들이 권력을 잡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오히려 당파적 레닌주의나 바디우식의 마오이즘이 역으로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진: 다중에 대한 선생의 비판에는 동의합니다만, 레닌주의, 마오이즘의 정치적 폭력과 테러리즘은?
지젝: 저는 세계를 비난하되 자신은 거기에 빠져있는 좌파적 ‘아름다운 영혼’의 자기기만을 선택하느니보다 보수주의자처럼 손에 피를 묻히더라도 단두대를 선택하는 행위(act)가 낫다 생각하는 편입니다.


고진: 쉽지 않은 문제군요. 선생 식대로라면 자코뱅적 테러와 알 카에다의 테러를 어떻게 식별하죠? 저는 오히려 자본의 적대를 인식하는 새로운 소비자운동이야말로 대안이 아닐까 싶은데. 그렇지만 저나 선생이나 자본에 내재한 적대로부터 코뮨적 유토피아를 구상한다는 점에서는 동지입니다.(웃음)


지젝: 네(웃음). 아마도 그러한 노력이야말로 유토피아적인 순간에서 영원을 창출하는 행위일 겁니다. 자, 이것으로 짧은 대담을 아쉽게 정리해야할 것 같군요. 감사합니다.

복도훈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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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싱어 교수 인터뷰(2001년 5월)


   윤리는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 짓는 중요한 잣대이다. 그러나 최근 주로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의 삶을 둘러싼 조건이 급격히 변화하면서 무엇이 윤리적으로 옳은지에 대한 판단이 흔들리고 있다. 인류의 새로운 윤리적 기준을 세우려고 하는 미국 프린스턴대 피터 싱어 교수를 침례신학대 배국원 교수가 만나 그가 주장하는 '실천윤리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편집자)


―당신은 실천윤리학이라는 분야를 새롭게 정립한 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윤리는 당연히 실천을 전제로 한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실천윤리학이라는 말의 의미가 모호해집니다. 실천윤리학이란 과연 무엇이며 왜 필요합니까?


"실천윤리학(practical ethics)은 전통윤리학의 한계로 인해 요청됩니다. 현대 사회는 급격하게 변하고 있고 낙태·안락사·환경오염·독점자본 등 문제들이 새롭게 등장해서 윤리적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윤리학은 이런 문제들에 적절하게 대응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것은 윤리학자들이 구체적인 윤리적 대안을 제시하기보다 윤리 그 자체의 의미를 질문하는 방법론적 탐구에 더욱 치중하여 왔기 때문입니다. 실천윤리학은 이름 그대로 현대인의 윤리적 실천을 목표로 하는 학문으로서 이론적 탐구에 그치는 윤리가 아니라 실행 가능한 구체적 윤리를 제시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은 다양성과 상대성이라고 말합니다. 상대주의가 지나쳐 허무주의까지 거론되는 우리 시대에 어떻게 윤리가 가능합니까?


"윤리의 전통적 기초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판단에는 동의합니다. 종교적 권위 혹은 계몽주의의 이성적 권위에 의거한 도덕률은 현대인들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현대인에게 도덕(morality)은 무의미할지라도 윤리(ethics)는 필요합니다. 인간은 반드시 행동을 위한 결단을 내려야 하고 이는 윤리적 선택과 기준을 요구합니다. 윤리적 선택이 가져올 결과를 기준으로 삼자는 나의 결과주의(consequentialism)는 물론 공리주의로부터 영향 받은 것입니다."


―결과주의를 잘 보여주는 예가 동물 살상에 대한 당신의 반대라고 보여집니다. 사람이 육식을 하는 것이 왜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쓴 '동물해방'의 중요한 논지는 인격체인 동물에 대해 인간이 지극히 비인격적인 살상행위를 자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더 많고 더 좋은 고기를 얻기 위하여 온갖 비윤리적인 방법으로 사육하고 살육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가축을 기르기 위해 산림을 목장으로 개조하면서 환경을 훼손하게 되고, 또 목장의 가축들은 전 세계 메탄가스의 20%를 배출하여 더욱 환경을 오염시키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이 동물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동물도 인간과 같은 '인격체(person)'라고 강조합니다. 전통적으로 사람이라고 해석되어 왔던 이 단어(person)를 어떻게 새롭게 정의할 수 있습니까?


"사물들은 세 가지 범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무감각한 것, 감각은 있으나 자의식을 갖지 못한 것, 감각과 자의식을 가진 것, 세 종류입니다. 이 중에서 마지막 범주에 해당하는 생명체는 모두 인격체(person)라고 나는 정의합니다. 나는 비록 동물학자는 아닙니다만 물고기 등은 두 번째 유형에, 다른 많은 동물들은 세 번째 유형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이 다른 모든 인격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고려해야 할 윤리적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20 세기에 들어와서 남성우월주의와 인종차별주의는 종식을 고했습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인간우월주의입니다."


―방금 말씀하신 인격체의 정의는 획기적입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똑같은 정의를 적용해서 당신이 낙태를 찬성하고 불구로 태어난 유아의 살해를 지지한다는 사실입니다. 획기적인 정의가 오히려 엽기적으로 적용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뱃속의 태아는 감각을 느끼지만 자의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두 번째 유형에 해당하는 비인격체입니다. 뇌가 없게 태어난 무뇌아 등 특정한 불구아들도 역시 정당한 의미의 인격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오해하듯 내가 무조건적인 낙태와 불구아 살해를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런 가능성을 위한 윤리적 근거가 있다고 말할 뿐입니다."


―서두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실천윤리학은 우리 시대를 위한 윤리적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요청됩니다. 그러나 지금 세계에는 복제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논란이 가열되고 있는데 정작 실천윤리학자들은 아직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테크놀로지가 너무 빠르게 발달하여 대응하기 숨이 가쁠 지경입니다. 원칙론적 의미에서 인간 복제는 윤리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3대 독자로 태어난 자식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경우 등 여러 가지 정황에서 복제 결정은 정당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우려하는 것은 복제의 테크놀로지가 일부 특권 부유층에 의해 왜곡되거나 남용될 가능성입니다. 우생학적 방법으로 신귀족주의적 사회계층이 형성되는 등의 부적절한 결과에 대한 대비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실천윤리학이 당면한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국적 기업의 횡포 등 기업 윤리를 바로잡는 일도 심각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시 올바른 환경 윤리의 정립입니다. 지금 지구는 날이 갈수록 오염되어 가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종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더 이상 인간만을 위한 윤리가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위한 공생의 윤리가 절실히 요청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자 나라가 가난한 나라에 대한 경제적 특권을 포기하고 나아가 인간이 다른 종에 대한 지배적 특권을 포기할 때 참다운 공생의 윤리가 수립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배국원·침례신학대교수

chosun.com 2001.05.08


■싱어 누구인가


실천윤리학의 새 지평 개척


   실천윤리학의 세계적인 거장인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현대 사회의 복잡한 윤리적 문제들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분명한 입장 표명으로 유명하다.

   1946년 호주의 유태인 이민 가정에서 태어난 싱어는 멜버른 대학을 거쳐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7년부터 호주 모나쉬 대학에서 가르치다가 1999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생명윤리 교수로 자리를 옮겨 활동하고 있다. 현재까지 모두 27권의 저서를 집필 또는 편집한 싱어는 '실천윤리학'이라는 분야를 새롭게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활발한 기고와 강연 활동을 통해서 윤리적 견해를 거침없이 피력해 온 싱어는 현재 활동하고 있는 철학자들 가운데 일반인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싱어가 29세 되던 1975년에 출판했던 '동물해방'은 40만권이 넘게 팔렸으며 9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동물 살해을 반대하는 철학적 논증과 더불어 채식주의자를 위한 요리법까지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을 통해 딱딱한 철학 서적에 식상해 있던 독자들은 삶에 있어서 철학의 위치를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싱어의 명성만큼이나 그에 대한 비판도 세계적이다. 철학자들은 그가 너무 피상적이라고 비판하고 일부 청중들은 낙태와 안락사를 지지하는 싱어를 인종 청소를 주장했던 히틀러에 빗대어 야유한다. 프린스턴 대학으로 옮길 때 또 한 차례 반대 여론에 직면했던 싱어는 그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현재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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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잃은 ‘저소득 젊은층’ 증가…일본 미래 심각”
양극화 해법을 묻다 ① 야마다 마사히로 도쿄가쿠게이대학 교수
 
 
한겨레 김도형 기자
 
 
» 야마다 마사히로 도쿄가쿠게이대학 교수
 

세계 각국이 계층간 빈부 격차가 극심해지는 양극화 확대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경쟁지상주의적 신자유주의의 확산에 따른 공통적 현상이다. 일본·중국·미국·유럽의 전문가들과 연쇄 인터뷰를 통해 양극화 해법을 모색해본다.

 

“전 세계의 경제구조가 바뀌어 점점 풍요로운 사회가 되어가는 것에 근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적으로 사회가 풍요로워지면서 정보통신산업이 발달하고 글로벌화와 서비스화가 진행되면 높은 수입으로 승부를 겨루는 사람과 수입이 낮아도 좋은 사람으로 나눠진다.”

일본 격차문제 전문가 야마다 마사히로 도쿄가쿠게이대학 교수(교육학·가족사회학 전공)는 양극화의 배경을 묻는 질문에 ‘풍요로워진 사회’라는 말을 꺼냈다.

“공업으로 물건을 만들어 소비해가던 데서 물건에 뭔가를 부가하거나, 서비스·정보로 즐거워하는 시대로 변했다. 보통 물건의 가격은 글로벌화의 영향으로 점점 내려갈 수밖에 없다. 단순히 물건을 만들거나 파는 사람의 인건비는 점점 내려간다. 역으로 새로운 물건이나 시스템을 만드는 사람 등 전문적 능력을 갖춘 사람은 생산성이 높아져 수입은 늘어난다.”

그는 일본의 격차(양극화) 문제에서 가장 우려할 대목은 장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저소득 젊은이들이 늘어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현재는 이들이 부모와 함께 살고 있어 문제가 표면화되지 않지만, 부모 세대가 사라지는 15~20년 뒤쯤이면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상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부모에 기생하는 일본청년들 당장은 ‘빈곤’ 못 느껴도 20년뒤엔 심각한 문제될 것”

-일본의 격차 문제에 대해 ‘희망 격차’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일본만의 특징인가?

=한국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즉, 일본의 저소득 젊은이는 대개 부모 슬하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반항하거나 폭동을 일으키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패러사이트 싱글’(부모에 기생하는 독신)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비교적 넉넉한 부모와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수입이 낮아도 생활이 가능하다. 따라서 지금 당장은 생활의 격차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지 않고 단지 장래가 불안한 젊은이가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위에 올라가지 못하고, 일을 해도 희망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다. 미국이나 영국이라면 아무리 능력이 없어도 생활을 위해서는 열심히 일하지 않을 수 없다. 그에 비해 일본에선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부모 밑에서 생활할 수 있기 때문에 니트 (직업도 없고, 교육훈련도 받지 않는 젊은이) 같은 사람이 나오게 된다. 그런 점이 일본 격차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저소득 젊은이는 얌전하다. 계속해서 저소득에 머물러 있지만 생활면에서 곤란하지 않다. 그렇지만 20년 뒤쯤 그들의 부모가 죽게 되면 부모의 연금이 없어져 격차 문제는 더욱 심각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 사이에 어떻게 하든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

-저소득 젊은이들이 부모에게 얹혀사는 게, 일본의 격차 문제가 정치문제화하지 않는 이유와 관계 있다는 얘기인가?

=그렇다. 연 수입이 100만~150만엔에 불과한 젊은이가 수백만명은 있을 것이다. 그 정도 수입으로는 생활하기가 불가능하므로 폭동이 일어나거나 범죄가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선 부모가 그 부족분을 보충해주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얼마전 끝난 도쿄 도지사 선거에서 격차 문제가 선거의 초점이 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다. 지금 빈곤을 느끼지 않으니까, 생활이 곤란하지 않으니까 잠잠한 것이다. 장래를 생각하면 깜깜하니까 지금을 즐기자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나는 그것이 희망 격차라고 말하고 있다.

7월 참의원 선거에서도 이 문제는 초점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일본은 문제 해결을 일단 뒤로 미루는 사회다. 가정도 그렇고 사회적으로 그렇다. 그 대신 결혼을 안 하거나 못하는 젊은이가 늘어나거나 결혼해도 아이를 낳지 않아 생기는 저출산 문제가 더 크게 부각되는 게 일본의 현실이다.

-희망 격차를 줄이기 위한 대책은?

=제대로 노력하면 평가받는 일을 얻을 수 있는 사회 체제를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현재는 제대로 된 일자리의 숫자 자체가 모자란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비정규직 등 생산성이 낮은 일에 종사하는 기간을 줄이고, 비정규직도 직장에서 승진할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그런 다음 생산성이 높은 일자리를 얻으려는 직업교육의 기회를 보장하고, 정규직 등 고생산성의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 또한 (주요 국가 가운데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낮은) 최저임금을 올려 노동시간을 규제하는 노동정책을 통해 사회 전체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노동규제는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방해해 비효율적이라고 강조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 일자리를 얻는 기회를 늘리는, 즉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촉진하기 위한 노동규제도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희망을 잃어버린 젊은이들에게 경제적 성공과는 별도로 가치있는 일에 대한 매력을 느끼게 해줄 필요도 있다. 그 수단으로는 환경보전이나 고령자 개호(수발), 육아지원 등 새로운 형태의 공공사업을 실시해 정규직의 길에서 벗어난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을 흡수하는 방안이 있다.

“제대로 된 일자리 늘리고 공공사업에 젊은층 흡수해야…최저임금 등 노동규제 필요”

-아베 신조 정권은 큰 성공을 거둔 영국 정부의 정책을 본뜨고 있지만, 예산투입에 소극적이어서 구두선이라는 비판도 있다.

=아베 정권이 무엇을 하려는 것은 알겠지만 예산 규모가 작기 때문에 근본적 해결은 안된다. 소득세나 상속세를 예전 수준으로 올릴 필요도 있다.

-세금을 올리는 문제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있을텐데.

=부자들을 상대로 세금을 올리자는 얘기이므로 일반인들의 저항은 없을 것이다. 일각에서 정부의 세금낭비를 이유로 반대하고 있지만, 격차대책은 세금을 낭비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다른 문제다.

-격차대책을 위해 기업의 부담을 늘려서는 안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는데.

=비정규직을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면, 대기업은 여력이 있을지 모르지만 중소기업들은 쓰러진다. 국민 전체의 부담을 늘리려는 방향이라면 모를까. 기업의 부담을 늘리는 것보다는 세금을 늘리는 편이 낫다. 중소기업은 정말 힘들다.

-영국 국방부가 얼마전 앞으로 30년 뒤면 양극화가 격화돼 중류층이 없어지면서 ‘마르크시즘’이 부활한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유럽에서 비정규직에 머물 수밖에 없는 저소득층 젊은이가 늘어난다면 마르크시즘이 부활하느냐, 아니면 이들이 종교에 빠지느냐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즉, 잃어버릴 게 전혀 없고, 지금의 생활이 계속해도 좋은 게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은 혁명을 요구하거나 종교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어떡하든 이런 흐름에 브레이크를 걸 필요가 있다. 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도쿄/글·사진 김도형 특파원 aip209@hani.co.kr

 


 

 

야마다 마사히로는
일본사회 특유의 ‘희망격차’ 주목

지난해 일본 사회에서 널리 쓰인 10대 용어 가운데 하나로 ‘격차사회’라는 단어가 선정됐다.

이 말을 퍼뜨린 주인공은 도쿄가쿠게이 대학 교육학부의 야마다 마사히로(50) 교수다. 2005년 발간한 <희망격차사회>라는 저서를 통해, ‘희망격차’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오늘의 일본 사회를 포착해 그 배경을 추적하고 처방전을 제시했다. 그는 표면적인 경제 격차만을 보지 않고, 일본의 독특한 사회·가족적인 구조가 잉태한 장래의 격차 위험성에 주목하고 있다.

야마다 교수는 격차 세계화의 요인이 경제의 글로벌화를 낳은 신자유주의라고 비판하면서도, 무조건적인 비판은 ‘뉴러다이트운동’(신 기계파괴운동)이라는 양비론적 견해를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강조와 소득·상속세의 과감한 증세를 해법으로 내놓은 또다른 전문가 다치바나키 도시아키(도시샤대학 경제학과 교수)에 비해 약간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야마다 교수는 2006년 9월 자신의 처방전을 좀더 구체화한 <신평등사회-희망격차를 넘어서>를 펴냈다. 1981년 도쿄대학을 졸업한 뒤 같은 대학원 사회학연구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도쿄/김도형 특파원

 

 

 

빈곤률 10년새 2배
비정규직 늘어난 탓

한때 ‘1억 총중류’라는 말이 구가될 만큼 세계적인 평등사회였던 일본은 이제 ‘격차사회’말이 널리 쓰이는 양극화의 나라로 변모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발표를 보면, 일본의 빈곤율은 1996년 8%에서 2005년 15.3%로 급증해 주요국 가운데 세 번째로 높게 나타났다. 1990년대 초반 거품경제 붕괴 이후 비정규직이 전체 노동자의 1/3 가까이로 크게 늘어난 게 가장 큰 요인이다.

현재 일본은 전후 최장의 경기확대 국면을 맞고 있으나, 그 과실이 골고루 미치지는 못한다. 기업들이 부담 상승을 이유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5년 재임기간 신자유주의 구조개혁을 단행해 지금과 같은 경제회복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감세 등 경제 활동하기 좋은 환경 만들기에 치중한 나머지 양극화 확대라는 부정적 유산도 남겼다.

제1야당인 민주당은 오는 7월 참의원 선거에서 격차문제를 최대 선거쟁점으로 삼을 태세다. 그러나 지난 4월 지방선거에서 유권자의 관심을 끌지 못한 바 있어, 쟁점화가 가능할지 불투명하다는 견해도 나온다.

도쿄/김도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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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인문학 임파서블 시대의 인문학

어제 시립도서관에 갔다가 정간물실에서 잠시 문학잡지들을 훑어보았다. 걔 중에는 <21세기문학>(2007년 봄호)도 껴 있었는데,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일이 생각나서 인문학 위기에 관한 기획좌담을 읽어보았다(실은 그 좌담자의 한 사람이었다). 사회자의 표현을 빌면, '인문학 임파서블 시대'의 인문학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해서 다른 두 분 선생님들과 자유분방하게 의견을 나눈 자리였다. 생각난 김에 내가 거들었던 대목들만 추려서 창고에 넣어둔다.    

■ 최근 인문학 서적의 출판 동향

제가 출판동향 분석가는 아니지만 나름대로는 ‘기존의 인문학에 대한 도전’을 네 가지 정도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먼저, 인문학 서적의 새로운 수용자를 찾으려는 움직임, 소위 ‘쉬운 인문학’의 유행입니다.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처럼 인문학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일반인들, 더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인문학의 희망을 나누려는 움직임도 있죠. 그런데 쉬운 인문학이 급증하는 현상은 논술시장과 연관된 것이기도 하죠.

 

 

그리고 두 번째는 ‘제 3의 문화’인데, 일련의 자연과학자들이 자신들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인문학자들도 포함시켜서 일종의 인문학과 자연학 사이의 구분, 곧 ‘두 문화’를 극복하고자 하는 운동입니다. 대표적으로는 존 브록만 같은 편집자와 리처드 도킨스, 재레드 다이아몬드 같은 저명한 과학자들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을 ‘새로운 인문학자(New Humanists)’라고 부르더군요. 국내에서도 최재천․도정일 교수의 <대담> 같은 책은 이러한 맥락에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디지털 미디어와 인문학의 접속입니다. 소위 ‘디지털 인문학’이라고 불리는 분야인데, 인문학 분야 가운데서는 가장 ‘돈 되는’ 축이 아닌가 싶습니다. 끝으로 정신분석학의 도전, 혹은 대중화를 들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문학비평뿐 아니라 영화비평 쪽에서 라캉과 지젝 같은 이론가들의 작업이 활용되고 있지요. 아카데미즘 내부에서는 아직 비주류이지만 대중문화 비평이나 대중적인 채널 속에서는 이런 정신분석학 계열의 책들이 많이 유통되고 있고 앞으로 더욱 활성화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 인문학 위기 담론


사실 인문학의 위기라는 것이 제도적인 문제이고 학문 후속 세대와 관련된 문제이지요. 인문학과 내부에서도 서로 이해관계가 상당히 다르고요. 어문계열만 하더라도 영문과 중문과 독문과 불문과 등등 각각의 분위기가 다르죠. 요즘 학생들에게 인기 좋은 영문과나 중문과는 전혀 위기의식이나 문제의식을 못 느낄 수도 있습니다. 제도적으로 볼 때는 인문학 전공자들의 생계와 관련된 문제도 얽혀있죠. 같은 전공자라 하더라도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 또 같은 비정규직이라 하더라도 학진(학술진흥재단)에서 제도적인 지원을 받고 있느냐 안 받고 있느냐에 따라서 서로 입장이 다르지요. 언론에서는 크게 뭉뚱그려서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지만 각자 자기의 소속이나 지위에 따라서 ‘위기의식’의 스펙트럼은 굉장히 다양합니다.


■ 멘토로서의 인문학


저는 포커스를 다른 점에도 맞추고 싶은데요. <천개의 공감>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현상은 독서치료, 문학 치료, 영화치료, 음악치료 이런 것들이 유행하는 현상과 관련이 있는 듯해요. 최근에는 문학이 어떻게 살아남을까를 이러한 문학 치료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죠. 소설을 읽으면 정서적 불안이 해소되고 시를 읽으면 우울증이 해소되고 이런 식입니다. 이것은 인문학을 굉장히 ‘실제적인 요구’에 맞추는 행위이기도 해요. 인문학에 대한 대중과 출판계의 요구도 아마 이런 실용적인 측면이 강하겠죠.

 

 

 

 

 ■ 정서산업과 인문학

이게 한국적 문화코드예요. 신경증이라는 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편적인 것 아닌가요. 프로이트 말대로라면 현대인은 모두 노이로제 환자이기도 하구요. 한국사회에서는 정신과에 가는 데 여러 가지 심리적∙문화적 장벽이 있기 때문에 이런 책들을 통해서 적절히 제어하는 거죠. ‘인문학의 생존’이라는 측면에서 이런 부분이 다뤄져야 할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인문학의 운명이 최근의 산부인과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최근에 출산율 저하되면서 산부인과 광고가 전부 피부관리, 비만관리, 보톡스 이런 거예요. 비슷한 처지이다 보니 인문학도 보톡스 인문학, 체형관리 인문학, 피부관리 인문학 이런 식으로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문학이 되어가는 게 아닐까, 또 요즘은 그런 걸 요구받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 인문학의 생존술?


그렇죠. 한데 체형관리, 피부관리가 산부인과 본래 목적은 아니듯이 인문학을 쉽고 재미있게, ‘슬림’하게만 만드는 것이 과연 인문학의 본업에 맞는 일일까 의문은 갖게 됩니다. 제가 아는 전통적인 인문학은, ‘이렇게 살면 행복하다’를 가르쳐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를 스스로 반문해보도록 하는 것이거든요. 인문학 자체가 원래 인간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요? 나의 안락을 불편하게 느끼도록 만들고,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일깨우는 것. 그런데 요즘 유행하고 있는, 또 한편에서 요구받고 있는 인문학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위무해주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이게 인문학의 살길로 포장되고 있고. 새로운 인문학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있지만, 이거야말로 반(反)인문학이 아닌가란 생각도 듭니다.


■ 배고픈 인문학


예전에 인문학은 배부른 학문으로 유한계급의 학문이었죠(*혹자는 '왕후장상의 학문'이라고 했다). 이제는 전형적으로 배고픈 학문이 되었어요.(웃음) 요즘 학문 후속 세대들은 수료 이후에 학위까지 받고 10년, 길게는 20년까지 ‘비정규직 노동자’로 버텨야 하거든요. 이것이 인문학이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가장 실제적인 이유지요. 제가 간혹 동창들을 만나는 자리에 가보면 이야기의 결론은 다 부동산이더군요. 그런 부동산-테크가 없는 저로선 뭐 할 얘기도 없고 끼워주지도 않아요. 인문학자들이 저마다 고상한 고민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들이 한가하거나 한심하게 보이는 거죠. 이제 이런 인문학의 형편이 들통 나는 바람에 더 이상 사회적 존경도 유지할 수 없는 그런 처지죠. 비관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위기 타개는 그런 정직한 현실 인식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라이프 스토리

 

중학교 때부터 서점 순례가 취미였어요. 집에 가기 전에 동네 서점 다 둘러보고 들어오는 게 버릇이었는데, 늘 새 책이 별로 없어 본 책 또 보면서 반복적인 서점 순례를 했었죠. 그런 서점 순례 습관이 계속 이어지다가 디지털 미디어 시대가 되다보니 서점 순례를 인터넷 공간에서도 하게 된 거죠. 그런데 그건 단순히 인터넷 탓만은 아니구요. 모든 생산이 위기에서 비롯되잖아요. 제 경우도 비슷합니다. 대학에서 박사과정 수료하고 결혼했는데(제가 원래 현실감각이 좀 없어서요), 상당히 암담하더군요. 담벼락에다 과외광고 붙이고 다니고 학원강의도 뛰고 그랬죠. 저대로는 위기국면이었는데 그렇다고 별수가 있었던 건 아니고 할 줄 아는 게 책읽기밖에 없어서 그거 가지고 버티다 보니까 어느 순간 다른 구멍으로 빠져나오게 되더군요.


■ 인문학 위기가 아니었다면?


논문만 써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도 논문 쓰는 것 좋아합니다.(웃음) 러시아 문학 같은 경우 국내 연구진들이 뭐든지 연구만 하면 ‘최초’일 경우가 많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최초의 단행본 연구서가 작년에 나왔을 정도니까요. 러시아 문학이 번역은 꽤 되었지만 제대로 된 연구서는 여전히 빈약하죠. 연구인력도 부족하고요. 한데, 제도적인 뒷받침도 별로 없는 상태에서 이런저런 관심도 돌보랴 생계도 유지하랴 정신없죠.(웃음)


■ 글쓰기와 인문학


프랑스 같은 경우 유명한 정치인 같으면 나름대로 역사서든 소설이건 내야지 자기자 제대로 된 정치인 지식인이 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예요. 우리 사회도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을까요.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서든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든 철학서 역사서를 쓰는 것이 정치가의 임무가 된다면 말이다. 사회적인 동의도 필요하고, 붐도 있어야 하지만, 그저 자동적으로는 안 되죠. 왜 인문학이 필요한가에 대한 적극적인 설득과 글쓰기의 강제도 필요한 것 같아요.

 


■ 인문학과 소통의 어려움


분과 학문 체계를 어차피 넘어서기로 했다면 더 과감한 시도가 필요한 것 같아요. 문화 콘텐츠 학과도 생기고 문화 콘텐츠 진흥원도 생길 정도로, ‘문화 콘텐츠’라는 말이 굉장히 광범위하게 유포되었죠. 그런데 실제로 ‘본토’에서는 안 쓰는 말이라네요. ‘문화산업’이라고 더 많이 쓰고요. 그런데 이게 한국적인 용어로 ‘문화 콘텐츠’란 말이 상용화된 거죠. 그러면서 디지털 스토리텔링, 이런 게 붐을 이루고 있고요. 더불어 학제간 연구의 필요성들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제 생각엔 학제간 연구 자체가 기이한 알리바이입니다. 기존의 학과 구분이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이라면 경계를 부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잘은 모르지만, 동경대 같은 경우 표상문화학부 이런 식의 편제가 있더군요. 나름대로 파격적이죠. 좀 더 파격적으로 학제간 연구를 재구성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끝으로 덧붙이자면, 오늘 좌담의 주제가 계속 인문학의 ‘대중적 소통’에 맞춰지고 있는 듯한 감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인문학 자체가 ‘소통 불가능성’ 내지는 ‘소통의 어려움’ 자체를 탐구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쉽게 소통되지 않는 부분이야말로 인문학의 독특한 관심 아닐까요?..

 

07. 05.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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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5-09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전출처 : Ritournelle > * 20대 젊은 보수주의자들의 현황 1

* 프레시안(2007. 5. 2) / 영한나라당이 아닌 영삼성?

   
  '영한나라당'이 아니라 '영삼성'? 
  [20대 보수화? 그 이면①]"학점 4.5로도 부족해" 

올해 초 몇몇 언론에서 소위 '20대 보수화' 경향을 다뤘다. 과거 '한나라당 반대' 입장이 다수를 차지하던 20대에서 '한나라당을 지지한다'는 응답이 50% 가까이 되는 현상을 보인 것이 계기였다. 이들 기사를 보면 20대 '보수'가 윗 세대의 '보수'와 같은지 다른지, 그래서 궁극적으로 이들이 올 연말 치러지는 대선에서 실제로 한나라당을 지지할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20대 보수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지난 2002년 대선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도 모른다. 2002 한일 월드컵의 여세를 이어받은 '20대 열풍'은 인터넷에서, 광장에서 정치적 지형의 변화를 이루는 데 일조했었다.
 
  이처럼 정치적 관심에 일차적 초점이 맞춰진 '20대 보수화' 담론은 정작 20대가 보수화됐다면 왜 보수화됐는지, 보수화됐다는 이들의 생각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이들의 변화가 한국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인지는 포괄하지 못했다.
 
  <프레시안>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전경련과 대기업의 지원을 받는 동아리인 '영리더스클럽'(Young Leaders' Club·YLC), '인재제일' 등의 활동을 하는 대학생들을 만나봤다. '대학'이란 공간에 대기업이 직접 만들고 후원하는 동아리가 보편화됐다는 사실 자체가 대학생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동아리 활동을 통해 이들이 얻고자 하는 것도 사회생활에 대한 간접 경험, 취업에 직ㆍ간접적 도움이 될 수 있는 지식과 인맥 등 좀 더 '현실적인 요구'로 변했다. 물론 이들 대학생이 서울 소재 대학이라는 점에서 섣불리 일반화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전 세대와 달라진 의미의 '대학 생활'을 자발적이면서 적극적으로 영위하고 있는 이들을 통해 달라진 20대들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이 같은 판단에 기반해 YLC, 인재제일 등 동아리 활동을 하는 이들을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가상의 대학생의 일상을 그려봤다. <편집자>
 
  '삐그덕.'
 
  4월 마지막주 어느날 한 대학 단과대 과방. 05학번 Y 군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중간고사 마지막 시험이 방금 끝났다. 그렇지만 Y 군의 발걸음은 여전히 무겁다. 5월에 있을 영리더스클럽(Young Leaders' Club·YLC) 학술제 예선이 마음에 걸리기 때문.
 
  '대학과 기업을 잇는 징검다리'로서의 동아리 활동
 
  다음주까지 제출해야 할 전공 과목 리포트도 있지만 Y군에게는 학술제가 더 신경쓰이는게 사실이다. 리포트는 매주 내지만, 전국단위 YLC 학술제 우승은 1년에 한 번뿐이다. 또 YLC 학술제 우승은 취업할 때 이력서 경력란에 한줄 더 쓸 게 생기는 일이다. 이날 저녁, 같은 학교 YLC 회원들 몇명과 학술제에 대한 얘기도 할 겸 모이기로 했다.
  

YLC(www.ylclub.net)


   
▲ ⓒYLC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이 매년 주최하던 대학생 캠프인 YLC(Young Leaders' Camp)가 모체가 돼, 지난 2002년 창설된 전국 규모의 대학생 연합 동아리.
 
  시장경제 원리를 익히기 위한 강연, 포럼, 학술제 등이 주요 활동이다. 회원들은 한 학기동안 필수포럼, 열린강연회 등 프로그램에 참가한 뒤 '준회원'으로 승격되며 정회원이 되기 위해선 경제, 경영, 근현대사 과목을 듣는 'ALP(Advanced Learning Program)'를 수료해야 한다.
 
  전경련을 매개로 기업인뿐만 아니라 교수, 정관계 인사들과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다. 최근 창립 6주년을 맞아 발간한 활동자료집에 미래에셋 강창희 소장, 미래문화포럼 복거일 대표, 홍익대 김종석 교수, 이화여대 주철환 교수 등이 축사를 써주기도 했다.
 
  필기시험, 면접 등을 통해 매 학기 200여 명의 신입회원을 선발하며, 전국적으로 600여 명 정도의 회원이 활동한다. 수도권 3개 지부(안암, 신촌, 관악)와 전국권 4개 지부(경남, 경북, 전라, 충청)가 있다.
 
  전경련은 1년에 2번 열리는 총회를 비롯해 열린강연회, 필수포럼, 운동회, 학술제, 취업박람회 등 활동과 관련된 경비를 전액 지원하며, 열린강연회 초청 강사 섭외에도 도움을 준다. 활동 성적이 우수한 회원에게는 해외 산업 시찰 기회도 준다.

  "누나, 어쩐 일로 이 시간에 여기 계세요?"
 
  두 학번 선배인 C 양이 과방에 앉아 있었다. 기업 인턴십 등 각종 활동으로 늘 바쁘게 사는 그는 Y군에게 '롤 모델'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C 양은 YLC 활동을 마친 선배이기도 했다.
 
  "저녁에 L 기업 이사님 인터뷰가 있는데, 그 전에 그 분 책 좀 훑어보고 있어."
 
  C 양은 이날도 변함없이 '열공(열심히 공부하다) 모드'였다. 최근 삼성이 운영하는 대학생 웹진 '인재제일'에서 기자로 활동하면서 한껏 바빠진 모습이었다. Y 군 역시 다음 학기에는 C 양을 통해 알게된 '영삼성 열정운영진'에 지원해볼 생각이다.


   인재제일(www.injaejeil.co.kr)

  
▲ ⓒ프레시안 

  삼성인력개발원이 운영하는 대학(원)생 격월 웹진. '대학과 기업을 잇는 징검다리'라는 주제 아래 1989년 종이잡지로 창간됐으며 1998년부터 웹진으로 운영돼 오고 있다. 삼성 취업정보, 기업문화, 과학기술 소개, 대학 과학동아리 탐방 기사 등으로 구성돼 있다.
 
  약 15명의 대학생들로 구성된 '학생기자단'이 제일기획 등 삼성 소속 회사와 함께 기획회의를 하고 취재활동을 한다. 한 학기당 60만 원의 장학금과 함께 원고료가 지급된다.
 
  이밖에도 기업이 운영하는 대학생 웹진으로는 LG '미래의 얼굴'(http://future.lg.co.kr), 현대 '영 모비스'(http://young.mobis.co.kr) 등이 있다. 모두 대학생들이 기자로 활동하며 소정의 장학금과 원고료를 지급한다.


  
 영삼성(www.youngsamsung.com)


   
▲ ⓒ프레시안 

  2005년부터 삼성이 운영하는 20대 포털사이트. 삼성 채용정보를 비롯해 외국어, 아르바이트, 생활·문화 정보 등 취업과 연관된 각종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영삼성 기획 및 운영은 매학기 10여 명으로 구성된 '열정운영진'이 맡으며 사이트 모니터링, 취재 및 기고 등 활동을 한다. 운영진들은 소정의 활동비(학기당 120만 원) 및 해외 배낭여행비를 지급받으며 삼성그룹이 주최하는 활동에 참여하면 지원을 받는다.
 
  현대자동차 역시 지난 2003년 개설한 대학생 커뮤니티 사이트 '영현대'(http://www.young-hyundai.com)를 운영하고 있다. 이곳 또한 현대자동차 홍보단, 리포터, 탐방대원 등의 각자 역할을 맡은 '열정운영진'이 주축이 돼 활동하고 있다.

  하긴 Y 군이 YLC에 가입하게 된 것도 C 양 덕분이었다. 그는 3학년이 되는 Y 군에게 "너도 이제 '스펙'(학점과 영어점수 등)에 도움이 되는 대외 활동을 해야 하지 않겠냐"고 자극을 줬다. "열정만 있으면 된다"는 YLC모집 포스터를 보고 마음 놓고 있던 Y 군에게 "신입회원 경쟁률이 10대 1이 넘는다"며 긴장의 끈을 늦춰선 안 된다고 조언한 것도 C 양이었다. 신입생 모집시험 문제 수준이 만만치 않다는 것. C 양의 말대로 모집시험에서는 '원이 엔보다 평가절상된 것에 대한 해결방안을 써보라'는, 평소 상식으로는 쓰기 힘든 문제가 출제됐다.
 
  '복학생 마인드(제대 뒤 학업에 열중하는 대학생들을 두고 이르는 말)'로 준비한 덕택에 Y군은 필기시험 며칠 후 합격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학술제로 고민하고 있던 차에 마침 작년 학술제에서 우승했던 C양을 과방에서 만난 Y군은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다.
 
  "누나, 누나 땐 도대체 어떻게 준비했어요?"
 
  "불평등한 미국과 평등한 아프리카? 선택은 당연한 것 아닌가"
 
  "학술제 준비? 벼락치기 한다고 뭐가 되겠니. 이것저것 상식 준비를 충실하게 해놓으면 될 거야. 기초적인 경제학 원리라든지, 한미 FTA라든지…."
 
  "FTA! 안그래도 YLC 강연에 오시는 분들마다 강조하던데, 당연히 알아둬야겠죠?"
 
  Y 군은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지었다. 그간 YLC에서 GE 코리아 이채욱 회장, 제프리 존스 전 미상공회의소장 등의 강연을 차곡차곡 들어오지 않았던가. 지난 3월에는 한미FTA체결지원단에서 일하고 있는 국제변호사가 강연을 하기도 했다. 오는 6월엔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 강연도 있을 거라고 들었다.
 
  "미국이 초강대국이 된 것은 과감하게 농업을 버렸기 때문이죠. 농업인구가 50~60%일 때 미국 토지 대부분은 농장과 초목이었지만 농업인구가 대거 제조업으로 이동하면서 지금은 농업인구가 3%정도라고 들었어요. 그들이 미국인들에게 충분한 양의 농산물을 제공하는 걸 봐도 제조업 중심의 정책이 성공적이었단 걸 알 수 있죠."
 
  "어느 교수님이 묻더라. 불평등한 미국이 좋은지, 아니면 평등한 아프리카가 좋은지. 난 당연히 불평등한 미국을 선택할거야. 전반적으로 수준이 높고 잘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으니까. 개방화가 대세인데 우리에게 다가온 개방의 기회를 그냥 날려보내는 건 아깝잖아."
 
  "사회적 약자? '노블레스 오블리제'로 끌어안으면 된다"
 
  "그거 완전히 '파시스트'같은 발상이잖아."
 
  생뚱맞게 대화에 끼어드는 B 군의 말에 C 양과 Y 군이 동시에 돌아봤다. 지난 학기 B 군과 같이 독서 토론를 했던 C 양은 B 군이 뭘 말하려는지 알 듯 했다. 지난해 여름 제대한 B 군은 복학한 뒤 취업 준비에 힘쓰는 다른 동기들과는 달리 집회에 참가하고 토론 모임에도 열심이었다. 그런 B 군을 두고 학과 내에서는 '독특한 선배'라고 불렀다.
 
  "지금 네 말은 어른들의 이분법과 똑같아. 시장경제 찬성하면 다 '보수'니? 전경련에서 지원받는 YLC를 '보수 단체'라고 하지만 우린 그 안에서 우리 능력을 키우기 위해 자체적으로 외국어 스터디 모임, 봉사활동 모임을 열어. 자기 개발을 위해 노력하고, 능력있는 사람이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바람직하지 않아? 진보와 보수로 나누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을까?"
 
  "그런 신자유주의적인 생각으로 사회가 좋아질 수 있을까? 그럼 일할 능력이 없는 중증장애인들처럼 사회적 약자들은 어떡하고? 생존에 위기를 느끼는 이들이 많아지면 사회는 더 불안해지는 거 아냐?"
 
  "글쎄. 한국 사회의 위기는 오히려 사회적 재분배를 너무 강조해서 온 것이 아닐까? 정치인들이 복지를 중시하고 세금을 많이 걷겠다고 하니까 국민들이 씀씀이를 줄이고 그만큼 생산이 줄어드는 악순환이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가 복지에 관심 없는 건 아니라고.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이나 '노블레스 오블리제' 정신은 필요하지. 그렇지만 무조건 세금을 많이 낸다고 살기 좋은 사회가 되는 건 아니잖아."
 
  "도대체 언제까지 아둥바둥 살아야 하나"
 
  B 군과의 논쟁은 결국 접점을 찾지 못한 채 끝났다. 과방을 나와 YLC 회원들과의 약속 장소로 향하는 Y 군의 시야에는 교정을 가로질러 시끌벅적 어딘가로 향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중간고사가 끝난 기념으로 '쫑파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저 애들도 넋 놓고 있다간 곧 후회할 텐데.'
 
  잠시 '쫑파티' 대열에 합류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던 Y 군은 혼자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이 복잡해진다. 얼마 전 모두가 부러워하는 유명 대기업에 취업한 한 선배의 푸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회사에 가보니 서울대 출신인 나도 괴리감을 느끼더라. 우리 사무실에서 국내 대학 출신은 나 밖에 없더라고. 여기 말고도 대기업들 요즘 해외파 많이 뽑지. 우스개 소리로 '한국에서 대학 나온 사람들은 다 어디 갔을까'라고 말하기도 하거든. 취업 성공했다는 여기 사람들도 걱정이 없는 게 아니더라고. 빠르면 30대 후반, 늦어도 40대에는 다시 무엇을 해야 할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 잘난 선배가, 취업한 다음에도 힘들어하다니…. 대체 '스펙'은 어느 정도로 좋아야 하고 언제까지 이렇게 아둥바둥 살아야 하는 거야?' 교문을 나서는 Y 군의 발걸음은 따뜻하게 내리쬐는 봄날 햇살과 상관없이 계속 무거워진다.

 


   "도태되는 게 두렵다"
 
  "학내 활동만으로는 내가 도태되는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요즘 대학생들의 활동이 '탈학교화' 추세인 건 사실이다."
 
  인재제일 기자로 활동한 A(23) 양은 동아리 활동을 시작한 이유에 대해 경쟁에서 뒤쳐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꼽았다. "학점 4.5를 맞아도 뭔가 부족한 면이 있다"고 생각하는 지금의 대학생들에게는 자신의 이력서를 다채롭게 채워줄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A 양은 "삼성이라는 메리트가 컸고, 이력서도 염두에 뒀다"고 말했다.
 
  그는 "졸업한 뒤 바로 일하고 싶은데 교양과 전공과목 들어서는 그럴 수 없다"면서 "그래서 기업체 활동에 관심 많이 갔다"고 덧붙였다.
 
  생명과학을 전공하면서 "취업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경영학을 부전공으로 택한 YLC 회원인 D(25) 군은 "동아리에서 자유시장경제에 대해 주로 배우는데 이공계에서는 배울 수 없는 내용"이라면서 "합리적 사상들을 접할 수 있어서 좋다"고 밝혔다.
 
  또 다른 YLC 회원인 E(23) 양은 "(전공) 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고 인맥도 쌓을 수 있어서 선택하게 됐다"고 말했다.
 
  취미, 개인적 관심사 등을 이유로 동아리를 선택하던 선배 세대들과는 확연히 다른 '동기'들이다.
 
  이들은 이같은 연합 동아리 외에도 경력을 쌓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A 양은 워싱턴 견학 준비도 하고, 언론고시팀에서 공부도 하고, 학교의 리더십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고 있고, E 양도 '경영 컨설팅'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었다.
 
  "미래를 고민하는 학생 입장에선 사회가 뻔히 보여"
 
  YLC 전 회원이면서 한나라당 정책 제안 활동을 하기도 했던 F(23) 양은 "미래를 고민하는 학생 입장에서는 사회가 뻔히 보인다"고 말했다. 자신이 아무리 열심히 활동을 해도 '출발선'부터 다른 이들을 따라 잡을 수 없는 '현실'이 뻔히 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조기유학 등 갔다온 사람들 보면 별로 아둥바둥 사는 것 같지 않는데 왜 한국 학생들은 그렇게 열심히 살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A 양도 "사법시험 붙은 이들 중 20% 이상이 외국어고와 강남8학군 출신이라고 들었다"고 맞장구를 쳤다. 학력 제한이 없다는 이유로 가장 확실한 신분 상승의 통로로 여겨졌던 각종 고시의 합격생도 이제 대한민국 인구의 1%가 조금 넘는 강남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지적. '개천에서 용 난다'는 것은 이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됐다.
 
  그래서 이들이 바람직한 사회에 대해 "능력있는 사람이 노력한만큼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사회"라고 대답하는 것은 이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의 변화를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는 측면도 있다. 대다수의 대학생들이 살아남기 위해선 아둥바둥해야 하는 '경쟁적 현실'에 '바람막이' 하나 없이 내팽겨쳐진 상태다. '대학'이란 간판이 어느 정도 이상의 직장으로 가는 디딤돌 역할을 하던 시대는 이미 끝난 지 오래다.
 
  양극화 현상이 기업들간에도 뚜렷이 나타나 임금, 직원 복지, 고용 안정성 등의 측면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차이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 또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차이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차이 이상이다. 따라서 공무원이나 공기업이나 대기업 정규직이 되기 위해선 남들보다 하루라도 빨리 '취업 준비 모드'로 일상 생활을 전환해야 한다. 소위 대학 본연의 '진리 탐구'나 추구하고 있다간 '비정규직'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십상이다.
 
  더군다나 이같은 '취업시장'에서 경쟁이 반드시 공정한 것도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인맥'과 '빽'으로 안되는 게 드물다는 것, 또 강남 출신 등은 상류층은 이미 동원할 수 있는 많은 자원을 갖고 있어 경쟁에서 선두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계급의 대물림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능력에 따른 공정한 대가"의 의미는 이런 현실 속에서 해석돼야 한다.
 
  이들도 '현실의 변화'를 꿈꾼다
 
  하지만 이들이 '한줄 세우기'가 익숙한 현재의 한국사회의 질서를 긍정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A 양은 "지금 한국사회는 일을 선택할 때 재미와 자부심보다 안정성, 수입, 명예를 고려한다. 외국의 어떤 놀이터 수리공의 사례를 봤는데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참 대단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명함을 내밀 때도 삼성과 중소기업의 느낌 자체가 다르다. 이런 인식의 재배열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D군은 "인종, 종교, 국가를 떠나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회"라고 말했고, 또 다른 YLC회원은 G(24) 군은 "누구든지 희망을 가질 수 있고 희망을 좇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는 사회"를 원했다.
 
  이들은 부와 명예라는 단 하나의 잣대를 강요하는 현실을 넘어서서, 인종ㆍ성별ㆍ종교 등 차이를 '차별'이 아니라 그야말로 차이로 인정하는 사회, 가정 형편 등 현실을 떠나 누구든지 미래에 대한 꿈을 품을 수 있는 사회 등을 내다보며 현 사회체제와 인식의 변화를 갈망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처한 현실에 무섭게 적응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들이 '보수화'됐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들 역시 과거의 여느 세대와 마찬가지로 사회 변화를 꿈꾸고 있었다. 이들이 꿈꾸는 변화가 얼마나 현실화될 수 있느냐는 것은 비단 이들만의 몫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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