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612/h2006122517053985140.htm

[가상 인터뷰] <42·끝> 수전 손택
"사상의 자유를 위해 행동하라"
경영진이 입맛대로 기업 기사 빼고 기자 징계 '시사저널' 사태에 쉬쉬
편집권 독립 지켜야 할 언론사들도 소극적 보도, 침묵의 카르텔이라니…


미국의 에세이스트, 소설가, 액티비스트, 문화비평가. 에세이집으로는 <해석에 반대한다>(1966) <사진에 관하여>(1977) 등이 있고, 소설로는 <미국에서>(1999) 등이 있다. 친아버지는 중국에서 모피상을 했었는데 손택이 다섯 살 때 죽었다. 손택의 원래 성은 로젠블라트(Rosenblatt)였고, 손택이란 이름은 법적으로 자신을 입양하지는 않은 의붓아버지의 성을 딴 것이다. 대학 생활의 출발은 버클리대학이었고, 시카고대학으로 옮겨 가서 문학비평가 케네스 버크와 보수주의 정치학자 레오 쉬트라우스 등에게서 배우며 석사를 마친 뒤, 하바드대학, 옥스퍼드대학, 소르본느대학 등에서 문학과 철학 등을 공부했다.

17살 때, 열 살 연상의 대학 선생과 만난 지 열 며칠 만에 결혼을 해서 아들을 하나 두었으며, 8년 뒤에는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남편과 이혼하고 그 때부터 아들을 홀로 키웠다. 1963년부터 서평 등을 쓰기 시작한 손택이 최초로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게이 감수성에 관한 에세이인 <캠프(camp)에 관하여>(1964)였다. 나중에 이 글은 정치적 관점을 강조하는 동성애 진영, 즉 ‘퀴어(queer) 정치학’쪽으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지만, 당시에는 대중문화와 관련해서 대안적 감수성과 상상력을 모색하고 제시하는 선구적이고 충격적인 글이었다.

손택은 발터 벤야민, 롤랑 바르트 등 20세기 유럽의 대표적인 지식인들과 이오네스크, 아르토, 브레송, 고다르 등 유럽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을 1960년대의 뉴욕 지식인 사회 및 문화예술계에, 그리고 결과적으로 미국에 열정적으로 소개했다. 1967년 <파르티잔 리뷰>에 쓴 글에서 “백인종은 인류 역사의 암이다”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해서 물의를 일으켰고 나중에 가서 자신의 발언이 암 환자들의 고통을 무시한 것이라는 점을 들어 사과를 하기도 했다.

1968년에는 베트남전 반대 행동을 위해 하노이를 방문하기도 했고 1993년에는 내전 중에 포위된 사라예보에 대한 전세계의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사라예보에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한 바 있다. 2001년 9ㆍ11 사태가 터진 직후 발표한 글에서 손택은 당시 미국 주류의 정치적 견해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그렇지만, 미국은 강하다” “모든 게 잘 되어 가고 있다”고 허풍을 떨던 부시를 ‘로봇과 같은 대통령’이라고 지칭하며 대놓고 반박함으로써 또 다시 충격을 준 바 있다.

손택의 사인은 백혈병으로 인한 합병증이었는데 이 백혈병은 30대 중반에 생긴 유방암과 60대에 생긴 자궁암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었다. 에세이 <은유로서의 질병>(1978)과 <타인의 고통에 관하여>(2003)는 바로 자신의 병 체험에 바탕을 두고 저술된 것들이다. 죽기 몇 년 전 영국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손택은 자신이 양성애자임을 밝혔는데, 평생 “실제로 아홉 번, 다섯 명의 여자와 네 명의 남자”와 사랑을 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손택의 좌우명은 “늙은이처럼 행동하지 마라, 바로 그 순간부터 늙기 시작한다” “우정이란 다른 사람들 안에서 기뻐하기 위한 욕망이다” “작가라면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당신을 당신 안에 가두지 마라” “변화는 나의 장기이다” 등이다.

이재현(이하 현) 선생님, 무덤 안은 어떠세요? 죽으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변신할 수 있나요?

수전 손택(이하 수전) 그냥, 수전이라고 불러, 동업자끼린데 뭘. 죽어서 좋은 점은 다른 사람들이 내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거야.

현 선생님은 평소에 “난 시골에서 살지 못한다, 도시가 좋다”고 말씀하신 전형적인 뉴요커인데다 워낙 명망가이셨으니까 다른 뉴요커들이 커피숍이나 술집에서 선생님의 사생활을 가십 거리로 삼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먼저 가장 궁금한 건데요, 성을 왜 스스로 바꾸셨지요?

수전 ‘장미꽃잎(Rosenblatt)’이란 말이 간지러워서 그랬어. 손택이란 이름이 더 단순한 게 맘에 들었지. 내 의붓아버지는 장교 출신의 참전 영웅이었지만 사춘기의 내가 보기에 지적으로는 정말 바보 같았거든.

현 독일어의 일요일(Sonntag)은 n이 두 개인데요. 손택이란 이름과는 어떤 관계인가요?

수전 난 그런 데 관심 없어. 이번 기회에 분명히 말하건대, 한국 페미니스트들 중에는 아버지 성과 어머니 성을 둘 다 붙여쓰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어. 하지만 그건 머저리같은 짓이야. 정확히 따지자면, 어머니 성이 아니라 외할아버지 성이잖아. 페미니스트가 그렇게 의식이 없어서 뭐가 되겠니? 차라리 성, 그러니까 ‘아버지의 이름’을 없애자고 해야지.

현 역시, 선생님은 거침이 없으시군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답니다. 한국의 지적, 문화적 분위기는 미국으로 치자면, 소설가 잭 케루액이라든가 시인 윌리엄 버로우즈 등과 같은 비트 제너레이션이 활약하던 때인 1950년대 수준도 될까말까지요. 아직, 정치적, 문화적 검열에 관한 문제라든가 드럭(drugㆍ마약) 문제에 관한 지식인과 문화예술인들의 인식이 아직 형편없어요. 다들 앵무새처럼 말할 뿐이지요.

수전 미국이라고 해서 크게 다른 건 아니야. 다만 나에 대해서는 미국의 주류 사회가 속으로 ‘저 년은 원래 저런 년이지’라고 생각하면서 약간 봐준 정도일 뿐이지. 또 내가 뉴욕 토박이가 아니었더라면, 9ㆍ11 이후 미국의 파쇼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대외 군사정책에 대한 나의 비판적인 목소리는 실제 내가 당했던 것보다도 아주 더 심한 박해와 핍박을 받았을 거야.

현 선생님에 대한 평가 중에 일찍부터 ‘아마도 미국에서 가장 지적인 여성’이라는 표현이 있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수전 나는 그게 일종의 욕이라고 생각해. ‘아마도’란 말도 그렇고 ‘여성’이란 말도 그렇고 말이야. 그 말에는 여성이란 본디 지적이지 못하다는 전제가 들어 있는 것이고, ‘아마도’란 여성이라는 존재는 기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 들어 있잖아?

현 으음, 듣고 보니 그렇군요. 선생님은 1960년대부터 사회적, 정치적 이슈와 관련해서 쭈욱 계속해서 나름대로 직접 행동을 취해 오셨습니다. 1980년대의 한국에는 일본어 한자말에서 빌어온 ‘활동가’란 말이 쓰이곤 했습니다. 지금 그 활동가들 중 일부는 죽고, 일부는 먹고살면서 애 키우느라 바쁘고, 일부는 국회의원이 되고, 또 일부는 아직도 사회운동 및 시민운동을 하고 있습니다만. 미국의 양심을 대표하는 ‘액티비스트’로서 선생님께서는 한국의 엑스(ex)-활동가들의 현재 모습은 어떻게 평가하고 계시는지요?

수전 야, 그런 걸 왜 내게 묻냐? 너희 일은 너희가 가장 잘 아는 거지. 세상이 바뀌면 바뀌는 만큼 변화를 해나가되, 최초의 그 곧고 아름다운 마음가짐과 ‘합리적 핵심’에 해당하는 관점을 지켜나가면 되는 거잖아.

현 물론이지요. 하지만, 자기 일에 파묻혀 살다보면 자신이 지금 어느 위치에 있는가를 놓치는 경우가 왕왕 있거든요. 또 한 해가 저무는데 세상이 더 나아진 것 같지도 않고요. 그래서 그런 거지요.

수전 그렇다면 한 수 가르쳐 주지. 가령 언론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는 <시사저널> 사태 해결에 나서는거야.

현 앗. 선생님, 어떻게 그 문제를 알고 계신가요?

수전 바로 위에서 네가 날 소개하면서 “작가라면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하지 않았니? 사장이 사전에 편집국 구성원들과 아무런 얘기나 논의 없이 기자가 쓴 글을 윤전기에서 인쇄되고 있는 상황에서 제멋대로 빼버린다는 게 말이 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잡지를 만들어 온 기자들이 참 대견스러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참 안쓰럽다.

현 네. 문제는 다른 일간지들이 이 중대한 사태에 관해 제대로 보도를 하고 있지 않아서 국민 대다수가 사정을 모른다는 겁니다. 일종의 굳건한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게지요. 사태는 정말 심각합니다. 소위 ‘편집권 독립’이라는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겠습니다만, 경영주가 제멋대로 기자의 글을 삭제하는 것은 일제 시대에도 없었던 일입니다.

수전 말로 안 되는 경우에 쓰라고 화염병이 있는 거야.

현 켁. 선생님,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수전 그러니까, 내 말은 연말에 망년회 대신‘몰로토프 칵테일’파티를 하라는 얘기야. 너희 한국에 활동가가 그렇게 많았다면서.

현 네에~(푸훗). 아무튼 선생님, 한국과 한국의 언론 상황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고맙습니다. 어찌 보면 매우 창피한 일입니다만, 사람들 만날 때마다 이런 사실을 널리 알려주세요. 그리고, 대충 50년쯤 뒤에 선생님 계시는 나라로 저도 살러 가겠습니다. 그럼, 다시 뵐 그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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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논문계획서 통과했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논문연구계획서>
1980년대 청년지식인들의 하위문화
- 억압된 문화실천의 생산과 수용을 중심으로



바람구두


“괴물과 싸우는 자는 자신이 그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면 그 심연 또한 너를 들여다보게 된다.” - F. 니체, 『선악의 저편』 중에서

연구문제를 선정하게 된 사회 ․ 문화적 배경과 의의

책의 운명 : 역사의 변동기에 태어난 한 권의 책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어떤 운명을 겪는가?

『해방전후사의 인식』 초판이 발간된 것은 1979년 10월 15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란 우리에게 무엇이었던가. 사람들은 모두 바쁘게 움직였고 우리들 독자들에게도 독서가 한가로움일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바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에 관한 이야기들이 줄을 이었고, 1980년 3월 20일에는 이미 제3판이 발행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비교적 이 책을 늦게 만나본 셈이었는데, 내가 갖고 있는 책을 확인해보니 이 ‘2판’이었다. 그 판수가 어떻든 열심히 읽었다. 밑줄을 그어둔 부분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무엇보다도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들이 아닌 것 같았다. 연일 계속되는 토론이 캠퍼스를 매우고 있을 때, 이 이야기들은 그저 책 속에 누워 있지만은 않았던 기억이 새롭다. 대학원 주최의 한 심야 토론회는 바로 그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기도 했다. - 김광식(1986), 「살아움직이는 책들」, 『우리시대 출판운동과 오늘의 사상신서』, 100~101쪽

책의 구상이 구체화된 것은 2004년 초가을이었다. 그 무렵 반민특위의 역사를 읽은 젊은 사람들이 “가슴속에 불이 나거나 피가 거꾸로 도는 경험을 다 한 번씩 한다”며 “그 시대를 거꾸로 살아온 사람들이 득세하는 역사”를 비판한 노무현 대통령의 언급을 접했다. 대통령은 이미 우리 현대사를 기회주의가 득세하고 정의가 패배했다는 식으로 평가한 바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정치권에서는 과거사 청산을 위한 여러 법안이 구체화되고 있었는데, 우리 사회의 역사 인식을 이대로 두고 본다는 것은 역사학자의 ‘직무유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몇몇 지인들에게 뜻을 물었고 세 분이 기꺼이 동참함으로써 편집진이 구성되었다.
우리는 정책결정권자들이 그런 역사 인식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1979년에 출간되기 시작해 현대사 인식에 큰 영향을 끼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하 『인식』)이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 박지향, 김철, 김일영, 이영훈 엮음(2006), 『해방전후사의 재인식1』, 11~12쪽


얼마 전 『해방전후사의 재인식』(2006)이 출간되면서 1980년대 민주화운동 세대의 의식세계를 규정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 한 권의 책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70년대 박정희 정권까지 우리 역사는 반공 이데올로기 중심의 우편향적인 시각에서 서술되어왔다. 1979년 첫 권이 출간된 『해방 전후사의 인식』(전6권)은 1980년대 민주화투쟁 시기를 대변하는 책으로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시각을 민중사관 중심으로 획기적으로 전환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80년대 민주화 투쟁의 지적 기원을 이룬 책으로 평가받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1987년 6월 항쟁 20년이 다가오는 시점인 오늘날 다른 한 측면에서는 민족주의, 좌편향적인 역사서술이라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김광식(1986)이 『해방전후사의 인식』라는 한 권의 책에 대해 20년 전에 던진 질문, “역사의 변동기에 태어난 한 권의 책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어떤 운명을 겪는가”라는 물음은 20년 세월을 거슬러 2006년 오늘 우리에게 되돌아온 질문이 되었다.

미셸 드 세로토는 “신문이든 프루스트(Marcel Proust)든 텍스트는 독자를 통해서만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라는 한 권의 텍스트가 지닌 의미 역시 독자를 통해서 생성된 것이다. 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책 읽기’라는 특정한 문화실천 행위는 특정한 시공간과 문화적 태도에 따라 변화한다.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은 의미가 생산되고 메시지가 기호화되는 의미 구조와 수용자에 의해 해독되는 의미 구조가 결코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고 전제한다. 홀의 지적은 텍스트를 생산하는 자로서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부분이다. 텍스트를 생산하는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과 맥락에 따라 의미를 형성하고 그것을 구성하지만,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놓여 있는 각각의 맥락과 환경 안에서 해당 텍스트를 해석한다. 텍스트란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수용자가 그 자신의 해석을 통해 의미를 재구성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텍스트의 의미는 생산자의 의미가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방식의 수용 과정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의미는 텍스트를 둘러싼 관계들 간의 투쟁과 타협의 소산이며 주체는 담론의 투쟁을 통해 형성된다.

청년문화 : 1980년대 청년지식인들의 하위문화
본 연구에서 주로 다루고자 하는 1980년대의 청년지식인들은 이른바 민주화세대로, 일반적으로 1987년 6월 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대학생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연구자에 따라 1970년대 유신독재시대에 청년기를 보낸 이들이 함께 포함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1980년대 대학 시절을 보낸 이들을 지칭한다. 1987년 6월 항쟁과 그 이후 벌어진 일련의 과정들은 대한민국 사회를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급격히 변화시켰다. 분단 이후 한국전쟁을 통해 형성된 50년 체제, 5.16 군사쿠데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사회 각 부문에서 형성되었던 권위주의 개발독재 체제는 반공이데올로기를 통치 기반으로 삼았다. 1980년대는 우리 사회에서 사회주의가 복권되는 중요한 반전을 가져왔고, 이후 권위주의 체제는 급격히 해체(최근엔 87년 6월 항쟁 이후 형성된 현재의 체제를 87년 체제, 87년 혁명이라 규정)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청년지식인들의 하위문화가 지닌 가장 큰 특징은 주류문화, 지배문화(지배적인 가치와 윤리)가 이단시하고, 검열의 대상으로 삼았던 좌파적 이데올로기들을 하위문화의 원천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1980년대 청년문화가 지배문화를 거부한 것은 그 내부의 능동적인 요인으로 인한 것이다.

문화연구가 국내에 소개되면서 등장한 하위문화의 개념이 주요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시대적으로 주로 90년대 이후 현재까지이다. 대체로 1980년대 하위문화로서의 청년문화는 역사학적 관점에서 혹은 정치학, 사회학의 영역에서 주로 논의되어 왔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본격적인 하위문화의 등장은 통기타와 청바지로 대변되는 197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한국사회에서의 하위문화는 그 개념을 산출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사회의 그것과는 다소 다른 것이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산업화와 근대화가 촉발한 사회변동이 노동계급의 생활 터전을 위협하고, 부모 세대가 오랫동안 유지해왔던 가치관이 붕괴되면서 출현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980년대 한국사회 청년지식인의 하위문화는 권위주의 체제 아래 급속한 산업화와 근대화 과정에서 초래된 체제억압적인 정치질서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출현했다. 1980년대 청년지식인들은 부모세대들이 간직했던 전통(지배)문화의 정체성 - 반공이데올로기, 독재체제에 대한 의식 ․ 무의식적 복종과 합의, 억압적 국가기구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 - 과 충돌했다. 청년지식인들은 억압적인 체제에 대해 불만과 공포, 정치적 자유,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담은 새로운 청년문화를 만들어냈고, 1980년대의 청년문화는 다른 시대와 구분되는 하위문화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문화란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이고,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는 곧 정치적 행위가 된다. 어느 사회에서나 문화정책은 사회체제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사회의 통합을 추구한다. 80년 광주를 제물로 삼은 5공 정권은 정치적 정당성의 취약함을 보완하기 위해 문화를 하나의 정치적 수단으로 육성과 통제를 주요 문화정책으로 삼았다. 1970년대에 이르러 한국의 교육은 ‘국적 있는 교육’, ‘주체적 민족사관 정립’을 명분으로 국사교육을 강화했고, 이에 따라 모든 한국사교과서가 검인정에서 국정으로 바뀌었으며, 국민윤리교육도 강화되었다. 국사와 국민윤리는 모든 공무원 시험에서 필수 과목이 되었으며 대학에서 군사교육이 강화되었다. 이렇듯 국가주의와 획일적 교육, 반공 이데올로기가 주입되던 시기에 민중지향적인 진보적 사상과 학문 역시 상당한 수준으로 제시되었다. 이 시기에는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 등이 창간되었고, 김지하의 담시와 희곡들이 발표되었다. 1970년대에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 텔레비전의 보급은 1975년에는 180만대, 1980년대에는 690만대에 이르러 100가구당86.7가구가 TV를 소유하는 등, 산업화와 도시화의 결과로 대중사회가 도래했으나 대중문화 자체는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말할 수 있는 권력을 요구하는 자발적인 세력의 등장, 진보적, 민중지향적인 사상과 학문들을 담은 텍스트들의 등장은 실제 대중의 삶과 의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1980년대의 청년문화는 다른 하위문화 일반과 마찬가지로 부모문화와 지배문화라는 두 가지의 문화형태들에 대한 반발을 통해 생성되었다. 유교적 가부장제 질서가 온존해있는 봉건적인 부모문화와 자본주의적인 권위주의 억압체제였던 지배문화는 한국 사회에서 지배적 가치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같은 지배적 문화의 위치에 있었지만 그것의 형태는 동일하지 않은 것이었다. 하위문화로서의 1980년대 청년문화는 전통적으로 유지되어 온 부모문화의 윤리의식과 규범 등 봉건적인 부모문화, 정치적 ․ 경제적 착취와 문화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억압적인 지배문화에 대해 이중의 투쟁을 벌였다. 이들은 부모세대가 내면화시켰던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의 검열과 지배문화의 공식적인 지식을 무력화하는 일상적 문화실천을 통해 지배체제의 문화재생산에 저항했다. 1980년대 청년지식인들의 이러한 거부행위는 그들만의 세대의식(generational consciousness)과 계급의식(class consciousness) - 레이몬드 윌리엄스의 용어를 빌자면 ‘감정구조(structure of feeling)’ - 을 동시에 드러내는 것이었다.

수용자 연구 : 억압된 지식(문화)의 생산과 수용과정은 1980년대 청년지식인들의 세대의식(generational consciousness)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 1980년대를 살아낸 청년지식인의 하위문화는 어떻게 다른 의미구조를 체현했는가?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 기형도, 「대학시절」<全文>

1980년대 대학시절을 보내며 서울의 우울을 노래했던 시인 기형도는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고 읊었다. 1980년대 대학의 풍경은 “플라톤과 총성, 감옥과 군대, 시를 쓰던 후배와 기관원”으로 상징되었고, 시인은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비록 시인 기형도는 1980년대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1989년 세상을 떠났지만 그와 같은 1980년대 세대들은 대학을 떠나 오늘날 우리 사회의 주류로 성장했다. 그러나 오늘날 과거 1980년대 청년지식인들이 피땀으로 싸워 얻어낸 공동체의 문화적 기억들, 자유와 민주, 평등과 다원성의 원칙들은 우리 사회의 지배문화로 성장하지 못했고, 그들이 저항했던 부모문화의 역공은 물론 같은 1980년대 세대 내부에서도, 그들이 만들어낸 문화의 혜택을 받는 1990년대, 2000년대 청년들에게 환멸과 희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의 사회학자 해럴드 가핀켈(Harold Garfinkel)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나누는 사소한(비논리적인) 대화와 행위에도 대화당사자들 사이에는 복잡한 공유 지식을 대화 과정에 투사하는 것을 전제한다고 말한다. 즉 우리가 버릇처럼 반복하는 일상의 수많은 행위들이 실제로는 현실에 대한 동일한 기본 가정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가핀켈(Garfinkel)은 사람들이 일상의 현실에 대해 이와 같이 동일한 기본 가정을 공유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실험했다. 그는 실험자인 대학생들에게 친숙한 존재들인 친구와 가족을 만났을 때, 처음 만난 사람처럼 행동하라고 요구했다. 실험자들은 가족과 친구들을 처음 만난 낯선 사람처럼 행동했고, 가족과 친구들은 이들에 대해 자제력을 잃고, 흥분하여 화를 냈다. 평소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상적인 대화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호명(interpellation)’에 응답하는 순간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모든 문화실천은 이와 같은 일상적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며, 한 개인의 인격(personality)이란 이와 같은 일상적 문화실천 과정의 축적물이다.

우리들이 느끼는 일상의 현실이란 세계 혹은 세계관을 타인과 공유함으로 형성된다. 이 말은 우리의 ‘문화적 기억’이 우리의 현실을 만들어주고, 그 기억을 통해서만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와 같은 공동체의 문화적 기억을 상실하거나 그로부터 소외된다면 민족이산(diaspora)의 이방인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한 사회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인류 공동체의 문화적 기억, 문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통의 기억과 감정구조를 습득하게 만드는 수단이자 도구이다. 디아스포라가 혈연적 민족구성원의 이질화를 초래한다면, 각각의 세대가 지배문화에 대한 저항과 타협으로 구성해내는 문화실천(책읽기)은 세대 간 세계인식의 두드러진 차이를 만들어낸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고민하고 있다. 권위주의 독재체제를 극복하고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 이르는 문민통치의 새로운 전통을 써내려가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세대간 문화충돌이라 부를 만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라크 파병 문제를 비롯해 국내외 수많은 현안들을 놓고 첨예한 논쟁과 사회적 갈등이 빈발하고 있다. 그와 같은 수많은 사례들 가운데 하나가 국가보안법 폐지논쟁이라 할 수 있다. 대통령이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에 보내겠다 말하자 1,500여명에 이르는, 이른바 국가원로들이 나서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시국 선언문”을 발표했다. 문제는 지금까지 이들 세대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나 이들 발언의 정치적 동인에 대한 분석, 이들의 전력에 대한 역사적 분석은 있었으나 이들이 과연 어떤 문화적 토대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분석은 물론, 이들이 규탄해 마지않는 1980년대 청년지식인 세대의 하위문화에 대한 문화분석 역시 아직까지 많이 부족한 상태이다. 어째서 한쪽에서는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보내야 할 악법으로 기억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국가원로를 자임하는 이들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국가의 중차대한 위기로 의식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이들이 책을 통해 습득한 지식, 문화실천의 차이에서 비롯된 세대간 문화의 차이, 감정구조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사회는 지난 1970년대 이후 1990년대에 이르는 시기동안 경제성장은 물론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양적, 질적 비약을 거듭해왔다. 20세기 후반 40년 동안 한국은 흔히 이중혁명으로 불리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두 관문을 통과하는데 성공했다. 한국 사회만의 독특한 개성이랄 수 있는 이중혁명은 수많은 고통과 희생의 대가로 얻어진 한국사회의 결실이며 세계적인 주목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형 이중혁명은 빛과 함께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197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는 시기는 한국 모더니티 형성의 역사적 전환점을 이루는 기본 틀이 짜인 시대로서 이 시대를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방식과 ‘동아시아의 기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의 상호 대질 작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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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들 통과하는 거니까. 대단한 건 아니지만, 대략 2주 정도 나름대로 발목을 잡고 고민하게 한 결과물입니다. 연구계획서만 원고지로 150매 가량 되는데 윗글은 문제제기의 사회문화적 배경 부분만 올린 것입니다.

* 혹시라도 제 논문을 위해 인터뷰에 응해주실 분들은 비밀글 남겨주시면 감사하게 만나뵙도록 하겠습니다.(아니면 제가 색출하겠습니다. 특히, 알라딘 서재의 1980년대 학번 여러분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이 말은 꼭 80년대 학번이 아니더라도 무방하다는 말씀입니다. 비밀글에 실명과 이메일, 연락처 남겨주시면 되겠습니다.)

* 협조해주신 분들의 신상은 원하신다면 비공개로 할 것이며, 논문이 완성되는 대로 한 부씩 우송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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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그리스도에서 레닌까지

'아감벤과 사도 바울'에 이어지는 페이퍼이다. 내친 김에 지젝의 바울론에 대해서 정리해두고자 한다. 그래봐야 두 개의 문단, 각각 <믿음에 대하여>(동문선, 2003)과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의 한 문단을 읽어보려는 것뿐이다(두 책은 비슷한 시기에 출간됐다). 대신에 국역본의 부정확한 대목들을 교정해두도록 한다. '그리스도에서 레닌까지'란 제목은 <믿음에 대하여>의 서문에서 따온 것이다.

 

 

 

 

먼저, <믿음에 대하여>의 8-9쪽. 조금 이전에 7쪽에서 밝히고 있는 이 책의 전제. "이 책의 기본 전제는 비록 그 전제가 잔인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만약 누군가가 자유-민주주의적 지배권을 포기하고 믿을 만한 급진적 지위를 주창하려 한다면 그것이 담고 있는 유물론적 해석을 승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문은 이렇다: "The basic premise of this book is that, cruel as this position may sound, if one is to break the liberal-democratic hegemony and resuscitate an authentic radical position, one has to endorse its materialist version. IS there such a version?"(이후에 원문 대조는 생략하거나 부분적으로만 하도록 한다.)

번역문은 포기할 만한 내용인데, 누락된 마지막 문장을 포함하여 다시 옮기면, "이 책의 기본전제는, 비록 이 입장이 잔인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자유민주주의의 헤게모니를 분쇄하고 진정으로 급진적인 입장을 부활시키고자 한다면 그 유물론적 버전을 승인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버전이 과연 존재하는가?" 정도이다.

진정 급진적인 정치적 입장이란 "정치를 일련의 실용주의적 개입이 아니라 (대문자)진리의 정치(politics of Truth)를 주장하는 입장이다. 오늘날 이러한 입장은 '전체주의적'이란 이유로 기각된다. "오늘날 이러한 장애로부터 탈출하여 진실의 정치를 표방하는 입장은 레닌으로의 복귀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다시 옮기면, "이러한 교착상태에서의 탈출, 곧 진리의 정치에 대한 재단언은 레닌으로의 회귀라는 형식을 취해야만 한다." 

레닌으로의 회귀는 <혁명이 다가온다>의 핵심적인 메시지이기도 한데, <믿음에 대하여> 또한 동일한 반문에 답하면서 주장을 전개한다. "왜 단순히 마르크스가 아닌 레닌인가? '제대로 된 복귀라면 원래 진영으로으 복귀여야 하지 않는가?' 오늘날 '마르크스로의 복귀'는 이미 학술권에서 별다른 관심사가 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마르크스를 고려하고 있는가? 한편으로 포스트모던 소피스트들의 마르크스, 메시아적 약속의 마르크스, 다른 한편으로 현대 세계화의 역동성을 예견하고 월스트리트 거리에서조차 회자되는 마르크스이다."

역시나 마지막 문장에 누락된 단어들이 있는데 이를 포함해서 다시 옮기면: "왜 그냥 마르크스가 아니고 레닌인가? 오늘날 '마르크스로의 회귀'는 이미 학계에서 나름대로 유행이다. 이 너나없는 회귀들에서 우리는 어떤 마르크스를 갖게 되었나? 한쪽에는 문화연구의 마르크스, 포스트모던 소피스트들의 마르크스, 메시아적 약속의 마르크스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오늘날 세계화의 동학을 예견한 마르크스, 월스트리트에서조차 그러한 인물로 환기되는 마르크스가 있다."

"이들 마르크스들이 지닌 공통점은 정치 본령의 거부이며, 레닌에 의거하게 되면 이 두 가지 함정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원문은 "What both these Marxes have in common is the denial of politics proper; the reference to Lenin enables us to avoid these two pitfalls." 다시 옮기면, "이 두 가지 계열의 마르크스들이 갖는 공통점은 정치다운 정치에 대한 거부이다. 레닌으로의 회귀는 이 두 함정들을 피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후의 지적들은 <혁명이 다가온다>의 주장들을 예견하게 해준다.

먼저, 지젝은 레닌의 개입이 갖는 두 가지 특징을 지적한다. 그 하나는 레닌의 외부성이고, 다른 하나는 폭력적인 전치이다. 차례대로 살펴본다.

(1) "첫째로 마르크스와 관련해 볼 때 레닌의 외부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니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친정집단'에 속하지 않았고, 마르크스나 엥겔스를 전혀 만난 적이 없다. 더욱이 그는 '유럽문명'의 동부 경계지역 출신이었다. 오로지 이 같은 외부적 위치에서만이 그 이론의 본래적 충동을 살려내는 것이 가능하다." '친정집단'은 'inner circle'의 번역이다. '동부 경계지역'이란 물론 러시아를 가리키는데, 러시아 내에서도 레닌은 타타르 출신이라고 해서 권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반복하자면, 이러한 외부성, 외부적 위치에서만 이론의 충격을 되살려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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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빅토르 세르주의 반체제 맑스주의

얼마 안되지만 모아놓은 마일리지는 장하준 교수의 <국가의 역할>을 주문하려다가 눈에 띄어 엉뚱하게 주문한 책이 수잔 와이스만의 <빅토르 세르주 평전>(실천문학사, 2006)이다. '역사인물찾기' 시리즈의 한권으로 나온 책인데, 700쪽이 넘는 두툼한 책으로까지 출간됐지만 사실 빅토르 세르주(1890-1947)란 인물에 대해서 사전에 입력된 정보는 거의 없다. 러시아사가 전공인 역자의 이름에 눈에 띄길래 '전공관련'인가 싶어서 유심히 읽어보니 어디선가 지나가면서 접해보았을 법한 '비운의 혁명가'이다. 소개에 따르면, "소설가이자 역사가, 한때 아나키스트였던 볼셰비키 당원, 이단아, 좌익반대파의 일원"으로서 "소련사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존재이다." 분명 마지막 멘트는 과장된 것이겠지만 아무튼 흥미를 끄는 것만은 사실이다.

 

찾아보니까 세르주 자신이 쓴 <회고록>도 유명한데, 이번에 그보다 먼저 출간된 것은 수잔 와이스만 교수의 책 'Victor Serge: The Course Is Set on Hope'(Verso, 2001)이다. "2500여 장에 이르는 원고와 1200여 개의 주석을 통해 러시아 혁명의 변질이라는 ‘20세기 변혁운동 최대의 비극’을 빅토르 세르주의 민감한 지성이 언제, 어떻게 감지했는지 그리고 그 비극을 막아보고자 그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상세히 밝혔다."

'20세기 서구 신좌파의 스승'으로 평가받는(다는) 한 인텔리겐치아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서는 재작년에 박노자 교수가 칼럼에서 다룬 바 있어서 옮겨놓는다. 유익한 참고자료이다.

 한겨레21(04. 02. 11) 실패한 혁명가’를 읽는다

1980년대의 혁명적인 열성이 ‘아득한 옛날’로 느껴지던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독서계에서는 ‘혁명가 평전’이라는 장르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체 게바라나 호치민, 마오쩌둥, 그리고 박열이나 여운형에 대한 ‘편안히 살게 된 세대’의 새로운 관심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제는 경험해보지 못할 듯한 기존 틀들의 전면적인 부정과 신세계 창조의 ‘이질적인 체험’의 매력에 끌린 것인가? 아니면 ‘임금의 목을 쳐보지도 못한’ 채, 기존의 지배층의 권력들을 계속 인정해 지금도 친일파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혁명의 부재’에 대한 참회인가?

물론 혁명과 우리가 멀었고 지금은 더욱 멀어졌다는 사실이 역으로 ‘혁명가 평전’들을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렸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원인은, 자본주의적 질서의 기본 틀에 대한 새로운 세대의 누적된 회의가 간접적으로 표출된 것이 아닌가 한다. 자본주의적 세계화라는 점점 심해지는 광풍에 대한 반항과 해결법 모색의 에너지가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혁명가 평전’의 열풍에 대해 한 가지 생각해볼 점이 있다. 우리에게 가장 유의미한 존재로 다가온 외국의 혁명가인 티토나 레닌, 체 게바라, 호치민, 마오쩌둥 등이 다 결과적으로 새 국가 건설에 ‘성공’한 ‘혁명형 건국 군주’가 아닌가? 체 게바라 같은 경우는 예외라 볼 수 있지만 그에게도 사회주의적 국가 쿠바의 건설이라는 ‘후광’이 있었다. 역사 인물의 위치나 중요성을 생각할 때 꼭 ‘성패’라는 자본주의적 기준을 적용하려는 우리의 순치된 무의식을 문제 삼으려는 것이다.

혁명가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우리를 옥죄고 있는 권력 관계와 ‘낙오자 되기’의 공포, 체제에의 안주 등의 포기, 반란의 행위 그 자체가 아닌가? 반란의 결과가 고생 끝의 죽음뿐이더라도 그 해방적인 순간, 체제의 모든 것을 내던져버리는 그 순간에 얻어지는 ‘참나’ 실존의 체험이 아닌가? 혁명의 진정한 의미는 ‘건국의 성공’보다는 체제의 부속품이 아닌 온전한 인간으로서 ‘나’를 실천해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세속인이 보기에는 ‘실패’한 혁명가라 하더라도 그가 지은 ‘해방적인 체험’이 담긴 시나 소설들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카타르시스를 일으키는 것이다. 삶에서 ‘실패’해도 작품으로 보통사람이 생각하기 어려운 경지에 오른 20세기의 탁월한 ‘세계주의적 혁명가’를 꼽자면,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후 1960년대 후반 이후에 서구 신좌파들의 스승이 된 빅토르 세르주(1890~1947)라는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를 들 수 있다.

우리가 인물을 소개할 때 그 이름 앞에 그가 출생했거나 거주했던 나라 이름을 하나씩 붙이곤 한다. 그러나 궁리를 거듭해도 그의 이름 앞에 붙일 만한 적합한 국명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의 아버지는 장교의 지위를 버리고 혁명에 몰두했다가 결국 망명을 결행해 벨기에에 정착한 러시아인이고 그의 어머니는 폴란드 귀족 가문 출신이었는데, 벨기에에서 태어난 세르주는 결국 벨기에 국적을 보유하게 됐고 불어와 러시아어를 거의 완벽하게 구사했다.

그러나 벨기에에 정착할 생각 없이 19살의 나이에 프랑스로 옮겼다가 그 뒤 스페인을 거쳐 1919년에 새로운 혁명의 러시아에 들어간 세르주를 ‘벨기에 사람’으로 칭하기가 힘들다. 그 뒤 9년 동안 볼셰비키 러시아의 각종 요직을 거치고 초기 코민테른의 대(對)서구 선전 작업에 주동적인 역할을 하다가 1928년에 강화돼가는 스탈린의 독재를 비판한 죄로 공산당에서 출당을 당했고 5년 뒤에는 투옥됐다. 몇년 뒤 몇명의 유명한 서구 지식인들의 끈질긴 구명운동 끝에 풀려나와 다시 벨기에로 가서 소련 체제의 ‘반동성’과 ‘혁명 정신의 말살’을 외쳤던 그는 스탈린주의의 선량한 신민이라는 의미의 ‘소련인’도 아니었다. 세르주는 히틀러의 군대가 서구를 휩쓴 뒤 기적적으로 멕시코로 탈출해 거기에서 소련에 의한 암살로 추측되기도 하는, 의문이 없지 않은 죽음을 당했다. 그의 아들이 멕시코 시민으로서 멕시코의 자랑이라 할 만한 저명한 화가가 됐지만, 창작 작업을 불어로 했던 세르주를 ‘멕시코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세계적 방랑자’ 세르주…. 그의 만년 소설의 무대가 자연스럽게 시베리아의 오지에서 스페인의 혁명 현장으로 옮기고 그 주인공들도 온갖 나라 사람들이 뒤섞인 것은 그의 ‘방랑 경력’을 반영하기도 한다. 카를 마르크스나 당시의 혁명 거인 트로츠키(1879~1940) 등의 ‘혁명 선배’들도 국가와 민족 등의 범주로 이해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마찬가지 아니던가?

그러나 트로츠키와 세르주는 서로 다른 점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게 멕시코에서 암살당했을 때 임종의 순간에 “그럼에도 공산당은 궁극적으로 옳은 것이고 그 역사적 정당성을 잃지 않았다”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간 철저한 공산주의자 트로츠키와 달리, 세르주의 정치적 지향이나 세계관은 무슨 ‘주의’로 범주화할 수 없었다. 벨기에에서 사회민주당의 청년조직에서 활약하다 체제에 안주해갔던 사민주의자들의 ‘개량주의’에 염증을 느껴 파리에서 아나키스트 신문의 편집자가 된 세르주는 ‘테러활동 고무·찬양’ 등의 죄목으로 프랑스에서 옥고를 치르고 스페인에서 아나키스트 반란의 주도자가 됐지만, 그는 수많은 남유럽 아나키스트들의 목적을 결여한 ‘폭력을 위한 폭력’을 시종일관 비판해왔다.

사민당의 간부도 아나키스트도 못 된 세르주는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지만 그와 소련 정권의 관계도 역시 오래가지 않았다. 러시아의 1917년 혁명의 근본 성격을 진정한 의미의 혁명으로 규정한 그였지만, 중앙집권을 거부한 아나키스트나 폭력을 규탄한 멘셰비키 등 기타 소수의 혁명 정당에 대한 새 정권의 비밀경찰(체카, KGB의 전신)의 살인적 탄압이나, 곡물의 강제 공출에 저항하는 농민들의 총살 또한 그의 자유주의적·인본주의적 신념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소련 체제의 근대적 폭력성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던 세르주는 레닌의 서거(1924) 전까지 그나마 공산당의 도덕성이나 “노동자 대표자로서의 성격”에 대한 믿음으로 버텨왔다.

그러나 그 뒤 트로츠키와 함께 신생국가의 관료화와 ‘혁명성 상실’을 비판하기 시작한 그와 스탈린 체제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괴리가 생겼다. 그렇다면 그가 트로츠키파였는가? ‘트로츠키주의’는 스탈린주의자들이 그에게 붙인 딱지였지만 실제로 그와 트로츠키 사이의 견해 차이는 컸다. 트로츠키를 늘 깊이 존경하던 세르주가, 트로츠키 저서들을 불어로 번역하는 등 소수파로서 트로츠키파의 목소리가 유럽인들에게 들리게끔 만반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인본주의적 혁명가였던 세르주는 혁명의 과정에서 반대파에 대한 조직적인 폭력이 불가피하다는 트로츠키의 ‘과도기적 국가 폭력 긍정론’에 찬성하지 않았다.

정치보다 글쓰기를 더 즐긴 세르주는 <러시아 혁명의 첫해>(1930)나 <혁명의 운명>(1937) 같은 역사·정치적 저작과 <혁명가의 회고록>(1945)이라는 나중에 서구 신좌파의 필독서가 된 자신의 역사적 증언의 모음을 펴냈지만, 필자가 좋아하는 것은 주로 1930년대 러시아의 암흑기를 소재로 한 그의 뛰어난 소설들이다.

<긴 황혼>(1946), <툴라예프 동지의 사건>(1948년 사후 출판)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스탈린 독재 체제의 완비라는 역사적 대사건을 안고 발버둥치는 각계각층의 역사 주인공들이다. ‘정의 상실’에 끝없는 분노를 느껴 거만한 ‘공산당 귀족’을 죽여버린 열성파의 젊은 공산주의자, 시베리아의 배고픈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스탈린과의 ‘이론 투쟁’을 쉬지 않는 트로츠키파의 ‘강철의 혁명가’, 권력과 부에 도취되면서도 숙청의 공포로 하룻밤도 편히 자지 못하는 스탈린주의의 ‘고위층 충견’들…. 역사의 마차에 깔리는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들을 세르주 이상으로 극명하게 잘 보여준 작가를 광풍의 20세기에도 찾아보기가 힘들 것이다.

“해방을 위한 투쟁 속에서 당연히 온갖 오류들을 다 범하게 돼 있다. 그러나 자신 한 몸의 영달을 위해 사는 것보다 더 무서운 오류는 없으니 그래도 투쟁하는 게 더 낫다.”(<혁명가의 회고록>) 한 세기의 비극을 함께 안고 살았던 그의 인생의 값진 결론인 셈이다.(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

06. 11. 29.

P.S. 페이퍼의 제목으로 단 '반체제 맑스주의'란 표현은 그에 관한 한 영어문건에서 따온 것이다. 빅토르 세르주 아카이브(http://www.marxists.org/archive/serge/index.htm)에서 그의 저작목록과 이런저런 자료들을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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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송어낚시> <워터멜론 슈가에서>의 저자 리처드 브라우티건. 이 사진은 <미국의 송어낚시>의 원작 표지이기도 하다. 소설에 이 사진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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