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그리스도에서 레닌까지

'아감벤과 사도 바울'에 이어지는 페이퍼이다. 내친 김에 지젝의 바울론에 대해서 정리해두고자 한다. 그래봐야 두 개의 문단, 각각 <믿음에 대하여>(동문선, 2003)과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의 한 문단을 읽어보려는 것뿐이다(두 책은 비슷한 시기에 출간됐다). 대신에 국역본의 부정확한 대목들을 교정해두도록 한다. '그리스도에서 레닌까지'란 제목은 <믿음에 대하여>의 서문에서 따온 것이다.

 

 

 

 

먼저, <믿음에 대하여>의 8-9쪽. 조금 이전에 7쪽에서 밝히고 있는 이 책의 전제. "이 책의 기본 전제는 비록 그 전제가 잔인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만약 누군가가 자유-민주주의적 지배권을 포기하고 믿을 만한 급진적 지위를 주창하려 한다면 그것이 담고 있는 유물론적 해석을 승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문은 이렇다: "The basic premise of this book is that, cruel as this position may sound, if one is to break the liberal-democratic hegemony and resuscitate an authentic radical position, one has to endorse its materialist version. IS there such a version?"(이후에 원문 대조는 생략하거나 부분적으로만 하도록 한다.)

번역문은 포기할 만한 내용인데, 누락된 마지막 문장을 포함하여 다시 옮기면, "이 책의 기본전제는, 비록 이 입장이 잔인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자유민주주의의 헤게모니를 분쇄하고 진정으로 급진적인 입장을 부활시키고자 한다면 그 유물론적 버전을 승인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버전이 과연 존재하는가?" 정도이다.

진정 급진적인 정치적 입장이란 "정치를 일련의 실용주의적 개입이 아니라 (대문자)진리의 정치(politics of Truth)를 주장하는 입장이다. 오늘날 이러한 입장은 '전체주의적'이란 이유로 기각된다. "오늘날 이러한 장애로부터 탈출하여 진실의 정치를 표방하는 입장은 레닌으로의 복귀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다시 옮기면, "이러한 교착상태에서의 탈출, 곧 진리의 정치에 대한 재단언은 레닌으로의 회귀라는 형식을 취해야만 한다." 

레닌으로의 회귀는 <혁명이 다가온다>의 핵심적인 메시지이기도 한데, <믿음에 대하여> 또한 동일한 반문에 답하면서 주장을 전개한다. "왜 단순히 마르크스가 아닌 레닌인가? '제대로 된 복귀라면 원래 진영으로으 복귀여야 하지 않는가?' 오늘날 '마르크스로의 복귀'는 이미 학술권에서 별다른 관심사가 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마르크스를 고려하고 있는가? 한편으로 포스트모던 소피스트들의 마르크스, 메시아적 약속의 마르크스, 다른 한편으로 현대 세계화의 역동성을 예견하고 월스트리트 거리에서조차 회자되는 마르크스이다."

역시나 마지막 문장에 누락된 단어들이 있는데 이를 포함해서 다시 옮기면: "왜 그냥 마르크스가 아니고 레닌인가? 오늘날 '마르크스로의 회귀'는 이미 학계에서 나름대로 유행이다. 이 너나없는 회귀들에서 우리는 어떤 마르크스를 갖게 되었나? 한쪽에는 문화연구의 마르크스, 포스트모던 소피스트들의 마르크스, 메시아적 약속의 마르크스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오늘날 세계화의 동학을 예견한 마르크스, 월스트리트에서조차 그러한 인물로 환기되는 마르크스가 있다."

"이들 마르크스들이 지닌 공통점은 정치 본령의 거부이며, 레닌에 의거하게 되면 이 두 가지 함정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원문은 "What both these Marxes have in common is the denial of politics proper; the reference to Lenin enables us to avoid these two pitfalls." 다시 옮기면, "이 두 가지 계열의 마르크스들이 갖는 공통점은 정치다운 정치에 대한 거부이다. 레닌으로의 회귀는 이 두 함정들을 피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후의 지적들은 <혁명이 다가온다>의 주장들을 예견하게 해준다.

먼저, 지젝은 레닌의 개입이 갖는 두 가지 특징을 지적한다. 그 하나는 레닌의 외부성이고, 다른 하나는 폭력적인 전치이다. 차례대로 살펴본다.

(1) "첫째로 마르크스와 관련해 볼 때 레닌의 외부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니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친정집단'에 속하지 않았고, 마르크스나 엥겔스를 전혀 만난 적이 없다. 더욱이 그는 '유럽문명'의 동부 경계지역 출신이었다. 오로지 이 같은 외부적 위치에서만이 그 이론의 본래적 충동을 살려내는 것이 가능하다." '친정집단'은 'inner circle'의 번역이다. '동부 경계지역'이란 물론 러시아를 가리키는데, 러시아 내에서도 레닌은 타타르 출신이라고 해서 권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반복하자면, 이러한 외부성, 외부적 위치에서만 이론의 충격을 되살려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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