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이건수 - 스탈린이 그린 붉은 유토피아



스탈린의 5개년 계획은 매년 12% 이상의 경제 성장을 이룩하며 10여 년 만에 후진국 소련을 선진국 대열에 올려놓았다. 2차세계대전이 시작될 무렵, 소련의 공업 총생산고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를 기록했고, 전쟁의 승리를 주도하면서 스탈린의 권위는 더욱 높아졌다. 오늘날 러시아의 구체적인 틀을 형성시킨 스탈린의 예술정책을 살펴봄으로써 통치자의 비전이 예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알아본다.

1917년 10월 혁명을 전후한 러시아의 미술계는 미래파· 큐비즘· 구성주의·절대주의를 위시한 이른바 러시안 아방가르드의 백화난쟁이 벌어졌다. 혁명의 흥분과 함께 ‘위대한 러시안 유토피아’를 향한 형식적 실험들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시인 마야코프스키는 “가두는 우리들의 붓, 광장은 우리들의 팔레트”라고 부르짖으며 혁명적 분위기를 고취시켰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으론 문화계몽 단체 프롤레트 쿨리트가 ‘프롤레타리아 계급 문화의 창조’와 ‘예술과 노동의 결합’을 강조하며, ‘노예·지주 사회 또는 부르주아 사회에서 만들어진’ 과거의 문화로부터 어떠한 영향도 전혀 받지 않은 새롭고 순수한 프롤레타리아 문화를 창조하려는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양극으로 펼쳐진 혁명 초기의 문화적 상황은 레닌에게 있어 모두 위험스럽고 의심스러운 것으로 비쳐졌다. 양자의 입장은 모두 전통과는 단절된 새로움만의 추구였으며, 그것은 민중에게도 예술의 기회를 부여하고 민중 속에서 예술가를 키워 내려는 레닌의 의도에 상반되는 것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신경제정책(NEP)을 추진하고 질서를 재건하면서 레닌은 문화유산이 대중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문맹일소와 부르주아 문화의 유산 계승을 선결 문제로 보았다. 당시의 노동 계급은 자본주의 사회 아래서 가난하고 교양없는 계급으로서 장래 사회주의 문화의 원초적 요소를 창조할 힘이 아직 없음을 레닌은 간파한 것이다. 레닌은 말했다.

“우리는 너무도 위대한 ‘회화에 있어서의 우상파괴자들’이다. 아름다운 것은 비록 그것이 ‘오래된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의 본보기로서, 출발점으로서 간주되고 보존되어야만 한다. 왜 진실로 아름다운 것에 등을 돌리고 단지 그것이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더 나은 발전을 위한 출발점인 그것을 버리는가? 왜 단지 그것이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것을, 복종을, 강요하는 신으로서 숭배하는가? 허튼 소리, 터무니없는 소리다! … 그러나 어쩐지 우리는 우리 역시 ‘현대 문화의 표준에 도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느낀다. 하지만 나는 감히 나 자신이 야만인임을 선언한다. 표현주의·미래파·큐비즘 그리고 그 밖의 ‘주의들’에 따른 작품들을 예술적 천재의 최고의 표명으로 고찰하는 것은 나의 능력 밖의 일이다. 나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그것으로부터는 어떤 기쁨도 경험하지 못한다. … 어떤 미술 전시회에서 가장 훌륭한 전시품을 보는 것보다 어떤 오지 마을들에 몇몇 초등학교를 세우는 것이 내게는 더 큰 기쁨이다.”

레닌은 문화 예술에 대한 일관적인 정책을 전개시켜 가면서 예술의 기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건들을 다져 나갔다. 따라서 미술 분야에 있어서는 1918년 당시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 역대 혁명가들의 조상을 거대한 규모로 세우려는 ‘기념비 프로파간다’ 계획, 전국 각지의 박물관 건립 계획, 미술 아카데미의 해산과 자유 작업장 설치 등을 추진했다. 그것은 예술의 사회주의적 생산·유통의 사회화와 국유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위로부터의 혁명, 스탈린주의

1924년 레닌이 병사한 후 정권을 잡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노선 아래서 러시아 미술은 점차 보수적 경향을 띠게 된다. 레닌 예술 정책의 본령이 담긴 <당 조직과 당 문학>(1905)·<게르첸을 회상하며〉(1912) 같은 에세이는 당 문화 정책의 이론적 틀을 제시하며 스탈린주의를 위한 기초 경전이 되었다. 스탈린과 레닌의 관계는 마치 종교에 있어서 신과 그 신의 육화와 같았다. 레닌은 죽지 않고 인민, 그리고 특히 스탈린과 함께 하고 있으며 더나아가 스탈린 자신이 바로 우리 시대의 레닌임을 모든 선전을 동원하여 주장했다. 스탈린이 등장하는 사진과 그림에는 항상 레닌의 초상이나 흉상을 그의 배후에 등장시켜 스탈린 자신이 ‘사회주의 원조’ 레닌의 적통자임을 내세웠다.

그러나 레닌의 정신은 점차 왜곡되고 파괴되어 스탈린 일인 독재를 위한 교조적 상징이 되었다. <예술·문학 영역에서의 당 정책>(1925)에 실린 레닌의 언급, “당은 이 영역에서 모든 단체나 조류의 자유 경쟁을 선언하지 않을 수 없다. … 그 사상적 내용에서 가장 프롤레타아적인 경우조차도 어느 한 집단이 독점하게 할 수 없다.”라는 ‘자유경쟁’ 정책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았다.

이 와중에서 아방가르드는 숨을 죽이고, 많은 예술가들이 서유럽으로 망명했다. 러시아에 남은 예술가들은 당의 정책에 순응해 나가야 했다. 20년대의 예술적 폭발은 가라 앉아버렸고,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은 28년에는 형식주의자라는 낙인을 받고 침묵해야 했다. 29년부터 정치적 압력을 받던 말레비치도 결국 33년부터는 예술 활동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가운데 ‘혁명 러시아 미술가 연맹(AKhRR)’ 등 사실적 양식의 예술 세력이 주도권을 잡게 되고, 그 세력은 20년대 말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작가 연맹(RAPP)’으로 합류했다.

1922년에 창립된 ‘혁명 러시아 미술가 연맹’은 19세기의 민주적 사실주의 및 이동파 화가단의 전통에 바탕을 두고 민중의 일상생활과 예술을 좀더 가깝게 연결해 보기를 시도하였다. 연맹은 “혁명을 그림으로 재현하고, 계급 투쟁과 사회주의 건설에 참여하자. … 일상생활을 진실되게 반영하고 이해될 수 있는 생생한 예술을 민중에게 제공하는 것이 우리의 최우선 과제이다.” 등의 슬로건을 내세움으로써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선구로 인정받는다.

1929년부터 발동이 걸린 스탈린의 ‘위로부터의 혁명’의 구성 요소는 초고도의 공업 발전 5개년 계획, 전면적 집단화, 계급투쟁으로서의 문화 혁명이었다. 학술과 문화의 볼셰비키화가 문화 혁명의 목표였다. 노동조합 이외의 다양한 사회단체도 폐지되거나 준국가기관화하거나, 아니면 작가동맹처럼 처음부터 준국가기관급의 새로운 단체를 낳게 되었다. 1932년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라프를 비롯한 각종 문학예술 단체를 해산하고 장르별 단일 조직을 결성할 것을 결정함에 따라 ‘소비에트 미술가 동맹(FOSKh)’이 생겼는데, 이로써 스탈린 체제 문화 영역은 완성되기에 이른다. 일원화된 사회체계가 탄생되었고 급기야 34년 사회주의의 ‘승리’를 선언했다.

창작 방법으로서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스탈린은 1932년 작가 고리키의 집에서 열린 작가 회의에서 “만약 예술가가 우리의 실생활을 정확히 묘사하려면, 그는 우리의 실생활을 사회주의로 이끌고 있는 것을 인식하고 묘사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것이 사회주의적 예술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2년 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기본적인 예술 창작 방법으로 채택되었다. 1934년 제1차 소비에트작가전연방회의에서는 스탈린의 사돈이자 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서기였던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소비에트 문학, 가장 풍부한 사상을 담은 가장 선진적인 세계 문학>이라는 환영사를 통해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소비에트 예술의 예술적 문학 및 문예 비평의 기본적 방법이며, 현실을 혁명적 발전 속에서 정확하게 역사적 구체성을 가지고 묘사할 것을 예술가들에게 요구한다. 여기서 예술적 묘사의 진실함과 역사적 구체성이라는 것은 노동자를 사회주의적 정신에 따라 사상적으로 개조하고 교육하는 과제와 결합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소위 ‘즈다노프 선언’을 발표했다.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의 전통을 계승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인민의 생각·감정·윤리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인민성(나로드노스찌), 계급에 대한 창작자의 자각과 자격을 의미하는 계급성(클라스노스찌), 당의 주요한 역할과 지도력을 묘사하는 당성(파르티노스찌), 당에 의해 고무된 신사고와 의식을 소개하는 사상성(이데이노스찌), 상황과 인물의 전형성(티피치노스찌)의 5원칙을 기본 규범으로 삼았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사회주의적 인간상을 긍정적인 주인공의 모습으로 전형화하는 일이었다. 작가란 ‘인간 영혼의 기사’라는 스탈린의 정의를 따라 작가들은 새로운 삶의 건설자, 모범적인 인간, 이상적인 지도자상, 어떤 의혹도 가지지 않는 공산주의적 이성의 소유자를 그려 내도록 요구받았다.

즈다노프 선언 이후 1936년 《프라브다》 지에서 ‘형식주의 논쟁’이 시작되면서 스탈린의 예술가에 대한 대숙청의 막이 열렸다. 형식주의·코즈머폴리터니즘(친유태주의)으로 규정된 아방가르드 예술, 그리고 사실주의를 가장한 ‘사회주의 자연주의’가 주요 공격 대상이었다. 이 당시 사회주의 리얼리즘측에서는 게라시모프·요간손 등의 화가, 마니젤 같은 조각가가 표현한 영웅적이고 현실 긍정적인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사리얀·데이네카·쿠크리니크시 등 근대적 요소를 잔존시킨 예술가들이 주목을 끌었다.

형식주의(러시안 아방가르드)와 마르크시즘(레닌-스탈린주의)의 대립은 예술에서 중요한 것이 형식이냐 내용이냐 하는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와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 중 어느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가가 중요한 창작 방법과 세계관의 문제로 부각된 것이다. 그러나 실상 이 양자의 대립은 사실상 정치적인 편견 위에 비롯된 것으로써 그 접점을 찾기는 힘들었다.

아방가르드측의 공격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때늦은 자연주의적 방법론에 집중되고 있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미술의 이론적 지도자 마니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두 개의 적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자연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형식주의라는 것이다.”라며 반론을 폈다.

이에 덧붙여 ‘어용 궁정화가’ 요간손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립자인 작가 막심 고리키의 ‘털 뽑힌 닭’이라는 전형성 개념을 인용하여 “세부적인 것을 절대화시킬 경우, 그것은 예술의 인식력을 경멸하는 자연주의로 흐르게 된다. … 사실적 자료는 전체의 진리가 아니다. 사실적 자료는 천연 자료이며, 이 천연 자료에서 예술의 순수 진리를 얻어 낼 수 있고 끄집어 낼 수 있어야 한다. 털 달린 닭을 그대로 구울 수는 없다. … 사실적인 것에서 비본질적인 부가물을 제외하고, 또한 의미있는 것을 끄집어 내는 것을 배워야 한다. … 1백 퍼센트 자연주의의 예를 들 수 있다. 그것은 합성적인 의도 없이 사진작가의 형성 의지 없이, 그냥 우연히 찍혀진 사진과도 같다. 그러나 특정한 의도, 의식적인 사진가의 연출력에 의해 찍혀진 사진의 경우, 그것은 이미 성찰적인 리얼리즘이다. … 예술적인 의도가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사진이 자연주의적인가 혹은 리얼리즘적인가를 구분해 낼 수가 있다. 특히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예술가의 의지, 예술적인 연출력이 그림에서의 조형예술가의 의지와 비슷하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방가르드 진영의 비판에 의하면 일반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 특히 요간손의 작품은 확대된 천연색 사진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내용은 주로 소비에트 인민의 밝고 아름다운 생활상, 레닌과 스탈린의 초상, 소비에트 혁명가· 전사· 사상가·사회주의 노동의 영웅 등의 초상화, 혁명을 전후한 역사적 정황 또는 대조국전쟁의 영웅적 공적을 찬양 고무하는 대규모의 테마 미술, 인민적인 유토피아관을 상징하는 풍경화·정물화 등이다. 그것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클리셰의 양산이었고, 북한을 비롯한 위성국들의 문화예술 정책에 막중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방법을 일반적으로 정리하면, 스탈린의 말대로 ‘형식에 있어서는 민족주의적이고 내용에 있어서는 사회주의적’이며, 민족적 국수주의적인 형식 뒤에 새로운 사회주의적 내용이 숨겨진 일종의 꿈의 리얼리즘을 의미한다.

 

 
 
스탈린 기념상

세르게이 메르쿠로프 <스탈린 기념상> 철근 콘크리트 높이 3000cm 1939


연단 위의 레닌

알렉산드르 게라시모프 <연단 위의 레닌> 캔버스에 유채 228×173cm 1930. 민중을 예술에 접근시키려고 했던 레닌은 외쳤다. “누구나 꿈을 꾸어야 한다.”


1928년 <제10회 AKhRR전> 모습

1928년 <제10회 akhrr전> 모습.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AKhRR 의장 파벨 라디모프. 앞줄 왼쪽부터 교육부 장관 안드레이 부브노프, 부하린, 스탈린, 모스크바 당 대표 바우만.


<소련의 5개년 집단화 계획의 끝에서> 리도 그래프 포스터

구스타프 클루트시스 <소련의 5개년 집단화 계획의 끝에서> 리도 그래프 포스터 1932. 30년대엔 대중적인 매체를 이용한 포스터·삽화·인쇄화 등의 장르가 적극 개발되었다.


베라 무히나 <노동자와 농민>

베라 무히나 <노동자와 농민> 스텐리스 스틸 2400cm 1937. 37년 파리박람회의 소비에트관 건물 위에 설치되어 서방세계에 공식적으로 소개된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


알렉산드르 데이네카 <광활한 대지>

알렉산드르 데이네카 <광활한 대지> 캔버스에 유채 205×302cm 1944. 스탈린의 햇빛 아래 뛰어가는 소녀들.


미하일 코스틴 <스탈린 공장에서>

미하일 코스틴 <스탈린 공장에서> 캔버스에 유채 132×173cm 1949. ‘건설’은 30년대 모든 소비에트 예술의 기본주제였다. 노동하며 실천하는 인간이 도덕적 인간이다.


아르카디 플라스토프 <건초만들기>

아르카디 플라스토프 <건초만들기> 캔버스에 유채 193×232cm 1945. 노동은 고통이 아니라 영예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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