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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 달하우스 크라이프 다누저 - 20세기 음악미학 이론
홍정수 외 지음 / 심설당 / 2002년 2월
평점 :
20세기 현대음악은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 진행된 탓인지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지 못했다. 현재도 이 상황은 좀체 회복되기 힘들어 보인다. 클래식 음반산업과 연주계, 그 음악을 좋아하는 애호가 모두 소위 현대음악이라 불리는 것에 쉽게 접근하려 하지 않는다. 어느덧 21세기가 됐지만, 20세기 중반부터 발전해온 현대음악은 여전히 어려운 대상일 뿐이다. 곧 현대음악은 꼭 듣고 향유해야 할 음악이 아니라 굳이 듣지 않아도 될 미래의 음악쯤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아도르로, 달하우스, 크나이프, 다누저’는 20세기 음악미학을 이끌어온 네 명의 대표적인 학자들의 입장을 정리해놓은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현대음악이 처한 상황과 20세기 음악미학을 개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현대음악이 대대로 전해져온 전통적 미학과 단절을 선언한 까닭과 아도르노를 비롯한 네 명의 학자들이 어떤 관점으로 음악과 사회를 대했는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비유를 통해 아도르노의 음악미학을 이해하면 쉬울 것 같다. 곧 예술은 ‘아름다움’보다는 ‘진실’이 더 중요하다는 게 아도르노의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의 아름다움’을 극도로 추구한 후기 낭만주의 음악은 아도르노에게는 예술이 아니라 비판 대상일 뿐이다. 후기 낭만주의를 이끌었던 작곡가들은 ‘과거’에 안주하고 ‘미래’를 등한시하며 ‘진실’을 추구하지 않았다. 이는 20세기에 활동한 스트라빈스키나 힌데미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아도르노는 이들이 대중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과거와 타협했다고 비판한다. 곧 이들의 작품에는 과거에 대한 ‘부정’과 진실을 밝히는 ‘역사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아도르노는 어떤 대상에서 이상적인 예술성을 발견했을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아도르노는 쇤베르크를 비롯한 제2빈악파의 초기 작품에서 새로운 흐름을 발견했고, 인간의 고통, 현실의 타락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아방가르드의 표현주의를 ‘진실이 반영되어 있는 예술’이라고 말하며 적극 옹호했다.
그러나 이런 아도르노의 주장도 비판의 여지가 있다. 크나이프는 아도르노가 너무 엘리트적이라고 말한다. 현대음악이 대중들에게 어렵게 느껴지듯이 그것을 옹호한 아도르노의 이론도 소수의 지식인을 위한 것뿐이다. 크나이프는 아도르노가 경멸했던 대중음악을 자신의 음악미학에 적극 반영했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으로 대중음악 연구에 나섰고, 음악학에 대중음악이 일상적인 주제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는 지식인에 의해 규정되는 아도르노의 이론보다 훨씬 적극성을 띄는 것이며, 20세기를 대중이 중심이 되는 ‘대중의 시대’로 파악한 사고이기도 하다.
또 한 명의 아도르노의 비판자인 달하우스는 음악의 자율성을 옹호하는 면에서 아도르노의 입장을 지지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새로운 음악에 관심을 두지는 않는다. 또 아도르노와는 다르게 옛것은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 시대의 음악은 그 시대의 미학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곧 달하우스는 아도르노가 배격했던 아름다움을 다시 미학에 끌어들여 판단의 근거로 설정한 것이다.
달하우스의 제자 다누저는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는 것보다 1950년대 이후의 20세기 음악을 정리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는 다양한 관점을 모두 수용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지지자였다. 따라서 그에게는 고급 음악과 저급 음악의 경계도 없으며, 옛것을 답습하는 연주나 전혀 새로운 경향의 성격의 것도 인정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자칫 ‘음악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조차 무색하게 만들지만, 음악을 비롯한 모든 예술과 철학에서 한때 유행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