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키신이 우리나라에 오는군요. 언젠가 써놓았던 글입니다. 마마보이 키신, 4월 8일 예술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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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0년대 중반부터 천재 또는 신동으로 불리며 전세계에 신드롬을 일으켰던 예브게니 키신. 그도 어느덧 신동이니 천재니 하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30대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때문인지 혹자는 ‘키신의 위대한 시대’는 이미 저물었노라고 말한다. 키신이 빛을 발했던 이유는 순전히 시간성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고 그가 더 이상 나이가 어리지 않다면, 그의 연주는 ‘전설’이 아니며 그저 평범한 피아니스트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항변한다. 사실 어느 정도 이 지적은 맞는 말이다. 데뷔 초기에 보여줬던 비범한 재능 속에는 그의 단점도 들어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걸 용인하며 그를 천재로 규정했다. 그리고 그는 그 말을 통해 스타로 등극했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렀다. 그는 과거처럼 어린아이가 아니어서 사람들은 그의 장점보다 단점을 더 많이 찾아내고, 또 그의 위대함이 한낱 평범함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평가절하하려 한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그의 연주 속에 사람들을 사로잡는 그 무엇이 없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그를 영원히 잊으려 할지도 모른다. 두 살 때 피아노를 연주해 열 살 때 정식 데뷔무대를 가졌고, 열두 살 때 국제무대에 나오면서 그의 험난한 운명은 시작됐다. 그는 뭔가를 끊임없이 보여줘야 하고 연주 속에 천재성을 드러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연주가로서의 수명은 곧 끝날지도 모른다. 그건 모든 연주가들이 다 마찬가지라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키신만이 지니는 특수성이 있다. 1990년대 초반 그는 대중 스타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다. 세계 유수의 언론이 앞다퉈 그를 소개했고, 클래식 음악계의 불황도 그의 음반과 연주회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다. 또 세계 음악계가 찬탄해마지 않았던 마우리치오 폴리니보다 대중들에게 더 큰 대우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키신은 자만하지 않았다. 인기에 편승해 다른 연주가들처럼 낭만적인 소품 모음집을 남발하지 않았고, 매번 일정한 실력으로 완성도 높은 연주를 들려주며 전설을 만들어갔다. 대중들의 천박한 심리에 휩쓸려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우를 범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차분하게 실력을 가다듬어 안절부절 못하는 대중들을 만족시킬 줄 알았다. 이런 모습을 보고 급기야 대중들은 키신을 거장적 연주가의 반열에 올려놓기에 이르렀다.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는 우리 시대의 연주가
“예술인은 언제 어디서나 감정을 쏟아 분위기를 창조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순간적인 심적 변화로 연주를 망치거나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연주가는 어떤 기분에 지배를 받아서는 안됩니다. 매번 자신의 연주를 최상으로 만들 수 있는 평상심을 가지고 있어야 하죠.”
피아노 콩쿠르를 거치지 않고 성공한 몇 안 되는 연주자인 그는 한번도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닦아왔다. 이 모습은 꾸준히 선보이고 있는 음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현재까지 비공식 녹음을 합쳐 사십 장 가까운 음반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 음반들의 레퍼토리가 거의 낭만주의 음악으로만 채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전주의 시대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열정’, 피아노 협주곡 두 곡만을 녹음한 바 있고, 모차르트의 곡은 비교적 자주 연주하는 편이지만 음반은 그리 많지 않다. 또 현대음악은 프로코피예프와 쇼스타코비치 협주곡 정도가 눈에 띌 뿐이다. 그는 바흐에 대한 관심을 피력하기도 했지만 부조니 편곡판 몇 곡만을 녹음했고, 본격적으로 바흐의 작품을 연주하지는 않았다. “낭만주의 음악을 가장 잘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라는 평도 받은 바 있지만, 너무 한 시대에만 천착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더욱이 실내악 작품은 유리 바슈메트, 미샤 마이스키 등과 녹음한 슈베르트의 ‘송어’를 빼면 전무한 실정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언젠가 그의 손을 통해 최상의 것으로 둔갑해 세상에 선보여질 것이다. 실제로 그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비롯해 바흐, 현대음악, 실내악에 대한 열정을 자주 내비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좀더 기다릴 필요가 있다. 천재를 너머 거장의 손길로 다듬어진 연주를 듣기 위해 좀더 그가 자유롭게 사유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놓아줄 필요가 있다. 언젠가는 그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