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오르그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에 나오는 말. 내가 좋아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시대가 정말 있었을까?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런 시대에서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무한히 광대하지만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아늑한데, 왜냐하면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별들이 발하고 있는 빛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와 자아, 천공의 불빛과 내면의 불꽃은 서로 뚜렷이 구분되지만 서로에 대해 결코 낯설어지는 법이 없다. 그 까닭은 불이 모든 빛의 영혼이며, 또 모든 불은 빛 속에 감싸여져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영혼의 모든 행위는 의미로 가득 차게 되고, 또 이러한 이원성 속에서도 원환적 성격을 띠게 된다.
다시 말해 영혼의 모든 행위는 하나같이 의미 속에서, 또 의미를 위해서 완결되는 것이다. 영혼의 행위가 이처럼 원환적 성격을 띠는 이유는 행동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영혼은 자기 자신 속에서 편안히 쉬고 있기 때문이고, 또 영혼의 모든 행위는 영혼 그 자체로부터 분리되는 과정에서 독립적으로 되면서 자기 자신의 중심점을 발견하고서는, 이로부터 자신의 둘레에 하나의 완결된 원을 그리기 때문이다.
철학이란 본래 "고향을 향한 향수"이자, "어디서나 자기 집에 머물고자 하는 충동"이라고 노발리스는 말한 바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형식으로서뿐만 아니라, 문학과 형식을 규정하고 또 그 내용을 부여하는 것으로서의 철학이란, 언제나 내부와 외부 사이의 균열을 말해 주는 하나의 징후이며, 또 자아와 세계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고 영혼과 행위는 서로 일치하지 않음을 말해주는 하나의 표지이다.
행복한 시대가 아무런 철학도 갖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까닭에서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이러한 시대에는 모든 사람이 철학자이자 또 모든 사람이 각각의 철학이 지니는 유토피아적 목표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때에는 행복한 시대의 지도를 그리는 일 이외에는 참된 철학의 과제란 달리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가장 깊은 내면에서 솟아나오는 충동이, 그 자신은 알지 못하지만 영겁의 시간 이래로 자신에게 주어진 형식, 즉 구원을 가져다 주는 상징으로서 자신을 감싸고 있는 형식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규정해 보는 일이 아니라면 선험적 좌표라는 철학의 원초적 문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정열은 이성에 의해 정해지고 또 완결된 자기 자신에게로 나아가는 길이며, 그리고 광기로부터는, 그렇지 않았더라면 침묵하게끔 운명지워진 수수께끼 같긴 하지만 해명이 가능한 초월적 힘의 메시지를 읽을 수가 있는 것이다. 또 이때는 내면성이라는 것도 아직 존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때는 아직 일체의 외부적 세계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혼에 대립되는 타자도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혼은 모험을 찾아 길을 떠나고 또 갖가지 모험을 끝까지 헤쳐 나가지만, 정작 찾는 일에 수반되는 참된 고통과 발전의 진정한 위험을 알지는 못하고 있다. 이러한 영혼은 결코 자신을 운명의 장난에 내맡기는 법이 없다. 다시 말해 영혼은 자신을 잃을 수도 있고, 또 그럴 경우에 자기 자신을 다시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거나 아니면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서사시의 시대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두고 일컫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