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스탄과 이즈 (보급판) 지만지 고전선집 64
죠제프 베디에 지음, 이형식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바그너는 '로엔그린'을 발표한 뒤 이 작품을 '낭만적 오페라'라고 이름 붙이고 "이제 더 이상 오페라는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가 다시 만든 작품이 바로 가극 '트리스탄과 이졸데'이다. 바그너가 직접 독일어로 쓴 대본은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무한한 동경과 사랑의 황홀감이 주는 관능성이 훌륭하게 묘사되어 있다.
바그너는 이 작품을 13세기에 활약한 독일의 시인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의 서사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참고해 개작했다고 밝힌 바 있다. 바그너의 작품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해진 이 이야기는 사실 유럽 전지역에 널리 퍼진 일종의 민중설화이다. 따라서 바그너가 참조한 독일 시인 슈트라스부르크가 창작한 이야기가 아니며, 최초의 발상지가 어디인지, 그것을 처음으로 노래한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12세기 전후 아일랜드와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에서 활동하던 켈트족에게서 흘러나왔다는 정설만이 확인될 뿐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가 이토록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불려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이 책 <트리스탄과 이즈>에서 그 이야기의 매력을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프랑스의 언어학자이자 문학사가인 조제프 베디에가 중세 시대에 활약한 시인들의 장편 서사시(아일하르트의 '트리스트탄트', 토마스의 '트리스탄과 이즈', 작자 미상의 '트리스탄과 광대짓')를 토대로 당시의 정감을 살려 재구성한 것이다.
이 책의 주제는 다음과 같은 두 구절에 크게 압축돼 있다. "아름다운 여인이여, 우리의 운명 역시 그러하니, 나 없이 그대 없고, 그대 없이 나 또한 없도다." "이즈 나의 연인, 이즈 나의 사랑, 그대 속에 나의 죽음 있고, 그대 속에 나의 삶 있나니!" 이 문장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책의 내용은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는 '죽음보다 강한 사랑' 이야기이다.


책은 첫 부분부터 박진감이 넘친다. 초반부에 모든 이야기를 다 풀어놓을 것처럼 줄거리가 순식간에 바뀐다. 로누아의 왕자로 태어난 트리스탄('슬픈 남자'라는 뜻)이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를 잃은 사연부터, 그가 용맹스런 기사로 성장할 때까지의 이야기가 짧게 서두를 장식한다. 그런 뒤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된다. 외삼촌인 코온월의 왕인 마크왕 밑에서 기사로 성장한 그는 아일랜드의 거인 기사 모르훌트를 무찌르고 나라를 구하는 영웅이 된다. 이 싸움에서 큰 상처를 입고 바다를 정처없이 떠돌던 그를 구해준 이가 바로 모르훌트의 조카인 이즈이다. 이즈는 죽어가는 트리스탄이 자신의 삼촌을 죽인 원수인지도 모른 채 치료를 해주고, 트리스탄은 몸이 회복되자 아일랜드를 탈출해 마크왕에게로 되돌아온다.
이들의 인연은 트리스탄이 마크왕의 아내를 맞이하기 위하여 아일랜드로 건너가면서 다시 시작된다. 원수의 관계였지만, 트리스탄이 골칫거리인 용을 퇴치해주자 아일랜드의 왕은 딸 이즈를 마크왕의 아내로 내준다. 트리스탄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이즈는 트리스탄이 자신을 군주에게 팔아 넘긴다고 생각하며 분노를 금치 못한다(바그너의 가극에서는 이미 두 사람이 사랑에 빠져 있다고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영영 헤어나지 못할 비극에 접어든다. 배 위에서 시녀의 실수로 마크와 이즈를 위해 준비한 '사랑의 묘약'을 트리스탄과 이즈가 마시게 된 것. 그 음료를 마신 뒤 두 사람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된다.
마크왕과 트리스탄, 이즈의 갈등이 증폭되고 결국 트리스탄은 영지에서 추방되기에 이른다. 브르타뉴의 '흰 손의 이즈'를 아내로 얻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금발의 이즈' 를 잊지 못해 병상에 눕게 된다. 트리스탄은 이즈를 데리고 오는 데 성공하면 흰 돛을 달고, 그렇지 못하면 검은 돛을 달라고 부탁하며 친구를 이즈에게 보낸다. 하지만 트리스탄은 검은 돛의 배가 온다는 '흰 손의 이즈'의 거짓말을 듣고 절망하여 숨을 거둔다(파두의 여왕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검은 돛배'가 바로 이 장면을 노래한 것이다). 그가 죽은 직후에 도착한 이즈도 슬픔에 잠겨 트리스탄의 곁에서 죽고 만다.

바그너의 가극이 외면적인 것을 없애고 두 주인공의 내면에만 천착했다면, 이 소설은 풍부한 읽을거리를 제시하며 갈등의 원인과 결과와 더불어 주인공의 내면을 되새기고 있다. 오랫동안 유럽의 여러 작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이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는 인습과 이성보다는 원초적인 본능과 정염이 더 소중하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또 그것은 죽음을 통해서만 얻어진다는 역설을 훌륭한 서사시로 승화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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