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로비츠 오리지널 재킷 컬렉션


격변기와 위대한 순간이 담긴 역사적 명연을 재조명


소니에서 선보이고 있는 ‘오리지널 재킷 컬렉션’은 옛 콜롬비아와 CBS의 LP 음원을 CD로 재발매한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음반이 낱장으로 이미 출시된 것이긴 하지만, 박스물로 포장된 이 시리즈는 한 연주가의 연주생애를 재조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게 다가온다. 그동안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12CD)와 ‘스트라빈스키가 연주하는 스트라빈스키’(9CD)가 나왔고, 앞으로도 20세기에 주목할 만한 활동을 했던 연주가를 택해 한정 발매할 예정이다. 이 시리즈에는 공히 옛 LP와 똑같은 모양을 한 CD 재킷과 당시의 내지를 그대로 수록한 소책자가 담겨 있다.

10장의 오리지널 재킷 CD로 구성된 '호로비츠의 독집 앨범 모음집'은 호로비츠의 격변기와 위대한 순간을 빠짐없이 포착하고 있다. 호로비츠는 1922년 데뷔한 이래 굴곡 없는 연주생활을 이어가며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군림했다. 그렇지만 그는 절정의 순간에서 매번 은퇴를 선언해 팬들을 애타게 한 괴짜 연주가이기도 했다.

첫번째 은퇴는 토스카니니의 딸 완다와 결혼한 후 더욱 정력적인 활동을 펼칠 무렵인 1936년에 행해졌다. 그는 3년 동안의 휴식을 가진 뒤 1939년 파리에서 복귀 연주회를 열며 청중들 앞에 다시 서게 된다. 그리고 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초반, 그는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받으며 생애 최대 전성기를 맞는다. 이미 거장적 품격을 지녔다고 평가받은 그는 1953년 미국 데뷔 25주년 축하공연을 카네기홀에서 가졌고, 당연히 이 공연은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그리고 또 은퇴 선언. 두 번째 은퇴는 첫번째와 달리 상당히 길었다. 자그마치 12년 동안 그는 무대를 찾지 않았다. 긴 칩거 생활을 끝낸 그는 1965년 카네기홀에서 재기 콘서트를 열고 화려하게 복귀한다. 그러나 그는 1968년부터 1974년까지 휴식을 위해 세 번째 은퇴를 선언한다.

음반은 호로비츠가 두 번째 은퇴 선언을 끝내고 복귀하는 순간에서 세 번째 은퇴 기간까지를 담고 있다. 호로비츠는 은퇴 기간에 연주회를 개최하지는 않았지만, 드문드문 음반녹음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두 번째 은퇴를 선언하고, 복귀하기까지 몇 장의 스튜디오 녹음을 남겨 놓았다. 이 녹음이 이번에 소개된 시리즈에 포함되어 있는데, 1962년에 녹음한 쇼팽, 슈만, 라흐마니노프, 리스트의 곡이 수록되어 있는 음반과 슈만의 ‘어린이 정경’과 스카를라티, 슈베르트, 스크랴빈의 곡이 커플링된 음반, 그리고 1963년 녹음한 베토벤의 ‘열정’과 드뷔시의 ‘3개의 전주곡’이 그것이다. 은퇴와 재기를 반복했지만, 그는 쉬는 동안 치열한 연습을 거듭했음을 알 수 있다. 10여 년의 칩거기간 동안 그의 연주 스타일은 조금씩 변해갔다. 외면적인 화려함보다는 사색의 깊이가 한층 더 강조됐고, 날카로움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더욱더 투명하고 고아한 아름다움으로 음반을 채색하고 있다.

 

1950년부터 죽기 2년 전인 1987년까지 무려 다섯 번이나 녹음할 정도로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어린이 정경’은 풍부한 상상력이 가미된 탄탄한 구성력이 돋보이는 명연이다. 다섯 차례 녹음 중 가장 뛰어난 완성도를 지닌 이 시기의 연주는 첫곡 ‘미지의 나라들’에서부터 듣는 이를 사로잡는다. 사뿐하게 내딛는 절묘한 타건과 천진난만함은 전편에 걸쳐 탁월한 아름다움을 창출해낸다. ‘트로이메라이’는 특히 뛰어나다. 색채미가 깃들여 있는 투명함은 환상미가 가득하고, ‘난로가에서’ ‘시인의 이야기’ 등에 이르러서도 시적 정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음반은 1965년 5월 9일 ‘카네기홀의 역사적 귀환 연주회’ 음반에서 절정을 맞는다(그는 후에 역사적 연주회를 몇 번 더 개최했는데, 1978년 ‘미국 데뷔 50주년’ 연주회와 1986년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61년 만의 귀향 연주회’를 열었다). 12년 동안의 긴 침묵을 깨고 청중들 앞에 선 호로비츠는 마치 노래를 부르는 듯이 부드러운 다이내미즘을 선보이며 관객들을 환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 음반은 바흐/부조니의 ‘토카타’에서 시작해 슈만의 ‘환상곡’, 스크랴빈의 소나타에 이어 쇼팽의 ‘발라드’로 끝을 맺고 있다. 그리고 앙코르로 드뷔시의 ‘인형의 세레나데’, 스크랴빈의 ‘연습곡’ Op.2-1, 모스코프스키의 ‘연습곡’ Op.71-11,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들려준다. 은퇴 전의 찬란한 기교와 박력은 다소 누그러졌지만, 풍요로운 서정성, 부드러움, 투명함은 그의 새로운 미래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낭만적인 동경과 작품의 본질을 꿰뚫는 혜안으로 인산인해를 이룬 청중들의 열화와 같은 환호를 받고 있다.

또 하나의 명반으로 기록되어 있는 1969년 녹음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도 이번 컬렉션에 포함되었다. 이 음반은 그의 만년 녹음(DG)보다 훨씬 뛰어난 직관과 기교가 돋보이는 것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색채미를 통해 작품 속에 깃들여 있는 정신과 육체의 상반된 요소를 면밀하게 포착해내고 있다. 그리고 그의 연주가 가장 빛을 발했던 라흐마니노프와 쇼팽, 스크랴빈의 곡. 장대한 구조를 러시아적 서정미와 색채미로 해석해낸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소나타 2번과 쇼팽의 ‘폴로네즈’ ‘마주르카’ ‘연습곡’ ‘왈츠’를 뒤섞어 연주한 음반도 좋긴 하지만, 그의 개성이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은 역시 스크랴빈의 음반에서이다.

스크랴빈의 ‘연습곡’과 ‘3개의 소품’ 중 ‘앨범 철’, 피아노 소나타 10번, 시곡 ‘불꽃을 향하여’가 담겨 있는 이 음반은 스크랴빈이라는 러시아 작곡가를 세상에 각인시킨 명연주이다. 호로비츠는 1950년대부터 스크랴빈의 작품을 자신의 레퍼토리에 집어넣어 자신만의 연주 스타일을 정립시켰다. 그때까지만 해도 스크랴빈은 거의 잊혀진 작곡가였다. 이 음반과 더불어 소나타가 담겨 있는 음반(RCA)은 후세에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을 주었고, 아직까지도 이를 뛰어넘는 음반을 쉽게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음반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불꽃을 향하여’는 특히 인상적이다. 5분 여 동안 지속되는 크레셴도의 강한 추진력은 다른 연주가들이 쉽게 넘볼 수 없는 경지에 있는 것으로 호로비츠만의 연주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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