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벤트로트ㆍ잔데를링ㆍ길렌
독일에서 태어난 세 명의 지휘자, 헤르만 아벤트로트와 쿠르트 잔데를링, 미하엘 길렌의 특별 에디션을 살펴보자. 이들은 서로 연주 경향은 다르지만 몇 가지 비슷한 점이 있다. 자의든 타의든 정치적 좌파라는 공통점과 국내에 뒤늦게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아벤트로트는 사회주의자는 아니었지만 2차 세계대전 후 동독에 머물며 음악 세계를 이어갔고, 잔데를링은 나치를 피해 소련으로 망명했다가 되돌아와 동독을 대표하는 지휘자로 각광받았다. 길렌은 서독을 비롯한 서유럽에서 주로 활동했지만, 열렬한 사회주의 신봉자였다.

서유럽에 있으면서 자본주의를 신봉하지 않았던 길렌은 자신의 사상을 음악 속에 투철하게 구현하려 했다. 지금은 비교적 자주 나오는 편이지만, 한때 길렌은 레코드 산업과 스타 시스템을 극도로 싫어해 소규모의 음반만 선보였다. 잔데를링도 마찬가지. ‘서독의 카라얀, 동독의 잔데를링’으로 비교되곤 했지만 그의 음반은 카라얀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적은 양이다. 제일 선배격인 아벤트로트의 음반은 더욱 처참하다. 188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1956년에 사망한 그는 당시 푸르트벵글러와 맞먹는 명성을 날렸지만, 동독을 기반으로 활동한 터라 정식 음원이 별로 남아 있지 않는 실정이다.
음반이 별로 없다고 해서 이들이 뛰어난 음악가가 아니라고 한다면 어불성설이다. 레코드 산업은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 산물에 불과하다. 세 사람은 지리적, 정치적 입장에 따라 상대적으로 적은 양의 음반만 내놓게 됐고, 이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상대적으로 늦게 명성이 알려졌을 뿐이다. 연주의 척도를 음반만으로 판단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이들의 음원을 때늦게 접할 수 있는 것만도 분명 반가운 일이다.

푸르트벵글러와 맞먹는 명성, 아벤트로트 바로 세우기
각설하고 헤르만 아벤트로트의 음반부터 살펴보자. 아벤트로트의 유산은 그간 프랑스의 타라 레이블에 의해 많이 복원됐다. ‘아벤트로트의 예술’ ‘아벤트로트의 초상’ 등을 비롯한 일련의 시리즈로 타라는 아벤트로트를 20세기의 거장 지휘자로 새로이 자리 잡게 만들었다. 이번에 선보인 음반도 타라가 주창하는 아벤트로트 바로 세우기의 일종이다. 아벤트로트의 음반은 크게 세 흐름으로 나뉠 수 있는데, 이번에 수록된 것은 그의 말기에 해당되는 연주이다. 1948년에서 사망할 때까지 아벤트로트는 라히프치히와 베를린 방송국에서 라이브 연주를 꽤 많이하며 명성을 쌓았다. 이를 주목한 체코 레이블 수프라폰은 1951년과 그 이듬해 아벤트로트와 몇 차례 레코딩 계약을 맺고 음반을 발매하기에 이른다. 이번에 선보인 음반이 바로 아벤트로트가 수프라폰에서 발매한 음원으로 타라가 수프라폰의 정식 허락을 받고 자칫 수장될 뻔한 음원을 리마스터링을 거쳐 복원한 것이다.

음반에는 라이프치히 방송 교향악단과 함께 한 브람스 교향곡 1, 2번과 베토벤 교향곡 9번, 프라하 방송 교향악단과 녹음한 브람스 교향곡 3번,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브람스 교향곡 4번이 담겨 있다. 브람스 교향곡 전곡과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 연주는 아벤트로트의 옛 명성을 확인하기에 충분하다. 초기인 1927년 연주(THA 102)보다 약간 템포를 빨리 하면서 중후한 낭만을 얇으면서도 텁텁하게 그려나가는 브람스 교향곡도 멋지지만, 맹렬하게 불타오르는 베토벤 9번 교향곡도 놓치기엔 아깝다. 푸르트벵글러와는 또 다른 맛을 풍기는 주정주의 해석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연주다.
잔데를링의 음반에는 지난 5월 19일에 열린 그의 90세 기념 연주회 실황이 담겨 있다(이 연주를 끝으로 잔데를링은 은퇴를 선언했다). 1912년생인 그는 같은 나이인 귄터 반트, 게오르그 솔티 등은 이미 세상을 등졌지만, 여전히 음악계의 신화로 남아 있다. 은퇴 연주회는 1960년에서 1977년까지 17년 동안 몸담았던 ‘그의 악단’ 베를린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했다. 서독의 베를린 필하모닉에 대항해 동독 정부가 1955년에 설립한 베를린 심포니는 잔데를링의 지도 아래 세계적인 악단으로 거듭났다. 우치다 미츠코와 함께 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4번, 슈만 교향곡 4번, 브람스의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 이날의 레퍼토리였으며, 지휘자는 일생 동안 펼쳐온 자신의 음악 신념을 세심하면서도 힘차게, 그리고 즐거운 하모니로 아로새겨놓았다.

잔데를링, ‘그의 악단’과 함께 음악계를 떠나다
이와 더불어 1966년 이고르 오이스트라흐와 함께 한 쇼스타코비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1965년·1971년 다비드 오이스트라흐가 함께 한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협주곡 1·2번, 1972년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가진 연주 실황인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이 담겨 있다. 모두 잔데를링의 즉물적이면서도 유유자적한 연주 경향을 분석하는 데 소중한 자료들이다.
이 밖에 이 음반에는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주목할 만한 연주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바이올린에서 일가를 이룬 오이스트라흐는 한때 지휘자의 역할에도 상당히 매료되어 있었다. 그는 베를린 심포니의 바이올린 파트를 자주 지도했고 가끔 지휘를 겸하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그가 연주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과 슈베르트 교향곡 2번,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이 담겨 있다. 이 중 쇼스타코비치 연주가 단연 눈길을 끈다. 여기에는 스탈린 체제에 대한 쇼스타코비치의 내면 세계가 마치 파노라마처럼 강렬하게 펼쳐져 찬탄을 자아내게 한다.
길렌의 음반은 그의 75세 생일을 기념한 재발매 세트로 베토벤, 슈베르트, 브루크너를 비롯해 쇤베르크, 베르크, 베베른, 스크랴빈, 부조니의 음악이 담겨 있다. 길렌은 1990년대 중반부터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됐다. 특히 그의 베토벤 교향곡 연주는 국내에도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는데, 과장이나 감정이입을 일체 배제하면서도 활기 넘치는 다이내믹과 긴장감을 발휘하는 연주가 다소 생소했기 때문이다. 이 경향을 오롯이 견지하고 있는 교향곡 8번이 이번 세트에 포함되어 있으며, 슈베르트 교향곡 9번, 브루크너 교향곡 6번에서도 텍스트의 투명한 구조를 일관되게 구현하는 그의 뚝심 있는 연주를 접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 성향의 현대 작곡가이기도 한 그는 현대음악 해석에 탁월한 지휘자로도 유명하다. 자신의 ‘의무와 경향’을 비롯해 쇤베르크의 ‘행복한 손’, 베르크의 ‘포도주’, 베베른의  ‘다섯 개의 관현악 소품’, 스토이에르만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변주곡’이 담긴 음반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의 손에 의해 현대음악의 구조가 속속들이 파헤쳐지며 좀더 쉽게 마음속으로 다가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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