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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무늬
오정희 지음 / 황금부엉이 / 2006년 1월
평점 :
품절
솔직히 그녀의 소설을 몇 권 읽었지만, 그 분위기만을 기억할 뿐 이야기의 정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그녀의 작품에 애착은 있었지만, 그렇게 정겨워하며 읽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 산문집에는 그녀가 작가가 되기 위해, 또 소설을 쓰기 위해 얼마나 간절하게 살아왔는지가 그려져 있다.그녀는 '생활인'과 '작가'의 사이에서 방황하기도 하며, 또 균형을 맞춰가며 이제껏 살아왔다고 밝히고 있다.
"이제껏 내 삶의 두 축은 생활인으로서의 '살기'와 소설가로서의 '쓰기'였고 그 둘의 균형 잡기에 적지 않은 안간힘을 써왔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바로 인생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글쓰기가 곧 삶 쓰기라는, 즉 사유와 쓰기의 진정성이 바로 아름다운 삶의 실천이 되리라는 소박한 믿음에서 출발했지만 현실적으로는 일상의 요구와 창작에의 욕망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공간에서 생겨난 것이 내 소설이었던 셈이다."
어머니와 아내로서 살아가면서도 작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녀의 노력은 정말 감동스러웠다. 다음의 구절을 보자. "... 따로 내 방을 가질 수 없는 형편이어서 궁여지책으로 나는 좁은 부엌의 귀퉁이, 조리대 옆에 작은 책상을 들여놓고 프랑스의 철학자 바슐라르의 흉내를 내어 '존재의 테이블'이라 명명하여 그곳에서 가계부도 쓰고 소설도 쓰고 책도 읽었다. 십 년 가까이 부엌은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 되었고 부엌의 창을 통해 비와 바람과 눈, 계절의 흐름을 보았다."
그녀는 이런 생활을 하면서도 끝끝내 소설을 써내려갔다. 그리고 그녀 자신이 체험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과 왜 소설을 써야만 했는지, 나에게 소설이란 무엇인지, 나는 어떤 소설을 쓰고 있는지를 담담하게 내뱉고 있다. 그것에 대해 길게 설명하는 것보다는 그녀의 말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치는 게 좋을 듯싶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 글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될 듯하다. 정말 좋은 산문집이다.
"모든 행위와 열정이 그러하듯 글쓰기 역시 내 안과 밖의 낯섦에서부터 시작된다. 낯섦에의 감수성은 세계와 나 사이에 프리즘을 장치하고 때로 가벼운 가위눌림으로, 신선한 발견으로, 상상력으로 또 다른 세계의 문을 열게 하는 것이다.
그 어느 곳에도 마음과 정신의 둥지를 틀어 안주하지 못하고 다만 의심쩍은 시선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환상과 현실, 안과 밖의 경계에서 어정대는 것이 작가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삶이 지속되는 한 이야기는 끝이 없고 내가 사는 일, 글 쓰는 일 모두 신명이 가 닿는 곳, 바람 따라 흐르는, 내 안에 깃든 넋의 노래들이 아니겠습니까. ... 작가란 어떤 이야기를 쓴다 해도 자신이 형상화시킨 인물들에게 더없는 애정과 생명을 나누어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기에 모든 작품은 자전적인 것이 아닐까 합니다."
"창작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요? 자신에게 찾아오는 감각이나 각성, 죽음으로 가는 고통의 과정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표현하고 기록하고자 하는 욕망, 필생의 작품에 대한 꿈, 백조가 마지막에 토해낸다는 아름다운 울음을 기다리며 종언의 순간까지 머리맡에는 펜과 종이를 놓는 것이 작가의 속성이고 예술가의 운명이 아니겠습니까."
"내게 소설이란 정말 무엇일까. 간혹 그런 물음을 받을 때면 내게 소설이란 '보상을 바랄 수 없는 짝사랑, 지독한 연애'라고 대답하곤 했었다. 소설쓰기란 되풀이 겪어도 면역과 내성이 생기지 않는 점, 그리고 그 가숨 뜀과 온갖 갈망과 공상, 기진맥진과 지리멸렬, 이윽고 쓰디쓴 환멸에 이르기까지 연애의 구조와 신통히도 닮아 있다. 똑같이 눈먼 열정의 소산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